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0. 17:07

“백년 이상 먹고살 수 있는 한반도 설계가 내 마지막 業”

4강에 둘러싸인 한반도가 김석철 국가건축정책위원장에게는 무궁무진한 보물섬이다. “DMZ 희망도시, 세종시의 물류 세계도시화…미래와 세계를 내다본 한반도 국토인프라 설계가 내 마지막 업입니다.” 칠순의 김 위원장은 보물섬 탐험에 나선 소년처럼 벅찬 포부를 펼쳤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 한 달 전쯤 김석철 명지대 석좌교수(70·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 대표)가 전화를 걸어 왔다.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다들 하지 말라고 해요. 김 기자(그는 20년째 필자를 이렇게 부른다) 얘기 듣고 결정하려고 전화했어요.” 김 교수는 12년 전 위암 수술을 받은 뒤 암세포들을 미운 친구처럼 끼고 산다. 작년 여름 또 다른 암이 발견돼 넉 달밖에 못 산다는 선고까지 받았다. 독한 진통제를 밥 먹듯 먹으며 불같이 일하고는, 약 기운이 떨어지면 숨쉬기도 괴로워한다. 그 고통을 목격했던 필자는 순간 목이 메었다. “죄송해요. 선생님 (건강을) 위해선 안 해야 되는데 우리나라를 위해서 맡았으면 좋겠어요.” 전화통 저편에서 빙그레 웃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 말이 듣고 싶었어요.” 작년 12월 27일 박근혜 정부의 건축정책을 수립하고 주도할 제3기 국가건축정책위원회(국건위) 신임 위원장에 김석철 교수가 선임됐다는 정부 발표가 나왔다. 국건위는 국토환경 디자인 개선 및 건축문화 진흥을 위해 2008년 12월 출범한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다. 》

서울 광화문에서 숭례문까지 2km 구간을 ‘국가상징거리 1단계 사업’ 구간으로 정하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을 건립하는 기본 방향이 1기 국건위에서 나왔다. 하지만 한반도 전체의 국토 인프라 설계보다 지방자치단체 수준의 개별 사업에 치중한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DMZ내 에덴도시 건설 제안할 것

11일 동아일보 사옥을 찾은 김 위원장은 “작년 항암치료를 받고 퇴원하면서 마음이 급했는데 국건위 연락을 받았다”며 “비무장지대(DMZ)에 에덴동산 같은 21세기형 소도시 건설을 대통령에게 제안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행복시대를 만들겠다고 했지만 큰 그림은 보이지 않는다. 미래세대에 백년은 먹고살 수 있는 희망을 주어야 한다. 남북관계에서 답이 나올 수 있다. DMZ에 에덴동산이 있다. 지금은 우리가 분단돼 있지만 천혜의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전된 DMZ야말로 인류역사에 공헌할 공간이다. 여기에 농업과 소프트산업을 결합한 인구 5000∼1만 명 규모의 소도시를 남북 합작으로 건설하면 통일을 내다보는, 또 세계가 보러 오는 희망의 도시가 될 수 있다.”

경기고교 시절부터 ‘천재’ 소리를 들어서일까, 금강산 입구 석왕사 앞에서 태어나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남다르기 때문일까. 김 위원장의 인문학적, 지경학적(地經學的) 상상력은 보통 사람의 생각 범위를 초월한다.

동북아 끄트머리의 이 작은 땅덩어리가 그에게는 무궁무진한 보물섬이다. 바다 공항을 끼고 있는 인천은 르네상스 시대의 베네치아를 능가할 ‘아시아의 진주’이고, 한반도 허리를 관통해 중국과 일본을 잇는 동서횡단 운하는 수에즈 운하의 경제성도 뛰어넘는 황금광이다.

하지만 국민도 마음이 급한 판국이다. 언제 실현될지 모르는 장기계획 말고 1년 안에 국민이 변화를 느낄 수 있는 국건위 계획은 없느냐고 물었다.


한반도 전체가 무궁무진한 보물섬

“행복한 부동산, 창조적 재건축, 도시 수출의 3개 프로젝트가 있다. 쉽게 예를 들겠다. 10년 전 서울 북촌에 자그마한 한옥을 사서 건축사무실로 개조를 하려는데 한옥 목수가 없더라. 이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한옥에 물받이 홈통은 다 있으니까 홈통 가게를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싶어 찾았더니 정말 홈통 수리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북촌이 한옥촌이 됐고 목수는 300명이 넘고 외국인 관광명소로 떴다. 미국 영화감독 우디 앨런이 부인 순이를 위해 한옥촌 드라마를 만들지 모를 일이다.”

그는 국민 재산의 대부분이 부동산이므로 발상을 바꾸면 부동산이 국민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서울에도 개발할 곳은 얼마든지 있다. 4대강 주변도 한강변처럼 살릴 수 있다. 부동산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행복한 삶의 터전이 되고, 개·보수를 통해 일자리도 끊임없이 나올 수 있다. 선진국에선 신축보다 재건축 수요가 많다. DMZ 에덴도시 같은 소도시를 설계해 시공까지 통째로 ‘도시 수출’을 하면 청년 일자리 문제도 풀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여의도 마스터플랜, 서울대 관악캠퍼스, 경주 보문단지 건설을 해냈다. 이제 위원장을 맡았으니 ‘아버지 대통령 때 사람’이라는 소리가 또 나오지 않을까.

김 위원장은 일에 눈멀어 그 생각을 못 했다며 한방 맞은 시늉을 했다. “1970년대 말 박정희 대통령이 중동의 도시설계 진출을 시도해 내가 쿠웨이트 신도시를 설계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는 한번 결정하면 밀고 나가는 힘이 있었다. 내 느낌에 박근혜 대통령도 그런 힘이 있다. 아버지가 못 이룬 도시 수출의 꿈을 박 대통령이 꽃피울 수 있지 않을까.”


