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8. 00:11

유커(중국관광객)가 어느덧 우리 골목과 일상 안으로 깊이 들어오고 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소식까지 전해진 뒤끝이어서 그런지 이제 본격적으로 그들과 더 가까이 어울려 사는 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왜 그들은 한국을 찾을까,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어떻게 바꿔놓게 될까, 우리 시민들 자영업자들 중소기업 대기업은 뭘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국내 최대 중국 인바운드(외국인 관광객 국내 유치) 회사이자 35년 여행업 경력의 모두투어인터내셔널 장유재 대표를 찾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지금은 명동 거리에서 ‘이랏샤이마세’ 대신 ‘콰이라이(어서 오세요)’가 대세다. 1998년 한중 관광 자유화가 이뤄졌지만 한동안 유커는 비즈니스 방문이 주였다. 쇼핑도 활발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이 물건만 만져보고 안 산다’고 했고 중국인들은 ‘살 게 없다’고 했다. 명동 일부 상점에서는 ‘중국인 출입금지’ 문구를 써 붙여 중국인들이 중국대사관, 청와대 앞까지 가서 항의한 적도 있었다.”


―그러던 게 언제부터 변했나.


“중국 경제성장이 동력이 됐지만 전자제품 문화상품 등 한국의 발전이 큰 몫을 했다. 처음엔 고려인삼밖에 팔 게 없었다. 하지만 인삼은 중국에도 흔하지 않은가. 인삼 다음으로 기껏 해봐야 가는 게 용산전자상가였다. 거기서도 사가는 게 면도기 정도였다. 그러던 상황이 삼성 휴대전화가 나오면서 확 달라졌고 지금은 주방용품 밥솥 화장품까지 확장됐다. 옛날에 우리가 일본 가면 코끼리밥통 보온병 사오듯 이제 중국인들이 한국 오면 그런 식으로 물건을 사간다.”

중국 국가관광국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인 출국자는 9800만 명에 달한다. 이 중 3분의 2가 홍콩 마카오를 갔고 나머지 3분의 1이 다른 외국에 갔다. 이 다른 외국 중 1위가 한국이었다. 홍콩 마카오는 중국의 특별행정구이니 사실상 중국인이 가장 많이 가는 외국은 한국인 셈이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도 중국은 단연 1위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올해 예상되는 1400여만 관광객 중 절반에 육박하는 600여만 명이 유커로 예상된다. 단일 국가 관광객이 한 해 500만 명을 돌파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다.

유커들이 지난해 한국에서 쓴 비용은 총 7조7000억 원으로 올해는 1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신한카드 빅데이터센터가 한국문화정보센터와 공동으로 상반기 외국인 신용카드 사용 지출액을 나라별로 분석했더니 중국인 비중이 사상 처음으로 절반을 넘는 52.8%(2조5524억 원)에 달했다. 일본인 미국인의 카드 사용액을 합친 금액의 2배가 넘는다. 산업연구원은 유커의 지출이 국내 산업에 미치는 생산유발 효과가 지난해 13조3700억 원이라고 추정하면서 3000만 원대 고급 승용차 44만 대를 판 것과 맞먹는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보쌈 족발집에 여주, 파주까지

장 대표에게 유커들이 느끼는 한국의 매력에 대해 물으니 여러 요인을 짚었다. 

“일단 가깝다. 아무리 멀어도 4시간이고 대부분 2시간이다. 물가도 중국 대도시와 비슷하다. 중국은 내수 활성화를 위해 명절 휴가 연휴를 9일, 10일씩 주는데 국내 여행 가는 것보다 한국 오는 게 싸다. 제주도 무비자, 한류도 큰 영향을 미쳤다. 유커 중에 20, 30대 여성 비율이 급증하고 있는데 드라마에 등장한 한국 문화를 즐기고 싶어 한다. 한국 드라마 속에 잠깐 나왔던 카페까지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간다. 쇼핑도 명품 싹쓸이보다 화장품 김 김치 라면 과자 밥솥 옷 등 생활용품을 많이 사간다. 물론 아직도 매대 이쪽부터 저쪽 끝까지 다 싸 달라는 식의 통 큰 소비도 많다. 왕복 40만 원짜리 저가 패키지로 와서 면세점에서 7000만 원 쓰는 게 중국 사람들이다.”

그는 외부 환경의 변화도 짚었다. 

“2012년 9월 이후 일본과의 영토 분쟁(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으로 중국인의 일본 여행이 확 줄었다. 태국은 정정이 불안해서, 말레이시아는 항공기 사고 때문에 줄었다. 한국 수요가 늘다보니 정기 노선이 없었던 중국 지방도시와 한국 지방도시 간에 전세기 운항이 늘었다.” 

그러면서 “올해 한국에 온 유커 600만 명 중에 여행사를 통해 온 사람은 30%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비행기 숙박을 스스로 예약해 오는 자유여행객”이라고 했다. 


자영업자들 유커 겨냥했으면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관광지 숙박 맛집 정보를 얻은 뒤 서울과 지방 곳곳을 누빈다. 신사동 가로수길, 북촌 한옥마을, 삼청동 거리, 통인 광장시장 등 재래시장에도 중국인이 넘친다. 심지어 동묘 앞 벼룩시장까지 찾아다닌다. 명동 상권이 확 살아난 것도 유커 때문이다. 식당 메뉴판은 일본어에서 중국어로 바뀐 지 오래다. 연남동, 합정동, 성산동 일대도 유커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연희동 감자탕집은 줄서서 먹는다. 홍익대 인근이 신촌보다 뜬 것도 유커 덕이 크다. 게스트하우스만 해도 100개 이상이 있다. 지방에도 전세기가 들어가면서 경기 여주, 파주 아웃렛은 물론이고 작은 동네 분식집도 ‘떡볶이’를 중국어로 써둔 곳이 있다.”


―유커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뭔가.

“숯불에 구운 고기 요리를 좋아한다. 또 여러 음식을 함께 시켜 먹는 걸 즐긴다. 삼계탕 좋아하는 것은 유명하고 순대, 닭볶음탕도 인기다.”


―미안한 말이지만 중국인들이 매너가 안 좋고 너무 시끄럽게 떠들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많다.

“목소리가 크고 톤이 높아 우리로서는 그렇게 느껴질 만한 게 좀 있다. 근데 중국 사람들은 한국인들이 시끄럽다고 한다(웃음). 당분간 유커 증가세는 매년 적어도 30%로 본다. 내년엔 700만 명 정도가 들어올 것으로 예상된다. 이참에 자영업자들도 손님을 한국인으로만 한정하지 말고 유커를 겨냥하는 전략을 펼 필요가 있다. 자영업자들이 힘을 합쳐 어떤 거리를 조성하는 것도 방법이다. 유커들 때문에 다소 불편해도 어쨌든 그들이 돈을 쓰고 간다는 걸 인정하고 이제 그들과 같이 살 생각을 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싶다. 어떻든 극심한 내수 침체 상황에 또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일본 관광객처럼 순식간에 수요가 사라질 가능성은 없나.

