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7. 22:11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뒤, 조문 방북과 분향소 설치 문제가 남남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이미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조문을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내렸지만, 진보진영에서는 “정부와 민간 차원의 조문단 파견”을 요구하고 있다. 26일에는 서울의 한 대학과 덕수궁 앞 광장에 분향소가 설치됐다가 즉각 철거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조문·분향소 설치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싣는다.


죽은 자들에 대한 예우


국가는 하고 국민은 할 수 없는 표현의 영역은 있을 수 없어…
죽은 자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과 그 행위를 찬양하는 것은 달라


우리 정부와 미국이 ‘북한 주민에게’ 애도를 표했다고 하는데 한낱 말장난이다. 당연히 우리가 초상집에 가면 유족들에게 애도를 표하지 않는가. 애도는 애도인 것이다. 인권침해의 괴수였던 카다피의 사체 처리에 대해서도 국제인권단체들이 문제제기를 한 것처럼, 아무리 독재자라 할지라도 그 죽음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엄숙함과 예우를 요구한다.


문제는 김정일만 죽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일부는 김일성과 북한 정부에 대해 유대인이 히틀러나 나치독일에 대해 느끼는 공포심과 증오감을 느낀다. 전쟁 도중에 자신의 가족을 인민군의 총구 앞에 잃은 사람들이 그 ‘학살자’에 대해 갖는 증오감은 스스로에게는 어떤 종교적 신념보다도 자랑스럽고 떳떳한 것이다. 그들의 신념을 존중해주지 않는 언사는 그들에게는 자신을 모욕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전쟁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당한 유대인들에게 ‘대학살은 없었어, 모두 거짓말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이 겪은 인간성의 상실을 확장하는 ‘행위’라고 보고, 독일은 대학살 부인죄를 제정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국가들이 소수를 차별과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혐오죄를 두고 있다. 광주학살의 전주곡이었던 ‘12·12’ 주도자를 ‘혁명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법 위반에 관계없이 거기서 죽은 자들과 그 유족들에 대한 예우가 아닌 것이다.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죄)의 폐지가 힘든 이유는 이 조항이 전쟁유족들에게 ‘혐오죄’와 비슷한 심정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언어에는 ‘학살자에 대한 공포와 증오감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다수들에 둘러싸인 소수’라는 일종의 ‘포위의식’이 가득하다.


결국 김정일 분향소 설치 문제는 법의 문제가 아니라 죽은 자(들)에 대한 예우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이 법(국가보안법)을 들고나와 분향소를 철거한 것은 잘못이다. 국가가 조문을 이희호·현정은씨에게 허가했다는 사실 자체가 분향소가 불법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국가만 할 수 있고 국민은 할 수 없는 여러 행위들이 법률에 정해져 있지만, 표현의 영역에서는 국가는 하고 국민은 할 수 없는 의사표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헌법 21조 검열금지 조항의 명령이다. 국가기밀 등을 제외하고, ‘원래는 할 수 없지만 국가의 허가를 받으면 할 수 있는 말’은 헌법상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우리가 쉽게 수용하는 ‘적장에 대한 예우’라는 문구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은 자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과 죽은 자의 행위를 찬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또 국가보안법 7조는 두말할 것 없이 위헌이다. 국가보안법의 다른 조항들은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물리적 행위’를 범죄시하지만 7조는 언사(찬양·고무·선전·동조) 자체를 범죄시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들의 국가보안법은 물리적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지 그러한 생각을 처벌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1789년 반란법도 “미국인들을 욕보이는… 미국 정부에 반하는 거짓되고 논란적이고 악의적인 문서의 작성”을 처벌한다고 하여, 당시 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사법부의 위헌심사권을 세계 처음으로 확립한 ‘마버리 대 매디슨’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이 법을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분향소 설치를 법의 문제가 아니라 예우의 문제로 다루면 해결책이 보인다. 이번에 죽은 자와 60년 전에 죽은 자들 모두에게 예우를 갖추는 방법은 무엇일까? 김정일의 죽음을 속으로, 사적 모임으로 애도하는 사람은 많다. 그의 죽음으로 당사국들이 관망세로 돌아서면서 올스톱된 북-미 회담, 같이 올스톱된 인도적 지원 및 에너지 경협, 이 때문에 늘어나는 아사자들과 지연되는 군축·평화…. 서울대에 분향소를 설치한 학생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적 애도들을 모두 적발해서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전쟁유족들도 원치 않는 것이다. 언론이 자꾸 뉴스 거리로 만들고 경찰이 자꾸 법적 논란을 일으키니 전쟁유족들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고 모욕감을 느끼게 되는 것 아닌가.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준법’ 명제에 좌우는 없다


현행법상 북한은 반국가단체이고 지속적으로 안보 위협하는 상황…

북한과의 교류에 일정한 제한 둔 실정법에 따라 이성적 대처 필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한 지도 어언 열흘이 지났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조문 방북의 문제로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다. 조문과 관련하여 정부는 특별한 관계를 가졌던 소수의 사람에 대해서만 방북을 허용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렇지만 일부 단체에서는 개별적 조문 방북을 허용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이 조문 문제와 함께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분향소 설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며칠 전 서울대에서 분향소 설치 제안에 관한 대자보가 붙으면서 시작되었고, 분향소는 다수의 반대 속에서 설치되었다가 곧바로 철거되었다. 또한 한 민간단체에서도 서울 도심에 분향소를 설치하려고 시도하다가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사람이 숨지면 애도와 조문을 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기본적인 예인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헌신한 분이 사망하면 그를 기리기 위하여 분향소를 설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북한 지도자의 사망으로 인한 조문이나 분향소 설치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사망으로 인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복잡하면서도 비극적인,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를 추구하면서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남북문제가 얽혀 있다. 한반도의 현실은 전쟁과 군사적 대치, 긴장과 교류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만들어져 왔다. 세계가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끝냈음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갈등과 대치 속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더구나 2010년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은 우리에게 북한은 경계의 대상이라는 것을 각인시켜 주고 있다.


우리나라 현행법은 국제법과 달리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남북한이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하고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교류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우리나라는 남북교류협력법을 제정하고 북한과 인적·물적 교류를 통하여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물론 이에는 북한 역시 경제현실을 고려한 태도의 변화가 있었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은 우리 헌법에 의하여 한반도에서 유일한 국가인 대한민국의 안보와 국민의 생존에 위협을 주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반국가단체로서의 법적 지위에는 변함이 없다.


2000년대 들어오면서 남북관계가 과거와 달리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두 대통령의 방북, 개성공단의 설치로 인한 진전된 경제교류뿐만 아니라, 금강산 관광을 통하여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한정된 지역이지만 북한을 방문하였다. 이렇게 남북의 교류가 빈번해졌음에도 북한은 지속적인 도발로 우리의 안보를 시험하면서 여전히 양면적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조문을 위한 분향소의 설치나 방북을 허용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법치국가이다. 우리의 실정법은 북한과의 교류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을 두고 있다. 조문을 위하여 분향소를 설치하거나 방북하겠다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이들에게는 대한민국의 법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또한 국가는 이들 국민을 보호하고 자유와 생명을 지켜야 할 책무가 있다. 실정법에 따라 북한이 반국가단체라는 점에서 이 단체의 수장을 위한 분향소 설치는 허용될 수 없다.


법은 우리의 약속이며 우리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한 근간이다. 국민이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국가와 사회의 안전과 평화는 유지될 수 없다. 남북관계가 법으로만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하여도,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대한민국의 실정법을 준수해야 한다. 법을 지켜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 앞에서 진보와 보수는 없다. 조문 방북이나 분향소 설치 문제는 우리나라 실정법에 따라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이다. 더구나 북한은 여전히 반국가단체이고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대상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하여 남북이 경협을 통하여 교류한다고 하여도, 이러한 한반도의 현실을 무시하고 개인이나 단체가 조문 방북을 요구하거나 분향소를 설치하겠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김상겸 동국대 법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512089.html



Posted by 겟업
2015. 1. 5. 21:46

지난 15일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요즘 연예인은 사실상 공인인 만큼 엄격한 잣대가 적용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신을 밝혔다. ‘국민 엠시(MC)’ 강호동씨가 잠정 은퇴를 선언하는 등 연예계를 뒤흔들고 있는 연예인 탈세 의혹에 대한 발언이었다. 강호동씨가 탈세에 이어 강원도 평창에 땅 투기를 했다는 의혹까지 보도되자 연예인의 도덕성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연예인들에게 들이대는 도덕성 잣대는 정당한지에 대해 두 가지 의견을 들어봤다.


‘공인 타령’으로 이득을 얻는 자들


어떠한 권한도 위임받지 않은 연예인은 당연히 공인이 아니다
‘아파트 신공’ 여성부 장관처럼 진짜 공인은 강호동 뒤에 숨는다


난리도 아니다. 3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강호동에 대한 세간의 여론은 수시로 급변했다. 탈세 의혹이 보도되자 그를 방송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득세했고, 막상 그가 ‘잠정’ 은퇴를 선언하니 옹호론자들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고의 탈세가 아니라 세무사의 단순 실수인 것 같다는 국세청의 입장이 보도되고 여론이 잠잠해질 무렵, 평창 땅 투기 의혹이 다시 가십의 시장으로 기어 나온다. 여론이 종잇장처럼 펄럭이며 앞뒤로 뒤집히는 동안 강호동은 몇 번이고 ‘죽일 놈’과 ‘희생양’ 사이를 오갔다. 어느 의협심이 넘치는 시민은 탈세 의혹 기사만 보고 발 빠르게 강호동을 고발했단다. 가히 초현실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상황의 비루함에 더없이 짜증이 난다. 연예인이라고 해서 동정표를 주자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강호동이 실제로 불법적인 방법으로 세금을 탈루했고, 투기 목적으로 부동산을 구매했다는 증거가 나와 혐의를 확정할 수 있으면 철저하게 비판하고 합당한 처벌을 하면 된다. 그러나 단순히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아직 입증되지 않은 혐의 의혹이 대중들에게 공표되고, 민감한 개인정보인 납세 내역과 재산 증식 과정이 만천하에 까발려져 공공연한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나나 이 글을 읽을 당신이 그런 것처럼, 강호동 역시 어떤 혐의로 수사를 받든 유죄 확정 전까지는 무죄 추정을 받을 권리, 소중한 개인정보를 보호받을 권리, 그리고 여론재판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그것이 법이 보장하는 시민의 권리다.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시청자들의 사랑을 먹고사는 연예인들은 ‘공인’이므로 단순 혐의만으로도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여기서 잠시 ‘공인’이란 개념에 대해, 우리가 왜 ‘공인’들에게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공직자나 정치인들을 ‘공인’이라 부르는 것은, 공동체가 그들에게 법률 제정과 자원 분배, 정책 입안 등의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고도로 집중된 권한을 위임받은 이들의 언행은 공동체의 실질적 이익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그 권한의 공정한 행사를 위해 필연적으로 고도의 도덕성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재산과 납세 내역 공개를 요구하며,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지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연예인들은 어떤가? 우리는 그들에게 어떠한 권한도 위임한 적이 없다. 그들의 활동이 국가적 의제를 세우거나 정책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연예인은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판매하는 ‘고소득 유명인’일 뿐, 공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범죄 사실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단순 혐의만으로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되고, 설령 범죄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법이 정한 이상의 과도한 처벌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어떤 이들은 연예인들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문화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공인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이 논리대로라면 우리 사회는 유명 연예인 한두 명의 언행에 전체의 도덕관념이 출렁일 정도로 정신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소리다. 그쯤 되면 이미 연예인의 문제 이전에 우리 사회가 교육과 자체 정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다. 연예인 핑계 댈 일이 아니다.


공인과 연예인의 경계가 흐려지면 득 볼 이들은 따로 있다. “요즘 연예인은 ‘사실상’ 공인인 만큼 엄격한 잣대가 적용돼야 하지 않겠는가.”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인사청문회에서 했던 말이다. 강호동이 “어찌 뻔뻔하게 티브이에 얼굴을 내밀고 웃을 수 있겠느냐”며 잠정 은퇴를 선언하는 동안, 김금래는 실거래가 3억2000만원짜리 아파트를 9500만원에 사는 신공을 펼치고도 여성가족부 장관에 임명됐다. 진짜 검증 받아야 할 공인들은 강호동의 넓은 등을 방패 삼아 몸을 숨겼다. 그리고 이젠 3년 전에 추징금 내고 끝났다는 인순이의 탈세 의혹이 기어 나온다. 3년 묵은 이 떡밥은 또 무엇을 감추기 위해 던져진 것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입증도 안 된 동료 시민들의 혐의 의혹을 미리 비난하느라 진짜 공인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할 텐가?


이승한 티브이 비평가


대중의 인기 얻는 순간 공인이다


왜 그리 가혹하고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는지 서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 인기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강호동이 은퇴를 선언했다. 비록 잠정 은퇴라는 표현으로 추후의 복귀 가능성을 열어두었지만, 세금 탈루에 대한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선택이었다. 일부 누리꾼들은 고의로 탈세한 것이 아니고 검찰 기소가 이루어진 것도 아닌데 은퇴는 너무하지 않으냐는 동정의 의견을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유명 연예인은 공인이기 때문에 더욱 엄격한 잣대의 도덕성과 처신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연예인은 과연 공인인가 아닌가? 필자의 생각에 연예인은 공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정도 인기가 있고 잘 알려진 유명 연예인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예인이 관련된 도박 또는 마약 사건, 교통사고, 병역 문제 등은 일반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끔 큰 비중으로 언론에 보도된다.


연예인이 공인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단순히 관심을 많이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중의 사랑을 받을뿐더러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비록 공무원처럼 국가에 관련된 공적인 일을 하지는 않지만, ‘공적’(公的)이라는 의미 자체가 사회 전체의 구성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의미하므로 연예인은 공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유명 연예인은 평소 자신의 언행에 대해서 늘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물론 갑작스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즉흥적으로 또는 순발력 있게 대응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결국 평소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 자신을 늘 돌아보는 마음, 자아존중감과 겸손의 미덕을 동시에 갖추려는 마음, 상식과 사회적 규칙을 존중하고 따르는 마음, 신중하게 생각하여 충동적인 행동을 자제하는 마음 등이 연예인들에게 요구된다.


평상시에 늘 명심하면서 몸에 배게끔 하라. 만일 그럼에도 잘못된 행동이나 범법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면,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며, 사람들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예인도 우리 대중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또는 그녀)가 진심으로 후회와 반성을 한 다음에 용서를 구하면, 대중은 너그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부인하고, 책임의 경감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애초에 진심 어린 반성이나 사과가 없다면, 대중은 그(또는 그녀)를 매몰차게 벼랑 끝으로 내몰 것이다.


연예인에게 왜 그리 가혹하고 엄중한 잣대와 요구를 들이대는지 서운한 감정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고마워하라. 대한민국의 연예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 그리고 인기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재능과 노력 못지않게 더 중요한 원천이 있음에랴. 그것은 바로 대중의 존재, 그리고 그들의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다.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대중과의 애착관계는 사랑과 관심에서 미움과 무관심으로 바뀔 수 있다. 자녀와 부모의 애착관계는 좀처럼 끊어지지 않지만, 연예인과 대중의 애착관계는 순식간에 끊어지곤 한다. 국민들은 유명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하게 관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스타여서 부담스러워하기 이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국민들은 결국 선택할 것이다. 공인으로서의 처신을 잘하고 책임을 다하는 연예인은 계속 사랑해 주고 언젠가는 용서하여 기회를 다시 주지만, 그렇지 못한 연예인에게는 가혹한 판단과 행동을 보일 것이다. 국민들의 마음은 변화할 수 있다. 연예인들이여, 자신이 대중의 인기를 얻는 순간 공인으로 공인(公認)되는 것임을 꼭 기억하라.


연예인도 사람인지라 인기를 얻은 다음에 과대망상적인 사고가 슬슬 자라나기 시작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하니 일반인처럼 평범하게 지낼 수 있으랴. 고급 음식과 술, 그리고 아름다운 이성들을 찾을 수 있다. 묘한 특권의식도 생겨날 수 있다. 돈을 더 벌고자 하는 욕심이 일어날 수도 있다. ‘누가 알겠어, 그리고 내 사생활인데 뭐 어때?’라는 생각이 들면 망할 징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럴 때는 초심을 다잡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라. 그래야 파국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손석한 정신과 전문의

Posted by 겟업
2014. 12. 6. 09:47

약 3500만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에스케이(SK)커뮤니케이션즈의 해킹 사건으로 ‘인터넷 실명제’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가장 심각한 피해는 주민등록번호의 유출이다. 인터넷 실명제 아래서는 누구나 주민번호로 본인 확인을 해야 서비스 가입이 가능하다. 서비스 제공업자들은 서버에 이를 규제 없이 보관해 왔다. 인터넷 실명제 때문에 피해가 커졌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동안 개인정보의 유출을 우려하며 폐지를 주장하는 쪽과 청소년 보호, 악플 방지를 위해 필요하다는 쪽의 의견이 팽팽히 맞서왔다. 헌법재판소도 곧 실명제의 위헌 여부를 가릴 예정이다. 인터넷 실명제의 폐지와 존속, 양쪽 의견을 들어본다.


실익도 없고, 국익에도 반한다


외국 유명 서비스도 도입 안하고 악플 규제·수사 편의도 근거 없다
외국인들 접근 못하도록 하는 게 그렇게 외쳐 대던 규제완화인가


인터넷 실명제는 전 국민을 예비범죄자로 간주하는 일종의 사전 검열이자,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강제하여 개인정보 유출 위험을 확대시키고 중소 정보기술(IT) 기업에 부담을 지우는 제도라는 점에서, 도입 초기부터 정당성과 필요성을 의심받아왔다. 정보기술 업계와 학계, 국회 전문위원들, 시민사회단체들이 한목소리로 폐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심지어 (바로 철회하기는 했지만) 행정안전부에서도 향후 대책의 하나로 실명제의 점진적 폐지를 거론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실명제 존치론자들은 실명 확인만이 인터넷의 각종 문제들의 해결책이 되어줄 것이라는 기대에 사로잡혀 여러 가지 반론을 펴곤 한다. 대표적인 반론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실명 확인을 하지 않으면 서비스에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구글이나 트위터, 페이스북 등 외국의 서비스들이 최근 국내에도 확산되고 있으며, 그 영향력 면에서는 이미 국내 포털들을 넘어서고 있는 상황이다. 이 서비스들은 이메일 인증 이외의 어떤 신원확인 과정도 거치지 않음에도 성공적인 서비스를 만들어가고 있다.


둘째, 실명제가 악성 댓글의 감소를 위해서는 효과적이지 않나?


앞서 말한 외국계 서비스들은 실명 확인을 하지 않지만 악성 댓글이 문제가 되고 있지는 않다. 온갖 인터넷 폐인들의 집결지로 유명한 어느 사이트는 실명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악성 댓글보다 더한 게시물들이 넘쳐난다.


실명제 시행 이후 최근 몇 년간 주요 포털 3사에서 악성 댓글이 몇 퍼센트나마 감소했다는 통계가 나온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명제 효과라기보다는 포털에서 악성 댓글 관리를 강화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댓글을 올리자마자 블라인드 처리가 이루어지니까 악성 댓글을 달 의욕이 사라지는 것이다. 악성 댓글을 해결하고 싶다면 이 방향으로 정책을 잡아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셋째, 실명제가 있어야 불법 정보를 올린 사람들을 신속하게 수사할 수 있지 않을까?


얼마 전 @2MB18nomA라는 트위터 계정이 유해 정보로 간주되어 접속이 차단되고 당사자는 선거법 위반 등의 혐의로 입건되어 수사를 받고 있다. 트위터가 주민등록번호는커녕 이메일 이외의 어떠한 개인정보도 수집하지 않음에도 수사는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고 신속히 진행되었다. 우리 수사당국이 실명제가 없다고 해서 마음먹은 수사를 못하는 곳이 아니다. 문제는 언제나 수사 의지이다.


넷째, 아이핀과 같이 주민등록번호를 수집하지 않는 방식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아이핀이 주민등록번호의 문제를 일부 보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이핀을 발급하는 소수 신용정보업체들은 아이핀 정보와 주민등록번호 정보를 연결시켜놓을 수밖에 없다. 그 정보가 유출된다면 여전히 어느 정도의 피해는 발생한다. 또한 유출 이외에 인터넷 실명제가 가진 또 하나의 문제, 즉 국가권력의 감시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문제에서는 아이핀은 어떤 해결책도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사상과 양심의 자유’ ‘사생활의 보호’라는 헌법 정신에는 별 관심이 없다면) 하나마나한 제도라 하더라도 없애는 것보다는 그대로 두는 게 낫지 않을까?


실명제는 결코 양심의 자유, 익명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무형적 피해만을 가져오는 제도가 아니다. 우리 정보기술 산업의 세계 진출을 가로막는 중요한 걸림돌 중 하나이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한국 국민만이 아니다. 국내의 200만 외국인들, 700만 재외동포들도 한국어를 사용한다. 한류와 코리안드림이 맹위를 떨치는 중국, 일본, 동남아에서는 매년 10만명 정도 이상이 한국어 공부를 시작한다. 이들 대부분이 페이스북에 만들어진 케이팝 가수들의 팬페이지에서나 놀 뿐 풍부한 콘텐츠로 가득한 국내 서비스를 사용하지 못한다. 바로 인터넷 실명제 때문이다. 1000만에 달하는 거대한 시장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 문을 닫아걸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 귀따갑게 들어왔던 규제 완화이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이고, 선진화·세계화란 말인가?