서울∼세종시 지하 초고속철도 뚫자

―한번 정하면 밀고 나가는 스타일을 권위주의적이라고 한다.

“대통령이 국익에 좋은 일을 선택해 밀고 나간다면 아름다운 독재가 될 수도 있다. 하하.”

김 위원장한테도 독재적 면모가 없지 않다. 여의도를 보행중심 도시로 설계했는데 가로축 한복판에 5·16광장이 생기고, 서울대 관악캠퍼스를 과천까지 이어진 연구중심 대학도시로 계획했는데 반쪽이 된 것을 지금도 유감스러워 한다.

정치에선 이해 당사자의 의견을 두루 듣고 양보와 타협을 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건축과 도시설계에서 그는 자신의 원안이 옳다고 믿는 모습이다. 암에 걸린 뒤 그곳에 사는 사람과 보는 사람들, 100년 뒤 주변에 살 사람과 구경올 사람까지 좀더 생각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세종시가 현재 모습으로 굳어진 데는 박 대통령의 역할이 컸다. 장차관부터 불편과 불만이 쏟아지는데 해결방안이 있나.

“정운찬(김 위원장의 가까운 후배)이 총리가 됐을 때 세종시 원안을 수정할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상대가 여자’라고 대답하더라. 당시 박근혜 의원이 미생지신(尾生之信·미생이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애인을 빗속에서 기다리다 익사했다는 고사성어) 속의 미생인 걸 몰랐던 거지. 2004년 수도 이전 지역으로 충남 연기군이 발표되던 날 수도 이전 불가론을 주장했던 사람이 나다. 요즘은 ‘길에서 사는 사람들’이 내게 세종시를 부탁한다고 말한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세종시를 중부권의 수도로 만들어내야 한다.”

김 위원장은 금강변과 한강변의 한 지점을 지하터널로 연결해 15분 안에 초고속철도로 달리는 꿈같은 프로젝트를 제시했다. 그게 가능한 일이냐고 필자가 입을 딱 벌리자 그는 빙그레 웃었다. “서울에서 세종시까지 120km이지만 지하 직선코스를 뚫으면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도버해협 유로터널(50.5km)보다 짧고 공사도 쉽다”는 거다.

초고속철도 유로스타로 20분 만에 도버해협을 건너 보면 누구나 절감할 수 있지 않던가. 영국이 더는 섬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세종시에서 서울을 눈 깜짝할 사이에 갈 수 있게 되면 한강변과 금강변 아파트값이 차이 날 이유가 없어진다. 그래도 세종시만으로는 경쟁력을 갖기 힘들다. 새만금 안바다를 활용하면 금강-새만금-세종시-대덕연구단지로 연결되는 물류 서비스산업 어번 클러스터가 가능하다. 금강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는 강이다. 당나라 소정방이 5만 대군을 몰고 백제로 쳐들어 올 때 배를 타고 금강을 거슬러 왔다. 사람과 물류가 유라시아철도의 출발점인 중국 동부 연안의 롄윈 강에서 서해를 통해 금강으로 이어지면 세종시는 세계도시로 도약한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동남권 신공항 같은 지역공약이 쏟아질지 모른다. 국건위에서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정치인이 국토 인프라를 놓고 장난하는 것은 역적질이나 다름없다. 지방 신공항은 최소한 인천공항과 경쟁할 만한 스케일이어야지 내 고장 살리기 정도로는 안 된다. 거제도와 여수 사이에 21세기 신공항을 만들어 항만과 접붙이면 ‘아시아 크루즈 루트’가 탄생한다. 중국에서 급속히 늘어날 크루즈 인구를 생각하면 백년은 먹고살 일자리가 나오는 거다. 천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영호남 문제도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다. 정치인이라면 세계와 미래를 보고 신공항을 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집권 기간은 짧다. 국건위는 긴 안목으로 한반도를 설계해야 한다.”


국토로 장난치는 정치인은 역적이다

그의 말을 듣노라면 한반도 전체가 보물단지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4강에 낀 토끼 모양, 또는 새우 크기의 약소국가가 아니라 지정학적 강점을 타고난 세계의 중심국가다. 두만강 하구에 동북3성-시베리아-동해를 아우르는 항만과 공항을 만들면 북한 경제를 살리는 건 물론 파나마 운하보다 엄청난 유라시아 경제권역도 이룰 수 있다.

―말만 들어도 환상적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박차고 나오는 거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정파가 없고’(?) 맑고 옛날식 애국심이 있다. 120년 전 갑오개혁은 실패했지만 3년 후인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다섯 철도망과 항만을 연결하는 한반도 인프라 구축을 선언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큰 대(大)자 대한민국을 성공시킬 것으로 믿고 싶다.”

다른 대통령, 새로운 2013년 체제를 꿈꿨던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와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평생 친구다. 김 위원장은 “백 교수 집을 설계할 때 진보가 좋은 집 짓는 것을 죄스러워 하더라”고 전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금융위원장을 지낸 김석동 씨는 그의 동생이다.

“가족들에게 남길 유산을 정리한 밤에 꾸란(이슬람 경전)을 보았다. ‘네가 죽은 뒤 가족이 너를 잊어도 네가 선행을 베푼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네가 인간 공동체를 위한 업(業)을 이룬다면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라고 쓰여 있었다. 내게는 국건위가 마지막 업이다.”