“중국이 자신들의 내수 경제를 살린다며 내수에 더 집중하게 되면 지금 같은 성장세는 힘들어진다. 얼마 전 중국 하이난 섬에 대형 면세점이 문을 열었다. 앞으로 내륙 지방에도 많이 생겨날 것 같다. 하지만 당분간은 한국에 대한 매력이 이어지리라 본다. 중국은 사치세가 있는 등 세금이 높다.”


―유커들이 지적하는 불편사항은 뭔가.

“아무래도 숙박이다. 특급호텔은 많이 늘었는데 중저가 호텔이 아직 부족하다. 지방을 중심으로 호텔이 많이 생기고는 있지만 서울 도심에도 샤워하고 잠만 자는 소규모 비즈니스호텔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年 방문객 1000만 시대 열린다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에 대한 중국인들 반응은 어떤가.

“여러 논란이 있지만 관광 측면에선 기대가 크다. 향후 주차 문제가 해결되고 타워가 완성되면 랜드마크로 필수 관광코스가 될 것 같다. 예전에 유커들이 오면 에버랜드, 롯데월드가 필수 코스였다. 패키지 상품에 둘 중 하나는 꼭 넣어야 했다. 중국에 놀이공원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1998년 한중 여행이 자유화되면서 동남아처럼 무조건적 저가정책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 아래 중국 전담 여행사 제도라는 걸 만들었다. 처음엔 25개사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180개사에 달한다. 장 대표는 전담 여행사들의 대표 격인 여행업협회(KATA) 인바운드 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중 FTA 효과에 대해 물었다.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는 중국인들이 한국에서 여행사 차리는 것에 제한을 두고 있지 않은데 중국은 자국 내에서 외국인이 여행사를 만드는 것을 일일이 허가제로 운영해 왔다. 그것도 일본 독일 등 몇 개 나라만 중국 자본이 함께 들어가야 허용해주고 있는데 한국은 이마저도 제외됐었다. 그런데 FTA 타결로 한국 업체도 한 회사 정도는 허용해줄 거라는 소식이 들린다. 성에 차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출발이라고 본다.”


9월 삼성증권은 ‘유커의 진짜 빅뱅은 이제 시작’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중국은 현재 해외여행 붐이 본격화되는 1인당 국민소득 3000∼1만 달러 구간의 중간 정도(6000달러)에 들어서 있다. 1만 달러 소득이 예상되는 2018년까지 여행객 규모는 최대 80% 늘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렇게 따지면 2018년부터는 연간 1000만 명의 유커가 국내에서 30조 원 이상을 소비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난해 국내 소매 판매의 10%에 해당한다. 

루돌프 줄리아니 시장 시절 미국 뉴욕이 불황 속에서도 관광객 증가로 높은 소득을 올려 경제를 활성화시켰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굴뚝 없는 미래산업이라 불리는 관광산업은 미래성장동력 중 하나로도 인정받는다. 바야흐로 유커들과 더 친해지는 법을 연구할 때이다.

허문명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41117/67928315/1



Posted by 겟업
2015. 3. 7. 23:42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戰爭·중국에서 6·25전쟁을 부르는 말)은 남조선의 북침으로 시작된 전쟁이다. 중국이 도와 침략자를 격퇴한 덕분에 미국의 북조선(북한) 점령을 막을 수 있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정권으로 중화 역사의 일부가 분명한데 한국인들은 자기 역사라고 우기고 있다. 한국인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역사왜곡을 잘하는 민족이다.”

 무슨 역사왜곡단체나 혐한모임에서나 들을 법한 망언이 서울 한복판에서 버젓이 들린다. 중국어로 하는 말이라 한국인은 바로 옆에 서 있어도 알 수 없다는 점이 다행이다. 중국어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을 딴 뒤 여행사에서 견습으로 일하던 A씨(28)는 최근 요우커(游客·중국인 관광객)들에게 이런 말을 하던 같은 회사 소속 중국계 무자격 가이드에게 “역사 왜곡이다”고 항의하며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 하지만 “중국 손님들 비위를 잘 맞춰야 나중에 쇼핑을 데리고 갔을 때 하나라도 더 잘 사줄 수 있다. 네가 여기서 손님을 상대로 역사 교육을 하겠다는 것이냐”는 중국계 가이드를 이길 수는 없었다. A씨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새 일을 알아보고 있다.

 A씨는 “더 큰 문제는 한국어·중국어 이중언어를 쓰는 중국계 무자격 가이드들이 요우커들에게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거짓 소개한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진상을 모르는 요우커들이 중국에 돌아가 “한국에 갔더니 한국인들도 6·25전쟁이 북침이라고 실토하더라”라든지 “한국인도 고구려가 중국 역사의 일부라고 인정하더라”고 말하고 다닐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요우커는 이제 한국은 물론 전 세계 관광산업의 큰손이다. 지난해 방한한 요우커는 392만 명으로 1961년 출입국 통계를 작성한 이래 줄곧 방한 외국인 1위였던 일본인(271만6461명)과 자리를 바꿨을 정도다. 하지만 문제는 관광의 품질이다. 관광은 돈만 버는 산업이 아니다. 문화·인적 교류를 통한 상호이해 증진 등 경제 외적인 파급효과도 크다. 살아 있는 외교활동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우커의 서울 관광이 일부에서 최근 보도한 엉터리 안내 수준을 넘어 역사왜곡의 현장으로까지 변질되고 있다.

 지난 주말 서울 경복궁 앞. 길가에 늘어선 버스 행렬의 맨 뒤에 막 주차한 버스에서 요우커들이 우르르 내렸다. 동행한 가이드가 중국말로 뭔가를 설명한다. 경복궁의 내력을 소개하는 것 같았지만 중국어에 능통한 가이드 출신 B씨(35)에게 통역을 부탁했더니 완전히 딴 소리다.

 “서울의 경복궁은 베이징의 자금성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고 초라해 볼 것이라곤 전혀 없다. 그러니 후다닥 돌아보고 나와서 다음 코스로 옮기자.”

 B씨는 “저 단체 관광객들은 곧 신촌에 있는 요우커 전용 상가로 옮겨 건강식품·고려인삼·화장품 등을 쇼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이드는 요우커 전용 상가에서 쇼핑을 하는 액수에 비례해 수당을 받기 때문에 관광은 대충대충 하고 쇼핑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게다가 일부 무자격 가이드는 처음 한국에 온 요우커들을 상대로 “물건을 사지 않으려면 버스에서 내려라” “이걸 10개 이상 사지 않으면 나는 집에 가겠다. 알아서 해라”며 압박도 서슴지 않는다고 귀띔했다. 관계를 중시하는 중국인은 며칠간 함께 다니며 애써준 가이드의 안면을 생각해서 물건은 사주지만 대개는 다시는 한국을 찾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 관광객의 경우 64%에 이르는 한국 재방문율이 요우커는 29.7%에 불과한 이유가 바로 이것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여행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C씨(47)는 “흔히 요우커들은 역사·문화 관광은 외면하고 쇼핑만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이야기를 나눠 보면 사실은 문화에 관심이 상당하다”며 “여행사들이 제대로 된 프로그램과 이를 운영할 자격 있는 가이드를 갖추도록 제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한국의 역사와 사회제도 등에 대한 정확한 안내를 위한 매뉴얼부터 만들고 이를 교육해야 한다. 관광 품질 향상은 국격과도 연결이 되는 중요한 문제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때다. 

