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있는삶/사설 노트'에 해당되는 글 715건

  1. 2018.01.08 [전우용의 우리시대]번역의 시대
  2. 2018.01.08 [기고]어느 이상주의자의 사회적기업 도전기
  3. 2018.01.08 [기자칼럼]기승전 ‘동성애’
  4. 2018.01.08 [뉴스룸/서동일]플랫폼 비즈니스에 눈뜬 SK
  5. 2018.01.08 [이달의 예술 - 미술] 아가, 다시 살아나거라
  6. 2018.01.08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끝판왕’과 ‘가성비’의 나라
  7. 2018.01.08 [서동일의 뉴스룸]카셰어링을 돈 안 되는 사업으로 보는 현대차
  8. 2018.01.08 [송평인 칼럼]왜 프랑스는 쇠하고 독일은 흥했나
  9. 2018.01.08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월급쟁이 여행중독자의 가성비 여행법
  10. 2018.01.08 [김용석의 일상에서 철학하기]다양성은 곧 생존의 조건
  11. 2018.01.08 [동아광장/박일호]참담한 문화계가 다시 살아나려면
  12. 2018.01.08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습관이 좋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
  13. 2018.01.08 [백영옥의 말과 글] 감정의 온도
  14. 2018.01.08 [유현준의 도시이야기] 카페·노래방·편의점… 숨을 곳 찾아 헤매는 한국인
  15. 2018.01.07 [朝鮮칼럼 The Column] "아메리칸 드림, 핀란드에서 펼쳐라?"
  16. 2018.01.07 [김현수의 뉴스룸]예쁜 레이저, 심리스 아이폰
  17. 2018.01.07 [동서남북] 세서미 스트리트의 줄리아가 그린 희망
  18. 2018.01.07 [만물상] "써야 생각한다"
  19. 2018.01.07 [권인숙 칼럼] 동성애 인정하면 동성애가 퍼진다?
  20. 2018.01.07 [오철우의 과학의 숲] 유전자 드라이브와 야생의 브레이크?
2018. 1. 8. 02:25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고 혼자 다 갖는 게 ‘독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게 ‘독재’,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고 자기 혼자만 옳다고 믿는 게 ‘독선’, 다른 형제 없이 하나뿐인 자식이 ‘독자’다. 그러니 ‘독립’이란 본래 주변에 다른 사람 없이 혼자만 서 있다는 뜻이다.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중국어사전은 독립을 “혼자만 서 있음. 혹자는 남에게 의존하거나 예속되지 않는 관계를 가리킴”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일본인들이 만들어 중국으로 역수출한 번역어 중 최고의 걸작은 낭만(浪漫)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물결이 이리저리 일렁임’ 정도 될 텐데, 일본인들이 romance에 상응하는 단어로 만들어낸 신조어였다. 이와 거의 비슷한 뜻을 가진 한자어로 풍류(風流)가 있었음에도 왜 굳이 신조어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단어는 한자 문화권 전체로 퍼져 나가 중국인 중에도 이 단어가 중국 고전에서 유래한 것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
몇 해 전, 소규모 학술 세미나에 일본에서 번역의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 한 사람이 참석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independence를 독립으로 번역한 이유가 뭡니까?” 사람을 허탈하게 만드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자립으로 번역하는 게 나았을 텐데, 당시 일본인들은 한자의 미세한 뉘앙스 차이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모국어가 아니니까요.” 순간 중국인들이 그 번역어를 역수입해 간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들었으나, 그에게 묻지는 않았다. “혹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다 엎드려 있는 상태에서 혼자만 일어서겠다는 의지가 작용하지는 않았을까?”라고 혼자 생각하고 말았다. 

일본인들이 유럽 세계와 조우하기 훨씬 전에 ‘성경’을 접했던 중국인들은 the God에게 천주(天主)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에는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과 다른 유럽인의 우주관은 용인했지만, 천하관의 차이는 어떻게 해도 극복할 수 없었다. 천주의 독생자에 상응하는 한자어 ‘천자(天子)’는 이미 세속에서 절대적 권능을 행사하는 황제의 몫이었다. 그들은 부득이 발음도 비슷하고 땅을 감독하는 자로 해석할 수도 있는 ‘기독(基督)’이나 발음만 비슷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야소(耶蘇)’라는 단어를 만들어 대응시켰다. 

얼마 전 한국 언론들이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SNS에 쓴 짧은 문장을 줄줄이 오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주일에 10시간 이상씩 10년 넘게 영어 공부한 사람들이, 그것도 평균 수준 이상인 사람들이, 영어사전을 옆에 두고도 오역을 한다. 그러니 아무런 사전 지식도, 참고할 문헌도 없이 처음 외국어와 맞닥뜨린 사람들은 어땠을까? 

최초의 번역은 자기들의 언어와 결합한 지식으로는 들여다볼 수 없는 혼돈의 세계와 교류하는 일이었다. 교류 수단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문화 전체와 상대 문화 전체를 맞대면시켜야 했다. 둘 사이에서 일치하는 것들을 찾아 대응시키고, 비슷한 것이 있으면 변형시키며, 없는 것은 창조해야 하는 버거운 일이었다.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알려는 의지를 총동원해야 했으나, 그래도 완벽한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 대통령, 장관, 목사처럼 격에 안 맞는 단어들이 만들어졌는가 하면, 가방, 구두, 돈가스처럼 상대도 모르고 자기들도 모르는 단어들까지 발명되었다.

유럽인들이 전 지구를 무대로 해상활동을 개시한 15세기 말부터, 일본과 중국에서는 유럽인들의 언어를 통해 유럽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본격화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서구세계와 접촉한 조선은 이 점에서도 후발 주자의 이점을 톡톡히 누렸다.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대응시킨 단어들을 가져다 쓰기만 하면 되었으니. 그러나 한국 문화 전체를 놓고 보자면 결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번역할 기회를 잃은 탓에, 한국인들은 자기 문화 전체를 성찰하고 서구 문화 전반을 주체적으로 관찰할 기회도 잃었다. 

19세기 말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유래한 신문물에 대한 한국인의 지식 세계는 중국 번역어와 일본 번역어의 공동 지배하에 있었으나, 20세기 이후에는 일본이 이에 대한 지배권마저 독점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일본어로 번역한 글을 그대로 읽거나,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가벼운 수고만 하면 되었다. 1980년대 초중반까지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인들은 별 문제의식 없이 이 편리함을 누렸다. 

그런데 이 뒤로 일본 번역어를 매개로 한 간접 번역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번역어를 창조하려는 의지가 커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번역어 만들기를 포기하거나, 우리말의 ‘미세한 뉘앙스 차이’를 모른 채 번역어를 만들고는 억지로 유포시키려는 경향만 강해진 듯하다.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근자에 횡행하는 ‘혐오’다. 우리말 어감으로는 ‘징그럽거나 끔찍하거나 더러워서 싫어함’에 해당할 텐데, 이 단어 하나에 증오, 분노, 불신, 공포, 멸시, 경시, 비하, 조롱, 심지어 숭배의 의미까지 다 구겨 넣는 게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혐오, 불신, 공포, 차별로 나누어 번역하는 단어들도, 한국에서는 ‘혐오’로 통일돼 있다. 같은 단어에 다른 뜻을 담다 보니 상호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소통에 장애가 생긴다.

공자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같은 말에 다른 뜻을 담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세상이 평화롭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게다가 자기 문화 전반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남의 문화에서 탄생한 단어를 함부로 번역하는 것은, 자기 문화에 대한 무지를 심화하는 일이다. 

국립국어원에서든 지식사회에서든, 올바른 번역어를 찾거나 만들기 위해 분발했으면 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252111015&code=990100#csidx61549b83d14692dab9ef8a84251cc9b 

Posted by 겟업
2018. 1. 8. 02:24

사회적기업도 성공과 실패의 과정이 여느 기업과 다를 바 없다. 품질경쟁력과 가격경쟁력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일반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다면 사회적기업은 사회서비스나 취약계층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적 가치가 뛰어날지라도, 정부 지원 기간인 3~5년 사이에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해보지 못하고 폐업하게 된다.나는 사회적 가치 그 자체가 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었고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들은 날 보고 사업의 ‘ㅅ’자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고 말했지만 우리가 꿈꾸는 공공성이 살아있는 기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우리만의 차별성을 부각하고 농촌과 도시의 선순환 사이클을 만들기 위해 ‘시골 어르신들이 농사 지은 것을 도시 어르신들이 발효빵으로 만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전주만의 정체성을 담은 특색 있는 제품을 고민하면서 ‘전주비빔밥’을 빵에 접목시켰다. 마지막으로 고식이섬유와 저칼로리 빵을 만들기 위해 각종 신선한 채소를 듬뿍 넣고 담백하고 매콤한 전통 고추장 소스를 만들어 넣었다.
 ‘전주비빔빵’은 그런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전주비빔빵을 만드는 ‘천년누리’는 사회복지 노인일자리 사업단에서 자본금 200만원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전문 기술도 부족하고 시장 경쟁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시장에 나왔다. 하지만 “가능성을 찾아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관점으로 고민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전주비빔빵은 재료도, 맛도 좋지만 어르신들의 인심 덕분에 속도 실하고 크기도 크다. 지혜와 경륜이 있고 인내심이 강한 어르신들은 오랜 시간 천천히 숙성시키는 우리밀 발효빵을 만들었다. 우리밀 빵의 건강함과 어르신들의 손맛으로 입소문이 난 전주비빔빵 브랜드는 희소성을 지니게 됐다.