박준우 함께하는 시민행동 기획팀장



아이핀제 의무화가 정답이다


사업적 타격 우려한 업계 반발과 네티즌 불편함 탓에 의무화 안돼 

아이핀제 사용률 1% 미만에 불과 빈번한 개인정보 유출은 이 때문


네이트 및 싸이월드의 3500만여명의 개인정보 유출로 인해 인터넷 실명제 폐지 논의가 확산되고 있다. 그 이전에도 옥션, 하나로텔레콤, 지에스(GS)칼텍스 등등에서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있었다. 더 이상 정부가 방관할 수만은 없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정보 유출사고가 인터넷 실명제 탓이라는 주장은 오해의 소지가 크다.


2003년 3월28일 노무현 정권 당시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은 공공기관 사이트에 인터넷 순수실명제 도입안을 발표했다. 이는 그야말로 인증된 실명으로만 게시글을 쓸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서 오남용되는 인터넷 실명제와 구분하기 위해 ‘순수실명제’라는 용어로 정리되었다. 게시판에 더욱 책임있는 글을 쓰도록 유도하기 위한 취지였다.


반면 현재 인터넷 실명제라 불리는 ‘제한적 본인확인제’는 2004년 12월 정보보호진흥원에서 개인정보 침해가 급증했다며 보완책 마련을 촉구해, 주민번호 대체 수단을 위한 연구에서 비롯되었다.


이 연구의 목적은 ‘개인정보 유출피해 방지 및 청소년의 성인사이트와 게임사이트 이용 관리’였다. 포털사 등 상업 사이트들이 주민번호를 수집하다 보니, 개인정보 유출은 물론 타인의 주민번호를 이용해 미성년자가 성인사이트와 게임사이트를 무분별하게 이용하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주민번호 대체 수단으로 고안된 ‘제한적 본인확인제’는 2007년 7월 지금 논란이 되는 ‘인터넷 실명제’라는 잘못된 명칭으로 알려지며 제도화된다. 이 때문에 지금 이 시간까지도 ‘인터넷 실명제’ 관련 논쟁은 극도로 혼란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본인의 실명으로 글을 쓰도록 강제하지 않는 한, 현재의 ‘인터넷 실명제’는 표현의 자유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 심지어 명예훼손 피해 구제와도 크게 관련이 없다. 왜냐하면 이미 포털사나 전자상거래 사이트 등에서는 ‘인터넷 실명제’ 시행 전에도, 모두 주민등록 인증제를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상거래를 위한 행정 절차와, 회원정보를 이용한 마케팅 때문이었다. 이미 다수의 사이트에서 주민등록 확인을 하고 있는데, 이를 의무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각종 통계자료에서 ‘인터넷 실명제’ 실시 이후 악성 댓글이 조금 줄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각 포털사에서는 그간 방치되었던 악성 댓글의 관리체계를 잡아나간 점도 고려해야 한다. 즉 ‘인터넷 실명제’보다도, 포털사에서 실시간 모니터링 요원을 대거 투입하고, 간단한 신고로 악성 댓글을 차단할 수 있는 피해구제 보완책을 마련한 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반면 인터넷 실명제 시행 관련 실무토론에서 최대 쟁점 사안은 상업 사이트에서 주민번호를 수집할 수 없도록 하고, 본인확인기관에서 주민번호 대신 가상 주민번호를 발급해주는 ‘아이핀’제의 전면 시행 여부였다.


그러나 사업적 타격을 우려한 포털사와 게임업체의 반발과 누리꾼(네티즌)들의 불편함 탓에 아이핀제는 의무화되지 못하여, 현재까지도 사용률이 1% 미만에 불과하다. 바로 이 때문에 개인정보 유출사고가 빈번한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주민번호 유출을 막을 수 있는 길은 해당 사이트에서 아무런 인증을 하지 않도록 하든지, 아니면 아이핀제를 의무화하여 상업 사이트에서 주민번호 인증을 하지 못하게 하는 두 가지 방안이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상업 사이트에서는 전자상거래 행정절차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본인 인증은 불가피하다. 법이 없어도 자신들의 사업적 이해관계로 시행했던 ‘본인확인제’를 법이 사라진다고 해서 스스로 폐지할 가능성은 없다.


‘인터넷 실명제’ 즉 ‘제한적 본인확인제’ 논의가 막 시작되었을 2004년부터 개인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아이핀제 확대를 대안으로 정했다면, 논란의 여지 없이 지금 이를 시행하면 되는 것이다.


변희재 주간 미디어워치 대표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9197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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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4. 06:17


‘간통죄’ 존폐 여부가 다시 헌법재판소의 손에 맡겨졌다. 2008년 합헌 결정이 난 뒤 3년 만이다. 지난 8일, 경기도 의정부지방법원 형사합의1부(부장 임동규)는 직권으로 헌법재판소에 간통죄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간통죄에 대해선 여러 차례 위헌법률심판 제청이 있었지만, 당사자의 신청 없이 법원이 직권으로 제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간통죄 폐지론에 더욱 힘이 실리는 형국이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폐지론과 ‘건전한 혼인관계’를 위해 유지해야 한다는 존속론, 양쪽의 의견을 들어본다.



‘혼인·가정 유지에 기여’ 근거 없다



국가가 개인 사생활 영역인 성생활에 형벌권을 행사하며 부당하게 개입하는 간통죄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일 뿐


최근 한 지방법원이 간통죄에 대하여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청구함으로써 우리 사회에는 또다시 그 존폐 여부가 이슈화되고 있다. 헌재는 1990년부터 2008년까지 네 번에 걸쳐 간통죄를 합헌으로 결정하였다. 그동안 헌재는 ‘선량한 성도덕과 혼인·가족관계의 보호’를 이유로 하여 간통죄의 존치를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헌재도 시대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2008년 결정에서는 “개인감정을 국가가 법제도로 규율하는 것은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을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이유로 재판관 9인 중 5인이 위헌 내지 헌법 불합치 의견을 제시하였다. 물론 이 결정은 위헌정족수 6인을 채우지 못함으로써 합헌이 되었다.


형법상 간통죄는 형법 제정 당시부터 도입 여부를 놓고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조항이다. 간통죄를 바라보는 시각은 법리적 측면과 현실적 측면이 있다. 현실적으로 볼 때 여론은 과거 다수가 간통죄 존치를 원했으나 폐지 주장이 늘어나면서 양자가 팽팽하고 맞서고 있다. 이렇게 여론이 변화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성도덕에 대한 기준이 변화하고 가족과 혼인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권리에 대한 국민의 의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론만 가지고 간통죄의 존폐를 결정할 수는 없다. 간통죄의 존폐 문제는 개인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려는 우리 헌법질서 아래서 정당한지, 또 그 목적에 맞는 기능을 현실적으로 하고 있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간통죄의 보호법익은 사회의 성도덕 보호와 헌법에서 보호하는 혼인제도 및 부부 쌍방간의 성적 성실 의무 등이다. 우선 형벌의 부과를 통하여 사회의 성도덕을 보호한다는 목적은 사회질서의 유지라는 차원에서 정당하다. 그러나 남녀간에 배우자를 선택하는 문제를 국가의 형벌권으로 규율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더구나 헌법 현실에서 간통죄가 성도덕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지 않고 있으며, 간통죄의 본래의 목적과 달리 배우자의 복수심을 충족시키거나 충분한 배상을 위한 경제적 목적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더 높다.


헌법은 36조 1항에서 혼인과 가족생활에 있어서 개인의 존엄성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하여 이를 보호해야 할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규정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한 혼인과 가족의 보호라는 점에서 개인의 존엄으로부터 나오는 자기결정권을 전제로 하고 있다. 즉 배우자를 선택하고 혼인관계를 유지하고 가족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사적 영역의 자유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에 의한 혼인과 가족관계의 보호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결정을 존중하는 선에서만 작동되어야 한다.


간통죄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개인의 기본권인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 국가는 개인의 사생활의 영역에 해당하는 성생활에 형벌권의 행사를 통하여 부당하게 개입해서는 안 된다. 물론 우리 사회의 성도덕 와해나 혼인·가족제도의 붕괴 등은 우려할 만한 현상이다. 그렇지만 이런 사회문제가 간통죄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실적으로 간통죄의 기소율은 점차 낮아지고 있으며, 간통죄 고소로 오히려 혼인생활이 파탄되어 간통죄는 혼인·가정의 유지에 기여하지 못한다. 부부간의 성적 성실 의무 위반문제는 이혼소송이나 손해배상 등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여성의 보호는 관련 법과 제도로 풀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급속한 사회발전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 속에서 이혼율이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이혼율의 증가와 함께 간통죄의 예방효과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간통죄를 폐지한다고 하여 갑자기 사회의 성도덕이 문란해지거나 가정의 붕괴가 급속도로 진행되리라 보지는 않는다. 법은 항상 살아 움직이는 규범이 되어야 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그렇다고 법이 사회의 변화에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법은 언제나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는 간통죄는 폐지되어야 할 시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김상겸 동국대 법대 교수



피해자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


간통죄 폐지되면 입증 책임이 수사기관서 피해자로 넘어가 입증에 따른 고통을 받으며 피해보상도 받기 어려워진다


의정부지방법원이 최근 간통죄에 대해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했다. 3년 전 헌법재판소에서 합헌 결정을 했으나, 최근의 분위기는 간통제 폐지론이 점차 힘을 얻는 상황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필자는 간통죄 규정을 존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간통죄는 우리 민족 최초 법인 고조선의 8조법금(八條法禁)에서부터 현재까지 내용상 일부 변화는 있지만 처벌규정 자체는 계속 존재해 왔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의 형법 제정 때도 포함됐다.


간통죄 규정은 선량한 성도덕과 성풍속을 보호하고, 혼인제도의 유지 및 가족생활의 보장, 나아가 부부간의 성적 성실 의무의 수호를 위해 입법된 것이다. 간통죄는 친고죄로서 고소가 있어야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수 있고, 배우자가 간통을 사전 동의하거나 사후 용서한 때에는 고소할 수 없다. 일정한 경우 고소 취하로 간주하는 규정과 재고소를 금지하는 규정을 두어 고소권 남용을 방지하는 장치도 두고 있다. 이처럼 간통죄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간통 혐의에 대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그 증거는 성행위에 대한 직접 증거여야 하고, 간통 혐의자들이 부인할 경우에는 최소한 정액이 묻어 있는 휴지나 이불이라도 있어야 한다), 소송 절차상으로도 적법한 고소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고소 요건으로 협의 이혼을 하거나 이혼소송을 제기할 것을 규정해놓아, 간통행위의 결과로 혼인과 가족생활이 사실상 파탄에 이른 경우에 한해 법적 규제가 미치도록 하고 있다.


일부 폐지론자들이 개인의 성생활이라는 은밀한 사적 생활영역을 간통죄로 제한하는 것은 헌법 17조가 보장하는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나, 이러한 기본권은 절대적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고 헌법 37조 2항에 따라 ‘질서유지 내지 공공복리를 위하여 제한’될 수 있고, 간통죄 규정이 과도한 제한으로 헌법 17조의 기본권 침해에 이른다고 보이지 않는다. 특히 우리의 혼인관계는 개인의 의사뿐만 아니라 전통과 문화에 기반을 둔 집안끼리의 결합이다. 자유로운 의사에 기해 스스로 형성한 법제도(혼인신고)에 편입된 부부관계에서 한쪽의 간통은, 성적 성실 의무 위배라는 단순한 혼인계약의 위배 차원을 넘어 부부 사이의 근본적인 신뢰를 무너뜨리고 혼인관계를 파탄시키거나 혼인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일부일처주의에 위협이 되는 것이다.


간통행위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건전한 성도덕에 반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무리 성개방이 이루어졌고 시대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간통죄는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해도, 혼인한 남녀의 정절관념은 우리 사회의 전통윤리로서 여전히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만일 간통으로 인해 가정이 파탄된 배우자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과연 폐지론자들이 주장하는 위자료만으로 그 충격이나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까. 따라서 간통죄는 여전히 존치돼야 하고, 간통죄 폐지론은 시기상조라고 본다.


실제 필자가 다수의 이혼소송을 진행하면서, 간통으로 인한 여러 폐해를 목격했고 간통죄로 고소하지 않고도 이혼소송에서 마무리되는 사건을 많이 경험했다. 즉 폐지론자들의 주장처럼 간통죄 규정을 악용하는 사례는 많지 않고, 간통죄 혐의를 찾기 위한 뒷조사 과정 때문에 오히려 혼인관계가 파탄됐다는 주장도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불구속 수사, 불구속 재판 원칙이 잘 지켜지는 현시점에서 간통죄의 혐의가 있다고 해서 바로 구속되는 것도 아니고 간통죄 처벌이 많은 위자료를 받기 위한 합의의 수단도 되지 못한다. 단지 간통죄 규정이 존재함으로써, 간통 혐의에 대한 입증을 수사기관에서 하게 된다. 하지만 간통죄 규정이 폐지되면 그 입증을 피해자가 직접 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그 입증이 쉽지 않고 결과적으로 간통으로 인한 피해자는 위자료 청구소송에서 입증을 위한 이중의 고통을 당하는 한편, 그 피해 보상도 받기 어렵게 될 가능성도 많다.


그렇다면 혼인제도의 유지를 위해서나 간통의 피해자 보호를 위해서라도 간통죄는 반드시 존치돼야 한다고 본다. 사견으로는 간통죄의 법정형과 관련해서는 다른 처벌 조항과의 형평상 벌금형도 선택할 수 있게 규정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한다.


김기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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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1. 06:42

인천국제공항 매각 문제가 다시 물 위로 떠올랐다. 지난 2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가 인천공항의 ‘국민주 매각’ 방식을 제안하자 친박계 유승민 의원이 반기를 들며 정치권 논쟁으로 번진 것이다. 유 의원은 “국민주 방식은 23년 전에 실패한 정책으로, 공기업 주식을 매각할 때는 매각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부의 의무”라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시민사회에서는 매각 방식을 떠나 ‘잘나가는’ 인천공항을 굳이 매각할 필요가 없다는 목소리도 높다. 인천공항 매각을 둘러싼 찬반 의견을 들어본다.


일부 국민주 매각 시도해볼 만하다


지분 매각 통해 시장 감시와 외국사 제휴로 경쟁력 높여야
20% 정도만 국민주 매각하면 공적자금 회수에도 문제없어


우선 인천공항의 경우 민영화는 아니고 정부 지분의 49%만 매각하고 51%는 계속 정부가 보유하고 경영권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49%를 매각하려는 이유는 현재는 인천공항공사가 서비스 측면에서 잘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잘한다는 보장이 없고, 특히 국제허브공항으로서는 환승률과 취항 항공사 수 등에서 세계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 보유 지분 일부를 매각함으로써 시장의 감시를 받게 하고, 외국의 유수한 전문공항운영사와 제휴하여 허브공항으로서 경쟁력을 더 높이려는 것이다. 또 매각대금을 인천공항 3차 증축에 필요한 4조원의 비용으로 충당하려는 것이다.
공기업 민영화를 찬성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공기업들이 대체로 비효율적·관료적으로 운영되어 만성적자에 시달리고 따라서 국민 혈세가 수시로 투입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공성이 강하지 않은 공기업은 민간에 매각하여 효율성을 높이고 또 판매대금으로 정부수입도 올리고 국가부채를 줄이는 데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인천공항공사의 경우 6년째 세계 최고 서비스 공항으로 선정되는 등 잘하고 있는데 왜 굳이 민영화하려 하느냐는 반대여론이 있다.



정부 지분을 국민주로 매각하는 방식에 대해선 장단점이 있다. 국민 세금이 들어간 공기업 지분을 매각할 때는 다른 기업이나 사모펀드에 팔 수도 있고 국민주로 매각할 수도 있다. 국민주로 매각하는 이유는 국민 세금으로 만든 기업이기에 그 이익을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의미가 있고, 상장가격보다 할인된 가격으로 서민들에게 매각함으로써 서민들의 복지 향상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주 매각의 단점으로는 기업이 발전하려면 주인이나 대주주가 필요한데 국민주로 다 매각하면 기업 발전에 도움이 안 되고, 상장가격보다 할인된 가격에 팔기 때문에 공적자금 회수가 극대화되지 않고, 기존 주주들이 주가 하락으로 손해를 볼 수 있다는 것 등이다. 그뿐만 아니라 국민주 매각이 과연 서민들에게 이익이 되는가 하는 것도 문제다. 모든 서민들에게 매각되는 것이 아니라 당첨된 일부 서민들에게만 유리한 ‘로또화’ 문제가 있고, 대부분의 서민들이 여윳돈이 없어 돈을 빌려 살 텐데 주식 값이 매각 당시보다 떨어지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도 문제다. 실제로 과거에 포스코와 한전의 국민주 매각 사례가 있는데, 한전의 경우 보유기간 제한이 풀린 3년 후 시장가격이 할인가격보다 떨어진 사례도 있다.


따라서 인천공항공사의 정부 지분을 매각하려면 공적자금 회수 극대화, 기업 발전, 서민복지 향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49%를 전부 국민주로 매각하는 것은 공적자금 회수에 문제가 있기에 15~20% 정도만 국민주로 매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일부에선 이윤도 많이 나고 부채 상환 능력도 있으니 지분 매각보다는 돈을 빌려서 3차 공항 확장공사를 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도 있지만, 국가부채와 공기업부채 문제가 심각한 지금 자체적으로 돈 마련이 가능한데 굳이 빌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 국민주로 매각하면 결국 외국인에게 다시 주식이 넘어가 국가 핵심 안보시설을 외국에 넘겨주는 꼴이 아니냐고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 요즈음처럼 개방된 사회에서 기업 주식의 일부가 외국인에게 넘어가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고 오히려 외국인들이 매입함으로써 주가가 올라가고 국제시장의 감시도 받게 되니 바람직하다. 더욱이 활주로와 관제탑 같은 핵심 시설은 정부가 계속 보유하고 외국인이 30% 이상 보유하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기에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건대, 인천공항공사는 정부가 지분 51%를 유지할 것이기에 민영화의 단점에 대해 너무 우려할 필요가 없다. 49%를 팔아 정부 수입도 올리고 3차 공항 확장공사를 위한 재원으로 쓰고, 외국 전문항공사와 제휴해 허브공항으로서의 경쟁력을 높이자는 것이다. 더욱이 국민주 매각은 국민 혈세가 들어간 공기업의 매각으로 인한 이익을 서민들에게 돌려주자는 것이니 극렬하게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나성린 한나라당 국회의원


투기세력에 넘어갈 위험이 높다





이미 국제경쟁력을 자랑하는 인천공항을 굳이 매각하는 건 

매각 이익 얻는 모종의 세력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케 한다


정부는 인천공항 매각을 오랫동안 물밑작업을 통해 진행해오다 지난해 9월 인천국제공항공사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대내외적으로 그 의지를 구체화했다. 최근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이를 받아 인천공항의 지분 49%를 국민주 방식으로 서민에게 20~30% 정도 저렴하게 공급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매각 여론의 공론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정부와 여당이 최고의 경영 성과를 자랑하는 인천공항을 민간에게 매각하기 위해 애쓰는 정당한 이유는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으며, 정부와 여당이 제시하는 근거도 문전옥답을 처분하는 부잣집 아들의 변명처럼 초라하기만 하다.


정부는 경영의 효율성을 제고하고 국제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항의 민영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계속 강조한다. 그러나 인천공항은 이미 최고의 경영 효율성과 국제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천공항은 7년 연속 흑자를 기록했고 지난해 흑자 규모만 3200억원에 이르며, 세계 공항평가에서 6년 연속 서비스부문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와 같이 업계 최고의 효율성과 경쟁력을 보유한 인천공항의 지분을 경영상의 효율과 경쟁력을 이유로 민간에게 매각할 이유는 없다.


나아가, 인천공항과 같은 국가의 기간공항은 이를 민영화한다 하더라도 서비스 향상, 비용 절감, 고용이나 투자의 창출과 같은 민영화의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공항은 지리적 독점력을 보유하고 있으므로 민간공항 운영자들은 투자비 회수를 위해 공항을 과도한 수익창출의 도구로 활용하고, 안전이나 고객 서비스는 뒷전으로 밀리는 사례들이 발생하게 된다. 정부는 행정적 규제를 통해 민간공항 경영의 공익성을 보장하면 된다는 설명을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정부가 공항사용료의 최고액을 규제하면 서비스가 열악해지고, 항공사의 사용료를 인상시켜 그 비용의 인상이 최종적으로 승객에게 전가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민간공항은 인력 감축과 새로운 장비의 도입을 통한 인건비의 감소를 추구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공항이 민영화되면 상당한 해고가 발생할 것이고, 중요한 업무를 외주나 하청을 통해 해결할 것이므로 공항업무의 안전성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만일, 인천공항이 민영화되면 영국 히스로공항의 장기 폐쇄 사태가 현실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질 낮은 서비스에도 최고가의 공항사용료를 물어야 하는 오스트레일리아나 유럽 민영공항의 현실을 인천공항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정부는 또 2017년까지 3단계에 걸쳐 공항을 확장하기 위해 4조원의 재원을 마련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인천공항의 지분 매각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인천공항의 흑자 기조를 고려하면 지분 매각이 아닌 합리적인 자본조달 방안이 적절하다. 인천공항의 지분을 국민주 방식으로 저가로 국민들에게 제공한다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주장은 근거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주장이다. 민영화로 공기업을 매각할 때 정부가 채택한 원칙은 최고가 매각 이론이다. 그런데 이 원칙을 철회하고 국민주로 매각할 경우 일반 서민들이 이 주식을 취득할 여력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고, 투기자본 등이 서민들을 내세워 저가로 주식을 취득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은 부동산 투기의 사례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다.