채인택 논설위원

Posted by 겟업
2015. 3. 7. 23:32

최근 만난 아모레퍼시픽 관계자의 관심은 면세점 계산대에 늘어선 유커(遊客), 즉 중국인 관광객들의 줄을 빨리 줄이는 것이었다. 계산대에서 신용카드를 받아 카드리더기에 긋고 서명하기까지 길게는 몇십 초가 걸린다. 중국 관광객들이 워낙 몰리다 보니 ‘카드를 긋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내 면세점과 주요 백화점, 화장품 업체 등은 알리바바가 개발한 ‘알리페이’와 같은 전자결제 시스템이 서둘러 한국에서도 대중화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스마트폰만 갖다대면 수초 만에 결제가 이뤄지는 시스템이다. 더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려는 고민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14년 한국 경제를 총결산하는 키워드는 여러 가지를 댈 수 있다. 삼성전자로 대표되는 한국 수출기업의 부진이 대표적일 것이다. 경기가 장기침체의 초입에 들어섰다는 분석과 긴축모드로 접어든 기업들로 세밑 풍경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이런 와중에 표정관리를 하는 기업들은 하나같이 중국인 관광객의 발길이 닿았던 곳이다. 면세점은 올해 사상 최대의 매출을 올렸다. 화장품 및 레저기업 관광업체 등의 주가도 ‘유커 수혜주’로 불리며 강세를 보였다. 올해 들어 10월 말까지 한국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은 562만278명으로 처음으로 500만 명을 넘어섰다. 중국인 한 명은 평균 1738달러(약 190만 원)를 쓰고 갔다. 청계광장 광화문광장 명동거리 등 서울의 명소와 유통가를 점령한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불편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일부 언론에서는 한국 소비자들이 역차별당한다는 비판까지 내놓았다. 하지만 한국 경제가 그나마 최악의 내수부진으로까지 치닫지 않은 것은 이들 덕분인지도 모른다. ‘2014년 한국 경제’의 키워드 가운데 하나로 당당히 ‘유커’를 꼽을 수 있는 이유다.

언제까지 중국인 관광객의 한국 방문 러시가 이어질지가 궁금해졌다. 정부는 평창 겨울올림픽이 열리는 2018년까지 전망치만을 내놓았다. 증가세가 지속돼 2018년에 1000만 명을 돌파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해 30조 원을 소비해 지난해 국내 소매판매의 10%에 이르는 돈을 쓰고 갈 것이라는 증권사 보고서까지 나왔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장밋빛 전망이다. 일본인 관광객이 엔화 약세로 갑작스럽게 줄어든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거시경제 지표 등 중국인 관광객이 발길을 돌릴 수 있는 변수는 언제든 불거질 수 있다.

기회는 주어졌을 때 잡아야 한다. 최근의 중국인 관광객 특수는 제조업 기반에서 성장해온 한국 경제가 외국인 관광객과 연계된 유통 의료 관광 등의 서비스 산업에서 충분히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다. 부족한 호텔의 확충, 전시회와 연계된 관광객 유치 전략인 마이스(MICE·기업회의, 포상관광, 컨벤션, 전시회) 산업 육성 등 서비스 산업 활성화를 위해 산적한 과제를 풀 수 있는 더없는 시간이 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중국인 관광객 방문이 최고 절정을 맞을 것으로 예상되는 2018년부터 한국의 생산가능인구가 줄기 시작할 것으로 통계청 등은 내다보고 있다. 한국 경제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을 그해까지 서비스업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키울 수 있는 싹은 틔워놓아야 한다. 중국인 관광객 특수를 한국 경제의 체질을 튼튼하게 할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면 과장일까. 이는 2018년 새롭게 들어설 차기 정부에 현 정부가 남겨줄 몇 안 되는 귀중한 선물이 될 수도 있다.

Posted by 겟업
2015. 3. 7. 23:01

박상환 하나투어 회장… "여행업은 사람이 자산, 사람이 전부다"

수출일꾼 꿈꾸다 여행일꾼으로
해외 잘 못나가던 군사정권때 6~7년간 70개국 넘게 돌아…
남들보다 먼저 지구촌 봤기에 중남미·지중해 상품 내놨죠

IMF 외환위기 때 폭풍성장
他社들 부도나고 해고할 때 한 사람도 구조조정 안해…
경기 살아나자 기회가 왔죠
인력 보존한 덕에 업계 1위로

"행상·밭일로 6남매 키운 어머니, 멀미 탓에 해외여행 한번 못갔죠
제겐 그것이 평생의 恨으로…"

여행의 패러다임 바뀐다
1980년대엔 '나 왔다'고 증명사진 찍기에 바빴죠
지금은 완전 개성시대… 여기에 맞는 상품 내놔야죠

싸구려여행? 억지 쇼핑코스?
반성해야 할 부분이지만
쇼핑 코스는 '필요악' 측면도… 물건 살 시간은 있어야죠
단, 주요 관광 빼먹으면 안돼

여행업, 여직원이 행복해야
아이 제대로 키우면서도 일할 수 있는 환경 돼야…
재택근무·출퇴근 유연근무… 꼭 하도록 권하고 있어요

"여기가 진짜 회장님 자리 맞나요."

국내 여행업계 1위 하나투어 박상환(57) 회장을 만나러 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회장이 일하는 자리를 보고 놀란다. 회사엔 번듯한 회장실이 없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하나투어 본사 10층 맨 안쪽 구석이 그의 자리다. 두 평(6.6㎡)쯤 될까. 높이 1m20㎝ 칸막이 안쪽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전화기가 놓여 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을 뿐이다. 어차피 보고와 결재 등 주요 업무는 스마트폰으로 하기 때문에 사무실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상환 하나투어 회장은 젊은 시절 해외여행 인솔자(TC)로 시작해 지금의 국내 여행업계 1위 기업을 키웠다. 지구에서 안 가본 곳을 꼽아보라는 말에 잠시 지구본을 들여다보더니 “그린란드 빼고는 다 가본 것 같다”며 웃었다. / 이태경 기자



지난 1월부터 9월 말까지 우리나라 해외 출국자 5명 중 1명 이상이 하나투어를 통해 외국에 다녀왔다. 이 회사는 이달 말 1998년 이후 누적 출국자 2000만명 돌파라는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다. 회사 설립 21년 만이자 2010년 1000만명을 넘은 지 4년 만이다. '해외여행 인솔자(TC)' 출신으로 대형 여행사 CEO(최고경영자)가 된 그를 지난 7일 하나투어 본사와 15일 서울 평창동 그의 집 근처에서 만났다.

◇"세상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라"

"요즘 여행업계 문제가 뭔지 아세요?"

지난 15일 오후 11시 30분쯤 서울 평창동의 한 주점. 소주잔을 기울이던 박 회장이 대뜸 물었다.

"업체 간 과당경쟁? 이익 안 남는 출혈경쟁? 질 떨어지는 싸구려 관광? 아닙니다. 그런 건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겁니다. 원하는 손님이 있기 때문이죠. 여행업계의 진짜 문제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겁니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게 무슨 뜻인가.