전주비빔빵은 1년 전보다 사업은 커지고 고용인원은 4명에서 30여명 가까이 늘었다. 월 500만원이던 매출은 월 1억원 가까이로 성장했다. 비빔빵뿐만 아니라 각종 건강 빵들이 모두 담백하고 속이 튼실해 소비자들의 재구매율이 높다. 어르신들은 단팥빵이나 비빔빵뿐 아니라 유럽의 치아바타, 크루아상, 호밀샤워도, 파이 등 세련된 빵도 아주 잘 만드는 기술자로 훈련되고 있다. 소비자들은 건강한 빵으로 착한 기업을 운영해줘서 고맙다는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빵을 구매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왜 빵이냐고 물었다. ‘빵’은 우리 어머니들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상을 의미한다. 우리가 만드는 빵은 배고픈 사람들의 허기를 채우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매일매일 살아가는 치열한 일상 속에서, 자신의 몸 하나도 지탱하며 살아가기 힘든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사회적 가치가 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한 순간 한 순간 눈물이 울컥하는 감동을 준다. 이제 ‘전주비빔빵’의 다음 목표는 지역 취약계층 100명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사업 초반에 사업의 ‘ㅅ’도 모르던 이상주의자의 믿음이 대한민국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그 길을 함께해준 정부의 사회적기업 육성 지원 정책에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든든한 버팀목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적 경제의 주체이자 소비자인 우리 모두라고 말하고 싶다. 



장윤영 천년누리 대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052107015&code=990304#csidx4179d49aad843759df44100e00eeea4 

Posted by 겟업
2018. 1. 8. 02:23

요 근래 정치권의 동성애 호들갑을 보노라니 좀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다. 마치 오랫동안 외항선이라도 타다 내린 것 같다. 언제부터 동성애 문제가 고위 공직자의 역량과 자질을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 됐나 싶어서다.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라고 거칠게 다그치는 국회의원, 곤혹스러운 표정의 대법원장 후보자, 그리고 21세기 한국 사회에 등장한 황당무계한 ‘후미에’(17세기 일본 에도막부가 기독교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을 국민들. 이미 후미에의 피해자도 나왔다.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졸지에 ‘동성애 옹호자’로 몰렸다. 군형법의 ‘군대 내 동성애 처벌’ 규정이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위헌 의견을 냈던 것이 동성애 찬성으로 ‘둔갑’한 것이다. 모호한 법으로 피해 보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법관의 양심에 따른 판단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 후보자, 항문성교를 연상하게 하는 후배위를 선호하죠? (녹취 파일을 흔들며) 그동안 관계했던 여성의 증언이 확보돼 있어요. 인정하세요.”
해당 군형법을 보면 ‘군인이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하면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 밖의 추행’이 자의적으로 해석되거나 악용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이 ‘동성애를 퍼뜨릴 위험인물’이라는 증거가 됐다. 비약도 이런 비약이 없다. 이 같은 논리가 별문제 없이 통용되는 분위기, 게다가 급격히 퇴행하는 정치인들의 수준을 보노라면 다음과 같은 문답이 오가는 청문회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저는 상식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하지 말자, 애매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법조문을 정비하자. 현재 동성애와 관련한 논의의 수준은 이 정도다. 그런데 이에 대한 동의가 군대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와 동일시된다. 또 이것이 물꼬가 되어 소아성애, 수간, 시체상간까지 비화되리라 단언하고 군대 가야 할 자녀를 둔 부모들의 불안감을 강변한다.

듣다 보면 동성애자만큼 무서운 존재가 없다. 페스트 저리 가라 할 만한 치명적 역병이다.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그 순간부터 동성만 보면 흥분해서 들이댈 좀비 같은 존재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통제불능 성도착자들이다. 좀 있으면 ‘나는 동성애자가 싫어요’ 외치다 죽임을 당했다는 군대 괴담까지 나올 기세다. 이렇게 끔찍한 존재들이 널렸는데 그동안 사우나는 어떻게 다녔으며 화장실 소변기는 어떻게 이용했나. ‘항문성교하면 처벌한다’는 얄팍한 보호막 하나로 안심하고 살아왔다는 말인가. 같은 논리라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이성애자들은 이성만 보면 흥분해서 껄떡거리는 존재들이다. 남녀가 함께 모이는 학교, 회사, 각종 공동체는 언제든 난교파티가 벌어질 공간이다.

우려해야 하는 것은 남의 성적 지향이 아니다. 동성 간이든 이성 간이든 물리력이나 지위 등을 이용해 상대에게 가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이다. 기득권, 다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차별과 탄압이다.

동성애가 정치권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한 데는 보수 개신교계가 큰 몫을 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죄악에 물들어가는 세상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떨쳐 일어날 만큼 ‘순수’한 신앙심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냉전·반공체제를 발판으로 함께 성장했던 수구보수체제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헤게모니를 되찾으려는 생존전략이라는 것을, 유통기한 지난 색깔론과 종북 타령을 대신해 혐오의 대상으로 삼기에 적절한 동성애를 선택했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에 언급된 그 수많은 죄들이 지금도 도처에서 횡행하는데 왜 동성애에만 목숨 거는 건지 이해할 길이 없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182104015&code=990100#csidx171f4b18366cf428816e6b50b4e1364 

Posted by 겟업
2018. 1. 8. 02:16

바디프랜드는 안마의자가 노년층 전유물 또는 실버 제품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기업이다. 건강에 관심이 높은 30, 40대도 안마의자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만들어 대중화에 성공했다. 아예 젊은층을 겨냥한 힐링 카페 ‘바디프랜드 파크’도 최근 시작했다.

정수기 렌털 사업으로 성장한 코웨이는 공기청정기, 비데 시장 점유율도 1위다. 코웨이는 이들을 모아 ‘환경가전’이라고 부른다. 가입자 건강과 직결되는 제품군이라는 뜻이다. 30∼50대 주부층이 주 고객이다. 

바디프랜드와 코웨이에 관심을 가졌던 곳이 있다. SK그룹의 사업형 지주회사 SK㈜다. SK㈜는 두 기업을 통째로 사거나 지분 투자라도 하고 싶어 했다. 반도체와 정유·화학, 이동통신사업을 주력으로 삼는 SK의 지주사가 왜 안마의자나 정수기에 눈독을 들였던 걸까. 

사실 SK㈜는 제품보다는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30∼50대 가입자 정보와 네트워크에 관심이 컸다. 평균 렌털 기간인 5년간은 가입자들의 집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살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플랫폼 비즈니스’다. 바디프랜드와 코웨이의 고객들은 제품 관리나 점검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현관문 잠금장치를 풀 준비가 돼 있었다. 두 기업이 쌓아온 신뢰야말로 플랫폼 비즈니스에서는 막강한 힘이 될 수 있다.  

SK㈜가 플랫폼 비즈니스에 관심을 가진다는 단서는 또 있다. 이달 초 SK㈜는 미국 개인 간 차량 공유업체 ‘투로’에 지분 투자를 했다. 단순히 차량공유 서비스에 투자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투로 경쟁력의 핵심은 ‘모빌리티(이동성) 플랫폼’이라는 데 있다. 



SK는 국내에서 ‘이동’이란 단어로 상상할 수 있는 과정 상당수에 대한 사업을 하고 있다. 우선 렌터카(SK렌터카)와 차량공유 서비스(쏘카)를 갖고 있다. 가는 길은 내비게이션(SK텔레콤의 T맵)이 알려준다. 기름을 넣을 주유소(SK엔크린)도 한 식구다. 결제나 멤버십 할인뿐 아니라 자동차 수리까지 SK라는 한 울타리 아래서 해결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아직은 계열사마다 흩어진 퍼즐 조각에 불과하다. 결국 이 조각들로 확실한 밑그림을 그려보겠다는 게 SK의 목표다. 자동차를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SK는 이들 사업 간 시너지로 언제든 ‘도로 위 점령자’가 될 잠재력을 확보하고 있다. 투로 지분 투자는 이 그림을 해외로까지 확대해보겠다는 장기 플랜의 일환일 것이다.


SK그룹이 안마의자, 정수기, 차량공유업체에 손길을 뻗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랫폼 비즈니스의 가치는 사용자 수가 결정한다. 이들 사용자 집단이 만들어내는 데이터와 네트워크 효과들이 곧 플랫폼을 가진 기업 가치다. 모바일을 기초로 한 산업 변화가 주로 ‘연결’에 집중돼 왔다면, 이제는 누가 그 위에 지붕을 지을 것인지가 핵심인 시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주인공은 인공지능(AI)이나 사물인터넷(IoT) 같은 기술이 아니라 플랫폼을 구축하는 자다”라는 분석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SK의 주력 사업은 에너지와 화학, 이동통신, 반도체였다. 각 산업 간의 장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지금 SK는 굳이 잘하는 사업 영역에만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한국에는 아직 건강과 의료, 자동차, 교육, 쇼핑 등 너무나도 많은 영역의 플랫폼들이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


국내 대기업 중 SK가 그걸 가장 먼저 눈치 챘다.