김순덕 논설위원


http://news.donga.com/List/Column/3/04/20140113/60120452/1

Posted by 겟업
2014. 10. 20. 16:35

[여성 1호를 만나다]<1>여상 출신 삼성전자 첫 임원 양향자 상무
“아부지, 내가 알아서 할게” 그 무거운 약속을 평생 지켰다


양향자 삼성전자 상무가 14일 대전 충남대에서 열린 ‘열정樂서’ 토크콘서트에서 ‘삼성 드림클래스’ 겨울캠프에 참가한 중학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대전=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대한민국에서 새해 벽두부터 여성 은행장, 여성 검사장 등 여성 진출의 보이지 않는 장벽이었던 유리천장 깨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있습니다. 

본보는 지난해 10월부터 두 달간 총 6부 34회에 걸친 장기 시리즈 ‘신 여성시대’ 기획을 통해 대한민국 일하는 여성들의 현주소를 다양한 각도에서 짚어보았습니다. 새해에도 바통을 이어받아 ‘여성 1호를 만나다’라는 간판으로 여풍(女風)의 현주소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동안 인사 소식으로만 짧게 접했던 사람들을 포함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분야의 ‘여성 1호’들을 발굴해 심층 인터뷰한 뒤 매주 오피니언면 기획란을 통해 소개할 예정입니다. 이들이 살아온 이야기는 단순히 개인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라 이 시대를 열심히 살고 있는 생활인들의 이야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성 1호를 만나다’ 첫 회 주인공은 삼성전자에서 여상 출신으로 최초로 상무가 된 양향자 씨(사진)입니다. 》

지난해 12월 발표된 삼성그룹 임원 승진 인사에서 유독 빛나는 이름이 있었다. 양향자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상무.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출신으로 광주여상을 졸업해 삼성그룹 설립 이래 최초로 여상 출신 임원이 된 인물이다.

세간의 관심에도 나서기를 꺼렸던 양 상무가 14일 오후 대전 충남대에 모습을 드러냈다. 양 상무는 이날 ‘삼성 드림클래스’ 겨울캠프에 참가한 중학생들의 멘토가 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무대에 오르기 전 대기실에서 만난 양 상무는 “강연 요청을 받고 이틀 밤을 지새우며 인생을 되돌아봤다”고 했다. 남들에겐 평범한 강연일지 몰라도 자신에겐 누구보다 절실했고, 그래서 치열하게 살았던 날들을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이날 초대된 중학생들은 모두 지방 중소도시나 산골, 섬 등에 사는 저소득층 아이들. 그는 30년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더 고민했다고 했다.

“제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제 고향은 전남 화순군 쌍봉리예요. 혹시 아세요?” 양 상무는 그렇게 산골소녀 시절의 향자로 돌아가 자신의 지나온 이야기를 꺼냈다.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는 봉우리가 두 개인 산자락에 양씨와 정씨 200여 명이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다.

“누나, 아부지가 얼른 안방으로 건너오란다.” 남동생이 불렀다. 폐가 좋지 않았던 아버지는 평생을 안방 이부자리에 누워만 계셨다.

“향자야, 이제 나는 얼마 안 남은 것 같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더 기력이 없었다. 퀭한 눈 때문에 별명이 ‘소 눈’이었던 아버지는 큰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동생들 잘 부탁한다.”

농사짓는 할아버지, 할머니, 광주 시내에서 장사하는 어머니를 대신해 두 명의 오빠와 두 명의 남동생을 챙기는 건 어릴 적부터 나의 몫이었다. “아부지. 제가 알아서 할게.” 1982년 겨울 어느 날, 아버지와 했던 나의 첫 번째 약속이었다. 열다섯 살 때 일이다.

아버지를 떠올린 양 상무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따 무대 위에서 이러면 안 되는데…. 기자님도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 해본 적 있죠? 보통 사춘기 때는 선생님 잔소리 피하려고, 부모님한테 짜증이 날 때 하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저한테는 이 말이 내 인생, 그리고 우리 가족을 책임지겠다는 무거운 약속이었어요.”

한때 대학교수가 돼 강단에 오르는 꿈을 꿨던 소녀 향자는 곧장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말없이 일주일 전 꼬박꼬박 눌러쓴 인문계고 입학 원서를 반으로 접어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다음 날 광주여상 입학원서를 새로 썼다. 

특별할 것 없었던 여상 시절이 지나갔고 1985년 겨울 또 한 번의 갈림길에 섰다. 대학을 갈 것인가, 취업을 할 것인가. 사실 대학에 정말 가고 싶었다. 가서 제대로 영어도 공부하고 싶었고 그토록 되고 싶었던 교수라는 사람들도 직접 보고 싶었다. 현실은 취업뿐이었다.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겠다던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경기 기흥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 메모리설계팀에 입사했다. 대졸 연구원들의 업무를 돕는 보조, 이른바 ‘시다바리’였다. 매일 오전 7시 출근해 복사 일부터 연구원이 던져주는 반도체 회로를 도면에 그려내는 단순 업무를 반복했다. 손은 주어진 대로 움직였지만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욕망했다. ‘회로를 왜 저렇게 그리는지 알아야겠다. 더 배워야겠다, 더 공부해야겠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이 반도체 업계 1위였다. 회사에는 일본 선진업체들이 일본어로 출판한 기술서적이 많았다. 기술을 알려면 일본어부터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8세 말단 직원은 겁도 없이 사내(社內) 일본어 학습반에 들어갔다. “고졸인 네가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는 강사의 비아냥거림과 대졸 연구원들의 텃세를 견뎌가며 매일 3시간씩 공부했다. 주말에도 기숙사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공부했다. 그리고 3개월 만에 가장 먼저 일본어 자격증을 땄다.