"일부에선 여행업이 20~30년 지나면 사라질 거라고들 한다. 고객들이 점점 단체 패키지 관광을 멀리하고 있어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맞지만 이는 끝이 아니고 새로운 기회이다. 여행업계는 지금 세상에는 없는 비즈니스를 만들어야 한다. 볼거리와 먹을거리, 즐길거리, 쇼핑거리를 발굴하고 엮어서 고객이 원하는 '새로운 가치'를 내놔야 한다. 고객은 그곳에서 우리를 필요로 한다. 세상은 무조건 밝고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그래야 길이 보인다."

―앞으로도 국내 여행업계가 계속 성장할 거라고 보나.

"지난해 해외 출국자(출장 포함)는 1350만명이었다. 이 숫자가 머지않아 3000만명, 5000만명이 될 거라 믿는다. 전 국민이 일 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가는 시대가 올 것이다. 여행이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인 시대가 온다."

―미래를 너무 낙관하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워 해외로 나갈 충동이 생긴다. 땅은 크지 않고 북한 중국 일본 등에 막혀 있어 섬나라와 다름없다. KTX 등 교통이 발달해 국내는 모두 당일 코스가 됐다. 여행을 생각할 땐 해외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미 겨울에 동남아에서 한두 달씩 살다 오는 분들도 많다. 영국이 우리와 비슷하다. 섬나라이고 사계절이 있다. 영국 국민들은 거의 100% 해외여행을 다닌다. 우리 소득 수준이 곧 3만달러가 넘는다. 4만달러, 5만달러가 되면 해외여행은 일상화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싸구려 여행상품이나 억지 쇼핑 코스 등으로 소비자 불만이 끊이질 않는다.

"끊임없이 지켜보고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반성도 필요하다. 하지만 쇼핑 코스는 필요악이란 점도 인정해야 한다. 정해진 스케줄 맞추다 보면 따로 물건 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단, 주요 관광을 빼먹으면 안 된다. 저가 패키지 상품도 살아남을 것이다. 친구 중에 서울 강남 부자가 있는데 꼭 우리 상품보다 30% 더 싼 여행을 다닌다. 고급 호텔이나 맛있는 음식은 필요 없다고 한다. 그 돈으로 원하는 거 사고 다른 걸 즐긴다는 것이다. 그 저렴한 여행 상품 만든 회사 사장을 만나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고 말해줬다."

◇IMF 외환위기 때 업계 1위 올라… "사람이 전부다"

하나투어는 1997년만 해도 업계 5위권 회사였다. 천지개벽은 IMF 외환위기 때 일어났다. 여행업계가 초토화된 시기, 하나투어는 6개월 만에 업계 1위로 올라섰고 그 이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때 여행업계는 한마디로 풍비박산이 났다. 그런데 하나투어만은 폭풍 성장을 했다. 비결이 무엇이었나.

"전 직원에게 약속했다. 한 사람도 구조조정하지 않겠다고. 당시 여행업계는 초상집이었다. 상위 10개 업체 중 5개가 부도났다. 살아남은 곳도 직원 80% 이상을 해고했다. 그럴 때 나가라고 하면 죽으라는 말밖에 안 된다. 여행업은 사람이 자산이다. 아니 전부다. 그걸 잃고선 회사를 끌고 갈 수가 없다. 반년만 참고 기다리면 기회가 올 거라고 봤다."

―사정이 어려운 건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였을 텐데.

"1998년 1·2월 해외 여행객이 전년도에 비해 95% 줄었다. 한 명도 모객하지 못한 날도 수두룩했다. 여행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는 게 불가능했다. 직원들에게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이겨내자고 호소했다. 월급은 50%로 깎았고 모든 경비는 최소로 줄였다. 2년 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 밤에 잠을 푹 자본 적이 없다."

―어려운 사정은 참을 수 있지만 비전이 없으면 버티기 어렵다. 당시 여행업이 조만간 살아날 거라고 어떻게 확신했나.

"여행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인솔자 생활을 하면서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때 넓은 세상을 보면서 배웠다. 1983년쯤 이스라엘에 갔는데 그 나라 역시 IMF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곧 여행 수요가 회복됐다. 북유럽도 그랬고 러시아도 그랬다. 경제 체질이 튼튼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는 위기를 곧 극복한다는 걸 눈으로 봤다. 그래서 우리도 6개월만 견디면 고객이 10%, 20%로 늘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 회복 속도가 빨랐나.

"1998년 1·2월엔 정상 월급의 50%도 못 줬는데 3월엔 60%, 4월엔 80%, 5월부턴 100%를 줬다. 사람이 부족해 인턴사원을 뽑았다. 비로소 사람 역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회사는 금방 회복하지 못했다.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180명 직원 중 30여명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회사를 그만뒀다. 하지만 항공권 발권, 상품 기획·개발 등 핵심 인력은 그대로 남았다. 여행 수요가 다시 늘자 물량이 한꺼번에 우리 쪽으로 쏠렸다."

박 회장은 "2003년 초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유행 때와 2008년 가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국제 금융위기 때도 직원을 감원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걱정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1985년 박상환 하나투어 회장이 해외여행 인솔자(TC)로 이집트 피라미드에 갔을 때 찍은 기념사진.
1985년 박상환 하나투어 회장이 해외여행 인솔자(TC)로 이집트 피라미드에 갔을 때 찍은 기념사진. 당시는 양복을 입고 손님들을 안내했다. / 하나투어 제공

◇해외여행 인솔자에서 창업자로

그는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당시 업계 1위 고려여행사에 입사했다. 원래는 무역회사에 가고 싶었다. 대학에서 영어교육과를 택한 것도 영어로 먹고살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역회사 취업엔 번번이 실패했다.

"여행사도 영어 많이 쓰고 외국 자주 왔다 갔다 한다기에 지원했다. 입사 이후에도 한동안 무역회사 꿈을 포기하지 못했다. 달러를 쓰기보다 버는 수출 역군이 되고 싶었다."

―1989년 여행자유화 이전이 오히려 돈 벌기 편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30명 단체가 해외여행을 가면 2000만~3000만원이 남았다.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가 2000만원대였던 시절이다. 개인 수입도 괜찮았다. 막내 사원인데도 대기업 초임의 3~4배는 벌었다. 특히 여권 만들면 상당한 부수입도 생겼다."

―여권 발급이 그땐 매우 중요한 일이었나 보다.

"여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사회적 신분을 의미했다. 돈 많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여권을 만들어주면 수고비를 받곤 했는데 신입인 나도 한 건으로 월급의 절반을 받았다. 집 사고 땅 사고 부자 된 사람들이 많았다. 여권 만드는 직원을 '껀돌이'라고 했다. 회사는 그들을 극진히 대우했다. 껀돌이들은 외무부 여권과 직원들과 잘 지냈다. 상납도 하고…. 수입은 좋았지만 계속 그런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몇 십 년 후 내 모습은 이게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1982년 그는 제1기 해외여행 인솔자(TC)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지원자가 구름같이 몰렸다. 최종 합격자(영어권)는 48명. 고려여행사 직원 160여명 중 그를 포함해 단 2명이 합격했다. 그는 "TC 자격증을 딴 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했다. 이후 6~7년 동안 70개국 이상을 돌아다녔다.

―군사정권 시절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다녔으니 주변에서 부러워했겠다.