공항과 같은 국가기간시설은 최고의 공익성을 요구하므로 공항을 이용하는 승객과 항공사의 편익을 함께 고려해야 하고 국민의 안전과 편익은 어느 경우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가치이다. 그럼에도 매각을 강행하려는 정부의 의지 때문에 국민들은 이번 거래로 이익을 얻는 모종의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여지가 있다. 인천공항 매각대금의 15%인 5900억원을 미리 당겨서 2010년 도로사업 예산에 편성한 것과 같은 예산의 꼼수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관문이자 자존심인 인천공항을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투기세력에 넘길 수 있는 위험은 홍수나 자연재해의 위난과 비교되므로 즉시 매각을 위한 모든 절차를 중단함으로써 그 위험을 회피하는 것이 정부의 최선의 선택이라고 본다. 


정미화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Posted by 겟업
2014. 11. 29. 09:27


지난 3일 서울중앙지법은 서울 도곡동의 주상복합아파트 타워팰리스 주민이 이웃에서 큰 개를 기르지 못하도록 해달라며 제기한 ‘애완견 사육 및 복도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 법원은 ‘대형견을 기르는 것이 공동주거생활의 질서 유지를 위해 바람직한 행위는 아니지만 이웃의 인격권이 침해될 위험이 있다고 보기 어렵고, 문제의 골든 리트리버 종이 안내견이나 인명구조견으로 활용될 정도로 유순한 종인 것도 판단의 근거’라고 밝혔다. 하지만 여전히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거시설에서 반려동물을 기르는 것을 두고 이웃간의 갈등이 빈번한 상황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이에 대해 동물보호단체와 아파트입주자단체의 의견을 들어본다.




유순하다면 소도 키울 건가?


아파트는 사유재산이면서 공동재산
공공성 위해 일부 제약은 당연하다
개 싫어하는 이웃을 위한 예의 절실
큰 개 키우고 싶다면 동의부터 구하자


공동주택 생활에서 애완견이 주는 피해는 크다. 그래서 아파트마다 관리규약으로 애완견 사육에 제한을 두고 있다. 지난 6월 임시국회에서 법 시행이 3년간 유예된 ‘어린이 놀이시설 안전관리법’을 보면, 놀이터의 모래는 사람과 애완견 등의 외출이 많은 4월부터 10월까지 1회 이상 기생충(란)에 대한 검사를 실시하고, 결과에 따라 위생소독을 하거나 모래 교체를 하는 등 조처를 취하도록 의무화하고 있을 정도다. 애완견의 ‘배변’이 발견되지 않아도 단지 애완견 출입이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기생충(란)에 대한 검사를 의무화한 것이다.


애완견을 사육하는 아파트 주민들은 애완견과 관련된 민원을 제기해본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공동주택 애완견 피해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하다. 요즘 피서철을 맞아 장기간 집을 비우는 주민이 많다. 그런데 간혹 애완견만 놔두고 집을 비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 소음피해가 상상을 초월한다. 밤새 개 짖는 소리에 잠을 설치는 건 기본이다. 이웃 주민이나 빈집에 방치된 애완견이나 괴롭긴 매한가지다. 또한 애완견 배변 문제도 심각하다.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아파트 놀이터나 화단에 배변을 방치하는 이들이 있어 대다수 선의의 애완견 주인들이 눈총을 받기도 한다.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는 타워팰리스 주민끼리의 ‘개싸움’을 보면 두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서민들이 사는 아파트단지는 층간소음과 애완견, 주차문제 등 공동주택 생활에서 발생하는 갈등이 폭발 직전인데 부자들이 사는 타워팰리스는 상대적으로 작은 분쟁만으로도 뉴스거리가 되며 이슈가 되는 게 보기에 불편하다. 공동주택 생활의 갈등과 분쟁도 부자들이 해야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키나 보다. 둘째는 아파트에서 큰 개를 키워도 된다는 법원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아파트는 개를 좋아하는 사람, 관심 없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이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유재산이자 공동재산이다.


주택법 시행령 57조 3항 5호에 따르면 공동주택에서 가축을 사육해 공동 주거생활에 피해를 미치는 행위는 관리주체의 동의를 구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은 타워팰리스 주민 김아무개씨가 “(이웃의) 애완견이 나를 위협하고 소음을 내 생명·신체·건강에 대한 인격권이 침해됐고, 무게 15㎏ 이상의 애완견을 기르지 못하게 하는 아파트 관리규약에도 위반된다”며 이웃 함아무개씨 부부를 상대로 낸 ‘애완견 사육 및 복도 출입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다고 한다. 재판부는 “대형견을 기르는 행위가 공동 주거생활 질서 유지라는 차원에서 바람직한 행위는 아니지만, 이 개가 김씨에게 정신적 고통을 줌으로써 생명·신체·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심장 장애가 있는 사람이 큰 개를 보면 놀라는 게 당연하다. 이를 객관적으로 입증해야만 법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법이 잘못되었거나 판결이 잘못되었거나 둘 중에 하나다. 재판부는 “골든 리트리버 종은 덩치가 크고 중량이 많이 나가기는 하지만 충성심과 인내심이 강하고 유순해 안내견이나 인명구조견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김씨가 낸 가처분신청을 기각했는데 재판부의 논리대로라면 아파트에서 소도 키울 수 있다. 소만큼 사람에게 충성하고 인내심 강하며 유순한 동물이 어디 있는가?


대한민국은 애완견을 포함해서 가축을 사육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민주주의 국가다. 하지만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 일정한 제약을 둔다. 국립공원의 애완견 출입 금지가 좋은 예다. 국립공원만 금지하는 게 아니다. 서울 서초구청도 몇년 전부터 애완견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휴가철 휴양지에서도 애완견을 데리고 가면 호텔을 잡기가 불가능하다.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관리규약에 15㎏ 이상 큰 개를 키우지 못하게 규정한 것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우리나라는 공동주택의 비중이 높지만 그에 따른 법 규정과 제도가 미비하다. 결국 입주민들의 성숙한 자세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큰 개를 키우고 싶다면 이웃들에게 동의를 구하자. 법과 제도가 미비한 이웃간의 갈등과 분쟁의 영역에서 우리의 성숙한 공동체 의식과 시민정신을 발휘하자.



김대중 서울시아파트입주자 대표연합회 사무국장



도시는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아파트도 단점 극복하며 진화중
‘대형견 무조건 안돼’ 인식 바꿔야
반려동물도 보호자와 있어야 행복
법규보다 이해·배려로 해결하자


아파트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한 논란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와 아파트의 비율이 나란히 증가하면서 예견된 갈등이었습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구는 꾸준히 늘고 있으며 이제는 아파트에서도 개나 고양이 등을 키우는 집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파트에서 키우는 반려동물, 특히 대형견일수록 부정적인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대형견이 주는 위화감이나 공포감, 아파트라는 닫힌 공간에서 받아야 하는 스트레스 등이 원인으로 제시되곤 합니다. 대형견은 아파트보다는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키우는 것이 적합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은 도시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 대신 넓은 부지를 확보해 산책로를 개발하는 새로운 형태의 아파트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아파트가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주거형태로 자리잡으면서 공간침해와 층간소음이 빈번했던 특유의 단점을 극복하고, 생활의 질을 높이려는 아파트가 늘어나고 있는 만큼 ‘아파트에서 대형견을 키울 수 없다’는 전제는 재검토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인간과 감정을 공유하며 가족의 일원으로 살던 반려동물이 유기되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아파트로의 이사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키우던 반려동물을 다른 곳에 맡기거나 유기해야 하는 가족들의 심정은 차치하고라도 이렇게 유기되는 동물이 한해 수십만마리입니다. 그 비용과 폐해는 고스란히 우리 사회가 떠안아야 합니다. 유기동물에 드는 비용은 연간 100억원에 이릅니다.


대형견이 위협적일 것이라는 편견도 대형견에 대한 지식 부족과 개인의 주관적인 공포심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 서울지하철 4호선에 오른 시각장애인의 안내견을 향해 승객이 ‘누가 이렇게 큰 개를 지하철에 태우느냐, 더럽다’고 윽박지르며 시각장애인에게 사과를 요구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승객은 비상전화를 들고 역무원을 불러 끝내 지하철 운행을 중단시켰다고 합니다. 승객의 처지에서는 안내견의 큰 몸집에 공포감을 느꼈을지 모르나 안내견인 골든 리트리버나 래브라도 리트리버 견종은 성품이 워낙 유순하고 잘 짖지 않으며 인간과 친화적입니다. 개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충성스러운 안내견의 모습에서 모든 대형견이 무섭거나 번거로운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외국의 경우 특별히 위험하게 여겨지는 대형견에 대해서는 일반인의 소유와 사육이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견종을 떠나 행동 성향이 위험한 개에 대해서는 따로 분류하여 중성화 수술을 시행하여 감독하기도 합니다.


서울 도곡동 아파트 타워팰리스에서 대형견을 키울 수 있다는 법원 결정을 받았던 견종도 안내견과 같은 골든 리트리버입니다. 이 골든 리트리버의 보호자는 산책을 시킬 때도 화물승강기를 이용하는 등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으며 가까운 이웃도 대형견에 의한 소음은 없었고 위협감도 느끼지 못했다고 진술했습니다.


대형견이 아파트에서 키워질 때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겠느냐는 의견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반려동물은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야생의 습성을 버리고 인간의 라이프스타일에 함께 적응해 왔습니다. 특히 개와 고양이는 보호자와 같이 있을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낍니다.


성품이 온순한 대형견을 키우는 가구가 늘어나고 대중의 인식이 바뀌면서 대형견을 키우는 보호자 스스로 배설물 처리와 소음에 신경 쓰는 등 반려동물 문화를 성장시켜 나간다면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는 이웃과의 갈등을 점차 줄여 나갈 수 있습니다. 아파트에서 대형견을 키우면서 발생하는 문제 역시 법규가 아닌 이웃간의 이해와 배려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나날이 도시가 거대해지고 있지만 우리가 사는 도시에는 결코 사람만 살고 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반려동물들이 사람과 함께 살고 있음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전지영 동물보호단체 ‘카라’ 팀장



Posted by 겟업
2014. 11. 25. 06:48

최근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저서 <강남좌파>를 펴내면서 “모든 정치인들은 강남좌파”라고 주장해 화제가 되고 있다. ‘강남좌파’라는 용어는 강 교수가 2006년 <인물과 사상>을 통해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이들”이라고 처음으로 정의해 공론화했다. 최근에는 조국 서울대 교수가 “우리 사회가 더 좋아지려면 강남좌파가 더 많아져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강남좌파는 진보의 외연을 넓히는 존재인지, 기득권의 위선에 불과한 것인지 다양한 분석과 견해를 들어본다.


진보의 상징적 효과에 과도하게 의존



강남좌파는 이제 중도좌나 리버럴로 지칭되어야 한다
그 말이 했던 모든 역할은 의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강남좌파’, 이들은 생활은 보수와 비슷하게 하면서 진보적인 의식을 가졌다고 여겨진다. 이 균열은 여러 가지로 말썽거리였다. 우선, 그들은 정말 의식은 좌파인데 생활만 우파로 하는 사람들일까? 아니다. 그들의 의식조차 벌써 전통적인 좌파와 다르다. 이들이 자본주의와 돈, 그리고 자신의 이익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면, 강남좌파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의식과 존재의 불일치라는 관점으로는 그들을 설명하기 어렵다.


그들은 과거 민주화 과정에서 진보적인 정책을 지지함으로써 약자를 돕는 일을 했다. 사실 1987년 중산층 시민들이 민주화의 주축으로 등장한 이후, 그들은 점점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진보의 상징적 가치가 높았던 민주화 과정에서 그들은 나름대로 좋은 역할도 했다. 그러나 민주화 과정이 복잡해지면서, 그 말은 점점 말썽거리가 된다. 왜? 과거에는 진보적인 가치를 입에 담기만 해도, 그 제스처를 ‘좋게 사줄 수 있는’ 접점이 많았다. 그러나 점점 그 접점들은 사라졌다.


먼저 강남좌파는 우파와 좌파의 이분법에 의존한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이 이분법에 따르면, 보수가 아니면 거의 자동적으로 ‘진보’였다. 우파든 좌파든 이 전략에 기대왔다. 그러나 보수가 아니면 모두 ‘진보’라고 통칭하는 일은 진보 부풀리기 혹은 진보 인플레에 가까울 것이다. 사실 강남좌파는 유럽식으로 말하면 중도좌에 가깝고 미국식으로 말하면 리버럴에 가깝다.(물론 거꾸로 중도는 저절로 강남좌파는 아니다. 중도 가운데는 자신을 진보라고 자처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래서 모호함과 오해를 피하려면, 강남좌파는 중도좌나 리버럴로 지칭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진보’의 강한 상징적 효과 때문에 강남좌파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따라서 이제 그 말이 했던 모든 역할은 의심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들은 진보의 상징적 가치와 기득권을 공짜로 혹은 이상하게 누리면서, 동시에 보수와 진보의 경직된 진영을 재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마치 정치가 보수와 진보의 단순한 지형 안에서 존재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거기 그치지 않는다. 강남좌파는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중도·중도좌 혹은 리버럴의 층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게 한다. 물론 이 중도와 리버럴은 과거 좌파처럼 정치 영역에서 윤리적 진실을 대표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모호하고 복잡한 행동의 결이 인정되지 않는 한, 대중민주주의는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중도나 강남좌파는, 내가 최근작 <우충좌돌>에서 설명했듯이, 상당히 모호하고 분열된 생활을 한다. 강남좌파를 자처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제 진보를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생활에서도 좌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강남좌파가 생활에서 좌파가 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제로 열심히 지적·문화적·상징적인 자본을 축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저 나쁜 짓도 아니며, 쉽게 비난할 일도 아니다. 다만 사실은 사실대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러니 ‘좋은 사람은 어쨌든 좌파’라는 상징성에 매달리지 말자. 그 대신에 문화적 자본과 경제적 자본을 확보하는 데 열성이면서도 일정하게 공정성을 추구하는 이 중도 혹은 리버럴의 ‘더러운 존재’를 정치적 실존의 차원에서 분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또 자기 자식은 외고나 좋은 대학에 보내면서 말로만 교육의 공공성을 외치는 좌파가 많다면, 강남좌파의 위선을 비판하는 보수의 목소리는 사그라지기는커녕 점점 우렁찰 것이다. 물론 자신들의 보수적 가치(정직과 국가 사랑 등)를 지키지도 못하는 우파가 강남좌파의 위선을 고발하는 것도 우습기는 하지만, 자신을 무조건 진보·좌파라고 자칭하는 강남좌파가 제 덫을 놓는 점도 있다.


강남좌파는 보수에게만 먹이가 되는 게 아니다. ‘자칭 정통 좌파’에게도 그렇다. 좌파도 아니면서 좌파를 내세우니까. 그러나 중도나 리버럴에 속하면서도 진보의 인플레를 조장하는 강남좌파적 전략도 좋지 않지만, 진보를 독점적으로 소유하려는 ‘순수’ 좌파적 관점도 나는 동의하기 어렵다. 전자는 진보를 부풀리고, 후자는 진보를 너무 좁힌다. 전자는 공짜로 막 먹으려 하고, 후자는 먹지도 못하면서 으르렁거린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이질감 주지만 진보 외연 확장에 기여



엘리트주의에 대한 성실한 자기비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배려로 ‘스타일의 정치’ 넘어서야


지난 학기에 전교생 교양과목으로 ‘진보와 보수’를 열었다. 300명이 넘게 신청한 이 강의에서 빈번히 토론된 주제 중 하나가 ‘강남좌파’다. 온라인 토론에서 한 학생은 “이념이란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에 의해 좌우되며, 강남좌파도 좌파의 주류가 될 수 있지 않으냐”고 말했다. 반면 다른 학생은 “요즘 ‘진보’가 세련되고 쿨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식으로 잘못 활용되는데 강남좌파가 그 전형적 사례”라고 비판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가 학생들의 뜨거운 반응이라면, 다른 하나는 긍정적 시각과 부정적 시각이 팽팽히 맞섰다는 점이다. 왜일까. 그것은 강남좌파가 우리 사회 뇌관의 한 부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강남은 이른바 ‘빗장 도시’다.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을 동시에 소유한 이들이 거주하는 공간으로서의 ‘강남’은 사회적 위세를 상징하는 개념이라는 점에서 기존 좌파의 이미지와 충돌한다.


보수든 진보든 강남좌파는 일종의 ‘불편함’을 안겨주는 개념이다. 보수에겐 자신의 배타적 소유물이라 생각했던 강남에서 좌파의 본격적 등장이 반가울 리 없고, 진보에겐 ‘강남’과 ‘좌파’라는 모순적 상징의 충돌이 결국 진보세력을 희화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존재한다. 이 점에서 강남좌파는 서구의 ‘리무진 진보주의자’, ‘샴페인 사회주의자’, ‘캐비아 좌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칭찬이라기보다 비아냥거림에 가깝다.


강남좌파에 대해선 먼저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구분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판단의 관점에서 강남좌파의 등장은 서구 사회 ‘여피 좌파’(yuppie left)의 출현에 대응한다. 여피 좌파는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등장한 진보적 성향의 고소득 사무직과 전문직 종사자들, 즉 ‘문화 좌파’ 또는 ‘골드칼라 좌파’를 지칭한다. 여피 좌파로 변신한 ‘68세대’는 1990년대 중도좌파의 정치적 기획인 ‘제3의 길’의 주요 지지그룹을 이루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강남좌파의 등장은 ‘486세대’의 분화를 보여준다. 고소득 사무직과 전문직이 된 일부 486세대는 앞선 산업화세대의 동일한 계층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진보적 성향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대세론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면서 이 계층이 젊은 시절 품었던 좌파적 가치를 다시 발견한 것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최근 복지국가 담론에 대한 486세대의 높은 지지는 바로 이를 증거한다.


문제는 이들에 대한 가치판단이다. 한편에서 강남좌파는 민주화를 주도한 노동자나 중간계급에게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낯섦과 이질감을 안겨준다. 더욱이 노동운동·시민운동에 헌신해온 이들에게 ‘낡은 좌파’라는 이미지를 부과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일부 지식인 강남좌파가 오피니언 리더로서 진보적 여론 형성에 나름대로 기여하고 있고, 특히 젊은 세대와 중산층 안에서 진보의 외연을 넓히고 있다는 점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강남좌파의 미래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첫째, 강남좌파를 자임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강남좌파로서의 정체성을 갖는 이들은, 좌파적 가치를 지지한다면 ‘자기성찰적 이성’을 더욱 발휘해야 한다. 강남좌파란 말에 담긴 복합적 의미를 고려해 엘리트주의에 대한 성실한 자기비판, 사회적 약자에 대한 더욱 적극적인 배려의 태도가 요구된다. ‘스타일의 정치’를 넘어선, 진보세력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진정성의 정치’를 발휘해야 한다.


둘째, 강남좌파 담론의 등장이 우리 사회 경제·사회 변동과 밀접히 관련돼 있다는 점 또한 주목해야 한다. 예상되는 부동산 거품의 붕괴, 강화되는 퇴출의 공포, 증가하는 노후생활의 불안 등은 이제 사무직은 물론 전문직까지도 시장과 성장보다는 국가와 분배의 역할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한다. 포스트 민주화 시대를 특징짓는 이러한 변화는 차이를 존중하면서도 공존을 모색하는 새로운 ‘성찰적 연대’를 요구한다. 강남좌파 담론이 단지 소비되는 게 아니라 생산적 논쟁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9089.html



강남 좌파, 그들은 누구인가?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8285



Posted by 겟업
2014. 11. 22. 09:39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으려면 여성은 헤픈 여자(Slut) 같은 옷차림을 피해야 한다”는 캐나다 경찰 마이크 생귀네티의 발언으로 촉발된 ‘슬럿워크’(Slut Walk) 운동이 지난 주말 서울에서도 ‘잡년 행진’이란 이름으로 진행됐다. 야한 옷을 입고 거리를 행진하는 ‘슬럿워크’ 운동은 여성들의 옷차림이 성범죄를 유발한다는 남성 위주 시각에 대한 저항운동으로서 의미를 갖지만, 그 방법이나 효과를 두고 다양한 의견도 존재한다. ‘슬럿워크’ 운동을 계기로 우리가 성찰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여성들의 생각을 들어본다.



내면화된 남성적 시선을 깨부수려는 것


6월 어느 날 나의 트친(트위터 친구)이 ‘잡년행진’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그냥 지켜봤다. 스스로를 ‘슬럿’으로 칭하는 것, 야한 옷에 대한 언급, 트위터에서 논쟁의 주제가 됐던 여러 가지 요소가 나를 주저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망설임은 내 안의 고정관념에서 오는 것이라 결론을 내렸다. 성소수자들이 스스로를 ‘퀴어’(Queer)라 부르며 의미투쟁한 것, 레즈비언이 ‘다이크’(Dyke)로 자처하며 자긍심을 가지려 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면, 스스로를 ‘슬럿’으로 호명하려는 여성들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 언급되는 ‘야한 옷’(에 대한 욕망, 혹은 입을 권리)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는 남아 있었다. 사실 나는 여성들이 노출 많은 옷을 입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다. 남성의 성적 욕망만이 존중되고 가시화되는 사회에서 그 욕망의 코드에 충실한 ‘야한 옷’을 왜 여성 스스로 입으려고 하는지, 왜 그 욕망의 대상이 되려고 하는지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서울 명동의 카페 ‘마리’에서 있었던 준비모임에서는 한 참가자가 잡년행진 당일 입을 옷을 고르면서 ‘살을 빼야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내재화된 ‘남성적 시선’을 발견하고 고민에 빠졌다고 했다. 그런 고민을 꺼내놓고 서로 공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두 여성의 몸을 보는 남성의 시선에 익숙해져 있고, 심지어 그 시선을 스스로도 갖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너무 말라서, 너무 뚱뚱해서, 가슴이 너무 작아서, 가슴이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려워 ‘입고 싶었던 야한 옷’을 입기 어려웠던 여성들은 잡년행진 그날만은 자기 자신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멋대로 옷을 입기로 한 것이다. 잡년행진에 동의하는 여성들은 그런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도 성찰하려 했다.


