“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여성은 헤픈 여자(Slut) 같은 옷차림을 피해야 한다”는 캐나다 경찰 마이크 생귀네티의 발언으로 촉발된 ‘슬럿워크’(Slut Walk) 운동이 지난 주말 서울에서도 ‘잡년 행진’이란 이름으로 진행됐다. 야한 옷을 입고 거리를 행진하는 ‘슬럿워크’ 운동은 여성들의 옷차림이 성범죄를 유발한다는 남성 위주 시각에 대한 저항운동으로서 의미를 갖지만, 그 방법이나 효과를 두고 다양한 의견도 존재한다. ‘슬럿워크’ 운동을 계기로 우리가 성찰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여성들의 생각을 들어본다.
내면화된 남성적 시선을 깨부수려는 것
6월 어느 날 나의 트친(트위터 친구)이 ‘잡년행진’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그냥 지켜봤다. 스스로를 ‘슬럿’으로 칭하는 것, 야한 옷에 대한 언급, 트위터에서 논쟁의 주제가 됐던 여러 가지 요소가 나를 주저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망설임은 내 안의 고정관념에서 오는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성소수자들이 스스로를 ‘퀴어’(Queer)라 부르며 의미투쟁한 것, 레즈비언이 ‘다이크’(Dyke)로 자처하며 자긍심을 가지려 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면, 스스로를 ‘슬럿’으로 호명하려는 여성들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 언급되는 ‘야한 옷’(에 대한 욕망, 혹은 입을 권리)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는 남아 있었다. 사실 나는 여성들이 노출 많은 옷을 입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다. 남성의 성적 욕망만이 존중되고 가시화되는 사회에서 그 욕망의 코드에 충실한 ‘야한 옷’을 왜 여성 스스로 입으려고 하는지, 왜 그 욕망의 대상이 되려고 하는지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서울 명동의 카페 ‘마리’에서 있었던 준비모임에서는 한 참가자가 잡년행진 당일 입을 옷을 고르면서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내재화된 ‘남성적 시선’을 발견하고 고민에 빠졌다고 했다. 그런 고민을 꺼내놓고 서로 공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여성의 몸을 보는 남성의 시선에 익숙해져 있고, 심지어 그 시선을 스스로도 갖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너무 말라서, 너무 뚱뚱해서, 가슴이 너무 작아서, 가슴이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 ‘입고 싶었던 야한 옷’을 입기 어려웠던 여성들은 잡년행진 그날만은 자기 자신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멋대로 옷을 입기로 한 것이다. 잡년행진에 동의하는 여성들은 그런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도 성찰하려 했다.
또한 이들은 다양한 목소리의 주체들과 연대해 각종 ‘부정의’를 향해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행진의 대오는 한진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복직투쟁 현장을 방문해 지지를 표했다. 다양한 이들이 행진에 참여했다. 많은 수의 ‘드래그 퀸’(여장 남성)들이 함께했고, 온라인에서 악플로 목소리를 높였던 마초들을 무색하게 할 만큼 많은 수의, 반성폭력 운동을 지지하는 ‘정의로운 마초’들이 함께했다.
잡년행진은 성폭력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시선·생각·담론을 깨부수려 했고, 동시에 피해자로 스스로를 정체화했던 여성들에게 그야말로 ‘팜 파탈’의 힘을 갖게 하는, 해방구의 부흥회를 하려 했던 것이다. 잡년행진의 메시지는 어떤 옷을 입어도 안전한 거리, 여성이라도 안전한 세상, 더 나아가 그 어떤 약자라도 안전한 삶이었다. 바로 성폭력이 없는, 그 어떤 혐오와 폭력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 윤리가 존재하는 정의로운 세상이었다.
지현 페미니스트 가수 문화연구자
달, 가리키지만 말고 움켜야
왜 지금에야 취재진이 몰려든 걸까? 몇년 전 ‘밤길 되찾기 시위’에서 “야하게 입은 사람이 없어서 찍을 게 없네” 하며 돌아가던 한 기자가 떠올랐다. 무엇을 입든, 언제 어디를 걷든 그것이 성폭력의 이유여선 안 된다고 말한 건데, 달을 보라고 했더니 손가락이 덜 야하네 더 야하네로 설왕설래다.
옷차림을 극적으로 밀어붙인 ‘슬럿워크’를 두고 다양한 의견이 많다. 그런 정체성과 욕망이 있었느냐며 적극 지지하겠다는 사람들과, 성폭력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옷차림 아니냐며 꼭 그렇게 해야겠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들까지. 그러나 하루 동안의 슬럿워크가 만들어 낸 ‘긴장’에 비해 현실은 더 저차원에서 밑돌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해야 할까, 아직 좋아하기 이르다고 해야 할까.