"해외 갔다 오면 친구들이 기다렸다. 양주 마시는 날이다. 12년산이 15달러였던 조니워커 블랙이 최고였다. 일본 갈 땐 코끼리밥솥과 무선 전화기를 사달라는 부탁이 많았다. 여성들에겐 랑콤 콤팩트가 인기였다. 손님들은 재력이 대단했다. 5000달러짜리 롤렉스 시계를 두 개, 세 개씩 사는 사람도 많았다. 외화 소지 한도가 3000달러였는데 2만~3만달러씩 갖고 나가더라. 돈을 얼마나 많이 갖고 가느냐가 능력이었다.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여행업에 회의가 들기도 했겠다.

"가장 비애를 느꼈던 건 나 또한 불법을 저질러야 했다는 거였다. 외국 현지에서 호텔·식사 비용을 내려면 꽤 큰돈을 갖고 나가야 했다. 30명 단체면 5만달러 정도가 필요했다. 해외 송금도 안 되고 신용카드도 안 되는 때였다. 현실과 동떨어진 규제도 문제였지만 어쨌든 당당하지 못한 일 아닌가. 공항에서 발각돼 망신당하고 빌고 사정해서 간신히 빠져나온 적도 있었다." 

―여행 인솔자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무엇을 배웠나.

"많은 걸 버려야 한다는 걸 배웠다. 돈과 사람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어느 정도 덜어낸 것도 큰 힘이 됐다."

―그 나이에 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나.

"어릴 때부터 내 삶의 기둥인 어머니를 잃으면 어쩌나 늘 걱정했다. 한번은 인도 갠지스강 인근 마을에 갔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을이었다. 돈을 모아 자신을 화장할 때 쓸 장작을 구하는 노인들의 무표정하지만 편안한 모습을 보며 인간에게 죽음과 삶이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고객 때문에 힘든 일 많았을 것 같은데.

"함께 TC 자격증 딴 동료는 출장을 딱 한 번 갔다 와서 그만뒀다. 나도 '이러다 미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영국에선 할머니 두 분을 잃어버렸다 공항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TC 경력은 회사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 경험으로 남들은 생각지 못한 상품을 아주 싼 가격에 내놨다. 사건·사고가 발생해도 안달하지 않고 기다리는 법도 배웠다."

박 회장은 1989년 동료 몇 명과 함께 국일여행사(지금의 모두투어)를 창업했고, 1993년엔 다시 국진여행사를 만들었다. 국진여행사는 1996년 하나투어로 이름을 바꿨다.




◇자식에게 떳떳한 아빠


―무역회사 꿈 그만 꾸고 여행업에 올인하겠다고 결심한 건 언제부터인가.

"1980년대 들어 부분적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됐고 1989년엔 완전 자유화가 됐다. 누구나 해외에 나갈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차원의 여행이 시작될 거라고 봤다. 여기서 내 길을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달랐나.

"1980년대 일정은 동남아 15일, 유럽 20일이 최소였고 여행지는 10여곳 이상이었다. '나 왔다'고 증명사진 찍기 바빴다. 1990년대엔 일정이 10여일 안팎, 나라는 4~5개국으로 줄었다. 지금은 4~5일짜리 일정에 한 국가 또는 한 도시만 가는 상품도 쏟아져 나온다. 개성이 중시되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 같다."

―여행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인가.

"그렇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것도 그 때문이다. 시대는 바뀌는데 회사는 구태를 답습했다. 여권 만드는 데 치중하고 단체 한 팀으로 큰돈 버는 구조에 집착했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 동료들과 국일여행사를 만들었다. 중남미와 지중해, 남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문 상품을 만들어 팔았다. 첫해 3억5000만원을 벌었고 3년 후 30억원을 벌었다. 대박이었고 정말 신났다."

―그렇게 잘나갔는데 국진여행사로 독립한 이유가 무엇인지.

"회사 상장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렸다. 직원이 주인의식을 가지려면 주인이 돼야 한다는 게 소신이다. 회사가 클 때 직원도 부자가 될 수 있어야 희망이 있는 거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따로 나왔다. 초기 자본금도 나와 직원들이 함께 모았다. 신입 직원들은 최소 500만원 정도의 주식을 보너스 대신 줬다. IMF 위기를 넘긴 것도 이런 힘이었다."

―평소에 '그때 돈은 많이 벌었지만 미래를 향한 꿈이 없었다'고 얘기한다던데.

"여행사 직원이었을 때 돈 많이 벌었다. 세금 안 낸 소득도 많았다. 해외여행에서 10% 이상 수익 내면 안 된다는 등의 엉터리 규정 때문이었다. 어기면 영업 정지였다. 소득 신고를 누락해 세금을 안 내는 게 업계 관행이었지만 그게 심적으로 힘들었다. 자식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었다. 지금은 당당하고 마음이 편하다."

하나투어는 2000년 여행업계 최초로 코스닥에 상장했고 2006년엔 영국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박 회장의 회사 지분은 초기 35%에서 최근 8.26%가 됐다.

Who is 박상환

◇6남매 키운 어머니, 가정이 제일 중요해

그의 할아버지는 전남 곡성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고 땅도 많아 천석꾼으로 불렸다. 하지만 6·25 전쟁을 전후해 가세가 기울었다. 막내인 아버지는 정미소와 논 50마지기를 물려받았지만 재산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정은 어머니가 지켰다. 그는 "어머니는 평생을 일만 했다. 단 하루만 어머니가 노는 걸 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떤 일을 하셨나.

"젊었을 땐 행상을 했다. 밭일도 하고 식당일도 했다. 서울에 올라오신 이후엔 파출부 일을 나가셨고 나이 드신 후에도 봉제 공장에서 나오는 옷의 실밥 따는 일을 했다."

―생활비나 용돈을 드리지 않아서 그러신 것은 아니었을 텐데.

"주식이 많이 올랐을 땐 내 재산이 꽤 많았다. 제발 일 좀 그만하시라고 해도 '돈은 있을 때 아껴야 한다'고 하셨다. 병나면 돈이 더 들어간다해도 몰래 일을 다니셨고, 용돈 드리면 한 푼도 안 쓰고 모았다가 자식들, 손자들에게 나눠주셨다. 멀미가 심한 어머니는 단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했다. 아들이 여행사 사장인데, 어머니를 여행 보내드리지 못한 것, 그게 지금도 한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6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배운 교훈이 있다면.

"철저한 근면과 성실이다. 끊임없이 성실하지 않으면 잘 굴러가던 자전거 바퀴가 쓰러진다. 돈 많이 벌어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삶을 보면서 한눈팔며 사는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가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교훈을 배운 것도 큰 자산이다."

하나투어가 요즘 주력하는 경영 목표인 '스마트워킹(smart working)'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일과 삶이 함께하는 직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여직원이 많은 여행업계 특성상 아이 키우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 들어 하나투어 전체 직원 2200여명 중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은 81명, 출퇴근 시간을 맘대로 조절하는 유연근무를 하는 사람은 300여명 정도다. 작년의 두 배다.

그는 말한다. "어머니가 가정을 버렸다면 우리 6남매는 어떻게 됐을까.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대단한 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게 가족이다."