서동일 산업부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70926/86524921/1#csidxf6a6c4e20166c3fa890b540fb26ec8a 

Posted by 겟업
2018. 1. 8. 02:14

‘예술은 관람자가 필요하다’는 말은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디드로가 편찬한 백과사전에서 ‘비평’을 정의한 장프랑수아 마몽텔(1723~1799)은 이 말을 통해 예술의 조건을 적시했다. 작품이 예술이 되려면 관람자 자신이 의미를 만드는 협업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술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인 송상희의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는 세 개의 스크린에 펼쳐진 영상이다. 지역마다 변형돼 전해 온 ‘아기장수’ 설화를 얼개로 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기는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염원하던 영웅이 될 운명이다. 하지만 비천한 신분의 영웅은 곧 역적이 되는 법. 살려두면 가족은 물론 온 마을이 관군에게 몰살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부부는 돌을 굴려 아이를 죽인다. 주인공 아기장수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지만 마을 사람들과 권력의 손에 재차 죽임을 당한다. 
  
1970년대 말 희곡으로 만들어진 설화는 당시 군부정권의 폭력성과 민중의 무력감을 이야기에 빗대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야기는 전 지구적 맥락으로 확장되어 민족 간 전쟁과 이념의 차이로 희생된 수많은 약자를 대변한다. 
  

송상희 영상작품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의 한 장면. 역사와 설화 속 희생자들 얘기다. [사진 송상희]

송상희 영상작품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의 한 장면. 역사와 설화 속 희생자들 얘기다. [사진 송상희]



카메라는 상처를 대하듯 땅을 어루만진다. 바이마르 유대인 강제수용소, 홋카이도의 폐탄광, 노근리 쌍굴다리, 보도연맹 학살지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들짐승이 다닌다. 
  
‘우리는 같은 사람을 쫓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이 아닌가!’ 인종 청소, 강제징용과 양민 학살의 희생자는 작품 속에서 기형이 된 물고기와 곤충의 입을 빌려 인간의 잔혹성을 꾸짖는다.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아기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불편한 심기의 관람자가 선뜻 자리를 뜰 수 없는 이유는 아기장수를 죽이자고 공모하는 이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죄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권력에 거스르지 않기 위해 타인의 고통에 귀를 막고 공동체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폭력을 합리화하고 방관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곧 추석이다. 많은 이가 분주한 삶의 자리를 떠나서 나고 자란 고향과 조상이 묻힌 땅을 밟을 것이다. 죽은 자를 거두고 생명을 품어 온 땅은 차별을 두지 않는다. 예술이 전달하는 설화와 역사의 교훈이 무거운 것은 아직도 평화와 포용이 요원한 현실의 무게 때문이다. 
  
이지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 

http://news.joins.com/article/21985969

Posted by 겟업
2018. 1. 8. 01:46

“끝판왕”은 원래 컴퓨터 게임의 ‘최종 보스’다. 하지만 의미가 확장되면서 일상어가 되었다. 유사한 말로 ‘종결자’도 꽤 유행한 적이 있다. 기표는 달라졌지만 뜻은 비슷하다. 더 이상 승급이 필요 없는 최종 단계 또는 최상의 무엇. 이를테면 “학벌의 끝판왕(종결자)은 하버드대학교”라는 식이다. 끝판왕에 대한 열망은 끝없이 성장해야 하는 피로감의 반작용인 한편, 모든 걸 줄 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비교서열 강박의 적나라한 노출이다.


또 재밌는 건 “가성비”라는 말이다. 가성비는 ‘가격 대비 성능 비율’의 줄임말이다. 같은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최선의 상품을 “가성비템”(가성비+아이템)이라고 부른다. 가격과 품질이 제각각인 수많은 상품들 사이에서 가성비템은 ‘최적의 균형점’이다.


가성비에 대한 집착은 단순히 경제적 효율을 추구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일종의 낙인 공포이기도 하다. “호갱님”(호구+고객님)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게 공포인 이유는 호갱님이 곧 ‘정보사회 무능력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끝판왕 열망’과 ‘가성비 집착’은 얼핏 이율배반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상호의존적이다. 가성비는 끝판왕의 환상은 유지하되 그것을 향한 광기가 시스템을 붕괴시키지 않도록 하는, 말하자면 압력분출 밸브로 기능한다.


견주고 줄 세우는 행위 자체는 특별히 비난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대상과 기준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적 삶의 영역마다 고유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장(field) 개념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각 장마다 나름의 판돈과 환상-공모가 있고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장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게 만든다.


그런데 한국은 하나의 정점을 향해 모두가 전력질주하는 사회다. 어떤 분야에서 업적을 쌓아 일가를 이룬 사람도 청와대가 부르면 쏜살같이 달려간다. 지역에서 성공하면 중앙(서울)이 순식간에 빨아들인다. 여러 개의 장이 병존한다기보다 단지 거창한 중심부와 황폐한 주변부만 존재할 뿐이다. 어떤 이에겐 역동적인 사회일 테지만 다수에겐 무간지옥이다.


여러 연구를 통해 알려졌듯 한국의 물질주의는 세계에 유례없는 특이성을 보인다. 어느 나라든 일정 정도 경제가 성장한 뒤에는 개인의 자유, 참여, 생태주의, 타인에 대한 개방성 같은 탈물질주의 가치에 대한 선호가 커진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경제성장, 안전, 법질서, 타자에 대한 폐쇄성 등의 물질주의 지향이 기이할 정도로 강하게 유지된다. 그야말로 ‘장기 물질주의 사회’다. 비교하고 서열화하려는 강박은 이런 강력한 물질주의와 깊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전국 1등부터 전국 꼴찌까지 줄 세우려면 기준은 물질적 가치여야 한다. 추상적 가치는 비교하기 어렵다.


한국의 물질주의는 왜 이토록 질기고 또 강한가? 이유를 크게 세 가지 꼽을 수 있다. 첫째, ‘폭력성의 고착’. 전쟁의 압도적 폭력뿐 아니라 식민지 경험과 군부독재 시기의 억압과 모멸,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군사주의, 반공주의 등이 거의 한 세기에 걸쳐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를 사회에 고착시켰다. 둘째, ‘서사의 과잉과 기록의 과소’. 극적 서사와 음모론은 넘치는데 성실하게 사실을 축적한 자료들은 드물고, 있다고 해도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유사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논의가 ‘리셋’되고 쳇바퀴 도는 논쟁으로 공론장에 대한 환멸만 커진다. 이런 환경에서 비평은 ‘용비어천가’이거나 ‘토황소격문’ 둘 중 하나로 소비될 뿐이다. 셋째, ‘권력 정당성의 일상적 위기’. 한국에서 정치가, 재벌, 관료 등 엘리트 권력집단이 사회적 존경을 획득한 적은 거의 없기에 권력 정당성에 대한 기대도 매우 낮다. 요컨대 권력은 원래 더러운 것이고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윤리적 가치들은 냉소의 대상이 된다.


물질주의가 팽배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서열과 순서를 정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한없이 불안해지며, 자기 머리와 가슴으로 무언가를 향유하는 데에도 서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인간 대신 한국인을 집어넣으면 이렇게 바뀔 테다. “한국인의 욕망은 늘 똑같아서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그 욕망은 한국인의 ‘종족 특성’이라기보다 우리가 지금껏 만들어온 역사의 산물이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7052.html#csidx7373ab820c81538b3409fdb6fc2be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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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0:57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부회장은 6월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코나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양복 대신 ‘알로하 코나(Aloha KONA)’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 청바지와 낡은 스니커즈로 멋을 더했다. 연 매출 100조 원에 이르는 현대차그룹을 이끌 경영자, 그의 달라진 옷차림을 놓고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풀이도 나왔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 부는 혁신의 바람을 좇다 보면 ‘공유(Share)’라는 단어와 만나게 된다. 디자인, 연료소비효율, 가격을 따져 차를 사는 시대가 저물고 필요할 때만 차를 빌려 쓰는 시대가 올 것이란 이야기가 많다. GM(메이븐), 다임러(카투고), BMW(드라이브 나우) 등 내로라하는 제조사들이 앞다퉈 카셰어링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이 바람을 거스를 수 없어서다.

늦게나마 현대차도 9월 현대캐피탈과 카셰어링 서비스를 시작한다. 이름은 ‘딜카’. 4월 서비스 시작 예정이었지만 기존 서비스들과 차별화 방법 등을 고민하다 5개월이 더 늦어졌다. 차별화로 내세운 것은 고객이 원하는 장소까지 차량을 갖다 준다는 것인데 이미 카셰어링 업계 1위 쏘카가 6월 시작한 서비스다.

현대차 측은 “‘카셰어링 시장 본격 진출’이란 시선이 부담스럽다”고 한다. 현대캐피탈과 중소 렌터카 업체에 차량을 공급하는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뜻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솔직히 다른 카셰어링 업체가 큰돈을 벌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글로벌 제조사들이 워낙 활발하게 사업을 하니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시작하지만…”이라고 말했다. 

실제 쏘카는 아직 돈을 못 벌고 있다. 지난해 서울과 제주를 중심으로 차량 6400여 대를 운영해 212억 원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영업이익’을 기준으로 보면 낙제점이다. 그러나 수익만 생각했다면 자동차 한번 안 만들어본 SK그룹 사업형 지주회사 SK㈜가 740억 원을 투자해 쏘카 지분 22%를 확보했을 리 없다. 베인캐피털(240억 원), 프리미어파트너스(100억 원)의 투자도 설명하기 어렵다.