‘일본어를 기가 막히게 하는 여사원이 있다’는 소문이 나면서 연구원들이 번역이 필요한 일본 서적을 들고 찾아오기 시작했다. 기술 자료를 밤새워 번역하다 보니 반도체 설계 업무에 대한 이해는 덤으로 따라왔다. 어느덧 반도체 설계 업무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1990년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임신했다.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의 첫 임신부였다. 전례가 없던 일이라 ‘회사 관두지 않느냐’는 말도 수시로 들려왔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 그리고 나 스스로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내가 알아서 잘하자.’

아이를 낳고 나니 바람은 더 커졌다. 부산 시댁에 맡겨놓고 한 달에 한 번밖에 보지 못하는 딸아이에게 훗날 부끄럽지 않을 엄마가 돼야 했다.

1993년 인사팀에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사내 기술대학 반도체공학과 입학원서였다. 여상을 졸업할 때 그토록 써보고 싶었던 대학 원서였다. “여사원은 사규상 뽑을 수 없다”는 인사팀 과장에게 ‘시험이라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그렇게 들어간 대학이었기에 매일 오후 4시 퇴근 직후부터 오후 9시까지 수업을 들으면서도 피곤한 줄 몰랐다. 3년 뒤엔 함께 입학한 남자 직원들을 제치고 수석으로 졸업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입사 22년 만인 2007년 메모리사업부 D램 설계팀 수석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에는 성균관대에서 전기전자컴퓨터공학 석사 학위도 땄다. 대학도 못 갈 줄 알았던 내가 석사라니….
양 상무는 조직의 일부를 책임지는 수석 자리에 오른 후 여성 리더로서의 장점을 본격적으로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회사에서 후배들 사이 그의 별명은 ‘이모’. 든든한 이모처럼 후배들의 뒤를 지켜준다는 의미에서다. ‘열혈 부장’ 시절 그의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중국 우한(武漢)에서 결혼하는 중국인 직원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휴가를 내고 비행기에 오른 것.

“중국 사람이니 당연히 외동아들일 거 아녜요. 이왕 간 김에 돌아가신 직원 아버님을 대신해서 축사도 직접 읽었어요. 축사 준비하면서 덤으로 중국어 자격증도 땄으니 일석이조죠.”

그리고 부장 6년차이던 지난해 12월 5일, 아버지 30주기 제삿날이었던 그날 아침 그는 당시 상사였던 전동수 삼성전자 사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양 상무, 축하해.”

30년 전 아버지가 하늘의 별이 됐던 그날, 그는 삼성의 별이 됐다. 그는 삼성그룹 역사상 최초의 여상 출신 임원이다.

별을 달던 순간 아버지 얼굴부터 떠올랐다고 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약속을 지키려고 열심히 살았으니까, 그 세월을 보상받은 거겠죠?” 아버지가 당부했던 대로 양 상무는 두 동생도 자랑스럽게 잘 키워냈다. 막냇동생은 누나를 따라 입사해 삼성맨이 됐다.

가족은 양 상무가 ‘지키기 위해’ 애써 온 존재이자, 입사 후 28년간 그의 삶에서 필요한 순간 가장 먼저 손길을 내어 준 은인들이다. “승진하고 나서 고향에 계신 어머니께 전화드렸어요. 이미 양씨 문중에서 고향에 플래카드를 걸었더라고요. 열혈 시부모님 생각도 났어요. 아이 둘 대신 키워 주시느라 부산에서 결국 제 회사 옆인 수원으로 짐 싸들고 올라와 주셨거든요.”
떨리는 목소리로 무대에 올랐던 양 상무는 이날 강연의 마지막을 이렇게 맺었다. “제가 여러분의 30년 후 미래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제가 미리 타임머신을 타고 왔다고 생각하세요. 여러분의 30년 후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저는 여러분 모두 훌륭하게 성장하리라 믿습니다.”

2000명의 학생이 보내는 박수 소리가 강당을 가득 메우자 양 상무 눈에서는 끝내 참았던 눈물이 또 한 번 터져 버렸다.

Posted by 겟업
2014. 9. 14. 13:55





Posted by 겟업
2014. 8. 18. 02:25

“너는 외국인이고 여자고 나이가 많아서 안 돼.”

 이 말과의 싸움이었다. 철학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건너간 독일에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였다. 하지만 그는 주변의 말 대신 온전히 자기 자신에만 집중했다. “나를 만류하는 사람들을 이해는 했어요. 하지만 제 인생이잖아요. 남들이 나만큼 나의 재능을 잘 알 수 없죠.”

 독일 쾰른 대학병원의 정신의학과 부원장으로 있는 이선희(56) 박사 얘기다. 그는 올해 창간 60주년을 맞은 이대학보사가 선정한 ‘자랑스러운 이대학보인상’ 수상자다.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그와 지난 17일 만났다.

 그는 이화여대에서 철학과 학·석사 학위를 마치고 1983년 말 독일 보훔대로 유학을 떠났다. 석사 논문의 주제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이었는데 보훔대에 헤겔 연구소가 있었다. 하지만 기대했던 학풍이 아니었다. “80년대 우리나라는 정치사회 이슈로 매우 치열했잖아요. 그런데 거기 교수들은 헤겔이 옛날에 썼던 일기책이나 사러 돌아다니더라고요. 뭔가 죽어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는 일단 ‘외도’를 해보고 철학이 그리워지면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의사였다. 학창시절 가장 자신 있었던 과목이 수학이라 의대 입시가 수월해 보였다. 주변의 만류가 이어졌다. “저한테 왜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지 물어보지 않고 ‘인문계라서 안 된다, 외국인이라서 안 된다’고 하더군요. 내 인생이고 내가 제일 나를 잘 알잖아요. 오히려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만 강해졌어요.” 의대 입시 공부가 어렵진 않았을까. 그는 도전을 구체화 해나가는 과정에 타협은 없었다고 했다. 월·주·일단위로 계획을 세세하게 짜서 입시를 준비했다.

