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8. 00:35

“단순히 언어적 도구로서 라틴어를 공부하고 문헌의 해독력을 높이고 유창하게 라틴어를 구사하는 것이 수업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라틴어의 단순한 암기를 지양합니다. 사실 언어 공부를 비롯해서 대학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틀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학문을 하는 틀이자 인간과 세상을 보는 틀을 세우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향후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그것을 빼서 쓸 수 있도록 지식을 분류해 꽂을 책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배가 정박되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항구를 떠나 먼 바다로 나가면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 생기는 물거품” 때문입니다. 배와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아야 하는데 물거품을 보는 것은 “메시지를 읽지 않고 그 파장에 집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거품을 바라보면 오해가 쌓이고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인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흐름출판)은 지향점이 분명합니다. 그는 “소통의 도구로서의 언어는 배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라틴어를 비롯해 모든 언어는 제대로 잘 사용할 때에 타인과 올바른 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외국어로 유창하게 말할 줄 알지만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유명 인사의 강변보다, 몇 마디 단어로도 소통할 줄 아는 어린 아이들의 대화 속에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의 수업은 라틴어 동사 활용(변화)표를 달달 외울 필요가 없이 머릿속에 ‘책장’을 마련한 다음 이 책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로 나아갈 수 있는 수업입니다. 


그래서 첫 수업은 휴강을 하고 학생들에게 운동장에 나가 봄 기운에 흩날리는 아지랑이를 보기를 권합니다. “공부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 ‘보잘것없는 것’ ‘허풍’과 같은 마음의 현상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언어 학습은 “학습의 방향성이 다른 학문들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습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공부할까요? 저자는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착취당하며 사회구조적으로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는 무신경해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모른 척하기 일쑤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두가 저만 잘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에는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경향신문 특별팀이 정리한 <부들부들 청년>(후마니타스)에서는 “2015년 8월 기준 임금 근로자로 신규 채용(근속 기간 3개월 미만)된 15~29세 청년의 64%가 비정규직”인 현실, “저소득층 청년 가구가 한 달에 고작 81만원을 벌고”, “계약 기간 1년 이하의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확률이 20%”나 되는 현실에 많은 젊은이들이 분노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일자리’와 ‘비정규직’과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이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너무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에 대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는 정치인들의 ‘막말’이 젊은이들의 분노를 더욱 키우고 있습니다. 막말 정치인은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단어를 단순하게 암기만 한 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는 저자의 충고부터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지식은 삶과 결합해 지혜가 되는 법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얘야 밖에 비가 온다”고 말하면 며느리는 그 말을 “빨래 걷어라”로 새겨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문장 자체에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법조문’이나 관행에 갇혀 있는 정치인들은 이렇게 지식 전체를 잘 버무려서 지혜를 만드는 능력을 포기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명문대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고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서 사법시험을 통과하는 엘리트 교육을 받은 한 정치인이 학교비정규직 및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동네 아줌마들’이라 말하며 ‘미친 ×들’이라고 욕을 해서 논란을 자초했습니다. 그 같은 정치인들부터 <라틴어 수업>을 읽으면서 자신이 왜,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공부를 해야 했는지를 다시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치인의 반성과 상관없이 ‘미움 받을 용기’를 배우고, ‘자존감 수업’을 받았던 젊은이들이 이제 이 책을 읽으며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자기배려’ 또는 ‘자기연민’의 지혜부터 습득하면 정말 좋겠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7172058025&code=990100#csidx43f2abc1c816040854517729927c7c7 

Posted by 겟업
2018. 1. 7. 23:48

책 정리를 할 일이 생겼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집에 쌓인 책이 많은데, 그걸 정리하지 못해 거의 무너질 지경이 되었다. 인터넷으로 집 안 정리하는 법, 책 정리하는 법 같은 걸 찾아보았는데, 어떤 정리의 법칙이든 가장 우선되는 건 ‘잘 버리는 일’ 같았다. 우선되는 일인 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책이란 게 과일 껍데기처럼 다 먹어치우거나 아니면 깎아버리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유행 지난 옷처럼 의류수거함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다양했다. 지인들의 서명이 있는 책들은 물론 버릴 수 없고, 오래전에 밑줄 그어가며 보았던 책들도 버릴 수 없고, 전에는 읽기 싫었지만 앞으로는 읽고 싶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책들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다 버릴 수 없는 책들이었다. 


책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건 소설책이다. 한 번 읽은 책도 있고 몇 번 읽은 책도 있고, 펼쳐보기만 하고 만 책도 물론 있다. 모두들 나름대로 내 책장에서 나이가 들었다. 최근 어떤 작은 모임에서 요즘 시대에도 여전히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대단히 새로운 질문이 아니었음에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좀 불끈했다. 발끈이 아니라 불끈이다. 나한테는 소설 쓰는 일이 맛있거나 맛있지 않거나 아주 좋은 밥상을 차리는 일과 같고, 그 밥상 차려놓은 후에는 이게 맛있기까지 해야 할 텐데 하면서 살짝 MSG의 유혹도 받고, 차림이 이쁜가 사발과 대접 놓임새도 신경 쓰고, 아무튼 그러한 일인데, 누군가 그걸 먹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묻는다면 거기에 조리있는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 불끈, 드셔보시지요, 할 뿐이다.
 학창시절에 샀던 책들도 눈에 띄었다. 30년도 더 된, 노랗게 색이 바랜 책들이다. 대부분의 책들은 지난 30년 동안 한번도 다시 펼쳐보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다시 펼쳐볼 일이 거의 없을 듯싶은데, 이 책들을 한쪽 구석으로 치우는 일이 어려웠다. 추억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없는 돈을 안타깝게 모아 샀던 책들, 그중에는 엉뚱한 표지로 제목과 내용을 가려놓은 금서도 있었다. 당시에는 금서도 많았고 그 금서들을 배포하는 방법도 많았다.