미국 빅3 완성차 업체 중 한 곳인 GM은 ‘메이븐(Maven)’이란 브랜드로 카셰어링 시장에 한발 앞서 진출했다. GM은 젊은층이 몇십 달러만으로도 GM 자동차를 만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메이븐을 활용한다. 신차 위주로 차량을 배치해 초기 시장 반응을 살핀다. 소상공인 전용 서비스를 출시하는 등 시장을 세분화해 이용 행태를 분석한다. 궁극적으로 메이븐이 아닌 GM을 위한 사업이다.

국내 카셰어링 이용자들 역시 미래 현대차 고객이 될 수 있는 20, 30대가 대부분이다. 쏘카와 그린카 등은 매일 이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차량을 선호하는지 살핀다. 당장 돈을 벌지는 못해도 수백만 명을 가입자로 둔 거대한 ‘플랫폼 사업자’로 성장하고 있다. 이들이 모아온 데이터는 영업이익이란 숫자로는 설명되지 않는 가치가 있다.  


그동안 자동차 산업의 주인공은 ‘제조사’였지만 미래는 모른다. 자동차가 공짜로 도심 곳곳에 배치되고, 이용자는 모바일로 차량을 예약해 이용하는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 현대차가 아무리 자동차를 잘 만들어도 돈은 ‘플랫폼 사업자’들이 벌어가는 현실이 오지 말란 법은 없다. ‘양복 대신 티셔츠’를 입고 신차 발표회를 했던 것처럼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현대차가 보고 싶다. 잘하는 일만 고집하다가는 금세 무대 뒤로 밀리기 십상인 요즘이다. 
   
서동일 산업부 기자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40100000109/3/70040100000109/20170809/85742215/1#csidxe8eb13b58b2d487bb1791059b07bd5d 

Posted by 겟업
2018. 1. 8. 00:53

20년 전 지도자 잘못 만난 프랑스… 조스팽의 어리석은 주 35시간 노동
지난 10년간 폐지 노력 다 실패 
같은 시기 노동 유연성 늘린 독일… 오늘날 메르켈의 황금시대 열어
경쟁력만이 성장의 원동력이다



프랑스와 독일을 흔히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라고 부른다. 과연 두 나라는 여전히 쌍두마차인가. 두 나라의 경제력은 2000년대에 들어와 역사상 선례가 없을 정도로 격차가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프랑스가 법으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강제한 것은 2000년부터다. 주 35시간 노동제는 근로자의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린다는 좋은 목적으로 도입했지만 더 많이 일하려고 해도 일할 수 없게 만들어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프랑스 경제의 질곡이 되고 있다. 

2007년 집권한 공화당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주 35시간 노동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지만 노조의 반발로 실패했다. 2012년 집권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비록 자기 당이 도입한 제도이지만 폐해를 인정하고 폐지를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현 대통령이 올랑드 정부의 경제장관으로 있다가 뛰쳐나온 것이 주 35시간 노동제 폐지가 좌절돼서다. 마크롱이 신생 정당을 창당해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은 공화당으로도 안 되고 사회당으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마크롱의 당선이 새로운 프랑스의 시작인지는 잘 모르겠고 무능한 프랑스가 맞은 파탄의 ‘화려한 피날레’인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가 사회당 리오넬 조스팽 총리 주도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도입하던 무렵 독일에선 사회민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상급 노조에 의한 집단적인 임금 인상 관행이 줄어들고 기업별로 임금과 노동시간 협상이 이뤄지는 새 관행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그런 노력의 연장이 2003년 발표된 ‘2010 어젠다’다. 기독민주당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10 어젠다’를 이어받아 독일의 최전성기를 이끌어 냈다.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에서 헤매던 2000년 무렵은 두 나라에 아주 중요한 시점이었다. 유럽연합(EU)은 1999년 단일 화폐 유로를 출범시키고 본격적인 시장 통합을 이뤘다. 역내 환율이 없어져 한 국가의 경쟁력은 직접 다른 나라에 타격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계적으로는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거대한 시장이 열렸다. 이 시점에 프랑스는 조스팽이라는 전철수(轉轍手)를 만나고 독일은 슈뢰더라는 전철수를 만난 것이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


두 나라의 장기 대차대조표는 실업률과 무역수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독일의 실업률은 2005년 11.7%로 최고치를 쳤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지난해 4.1%까지 내려갔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2010년 독일을 추월해 2013년 10%를 넘어선 이후 지난해까지 4년 연속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독일 무역흑자와 프랑스 무역적자의 격차는 1990년 100억 유로에서 지난해 32배인 3200억 유로로 벌어졌다. 이 액수는 일자리로 따지면 약 320만 개에 해당한다. 







주 35시간 노동제는 단기적으로는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가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랑스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국은 일자리를 줄이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본래 프랑스 제품은 디자인을 제외하고 질과 서비스 등 모든 면에서 독일 제품에 뒤떨어졌다. 프랑스는 뒤떨어지는 제품 경쟁력을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인건비에 의한 가격 경쟁력으로 따라잡았다. 그러나 제 주제도 모르고 세계 최초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실시함으로써 그 경쟁력마저 사라졌다. 



이제 프랑스에 남은 거의 유일한 경쟁력은 원전을 토대로 한 값싼 전기료 정도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사라지는 경쟁력 때문에 프랑스는 원전을 포기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반면 독일은 전기료 부담을 안고서라도 원전에서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을 추구할 만큼 경쟁력에 자신이 생겼다.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을 선언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최저임금을 파격적으로 올리고 있다. 초과 근로시간도 줄이겠다고 한다. 우리 산업의 어떤 경쟁력을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성장의 원동력은 경쟁력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는 더 그렇다. 경쟁력은 아랑곳없는 소득 주도 성장은 훗날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조스팽의 주장만큼이나 어리석었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http://news.donga.com/3/all/20170809/85742221/1#csidx6f19d132cbe52989d0494334a0a8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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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0:51

휴가는 가지 못했지만 지난 휴가를 되새기며 지낸다. 나는 여행 갈 때 까짓것 한두 푼에 연연한다. 4인 가족 가장인 월급쟁이 여행중독자의 숙명이다. 그런 주제에 꿈은 크다. 몇 년 전에는 8월 호주 여행을 꿈꿨다. 혹등고래가 남극을 떠나 호주 퀸즐랜드 해안으로 회유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입시지옥이 시작되기 전에 아이들에게 고래를 보여주고 싶었다.
 
우선 비행기값이 부담이었다. 고민하던 중 경제 기사에서 유명 저가항공사가 한국 취항 예정이라는 뉴스를 봤다. 바로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프로모션 e메일 구독신청을 했다. 취항 기념 초특가 행사 메일이 오자마자 숨도 안 쉬고 발권했다. 다음 해 8월 초 호주 왕복 티켓이 세금 포함, 1인당 45만원이었다. 직항이 아니라 비행시간도 길고 좌석도 좁은 건 감수해야지. 그런데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비즈니스석이 출발 직전까지 완판되지 않은 경우 업그레이드 받을 수 있는 옵션을 저렴하게 파는 것이다. 8월은 호주의 겨울이라 성수기가 아니니 가능성 있다고 보고 옵션을 구매했다. 작전 성공. 누워서 갔다.
 


도착 후에는 캠핑카 여행에 도전했다. 그것도 공짜로. 오히려 기름값 210불까지 받아가며 브리즈번에서 케언스까지 1800㎞를 여행했다. 호주처럼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는 렌터카 회사들이 차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줄 자원자들을 구한다. 나라가 커서 원 웨이 렌털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다시 원래 위치로 차를 보내야 하는데, 기사 고용해서 보내면 인건비 들고 차 수송 차량 이용해도 돈이 드니까 차라리 일정 맞는 여행객들에게 수송을 맡기는 거다. 운 좋게 가장 크고 좋은 6인용 메르세데스 캠핑카를 잡았다.


거대한 캠핑카를 몰고 북동해안을 누비며 혹등고래를 본 후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를 향해 달리는데 이 나라에서는 로드킬이 캥거루더라. 아내에게 의기양양하게 서방 잘 만난 줄 알라고 큰소리를 좀 과하게 쳤더니 돌아온 대답. 사업가 집안에 시집간 아내 친구도 휴가 중인데, 여행 며칠 전에 온가족이 1등석을 아무렇지도 않게 끊어서 옆집 놀러가듯 뉴욕으로 갔고 공항에는 리무진과 기사가 대기 중이라신다. 하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임시직 렌터카 운송기사로 일하는 셈이었던 것이다. 현실은 그러하였다.
 
문유석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




http://news.joins.com/article/21824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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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0:25

“다양성이 왜 중요한가요?” 학기말 세미나 자유토론 시간에 한 학생이 불쑥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다양성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자신도 그런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이유에 대해 자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다양성이 중요함을 여러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논리는 그것이 ‘생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일정한 생명 집단을 이루는 개체들이 모두 동일하다면 내부적 갈등의 문제는 없겠지요. 하지만 환경 변화나 다른 집단의 공격 같은 외부의 간섭과 침투에 매우 취약합니다. 치명적이기까지 합니다. 그에 대한 반응이 획일적이기 때문입니다. 영생(永生)을 할 수 있는 생명체 집단이라 할지라도 개체가 모두 동일하다면 치명적인 요소가 하나만 침투해도 몰살하겠지요. 