Posted by 겟업
2014. 8. 4. 10:16

공공디자인의 전통과 현대

 

- 다시 생각하는 공공성과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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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평론가  최 범 

 

정자나무를 생각한다

 

 여기 나무가 하나 있다. 마을 가운데 우뚝 서있는 커다란 나무. 우리는 이런 나무를 정자나무라고 부른다. 정자(亭子)와 같은 나무라는 뜻이다.

 

다음 글을 읽어보자.

 

“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하면 마을 앞에 있는 큰 정자나무 아래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모여들었다. 작은 정자나무는 내 어린 시절에 없었으므로 우리들은 큰 정자나무 아래로 모여들어 놀았다. 정자나무는 어린이들의 공동 놀이터요, 마을 어르신들의 야외 사랑방이요, 마을의 대소사 일이 논의되던 진뫼마을 국회의사당 같은 역할을 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낮잠을 즐기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할 때 고함을 치며 시끄럽게 싸우기도 하는 곳이어서 외지인이 지나가다가 쉬려면 마을 사람들 눈치를 보며 한 쪽에 가만히 앉아 있다 조용히 떠나는 그런 곳이었다...” 1)

 

흔히 한국에는 광장문화가 없다고 한다. 물론 광장이 없었기 때문에 광장문화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광장은 없었지만 광장문화는 우리에게도 분명 있었다. 물론 우리식대로 말이다. 광장이 공간적 개념이라면 광장문화는 관계적 개념이다. 그러니까 광장이라는 공간은 없었지만 광장이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관계는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정자나무이다. 길가나 마을 한 가운데에 서있는 정자나무는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만남을 발생시키고 소통을 활성화한다는 점에서 관계를 만들어내는 훌륭한 장치였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정자나무가 곧 광장이었다. 그렇게 보면 우리에게 광장문화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서구적인 기준으로 우리 문화를 재단하는 일에 다름아니다. 전통적으로 높은 수준의 공동체문화를 일구어온 우리에게 관계의 공간이 없었을 리는 없다. 우리의 전통에서 얼마든지 그런 사례를 찾을 수 있다.

물론 마당이라는 것도 있었다. 광장을 마당과 비교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는 하다. 그러나 마당은 대체로 건물에 의해 구획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완전히 열린 공간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정자나무만큼의 개방성과 접근성을 가지지는 못한다. 그리고 정자나무라는 말이 나왔을 정자라는 건물 형태도 중요한 공유시설이기는 했지만, 위치나 공간적 규모에서 볼 때 정자나무에 비할 바는 못된다. 그렇게 보면 확실히 마당이나 정자보다는 정자나무가 훨씬 더 공공성을 띤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정자나무야말로 한국적 광장문화의 원형이라고 생각한다.

 

 

정자나무는 자연물이지만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인공화된 자연(Man-made Nature)’, 즉 요즘식으로 말하면 조경디자인이다. 하지만 단순한 꾸밈의 조경을 넘어서 완벽하게 공공성을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개념으로 공공디자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그것은 서양의 광장처럼 형태에 의해 기능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용에 의해 기능이 창출되는 것이라는 점에 특징이 있다. 정자나무가 정자나무인 것은 나무의 형태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참여와 사용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한국의 보자기를 닮았다. 고정된 형태에 의해 기능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용의 방식에 따라서 변용 가능하다는 점에서 유연함과 상호관계의 미학이 잘 녹아 있다.

앞에서 인용한 글에서처럼 정자나무에는 만남과 놀이와 휴식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정자나무에는 다양성과 개방성과 소통이 모두 공존했던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공공디자인의 요건을 넘치게 충족시킨다. 그런 점에서 정자나무를 한국 공공디자인의 원형으로 생각해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서양에 광장이 있었다면 우리에게는 정자나무가 있었다.

 

근대화와 공공성의 변용

 

 한국 사회는 근대화를 거치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겪었다. 이런 과정에서 전통적인 공공성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공공성은 아직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한국의 현대는 ‘공공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물론 오늘날의 공공성은 전통사회의 그것과는 다르다. 전통사회의 공공성은 공동체성(Communality)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에 걸친 혈연과 지연 같은 자연적인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서 현대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그에 비해 지금 우리가 말하는 공공성(Publicness)은 근대 시민사회의 공공성이다. 전통사회의 공동체성이 공동사회(Gemeinschaft)라는 조건에 기반한 것이라면, 근대 시민사회의 공공성은 사회적 이해관계에 기초한 이익사회(Gesellschaft)를 전제로 하고 있다. 그 점에서 전통사회의 공동체성과 근대 시민사회의 공공성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역사에는 연속성과 단절이 함께 존재한다. 이는 한국 근대사도 마찬가지이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에서의 공공성의 운명은 좀더 복잡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즉 전통적인 공동체는 해체되었지만 전근대적인 가치는 여전히 강고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이러한 것이 근대화의 모순과 결합하면서 구조적으로 더욱 악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의 근대는 ‘식민지적 근대’로서 내용적으로는 ‘공공성 없는 근대화’라는 특징을 보인다. 그리하여 한국 사회는 전체적으로 볼 때 그 외형은 매우 현대적이지만 실제 내용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다. 이것을 이른바 한국 근대의 부정합 모순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의 이러한 특성은 바로 공공디자인의 성격을 결정한다. 왜냐하면 공공디자인이란 기본적으로 근대 시민사회에서의 디자인의 한 양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과 같이 근대적인 공공성 자체가 없는 사회에서 공공디자인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순된 것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국 공공디자인의 과제는 더욱 복합적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한국의 공공디자인은 이중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디자인의 공공성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한국 사회의 공공성까지도 창출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 디자인의 성격과 공공성

 

 흔히 한국 사회의 구조적 성격으로 ‘강한 국가’와 ‘약한 시민사회’를 든다. 식민지, 전쟁, 경제개발을 거치면서 국가는 점차 거대해졌지만 그에 비례하여 시민사회는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가는 근대화 과정을 통해 지나치게 성장한 ‘과대성장국가(Overdeveloped State)’로서 매우 억압적이면서도 계몽자적인 성격을 띤다. 사회의 모든 영역이 국가에 의해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전쟁에서부터 헤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디자인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국 디자인의 국가주의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디자인 진흥(Design Promotion)’ 정책이다. 디자인 진흥정책은 1960년대의 개발 드라이브 정책의 부산물로서 디자인을 경제개발이라는 국가 목표의 종속변수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1960년대 중반부터 국가 주도의 디자인 진흥정책이 추진되었고, 이는 한국 현대디자인의 성격을 주조한 매우 강한 구조적 요인이었다.