불끈이든 발끈이든, 이렇게 감정이 앞서면 대답에 조리가 없기 마련이다. 그때 톨스토이 얘기를 했었다. 독후감 같은 것을 쓸 일이 생겨서 근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한 권당 600페이지가 넘는 총 4권 분량의 긴 책이다. 이 책의 감상문을 쓸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서 편집자가 ‘혹시 체력이 허락된다면’이라는 농담 같은 말을 덧붙였을 정도다. 그만큼 압도적인 길이이기도 하거니와 그 촘촘한 짜임새의 긴장이 만만치 않다는 뜻임을 알아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읽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전쟁과 평화>를 읽어본 적이 있었던 것인지 자신할 수가 없어서이다. 아주 어렸을 때 어린이용으로 편집된 세계명작 동화로도 읽었던 것 같고, 촘촘하게 인쇄된 몇 권의 책으로도 읽었던 것 같지만, 기억이 다 가물가물하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은 새롭게 읽을 때마다 그 울림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건 물론 달라져있는 내 삶 때문이다. 책을 다시 읽는 나는 매번 전보다 더 나이가 들어있다. 빛나던 열정과 결기는 좋게 얘기하면 성숙해져있지만 나쁘게 얘기하면 소심하게 빛을 잃었거나, 심지어는 비겁한 방식으로 잊혀지기도 했다. 오래된 소설을 읽는 즐거움, 추억을 더듬는 안타까움과 쓸쓸함도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분명히 오래된 소설을 읽고 또다시 읽어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안타까움과 쓸쓸함을 넘어 갑자기 환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어떤 한 문장 때문일 수도 있고, 여전히 기억 속의 어느 한순간을 찌르는 듯한 장면 때문일 수도 있고,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옆에서 들리는 듯 자주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작가의 숨소리 때문일 수도 있다. 200년 전을 살았던 대작가 톨스토이의 숨소리를 듣는다니, 근사하지 않나. 


낯선 나라의 낯선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귀족들의 삶, 황제를 위해 기꺼이 바치고 싶은 목숨, 전쟁에 대한 광적인 열정,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 모든 것이 오늘날의 우리와는 다르다. 그 다름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다름 속에서도 ‘여전히 관통하는’, ‘여전히 같은 것들’이다. 전쟁 속에서 펼쳐지는 오만과 허위, 그 전쟁이 앗아간 목숨들, 그리고 파괴된 사랑들, 그래도 여전히 삶은 이어진다는 것. 


이 소설에는 느닷없는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히 빠른 전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시간과 그 시간 속의 사람들, 그리고 결국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쫓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이렇게 읽히는 것, 한 장 한 장, 한 줄 한 줄, 더듬어가듯 읽히는 것을 천천히 쫓아 읽는 게 책을 읽는 즐거움이지 싶었다. 



전쟁에 관한 소설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무수하다. 전쟁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작가는 자신이 겪고 있는 가장 끔찍한 전쟁을 묘사하고 있을 것이다. 물리적인 전쟁의 한복판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도처에서, 우리나라의 도처에서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 누구나 그러할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처럼, 특별히 내세울 게 없어서 국민 중의 한 사람, 서민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들 삶이 정작 그러할 것이다. 그들, 우리들의 삶이 차근차근 위로받기를 바란다. 누가 봐도 정쟁으로 보이는 그런 싸움 말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편에 선 정치를 기대한다. 어떤 정치인이나 자신이야말로 그렇다고 말할 것이고, 그중 많은 정치인들의 말을 믿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건 이름 없이도 이루어냈던 우리들의 승리의 기억이다. 그러니, 국민의 감시가 무서울 것이다. 지난 세월, 뒤로 간 시간들이 너무 길었다. 서둘러, 그러나 차근차근, 아주 긴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듯이, 한 문장 한 문장 빼놓지 않고 읽듯이, 그러다가 책의 한 권 한 권이 쌓여가는 것을 보듯이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김인숙 소설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6142055005&code=990100#csidx8e4f84aa918308582064563a374d125 


Posted by 겟업
2015. 3. 8. 00:19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만나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왠지 즐겁고 유익하고 행복해질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나에겐 김정운 교수님이 그런 분이었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에서부터 『남자의 물건』 『노는 만큼 성공한다』까지 김정운 교수님의 책은 유머러스한 제목만큼이나 흥미로우면서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어느 순간 나는 교수님의 팬이 되었다. 최근 『에디톨로지』라는 책을 내고 일본 유학 중에 잠시 귀국한 김정운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하얗게 눈이 내리는 날, 빨간색 머플러를 두르고 나타난 김정운 교수님은 삶의 재미와 포인트를 정확히 아는 분 같았다. 과거에 비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지만 즐거움을 모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을 위한 좋은 조언의 말씀을 듣고 싶었다.

-교수님 반갑습니다. 일본 생활은 어떠신지요?

 “일본에 있으면 좀 쓸쓸하고 외롭다가 한국에서 바쁘게 지내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면 ‘여유가 있는 여기가 좋구나’ 하고 느껴요.”

 -처음에 어떻게 일본 유학을 가시게 되셨지요?

 “나이가 만 50세가 되었을 때 내가 다 소진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일본으로 안식년을 신청해서 갔어요. 그해 다이어리 첫 장에 ‘한 해에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를 써보았는데, 나도 모르게 ‘올해부터는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한다’라고 쓴 것이에요. 왜 그런가 보니 제가 그동안 하기 싫은 것을 너무 많이 하고 살았더라고요.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들을 만나고, 읽고 싶지 않은 책들을 읽고. 하기 싫은 일은 가능하면 그만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고 생각하니,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전문적인 화가는 못되더라도 글과 그림을 같이하면 내가 남들과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아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중에게 항상 유쾌한 모습만 보였던 교수님이었기에 조금은 의외의 답이었다. 아마 인지도가 높아질수록 찾는 곳이 많아지고, 넓어지는 관계와 모임 속에서 자신이 소진된다고 느끼셨던 모양이다. 지금은 삶의 주도권을 되찾으셨다고 하니 다행이다. 최근엔 글과 함께 그림을 같이 그리시면서 논리로만 쓰는 글이 아닌 감성을 공유하는 글쓰기로 행복하시다 했다. 그래서 이번엔 행복에 관해 여쭈어 보았다.

 -매년 조사에도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부탄이나 필리핀보다도 낮게 나옵니다. 그리고 집단 불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심리적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교수님이 보시기에 왜 그런 것 같습니까?

 “한국 사회가 옛날과 비교해서 경제 수준이라든지, 정치적 민주화라든지 이런 형식적인 틀은 어느 정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그 틀을 채워나갈 수 있는 ‘삶의 내용’들이 풍성하지 못해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면 즐거운지 모르는 채로 그냥 살다 보니, 자기가 느껴지지 않아 불안하고,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괜한 적을 만들어 정치적 이념을 가지고 싸우거나, 아니면 연예인 이야기하는 것밖에는 대화거리가 없는 삶을 살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풍성한 삶의 내용을 만들어 갈 수가 있을까요?