외연을 갖지 않은 집단은 없습니다. 무한한 우주 전체를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삼을 수 있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간섭과 침투는 상존하며 이에 반응해야 합니다. 각기 다른 개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함으로써 살아남기도 하고 피해를 입기도 하며 소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양성을 확보한 집단은 존속할 수 있습니다. 다양성의 정도와 생존 가능성은 비례합니다.

이는 현대 농업과 축산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택된 종(種)에만 의지하는 획일화된 농업은 한 가지 병충해에도 전체 수확이 위협 받습니다.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 같은 동물 전염병이 자연 상태의 개체보다 사육되고 있는 동물들에게 쉽게 확산되는 것도 그 다양성의 정도가 낮기 때문입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의 결론에서 문학적으로 표현했듯이 자연은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경이로운 무수히 다양한 형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연 그 자체가 다양하며, 다양성은 자연을 존재하게 하는 원리입니다. 동양사상에서는 ‘자연과 동화하는 삶’을 강조해 왔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런 삶은 자연의 다양성을 깨닫고 그 이치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시대를 앞서갔던 16세기의 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는 “세상을 이루고 있는 사물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자연의 이치에 맞추어 살기를 원한다면 세상 만물에 다양성의 옷을 입혀라!”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문명화 과정에서 사물을 구분해서 범주를 정하고 일정한 방식으로 동식물을 사육하고 경작해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의 근원적 다양성에 대해 망각의 경험 또한 해왔습니다. 이런 경험이 종종 일상에서도 자연의 다양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무심하게 바라본 얼룩말의 무늬는 모두 똑같아 보이고, 하늘의 별들은 모두 오각형으로 반짝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초원의 얼룩말들은 다 똑같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생명의 원리를 알 수 없으며, “하늘의 별들은 다 똑같아!”라고 하는 사람은 우주의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생물 다양성이 자연에 필요한 것처럼 문화 다양성은 인류에 필요합니다. 다양성은 생물·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세계에도 활력을 불어넣으며 교류, 혁신, 창조성의 근원이 됩니다. 가장 큰 다양성을 지닌 집단이 가장 안정적이고 발전적입니다. 다양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법을 모색하고 타자와 협력하는 일은 인류가 진화하고 개인이 발전하는 동기가 되어 왔습니다. 다양한 환경은 더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뜻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선택의 기회 또한 더 많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70708/85256572/1#csidx5bafbeb7206067d895d4efd6921cd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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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0:09

“나는 평생 동안 미술관이나 공연장을 찾을 의향이 전혀 없다. 그런데 정부가 내가 낸 세금으로 예술에 지원하는 것이 타당한가?” 누군가가 화를 내면서 이렇게 묻는다면, 이 사람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정부가 예술에 왜 지원을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또 어떻게 지원하는지도 말해주어야 한다. 우선 예술이 우리 삶에 왜 필요한가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두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예술을 통한 심리적·정신적 효과이다. 시 한 편을 읽거나 영화 한 편을 보면서 팍팍한 일상에 지친 삶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고, 그런 심리적 치유와 재충전을 통해 다시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예술 수준이 향상되면, 국민이 문화적 자부심을 갖게 되고 공동체적 일체감도 이룰 수 있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국제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고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게 될 때, 국민이 문화적 자부심을 갖게 되고, 행사의 성공을 위해 내부적 일체감도 이루게 될 것이며, 그때의 일체감이 사회의 다른 분야로까지 확산되고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답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화가 난 사람을 진정시키기에도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준비한 또 하나의 대답이 예술을 통한 경제적 파급 효과다. 예술이 활성화되고 발전되면 그 효과가 경제에도 흘러넘치게 된다는 것이다. 미술관이나 공연장이 활기를 띠고 문화예술 행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인력이 더 필요하게 된다. 필요한 장비를 제작해주는 일들도 파생적으로 생길 것이며, 행사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업, 음식업, 기타 상점들도 활기를 띠게 되어 예술과 직접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혜택이 미치게 된다는 식이다. 

이런 효과들이 현실이 되려면 문화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첫째, 문화예술의 다양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다양한 생각과 느낌의 예술 작품을 접할 수 있게 해야 하고, 이를 위한 예술의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똑같은 현실이나 대상을 바라보며 예술가들이 저마다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고 적대시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할 문화와 예술에서만은 다양한 다름들이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문화예술의 자율성을 살려내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그 자체로 보이고, 관객들의 판단에 맡겨 두어 문화예술계가 스스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영화 한 편을 보면서도 진보와 보수의 진영 논리로 해석하고, 미술 작품의 의미를 정치적 관점으로 몰아가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물론 작품에 대한 해석이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과 선택의 문제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이런 다양성과 자율성을 목표로 예술을 지원해야 하며, 여기에 적합한 방법이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그런데 예술 지원의 교과서적 규범 같은 이 원칙이 말처럼 잘 지켜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지원금이 국민의 세금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정부의 관점에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문화와 예술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정치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내용이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술 지원이 정치의 논리, 더 정확히는 정치에 편승한 문화 권력의 편 가르기 논리에 따라 집행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술의 공공성보다 정치적 편의주의에 따라 예산이 집행되고, 이런 일들이 누적되어 나타난 사례가 문화계의 블랙리스트 사건일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섰고, 문화기관이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말한다. 블랙리스트 의혹의 진상을 조사하고 제도개선위원회(가칭)를 만들겠다는 소식도 있다. 반가운 일이다. 이번 기회에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흐지부지 덮어버리고서는 새롭게 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문화의 논리로 해결해야지, 정치적 논리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칫 또 다른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우려되어 하는 말이다. 이젠 내 세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냐고 묻는 누군가를 향해 당당하게 다양성과 자율성이 살아 숨 쉬는 문화공간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박일호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교수 


http://news.donga.com/Main/3/all/20170706/85240539/1#csidx4104374e46114a69b0c9531ea324f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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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0:04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책 『이동진 독서법』을 읽다가 깊이 공감하는 구절을 만났다. 삶을 이루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라는 구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과수 폭포를 보고 싶다, 남극에 가보고 싶다는 등 크고 강렬한, 비일상적 경험을 소원하지만 이것은 일회적인 쾌락에 불과하고,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 자체가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마치 동화 ‘파랑새’를 연상시키는 일견 익숙하고 평범해 보이는 말이지만, 실은 굉장히 과학적인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행복감에 관한 심리학의 연구결과는 공통적으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한다. 어떤 ‘큰 것 한 방’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습관이 행복해야 행복하다는 말이 좋았던 이유는 폭넓게 생각을 확장해 갈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시민들이 행복한 습관을 누릴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야 한다. 한강시민공원에서 걷고, 자전거를 타고, 연을 날리고, 낚시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라. 공원과 도서관은 행복 공장이자 행복 고속도로다. 교육도 중요하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요리를 하고, 다양한 운동을 즐기고. 어린 시절부터 각자의 행복한 습관을 찾을 수 있도록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이 영재교육 이상으로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멋진 몸매를 위해 굶고 운동하는 것이 유행이라 치자. 바뀌어 가는 몸매를 보는 기쁨이 이를 위한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되는 거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맛집 찾아다니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 낫다. 남들 보기에 덜 번듯한 직장이더라도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을 매일 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 일상을 보내는 공간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꾸미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잘나가는 사람과 친해져 보려 애쓰기보다 가족,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이 낫다. 습관처럼 내 곁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가 불행하면 내 삶 또한 불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유석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


http://news.joins.com/article/21765763


Posted by 겟업
2018. 1. 8. 00:02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남자 친구 때문에 힘들다는 여자분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말다툼 끝에 연락을 끊은 후 낯선 여자와 함께 있던 그가 한 말에 마음이 무너졌다고 했다. "외로움 못 참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세상엔 사랑 때문에 잠 못 드는 괴로운 사람이 많다.

외로움은 전염성이 강하다. 정신과 전문의 김병수의 책 '감정의 온도'에는 외로운 친구를 곁에 두면 외로워질 확률이 무려 40~65%까지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다. 외롭지 않은 사람을 세 번이나 거쳐야 외로움의 전염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부부 사이에 외로움이 더 잘 전염된다고 말한다. 가령 남편이 회사 일을 마치고 가족이 있는 집에 들어와 '외롭다'고 말하면 아내 역시 우울해지는 동시에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데 외롭다면 대체 나는 남편에게 어떤 존재인가 자문하며, 역시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식이다. 앞서 말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온 편지와 같은 경우였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음식을 찾던 후배에게 "혹시 배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픈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가 와락 눈물을 터뜨리는 그녀에게 연애 상담을 해주던 기억이 났다. 얼마 전 나는 외로움과 배고픔을 느끼는 뇌신경이 서로 매우 근접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말인즉, 우리 뇌가 외로움과 배고픔을 혼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억지웃음에 대한 뇌의 반응 역시 비슷하다. 우리 뇌는 가짜와 진짜 웃음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억지로 웃어도 신체에 90% 긍정적 효과가 있다.