 결국 85년,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쾰른대 의대에 입학했다. 6년의 공부 끝에 당시 인기가 좋았던 외과의 레지던트가 됐다. 암병동에 진찰을 다닐 때였다. 환자들로부터 “닥터 리랑 얘기하면 마음이 편해져 신경안정제를 덜 먹게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때 이 박사는 ‘나도 정신과 의사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됐다. 주변에서 또 말렸다. 독일어가 완벽하지 않은데 어떻게 환자들을 심리 치료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외국인 유학생들은 말을 자주 할 필요가 없는 마취과나 방사선과를 택하곤 했다. 하지만 이 박사는 1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다시 정신과 레지던트가 된다. 당시 면접에선 철학 공부가 큰 도움이 됐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정신의학과 철학의 유대가 강한 나라다. 대학교 1학년 때 읽었던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인용한 답변으로 점수를 많이 땄다.

 의학박사 학위와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VIP 환자들을 담당하게 됐을 때였다. 주위에서 “외국인 의사가 진찰하면 환자가 다 떠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의사 동료의 이런 편견에 부딪힐 땐 “나처럼 다른 문화에서 온 사람이 오히려 너희한테 도움이 된다, 나를 차별하는 것을 극복해야 진정한 시민이 될 수 있다”며 설득했다. 한 달 뒤에 그만두려는데 환자들로부터 ‘닥터 리가 그만두면 어떡하냐’는 편지가 쏟아졌다. 이 박사는 자신이 동양인 출신에 철학공부를 했던 게 환자 치료에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그는 29년 전 ‘외도’에 만족해 했다. 도전을 머뭇거리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주변 신경 쓰지 말고 도전하세요. 도전하지 않으면 얻는 것도 없어요. 실패를 하더라도 그 실패를 통해서 무엇이든 얻게 돼 있어요.” 그는 외도의 끝을 철학박사 학위를 따는 것으로 마무리 할 예정이다. “철학자로 돌아가겠다는 건 아니고요, 단지 마무리를 하고 싶어서요.”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4205109&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3. 11. 1. 22:59

그동안 커쇼는 그냥 공 잘던지고, 기부 잘하는 선수인줄 알았는데 이제 커쇼는 내 삶의 좌표가 될 것 같다.



지인이랑 MLB 이야기 하다가 왜 커쇼가 그렇게 인기많은줄 아냐고, 왜 공 잘 못 던져도 안 까이는줄 아냐고 물어보셨다. 


미국인들에게 커쇼는 히어로 같은 존재라고 했다.


미국에 오래 산 그 분 말씀은 즉,

커쇼가 그냥 야구를 잘해서가 아니라 커쇼의 삶 자체가 미국인들이 존경할만한 삶이기 때문이다. 유럽축구선수들가 비교하면 답이 나온다. 많은 유럽 축구선수들은 축구 잘해서 돈 많이 벌어 스포츠카 사고, 모델 여자친구 사귀고, 호화스러운 파티 여는데, 커쇼는 경기장에서 실력 최강에 멘탈 최강으로 존경을 받으면서도 일상에서 기부도 많이 하고, 고등학교때 만난 여자친구와 결혼하고, 오프시즌마다 아프리카로 봉사활동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임에도 검소하고 늘 겸손하면서 그걸 나누는게 얼마나 프레셔스한 삶이냐, 그렇기 때문에 커쇼가 한 번 부진하다고 절대 까이지 않는 것이라는 것.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었음에도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자신보다 더 못한 이들을 돌보는 삶. 


아  정말 프레셔스하다. 나도 이렇게 살고싶다.





I always say the first time you’ve hugged a Zam­bian orphan it’ll change your life,” she told Dodgers Magazine. “It’s because that whole blanket of poverty becomes very personal, and you see the one life that you can impact and what a difference you can make… Going to Zambia really broadened both of our perspectives. I think we’re just trying to leave a legacy, leave a mark.”


Posted by 겟업
2013. 10. 15. 11:33

공 하나 던지기 전 경기장이 숨죽이는 순간.


집에서 티비로 보는 나도 숨막히는데 말도 안통하는 외국에서 마운드에 혼자서서 저 분위기에 압도되지 않는 당당함.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변화를 드러내지 않는 위기관리 능력. 저 나이에 멘탈 최강이다ㄷㄷㄷ


류현진의 당당함과 위기관리 능력은 배워야 한다. 아, 물론 저 당당함은 실력에서 나오는거다.


류현진 경기보면서 또 감동하는건 미국 야구장 시설. 쩐다. 색상부터 정말 세련돼 보인다. 저게 미국이구나 싶다.


2013년은 류현진 덕분에 정말 즐거웠다.








Posted by 겟업
2013. 7. 22. 13:15

허영만 <식객>에도 나오는 학교 앞 유명한 멸치국수집. 특히 학식이 문 닫는 일요일 아침에 도서관에 들어가면서 가기 좋다. 

오늘 테이블 옆에 이런게 붙어 있어서 몇번이고 읽으면서 멸치국수가 아닌 반성국수를 먹고 돌아왔다. 


각자의 성공의 정의는 다르지만 그래도 성공하는 사람은 이유가 있는 법이다. 