 “삶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서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공부해보는 것입니다. 내 삶의 관심사들이 다양해지는 공부를요. 제가 독일에서 13년간 지내면서 가장 부러웠던 문화는 그들이 주말판 신문을 여유롭게 읽는 모습이었습니다. 그곳의 주말판 신문은 책, 음악, 미술, 여행 등의 여러 주제를 담아 책 한 권 두께로 나옵니다.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를 읽고 저녁에는 친한 친구들을 만나 낮에 읽었던 재미있는 내용을 이야기하며 보냅니다.”

 -제가 미국에 살다 중국 유학을 하며 느꼈던 것이, 미국에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사방팔방에서 다양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한곳으로 시선이 모아지기 힘든 반면, 중국에서는 누굴 만나도 다들 비슷한 관점에서 제한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해서 좀 답답하더라고요.

 “한 사회의 성숙도를 잴 수 있는 척도는 그 사회 안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삶의 주제가 얼마나 다양한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서양식 파티가 이루어지기 힘든 이유도 우리나라에선 반드시 그 파티의 주인공이 있어야 하고, 그 주인공이 가운데로 나와서 노래나 발언을 해야 하고, 결국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이게 됩니다. 각자 삶의 주제가 풍부하면 다양한 이야기가 그 파티 구석구석에서 펼쳐질 텐데 그 삶의 내용이 빈곤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단순화됩니다.”

 두 시간이 넘는 대화의 시간 동안 김정운 교수님이 강조한 것은 삶의 의미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공부’였다. 그는 자신이 교수를 그만둔 것도 그 공부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도 교수직을 내려놓고 잠시 동안 불안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현대인들의 고질적인 문제, 불안에 대해 물어보았다.

 -지금 현대인들은 많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텐데요, 심리학자이신 교수님 관점에서 한번 분석해 주시지요.

 “우리가 불안한 이유를 단순히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만 돌리는분도 많습니다. 물론 사회 구조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다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다만 구조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조적인 문제의 해결은 수단적 가치이지 내 삶의 궁극적 가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수단적 가치들이 제대로 안 되어 있어 궁극적 가치에 도달하지 못하니 자유를 이야기하고 민주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즉 내 삶의 궁극적 가치에 대한 고민과 노력도 동시에 진행돼야 합니다.”

 - 그러면 궁극적 가치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왜 사는가? 이 질문에 대한 개인들의 성찰적 대답입니다. 저는 심리학을 전공했으니 명쾌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행복하려고, 즐겁기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꾸 부정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 그런데 정치적으로 어두웠던 시대를 보내셨던 제 앞 세대들은 본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죄의식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세대만 하더라도 대학생 때 연애하면 나쁜 사람이었어요. 사랑도 동지적 사랑을 해야 한다 해서, 내가 감옥 가면 옥바라지해야 하는 그런 사랑,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랑도 제대로 한번 못해보고, 공부하면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여겨지고, 재미있으면 불안하고,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면 죄의식을 느끼고. 이것이 압축성장과 시대가 남겨놓은 어두운 측면입니다. 형식적인 민주주의는 이루어졌고 경제적 성장도 세계 10위권까지 이뤄냈지만 내 안을 들여다보면 아무 내용 없이 텅 빈 것 같고 불안한 거예요. 수단적 가치가 이뤄지면 궁극적 가치도 실현될 것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이에요.”

 -혹자는 삶의 내용을 풍성하게 하고 행복하기 위해 재미있는 무언가를 배우라고 하면 배부른 소리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셔요. 하루하루 살기도 바쁘다고요.

 “저 역시도 한때는 정말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빴나를 보니까 최소한 절반은 제쳐낼 수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먹고살기도 바쁘다고 내 삶의 내용을 채우지 못하는 것을 합리화하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합리화하면 내 미래의 삶은 누가 책임질까요? 앞으로는 은퇴하고도 30년은 더 산다고 하는데 나중에 늙어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우리는 불안하면 관계 속으로 도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꾸 퇴근 후 저녁 약속, 술 약속 만들어서 관계로 도피하려 하지 말고 주체적으로 자신이 즐거운 일을 찾아서 한 가지씩 배워보세요.”

 관계 과잉 사회. 김정운 교수님은 우리의 불안이 관계로의 도피를 만들고, 그 관계 의존적 문화가 자기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가 잘나가던 교수 자리를 내려놓고 일본 유학을 떠난 것도 새로운 공부를 통해 삶의 내용을 좀 더 풍성히 채우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은퇴까지 30년의 시간을 일합니다. 하지만 은퇴 후 30년의 시간이 더 남아 있어요. 우리는 그 나머지 30년의 시간을 위해 무슨 준비를 하고 있나요?” 자신에게 되묻는 듯 말하는 김정운 교수님. 이번엔 그의 최근작 『에디톨로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새로 내신 책 『에디톨로지』를 보면 창의적 아이디어는 기존에 있는 데이터와 데이터 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을 통해 편집해 나가는 과정 속에서 나온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주 훌륭한 통찰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쌓아놓은 데이터는 많지만 정작 창의적 아이디어는 잘 나오지 않는 것 같아요. 왜 그런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삶이 여유롭지가 않아서 그래요. 각 데이터 간을 연결하는 새로운 메타언어는 미학의 분야이지 논리의 분야가 아니거든요. 즉 삶이 즐겁고 재미있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때 창의적 아이디어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사회 지도자들부터 여유를 가지고 좀 쉴 줄 알아야 변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열심히만 하자’ 하는 구호는 평균 연령 50세 때 맞는 구호였지 지금처럼 100세 시대에 맞는 구호가 아닙니다.”

 -경직된 사회에서 자라서 그런지 지금 우리나라 젊은이들도 자기 본인 생각을 창의적으로 잘 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요?

 “제가 독일에 가서 보니까 학생들이 수업 중에 노트 필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카드에다 필기를 하더라고요. 노트는 한번 써놓으면 찢을 수가 없기 때문에 여러 데이터 간의 관계를 주체적으로 새롭게 설정하는 편집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카드에다 필기를 하면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그것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카드를 사용하게 되면 카드 위에 본인의 언어로 키워드를 쓰게 되고 그 키워드를 가지고 또 자기 식으로 정리를 하게 됩니다. 바로 이 과정에서 본인만의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고 실력이 쌓이는 것입니다. 데이터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키워드를 뽑는 것, 그것이 진짜 실력입니다.”