'감정의 온도'에는 심부 온도를 38.5도까지 올리는 목욕만으로도 항우울제 복용과 같은 개선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등장한다. 따뜻한 목욕이 마음의 온도까지 높여준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이야기다. 외로움의 온도는 낮고, 웃음의 온도는 높다. 흥미로운 건 외로움만큼 웃음도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외로움 때문에 시작한 연애는 대개 괴로움으로 끝난다. 연애의 목적이 외롭기 때문이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함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백영옥 소설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28/2017072802759.html

Posted by 겟업
2018. 1. 8. 00:00

노래·비디오·멀티·PC방… 
카페는 싼값에 거실 빌려주는 곳, 사적 공간 부족해 '방'으로 도피 
청소년들, 편의점서 시간 보내고 게임 속 사이버 공간으로 몰려가 
부모 감시 벗어날 수 있기 때문

우리나라는 유독 '방' 문화가 발달했다. 노래방, 비디오방, 멀티방, 모텔방, 룸살롱 등 각종 방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도시에 단위 면적당 커피숍이 가장 많은 나라도 우리나라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에 각종 '방'이 많은 이유는 사적인 공간이 부족해서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대학만 가도 부모를 떠나서 산다. 그럴 경우 자기 집에 친구를 불러들이기 쉽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결혼 전 대부분 부모님과 같이 살고, 국민 60%가 아파트에 살고 있다. 부모님과 같이 살아도 2층 주택이라면 층별로 사생활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단층 구조의 아파트에서는 가족끼리 너무 공개되어 있어서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기 어렵다. 독립을 해도 원룸이나 고시원같이 좁은 공간뿐이어서 두 명 이상 함께 앉아 있기도 힘들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만날 때는 카페나 노래방이 필요하고, 연인과 함께 있고 싶을 때는 모텔에 가야 한다. 사적인 공간을 소유할 수 없다 보니 시간당으로 공간을 빌리는 사업이 번창했다.

우리나라에서 카페는 커피를 파는 곳이라기보다는 5000원을 받고 두세 시간 정도 거실을 빌려주는 사업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모텔 대실 문화는 방을 시간당으로 빌려준다. 방 하나를 하루에도 여러 번 돌려쓰는, 시대를 앞선 공유 개념 숙박업이다. 그래서 가격도 저렴하다.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공간 렌털 사업이 발달해 있다. 공간을 다른 커플들과 나눠 쓰기 싫은 젊은이는 차를 산다. 차는 집보다는 저렴하면서도 완전한 사적 공간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의 선택이다. 더 많은 사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동차 윈도를 어둡게 틴팅(tinting) 한다. 틴팅 필름은 자동차 실내를 좀 더 사적인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재료다. 뚜벅이가 연애할 때 어려운 것은 이동이 어려워서가 아니고 그들만의 공간이 없어서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사적인 공간의 부족은 청소년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올해 중1인 필자의 둘째 아들은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들어와 엄마에게 꾸중을 듣곤 한다. 중학생들은 왜 편의점을 찾는가? 요즘 학생들은 항시 감시를 받으면서 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선생님과 학부모가 많아야 일 년에 한두 번 만났다. 학교와 가정의 공간이 분리되어서 자녀 세대가 공간적으로 자유와 독립이 가능했던 시절이다. 요즘은 아이들이 학원에 5분만 늦어도 학부모에게 문자가 도착한다. 학원은 고객인 학부모들과 공조해 전방위로 학생을 감시한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아이들은 공간적으로 부모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핵가족 형태도 청소년에게는 불리한 구조다. 대가족 집안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야단치면 조부모가 옆에서 말려주고 견제해주었다. 권력 구도가 견제 가능한 순환형 3권 분립 체제였다. 반면 지금은 부모-자녀 양강 대립구도다. 요즘은 부모 중 한 명이 야단치는데 다른 한 명이 말리면 부부싸움만 난다.

학교, 학원, 집 모두 부모 감시하의 공간이다. 청소년에게는 감시에서 벗어난 사적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대학생이 스타벅스에 가듯 10대들은 편의점에 간다. 1000원짜리 과자 한 봉지를 사면 편의점에서 친구들과 놀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편의점은 알바 점원과 CCTV 덕분에 안전하다. 중학생들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 자신들만의 안전한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 편의점이다. PC방도 이들의 용돈 내에서 빌릴 수 있는 공간이다. 1500원가량이면 한 시간 동안 PC방을 전세 낼 수 있다. 학원과 집에서 그들만의 사적 공간을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은 PC방이나 편의점에서 삼삼오오 모여 부모의 감시를 벗어난 자신들만의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 공간을 완전히 소유할 수도 없고, 1등을 할 수도 없는 청소년들은 점점 게임 속 사이버 공간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금은 더 작은 스마트폰 스크린 속 공간으로 숨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 차라리 30년 전 학교에서 밤 10시까지 붙잡혀 있었던 야간 자율학습실이 그리울 정도이다. 그때는 그곳이 감옥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야간자율학습실은 청소년 시기에 공식적으로 부모를 떠나 있을 수 있게 해준 우리만의 거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비용 대비 공간을 빌리는 순서는 가장 저렴한 편의점부터 PC방, 커피숍, 노래방, 모텔 순이다. 우리의 주거 공간에 사적인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청소년은 편의점과 PC방으로, 대학생은 커피숍과 모텔로 가고 직장인은 차를 산다. 우리 도시의 각종 방 문화는 부족한 사적 공간과 인간의 욕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12/2017071203226.html


Posted by 겟업
2018. 1. 7. 23:53

美, 소득 따라 교육 격차 커지고 한국처럼 자녀의 미래에 집착 
핀란드·스웨덴 등 북구 나라는 '노르딕 모델'로 자녀 독립 돕고 
자신의 꿈 펼칠 수 있게 지원… 청년의 미래 위한 제도로 참고를


우리 아들딸 세대는 우리 세대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전에는 개인의 신분 상승 기회가 보장된 국가로 흔히 미국을 거론했다.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사회 최상층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많았고, 수백만명의 이민자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했기에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미국은 여전히 기회의 땅인가? 그렇지 않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미국은 오히려 다른 나라에 비해 상향 사회 이동이 매우 적다. 최저 소득 구간의 사람들이 상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계속 빈민으로 남는 비율이 훨씬 작은 나라는 오히려 북유럽 국가들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영국 노동당 당수였던 에드 밀리밴드는 이렇게 말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려면 핀란드로 가라."

오늘날 국가 경쟁력과 삶의 질 면에서 최상위를 차지하는 나라, 행복하게 살고픈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로 꼽히는 곳들은 핀란드·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아이슬란드 등 소위 노르딕(Nordic) 국가들이다. 혁신 국가, 국가 경쟁력,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일과 삶의 균형, 행복 지수, 청소년 학업 성취도 같은 조사를 할 때마다 노르딕 국가들은 모두 최상위권에 들었던 반면 미국은 순위가 훨씬 뒤처졌다.

아메리칸 드림은 어느덧 '미국병'으로 미끄러져 버린 것 같다. 그 증상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교육 문제다. 갓난아이 때부터 좋은 유치원 들여보내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고, 좋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잘사는 지역에 집을 얻어야 한다. 피아노나 무용 같은 과외 교육시키기 위해 어머니들이 돈 대고 운전하느라 골수가 빠질 지경이다. 명문대학 입학 역시 많은 경우 부모의 능력에 좌우되고, 엄청난 학비도 부모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미국 중산층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너무 크게 희생한다. 반대로 저소득층 아이들은 그런 경쟁에서 일찌감치 뒤처져서 중등 교육부터 이미 포기 상태에 빠지곤 한다. 어렵사리 우수한 대학에 들어간다 해도 경제적 부담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자연히 불평등의 대물림이 영속화하는 경향이 커졌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그토록 큰 희생을 치른 결과 모두들 행복해졌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엄마 손에 이끌려 자란 아이들이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는 어렵다. 많은 미국 대학생들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부모에게 문자나 전화 통화로 보고를 하고, 명문대학의 여학생들이 부잣집 남자 만나 결혼하는 게 꿈이라는 조사도 있다. 시간이 흘러 부모가 늙으면 지난날의 '투자'에 대한 반대급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중년의 성인들이 나이 든 부모를 돌보는 데에 완전히 얽매여 의존 상태가 역전된다.

미국 사회의 일들이 우리나라와 너무 흡사하여 놀라울 지경이다. 두 나라 모두 부모 자식 간에 서로 과도하게 얽매여 사느라 정작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 중 하나가 '노르딕 모델'이다. 아이들은 십대 후반이면 자기 삶을 찾아 부모 곁을 떠나고, 부모 역시 자식의 삶에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초·중등 교육뿐 아니라 대학 교육도 무료이니 수학 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대학교 진학이 가능하지만, 굳이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부자가 되지 않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며 잘 살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병원비가 거의 무료일 정도로 우수한 사회보장제도를 이용하며 살다가 나이 들면 시설 좋은 양로원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의 인간관계는 너무 메마르고 비정한 게 아닐까? 생각하기 나름이다. 과도한 의존과 부담에서 벗어날 때 오히려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 생각이다.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 노르딕 국가들의 단점도 언급하는 게 옳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모두 우울증, 알코올중독, 자살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행복한 사회라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흔히 북유럽의 혹독한 겨울 날씨를 거론하지만, 자연만 탓할 게 아니라 분명 이 사회 시스템이 안고 있는 심각한 결점들도 들여다보아야 한다.