다들 성공하고 싶고, 부자고 되고 싶어해도 그들의 성공 뒤에 숨은 노력은 보지 못하거나 알고도 시작하지 않는것 같다. 

그건 그렇고 나는 잠자는 시간이 아깝지 않을걸보니 대성하긴 글렀다.  이제 열심히 공부하고나서 사장님의 맛있는 멸치국수를 먹어야겠다. 오늘도 열심히! 




 식당 위 다락방에 누워서도 손님들의 맛 품평을 들어요
  
《식객》에도 공개하지 않은 5% 비법이 있다. 국물만들기 마지막 단계로, 위의 재료들을 40분 정도 우린 국물에 곱게 간 양파와 마늘, 다시마 등을 넣는 것. 마지막에 넣기 때문에 각각의 양념 고유의 맛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이 집에서는 국물에 소금을 넣지 않는다. 대신 멸치 젓국으로 간을 맞춘다. 조미료를 일체 넣지 않는데, 손님들이 “에잇, 조미료 맛이 나네” 할 때가 가장 억울하단다. 국수는 소면으로 삶아야 맛있다, 중면이 더 맛있다 의견이 분분하다. 최 사장의 말.  “소면으로 삶으면 너무 빨리 불어요. 중면은 불지 않았는데 손님들이 보자마자 불었다고 그래요. 시각적으로 불어 보이는 거죠. 그래서 저는 소면과 중면 중간 굵기의 국수를 따로 주문해서 만들어요.”  주방 옆 테이블에는 부추와 대파 등이 쌓여 있는데, 밭에서 막 뽑아 온 것처럼 신선했다. 최 사장은 이곳을 열기 전에 남편과 함께 과일가게를 운영했다. 이때 터놓은 청과물 도매상에서 신선한 재료를 사 온다. 지금도 장보기는 최 사장이 이틀에 한번씩 직접 한다.
 

최은주 사장은 “뭐든 쉽게 얻는 것은 없는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24시간 운영하는데, 예전에는 새벽 3시까지 했어요. 직원들이 다 퇴근한 후 혼자 주방에 남아 밤새 맛을 연구했죠. 주변 사람들은 저한테 미쳤다고 했어요. 잠도 자지 않고 음식 맛 연구만 하니까. 그때는 맛을 찾는 것에 혈안이 돼 있어서 잠자는 시간도 아깝더라고요.”  그는 요즘도 하루에 2~3시간 잘 때가 많다. 그의 침실은 식당 위 다락방. 천장이 얇아 손님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다 들리는데, 국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벌떡 일어나 귀를 쫑긋 세운다고. 계산대에 서서 국수를 먹는 손님들의 표정과 반응을 유심히 살피는 게 그의 가장 큰 임무다. 스스로 “예민해서 상처를 잘 받는다”는 그는 손님이 불평 한마디만 해도 상처를 받는다.

  “20~30년 된 국숫집들이 많은데, 역사가 짧은 집에서 좋은 맛이 나오겠느냐고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열심히 연구해서 찾아낸 맛인데 쉽게 얻어진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을 보면 속상해요. 간혹 입에 안 맞는다는 분이 있으면, 어떻게 더 맛있게 만들까를 늘 고민해요. 그런 날은 잠도 안 오죠.”  그의 또 다른 일과는 소문난 맛집 다니기. 설렁탕집이든, 갈비집이든 혼자 다니면서 진지하게 맛을 보고, 그 비결을 고민한다. 얼마 전에는 행주산성 근처에 있는 유명 국숫집에 다녀왔다고 한다.


 3000원짜리 멸치국수에는 3000가지의 시행착오와 노력이 담겨 있었다.


Posted by 겟업
2012. 9. 5. 22:04
인물사진

 

http://blog.daum.net/parismadame/8792252

http://blog.daum.net/parismadame/8792273

 

 

 

 

취직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계속 공부하고 싶다.

졸업을 앞두고 하루에 수십번도 마음에 왔다갔다한다.


그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공부 시작하면 박병선 박사님 반 만큼이라도 할 수 있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yes 라는 대답이 나온 적이 없다.

 

 

혹시 내가 대학원을 진학하고, 학자가 된다면 그 출발점은 박사님 절반 만이라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일거다.

약속 지켜라.


 

Posted by 겟업
2012. 8. 20. 15:18
이젠 진짜 롤모델이다.

존 우드는 한때 나의 롤 모델이자  내가 '그래! 나도 존 우드처럼 세상을 바꾸겠어'라고 외치며 1년 동안 국제개발 분야를 뛰어다니도록 만든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히말랴야 도서관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는데 원서는 제목이 leaving Microsoft to change the world 인가보다.

제목에서 말하듯이 존우드는 MS를 다니다가 나왔다. 그냥 MS 직원이 아니라 빌게이츠의 오른팔 스티브 발머의 오른팔(?)이었을 만큼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다. FYI 스티브 발머는 엑셀프로그램 만든 개발자.


네팔. 정말 열악하다. 험준한 히말라야 산맥때문에 발전할 수 없는 땅이다.  

산업이 발달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관광으로 먹고 사는 네팔을 찾는 사람들 일 년에 50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관광객 대부분은 히말라야 등반을 위해 똑같은 코스를 오르는데 그 곳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사탕, 초콜렛을 주고, 돈을 쥐어준다. 그래서 아이들은 관광객만 보면 'sweet, sweet' or "1 달러, 1달러" 하면서 달려든다.