위아래로 훑어보고 만지고 시비 걸고 성폭력하는 것은 계절, 낮밤, 장소, 여성의 나이, 옷차림, 직업에 관계없이 일어난다. 조신하게 입었으면 그랬다는 이유로 표적이 되고, 14년간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했으면 그것을 빌미로 성희롱을 겪게 된다. 목소리가 크면 크다고, 작으면 작다고, 고학력, 저학력, 어린이, 노인, 여름, 겨울…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니 미칠 노릇이다. 성폭력 발생에 마치 합리적인 법칙이 있는 양, 그것만 피해가면 안전할 것인 양 착각하게 하지만 그것은 미리 약속된 게 아니고 사후에 자의적으로 적용된다. 특정한 옷차림으로 최전선에 가 거기서 싸워보기로 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에 가깝다. 모든 옷차림은 이미 최전선에 있는 셈이다.
손가락 모양에 무슨 뜻을 담았는지 설명하느라 지쳤다면, 접어 내리고 대신 주먹을 쥐어 달을 움켜야 하는 건 아닐까.
2004년 처음 열렸던 ‘밤길 되찾기 시위’에서는 유영철 사건과 그의 암묵적 동조자를 향해 소복을 입고 서울 광화문을 행진했다. 2007년엔 최연희 성추행 국회의원을, 2009년에는 장자연씨의 죽음에 책임지지 않은 자들을 불러 세우며 노란 천을 두르고 장맛비에 우비를 입었다. 여성의 몸의 권리와 자유, 그에 대한 억압을 추상적으로 증언하고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고 하루의 행사로 그걸 표현하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구체적으로 이미 벌어진 싸움에서는 비유도 가정도 필요치 않게, 내가 사는 현실이 그대로 말할 수 있다. 그 싸움의 결과가 내 미래에 관련이 있다는 긴장을 몸으로 느끼며.
이번 슬럿워크에서 분출된 에너지가 때로는 고리타분하고 지난한 모습으로, 조직적인 행동으로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김혜정 제4회 밤길 되찾기 시위 기획단
‘잡년’ 아니라 ‘난년’일세
캐나다의 어느 경찰관이 벗고 다니니까 성범죄를 유발한다 뭐 그런 말을 했다 들었을 때 이제 그 정도에 일일이 열받을 단계는 다 지났으니까 그냥 신기했다. 게다가 캐나다는 <볼링 포 콜럼바인>이나 <사우스파크> 때문에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이것 참.
어쨌거나 여성들의 노출이 진정 성범죄의 원인이라면 캐리비안베이 같은 곳에는 지금쯤 수면 위에 시체가 여러 구 둥둥 떠다녀야 할 텐데, 어쨌거나 전세계의 여성들은 헐벗고 백주대낮에 걸어 다니며 ‘너 보라고 벗은 거 아니거든’을 외치기 시작했다. 여성의 노출 의상이 남성을 자극해 성범죄가 일어난다는 어떤 남성들의 논리는 짜증이 나다 못해 이제는 점점 신기하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여성이 몸을 노출하는 의상을 입는 것은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고 그만 유혹을 느낀 남성이 욕망을 자제하지 못해 범죄가 일어난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여기에 남성이 제1의 성으로 군림하고 있는 비결이 있다. ‘여성이 몸을 드러내는 의상을 입는 것은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는 사실 ‘너희가 지금 벗은 것은 나를 꼬시려고 그런 것이지!’라는 말인데, 이 자신감! 놀라운 자신감! 자신에 대해 끝없이 긍정적인 이 자세! 이것야말로 우리 여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다.
여하튼 한국에서도 ‘슬럿워킹’이 열렸는데, 평소 ‘슬럿리빙’을 하느라 마음으로 응원만 보냈다. 슬럿리빙이 뭐 별건 아니고, 내가 헐벗고 다닐 때 혹시 야단치거나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꼭 혼이 쏙 빠질 정도로 괴롭혀 주는 게 ‘슬럿리빙’이다. 굳이 내 성질이 더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어떤 여자에게 그런 짓을 했다가 크게 덴 경험이 있어야 다음번에 다른 여자에게 그러려다 망설이기라도 하기 때문이다. 여성간의 연대가 별건가, 내가 확실히 해 놔서 나중에 놈들이 누굴 조지려다 아차 그때 걔처럼 미친 애면 어떡하지? 안 되겠다 하고 주저하게 만들면 슬럿리빙은 한 건 성공이다. 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미친 여자’니까. <위험한 정사>의 글렌 클로스처럼, 미친 여자들은 놈들 집의 토끼를 삶아 버리고 나중에 총을 맞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
백주대낮에 헐벗고 거리를 점령한 자매들을 보니 오랜만에 무척 즐거웠는데, 단 선글라스나 가면으로 꽁꽁 가린 건 살짝 아쉬웠다. 게다가 ‘잡년’이라니 너무 겸손했다. 누가 뭐래도 여러분은 ‘난년’이다. 난년 여러분, 힘내시라. 월드컵 응원할 때나 좀 벗어도 뭐라고 안 하는 이놈의 나라에서 우리, 평소에도 즐겁게 막 벗자. 이게 다 애국애족이다.
김현진 에세이스트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80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