 -제가 『에디톨로지』를 읽으며 공감했던 부분이 ‘일관된 자아에 대한 요구가 심리적 억압을 낳는다’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인간은 원래 모순적인 존재이지만, 본인이 때론 받아들이기 힘든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면도 같이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발견했을 때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안의 여러 가지 나를 용납하지 못하고 억압하면 다른 사람들을 못 받아들이고 억압하려고 합니다. 반대로 성찰을 통해 내 안에 다양한 내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면 타인을 좀 더 너그럽게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심리학에서는 내 안의 다양한 모습들 간의 관계가 나와 다른 사람들 간의 관계와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여기 오는데 앞에서 차를 막고 안 비켜주더라고요. 이럴 때 ‘저 사람은 왜 저럴까?’ 하면서 화만 내지 말고 생각을 돌려 ‘나는 안 그랬나?’ 하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은 삶의 어느 순간 행복하다고 느끼시나요?

 “저는 음악을 좋아합니다. 음악을 듣다 감동해서 눈물이 날 때가 있는데 그때가 저는 제 삶 속에서 큰 행복의 순간입니다. 특히 산책할 때 음악을 들으면 나에게 처해진 상황과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이 음악과 함께 가슴이 트이면서 새롭게 보이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때가 참 행복합니다.”

 김정운 교수님과의 만남은 예상대로 유익하고도 즐거웠다. 새해를 맞아 한번 올해에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 한 가지와 ‘정말로 하기 싫은 일’ 한 가지를 다이어리에 적어보자.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그것들을 내 삶 가능한 범위 내에서 노력하고 실천해보자. 그저 남들의 요구만 들어주면서 끌려다니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닌, 김정운 교수님처럼 내 인생의 주도권을 내가 갖고 남의 시선을 덜 의식하며 사는 것이 바로 행복의 길인 것 같다.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836881&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5. 3. 7. 23:47

찻잔을 사이에 두고 앉았습니다. A대학의 교수가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행복할 줄 알았어요.” 학창 시절, 세 가지 꿈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5년 안에 박사 학위를 딸 것. 그 다음에 미국의 유수한 대학에서 교수가 될 것. 마지막으로 대학 근처의 백인들이 사는 근사한 동네에다 집을 장만할 것. “이 세 가지를 이루는 날, 저는 행복하리라 생각했어요.” 

정말 최선을 다해 뛰었다고 합니다. 네 시간 이상 잔 날이 없었답니다. 결국 5년 만에 박사가 되고, 미국에서 손꼽히는 대학의 교수가 되고, 멋진 집을 장만했습니다. “그날만 기다렸어요. 그 집으로 이사했어요. 정말 행복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달랐습니다. 굉장히 허한 감정이 밀려오더군요. 거기에 행복은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가 저는 ‘매화’가 떠올랐습니다. 밖에는 찬바람이 쌩쌩 붑니다. 겨우내 쌓인 눈은 녹지도 않았습니다. 발목까지 푹푹 잠깁니다. 우리의 삶입니다. 삶은 늘 춥고 수시로 고달픕니다. 그 눈길을 뚫고 사람들은 떠납니다. 매화를 찾아서. 겨울 끝, 봄의 시작을 알리는 꽃. 내 인생의 겨울이 끝나고, 내 삶의 봄이 시작됨을 알려줄 꽃. 그 찬란한 ‘터닝 포인트’를 찾아서 말입니다. 

산과 들을 뒤집니다. 공간뿐만 아닙니다. 시간까지 뒤집니다. ‘옛날에는 행복했던가, 미래에는 행복할 거야.’ 그래도 매화는 보이지 않습니다. 뒤지고 뒤져도 없습니다. 대체 매화는 어디에 숨은 걸까요. 사람들은 지칩니다. 결국 기진맥진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랬더니 내 집 뜰에 매화가 피어 있습니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매화가 말입니다. 

다들 아는 이야기라고요? 아니요. 사실은 모르는 이야기일 걸요. 왜냐고요? 우리는 지금도 집을 나가 눈 속을 헤치며 매화를 찾고 있으니까요. 그렇게 행복을 찾고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먼 곳’에 익숙합니다. 늘 먼 곳을 바라보고 먼 곳을 동경합니다. ‘님은 먼 곳에’란 노래도 있잖아요. 매화도 그렇게 멀리 있습니다. 밤하늘의 별처럼 말입니다. 숱한 예술가들이 먼 곳을 노래했습니다. 별들이 울어대는 고흐의 그림을 봐도,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읊조려도 그렇습니다. 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여기에는 없는 별. 먼 곳에는 있는 별.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이사를 하면 찾을 것만 같은 별. 여기서 우리가 빠트린 아주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달에 가서 보면 어떨까요. 화성에 가서, 목성에 가서, 아니면 더 먼 우주에 가서 보면 어떨까요. 그렇습니다. 지구가 그런 별입니다. 그토록 동경하던 별. 그토록 가고 싶던 별. 우리가 바로 그 별에 살고 있습니다. 그게 지구입니다. 당신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입니다. 

그러니 매화는 언제 필까요. 겨울의 끝자락, 아니면 봄의 초입에만 필까요. 아닙니다. 행복의 매화는 사시사철 피어납니다. 내 집 뜰 앞에 지금도 피어 있습니다. 고통의 순간, 슬픔의 순간에도 매화는 지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피어납니다. 하루 네 시간씩 자며 공부하던 시절. 힘들고 고달팠던 순간들. 그곳에 정말 매화가 없었을까요. 

과거의 나는 기억이고, 미래의 나는 꿈입니다. 진짜 나는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 행복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맞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행복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정말 행복해질 테니 말입니다. 거기가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가요. 내게 이미 주어진 행복을 깨닫는 일. 그걸 이해하면 눈밭은 순식간에 매화밭이 됩니다. 우리의 일상, 내 집 뜰에는 매순간 매화가 피어나니까요.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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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5. 3. 7. 22:27

“곰팡이가 핀 책이 아니라 명상에서 진리를 찾아라. 달을 보기 위해선 연못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라.” 