남의 나라의 좋은 제도를 배워서 가져온다고 그대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많은 사례를 참조하되 결국은 우리에게 맞는 체제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누가 만드는가? 현 정부도, 다음 정부도 조만간 답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인 청년들이 새로운 꿈을 꾸고 미래 사회의 새 제도를 연구해보아야 한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11/2017071103438.html




Posted by 겟업
2018. 1. 7. 20:06

10년 전 6월 29일, 미국에 아이폰이 나왔다는 뉴스를 봤다. 그땐 별 관심이 없었다. 모토로라의 핑크색 레이저 모델이 더 예뻐 보였으니까. 당시 레이저는 날렵한 디자인과 핑크, 라임, 실버, 블랙 등 다채로운 컬러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아이폰이 마음에 들어온 것은 ‘옐프(yelp)’라는 맛집 찾기 애플리케이션(앱) 때문이었다. 2009년 9월 미국 뉴욕에 갔을 때였다. 주섬주섬 지도책을 꺼내려던 찰나, 미국에 살던 지인이 아이폰을 꺼냈다. 옐프로 우리 주변에 있는 가장 인기 있는 컵케이크 카페를 찾아냈다. 여행 책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아이폰은 그해 11월이 돼서야 한국에 상륙했다.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 망설이던 중 친구가 미국 주간지 ‘타임’ 앱 덕분에 출퇴근 시간에 영어공부 하기 좋다고 했다. 공부는 ‘지름신’의 좋은 핑계가 돼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이폰은 생활의 일부가 됐다.

구구절절 아이폰과의 첫 만남을 떠올린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29일이 아이폰의 10번째 생일이어서, 두 번째는 얼마 전 열린 동아일보, 한국디자인진흥원 주최의 디자인경영포럼에서 아이폰이 화제에 올라서다.  

포럼에 참석한 에린 조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 전략디자인경영학과 교수는 “아이폰은 디자인이 아닌 전략의 승리”라고 설명했다. 그러면 왜 10년이 넘도록 아이폰이 디자인경영의 모범 사례로 꼽힐까. 조 교수는 “아이폰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혁신을 이끄는 ‘디자인 전략’을 선보였다”고 설명했다. 

10년 전 레이저는 예뻤고, 블랙베리는 시크했다. 하지만 아이폰은 휴대전화에 맛집 검색, 영어공부 같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더 많은 개발자가 뛰어들면서 그 쓰임새는 무한히 확장됐다. 이젠 백화점, 서점, 은행도 들어 있다. 아이폰 이후의 디자인경영은 ‘남보다 예쁘게 만들어서 비싸게 판다’가 아닌 ‘새로운 기술과 의미를 제품과 서비스에 매끄럽게 담을 수 있는가’를 포괄하는 전략적 개념이 됐다. 


요즘 ‘심리스(seamless·끊김 없는)’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품과 서비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포스트 아이폰 시대에는 기업이 각종 ‘재료’를 심리스하게 융합해 디자인해야 한다.



혁신적인 기업들은 이미 디자인, 개발, 전략, 기획부서가 함께 심리스한 상품 개발에 나서고 있다. 네이버는 디자이너를 ‘서비스 설계자’로 부른다. 사용자의 경험까지 디자인해야 한다는 의미다. 에어비앤비의 창업자 세 명 중 두 명은 디자이너 출신이다. 이 회사의 디자인 팀에는 도서관 사서, 댄서, 생명보험 설계사 출신 등이 있다고 한다. 사용자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배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폰의 고향, 미국에서는 최근 10주년을 기념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중 월스트리트저널 기사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10년 후 당신의 아이폰은 더 이상 폰이 아닐 것.’ 안경이나 헤드셋, 혹은 상상도 못 할 디자인이 나타날지 모른다. 무엇이 또 우리의 10년을 바꿀지 기대된다. 
  

김현수 산업부 기자


http://news.donga.com/East/MainNews/3/all/20170630/85131654/1#csidx71cb96f42201a7eadeb92f2193836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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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7. 16:35
두 달 전쯤 미국의 유명 어린이 TV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에 '줄리아'라는 이름의 여자 인형이 새로 등장해 화제가 됐다. 48년 방송 역사상 첫 자폐아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네 살인 줄리아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할 땐 친구들이 불러도 반응하지 않고, 갑자기 웃거나 이상한 소리를 낸다. 소방차 사이렌 소리에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서미 스트리트는 줄리아를 통해 시청자에게 자폐가 무엇인지를 자연스럽게 이해시켰다.

한국에선 자폐성 장애와 지적장애를 합쳐 발달장애라고 규정한다. 국내 등록 장애인 250여만명 중 지적장애인이 20여만명, 자폐성 장애인은 2만여명 정도이다. 지적장애, 자폐성 장애, 뇌병변 등의 장애가 겹친 발달장애인도 상당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세서미 스트리트'의 자폐증 아동 캐릭터 줄리아. /EBS 화면캡처
발달장애인은 자기주장이나 권리를 제대로 내세우지 못하므로 여러 유형의 장애인 중에서 가장 소외되고 차별받는 약자(弱者)에 속한다. 19년 동안 소 축사 옆 쪽방에서 살며 강제 노역을 했던 고모(48)씨, 10여년 동안 '거짓말 정신봉' '인간 제조기'라는 글자가 적힌 몽둥이로 맞아가며 타이어 수리점에서 일했던 김모(42)씨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발달장애인 사례들이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청소년기엔 학교에 다녔어도 성인이 되면 대부분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것도 문제다. 얼마 전 광주광역시에선 발달장애가 있는 20대 여성이 아파트 12층 난간에 매달리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 어머니가 15분간 필사적으로 딸을 붙들고 있는 사이 경찰이 출동해 구조했다. 이 장애 여성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지 하루 만에 이런 소동을 벌였다고 한다. 집과 병원 외엔 갈 곳이 없었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문재인 정부는 최근 '국가가 치매를 책임지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발달장애도 포함하길 바란다. 국가와 지자체가 발달장애인의 생애주기별 욕구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지원하면 발달장애인 가족의 삶의 질까지 높여줄 수 있다. 소수만을 위한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발달장애인들을 도울 전문 인력을 양성하면 새 정부가 추구하는 일자리 늘리기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전 세계 140여 나라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자폐아 줄리아'의 인형을 움직이는 여성은 자폐성 장애를 가진 13세 아들을 두고 있다고 한다. 사람과 동물, 몬스터, 요정 등 다양한 캐릭터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서미 스트리트는 TV 속 가상의 세계다. 하지만 우리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깨치는 순간, 이 이상향은 현실로 다가온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1/20170611017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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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7. 16:32

'시인의 경지에 이른 과학자'상이라는 게 있다.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글솜씨를 발휘한 저자에게 주는 상이다. 1993년 미국 록펠러대학이 제정했다. 역대 수상자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네 명이나 됐다. 아인슈타인도 글을 잘 썼다. 우연이 아니다. 생각을 체계적·합리적·논리적으로 펼치는 것은 무엇을 하든 필수다. 미국 의대 시험에서도 에세이를 중시하는 이유다.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서구 고등교육의 근간은 수사학(修辭學)이다. 글로든 말로든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국 방송을 보면 길 가는 아무한테나 마이크를 들이대도 자기 생각을 풍부하고 논리적으로 얘기한다. 우리는 그저 "너무, 너무" "… 같아요"만 연발한다. 앞뒤가 뒤죽박죽이어서 글로 옮겨 놓으면 무슨 얘기인지 알 수도 없다. 때론 한국어를 배운 지 3~4년 된 외국인이 우리보다 더 조리 있게 한국말을 하기도 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우리도 예부터 글을 잘 쓰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걸 강조했다. 이런 전통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다 한국에 들어온 사람 불만 중 상당 부분이 글쓰기 교육이 없다는 것이다. 객관식 문제 한두 개 맞히는 데 목숨 거는 세상에선 글쓰기 교육 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이상해진다.


▶올해 초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신입생 글쓰기 평가를 했더니 39%가 70점 미만을 받았다. 주제를 벗어난 데다 비문(非文)에 맞춤법도 엉망이다. 채점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나 제대로 평가하면 점수는 훨씬 더 떨어질 것이다. "거시기하다"는 등 비속어, 인터넷식(式) 엉터리 문체가 과제물에 넘쳐난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요즘 신입 사원은 영어보다 국어 실력이 문제"라고 한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20년간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한 낸시 소머스 교수가 그제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어느 분야에서든 진정한 프로가 되려면 글쓰기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짧은 글이라도 매일 쓰라. 그래야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하버드 대학 신입생은 한 학기 적어도 세 편 에세이를 쓴다. 교수가 일일이 첨삭 지도한다. 사회에서 리더가 된 졸업생에게 '성공 요인이 뭐냐'고 물었더니 가장 많은 답이 '글쓰기'였다. '능력을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이란 질문에 대한 답도 단연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기술이 아니다. 생각의 근력(筋力)을 키우는 일이다. 생각하는 힘이 없는 사회는 주관 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냄비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갈등도 빈발한다.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우리 모습 아닌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05/2017060502685.html

Posted by 겟업
2018. 1. 7. 15:49

동성애가 더 잘 퍼진다(?)는 걱정은 군대 같은 이성애적 남성성이 강하고 개인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집단주의적 폐쇄성이 강한 공간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확인된 사실도 없다. 군대는 오히려 남자답지 못한 남자에 대한 집단적 혐오와 경계심이 높아 이성애자의 동성애자에 대한 성폭력 같은 보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작년에 일어난 일이다. 인권 관련 회의에서 미혼모 인권 행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참석했던 한 공무원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관점을 꼭 보태야겠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미혼모 인권도 중요하지만 미혼모 발생 예방도 중요하지 않나요?” 순간 다들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막막해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잠시 후 어떤 이가 다른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고 다수가 동조하며 회의를 이어갔다.