또한 이들은 다양한 목소리의 주체들과 연대해 각종 ‘부정의’를 향해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행진의 대오는 한진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복직투쟁 현장을 방문해 지지를 표했다. 다양한 이들이 행진에 참여했다. 많은 수의 ‘드래그 퀸’(여장 남성)들이 함께했고, 온라인에서 악플로 목소리를 높였던 마초들을 무색하게 할 만큼 많은 수의, 반성폭력 운동을 지지하는 ‘정의로운 마초’들이 함께했다.


잡년행진은 성폭력을 피해자의 책임으로 돌리는 시선·생각·담론을 깨부수려 했고, 동시에 피해자로 스스로를 정체화했던 여성들에게 그야말로 ‘팜 파탈’의 힘을 갖게 하는, 해방구의 부흥회를 하려 했던 것이다. 잡년행진의 메시지는 어떤 옷을 입어도 안전한 거리, 여성이라도 안전한 세상, 더 나아가 그 어떤 약자라도 안전한 삶이었다. 바로 성폭력이 없는, 그 어떤 혐오와 폭력도 없는 평화로운 세상, 윤리가 존재하는 정의로운 세상이었다.


지현 페미니스트 가수 문화연구자


달, 가리키지만 말고 움켜야


왜 지금에야 취재진이 몰려든 걸까? 몇년 전 ‘밤길 되찾기 시위’에서 “야하게 입은 사람이 없어서 찍을 게 없네” 하며 돌아가던 한 기자가 떠올랐다. 무엇을 입든, 언제 어디를 걷든 그것이 성폭력의 이유여선 안 된다고 말한 건데, 달을 보라고 했더니 손가락이 덜 야하네 더 야하네로 설왕설래다.


옷차림을 극적으로 밀어붙인 ‘슬럿워크’를 두고 다양한 의견이 많다. 그런 정체성과 욕망이 있었느냐며 적극 지지하겠다는 사람들과, 성폭력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옷차림 아니냐며 꼭 그렇게 해야겠느냐고 걱정하는 사람들까지. 그러나 하루 동안의 슬럿워크가 만들어 낸 ‘긴장’에 비해 현실은 더 저차원에서 밑돌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해야 할까, 아직 좋아하기 이르다고 해야 할까.


위아래로 훑어보고 만지고 시비 걸고 성폭력하는 것은 계절, 낮밤, 장소, 여성의 나이, 옷차림, 직업에 관계없이 일어난다. 조신하게 입었으면 그랬다는 이유로 표적이 되고, 14년간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했으면 그것을 빌미로 성희롱을 겪게 된다. 목소리가 크면 크다고, 작으면 작다고, 고학력, 저학력, 어린이, 노인, 여름, 겨울… 모든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니 미칠 노릇이다. 성폭력 발생에 마치 합리적인 법칙이 있는 양, 그것만 피해가면 안전할 것인 양 착각하게 하지만 그것은 미리 약속된 게 아니고 사후에 자의적으로 적용된다. 특정한 옷차림으로 최전선에 가 거기서 싸워보기로 하는 것은 상징적인 의미에 가깝다. 모든 옷차림은 이미 최전선에 있는 셈이다.


손가락 모양에 무슨 뜻을 담았는지 설명하느라 지쳤다면, 접어 내리고 대신 주먹을 쥐어 달을 움켜야 하는 건 아닐까.


2004년 처음 열렸던 ‘밤길 되찾기 시위’에서는 유영철 사건과 그의 암묵적 동조자를 향해 소복을 입고 서울 광화문을 행진했다. 2007년엔 최연희 성추행 국회의원을, 2009년에는 장자연씨의 죽음에 책임지지 않은 자들을 불러 세우며 노란 천을 두르고 장맛비에 우비를 입었다. 여성의 몸의 권리와 자유, 그에 대한 억압을 추상적으로 증언하고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고 하루의 행사로 그걸 표현하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만, 구체적으로 이미 벌어진 싸움에서는 비유도 가정도 필요치 않게, 내가 사는 현실이 그대로 말할 수 있다. 그 싸움의 결과가 내 미래에 관련이 있다는 긴장을 몸으로 느끼며.


이번 슬럿워크에서 분출된 에너지가 때로는 고리타분하고 지난한 모습으로, 조직적인 행동으로 계속되었으면 좋겠다.


김혜정 제4회 밤길 되찾기 시위 기획단




‘잡년’ 아니라 ‘난년’일세


캐나다의 어느 경찰관이 벗고 다니니까 성범죄를 유발한다 뭐 그런 말을 했다 들었을 때 이제 그 정도에 일일이 열받을 단계는 다 지났으니까 그냥 신기했다. 게다가 캐나다는 <볼링 포 콜럼바인>이나 <사우스파크> 때문에 좋은 나라라고 생각했는데 이것 참.


어쨌거나 여성들의 노출이 진정 성범죄의 원인이라면 캐리비안베이 같은 곳에는 지금쯤 수면 위에 시체가 여러 구 둥둥 떠다녀야 할 텐데, 어쨌거나 전세계의 여성들은 헐벗고 백주대낮에 걸어 다니며 ‘너 보라고 벗은 거 아니거든’을 외치기 시작했다. 여성의 노출 의상이 남성을 자극해 성범죄가 일어난다는 어떤 남성들의 논리는 짜증이 나다 못해 이제는 점점 신기하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여성이 몸을 노출하는 의상을 입는 것은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고 그만 유혹을 느낀 남성이 욕망을 자제하지 못해 범죄가 일어난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여기에 남성이 제1의 성으로 군림하고 있는 비결이 있다. ‘여성이 몸을 드러내는 의상을 입는 것은 남성을 유혹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이야기는 사실 ‘너희가 지금 벗은 것은 나를 꼬시려고 그런 것이지!’라는 말인데, 이 자신감! 놀라운 자신감! 자신에 대해 끝없이 긍정적인 이 자세! 이것야말로 우리 여자들이 반드시 배워야 할 점이다.


여하튼 한국에서도 ‘슬럿워킹’이 열렸는데, 평소 ‘슬럿리빙’을 하느라 마음으로 응원만 보냈다. 슬럿리빙이 뭐 별건 아니고, 내가 헐벗고 다닐 때 혹시 야단치거나 함부로 만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꼭 혼이 쏙 빠질 정도로 괴롭혀 주는 게 ‘슬럿리빙’이다. 굳이 내 성질이 더러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어떤 여자에게 그런 짓을 했다가 크게 덴 경험이 있어야 다음번에 다른 여자에게 그러려다 망설이기라도 하기 때문이다. 여성간의 연대가 별건가, 내가 확실히 해 놔서 나중에 놈들이 누굴 조지려다 아차 그때 걔처럼 미친 애면 어떡하지? 안 되겠다 하고 주저하게 만들면 슬럿리빙은 한 건 성공이다. 그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미친 여자’니까. <위험한 정사>의 글렌 클로스처럼, 미친 여자들은 놈들 집의 토끼를 삶아 버리고 나중에 총을 맞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다.


백주대낮에 헐벗고 거리를 점령한 자매들을 보니 오랜만에 무척 즐거웠는데, 단 선글라스나 가면으로 꽁꽁 가린 건 살짝 아쉬웠다. 게다가 ‘잡년’이라니 너무 겸손했다. 누가 뭐래도 여러분은 ‘난년’이다. 난년 여러분, 힘내시라. 월드컵 응원할 때나 좀 벗어도 뭐라고 안 하는 이놈의 나라에서 우리, 평소에도 즐겁게 막 벗자. 이게 다 애국애족이다.


김현진 에세이스트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8082.html

Posted by 겟업
2014. 11. 21. 22:59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2015년부터 초·중·고교에서 종이책 교과서를 없애고 태블릿 피시 등 디지털 기기로 수업을 진행한다는 내용의 ‘스마트교육 추진전략’을 발표했다. 학생들은 무거운 책가방을 내려놓고 디지털 교재를 이용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까지 너무 컴퓨터에만 몰두하면 인성교육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우려할 정도로 디지털 교재 전환에 대한 걱정의 목소리도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스마트교육의 기대 효과에 대한 전문가들의 긍정·부정적 견해를 싣는다.



창의력 기르기 위한 스마트교육


우리 사회는 창의적 학습 사회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다. 정보기술 발전에 따라 정보 활용 및 처리 역량이 향상되어 개인과 사회의 생산성이 크게 증가했다. 또 인터넷에서의 활동도 달라졌다. 지식의 단순 소비자를 넘어 지식의 공개·공유와 협업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프로슈머(참여형 소비자)로 살게 되어 창의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그동안 내부적으로 우리 교육에 대한 여러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지만, 피사(PISA)나 팀스(TIMSS) 등 국제비교평가에서는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특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피사 연구에서 한국의 학생들은 인터넷 상황에서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즉 디지털능력(DRA·Digital Reading Assessment)에서 월등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학업성취는 높은 반면 창의적 문제해결력, 학습만족도, 학습흥미도 등에서는 평균 이하로 매우 낮게 나타났다. 이는 우리 교육이 창의력, 문제해결력, 글로벌 역량, 공동체 의식 등을 갖춘, 21세기에 요구되는 스마트 인재 양성보다는 여전히 대학입시를 위한 주입식 위주의 교육에 치중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간 과목별로 정해진 교실을 돌아다니며 수업을 듣는 교과교실제 수업이나 선택교과제 등 학생 중심으로 학교정책이 다양화된 것에 비해, 교실 현장의 수업은 더디게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의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스마트교육 정책이 수립되었다. 스마트교육이란 21세기 학습자 역량 강화를 위한 지능형 맞춤학습 체제로, 교육의 환경·내용·방법·평가 등 교육체제를 혁신하는 동력이다. 스마트교육 정책의 내용은 기술 도입보다 정책 변화가 중심이 된다. 스마트교육이란 표준화된 지식이 아니라 개별화된 학습을 지원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는 장소이다. 개인의 학습을 유연하게 맞춤형으로 구현하고, 집단 지성과 소셜 러닝 등의 방법을 활성화하여 같이 배우는 협력학습을 중시한다. 따라서 체험 중심, 현실에 기반한 문제해결 중심,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내용을 학습할 수 있는 스마트환경이 교수학습 방법으로 사용된다. 이를 위해 디지털 교과서를 보급하고, 이러닝(E-learning)을 정규 수업으로 인정하고, 컴퓨터로 평가를 하는 시스템을 제공하게 된다.


과학기술이 인류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쳤음에도, 기술 발달이 정책에 의해 방해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자동차 기술은 자동차가 마차보다 빠르게 갈 수 없다는 레드플래그법 때문에 미국으로 기술이 이전되어 미국 경제를 부흥시키는 대표 기술이 되었다. 정책적 지원이 없으면 새로운 교육 시장을 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사장될 수도 있다. 스마트교육의 성공은 우리의 또다른 미래 먹을거리가 될 것이다. 핀란드 교육이 피사에서 거둔 성공으로 관광산업에 큰 기여를 할 수 있었듯이 우리는 스마트교육의 성공으로 새로운 시장을 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정보통신 강국 이미지와 국제비교평가에서의 우수한 성적(디지털 능력)은 스마트교육을 한국의 브랜드 교육으로 만들 수 있는 호재이다.



수년 전에 만들어진 종이 교과서에는 최신 자료도 부족하고 동영상도 없다. 멋진 사진을 확대해 보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질문을 할 수도 없다. 이미 스마트기술로 길들여진 학생들에게 이러한 교실 수업은 답답하고 획일적이다. 교사들에게도 그 답답함은 마찬가지이다. 멋진 수업을 하고 싶어도, 매번 그 많은 자료를 무슨 수로 찾아서 수업에 임할 수 있겠는가?


스마트교육 정책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수많은 섬세한 세부사항들이 함께해야 한다. 교사들이 교육적 변화에 동참하고 적극 참여해줄 때 정책이 성공할 수 있다. 컴퓨터를 활용한 수업이 컴퓨터게임으로 이어질까 걱정하여 학생들이 컴퓨터를 만지는 것을 극히 꺼리는 학부모들의 이해 없이 이 정책이 성공할 수 없다. 수많은 멀티미디어 자료들의 저작권에 대한 해결 없이 스마트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다. 스마트교육은 있는 자를 위한 교육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기회의 평등으로 종식될 때 스마트교육이 성공할 것이다.


이옥화 국가정보화전략위원 충북대 교육학과 교수



교실혁명 선행 없인 부작용만 클 것


교육과학기술부의 계획에 따르면 상상 속의 미래학교가 2015년이면 이루어진다. 종이책 교과서도 사라지고, 선생님 없이도 인터넷만 연결되는 공간이면 어디서나 학습이 가능하고, 평가 시스템도 달라져 전국적인 일제고사나 학교시험도 온라인으로 이루어지고, 학교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 3차원(3D) 입체영상 체험까지 하면서 현실과 가상공간이라는 학생들의 학습공간이 마련되어 스마트한 교육이 완성되는 것이다. 사교육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주호 장관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정보통신기술과 삼성·엘지(LG)·케이티(KT)의 다양한 첨단기기를 이용하면 획일적인 입시교육에서 탈피해 지능형 맞춤수업 체제가 일반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사회에서는 학교가 아예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한 학자들도 있으니, 학생들이 세계 1위의 디지털 읽기 소양능력을 가진 한국 사회에서 가능할 수도 있는 청사진이다.


정말 그럴까? 2015년까지 총 2조2280억원을 투자하여 스마트교육을 완성하면 학교 현장에서 교실혁명이 일어날 수 있을까? 1997년부터 2008년까지 교육정보화 사업과 컴퓨터, 교단선진화 기기 등 인프라 관련 사업에 투자한 돈이 총 6조7659억원이지만 학생들은 학습흥미·자신감·동기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이하이고 사회·국가에 대한 인식은 최하위 수준인 게 현실이다. 최근 교과교실제로 전자칠판, 전자(CD)교과서까지 등장했지만 사용하는 교사는 많지 않다. 오히려 학생 참여형 프로젝트수업, 토론수업, 오감활동을 통한 표현수업으로 ‘잠자는 학생’들에게 호기심과 배움의 즐거움을 주며, 수업 전문성을 쌓아가고 있는 참교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또한 스마트교육은 인터넷의 상업적 공간에 학생들을 줄세우기 할 게 뻔하다. 그 하나는 대부분의 아동·청소년을 인터넷 중독으로 내몰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행정안전부의 ‘2010년 인터넷 중독 실태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의 인터넷 중독이 9명 중 1명꼴이고, 저학년으로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다. 또한 고위험군도 다문화가정, 한부모가정 등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매년 2~3배씩 증가하고 있다. 이제 시공간을 초월하여 아동·청소년들이 합법적으로 공부와 시험이라는 미명하에 정보기술(IT) 기기의 노예가 되고, 게임이나 음란물, 사이버폭력에 교사와 부모의 눈을 피해 노출되는 범위도 확대될 것이다.


둘째는 매년 저소득층에 컴퓨터와 인터넷 통신비를 지원해왔다고 하지만, 돈이 없어서 스마트교육에서 소외되는 계층도 증가할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정보화진흥원 등에 따르면 개인용 컴퓨터(PC) 보유율이 장애인 71.2%, 저소득층 64.7%, 농어민 58.7% 등으로 나타났다. 사회계층 간에 정보격차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학교교육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아빠 스마트폰으로도 공부가 가능한 스마트교육이 아니라, 개인별 맞춤형 교육을 할 수 없는 교실 환경의 혁신적 개선이 먼저다. 전교생이 1800명, 학급당 학생 수가 40여명에 이르는 대도시의 과밀·거대학교에서 창의성과 협동심, 바람직한 인성을 배우는 것은 한계에 부닥쳐 있다. 스마트한 교실혁명도 불가능한 환경이다. 지난 교육정보화 사업처럼 각종 스마트기반 기기의 활용보다 수리·보관·유지의 어려움 또는 도난·분실 염려로 학생 접근을 통제하는, 전형적인 예산낭비 사업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학교에 오지 않고 올빼미가 되어 컴퓨터와 생활하는 아동·청소년이 많아질지도 모른다. 학교 현장은 국내의 이런 시장을 확대하려는 정보기술업체나 사교육산업, 스마트교육산업의 경쟁 장소로 오염될 것이다. 스마트기기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참다운 배움과 돌봄, 책임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는 학교운영 시스템과 학습생태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다.


미래의 핵심 역량은 단순히 웹페이지에 있는 정보를 수집하고 적용하는 능력만이 아니다.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은 토론 활동, 문화·예술·체육 활동, 영성 훈련, 노작 활동, 민주주의 교육 등을 통해 개개인의 독특한 색깔을 지닌 창의적 인재를 기르는 것이다. 미래학교는 창의성과 인성, 사회성, 생태적 감수성을 지닌 학생들이 즐겁게 어울리는 생활공동체 학교여야 한다.


이영탁 참교육연구소 기획실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542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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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9. 06:27

정부가 내수 활성화를 위해 공휴일이 중복되면 다음날 하루를 더 쉬는 ‘대체휴일제’ 도입을 검토하기로 했다. 관광산업계는 “여가 관광 수요가 확대된다”며 환영하고 있고, 재계는 “비용 증가”를 내세우며 반대의 뜻을 밝혔다. 대체휴일제를 연구해온 대표적 기관인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의 의견을 들어본다.



삶의 질 개선과 소비 활성화에 기여



내수경기 활성화를 넘어서 대체공휴일제의 더 큰 의의는 헌법상 행복추구권에 포함된 휴식권리에서 찾을 수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시행중인 대체공휴일제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공휴일제도의 근본적인 문제점 해소를 통한 국민 삶의 질 개선과 경제성장에 대한 민간소비 기여도 증대의 필요성 때문이다.


대체공휴일제는 항간에서 오인되고 있는 것처럼 공휴일 수를 현행보다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규정되어 있는 연간 14일의 공휴일 수를 매년 동일하게 유지하려는 취지의 제도이다. 우리나라의 명목상 공휴일 수는 미국(14일), 일본(15일), 독일(15일) 등 주요 선진국과 유사한 수준이지만, 실제 공휴일 수는 6~11일에 불과하다. 외국에서는 ‘10월 둘째 주 월요일은 콜럼버스의 날’과 같은 ‘요일 지정 방식 휴일제’와 대체공휴일제를 통해 연간 공휴일 수를 철저하게 보장하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5월5일 어린이날’과 같이 ‘날짜 지정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공휴일과 토·일요일의 중첩이 불가피하다. 이런 근본적인 한계 때문에 연간 3~8일의 편차가 발생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실제 공휴일이 14일인 해는 전무후무하므로, 선진국과의 명목상 공휴일 수를 직접 비교하며 공휴일이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최근 내수 활성화를 위한 장·차관 국정토론회에서 대체공휴일제 시행 검토 방안이 발표되자, 다음날 여행 및 레저를 비롯한 내수업종과 건설업 주가가 일제히 상승세를 기록하였다. 향후 민간소비 증대에 대한 투자자들의 기대심리가 반영된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휴일과 내수경기의 연관성에 대한 의문에 좋은 해답을 던져줄 것으로 판단된다.


소비위축으로 촉발된 경기불황인 경우 생산 측면보다는 소비촉진을 위한 정책이 필요한데, 현재와 같이 국가재정과 가계소득의 한계가 존재하여 자금이 정체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통상적인 경기부양책의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때 시중자금을 회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 촉진제가 필요한데, 바로 휴일이 소비자의 지갑을 열게 하여 경제가 순환하도록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제도 시행 초기부터 전체 국민의 소비가 즉각적으로 증가하는 효과는 기대할 수 없겠지만, 일부 소비라도 발생하게 되면 유통·생산업의 판매량 및 이윤 증대, 고용 증대, 가계소득 증대, 정부 세수 증대 등으로 순환될 수 있다.


경제계를 비롯한 사회 일각에서는 대체공휴일제 도입 때 약 11조~12조원의 기업비용이 발생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으나, 내수경기 진작 및 근로자 휴식권리 보장을 통한 산업재해 감소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총편익은 약 35조5000억원이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 바 있다. 따라서 기업비용을 계산하더라도 약 24조원의 순편익이 발생하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40시간 근무제 시행 후 유통업, 엔터테인먼트업, 여행업과 연관 산업의 매출이 증가한 바 있으며, 프랑스·미국·일본·중국이 각각 경제대공황 및 극심한 경기불황을 휴일정책을 통해 극복한 사실이 존재하므로 휴일정책의 내수경기 활성화 효과는 일반적인 경기부양책보다 더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대체공휴일제 도입의 더 큰 의의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행복추구권에 포함된 국민의 휴식권리에서 찾을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노동자 1인당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300시간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며, 최하위인 네덜란드보다는 무려 500시간을 웃돈다. 장시간 노동은 업무 스트레스를 강화하고 집중도를 떨어뜨려 각종 업무 관련성 질병·재해를 유발함은 물론 가족 결속력 약화 등 삶의 질 하락의 주된 원인이 된다고 분석한 보고서도 나와 있다. 따라서 국민의 건강과 삶의 질 개선을 위해서 예측 가능한 휴식권리를 보장해야 할 필요성도 있는 것이다.


경제계는 생산 측면을 강조하지만, 가계는 기업에 노동력 및 자본을 제공하는 생산요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업이 생산한 상품을 구입하는 소비자이기도 하다. 즉, 거시경제모형 측면에서는 가계와 기업의 균형이, 그리고 국민 개인 측면에서는 노동과 여가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이성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원





놀면서 경제성장 이룰 수 있나



시급제나 일당제를 적용받는 취약 근로자는 임금이 줄 수 있다

오히려 연차휴가 사용률 제고가 몇 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최근 ‘지역·서민경제를 위한 국내관광 활성화’라는 명분하에 정부 차원에서 대체공휴일제 도입을 검토중이라고 한다.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체공휴일제는 별다른 실효성 없이 기업과 국가경제에 부담만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높은 일종의 ‘복지 포퓰리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공휴일제 도입을 요구하는 쪽에서는 우리나라의 휴일 수가 선진국보다 부족하고, 대다수 선진국이 요일제 휴일 또는 대체공휴일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관광산업 활성화를 통한 내수경기 진작을 위해 대체공휴일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이다. 결론적으로 대체공휴일 도입시 내수 진작 효과보다는 생산 차질로 인한 전체 국가경제적 손실이 훨씬 클 것으로 추정되고, 우리나라 휴일 수는 선진국에 비해 결코 적지 않다.