경전의 한 구절이냐고요? 페르시아의 오래된 속담입니다. 기나긴 세월 속에서도 이 속담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통하는 이치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너도 나도 ‘통찰력’을 찾습니다. 옛날에는 가진 정보가 많고, 가진 지식이 많으면 통찰력이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이제 웬만한 정보와 지식은 스마트폰 몇 번만 두드려도 얻을 수 있습니다. 정보의 양과 지식의 축적이 더이상 통찰력으로 직결되진 않습니다. 

그래서 다들 묻습니다. “대체 어디에서 통찰력을 키울 수 있을까?” “어떡해야 통찰의 눈을 가질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사람들이 주로 내놓는 답은 ‘책’입니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 세상에 책만큼 생각을 키워주고, 안목을 넓혀주는 게 어디 있나?” 

저는 목숨을 건 듯이 책 읽는 사람도 여럿 만났습니다. 일주일에 한 권씩 읽는 사람도 있고, 1년에 100권을 읽는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떤 가톨릭 신부님은 “지금껏 성경책만 1000번을 읽었다”고 하더군요. 참 어마어마한 독서량입니다. 

그런데 뜻밖입니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는 이들도 통찰력은 제각각입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통찰력이 더 강한 것도, 책을 적게 읽는다고 통찰력이 더 약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 달에 열 권 읽는 사람보다 한 달에 한 권 읽는 사람의 통찰력이 더 번득일 때도 있더군요. 그래서 더 유심히 살폈습니다. 강한 통찰력의 소유자들. 그들은 대체 무엇이 다를까. 공통점이 있더군요. “어유, 내가 통찰력은 무슨…”하면서도 꼭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책을 많이 읽기보다, 책을 깊이 읽으려고 노력한다.”

아하! 싶더군요. 창고에 오래 묵혀둔 책에서만 곰팡이가 피는 게 아니었습니다. 지금 손에 들고 내가 읽는 책에서 곰팡이가 필 수도 있더군요. ‘명상’이 생략된다면 말입니다. 좌선한 채 고요히 앉아 있는 게 명상이 아닙니다. 깊이 묻고, 깊이 생각하고, 깊이 궁리(窮理)하는 게 명상입니다. 독서를 할 때는 책과 내 마음이 마주 앉습니다. 책에는 문고리가 있습니다. 온갖 정보와 지식, 저자의 경험이 담긴 창고를 여는 문입니다. 독자는 그걸 열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게 다는 아닙니다. 독서에는 또 하나의 문고리가 있습니다. 그건 책과 마주한 내 마음의 문고리입니다. 그 문고리는 책만 읽는다고 잡히진 않습니다. 책의 내용에 대해 깊이 묻고 궁리할 때 비로소 잡히는 문고리입니다. 책에도 길이 있고, 내 마음에도 길이 있습니다. 책에 난 길을 걸을 때 ‘지식’이 쌓입니다. 내 마음에 난 길을 걸을 때 ‘지혜’가 생겨납니다. 책 속에 난 길도 걷고, 내 마음속 오솔길을 향해서도 깊숙이 걸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 안에 ‘길 눈’이 생깁니다. 길을 보고, 길을 알고, 길을 내는 눈. 그게 통찰력입니다. 어찌 보면 “성경책을 1000번 읽었다”는 건 안타까운 고백입니다. ‘1000번을 읽어도 모르겠더라’는 절규가 깔려 있으니까요. 차라리 성경을 한 구절만 읽고, 거기에 대해서 1000번 묵상(명상)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럼 내 안에 성경을 보는 ‘길 눈’이 생겼을지도 모릅니다.

페르시아 속담을 다시 읽어봅니다. ‘달을 찾으려면 연못이 아니라 하늘을 보라.’ 통찰력도 똑같습니다. 책에 나 있는 길만 따라가면 ‘지적인 사람’이 됩니다. 책에 난 길을 보며 내 마음에도 길을 낼 때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게 통찰력입니다. 우리의 삶을 헤쳐가는 ‘길 눈’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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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5. 3. 7. 22:25

#1. 미국 대학의 한국 교수가 물었다. 미국 학계가 끊임없이 새로운 학문적 성취를 하는 이유를 아느냐고. 국력과 영어의 힘이라고 답했다. 한국 교수가 미국 교수보다 무능해서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답했다.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자부심입니다. 나의 연구가 인류의 지혜를 한 단계 더 높인다는 자부심이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가 부연했다. “미국에 살아서 생긴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미국과 다른 나라 학자를 가르는 큰 차이가 바로 이겁니다. 미국 학자는 내가 미지의 영역에 대한 인류 최초의 개척자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잘 났다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눈높이와 시야가 다르다는 거죠. 미국 프로야구 결승을 ‘미국 시리즈’가 아닌 ‘월드 시리즈’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한국에서 공부할 때 좋은 연구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개척자로서 인류에 대한 기여 같은 생각은 못 했습니다.”

#2. 인기 인문학 강사인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 후 온 나라가 안전 문제에 촉각이 곤두섰을 때 발생한 지하철 사고를 언급했다. “저는 이런 사고가 또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사고가 나면 매번 강조하는 게 뭡니까. 준비, 훈련 부족 아닙니까. 그런데 왜 매번 안 될까요.” 매뉴얼 부재 등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최 교수의 답은 달랐다.

“준비와 훈련 모두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대비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다는 창의·전략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있는 것에 맞춰 일하는 데는 능숙합니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우리의 인식 밖에 있습니다. 선진국을 운영해 본 경험이 없어서입니다. 가지고 있는 물품을 보세요. 우리가 만든 것은 있어도, 우리가 처음 만든 것이 있는지요.”