디자인 진흥정책을 뒷받침한 것은 이른바 ‘미술수출’ 이데올로기였다. 1967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미술수출’이라는 휘호를 하사(?)하였는데, 이는 최고 지도자가 한국 디자인계에 내린 명령에 다름아니었다. ‘미술수출’은 한국 현대 디자인 이념 2)의 창설 효과를 가지며 오늘날까지도 거의 유일한 디자인 이데올로기로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국가 주도의 디자인 진흥은 1970년대 이후 민간 부문의 발전에 따라 상대적으로 그 영향력이 축소되지만, 그러나 한국과 같이 강한 국가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민간 부문이 국가 정책에 영합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국가와 기업 간의 갈등은 잠복되어 있을 뿐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현대 한국은 식민지 유산을 계승한 지배 그룹과 경제 개발을 최고의 이데올로기로 삼은 집단에 의해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한국 디자인계 역시 이러한 이념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이런 경우 사회 일반과 마찬가지로 디자인에서의 공공성은 인식되지도 실천될 수도 없는 낯선 가치일 수밖에 없다. 사실 그렇게 보면 2000년대 들어와 불기 시작한 공공디자인 붐은 다소 기이한 느낌을 준다. 지난 수 십 년간 사적 디자인만이 존재하던 한국 사회에서 공공디자인의 대두는 그 자체로 반가운 것임에 틀림없지만, 문제는 그것을 주도한 세력들이 너무나도 익숙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1960년대부터의 디자인 진흥정책은 산업 관료와 ‘교수-디자이너’ 3)들의 협력에 의한 것이었는데, 이들이야말로 디자인 진흥 세력의 중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바로 공공디자인 정책과 사업들이 바로 그 디자인 진흥세력에 의해 추진되는 것은 분명 모순된 일이다. 국가주의에 기반한 디자인 진흥정책은 공공디자인과는 그 이념에서나 실천 형태에서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디자인 진흥정책이 국가 중심적이라면 공공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시민사회 중심적이기 때문이다.

 

2) 서구의 근대디자인 이념이 윌리엄 모리스나 발터 그로피우스 같은 지도적 디자이너들에 의해 주도된 것에 비하면 한국의 현대디자인 이념은 디자이너가 아니라 권력자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이는 한국 디자인이 국가 권력의 하위부문이었을 뿐 상대적 자율성을 갖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의 ‘디자인 서울’ 정책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3) 한국 디자인계는 크게 디자인 교수와 디자이너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중에서도 디자인 교수, 즉 ‘교수-디자이너’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한국에서 교수-디자이너는 단지 교수인 디자이너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대학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각종 국가 정책과 디자인 비즈니스에 관계하며 중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한국의 디자인 진흥정책은 기본적으로 산업 관료와 ‘교수-디자이너’의 협력에 의한 것이다. ‘교수-디자이너’를 ‘프로페자이너(Profesigner)’라고 부른다면, 정치가-디자이너는 ‘폴리자이너(Polisigner)’라고 부를 수 있다. 최근 국가 주도의 각종 공공디자인 정책과 프로젝트에는 ‘교수-디자이너’를 넘어선 ‘정치가-디자이너’, 즉 ‘폴리자이너’가 등장하여 주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차이들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은 채 추진되는 공공디자인 정책과 사업은 또 하나의 국가 프로젝트가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리고 여기에는 예의 익숙한 디자인 집단이 협력하고 있는데. 이러한 방식의 문제는 거기에 시민사회적인 문제의식과 실천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추진하는 ‘디자인 서울’ 정책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확대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경우에도 공공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결국은 정치가와 디자인 전문가들의 결합에 의해 ‘위로부터’ 추진되는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진정한 공공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처럼 근래 일련의 국가 주도의 공공디자인 정책이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게 여전히 디자인의 공공성에 대한 사유가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뼈저리게 증명하는 것은 다시 한 번 한국의 근대화가 공공성을 잉태하지 못했으며, 디자인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최근 이러한 현실에 대한 시민사회와 디자인계 내부로부터의 비판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의 단초를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마도 한국 디자인의 공공성은 훨씬 더 넓은 사회적 차원에서의 공공성에 대한 의식과 실천에 의해서만 뒷받침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디자인의 공공성은 여전히 그 성과를 말하기 이전에 근본적인 과제를 안고 있는 아포리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생각하는 공공성과 디자인

 

 공공디자인은 디자인으로 구현된 공공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보면 결국 공공디자인은 한편으로는 디자인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공성에 대한 인식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한국의 디자인은 그러한 공공성을, 아니 한국 사회 자체가 그동안 근대적 공공성을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한국의 현대 디자인은 한편으로는 국가에 의한 ‘위로부터’의 디자인 진흥에,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를 위한 디자인으로 치달아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디자인의 공공성이란 생각해볼 주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한국 사회도 일정하게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내면서 새로운 단계로의 발전이 요구되고 있다. 디자인에서의 공공성이 요구되는 것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우리는 개발국가를 넘어선 전망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배제된 공공성에 기반한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과제를 던진다. 따라서 이제는 탈개발국가를 지향하면서 디자인과 공공성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디자인 이전에 전통사회의 공동체성과 현대사회의 공공성의 차이를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연속선상에서 보는 관점이 필요하다. 그럴 때 공공디자인에서의 전통과 현대의 만남도 가능해질 것이다. 한국 공공디자인의 전통과 역사성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한동안 너나없이 두바이가 어떠니 빌바오가 어떠니 하고 떠들어대었다. 모두 앞뒤 없는 짓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세계적인 디자인 명소라고 불리는 대상들에 대한 순례가 과연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던가. 도움은커녕 결국 몇몇 바람잡이들에 의한 또 한 번의 집단행동에 지나지 않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21세기의 뻘짓에 다름아니었다. 두바이와 빌바오를 배우자고 떠들던 자들은 바로 저 디자인 진흥세력의 후예들이다. 그들에게는 디자인이 갖는 전통과 맥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그런 식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참고사항일 뿐이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 자신의 눈과 손으로 해결해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또 한 번의 소외된 발전으로 우리를 끌고 갈 뿐이다.

눈을 감고 옛날 동구밖의 정자나무를 떠올려보자. 거기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노인들이 장기두는 소리가 들리지 않은가. 두바이나 빌바오가 아니라 정자나무에서 우리 공공디자인의 상(像)을 그려보는 것이 과연 엉뚱한 일일까.

 

*공공디자인엑스포 2010 심포지엄, 2010. 12. 16.

Posted by 겟업
2014. 2. 8. 07:26

Why are so many adults adopted in Japan?

왜 일본에선 그렇게 많은 성인이 입양되는가?

 

AMERICA and Japan top the charts for the highest rates of adoptionbut with one big difference. Whereas the vast majority of adoptees in America are youngsters, in Japan kiddies represent a tiny 2% of all adoptions. Men in their 20s and 30s make up the remaining 98%, or almost 90,000 adoptees in 2008 (up from fewer than 80,000 in 2000). Why are so many adults adopted in Japan?


미국과 일본은 가장 높은 입양률을 차지한다. 그러나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 미국에서 대다수 입양아들은 아기인 반면에 일본에서 아기는 전체 입양에서 2%만 차지한다. 20~30대 남성이 나머지 98%의 입양을 차지한다. 2008년엔 거의 90,000명의 입양(2000년엔 80,000명이 안되던 것이 올랐다.)이 있었다.

 

The reason is more mercantile than magnanimous. Business acumen and skill are not reliably hereditary. Although India’s family firms are thriving for now, a lack of suitable offspring may force them to pass the baton to non-family members (such as Cyrus Mistry, the first outsider to chair the Tata Group, one of India’s most revered conglomerates). Most family businesses wilt after their founder’s death. Just 37 members make up Les Hénokiens, a fraternity of companies worldwide that are at least 200 years old and are still run by a family member. The two firms which vie for the title of the world’s oldest family company are Hoshi, an inn founded in 781, and Kongo Gumi, a Buddhist temple builder from 578and both are Japanese.