휴일을 늘려 관광산업을 활성화함으로써 국내총생산(GDP)을 증가시킨다는 논리는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어떻게 휴일을 늘려 일을 안 하는데 국내총생산이 증가할 수 있는가? 늘어난 휴일에 모든 근로자들이 일을 안 하고 쉬고, 그중 일부가 여가 활용에 돈을 쓴다고 국내총생산이 늘어날까? 상식적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이는 선진국에 비해 취약한 노동생산성을 근면으로 보완해 온 우리나라 실정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논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휴일 수가 부족하다는 주장도 납득하기 어렵다. 우리나라의 법정 공휴일은 연간 15일에 달하는데, 이는 미국 등 선진 6개국 평균 11일에 비해 4일이나 많다. 향후 10년간 연평균 2일의 공휴일이 중복된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선진국보다 2일 더 많은 것이다. 법정 휴가제도까지 고려할 경우 우리나라의 연간 휴일·휴가일 수는 134~144일에 달하며, 이는 선진 6개국 평균에 비해 최대 9.5일 더 많다. 우리나라 경제 수준을 고려하면 오히려 휴일을 줄여야 할 상황이다.


더구나 대체공휴일제 도입은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는다. 대체공휴일 도입을 찬성하는 쪽은 제도의 실효성 확보를 위해 현재 공무원에게만 적용되는 공휴일을 민간에 강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1개국 중 공휴일을 민간에게 강제하는 나라는 2개국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는 오이시디 국가 중 유일하게 유급휴일제도를 채택하고 있어 공휴일 확대에 따른 기업의 부담이 매우 크다. 유급휴일제도란 일을 하지 않아도 평일의 100% 임금을 지급하는 제도로, 이로 인해 선진국의 경우 휴일근로에 따른 임금이 대부분 150% 이하에 불과한 반면, 우리나라는 휴일 근무 때 250~350%에 달하는 임금을 지급하여야 한다. 특히 올 7월부터 20인 미만 영세기업에 주 40시간제가 시작되는 상황에서 대체공휴일제까지 도입될 경우 중소·영세기업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될 것으로 우려된다.


정부가 금번에 대체공휴일제 도입을 검토하면서 내건 명분 중 하나가 ‘서민경제’이다. 과연 대체공휴일제 도입이 서민경제를 위한 것인가? 대체공휴일제로 정규직 휴일이 확대되면 임시·일용직 등 취약계층은 오히려 피해를 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휴일이 늘어도 소득이 줄지 않는 정규직 근로자와 달리, 시급제나 일당제를 적용받는 취약 근로자는 임금이 감소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자영업자 또한 마찬가지이다. 단적으로, 1700만명의 임금근로자가 점심을 사먹는 식당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의 소득 감소는 누가 보전할 것인가? 경총 조사에 따르면, 일용직·자영업자 등 서민·취약계층의 85.3%는 소득 감소 등을 이유로 들어 대체공휴일제 도입에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근로자의 휴식을 늘리고 관광산업을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이 대체공휴일제 도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연차휴가 사용률을 제고할 경우, 별다른 부작용 없이 대체공휴일제 도입의 몇 배에 달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럼에도 대체공휴일제 도입만을 요구하는 것은 정규직의 이익을 위해 기업과 서민·취약계층의 부담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호성 한국경영자총협회 상무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3795.html

Posted by 겟업
2014. 11. 17. 06:24

논쟁 최근 보건복지부가 종합감기약, 해열진통제, 소화제 등 일반의약품을 약국 외에서도 팔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진수희 장관은 애초 일반약의 슈퍼 판매가 어렵다는 뜻을 나타냈다가,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에 다시 판매가 가능하도록 추진하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슈퍼의 약 판매 논란은 의약품 구입에서 ‘편의·효율성’을 강조하는 쪽과 ‘안전성’을 강조하는 쪽이 오랫동안 대립하고 있는 사안이다. 이에 대한 찬반 양쪽의 견해를 들어본다.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인프라 구축해야


현재 보건의료는 과거와 달리 쌍방향 정보교환으로 이뤄지고 외국에서는 이를 반영해 다양한 자가치료 인프라를 구축중이다.


올해 들어 일반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그동안 방향을 잡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던 보건복지부가 국민의 의견을 수렴해 일반약 약국 외 판매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 문제를 둘러싼 논의는 지난 20여년간 끊임없이 제기돼 왔으며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제자리걸음으로 끝난 전례가 있지만, 이번에는 과거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 기대한다.


누구나 한번쯤은 심야시간, 공휴일, 또는 외지에 여행을 갔을 때 경미한 증상이지만 그냥 참기에는 불편하고 간단한 상비약은 없고 응급실에 가기는 망설여지면서 고생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일반의약품 약국 외 판매에 관한 논의는 가장 먼저 ‘의약품의 안전성이냐, 국민의 편의성이냐’에 대한 판단일 것이다. 그러나 국민 보건의료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안전성·접근성·비용 모든 측면에서 효율이 가장 높다고 판단되는 의약 정책을 만드는 것이지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는 아니다.


의약품 안전성 측면만을 보면 약사법과 일반약 분류기준에서 일반의약품은 ‘오·남용의 우려가 적고 부작용이 비교적 적고 유효성과 안전성이 확보된 의약품으로, 주로 가벼운 의료 분야에 사용되며 일반국민이 자가요법(self-medication)으로 스스로 적절하게 판단해 직접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돼 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국민이 약국 외 판매를 원하는 품목은 가정상비약 수준의 의약품 정도이다. 그럼에도 일부 약사는 어떤 회사의 드링크류는 카페인이 함유돼 있어 심장 등에 무리를 줄 수 있으므로 복약지도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식이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이 드링크 한 병에 포함된 카페인은 약 30㎎으로, 커피전문점에서 파는 커피 한 잔에 들어있는 양의 10%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의약품 사용 실태를 보더라도 일반 가정의 약 90%가 가정상비약을 보유하고 있으며, 특별한 복약지도 없이도 가정상비약을 사용해 일정 정도의 자가치료를 행하고 있다. 식약청 자료를 보면, 2000~2008년 발생한 가정상비약 부작용 사례는 간 손상이나 위장출혈 등 17건이 보고된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약사가 의사의 처방을 오독해 처방보다 5배 많은 함량의 전문의약품을 조제해 사망한 사고가 최근에 일어난 바 있다. 2008년 기준 조제 건수가 총 4억2000만건이 넘으며, 이 과정에서의 실수는 환자에게 치명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다. 국민이 약 복용의 안전성에 우려하는 것은 그런 데서 생긴다.


국민의 70~80%가 일반약의 약국 외 판매를 요구하는 것은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국민 의식수준의 향상 및 다양한 건강정보 접근성 확대, 자기 건강 결정권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면서 발생한 자연적인 현상이다. 과거의 의료가 일부 전문인의 독점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뤄졌다면, 현재의 보건의료는 개개인이 자기 건강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쌍방향으로 정보를 적극적으로 교환하면서 이뤄지고 있다. 외국에서는 이를 반영해 다양한 자가치료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세계보건기구는 자가치료를 “자신의 책임 아래 경미한 신체의 부조는 자신이 치료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의약품 접근성의 확대, 사회적 차원의 건강 캠페인, 건강 증진 프로그램 활성화 등이 그 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2008년 11월 기준 전국 약국 2만831곳 중 8.4%인 1752곳만이 군 단위의 지역에 분포하고, 전국의 215개 기초행정구역(1개 읍과 214개 면)에는 최소한의 약품을 구입할 수 있는 시설이 없는 등 실질적인 국민 편의 및 자가치료 환경은 열악한 실정이다.


최근 정부는 가정상비약을 약국 외에서 팔 수 있도록 ‘전문의약품(의사 처방약)-일반의약품(약국 판매약)’으로 돼 있는 의약품 분류기준에 ‘자유판매약(약국 외 판매약)’을 넣는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약사법 개정이라는 국회의 절차가 남아 있는 상황에서 아직 이 논의는 진행중이며 국민의 지속적인 관심이 더욱 요구되는 때다. 이 논의를 시작으로 보건의료의 주체인 국민이 중심이 되어 국민이 요구하고 원하는 보건의료 체계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정승준 한양대 의대 교수





약을 쉽고 편하게 사는 건 옳지 않다



밤에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난다고 슈퍼에서 해열제를 사서 먹였다가 복막염 등의 치료시기를 놓친다면 그때는 누가 책임질 것인가?


어제 약국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젊은 아기 엄마가 아이를 안고 지나가다가 꾸뻑 인사를 하면서 “이 아이가 약사님 때문에 생긴 아이예요”라고 했다. 지난해 언젠가 피임약을 사러 약국에 왔을 때 내가 “사람 몸은 기계가 아니라서 잠그고 싶을 때 잠그고, 열고 싶을 때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 가운데 원인 모를 불임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결혼을 앞둔 사람이 피임약을 함부로 먹으려 하느냐”라고 하면서 약을 안 줬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피임약을 안 먹었더니 몇 주 지나지 않아서 임신이 확인됐고, 그렇게 해서 그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약사님 평생 기억할 거예요. 약사님 덕에 탄생한 생명이니까요”라는 아이 엄마의 말을 듣고는 오랜만에 약사가 된 보람을 느꼈다.


약국에 있으면 재미있는 일도 참 많다. 지금은 고등학생이 된 딸이 어릴 때 약국에 왔을 때 어느 손님이 “쥐약 주세요”라고 하는 말을 듣고는 “엄마, 그 아줌마 집에 쥐가 아픈가 봐”라고 했던 이야기는 지금도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약국은 약만 파는 곳은 아니다. 아이 엄마가 장 보러 왔다가 유모차를 맡겨 두고 가기도 하고, 할머니들이 마실 나왔다가 잠시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갈수록 약국은 약 타러 가는 곳이 되고, 약사는 의료인이 아닌 약 판매 상인으로 격하되고 있는 현실 앞에서는 맥이 풀리곤 한다.


지금 정부에서는 국민 편익을 위해 일반의약품 슈퍼 판매를 추진하려 하고 있다. 연일 일부 언론으로부터 약사는 주민들 불편에도 아랑곳없이 자기 밥벌이를 위해 약을 독점하고 있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몰리고 있다. 과연 그런가? 의약품 오·남용 1위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의약품을 누구나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과연 옳은 정책인가? 밤에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거나 복통을 일으킨다고 원인도 모르면서 슈퍼에서 해열제를 사서 무작정 먹일 수 있도록 했다가, 만약 복막염이나 다른 응급한 상황이 일어나서 치료 시기를 놓치는 일이 발생한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응급환자의 안전성과 편의성을 동시에 해결하려면 ‘심야 의원제’를 도입해 동네 의원들이 당번제로 문을 열도록 하고, 그에 따라 그 병원 인근의 약국도 자연스레 문을 열게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옳은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휴일에 계속 복용하고 있는 당뇨나 혈압약이 갑자기 떨어져 병원 문을 열 때까지 먹을 약 한두 알을 줄 수 없느냐고 부탁하는 환자들을 위해 동일처방은 리필할 수 있도록 하는 ‘동일처방 리필제’도 실시되었으면 한다.


지식경제부에서 슈퍼 판매 논의가 나오자 증시에서 제약주가 요동을 쳤다고 한다. 약은 정말로 많이 팔기만 하면 좋고, 편하게 살 수 있기만 하면 좋은 것인가? 지난해 12월부터 병원과 약국들은 의약품처방조제지원(DUR) 제도를 따르고 있다. 이 제도는 여러 병원이나 약국들이 환자에게 중복해서 투약하는 진통제나 항생제 등의 약들을 걸러내고 그렇게 걸러진 내용을 다시 의약인들이 의논해서 국민들의 건강을 중복 확인하기 위해 시행된 제도로, 의약품 오·남용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일반약의 슈퍼 판매가 불가하다고 결정했던 데는 의약품 오·남용을 줄이려는 기존 정책과 명백하게 상반되는 정책을 동시에 시행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대통령이 이런 결정에 대해 진노하셨다고 한다. 의약품 오·남용이 이렇게 심각한 나라에서 이런 졸속 조처를 채택하지 않는다고 대통령이 진노하셨다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통령은 좀더 중요하고, 진정 진노해야만 할 일에 “나는 대통령이다”라며 진노하셨으면 좋겠다. 제발 부탁드린다. 생명을 구하고 건강을 지키는 일을 보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믿고 의지하는 많은 아픈 사람들에게 더 이상 상처를 주지 않도록 더 신중해주셨으면 좋겠다.


나는 진로를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약사라는 좋은 직업을 권하고 싶다. 갈수록 힘들고 어려워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약사는 참 좋은 직업이다. 나는 오늘도 그냥 약사이고 싶다.


김미정 약사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2692.html


Posted by 겟업
2014. 11. 15. 22:44

과거 일부 사학이 주장해 파문이 일었던 ‘기여입학제 논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8일 김황식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기여입학제가) 가난하고 능력 있는 학생들을 위해 100% 쓰인다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는 “논의된 바 없다”고 못박았지만, 찬반론자 사이에서는 ‘이제는 도입해야 할 때’라는 의견과 ‘사실상의 교육 카스트’라는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찬반양론을 들어본다.




기여입학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요즘 대학 등록금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여당의 원내대표가 추락하는 지지도를 회복해볼까 하는 기대에서 느닷없이 꺼내 든 ‘반값 등록금’ 카드가 일파만파를 일으키며 촛불시위로 비화하는가 하면, 언론은 앞을 다투어 우리나라의 대학과 교수들을 싸잡아 질타한다. 이러한 비판 중에는 극히 소수의 부정적인 사례를 침소봉대한 부분도 있고, 대학이 겸허히 수용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대학의 구성원으로서 송구스런 마음도 있고 다른 한편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반값 등록금을 제안한 여당도 정부도 모두 뾰족한 해결책은커녕 명확한 문제의식조차 없는 듯 보이며, 야당은 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생각만 하는 듯하다. 이런 와중에 며칠 전부터 기여입학제가 재론되기 시작했다. 사실 ‘기여입학제 불가’는 과거 참여정부가 일관되게 채택한 3불 정책의 하나였다. ‘대학 입학권을 돈 주고 산다’는 것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 거부의 논리였다. 이는 다수 국민들의 정서이기도 했다. 현재도 많은 사람들은 기여입학제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사실 필자도 이 글을 쓰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대학 입학을 돈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는 입장에 찬성하는 것처럼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기여입학제에 대해 진지하고 신중하게 재고해볼 때인 것 같다.


우리나라 대학의 절대다수는 국고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립대학이다. 일전에 여당의 원내대표가 ‘기부금의 활성화’ 운운했는데, 우리 대학의 현실을 전혀 모르는 발언이다. 우리 현실에서 대학에 대한 기부는 극소수의 최고 명문대학에 집중된다. 기부할 사람은 생각이 없는데 대학이 기부를 요구할 수도 없고, 요구해 봐야 아무런 실효도 거둘 수 없다. 어떤 정치인은 대학보고 수익사업으로 재정을 충당하라고 하지만, 이 또한 무지의 소치다. 미국의 명문대학들은 주식투자를 통해 엄청난 수입을 올린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하버드대의 경우 가장 큰 수익사업은 토지 임대업이다. 더욱이 우리의 대학들보고 주식에 투자하라는 것은 위험한 도박을 하라는 주문이나 다를 바 없다.


대부분의 우리 대학들은 상시평가체제로 인한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받기 위해 가장 절실한 것은 재정이다. 그간 부지런히 교육시설과 연구 인프라 구축에 투자했음에도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다. 돈 쓸 데는 많지만 이를 구할 수 있는 경로는 제한되다 보니 대다수의 사립대학들이 등록금에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여입학제는 등록금 부담을 경감하는 대안으로 활용될 수 있다. 기여입학의 대상은 정원 외로 하고 그 상한선은 물론 일정한 자격기준을 명시하며, 기부금은 오직 장학금으로만 사용하자는 것이 필자의 구상이다. 기부자의 직계 자녀는 기여입학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든지, 기부 일시로부터 일정 기간이 경과한 뒤 기여입학을 허용하는 것도 이 제도의 남용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부자들이 돈으로 자녀들을 대학에 입학시킨다’는 생각에서 ‘부잣집 자녀 하나를 기여입학시킴으로써 수십명의 어려운 학생들을 장학금으로 공부시킨다’고 발상을 전환해볼 수는 없을까?


보기에 따라서는 현재 소수의 명문 사립대들이 채택하고 있는 예체능 우수자 선발도 일종의 정원 외 특별선발이라는 점에서 기여입학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더욱이 예체능 우수자들이 이들 대학의 홍보에 기여한다면, 기여입학제는 어려운 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


지난 10년간의 대학 등록금 인상 추이를 관찰해보면, 참여정부 시절의 인상폭이 가장 컸음을 알 수 있다. 2004년 579만원이던 사립대 등록금 평균이 2008년에는 739만원으로 4년 사이에 260만원이 증가했는데, 2010년엔 평균 754만원이다. 참여정부가 대폭적인 인상을 주도했을 리는 없겠지만, 이 기간 정부의 대학정책은 좀더 면밀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에 대한 가정법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러나 참여정부가 기여입학제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했다면 지금의 등록금 사태는 어떤 양상을 띠고 있을까 궁금하다.



이성호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



부유층이 반값 등록금에 기여하는 법



지난해에만 학자금 대출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 신세가 된 대학생이 5만3000여명에 이른다. 취업포털 ‘커리어’가 최근 대학생 65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48.9%가 ‘등록금 마련을 위해서 다음 학기 휴학을 고려하고 있다’고 답했다.


대학이 정상적인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 문제의 해결 방안으로 김황식 총리는 황당하게도 기여입학제 도입을 언급하고 나섰다. 국민 여론과 사회적 합의를 고려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부유층에게 기여입학금을 받아 등록금 인하에 쓰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입장이다.


기여입학제는 이명박 정부가 3불 제도(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금제 금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웠지만 집권 이후 국민 여론을 의식하여 추진을 사실상 포기했던 정책이다.


이 제도가 도입되지 말아야 할 첫째 이유는 우리 사회가 부모를 잘 만나야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처럼 통합 전형자료 중의 일부로 기여금을 고려하는 제도를 도입한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부모의 경제력과 신분이 대학을 결정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게 되는 것이다. 국제중학교와 자율형 사립고 제도로 중·고등학교에서도 교육의 계층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인데 대학에서 기여입학금 제도마저 허용된다면 그나마 형식적으로 유지돼온 ‘교육 기회의 평등’까지도 허무는 것이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가 21세기 한국 사회에 교육제도라는 이름으로 도입되는 격이다. 헌법 31조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다”에 담긴 뜻은 결코 부모의 경제력 능력에 따라 교육받을 기회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둘째, 대학의 빈익빈부익부 구조를 심화시키게 된다. 미국의 경우에도 이 제도는 하버드대학 등 일부 사립대학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도 부유층이 거액의 돈을 내고 자녀를 보내려고 하는 대학은 일부 상위권 대학일 것이다. 이번에 반값 등록금 문제가 제기되면서 ‘조중동’조차도 일부 사립대학의 과다한 적립금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기여입학금은 일부 대학에 편중되고 지방의 사립대학과는 거리가 멀게 되면서 대학의 서열화를 더욱 부추기게 될 것이다.



교육전문지 <오늘의 교육> 5·6월호는 특집으로 ‘대학의 교육 불가능’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읽은 어느 학생의 수기에 “아르바이트는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일이고, 장학금은 사연을 팔아 학자금을 마련하는 것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지금도 부모가 가난한 학생들은 온몸으로 경제력의 차이에 따른 차별을 받으면서 대학을 다니고 있다. 대학 입학 과정에서부터 원천적인 차별이 존재하게 될 경우에 대부분의 학생과 부모들이 겪게 되는 좌절감을 누가 씻어줄 것인가!


반값 등록금의 재원을 마련하는 올바른 방법은 이명박 정부의 부자감세 정책을 폐지하는 것이다. 부유층이 반값 등록금 실현에 기여하는 것은 기여입학금으로 자녀들의 입학을 보장받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력에 걸맞은 세금을 내는 일이다.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 지금도 공교육과 사교육에 걸쳐 우월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처지에서 뒷문으로 대학을 가는 통행증까지 얻는 것은 공정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부자감세를 철회하고 4대강 사업에 쏟아붓고 있는 예산을 대학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등교육 재정 확충 예산으로 전환하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국내총생산(GDP)의 1%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2학기 등록금 청구서에 반값 등록금이 찍혀 나오도록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야말로 거리에 나선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4·27 재보선에서 표출된 민심에 대해 정부로서 대답해야 할 최우선적인 과제일 것이다.


한만중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부위원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2183.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2184.html


Posted by 겟업
2014. 11. 12. 06:37



대학의 학생 선발에서 성적 위주의 획일적 방식을 벗어나 학생의 잠재력, 대학의 설립이념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하자는 뜻에서 도입된 입학사정관제가 흔들리고 있다. 주요 10개 대학의 입학사정관제 합격자를 분석한 3일치 <한겨레> 보도를 보면, 서울의 강남구가 가장 많은 합격자를 배출하는 등 지역 편차가 두드러진 것으로 드러났다. 입학사정관제 개선 방향에 대해 학부모단체, 현직 교사, 입학사정관의 의견을 들어본다.