#3. 법이 시행된 지 보름도 안 돼 사달이 났다.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단통법) 말이다. 목소리 큰 소비자는 혜택이 줄었다고 분통이다. 한쪽에선 중저가폰을 쓰는 소비자의 혜택이 늘었다고 항변한다. 단말기 제조회사와 이동통신 3사의 이해도 갈린다. 시장에 맡기자는 주장과 과도기이니 보완하자는 의견이 맞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단통법은 한국이 세계 최초로 만든 법이다. 정보기술의 맨 앞줄에 있다 보니 베낄 참고서도, 준용할 기준도 없는 상태로 만든 법이다. 이렇게 처음 해 본 일에서 우리 실력이 드러나고 말았다. 좋은 법, 나쁜 법을 따지기 전에 아쉬운 게 이 대목이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열심히 쫓아가는 것으론 부족하다는 걸 이제 다 안다. 중국이 으르렁대는 통에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할 수밖에 없다. 도전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생존의 문제다. 자문한다. 우리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갈 혜안과 역량을 가졌을까. 단통법 혼란은 그저 단통법만의 문제이길 바란다.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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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5. 3. 7. 22:12

칼 세이건은 인간과 문명의 미래를 많이 걱정했던 우주과학자다. 물론 세이건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 중에 인간의 내일을 우려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세이건이 좀 다른 점은 그가 좋고 나쁜 것에 대한 윤리적 가치분별과 판단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비판한 것 중에는 인류의 ‘진화적 습성’에 관한 것이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몸에 붙여온 버릇들 중에는 ‘못된’ 것이 많다. 

그런데 진화가 붙여준 습성이라 해서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고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세이건이다. 이런 주장을 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는 과학자로서는 드물게, 마치 용감한 인문주의자처럼, 인간의 ‘개선’ 문제를 많이 생각했던 사람 같아 보인다.

 진화가 인간에게 붙여준 ‘나쁜 습성’이란 어떤 것인가. 세이건이 만든 습성목록에는 대표적으로 다섯 개쯤이 올라 있다. 싸우고 죽이기 좋아하는 호전성, 그릇된 사회적·문화적 관습,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 이방인에 대한 이유 없는 적개심, 증오와 불신의 버릇 등이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습성들은 적대적 환경에서 인류를 살아남을 수 있게 한 집단적·부족적 특성들이기도 하다. 지도자에게 맹종하고 싸우기 좋아하고 이방인을 의심하고 적개심을 품는 것 등에 ‘진화적 이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이건 같은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 이득들은 이제는 인류가 버리고 넘어서야 할 낡은 ‘파충류적’ 열정들이며, ‘인류의 생존을 크게 위협하는’ 파괴적 요소들이다.

 버려야 할 것은 이런 버릇만이 아니다. 우주에서 보면 지구 행성은 손에 쥐면 부서질 것 같은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행성은 생명을 품고 과학 문명을 일으키고 우주를 연구하기 시작한 소중한 고장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알려진 범위 안에서는 이런 성취를 이룩한 곳이 지구 말고는 없다. 

인간은 과학을 아는 유일한 생물종이다. 우주는 그 인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이해한다. 이처럼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지구행성에서 생명은 보존되고 문명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자면 인간이 자기 존재의 품위를 위해 청산해야 할 것들이 또 있다. “극단적 형태의 민족 우월주의, 우스꽝스러운 종교적 광신, 맹목적이고 유치한 국가주의”가 그런 것이다. 지구는 “이런 것들이 발붙일 곳이 결코 아니다.”

 세이건을 읽다 보면 수천 년 전 출현한 유대경전 ‘레위기’의 한 대목이 불쑥 머리에 떠오른다. “너희는 거룩하라.”(19장 2절) 유대민족의 신 야훼가 족장 모세를 시켜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게 했다는 당부의 언어이자 명령이다. 경전 성립의 유대적 배경을 구태여 파고들지 않더라도, 한 민족집단을 이끌어야 했던 모세에게 최대의 관심은 집단의 강한 결속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결속의 방법은 무엇인가? “너희는 거룩하라”가 그 방법론 같다. 결속 명령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보편적 가치와 도덕성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결속의 열정만으로 뭉쳐진 명령은 ‘부족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욕심쟁이 인간이 무슨 수로 ‘거룩’해질 수 있을까? ‘레위기’에 나오는 “거룩하라”의 방법론은 이런 것이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포도원의 떨어진 열매도 다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타국인을 위하여 버려두라.” 

더 깊은 대목도 나온다. “이방인이 너희 땅에 우거하여 함께 있거든 너희는 그를 학대하지 말고 너희 중에 낳은 자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한때 이방인이었느니라.” 

부자 사랑에 빠져 약자와 가난한 자를 한없이 경멸하고 심지어 혐오하기까지 하는 한국의 다수 기독교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대목이다. ‘레위기’의 이런 구절들은 인간 존재가 어떻게 이 우주에서 의미와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가, 그 방법론을 일러주기도 한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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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12. 26. 16:58
두 아이의 엄마 샬롯 키틀리(영국)씨가 지난 16일 세상을 떠났다(depart this life). 36세.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be diagnosed with stage four bowel cancer). 간과 폐로 전이됐다(spread to her liver and lungs). 대장과 간의 종양을 제거하기(remove tumors from her bowel and liver) 위해 두 번 수술을 받았다. 25차례의 방사선 치료, 39번의 끔찍한 화학요법 치료(25 rounds of radiotherapy and 39 bouts of gruelling chemotherapy)도 견뎌냈지만,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블로그 내용.

"살고 싶은 나날이 저리 많은데, 저한테는 허락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become grumpy with my husband) 늙어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안 주네요.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매일 아침 아이들에게 일어나라고, 서두르라고, 이 닦으라고 소리 소리 지르는(shout at my children to wake up, hurry up and clean their teeth) 나날이 행복이었더군요.

살고 싶어서, 해보라는 온갖 치료 다 받아봤어요. 기본적 의학 요법은 물론(not to mention the standard medical therapies), 기름에 절인 치즈도 먹어보고 쓰디쓴 즙도 마셔봤습니다. 침도 맞았지요(get acupuncture).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귀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feel like a waste of precious time). 장례식 문제를 미리 처리해놓고 나니(sort out my funeral in advance) 매일 아침 일어나 내 새끼들 껴안아주고 뽀뽀해줄 수 있다는(have a cuddle and kiss my babies) 게 새삼 너무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얼마 후 나는 그이의 곁에서 잠을 깨는(awake next to him) 기쁨을 잃게 될 것이고, 그이는 무심코 커피잔 두 개를 꺼냈다가 커피는 한 잔만 타도 된다는 사실에 슬퍼하겠지요. 딸 아이 머리 땋아줘야(plait her hair) 하는데…, 아들 녀석 잃어 버린 레고의 어느 조각이 어디에 굴러 들어가 있는지는 저만 아는데 그건 누가 찾아줄까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be given six months to live) 22개월 살았습니다. 그렇게 1년 보너스로 얻은 덕에 아들 초등학교 입학 첫날 학교에 데려다 주는(walk my son for his first day at school) 기쁨을 품고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녀석의 첫 번째 흔들거리던 이빨(his first wobbly tooth)이 빠져 그 기념으로 자전거를 사주러 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보너스 1년 덕분에 30대 중반이 아니라 30대 후반까지 살고 가네요. 중년의 복부 비만(middle-age spread)이요? 늘어나는 허리둘레(expanding waistline), 그거 한번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희어지는 머리카락(greying hair)이요? 그거 한번 뽑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살아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저는 한번 늙어보고 싶어요. 부디 삶을 즐기면서 사세요. 두 손으로 삶을 꽉 붙드세요(keep a tight grip on your life with both hands). 여러분이 부럽습니다."