양치를 못하는 환경에서 오히려 충치를 키운다며, 관광객에 지나친 의존도를 키운다며 입산 부터 절대 돈과 사탕을 주지말고 만약 뭐라도 도움을 주고 싶으면 치약, 칫솔, 학용품을 주길 권하지만 어린 아이들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마음 때문에 줘버리니깐 부모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내 교육시키기 보다는 앵벌이를 시키거나, 단 것만 먹어 이가 썩는 등의 부작용이 계속해서 나타나 버린다.


그런데 존 우드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수만명이 똑같은 코스를 올랐지만 존 우드만이 그 곳을 실질적으로 바꾸려고 결심했다. 

자세한 내용은 책에 나오고, 비결은 실행력+ 인적 네트워크.






처음 존 우드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을때는 나도 들떠서 아시아 빈곤 퇴치를 위해 힘쓰겠어라는 마음을 먹었지만 

나는 아마도 존 우드처럼 숭고한  일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존우드는 나의 롤모델이고, 나는 존 우드 같은 선진국형 인간이 되고 싶다.


좋은 나라에 태어나서 세계에서 충분히 경쟁력 있는 자국 대학 졸업해서 상대적으로 쉽게 다국적기업에 취직해서 세계를 출장을 다니고 주말엔 가족들과 보트를 끌고 다니고 와인 테이스팅을 취미로 가진 사람이 아니라 세계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자신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실행하는 인간 말이다. 



2010년  미 뉴스위크지에서 한국을 베스트 국가 15위로 꼽았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있다. 질문이 멋있어서 메모해둔 기산데


'지금 이 순간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면 건강하고 안전하며 적당히 부유하고 신분 상승이 가능한 삶을 영위할 기회가 많을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기획했다고 밝혔다.


(솔직한 심정으로 한국인의 경쟁심리에 내 앞에 14개의 나라나 더 있어? G7 갈려면 멀었네. 라는 생각이 먼저란건 부인하지 않겠다)


그래도 나는 200개가 넘는 나라 가운데 15 번째로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서 건강하고, 안전하고, 적당히 부유하고, 내 노력의 여하에 따라 신분상승이 가능한 삶을 살 기회를 받았다. 게다가 인터넷도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중요하다!) 온갖 신기술의 베타테스트장에 되는 곳에 살고 있다. 특히나 교육 부문에서는 세계 2위라고 하니 내가 받은 교육은 우주최강라는 뜻 아닌가(도대체 기준이 뭘까-_-)



맞다. 나도 존 우드처럼 살아야한다. 


이름 있는 연봉 높은 직장에 취직해서 좋은 곳에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았던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키는 삶을 위해 살아야 한다.
 
그동안은 나만 잘 살고, 내 민족만 잘 살고, 내 나라만 잘 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이해하고 참여하는 방법을 찾고, 
실제로 실행하면서 내가 받은 행운을 세계에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 것이 내가 얻은 행운을 갚는 방법이다. 

안그러면 나는 다음 생엔 이상한 걸로 태어날지도 모르잖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쓰일 수 있도록 공부할거다.

그리고 다음에 꼭 그 일을 실행한거다.



선진국형 인간으로 살기.




+) 여행한 후 깨달은 생각은 나라마다 너무나 생각, 문화, 현실이 다르므로 최빈국을 제외하곤 원조보단

'기업가 정신'을 키워주는 교육을 하는게 어떨까. 뜬금없이 창업강의하는것도 웃기지만 자신 주변을 둘러보고 생각하면서 아이템을 찾고, 그걸 만들 창의력말이다.


Posted by 겟업
2012. 8. 17. 20:56

사실 나는 오바마에 대해 잘 모른다.

 

현존하는 최강대국 미국의 대통령.

그를 처음 봤을때 나는 그렇게 선해보이는 정치인을 처음 봤고.

컬럼비아-하버드 로스쿨 출신, 하버드 크림슨 흑인 최초 편집장 출신아라는 스펙.

전세계에 오바마 열풍을 몰고와 한때 서점가와 언론에 오바마 스피치, 오바마 스타일이 유행했던 것.





 

그런데 내가 오바마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은 당선 후 들었던 한토막의 뉴스 덕분이다.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되던 날 나는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고  mp3를 통해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미국 특파원은 미국의 축제분위기를 전하면서 뉴욕의 흑인 커뮤니티에 가서  한 흑인을 인터뷰를 했다.

그 흑인이 말한 내용은 대략 이랬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어렸을때 항상 말씀하셨죠. 너는 앞으로 열심히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심지어 대통령도 할 수 있을거야. 하지만 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흑인 중엔 아무도 대통령을 했던 사람이 없으니깐요. 하지만 이제 저는 제 아들에게 열심히 노력하면 너는 대통령도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제 아들은 믿을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깐요."

 

 

그 후로 내 삶의 프레임이 참 많이 바뀌었다.


그 전엔 자국민은 천대하던 정책에 반대했고, 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이 땅에 살려는 사람들에겐 2배, 3배 엄격한 잣대를 적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필리핀 결혼이주여성의 국회 진출, 외국인 국가대표축구팀 선발 논란 등의 문제에 있어서 한국인 경쟁자보다 2~3배 쯤은 뛰어나야만 그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바마 덕분에 꿈을 꿀 수 있는 흑인 사회 아이들을 보니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 실력만 있다면 그 자리에 반대 여론를 무릅쓰고라도 외국인을 앉히는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들의 자녀와 친구들 수백 ,수천명의 어린이들도 함께 꿈을 꿀 수 있을테니깐. 그러면 한민족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 나와서 대한민국에 분명 긍정적인 에너지를 선사할 수 있지 않을까? 


롤모델은 꿈을 심어준다.

오바마가 미국에 뿌린 희망의 메시지는 얼마나 많은 미국의 흑인어린이들이 꿈을 꾸게 만들까.