다양한 교육적 경험이 공교육에서 이뤄져야


다양한 교육적 환경과 교육을 통한 성장과 성숙은 사회의 원동력이 된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도전해보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는 교육적 환경은 아이를 행복하게 하고, 경쟁력 있는 미래 인재를 배출하게 한다.


입학사정관제는 이러한 교육적 목적을 위해 도입된 다양성을 위한 제도이다. 현재까지 입학사정관제로 선발되는 학생은 20% 안팎이다. 80%의 학생은 수능성적이나 학생부 내신, 논술 등으로 선발되고 있다. 지금까지 입시에서는 모든 사람이 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평가잣대로 학생을 순위화하고 선발하였다. 같은 날 동시에 시험을 치르는 하나의 잣대인 수능을 통해 가장 많은 수의 학생을 줄을 세워 선발하였다.


그동안 책을 읽거나 동아리 활동을 통해 좋아하는 영역에 관해 서로 논의하고 심화시키는 학생들은 필요없는 행위를 하는 학생들로 언급되었다. 블로그에 자신의 의견을 쓰기 위해 책을 읽고 논쟁을 하는 학생, 지역사회의 문제를 구청이나 시청에 건의하고 개선하려는 학생, 글쓰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 발명하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 등 우리 주변에는 다양한 학생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학생들에게 주목하지 않았으며, 주목할 수 없었던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었다.


입학사정관제가 도입되면서 다양성을 위한 고교의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몇년 되지 않았지만, 입시교육에만 몰입하던 고교에서 다양성 교육의 모습이 발견되고 있다. 물론 아직 수능성적으로 선발하는 인원이 다수이기 때문에 변화를 수용하지 않는 학교도 많이 있다. 입학사정관제는 각 영역에서 우수한 다양한 학생을 선발하려 시작된 제도이다. 부자 학생만을 선발하거나, 가난한 학생만을 선발하거나, 강남 학생만을 선발하거나, 지방 학생만을 선발하기 위해 시행되는 제도가 아니다.


‘스펙’이라는 용어는 나쁜 어감을 가지고 회자된다. 학생의 적성과 흥미와는 별개로 숙제처럼 축적되는 경력의 의미로서 언급된다. 학생에게 다양한 교육적 경험을 할 수 있는 환경과 목표가 제공되고 이를 성취할 수 있는 교육적 환경이 학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면, 현재 언급되는 스펙의 정의는 학생의 다양한 경험이나 적성과 흥미를 표현하는 용어로 인식될 것이다. 공교육 환경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스스로의 적성과 흥미를 개발하여 성장하는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꿈꾸며, 많은 입학사정관들은 다양한 학생을 선발하려는 연구와 시도를 계속해 나가고 있다.


김수연 경희대 입학사정관


‘정보력’과 ‘가시적 결과’에 좌우되지 않아야


사교육비 경감, 공교육 정상화, 성적위주 선발 탈피 등을 위해 도입된 입학사정관제는 대학과 고교의 연계, 선발된 학생의 추후관리까지 기대할 수 있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서울 강남구와 특목고가 입학사정관제에서도 강세를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입학사정관제의 도입 배경과 기대효과가 처참히 무시된 결과이다.

서울권이 아닌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수년간 입시지도를 해온 사람으로서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여전히 불평등이 지속되는 상황에 지치고 힘이 빠진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다.

입학사정관제는 2004년 도입이 제안되어 2007년부터 일부 대학에서 부분적으로 시행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져왔다. 이제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입학전형 유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문제는 입학사정관제가 마치 대학입시의 주인공인 양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입학사정관제로 선발할 수 있는 신입생은 모집정원의 약 20% 정도에 불과한데, 모든 학생이 입학사정관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입학사정관제는 장기간의 준비와 일관된 노력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서 학생 이력의 ‘스토리’가 구성되어야 하고 그에 맞는 의미있는 활동이 연속되어야 한다. 남들보다 앞서 준비하지 않고는 두드러진 성과를 내기 힘들다. 아직 초기 단계인 입학사정관제에서는 학생의 잠재적인 능력을 측정하기보다는 가시적인 결과로 학생을 선발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가시적인 결과, 즉 ‘스펙’을 갖추기 위해선 정보력이 필수다. 이른바 ‘대치동’이 ‘한국 사교육의 메카’라고 불리게 된 것은 학습의 ‘질’보다는 정보의 ‘양’에서 월등하기 때문이다. 입학사정관제에서도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강남지역과 특목고 학생이 더 유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결과다.

입학사정관제는 기존의 대입제도가 안고 있었던 선발 경쟁에서 교육 경쟁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단순히 선발의 의미에 그치지 않고 대학의 인재관과 교육관에 맞는 잠재력 있는 학생을 선발·육성하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하지만 특정 지역 및 특목고 학생들이 더 많이 선발된 현재의 결과는 단순히 선발의 의미에 그치고 있는 상황을 잘 반영한다. 입학사정관제 본래의 취지를 살려서 교육에 필요한 도구로서 잠재능력을 확인하고 발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춰서 운영한다면 자연스럽게 대입제도의 한 부분으로 정착할 것이다.


임지연 경기 안양시 동안고 교사



지역균형선발 등 격차해소 전형에만 적용을


입학사정관제는 도입 초기 획일적인 점수 위주의 선발에서 벗어나 학생의 다양한 적성과 잠재력을 보고 뽑겠다고 했으나, 이명박 정부 들어 무리하게 확대시행되면서 특권층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고 서민층에겐 ‘그림의 떡’인 입시전형이 되었다.

참여정부 시절, 잠재력이 있는 학생을 선발해 교육격차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농어촌 특별전형’과 ‘지역균형선발’에서 입학사정관제를 제한적으로 도입하였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에서 입학사정관제는 그야말로 주요 사립대학들이 대학자율을 빌미로 특목고생을 우대하기 위한 제도로 변질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학사정관제가 확대되었을 때 각 대학이 학생을 골라 뽑기 할 것은 충분히 예상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특목고생을 골라 뽑기 할 줄은 몰랐다. 발표된 자료를 보면, 주요 대학에서 강남을 비롯한 ‘사교육 특구’ 지역 합격생이 다른 지역에 비해 6배의 차이를 보였고, 특히 외고·국제고와 일반계고의 차이는 무려 20배라는 것이다. 허탈감마저 든다.

현실이 이런데도 정부와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입학사정관제가 특권층을 더욱 공고히 하고 고교등급제에 정당성을 주는 것이라고 아무리 비판을 해도, 학생의 잠재력과 창의력을 보고 자기주도학습을 한 학생을 뽑는 전형이고 획일화된 공교육을 살리는 묘책이라고 열을 내어 홍보한다. 그러면서 반칙을 일삼는 일부 사립대에 제재도 가하지 않고 올해도 재정지원까지 하니 대학들은 더욱 눈치도 보지 않고 기고만장하여 특목고생을 유치하기 위해 온갖 편법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 공개를 요구해도 대학자율이라며 입학사정관 전형의 구체적 방법과 절차 등도 공개하지 않는다. 때문에 초등학생 때부터 ‘스펙’을 관리해야 하며, 입시준비에 고액 컨설팅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입학사정관제는 정부에서 그렇게 홍보하는 ‘개천에서 용 나는’ 입시제도이기는커녕 서민층은 감히 엄두조차 못 내는 제도다. 이런 계층차별적 전형을 위해 정부가 대학에 재정까지 지원하는 것은 폐지되어야 하며, 농어촌 특별전형과 지역균형선발 등에 최소한으로만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 맞다. 사회적 책임이 큰 대학이 우리 교육의 발전은 외면한 채 이기적으로 특목고생을 골라 뽑기 위해서 이렇게 사회적 약속을 무너뜨리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정부는 대교협에 엄정한 책임을 묻고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그나마 ‘공정한 사회’로 가는 첫걸음이다.


장은숙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회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1179.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1184.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118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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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1. 06:55

[논쟁] 장학제도와 부실대학 구조조정 병행해야



최근 정치권에서 ‘반값 등록금’ 논쟁이 불붙고 있다. 특히 김성식 한나라당 정책위 부의장이 “B학점 이상 학생에게만 지원해야 한다”고 밝혀 논란을 빚고 있다. 여야가 등록금 관련 법안을 처리하기로 한 6월 국회를 앞두고, 반값 등록금 정책의 방향과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한나라당·민주당·민주노동당의 견해를 들어본다.


등록금 논쟁이 뜨겁다. 대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완화하자는 취지에 대해서는 여야 할 것 없이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고, 때문에 각 당에서도 이러한 취지에 부합하고자 안을 내놓고 있다. 실질적인 방법론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쟁점들이 부각되기 마련이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입장들을 논의하며 얽힌 이해를 풀어나가는 것이 국회가 할 일이요, 우리 의원들의 임무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에 대한 사부담 비율은 매우 높아서, 부모 세대의 안정된 노후생활이 박탈됨은 물론 교육 격차로 인한 기회의 평등마저도 침해받고 있는 실정이다. 교육에서 공부담 비중을 높이는 일은 이제 선택 가능한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 하는 당위가 되었다.


현재 정부는 학생의 경제·생활 여건을 고려한 맞춤형 국가장학제도를 지속적으로 확충하고, 든든학자금 금리 인하 등의 제도 개선을 통해 가계부담을 낮추기 위한 정책을 추진중이다. 그간의 노력으로 2007년에 979억원이던 국가장학사업 규모가 올해에는 5218억원으로 늘어났지만, 현재 국내총생산(GDP) 대비 0.6% 수준인 고등교육 재원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권고치인 1% 수준까지 높일 수 있도록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2010 경제협력개발기구 교육지표’에 따르면, 2007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등록금은 주요 11개국 중 미국 다음으로 높다(구매력평가환율 기준). 그럼에도 학생 1인당 교육비가 낮다는 점은 고등교육에서 질 개선이 필요함을 역설해준다. 연간 등록금이 1000만원에 이르는 때에 대학이 눈총을 받는 것은, 사정이 이러함에도 양적 팽창에만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생들의 등록금 부담을 완화해주기 위한 장학제도와 더불어, 부실 대학에 대해서는 행정적·재정적 지원 배제와 더불어 점진적인 구조조정을 해나가야 한다.


현재 한나라당 정책위에서는 등록금 부담 완화를 위한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본격적으로 정책 마련을 위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나는 태스크포스 단장으로서 정책의 현실화를 위해 가능한 모든 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선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책 집행의 책무가 있으므로, 대학생들의 등록금 부담 완화를 위한 방안을 정교하게 다듬고 소요 예산 마련에도 경주해야 한다. 여기에는 국민의 이해와 더불어 야당의 협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다행히 야당도 대학생들의 등록금 부담 완화에 관한 한 취지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모처럼 의기가 투합한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한다.



임해규 한나라당 국회의원



[논쟁] 학점 제한 없이 더 넓은 계층에 적용해야



황우여 신임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반값 등록금’을 꺼내들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여당의 입장에서 복잡한 방정식과도 같은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풀까 짐짓 기대하며 주목했다. 하지만 여당은 ‘반값 등록금’을 ‘등록금 부담 완화’로 명칭을 바꿔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더니 이제는 각종 조건을 달아 흥정을 하고 있다. 등록금 인하는 없이 무상장학금 확대 정도에 스스로 만족하는 광경을 연출하더니 느닷없이 사립대 구조조정과 연계하여 추진한다고 하고 급기야 장학금도 B학점 이상으로 제한한다고 한다. 복잡한 방정식을 풀겠다며 기세 좋게 팔을 걷어붙이더니 덧셈·뺄셈 수준의 해법만 끼적이고 있어 실망스럽다.


어쩌면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작금의 정치권이 고민해야 할 등록금 정책은 그동안 국가가 방기해왔던 고등교육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는 자세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오류와 무책임을 반성해야 할 정치권과 정부가 오히려 권리를 요구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각종 조건을 들이미는 모습은 아직도 등록금 정책을 ‘시혜적 조처’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정치권의 한 사람으로서 당혹스럽다. 집안이 어려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도 학점 때문에 남들이 타는 장학금을 타지도 못하고 학자금 대출도 못 받는 학생이 느끼는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며,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며 시간을 낭비할수록 암담한 현실에서 빠져나오기는 더 힘들어질 것이다. 또한 대학 부실의 책임을 대학 경영자와 함께 등록금 고통으로 짊어져야 하는 학생들에게 ‘희망’ 대신 ‘원망’을 품게 하는 것이 과연 성숙한 국가의 자세인지 묻고 싶다.


반값 등록금 약속을 해놓고도 이행하지 않았던 정부와 정치권이 부실하게 대학을 운영한 사학경영자에게는 안심하고 학교를 문닫을 수 있도록 특혜성 배려를 추진하면서, 사정이 어려운 대학생들에게는 선을 그어 밀어내고 솎아내겠다는 모습을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착잡하기 그지없다. 학점이 저조한 학생이 성실하게 학업에 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경영이 부실한 대학이 건전하게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 ‘교육’을 고민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한나라당에서는 소득 하위 50% 이하에 등록금을 지원하겠다고 하지만, 실제 그 이상의 가정에서도 등록금 부담을 느끼고 있으므로 지원받는 소득분위를 더 확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지난 2008년 필자가 발의했던 등록금 상한제가 한나라당과 논의를 거치면서 ‘인상률 상한제’로 바뀌어 무용지물인 상황에서, 다시 등록금 상한제를 도입해 치솟은 등록금 액수를 제한해야 한다.


안민석 민주당 국회의원


10조원 재정을 고등교육에 투입하자



민주화되지 않은 정치권력의 특징 중 하나가 국가 예산 집행을 ‘베풀기 사업’쯤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최근 말하고 있는 대학 장학금 정책의 모습을 보면 봉건적 사고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공부 잘하는 학생 용돈 주듯이 국가장학 정책을 구상하는 모습이 딱 그러하다.


대한민국의 ‘등록금 애사’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명확하다. 대학교육에 국가재정의 투입이 미약했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으로 보면, 대학교육비의 69%를 국가재정으로 댄다. 반면 한국은 21%만 국가가 부담하고 79% 이상을 학생과 학부모가 부담하고 있다. 국가가 자신의 책임을 방기했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가 등록금 참사의 본질이다. 고등교육 재정을 대폭 늘려야 하고, 재정 마련과 투입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 바로 정부가 할 일이다.


그런데 정부·여당의 입에서 나온 첫 일성이 ‘공부 못하면 돈 안 주겠다’는 것이다. 학부모의 소득수준에 따라 학생들의 ‘스펙’이 달라지는 것이 오늘 대학의 현실이다. 학자금과 생활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학점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학생도 많을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도 따지지 않고 학점이 낮으면 장학금을 안 주겠다는 것은 정작 혜택을 받아야 할 학생들을 배제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경쟁에서 밀린 학생들에게 생활고를 더하고, 그로 인한 ‘비극’을 방조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장학금 혜택마저 못 주겠다며 학생을 사지로 모는 것, 문명사회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등록금 애사의 본질은 등록금 액수가 너무 높다는 데 있다. 정부·여당은 적극적인 정부재정 투입을 통해 등록금 고지서의 액수 자체를 반값으로 낮춰야 한다. 정부·여당은 이제 ‘장학금 정책’이 아닌 근본적 해결을 위한 ‘등록금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고등교육교부금법 도입을 중심으로 한 ‘정부책임등록금제’ 5대 법안을 5월31일 제시했다. 등록금 경감 예산 6조원을 비롯해 매년 10조원 안팎의 재정을 고등교육에 투입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반값 등록금 실현뿐만 아니라 시간강사 문제 해결, 고등교육 경쟁력 강화를 이뤄내자는 것이다. 지난해 4대강 예산에 쏟아부은 22조원의 절반만 투자해도, 고등교육 전반의 문제를 해결할 예산을 확보할 수 있다. 등록금 문제는 예산이 아닌 정부의 의지 문제라는 것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도 책값은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대한민국 부모들은 믿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그 마음의 절반이라도 따르고 있는지, 이번 6월 국회 등록금 정책의 향배를 보면 확인될 것이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0605.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0606.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06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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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8. 09:33

송지선 아나운서의 자살을 계기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양면성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지극히 사적인 발언이 매체를 넘나들며 확대재생산되면서 발언자의 사생활과 인격이 침해받고 있다. 트위터·페이스북 등에 올린 글은 사적 영역으로 보호받아야 하는 것인지, 공적 공간이므로 발언에 따른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것인지 다양한 견해를 들어본다.



개인의 일기장은 보호받아야 한다


한국인터넷진흥원의 2010년 12월 인터넷 이용실태 조사결과를 보면, 20대의 89%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이용하고 있고 특히 여성들의 블로그 이용률은 86.9%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젊은 세대는 개인의 소소한 일상사부터 취미나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교환하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소통의 공간으로 만들어 간다. 때문에 20~30대 여성들에게 소셜네트워크서비스란 ‘일기장’과 같은 ‘마음밭 공책’쯤으로 여겨질 수 있을 것 같다.


일례로 싸이월드가 인기있을 때 많은 네티즌들은 ‘뽀샵질’을 한 ‘얼짱 각도’의 이미지성 사진을 자신의 홈에 올리는 데 열광했다. 하지만 소셜네트워크를 이용하면서 ‘생얼’ ‘추리닝 차림’ ‘짬뽕라면 밥상’ 등과 같은 꾸미지 않은 일상의 사진을 올리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또 이런 ‘망가진’ 사진들에 더 많은 공감글이 달린다.


이는 소셜네트워크 매체에 대한 네티즌들의 태도가 ‘보여지는 나’에서 ‘보여주는 나’라는 흐름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뜻한다. 그리고 이 흐름은 많은 사람들과 관계맺기가 이뤄지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기능적 특성과는 다르게 그 활용적 측면은 좀더 개인적이고 사적인 공간으로 사용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자신의 메시지를 더 효과적으로 유포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특별한 맥락 없이’, ‘의도하지 않은’(물론 상업적 목적을 갖는 경우도 있겠지만) 태도로 그때그때의 생각과 느낌과 감정을 적어 내려간다.


최근 야구 캐스터로서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던 송지선 아나운서의 죽음이 네티즌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인과 관련해 ‘공인’이 자신의 개인 신상과 관련한 내용을 여과 없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게재해서 초래된 문제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가 이 사건을 바라보는 전체의 시각이 되어선 안 될 것 같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있어 공적인 내용의 수위와 사적인 내용의 수위가 어느 정도여야 한다는 기준이 있을 수 있을까. 한 조사결과를 보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이용 때 ‘개방성에 의한 신분 노출’ 우려감이 40%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이번 사건과 관련해 방송인 백지연씨가 “선플이 악플을 이기길”이라고 지적한 것처럼, 사용자의 증가와 함께 우리 사회가 교육적·문화적 차원에서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사용 예절과 심도있는 의식개선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이은영 아이앤리서치컨설팅 대표


SNS는 전면유리로 된 집의 거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매체다. 다양한 툴마다 지극히 사적인 내용을 올려놓을 수 있는 기능들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모든 것을 올리는 공간으로 사용하는 행위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특성을 과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공유·개방·참여’라고 할 때, 팔로어나 친구에게 대놓고 구분하지 않은 글을 올리는 행위는 그것을 퍼뜨려도 좋다는 인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전면이 유리로 된 집의 거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훤히 다 보이는 공간이다. 자신의 집이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들여다볼 수 있는 거실이라면 행동에 신경이 쓰이기 마련이다. 페이스북에 비밀그룹이 있듯,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안에는 자신을 다 드러내도 좋을 가려진 방과 같은 공간이 따로 존재한다.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본다. 자유롭게 글을 쓰거나 사진·영상을 올릴 수 있지만, 거기에는 책임도 따른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고 사용할 필요가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다양한 사람들과 연결되고 그들과 생각이나 의견, 관심사 등을 공유함으로써 소통할 수 있지만, 사용자 나름대로 원칙을 정할 필요가 있다. 기업에는 기업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듯이 개인에겐 개인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들면, 별명을 쓰거나 본인의 사진이 아닌 다른 이미지 사진을 넣은 사람과는 친구 맺기를 하지 않는다든가, 친한 사람들과 사적인 이야기 중심의 관계 형성을 할 때는 커뮤니티 같은 비밀그룹에서 소통한다든가 하는 것이다.


외국인들은 주로 아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으로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사용을 시작하고, 목적에 맞게 사적 교류와 정보 공유 공간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우리나라의 사용자들은 대부분 유명인이나 자신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들과 연결되기를 원한다. 이런 현상은 문화적인 차이로 볼 수도 있지만, 한국의 이런 관계맺기 방식이 소셜에티켓(또는 네티켓)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드러낸다고 본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에서도 예의를 지키는 개인적인 노력들이 우선돼야 한다. 감정을 나타내는 언어에는 긍정적인 언어보다 부정적인 언어가 몇 배 더 많다고 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부정적인 언어에 더 많이 반응하고 그런 언어들이 들어간 글이 쉽게 퍼진다. 구전되는 소문은 살이 붙어 와전되는 경우가 많은데, 글 또한 보는 사람들 나름의 생각이 더해져 확대해석된다. 이런 것을 다 막을 수는 없지만, 글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내용은 나름대로 여과해 올린다면 논쟁거리나 사냥거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최재용 한국소셜미디어진흥원장


언론의 무차별적 인용 보도가 문제


중동·북아프리카의 민주화 시위에서부터 홍익대 청소노동자를 돕는 시민들의 참여에 이르기까지, 트위터는 사회적 의제들을 제기하고 확산시키며 실천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공간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트위터에 유통되는 내용의 대부분은 극히 개인적인 일상과 감정, 고백들이다. 개방된 공간이자 사적인 공간인 트위터는 실명과 익명, 사회적 발언과 개인적 대화, 독백이 뒤섞여 있는 곳이고 이것이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트위터의 매력이기도 하다.