'Live to the point of tears.'(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 '눈물이 나도록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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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10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감동(感動)을 국어사전에서는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이라고 푼다. 지난주엔 부산에서 전해진 찡한 사연에 많은 국민이 감동했다. 이름하여 ‘치매 할머니 보따리’ 사건이다. 주인공은 1948년생, 그러니까 만 66세의 여성 A씨다. 사실 요즘 66세는 할머니라 부르기엔 좀 이른 감이 있지만, 그래도 손녀를 보셨으니 할머니가 맞다.

 사연을 복기해 보자. 지난 15일 오후 부산 서부경찰서 아미파출소로 신고전화가 들어왔다. 112 신고가 아니라 파출소 일반전화로 한 여성이 제보했다. “부산대학병원 앞길에서 웬 할머니가 보따리를 들고 서성거린다”였다. 경찰이 출동해 순찰차로 파출소에 모셔왔다. 슬리퍼를 신고 계시길래 주변 주민일 것으로 생각하고 경로당 10여 곳과 주민센터·문화센터 등에 수소문했으나 허사였다. 한참 뒤 할머니가 자기 이름과 사는 곳(모라동)을 기억해 내고 경찰에 말해 주었다. 다시 부산하게 움직인 끝에 가족과 겨우 연락이 닿았다.

여기까지는 흔한 사건이다. “부산 서부서 관내에서만 많을 때는 일주일에 3~4건이나 치매 노인 실종 신고가 들어온다”고 아미파출소 박헌중(49·경위) 관리주임은 말했다. 찡한 사연은 할머니가 들고 있던 보따리 두 개에 들어 있었다. 경찰이 가족에게 인계하러 할머니를 모시고 간 곳은 아미동에서 차로 30분 이상 걸리는 개금동의 한 병원. 할머니의 딸(38)이 제왕절개로 딸을 출산하고 입원해 있었다. 그리고 보따리 하나에는 이불, 다른 하나에는 밥과 미역국·반찬이 들어 있었다. 오후 8시 가까워서야 병실에 도착했으니 음식은 이미 다 식어 있었다. 딸의 산후 구완에 쓰려던 밥이요 국이었다. 딸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간호사들이 사연을 듣고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다음 날 부산경찰청 페이스북에 이 이야기가 실리자 누리꾼들이 다투어 댓글을 달거나 퍼 날랐다. 아미파출소에는 칭찬하는 시민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전화뿐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달걀, 1회용 기저귀, 화장지, 라면, 음료수를 들고 물어물어 파출소까지 찾아왔다.

팍팍한 세상. 비록 당사자에게는 안타깝고 그나마 천만다행인 해프닝이었지만, 많은 국민이 공감하고 위로를 얻었다. 어머니의 지극한 자식 사랑이 있고, 이제 누구에게나 남의 일이 아닌 치매 증세가 있고,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경사에다 경찰관의 헌신적인 자세까지 겹쳐진 사연이다. 듣고 마음이 녹진녹진, 뭉클해지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비슷한 일은 가끔 벌어진다. 지난달 22일에는 서울 남대문경찰서 태평로파출소 경찰관들이 행인의 신고를 받고 길 잃은 열한 살 아이의 집을 찾아주었다. 알고 보니 지적장애 3급이었던 꼬마는 자기 이름만 말할 뿐 부모 연락처와 사는 곳을 대지 못했다. 경찰관이 “짜장면 먹고 싶어”라는 아이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짜장면 배달해주는 중국집 전화번호 아니?”라고 묻자 전화번호 여러 개를 줄줄이 말하더란다. 그중 한 곳이 강서구의 중국식당으로 확인되었고, 덕분에 부모를 찾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서울경찰청 페이스북).

수많은 개인의 감동은 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집단적인 감동이 제도를 바꾸고 사회를 낫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도처에서 분출되는 감동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변화의 그릇에 담아내는 일은 정치와 행정의 몫이다. 과연 우리 정치는 그런 역할을 다하고 있을까. 부산 치매 할머니의 경우 남편과 사별한 후 작은 주공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인지(認知) 장애를 안고 홀로 생활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식들이 있지만 가정마다 곡절이 있을 테니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내가 따지고 싶은 것은 이름표나 실종 방지장치(배회 감지기) 같은 서비스가 왜 할머니에게는 제공되지 않았으며, 노인요양보험의 간병서비스도 받지 못하고 있었는지, 구청·시청은 그동안 무얼 했는지 하는 의문이다. 정치인과 관료에게는 감동의 이면에 깔린 문제점을 갈무리해 사회를 변화시킬 의무가 있지 않은가. 

이건 아파트 관리비(난방비) 비리 의혹을 폭로하다 폭행사건에까지 휘말린 배우 김부선씨 사례에도 해당된다. 한 여성이 외롭게 싸우는 동안 구청·시청, 지방의회, 경찰·검찰과 국회의원은 손 놓고 있었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대마초 합법화 주장을 다시 꺼내지만 않는다면, 김부선씨를 지방의회 의원으로라도 추천하고 싶다. 다수의 잔잔한 감동을 잘 담아내 큰 변화를 이끌어내면 우리 국회도 감동을 넘어 환호와 환희를 불러일으킬 텐데,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짜증과 혐오만 자아내니 큰일이다. 제발 아미파출소 직원들만큼이라도 일을 해보라.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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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12. 4. 00:49

태권도장에 다니는 일곱 살 아들내미는 품새를 시작하기 전 구호부터 외친다. 관장님이 시켜서 앵무새처럼 외워대는 문장이지만, 듣고 있으면 가끔 울컥할 때가 있다. “태권도를 배우는 이유.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강인한 정신력과 용기를 길러 약한 자를 돕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태권도를 배웁니다.” 살짝 비문인 상투어들 사이에서 청신한 폭포수처럼 귀에 꽂인 구절은 바로 ‘약한 자를 돕고.’ 새된 목소리로 목청 높여 외치는 이 세 어절을 듣고 있노라면-엄마가 보기에는 바로 니가 그 약한 자인 것 같다만-, 정신에는 촉촉히 물기가 돈다. 약한 자를 돕는다니. 이 낡고 흔해 빠진 말이 왜 이렇게 낯설고, 아름다운 걸까.