 

원인은 너그러움보단 상업적 이유이다. 사업적 수완과 기술은 확실히 유전적이지 않다. 비록 인도 가족 기업들은 지금까지 번성하고 있지만 경영 승계에 적합한 후손이 없는 것은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경영 바톤을 넘기게 만든다(인도에서 가장 존경받는 재벌인 타타그룹을 이끄는 최초의 외부인 사이러스 미스트러 회장의 경우처럼). 대부분 가족 사업은 창업자가 죽고 난 후 시든다. 37명으로 구성된 에노키안 협회(Les Hénokiens)는 적어도 200년이 넘었고 여전히 가족멤버로만 운영되고 있는 세계적인 회사들의 협회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 기업의 타이틀을 다투는 두 기업은 781년에 세워진 여관 Hoshi578년부터 이어진 불교 사원 건설회사 Kongo Gumi 인데 둘 다 일본 회사다.

 

Before the second world war, Japan’s civil code decreed that family wealth passed along male lines; tradition dictated it went to the eldest. In daughter-only households, this fuelled a demand for adopted sons who could carry on the family name and business. (If a biological son was deemed an unsuitable heir, he too could be bypassed for an adopted one.) In turn, families with a surplus of younger sons sent them out for adoption. Many legal adoptions are coupled with a form of arranged marriage (known as omiai) to one of the family’s daughtersbut the son-in-law (or mukoyoshi) then changes his name to hers. Today a host of matchmaking companies and marriage consultants recruit voluntary adoptees for Japanese companies.

 

2차 대전 이전에 일본의 민법은 가족의 재산은 남성에게 전달된다고 정했다; 전통적으로 큰아들에게 가도록 했다. 딸은 그냥 식구였다. 이것은 가족의 이름과 사업을 이을 수 있는 양자의 욕구를 불 지폈다. 만약 생물학적 아들이 부적합한 상속자로 여겨지면, 그는 건너뛰고 양자에게 돌아갈 수 있다. 차례로 젊은 아들이 넘치는 가족들은 아들들을 입양보낼 수 있다. 많은 법적 입양이 그 집안의 딸 중 한명과 중매혼(omiai)의 형태와 결부된다. -그러나 사위(mukoyoshi)는 자신의 이름을 딸 집안의 것으로 바꾼다. 오늘날 결혼정보회사와 결혼 컨설턴트들은 일본 회사를 위한 입양 지원자를 모집하기도 한다.

 

Although Japan’s post-war code no longer upholds primogeniture, business families find the habit hard to kick. The country's declining birth rate has further limited the likelihood of a male heir for many of them, who often select sons from among their most promising top managers. Toyota and Suzuki, both carmakers, Canon, an electronics firm, and Kajima, a construction company, have all adopted sons to manage them. Incentives are high for prospective adoptees, too. Their parents sometimes receive gifts of many million yen. To be selected as a mukoyoshi is to be awarded a high executive honour. This prompts fierce competition among managers, which means that the business has access to as good a talent pool as non-family companies. In fact, researchers have found that adopted heirs’ firms outperform blood heirs’ firmsalthough the prospect of being overlooked for an outsider can serve as motivation for sons to knuckle down, too.


비록 일본 전후 민법은 더 이상 장자 상속권을 지지하지 않지만 가족기업들은 그 습관을 버리긴 힘들었다. 가끔 자기 회사 고위 관리자들 중 가장 촉망받는 이를 아들로 선택하는 가족기업들에게 일본의 감소하는 출산율은 아들 상속 가능성을 더 제한하고 있다. 도요타, 스즈키, 캐논, 가지마 모두 아들을 입양해 회사 경영을 했다. 미래 입양아들에게 인센티브 역시 높다. 그들의 부모들은 가끔 선물로 수백만 엔을 받기도 한다. 사위로 간택된다는 것은 고위 경영진 사장 자리를 받는 것이다. 이것은 매니저들 사이에서 치열한 경쟁을 재촉하기도 하는데, 이 말은 가족기업들도 비가족기업처럼 능력있는 인력 풀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실 연구원들은 입양된 상속인이 이끄는 기업이 혈연 상속인의 기업보다 더 성과가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비록 외부인들이 간과할 수 있는 측면은 이것이 아들들도 열심히 일을 할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http://www.economist.com/blogs/economist-explains/2013/04/economist-explains-why-adults-adopted-japan

 

 

kiddie : 아기

mercantile : 상업과 관련된

magnanimous : 너그러운, 도량이 넓은

Business acumen : 사업적 수완

reliably : 확실히, 믿을수 있게

hereditary : 유전되는, 세습되는

wilt : 시들다

fraternity : 협회

vie for : 경쟁하다

civil code : 민법

decree : 명하다, 칙령

bypass : 우회하다, (절차, 순서를) 건너뛰다

arranged marriage : 중매결혼

primogeniture : 장자상속

likelihood : 공산, 가능성

knuckle down : 열심히 일하기 시작하다

Posted by 겟업
2013. 10. 13. 23:14

우리나라 신화는 단군, 주몽, 혁거세신화 같은  건국신화라서 바로 역사로 굳어져 이어져 버려 신화적 상상력이 발생하기 어려움.

게다가 고구려, 신라, 백제 자체가 기원 후 세워져 창세 신화 없음.



제주도 설문대할망신화 정도?


옛날, 한라산을 베개 삼아 누우면 다리가 제주시 앞의 관탈섬에 걸쳐졌고 빨래를 할 때면 한라산 꼭대기를 짚고 관탈섬에 빨랫감을 놓아 발로 문지르며 빨았다는 키가 엄청나게 크고 힘이 센 설문대 할망이 있었다. 할망은 바다 가운데에 제주도를 만들기로 마음 먹고 치마폭으로 흙을 날랐다. 치마에서 떨어진 흙부스러기들은 수많은 오름이 되었고 날라온 흙으로는 한라산을 만들었는데 산이 너무 높아 봉우리를 꺾어 던지니 산방산이 만들어졌다고 하네요. 

할망은 속옷이 없어 제주 백성들에게 명주 100동(1동은 50필)으로 속옷을 한 벌 만들어 주면 육지까지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백성들이 명주를 99동밖에 모으지 못해 속옷을 지어주지 못하자, 할망은 다리를 놓다가 중단해 제주는 섬이 되었다고 한다. 조천읍 조천리와 신촌리 바닷가에 있는 바위섬들이 할망이 다리를 놓던 흔적이라고 하며, 외롭게 지내던 할망은 역시 덩치가 큰 설문대 하르방을 만나 함께 살게 되었죠.

할망과 하르방에게는 50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할망은 엄청나게 큰 솥에서 아들들에게 먹일 죽을 끓이다 잘못해서 뜨거운 죽 속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한라산의 물장오리에 들어섰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구요,

성산포의 일출봉 기슭에 있는 촛대 모양의 등경돌은 설문대할망바느질할 때 등잔을 올려놓던 돌이라 하고, 제주시 한천 인근의 족두리 모양을 한 큰 바위는 설문대할망이 쓰던 모자였다고 하며, 섶지코지 역시 설문대코지에서 유래한다는 등 설문대할망과 연관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진다. 해남이나 강화도 등에도 이런 유형의 이야기가 전하는데, 설문대할망 대신 마고 또는 마귀 할머니가 주인공이라고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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