물론 트위터의 혼재적 성격은 블로그나 다른 소셜네트워크서비스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새로운 매체들의 출현으로 형성된 이런 제3의 공간에서는, 하나의 발언을 방식과 통로, 발언자에 따라 공적 발언과 사적 발언으로 나누는 기존의 방식은 더이상 적용하기 힘들게 되었다. ‘공개되었지만 사적인 발언’이라는 특이한 발언들이 쏟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사회는 아직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만나는 부분에 대한 전반적인 합의가 미흡한 상황이다. 이에 따라 공적 영역의 사유화, 사적 영역의 공유화가 때로는 상당히 부정적인 방식으로 일어나고 상당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사이의 애매한 지대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인용에 대해서도 당연히 우리 사회에는 아직 합의된 규칙이 없다. 특히 트위터의 경우 140자의 제한을 가지는 특성상, 많은 이야기들이 앞뒤 문맥에서 잘려나간 채 다른 공간이나 매체에 옮겨질 경우 개인의 사적 발언이 사회적으로 증폭·왜곡되어 상당한 갈등과 발언자에 대한 치명적인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언론의 보도이다. 언론의 트위터 인용이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실 속에서, 그냥 원래의 공간에 머물렀으면 문제가 크게 없었을 글이 엄청나게 확대증폭되는 것이다. 맥락에서 떨어져나온 140자의 글은 다른 매체, 특히 공적 영역인 언론에 의해 인용될 경우 내용 자체가 달라지거나 오해의 여지가 생기게 된다. 따라서 트위터를 비롯한 새로운 매체에서의 발언을 인용하거나 다른 매체로 옮길 때는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트위터란 개인 주택의 앞마당과 같은 곳이다. 훤히 들여다볼 수 있어도 어디까지나 사적 공간인 그곳은 집주인이 일군 고유한 생태계이다. 트위터 사용자가 자기소개 등을 통해 스스로 설정해놓은 트위트의 성격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며, 개별 발언의 경우 발화자의 성격, 해당 발언의 앞뒤 맥락까지 세심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인용하는 매체가 달라질 경우 발언자에게 직접 미리 양해를 구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다.


고은태 중부대 건축디자인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0102.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0103.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801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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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7. 07:03

모든 걸 게임 탓으로 돌리는 편리한 발상일 뿐



만 16살 미만 청소년들의 온라인게임 접속을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강제로 차단하는 ‘셧다운제’가 오는 11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여성가족부 등 셧다운제를 찬성하는 쪽에서는 이 제도가 청소년을 보호하고 수면권을 보장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밤 12시 이후 청소년들의 수면을 방해하는 것이 어디 게임뿐이랴. 공부 셧다운제, 티브이 셧다운제 등을 도입해 밤 12시 이후에 책을 읽고 공부하고 티브이 보는 청소년까지 모두 강제로 재울 것이 아니라면 게임 접속 차단만이 수면권을 보장한다는 주장은 난센스에 가깝다. 취침시간은 가정에서의 대화와 소통을 통해 결정할 문제이지 법으로 규정할 성질이 아닌 것이다.


게임중독도 마찬가지다. 찬성 쪽에서는 게임중독으로 인한 극단적 범죄 사례를 예로 들며 셧다운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얘기한다. 물론 치료가 필요한 경우라면 적절한 치료와 상담 등이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게임중독에 빠지지는 않는다. 게임중독은 가정환경이나 학업·성적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 개인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환경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그 원인을 게임으로만 돌리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주장이다.


‘신데렐라법’ ‘온라인통금법’으로 불리는 셧다운제는 왜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의 특정한 시간대와 온라인게임이라는 특정한 장르의 게임만이 규제의 대상이 되는지에 대한 근거가 없다는 측면에서 이치에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청소년의 문화적 자기결정권, 가정에서의 부모의 교육권, 게임 개발자의 직업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위헌적 요소마저 갖고 있다. 실효성 문제는 또 어떠한가. 우리보다 먼저 이 제도를 도입한 타이가 도입 2년 만인 2005년 개인정보 도용 등을 이유로 폐지했을 정도로 실효성마저 의문인 상황이다.


진정 청소년의 수면과 건강 문제를 걱정한다면 셧다운제라는 편리한 발상 이면에 있는 청소년들의 삶을 바라봐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3~4개의 학원을 돌고 밤늦게 귀가하는 청소년들에게 거의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 자리잡은 것이 바로 게임이다. 따라서 게임중독 문제를 해결하고 청소년의 수면권과 건강권을 보장하려면 과도한 사교육을 낳는 입시경쟁 중심의 교육체계에 대한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입시경쟁이 아닌 지성과 감성, 신체성과 인성을 고르게 발달시키는 창의적 문화교육으로의 전환은 게임중독 문제에 대한 어렵지만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 물론 해법이 근본적인 만큼 그 길은 멀고 또 험할 수 있다. 셧다운제 도입 철회부터 시작해보자.


최준영 문화연대 사무처장


게임중독 방지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인터넷 강국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심각한 인터넷 게임중독’이라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난해 서울에서는 밤새 폭력게임을 하던 미국 명문대 중퇴생이 “게임 속에서처럼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에 부엌의 흉기를 들고 나와 길을 가던 시민을 찔러 살해한, 이른바 ‘묻지마 살인사건’이 있었다. 부산에서는 게임중독에 빠진 중학생이 자신을 나무라는 어머니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죄책감에 스스로 목을 매 숨진 사건이 발생했다.


이처럼 게임중독은 반인륜 범죄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는 그 폐해를 줄이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그 일환이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청소년들의 게임 접속을 금지하는 ‘셧다운제’ 실시다. 2010년 행정안전부 조사를 보면, 9살부터 19살까지 청소년들의 인터넷중독률은 12.4%(87만명)로 성인의 약 두배다. 따라서 이러한 조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적용 연령이다. 위 조사에 따르면, 2010년의 경우 중독이 심한 고위험 사용자군의 비율은 중학생이 2.1%인 반면, 고등학생이 3.5%였다. 그런데 왜 고등학생이 셧다운제의 예외가 되어야 하나? 그래서 필자는 적용 연령을 16살 미만에서 19살 미만으로 상향조정해, 고등학생을 포함하는 수정안을 국회 본회의에 제출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도에 여러 반론이 제기됐다. 먼저, 셧다운제는 청소년의 문화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묻고 싶다. 19살 미만 청소년들에게 술·담배 판매를 금지하는 것은 왜 청소년의 행복추구권 침해라고 주장하지 않는가? 다음으로 게임은 축구, 야구, 구슬치기, 제기차기와 같은 놀이의 일종인데 왜 지나친 규제를 하느냐는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축구나 제기차기에 중독돼 부모를 살해하고 묻지마 살인을 하지는 않는다.


최근 한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중독의 사회적 손실 비용이 연간 5조5000억원에 이르고 이 중 16살 미만의 인터넷중독자에 의한 비용만 9039억원으로 추계된다고 한다. 자녀와 부모의 갈등 비용, 범죄 및 사건사고로 인한 사회통합 저해 비용 등을 포함하면 사회경제적 비용은 이보다 더 클 것이라고 한다. 게임중독자의 뇌가 마약중독자의 뇌와 매우 흡사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교육계 단체인 교총과 전교조 모두 19살 미만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셧다운제 도입에 찬성하고 있다.



이 법의 논의 과정에서 게임업계의 로비가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문화체육관광부는 게임산업 진흥이라는 명분 아래 게임업계의 입장을 상당 부분 대변했다. 그러나 우리 청소년들의 정신건강 보호가 그보다 하위 가치라고 생각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신지호 한나라당 국회의원



청소년이 게임에 빠지는 근본 원인을 돌아보라



청소년들의 게임중독을 막기 위해 도입되는 ‘셧다운제’에 대한 청소년들의 시선은 냉소적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단순히 게임을 못하게 되어 화가 난다는 반응을 하는 대신에, ‘과연 규제가 제대로 되겠느냐’며 오히려 셧다운제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게임에 빠지는 근본적 이유를 외면하는 어른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셧다운제가 청소년들의 게임중독을 예방하는 데 효과가 없다는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셧다운제에 의해 규제되는 연령의 청소년들이 타인의 주민번호를 도용함으로써 계속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손쉽게 알 수 있는 가족 구성원의 주민번호를 이용하여 셧다운제를 피하고, 더 나아가 가족이 아닌 타인의 주민번호까지 도용할 수 있다. 둘째, 셧다운제는 청소년들이 늦은 시간에 하는 모든 게임을 규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회원 가입을 할 필요가 없는 플래시 게임 등을 비롯해 증가 추세에 있는 스마트폰의 게임이나 국내 게임보다 더 해로울 수 있는 외국 게임 등은 모두 규제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게임을 원하는 청소년들은 셧다운제 도입 전과 마찬가지로 늦은 시간까지 게임을 할 수 있다.


또한 셧다운제는 청소년들이 게임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이유를 외면하며 계속해서 청소년들의 놀이문화를 억압하는 형태를 취함으로써 오히려 청소년들의 게임중독을 부추길 수 있다. 청소년들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게임을 하기 시작한 배후에는, 학생들의 ‘놀이’를 ‘학업’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여겨 달갑지 않게 바라보고 청소년들이 마음껏 놀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지 않은 어른들이 있다.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청소년들은 놀이를 떳떳하지 못한 활동으로 생각하게 되어, 친구들과 건전하고 활동적인 놀이문화를 찾아다니는 대신 밀폐된 공간으로 들어가 밤이 새도록 게임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셧다운제를 도입하면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활동은 건전하지 못해 규제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커질 것이고, 그에 따라 몰래 할 수 있는 놀이인 게임에 더욱 의존하게 될 것이다.

발생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이 앞서 근본적 원인을 외면하고 규제에만 급급한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부모님의 주민번호로 새로운 아이디를 만들어야 하는 ‘귀찮은’ 제도로 인식되는 셧다운제를 시행하는 대신, 청소년들의 놀이문화를 바라보는 시선을 긍정적으로 바꾸고 건전한 놀이공간을 확보해주는 일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



현호정 경기도 군포시 흥진고 3학년

청소년들이 게임중독으로 인해 사회적 문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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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6. 07:12

사후세계는 과학적 분석대상 아니다


영국의 세계적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최근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천국과 내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해 지어낸 이야기”라며 또다시 사후세계를 부정하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한 찬반 논리와 그 함의를 다양한 전문가에게 들어본다.



과학은 경험과 논리의 학문이다. 따라서 논리적 모순이 있고 경험상 검증이 되지 않으면 그걸 진실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인간이 죽은 다음의 세계는 그런 까닭에 기본적으로 과학의 분석 대상이 되지 못한다.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살아 돌아와 이를 과학적 분석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경우는 애초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이 사후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이미 과학의 태도에서 벗어난 것이다.


과학은 또한 경험의 세계가 달라지거나 그 경험을 바라보는 시선이 변하면 판단과 결론도 달라진다. 이른바 패러다임의 변화다. 그 변화 이전의 과학과 그 이후의 과학은 같은 과학이라는 영역에 속한다 해도 그 인식의 방법과 내용은 같지 않다. 따라서 현재의 과학이 풀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경험과 논리의 세계가 변동하면서 패러다임이 바뀌면 알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과학이 앞으로 어떤 놀라운 이해력과 검증력이 생길지는 모르나 그걸 기대할 수 있다면, 그때 사후세계의 존재가 누구에게나 자명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그걸 부인한다면 그건 과학의 역사에 무지한 것 아니겠는가? 인류의 과학사는 과거의 과학이 그다음 세대의 과학에 의해 부정당하는 사태를 무수히 겪지 않았던가?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바로 한치 앞도 알지 못하는 것이 진실 아닌가? 그렇다면 사후세계에 대한 과학의 예단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를 예감할 수 있는 차원이 단 하나 있다. 그건 종교적 영성이다. 보통의 경우 발휘되지 못하는 힘이나 예지력 또는 감각이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생겨나는 걸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거나 보기도 한다. 과학이 대답해주지 못하는 지점이다.


인간에게 내재된 영적 차원의 능력은 3차원을 넘어서는 영역과 소통하는 힘이고, 그 힘은 삶과 죽음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고 상상하는 기능을 한다.


과학은 인간의 영성에 잠재되어 있거나 나타난 현상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이지만, 그것이 인간의 삶에 가져다주는 자산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종교인들의 자세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사후세계에 대한 확신은 과학적 이성으로 납득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영적 차원의 깨침이 가져다주는 평화와 감사다. 이게 없는 존재는 삶 자체가 너무 고독하고 힘겨울 것이다. 사후세계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대의 축복이다.


한종호 <기독교사상> 편집주간



지상에서 ‘천국의 삶’ 사는 게 중요하다



세계 제일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천국은 없다”고 한 발언을 두고 쇼킹하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을 것이다. 특히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던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늘에 천국이 없다고 하는 것쯤은 스티븐 호킹 박사처럼 위대한 물리학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오늘날 기본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소리가 아니던가.


성경이 쓰일 당시 ‘하늘’이란 일차적으로 우리가 보는 파란 하늘 위에 놓여 있는 무슨 장소쯤으로 생각했다. 말하자면 파란 하늘이 지구의 뚜껑이며 동시에 하늘나라의 마룻바닥이었던 셈이다. 이제 천국이 문자 그대로 하늘 어디에 붕 떠 있는 땅덩어리쯤이라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


사실 지금뿐 아니라 옛날에도 종교의 심층에 접했던 사람들이라면 이런 물리적 천국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성경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4세기까지 유통되던 ‘도마복음’이라는 복음서 제3절을 보면, 예수가 친히 그 제자들을 향해 “너희를 가르치는 자들이 너희에게 ‘보라, 그 나라가 하늘에 있다’고 하나, 그렇다면 새들이 너희보다 먼저 거기에 가 있을 것이라”고 하며 파란 하늘 위에 있을 하늘나라를 부인하였다.


이런 천국이 없다면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그건 호킹 박사도 모르고 공자님도 몰랐다. 공자님은 지금의 삶도 다 알지 못하는데 죽은 뒤의 일까지 어떻게 걱정할 수 있겠는가 했다. 호킹 박사가 말한 것처럼 ‘지금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 또한 심층 차원의 기독교는 육체적으로 죽어서 어디에 간다는 것보다 지금 여기서의 삶을 더욱 강조한다. 예수도 그 나라에 ‘들어감’보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함’이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할 일이라 했다. 앞에서 말한 ‘도마복음’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밖에 있느니라”고 하였다. 내 속에, 그리고 내 이웃의 속에 있다는 뜻이다. 이 복음서는 계속해서 내 속에, 그리고 내 이웃 속에 있는 하느님의 나라, 곧 하느님의 임재를 ‘깨달으라’고 한다. 이렇게 될 때 하늘과 나와 내 이웃이 ‘하나’되는 경험을 할 수 있고, 이런 경험을 통해 이 지상에서 진정으로 하늘나라의 삶을 사는 것이라 가르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천국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오강남 캐나다 리자이나대학 명예교수·종교학



종교·과학에 대한 통찰체험과 실천이 중요하다



17세기 뉴턴에 의해 결정론적인 세계관이 확립되었다. 19세기엔 다윈의 진화론이,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양자물리학과 유전자 이론이 확립되면서 종교와 과학의 상호작용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왔다.


핵물리학을 전공한 이언 바버 교수는 그의 저서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에서 과학과 종교를 다루는 방법을 분류하는 네 가지 이론 유형(갈등이론, 독립이론, 대화이론, 통합이론)을 기술하였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 성서문자주의자는 진화론이 종교적 신념과 맞지 않는다고 믿는 반면, 무신론적인 과학자들은 진화의 과학적 증거는 유신론과 공존할 수 없다고 보아 갈등이 생긴다는 게 갈등이론이다. 독립이론은 종교와 과학은 인간의 삶에서 완전히 다른 기능을 수행하지만 상호보완적인 관점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대화이론은 과학 자체가 답할 수 없는 극한 질문들이 제기될 때 비로소 종교와의 대화가 가능해진다고 본다. 통합이론은 과학과 종교를 폭넓은 동반자관계로 보아 긴밀한 통합을 모색하는 이론이다.


스티븐 호킹의 저서 <위대한 설계>에 담겨 있는 내용이나 “천국이나 사후세계는 꾸며낸 동화에 불과하다”는 최근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최근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M 이론’에 대한 언급을 빼고는 갈등이론의 범주에 속하는 호킹 자신의 신념에 찬 주장일 뿐 별로 새로운 점을 찾을 수 없다. 중력과 양자이론을 아우르며 우주를 기술하는 궁극의 법칙이라는 ‘M 이론’은 60억 인류 가운데 극소수의 입자물리학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이다. 이 이론을 언급한 호킹이 “신이 필요없기 때문에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한다고 해서 인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설사 우주의 법칙을 모두 파악했다 하더라도, 냉철히 살펴보면 과학은 자연현상을 탐구하는 분야이기 때문에, (안타까운 일이지만 유명 과학자들의 최근 자살 사례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윤리적인 측면과 같은 과학적 연구 이외의 분야에서 과학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현명하다고 볼 수는 없다. 사실 ‘사후세계의 존재 유무’는 체득의 문제이지 이분법적인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각자 자기성찰 수행이 꼭 필요한 것이다.


바버는 네 가지 유형 가운데 대화이론 혹은 통합이론으로 화해가 가능하리라고 전망했는데, 이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는 종교와 종파를 초월해 각자의 종교(또는 신념)와 과학에 대한 깊은 통찰체험을 바탕으로 무엇을 믿든 서로 견해가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비생산적인 갈등의 폭을 줄여가야 한다. 이렇게 해서 서로 도우며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더불어 나눌 실천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바이다.


박영재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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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1. 1. 08:03

정권 바뀌어도 예측 가능하게 관리법 만들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입지 선정을 비롯해 동남권 신공항 공약 철회, 한국토지주택공사(LH) 본사 이전 결정으로 지역 민심이 사분오열되고 있다. 현 정부의 국책사업 진행 과정이 매번 지역갈등을 조장하게 된 근본 원인과 앞으로 이런 논란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할 대안은 무엇인지 전문가들의 견해를 들어본다.


엠비 정권은 균형발전을 한물간 이념으로 치부한다. 이전 정부가 추진한 균형발전 정책을 하나하나 지워왔고, 급기야 ‘균형발전’이란 말도 ‘지역발전’으로 바꿔 쓰고 있다. 균형발전에 관한 정부의 철학 부재는 최근 국책사업을 둘러싼 갈등을 분출시키는 까닭이 되고 있다.


세종시 갈등은 국토의 균형발전을 선도할 거점 새도시라는 세종시의 역할을 무시했기 때문에 빚어졌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본사를 진주로 몰아준 결과, 영호남 갈등이 깊어진 것도 균형발전을 위한 분산입지를 배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학벨트의 충청권 입지 약속 파기로 빚어진 지역간 갈등은, 기초과학 인프라를 지역간에 고루 발전시켜야 한다는 정책철학이 부재한 데서 비롯됐다.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는 편협한 경제적 타당성 문제에만 사로잡혀 지역 물류시스템의 선진화란 균형발전의 의미를 놓친 결과다.


이러한 갈등을 근원적으로 예방하고 해결하기 위해선 균형발전을 위한 국책사업을 예측 가능하게 관리할 수 있는 ‘국책사업관리법’이 제정돼야 한다. 균형발전을 담보할 국책사업으로서 요건을 제대로 갖추도록 하고, 또한 제대로 갖추었을 때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제도 틀을 마련하자는 게 국책사업관리법 제정의 취지다.


선거공약이든 정권의 정치적 목적이든 어떤 경우라도 막대한 국민 혈세가 투여될 국책사업으로 추진하기 위해선 그에 준하는 요건을 국민적 논의와 검증 절차를 통해 갖추도록 해야 한다. 제안된 사업에 대해선 투명하고 엄격한 타당성(경제성 포함) 검토를 거치되, 그 과정과 결과는 개방해 국민들이 충분히 납득하고 승인할 수 있어야 한다. 국책사업 선정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는 국회가 돼야 한다.


국책사업의 예산, 추진 기간과 절차, 사업내용 변경 등을 모두 예측 가능하게 통제할 수 있는 프로세스가 법에 적시돼야 한다. 예산의 증감이 필요할 경우 국회에서 심의를 통해 조정하는 예산상한제 도입도 필요하다. 이해당사자 사이의 갈등은 합의회의나 배심원제와 같은 참여적 의사결정 구조를 제도화해 예방하고 조정하면 된다.


추진중인 사업이라도 일정 요건을 구비하면 공론화를 통해 수정하거나 퇴출할 수 있는 절차 규정도 마련돼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 개입은 엄격히 통제돼야 한다. 국책사업의 추진 성과는 국회에 정기적으로 보고해 국민들이 소상히 알도록 해야 한다. 국책사업 전반을 이런 식으로 예측 가능하게 관리하려면 이를 전담할 ‘국책사업관리처’가 신설돼야 한다.


조명래 단국대 도시계획·부동산학부 교수


국책사업 유치 경쟁이 없는 사회를


동남권 신공항,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한국토지주택공사 이전…. 최근에 여러 지역에서 유치하려고 과열경쟁을 벌였던 사업들이다. 요즘 안전성 논란이 다시 일고 있는 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에 대해서도 한때는 3000억원의 지원금을 따내기 위해 유치 광풍이 불었던 적이 있었다. 모두 ‘국책사업’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사업들이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들이 국가정책에 관심이 있어서 이 사업들을 유치하려고 한 것은 아니다. 지자체들의 관심은 ‘지역발전’에 있었다. 그렇다면 상식적인 의문 하나를 던져볼 수 있다. 왜 지역발전을 위해 지역정책이 아닌 국가정책에 목을 매야 하나?