그래서 나는 진심 앞으로 미국이 더 무섭다.


 

Posted by 겟업
2012. 8. 17. 20:35

"이효리씨 아시죠?"

"이름이 이상하네요..."

 

라고 대답해 국민요정 이효리에게 굴욕을 안긴 안철수 교수님 같은 극소수를 빼곤 아마 대한민국에서 이효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을까?



우상만 13498172 명이라 미어터지는 나의 우상 신전에서 누구를 가장 처음으로 선택해야할지 고민 끝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보다 내 관점을 가장 크게 많이 바꾼 인물 '이효리'를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TV를 안보고 살아서 흔한 유행어도 모르는 내가

2000년도 이후 발매된 음악이면 다 최신곡이지 이런 소리하는 내가

연예인의 무식함이 싫어 퀴즈와 다큐멘터리를 선호하는 내가


이효리가 나의 첫번째 스승(?)이라고 말한다면 안 어울릴만도 하다....


사실 나는 '본성 불변의 불칙'을 믿는 사람이었다.

인간은 어느 정도의 경험과 연륜을 통해 약간은 유해질수 있지만 나도, 남도 본성은 바뀌지 않을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나에게 이효리는 인간이 얼마나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던 인물이다.


 



                      

    언니 예뻐요




 

 

10년 전 대한민국은 이효리에 열광했다. 이효리가 입고 나온 옷은 어김없이 다음날 인터넷쇼핑몰과 동대문시장에 효리st. 로 출시되었고, 스포츠신문사엔 이효리 전담반까지 생겼고, 당시 인기있던 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님을 감히(?) 강효리라고 부를만큼 대한민국은 효리왕국으로 변했다  (서태지, H.O.T. 이효리 이렇게 대한민국 3대 신드롬이라던가? )


효리 신드롬 속에서 내가 이효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된 계기는 'off the record:이효리'라는 케이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말그대로 톱스타 이효리의 일상을 밀착취재한 프로그램이었고 프로그램은 이효리의 화려함과 고충을 여과없이 보여주고자 노력했고 인기도 상당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그 당시 이효리 말 한마디는 곧 다음 날 스포츠 기사 1면이었지...). 프로그램을 본지는 꽤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 당시 내가 기억하던 이효리는 와 어쩜 저렇게 자신만만하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이 잘난 것을 알고 당시 조용한 아이돌들과 달리 자신의 성격을 방송에 과감하게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였다. (이 언니는 젖소 천마리 내 것이 되는 시간이 just 10 minutes 이라잖아. 이건 알프스 목동의 할아버지가 와도 불가능해.)

자칫 거만하다고 비춰질 수 있었지만 요정출신 걸그룹에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솔직함과 톱스타답지 않은 털털함에 오히려 사람들은 반했다. 혹시 조금이라도 겸손했다면 오히려 그 당시 이효리의 이미지를 갉아먹을 정도로 느껴졌달까? 

그 당당함 + 털털함에 사람들은 열광했고, 톱스타 이효리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인기라는건 역시나 화무십일홍, 그 후로 몇 년간  나도  TV없는 생활이 지속되고, 이효리도 점점 잊혀져갔다. 

간간히 앨범 발표때마다 노래는 없고 섹시함만 있다고 질타를 받았고, 대담하게 연기에 도전했다가 발연기 혹평을 받았고

표절, 고소 등등 안 좋은 소리가 나오면서 톱스타 타이틀을 빼앗기진 않았지만 상당히 큰 타격을 받았다.

 

 

 

 


내가 다시 이효리를 만난 것은 힐링캠프였다.


이번에 이효리는 10년 전과 다르게 너무나도 달라져있었다.

당당함은 간직하면서 겸손함을 더했고 자신의 영향력을 긍정적으로 쓰기위해 사회 참여를 하는 소셜테이너로 변해있었다.


자신도 인정하듯 여전히 부족하지만 성장 중이다. 

수많은 걸그룹 여자들이 덤프트럭의 시멘트처럼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아직도 살아남은 것도 대단하지만 

더 대단한건 더 성장할 그녀의 10 년 후 모습을 더 기대하게 만드는 능력이다.

"제가 앞으로 어떻게 변하는지 친딸처럼, 언니처럼, 조카처럼 쭉 지켜봐주세요"라는 

끝인사를 남긴 그녀를 보고 있으니 앞으로 10년은 더 건재할 것 같다.



"지금 내가 기부를 하고 있긴 하지만, 제가 쓰고 넘치는 것만 기부하고 있다. 나는 내가 쓸 것도 줄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효리 멋져요가 아니라 지금부터다)



그 후로 나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때 싸가지 없던 그 친구는 여전히 싸가지 없을 것' 이라고 단정짓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왜냐고? 사람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깐. 

그래서 나 역시도 내 성격에서 마음에 안드는 부분이 눈에 빤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걸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왜냐고? 사람의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깐.

게다가 이 바쁜 현대사회에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보이는 내 장점만 극대화하기도 바쁜데 

단점까지 개선하면 얼마나 비효율적냐는 자기합리화를 고수하면서 살아왔다.


이효리를 보고 저렇게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이효리도 변하는데 나라고 못 변하랴. 

다짐했고 매번 저지르고 넘기던 실수도 기록하고 곱씹으면서 내 단점을 고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한가지 더 있다. 

이효리 덕분에 인간이 참 재밌어졌다. 인간을 더 알고 싶어졌고, 인간을 더 들여다보고 싶어지더라.


이모든게 다 이효리 덕분이다.



이정도면 내 인생에서 이효리는 참 괜찮은 사람이지 않은가?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