그 공무원은 자존심이 상할 상황이었다. 그가 전혀 뜬금없는 소리를 하였다면 반박하며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혼모가 늘어나면 안 좋다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 보편상식이고 공무원은 상식 수준의 말을 하고 있었다. 반론이 쉽지 않은 주장이다. 반면 인권과 예방은 같이 이야기할 수 없는 모순관계이다. 특정 소수자 그룹의 인권을 논하면서 그들은 존재하지 않아야 더 좋고 존재할 수 없게 노력까지 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반인권적이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정직한 접근은 미혼모가 많은 사회가 정말 문제인가를 토론하는 거였다. 그러나 결혼제도, 국가, 여성의 저임금과 성, 저출산 등이 얽혀 있어 논쟁을 피하는 게 낫다고 다들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특정 소수자 혐오는 그 소수자들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너무 퍼지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전염과 확산에 대한 경계 혹은 공포가 깔린 의심에서 출발한다. 미혼모의 존재를 인정하면 너도나도 미혼모가 되려 하지 않을까?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인정하면 너도나도 군대 안 간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바탕에선 이들이 적게 존재하면, 심지어는 없으면 더 좋다는 생각을 당연시하고 있다. 소수자 인권을 부정하지 않더라도 결국 차별이 예방이라는 믿음도 깨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소수자 인권은 허술한 토대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셈이다.


며칠 전 영외에서 동성 군인과 합의된 성관계를 한 대위가 군형법 92조의6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을 보면서 이 허술한 토대가 생각났다. 이 법은 영내 성관계 금지와 징계로 통제 가능한 동성 군인과의 섹스를 굳이 ‘항문성교’라며 추해서 형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으로, 특정 대상만을 심하게 차별하는 허약한 법이다. 그러나 헌법소원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대선에서도 후보자들은 군형법을 인정한다는 의견을 당연한 듯 피력했다. 다수가 지지하기 때문이다.


기사의 댓글에서도 다수의 마음이 확인된다. 다른 문제에 진보적인 특정 사이트의 댓글에서 이번에는 유죄판결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훨씬 높다. 지지가 높은 댓글은 “군은 특성상 동성애 금지해야 돼. 저런 지휘관이 동성애자면 지위를 이용해서 악용할 수도 있고 애들 작살난다”, “군대가 동성애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엄마들 어찌 아들을 군대 보내겠나?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더욱 철저한 관리와 처벌이 있어야 한다”, “내 아들이 군대 가서 동성애자 되면 어떡하지요” 등이다.


성폭력과 동성애 확산에 대한 공포이다. 동성간 성행위를 금지하지 않는 것은 동성간 연애를 허락하는 것이고, 그러면 동성애가 군대에 만연할 것이란 두려움이 다수의 반대의식에 담겨 있다. 내 아들은 절대 동성애자일 리 없지만 유혹에는 넘어갈 것 같고, 서열적 권위가 강한 군대에서 선임으로 혹은 장교로 이들을 만날 것 같기에 두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가 더 잘 퍼진다(?)는 걱정은 군대 같은 이성애적 남성성이 강하고 개인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집단주의적 폐쇄성이 강한 공간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확인된 사실도 없다. 군대는 오히려 남자답지 못한 남자에 대한 집단적 혐오와 경계심이 높아 이성애자의 동성애자에 대한 성폭력 같은 보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동성애를 금지하면 동성애 폭로 등을 약점 삼아 성폭력 등 각종 범죄가 더 쉽게 일어난다. 그래서 몇 년 전 미국 군대는 동성애자인지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던 모호한 신분불인정정책을 폐지했다.


진짜 문제는 군대의 특수성은 핑계이고 다수의 사람이 동성애는 없으면 더 좋은 것이라며 동성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을 가능성이다. 동성애가 시민사회에서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일상으로 살아가는 공간인 군대에서만 특별히 구성원간 동성애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은 나오기 힘들다.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반인권적 판결을 대하면서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존재의 부정보다 더 공격적인 차별은 없다는 것이다.




권인숙  명지대 교수·여성학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6873.html#csidx31a4d15cd2443049afb96a6af7441a7 

Posted by 겟업
2018. 1. 7. 15:25

피를 빨아먹는 게 모기의 모성애라는 얘기도 있다지만, 그래도 모기는 성가시고 아주 간혹 위험하다. 가려움쯤이야 성가신 일로 넘겨도 말라리아, 지카 같은 병을 옮기는 건 위험한 공중보건 문제다. 그래서 모기를 쫓거나 피하려는 가벼운 노력도 있지만, 병원체를 옮기는 모기 종을 물리치려는 치열한 노력도 계속된다.


아예 모기의 유전자를 바꾸자는 건 그런 시도의 첨단에 서 있다. 2010년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영국의 생명공학기업이 카리브해의 영국령 케이맨 제도에서 유전자 변형 모기들을 야생에 풀어 뎅기열 매개 모기 종을 퇴치하려는 실험을 벌였다.


퇴치 전략은 이렇다. 수컷 모기의 유전자를 변형해 야생에 푼다. 이 수컷이 야생의 암컷과 짝짓기를 하면 후손 유충은 생존에 필요한 특정 항생물질을 생성하지 못해 죽고, 그래서 세대를 거듭할수록 모기 수가 줄어들도록 했다. 당시 모기 수가 크게 줄었다는 발표도 있었으나 야외 실험 전에 환경영향평가가 충분했는지는 논란거리가 됐다.


더 적극적인 시도는 ‘유전자 드라이브’라는 말과 함께 2015년 등장했다. 모기 번식을 막을 특정 유전자가 후손에게 우선적으로 널리 유전되도록 촉진하는 기술이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은 듯했다. ‘수출 드라이브’ 같은 말에 담긴 의미와 비슷할 듯하다. 예컨대 암컷이 태어나는 걸 막는 유전자를 모기 후손들에게 널리 퍼뜨릴 수 있다면 그 종의 개체는 점점 줄고 결국엔 위험한 모기 종을 퇴출할 수도 있다는 구상이다.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NAS)가 지난해 이와 관련한 평가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를 보면, 유전자 드라이브는 일찍이 1960년부터 어떤 생물종을 개체군 수준에서 보존하거나 퇴치하는 유전공학적 관리 기술과 전략으로 연구되었는데 실효성이 특히 주목받은 것은 2013년 무렵 유전체 편집 기술인 ‘유전자 가위’가 등장한 이후였다. 실험실에선 모기나 초파리에 유전자 가위 시스템을 심어 특정 유전자를 확산하는 기법이 개발됐다.


유전자 드라이브는 위험한 야생은 억제하고 멸종위기 야생은 보존하는 전략이 될까? 기대도 높지만 우려도 깊다. 얽히고설킨 생태계를 뜻하지 않게 교란할 가능성은 한창 논란 중이다. 현재로선, 지난해 유엔 생물다양성 회의나 미국 과학아카데미 보고서가 밝혔듯이 불확실성과 우려도 있지만 연구 가치 또한 있으므로 실험실 연구는 계속돼야 한다는 쪽에 무게가 실려 있다.


논란 중에 다른 성격의 연구도 새롭게 눈길을 끌었다. 실험실이 아니라 실제 야생에서도 유전자 드라이브는 힘을 발휘할까? 야생에선 돌연변이가 출현해 유전자 드라이브에 대한 저항성도 또한 생기지 않을까?


이런 물음과 관련한 연구결과가 최근 또 하나 더해졌다. 미국 생물학 연구자들은 유전자 가위 기법을 이용해 거짓쌀도둑거저리라는 병해충의 개체수를 줄이는 유전자 드라이브 실험을 했다. 연구진은 몇 세대 뒤에 자연적으로 돌연변이가 생겨나 유전자 드라이브 전략을 무력화하는 저항성이 생겨났다고 학술지(<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했다.


흥미로운 점은, 변이가 작더라도 드물게 출현하더라도 일단 생긴 변이는 야생에서 빠르게 확산하는 것으로 분석된다는 점이다. 말라리아, 뎅기열, 지카 같은 질환의 퇴치를 목표로 연구돼온 유전자 드라이브 전략은 생태계 교란 가능성이라는 딜레마를 안고서 앞으로도 여러 논의를 거칠 것이다. 이제 유전자 드라이브 연구 전략이나 환경영향평가 논의에서는 첨단 과학의 수동적 대상으로 여겨질 법한 야생이 실은 능동적 적응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심각하게 고려될 듯하다. 야생의 진화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오철우 삶과행복팀 선임기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6282.html#csidx4b24b569d03b6b1b39acf64b20245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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