그것은 한국 사회가 여전히 중앙집권적인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 자체의 재원이나 역량으로는 지역발전이 어렵다는 생각이 퍼져 있다. 그 결과 국가재정이 투입되는 국책사업을 유치하려고 지자체들이 과열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해법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구조를 분권형 국가구조로 전환하는 것에 있다. 중앙정부가 재정을 틀어쥐고 그때그때 사업을 지역에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지역이 자율적으로 지역발전을 위한 정책을 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재정을 지방에 주고 자율권도 줘야 한다. 그리고 지역은 지역발전을 위한 계획을 스스로 수립하고, 성패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지금과 같은 지역갈등의 악순환 구조를 벗어나기 어렵다.


한편 지역의 비민주적인 지배구조는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국책사업 유치는 지방권력의 무능함을 덮는 수단이 되고 있다. 국책사업 유치만이 살길인 것처럼 얘기하다가, 유치가 안 되면 정권을 욕하면서 자기 자신은 면피를 하는 게 지방자치단체장들의 행태이다. 이런 행태를 뒷받침하는 데 온갖 단체들이 동원된다. 다른 목소리는 내기도 어려운 분위기다. 그러나 지역도 스스로의 민주적 역량을 키우고 중앙의존적 습성을 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역에 희망은 없다.


따라서 지금 국책사업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지역 간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구조의 혁신과 지역의 민주화이다. 이런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그 어떤 처방도 임시방편에 그칠 수밖에 없다. 국책사업을 둘러싸고 지역의 기득권자들이 삭발과 단식농성을 하고, 온 지역을 현수막으로 도배하는 우스운 현실이 내일도 반복되지 않으려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하승수 변호사·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


공짜 점심은 없다 



최근 지방자치단체가 다투어 선호시설을 유치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이러한 갈등은 중앙 정부와 지자체 모두에게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중앙정부는 국책사업 추진 과정에서 투명성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으며, 지자체는 공정한 절차의 결과에는 승복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당사자의 행태가 바뀌는 것과 동시에 국책사업 추진을 둘러싼 제도가 변화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각 지자체가 선호시설을 유치하고자 경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선호시설의 건립 비용은 거의 부담하지 않으면서 그 혜택은 모두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선호시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짜 선물인 것이다. 공짜 싫어하는 사람 있겠는가. 선호시설이 공짜이다 보니 탈락 지역은 상실감을 크게 느낀다. 형제가 여럿인 집에서 누구나 어릴 때 느끼는 ‘엄마는 나만 미워해’ 감정과 비슷하다. 아무리 중앙정부가 투명한 선정 절차를 거치더라도 선호시설이 공짜인 한 지자체의 이러한 상실감은 어쩔 수가 없다.


결국 문제 해결은 선호시설이 공짜가 아니도록 만드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즉각 지자체로 하여금 선호시설 유치에 비용을 부담하게 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지자체간 입찰 경쟁을 통해 가장 높은 금액을 써낸 지자체가 선호시설을 유치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재정 사정이 좋지 않은 지자체는 늘 탈락할 수밖에 없어 빈익빈 부익부가 문제가 된다. 따라서 선정위원회의 몇 가지 평가 기준에 지자체가 제시하는 부담금액을 포함시키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부담금 절대액을 기준으로 하는 대신 그 지자체의 연간 예산 대비 부담금 비율을 참고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공짜 점심을 막는 제도는 이미 우리 사회에 존재하고 있다. 토지를 개발할 때 지가 상승으로 발생하는 개발이익의 일부를 그 수혜자로부터 정부가 환수해 오는 개발이익환수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선호시설 부담금제에는 몇 가지 보완책이 따라야 한다. 지자체가 선호시설의 효과를 과대평가하여 과도한 부담금을 지급하고 시설을 유치하는 이른바 ‘승자의 저주’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자체의 평가 역량이 강화될 필요가 있다.


아울러 평가위원의 중립성을 정부가 담보해 주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평가 기준을 내세우더라도 평가위원들의 판단이 신뢰받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박진 한국개발연구원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78955.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78956.html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478957.html



http://getupandgo.tistory.com/747   [메아리/1월 19일] 4대강도 결국 소통의 실패였다

http://getupandgo.tistory.com/904  지금은 國道에 '스토리(Story)'를 입혀야 할 때

 


Posted by 겟업
2014. 10. 31. 23:03

《 국방부가 모든 여군을 대상으로 성범죄 피해를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이달 말부터 다음 달까지 육해공군 여군을 대상으로 성범죄 피해 사례를 조사하겠다는 겁니다. 최근 육군 17사단장의 여부사관 성추행 사건이 계기가 된 거지요. 이번 국정감사에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28사단 윤 일병 구타사망사건. 잊으신 건 아니겠지요? 1심 재판의 마지막 공판이 1주일 뒤인 24일 열립니다. 육군은 4단계인 병사 계급체계를 2단계로 줄이는 것까지 검토하고 있다지만 병영문화개선 효과가 클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습니다. 국방개혁 일환으로 모병(募兵)제를 도입해 군대 문화 자체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할 때 징병제를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여전히 강합니다. 모병제 찬반 의견을 통해 국방개혁문제를 함께 고민해봅니다. 》      

       
▼ 모병제, 아직은 시기상조다 ▼


박용옥 대통령국가안보자문위원 전 국방부 차관

징병제냐 모병제냐 하는 문제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병력충원제도에 관한 것이다. 징병제는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국가가 국민 모두에게 군복무 의무를 부과하는 제도이다. 남북한을 비롯해 중국, 러시아, 브라질, 이스라엘, 터키 등 70여 개국이 채택하고 있다. 이에 비해 모병제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국가와의 계약에 의해 군에 복무하는 제도로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일본 등 100여 개국이 채택하고 있다. 

원래 징병제는 19세기 들어 전쟁이 국민 전체의 안위와 직결되는 양상이 되면서 돈 받고 싸우는 용병이 아니라 애국심과 국민 총동원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국민개병(國民皆兵)’의 개념으로 도입된 제도다. 유럽에서는 18, 19세기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의 유산으로 확립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보편적인 병력충원제도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우리는 1948년 건국과 함께 헌법이 모든 국민에게 부과한 ‘국방의 의무’에 따라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그동안 복무기간 단축, 병역특례제도 도입 등으로 징병제에 따른 문제점들을 보완해 왔는데 이제는 아예 모병제로 전환하자고 주장하는 여론까지 대두하고 있다. 일병 구타 사망 사건, 성추행 문제 등 흐트러진 군 기강과 관련이 높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모병제 문제는 섣부르게 거론할 일이 아니다. 현재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일고 있는 징병제 유지냐, 모병제 전환이냐에 대한 왈가왈부는 국민 개개인의 희망과 편익에 따라 좌우될 문제가 아니다. 병력 충원 문제는 현재의 안보위기 상황에 대처하면서도 앞으로 통일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북한지역 안정화(安定化) 작전 등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대비한다는 넓은 안목에서 생각해야 한다. 

먼저, 우리가 벤치마킹해 볼 수 있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전후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한 국가들의 예를 살펴보자. 이들은 모두 인접 국가와의 무력충돌 가능성이 희박하고, 자주국방 역량과 이를 뒷받침하는 경제력이 탄탄한 나라들이다. 국민 개인소득은 연평균 3만∼4만 달러 이상이고 병력 1인당 소요 국방비는 연평균 20만∼40만 달러에 달한다. 대표적인 이들 모병제 국가는 역사적으로 상무정신(尙武精神)의 전통을 갖고 있고, 군복무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대우받는 환경이다. 

우리의 경우 안보, 경제 모든 면에서 모병제는 아직은 시기상조다. 무엇보다 경제적 측면에서 현재 우리의 병력 1인당 소요 국방비는 연 4만 달러 수준으로, 선진 모병제 국가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의 안보상황은 아직 전쟁 재발의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모병제를 위해 보수(報酬) 등 병력 1인당 소요 국방예산을 지금보다 몇 배로 대폭 증액한다 하더라도 양질의 병력 자원을 필요한 만큼 확보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또 국방예산의 대폭적인 증액 자체가 정치·경제·사회 여건상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더욱이 모병제 도입 시 군복무 지원이 ‘없는 자’의 불가피한 생계수단으로 인식되는 풍조가 나타나는 등 더 심각한 사회 계층적 갈등요인으로 작용될 소지도 배제할 수 없다. 

우리는 현재 세계에서 전쟁 발발 가능성이 가장 높고 아주 위험한 지역으로 꼽히는 나라다. 무엇보다 국민 단합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미국 일각에서는 최근 다시 징병제로 전환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고, 중동의 아랍에미리트는 9월 1일자로 다시 징병제로 전환했다는 사실에서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군내 폭력 등 병영문화 개선은 시급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병제로 풀 일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안보다. 우리의 안보 문제는 범국민적 관심과 총동원 체제로 대처할 문제이지 섣부른 모병제 논란으로 치부할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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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국방대학원 교수, 국방부 군비통제관, 주미대사관 국방무관, 국방정책실장, ‘남북비핵화공동선언’ 협상대표, ‘남북고위급회담’ 군사대표,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 대표 등을 역임했다.

박용옥 대통령국가안보자문위원 전 국방부 차관


        
▼ 정예 모병제로 가면 된다 ▼


김기원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

윤모 일병 폭행 사망사건으로 나라가 떠들썩했다. 군대폭력에 대한 실태조사가 이뤄졌고, ‘병영문화혁신위원회’를 만든다는 발표도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경우를 보면, 이런 대책들은 시간이 지나면 흐지부지되고 만다. 물론 군대에서 배곯는 일은 사라졌고, 사망자 수가 줄기는 했다. 그러나 한국 군대는 여전히 “참으면 윤 일병, 못 참으면 임 병장”이다. 이젠 임시변통이 아닌 근본적인 국방개혁, 특히 징병제도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한국의 징병제에는 긍정적 기능도 없지 않았다. ‘빡빡 기는’ 군대생활과 그에 따라 사회전반에 파급된 군사문화가 고도성장의 촉진제였다. 열악한 작업환경하의 장시간 노동을 견뎌내는 힘이 거기서 길러졌던 것이다. 1970년대 중동 사막에서의 건설현장을 생각해보라. “군대 가야 사람 된다”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끝났다. 한국은 이미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다. 1. 모방이 아닌 이노베이션으로 승부해야 하고, 그러려면 창의적 사고를 억압하는 군사문화는 극복돼야 한다.2. 군대로 인한 경력 단절로 숙련 축적이 어려운 현재상황에서 벗어나야 중소중견기업도 튼튼해진다. 3. 대개의 선진국은 물론이고 중공군과 대치하는 대만에서조차 징병제를 폐지하기로 한 것은 인권문제와 더불어 바로 이런 경제적 고려 때문이다.

징병제 폐지에 대해 엄중한 분단현실 운운하지만, 인해전술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첨단무기와 그것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정예병 중심으로 안보를 굳건히 해야 할 세상이 되었다. 뭔가 좀 알 만하면 제대하는 지금의 징병제로는 전쟁기술도 잘 축적되지 않는다. 

4. 재정부담의 급증을 우려하기도 한다. 물론 군인들에게 어엿한 직장인 월급을 지급하는 모병제에선 그만큼 비용이 늘어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군인 수를 줄이고 정예로만 뽑는 모병제를 고려한다면 돈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인건비만이 아니라 군을 운영하는 의식주 등 각종 부대비용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모병제를 통해 효율적으로 인력활용을 한다면 오히려 국방비 부담이 가벼워질 수 있다고 본다.

모병제를 하면 결국 가난한 집 자식들만 군에 가는 게 아니냐는 주장도 있는데 한국에선 이미 힘 있고 돈 있는 집안 자식들은 요리조리 징병에서 많이 빠진다. 가더라도 주로 편한 자리에 배치받는다. 이런 형편에선 가난뱅이가 간다 하더라도 그 군대가 괜찮은 직장이 되도록 하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은가.

모병제가 군대폭력을 곧바로 일소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직업으로 군을 선택한 사람들이니만큼 서로에 대한 존중감은 커질 것이니 병영문화가 개선될 것이다. 덴마크처럼 징병제에서도 높은 사회문화 덕분에 군대폭력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 사회문화수준이 낮은 한국에선 역으로 징병제 폐지라는 파격적인 제도 변화를 통해 병영문화 나아가 사회문화를 바로잡는 길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주변에서 만난 적지 않은 군 간부들조차 모병제가 불가피한 대세고 시기와 방법만이 문제라고 한다. 모병제를 도입하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시행은 단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징병제 속에서 모병제를 확대해나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를 위해 종교적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즉각 도입해야 하며, 군대를 선택하지 않는 남녀 모두 일정 기간 공적 서비스에 종사하게 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예 모병제로 가슴 졸이는 병사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면서도 나라경제를 격상시킬 정치세력은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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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서울대 경제학과 학사, 석사, 박사를 졸업했다.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이며 베를린 자유대 객원연구원으로 현재 독일에 머물고 있다. 블로그 

Posted by 겟업
2014. 10. 30. 07:27

《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을 마련하기 위한 공청회가 오늘(12일) 열립니다. 교육계의 주요 이슈임을 반영하듯 교사와 전문가 등 무려 7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개정안에 따르면 고교의 경우 사회 과목은 ‘통합사회’로, 과학 과목은 ‘통합과학’으로 개편되고 한국사는 6단위(1단위는 한 학기 동안 1주일에 1시간씩)를 배워야 하는 필수과목이 됩니다. 교육부는 크게 3가지의 안을 내놨지만 과학계는 과학 교육이 축소될 가능성이 크다며 반발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시대에 대한 역행이라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교육 당국은 그동안 과학 수업이 충분히 확대돼 왔으며 개정이 되더라도 과학 교육이 축소될 우려는 없다고 반박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두 전문가의 말을 듣다 보면 역시 이번 개정에도 ‘소통’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동아쟁론을 계기로 더욱더 많은 쟁점들이 노출되어 원만한 합의를 이뤄내길 빌어봅니다. <오피니언팀> 》

        
       
▼ 과학수업 축소는 미래인재 육성에 역행한다 ▼


정진수 충북대 물리학과 교수 기초과학학회협의체 교육과정대책위원

합리적인 교육과정 개정을 바라는 과학계의 요구가 밥그릇 챙기기로 곡해당하고 있다. 과학계가 초중등 과학 교육에서 챙기는 이익은 없다. 다만 개정의 절차 방향 내용 모두에서 나타나는 심각한 문제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할 뿐이다. 개정 절차는 독점화 권력화되어 있고, 개정의 방향에는 미래사회의 인재상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다. 새 교육과정이 강조하는 맞춤형 교육도 학생들에게는 허울뿐이고, 기초소양을 약화시킬 우려가 크다.

1. 지식정보화시대인 21세기에 학생들은 기본적인 개념뿐 아니라 첨단지식의 변화도 어느 정도 알고 그 지식을 생활에 활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교육에는 시대에 뒤떨어진 박제화된 지식만 남아 있다. 첨단 지식의 변화와 경중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배제하고, 소수의 교육학자들에게만 독점적으로 개정 작업을 맡겨온 결과다. 

누구나 자기 분야가 중요하다고 요구하고 있으니, ‘이해관계’ 조정이 우선이라는 교육부의 주장은 궤변이다. 과목별 시간은 인재상과 교육의 방향을 정한 후에 결정하는 것이 순서다. 2. 각 과목에 배정되는 시간에 따라 사범대 졸업생의 취업률이 달라지는 현실에서, 교육과정 개정을 밥그릇 싸움으로 변질시킨 것은 시간 배정을 권력화한 교육부인 셈이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학생들이 정해진 교육과정에 따라 제대로 학습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임무다. 교육과정을 수능 체제에 맞추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일이다. 수능 체제가 결정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에 맞추어 교육과정의 틀을 정하겠다는 것은 ‘있지도 않은 꼬리(수능)’가 ‘몸통(교육과정)’을 흔드는 격이다. 

인재상은 교육과정 문서가 이것으로 시작할 만큼 중요하다. 민주화 다원화 선진화된 사회에서 미래의 인재상을 설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사회 여러 분야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며 교육의 방향을 정하는 노력은 꼭 필요하다. 방향도 정하지 않고 시간 배정부터 하겠다는 것은 설계도도 없이 땅부터 고르겠다고 덤비는 것과 다름없다.

지금의 교육내용은 학생들의 기초 소양을 충분히 길러주지 못한다.3.  일제가 교육비용을 절감하려고 만든 문·이과 구분 교육은 한쪽을 선택한 아이에게서 다른 반쪽의 학습권을 모두 빼앗는다. 선택권을 빌미로 지나치게 쪼개놓은 과목은 지식의 편식을 가중시킨다. 학생들이 들을 수 있는 과목의 무려 6배를 제공하는 현 교육과정에는 반드시 배워야 할 것과 배워두면 좋은 것이 마구 섞여 있다.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채, 입맛에 맞는 것만 고르라는 것을 맞춤형 교육이라 부를 수는 없다. 

최소한 가르쳐야 할 필수시간을 모든 과목에서 같이 줄이고, 진로에 따른 선택이 가능하도록 학교의 자율성을 확대하겠다는 것은 현실을 모르는 발상이다. 공식적 시간표도 지키지 않을 정도로 입시에 목을 매고 있는 학교는 자율시간을 입시 과목에 쏟을 수밖에 없다. 

지금 개정작업은 적체된 문제는 버려둔 채 시간 배정에만 매달리고 있다. 과학계는 미래가 필요로 하는 인재상부터 정립하고 교육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우선이며, 이를 위해서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모여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를 과학계가 과학에 시간을 더 배정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미국은 과학 교육과정 하나만 만드는 데에도 철학을 포함한 여러 분야의 전문가 수백 명이 모여서 안을 만들고 수천 명의 검토를 거쳤다. 최근의 지식도 소개하고,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역량도 강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교육부는 미래를 위한 방향 설정도 없이 10명의 교육학자에게 반년 만에 틀을 정하라고 한다. 이제 우리도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신중하게 정해야 한다. 어른들의 ‘이해관계’가 학생의 미래를 좌우하게 놔둘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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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속한 기초과학학회협의체는 대한수학회, 한국물리학회, 대한 화학회, 한국 분자·세포생물학회, 한국지구과학학회 연합회가 모여 기초과학의 발전을 모색하는 단체다.

정진수 충북대 물리학과 교수 기초과학학회협의체 교육과정대책위원

       
       
▼ 모든 과목 가르친다고 통합교육 되진 않는다 ▼


황규호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과정 개정 연구위원

문·이과 통합 교육과정 개정은 일차적으로 현행 수능 체제에 의해 야기된 문·이과 칸막이 문제를 없애는 데 취지가 있다. 문과생은 과학 교과를 소홀히 하고, 이과생은 인문·사회 교과를 소홀히 하는 문제점을 개선하려는 것이다.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창의 융합 인재는 인문학적 상상력과 과학기술 창조력을 고루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이과 통합이 문과와 이과 등 계열을 폐지하고 모든 학생이 동일한 과목들을 똑같이 이수하는 획일적 교육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기초소양에 충실하되 자신의 진로에 따라 여러 과목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해 이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이과 통합교육의 기본 방향이다. 핵심은 ‘맞춤형 교육’이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고등학교 공통과목이나 교과별 필수 이수단위는 학생들의 진로에 따른 맞춤형 교육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적정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과학계는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과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과학 기초소양 함양을 위해서는 과학 교과 시수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예를 들어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고 6단위를 배정했으니 과학에도 총 16단위(국어, 수학, 영어, 사회는 각 10단위)를 배정하라는 식이다. 또는 모든 교과에 15단위를 배정하되 도덕을 포함하는 사회교과군의 경우 이미 한국사에 6단위를 배정했기에 이를 차감한 9단위만 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문·이과 ‘균형학습’의 취지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는 1970년대부터 공통필수 과목으로 지정돼 있었다. 한국사 필수 지정이 곧 과학교육의 약화를 초래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학생들에게 과학적 기초소양을 반드시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모든 학생을 위한 ‘기초소양’의 범위와 수준을 어느 정도로 규정해야 할 것인가이다. 

1. 지난번 교육과정 개정에서 일부 과학계 인사가 ‘최소한의 과학적 소양’이라며 제시한 내용에는 전문 과학자들조차도 생소해하는 현대과학 지식이 다수 포함돼 있었다. 과학교사들이 당황했음은 물론이요, 학생들 또한 난해한 용어들과 씨름하느라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대 과학지식의 기본 개념들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의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학생들의 이해수준을 감안하지 않은 것이 문제인 셈이다. 세부적인 과학지식을 더 많이 학생들에게 꼭 가르쳐야 한다는 개발자의 과도한 의욕과, 학교교육 및 학생에 대한 이해 부족이 낳은 결과다. 

2. 다른 한편으로, 기초소양 교육에서는 “싫어하더라도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은 가르쳐야 한다”는 접근을 넘어서서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을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찾는 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국제 평가에서의 높은 시험 성적에도 불구하고 교과에 대한 흥미와 자신감이 왜 떨어지겠는가. 이 문제를 해소하려면 낱낱의 지식들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교과별 핵심 원리와 탐구능력을 엄선하고 이를 유기적으로 조직하여 사회 및 자연 현상에 대한 큰 그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많은 지식을 얕게 가르치기보다 적은 내용을 깊이 있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전 세계 교육계가 받아들이는 상식적인 경구다. 서울세계수학자대회에 참가했던 수학 천재들의 공통적인 조언도 더 많은 문제풀이보다는 기초 개념과 기본 원리의 이해를 강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교육과정 개정과 관련해 그동안 교과교육 전문가 및 학교 현장 교사들이 함께 참여하여 서로의 생각을 협의하고 조율해 왔다. 학습경험의 양보다 질을 개선하여 ‘배움의 즐거움’을 일깨우는 교육과정이 될 수 있도록 학생과 학부모와 학교 선생님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모두가 지혜를 모아주기 바란다.

이화여대 입학처장과 교무처장, 한국교육과정학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 구성 방안 연구’의 책임을 맡고 있다.

황규호 이화여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과정 개정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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