약자들의 따스한 연대를 누구나가 말하던 시절이 있었다. “없는 사람들끼리 돕고 살아야죠” 같은 대사를 실생활에서도, 허구에서도 수시로 들었다. “우리 같은 서민들”은 많은 문장의 주어로 곳곳에서 발화됐고,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냐” 같은 위대한 인문정신도 저잣거리에서 빈번히 설파됐다. 이제는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피식 웃음이 나는, 풍속극에나 등장할 법한 사어(死語)들이지만, 말로라도 그러던 시절이 어쨌든 있기는 했다.

이제는 누구도 스스로를 약자로 규정하거나 선언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의 ‘약자-됨’은 결단코 은폐되어야 할 존재의 치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어. 갑과 을. 나는 내 자식이 갑이 되길 바래.” 정성주 작가가 이태 전 쓴 드라마 ‘아내의 자격’에 나오는 시대를 꿰뚫는 명대사다. 그러므로, ‘갑-되기’가 시대정신인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들의 대부분은 약자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약자를 혐오하는 약자들에 의해 자행된다. 윤일병을 죽음에 이르게 한 28사단의 장병들, 단식 중인 세월호 유가족 보라며 닭다리를 뜯고 있는 노인들, 한때의 피해자가 가장 극렬한 가해자로 돌변하는 왕따와 학교 폭력, 지역차별과 여성비하를 토사물처럼 쏟아놓는 극우 청년단체….. ‘나는 너보다 나이가 많다’, ‘나는 너처럼 비명에 자식을 잃지 않았다’, ‘나는 이제 친구가 있다’, ‘나는 그 지역 출신이 아니다’, ‘나는 여성이 아니다’가 이들에겐 일말의 권력, 알량한 권세가 된다. 모두가 갑이 되길 원하고, 기적적으로 모두가 갑이 되는 곳. 아이부터 어른까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갑이어서 슬픈 땅.


강한 것은 아름답고, 약한 것은 추하다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너무도 성실하게 내면화했다. 약한 것은 딱하고 가여운 것이 아니라 못나고 혐오스러운 것이어서, 이제 약자조차도 약자의 마인드 따위는 필사적으로 가지려 하지 않는다. 영세 자영업자지만 정치의식은 대기업 CEO인 ‘사장님’들은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며 노동을 착취하고, 평생을 서울내기로 살아온 중년 부인도 지배계급을 선망하며 거침없는 지역 차별 발언을 쏟아낸다. 권력이라곤 가부장 권력밖에 가져본 적 없는 가난한 노인들은 어버이의 이름으로 정신적 매질을 멈추지 않고, 성 권력뿐인 절망한 청년들은 칼날보다 잔인한 언어로 여성을 능멸한다. 내가 약자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제물을 찾아 물고 물리는, 갑의 표식을 이마에 붙인 을들의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지옥이 바로 여기다. 이것은 소수의 흉측한 사람들이 벌이는 이상행태가 아니라 강한 것만을 욕망하게 만든 이 사회의 아비투스가 초래한 총체적 정신병리다. ‘얕보이면 죽는다’는 공포, ‘당하는 게 죄인’이라는 좌절이 우리 내면에서 작동하고 있는 한, 이 그악스런 비극은 종식될 수 없다.


미시권력의 끊임없는 비교우위를 통해 약자가 약자를 혐오하는 동안, 강자들의 거악은 쉬이 잊혀졌다. 강자들의 태평성대를 만들어준 건 그러니까 바로 우리 약자들이다. 아마 지그시 웃고들 있었겠지. 강한 것은 아름답고, 약한 것은 추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추한 것이 추한 것이다. 그게 누구든, 약자를 돕는 자가 아름답고, 약자를 혐오하는 자가 추한 것이다. 이미 늦어버렸다는 생각이 사실은 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들에게라도 가르치는 수밖에.


박선영 문화부 기자 


http://www.hankookilbo.com/v/421a11a078824492965b19042e028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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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4. 00:47

집이나 배를 지으려면 먼저 설계도를 준비해야 한다. 창업, 즉 사업을 시작하는 데에도 먼저 설계도가 필요하다. 창업의 설계도를 사업계획서(Business model)라고 한다. 나는 청년창업이 우리나라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서울대에서 가르친 모든 과목에서 학생들에게 기말시험 대신 사업계획서를 발표하도록 한다.

사업계획서는 청년창업의 성공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 학생들이 파워포인트로 사업계획서를 발표할 때 나는 스크린을 보지 않고 발표하는 학생을 보면서 세 가지를 관찰한다. 첫째는 학생의 눈, 둘째는 학생의 입, 셋째는 학생의 말이다. 영롱하게 빛나는 눈에서 열정을 보고, 흔들림 없이 든든한 입에서 정직성을 보며, 발표 내용을 정교한 용어로 구사하는 말에서 전문성을 본다.

학생들에게 질문을 한다. “여러분이 창업에서 성공하려면 열정, 정직성, 전문성이 필요하다. 이 중 한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겠는가?” 학생 대다수는 전문성을 포기한다. 이에 동의한 나는 두 번째 질문을 한다. “열정과 정직성 중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학생들 간에 답변이 엇갈리지만 대개의 경우 정직성을 포기하겠다는 편이 4대 6정도로 더 많이 나온다.

학생들에게 새로운 질문을 한다. “이번에는 투자자 입장이 되어보라. 여러분은 창업자의 열정, 정직성, 전문성을 보고 투자해야 한다. 이 중 한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겠는가?” 학생 대다수는 전문성을 포기한다. 이에 동의한 나는 두 번째 질문을 한다. “여러분이 투자하려는 창업자의 열정과 정직성 중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면?” 첫 질문에 대한 답변과 달리, 열정 보다 정직성을 가진 창업자에게 투자하겠다는 쪽으로 학생들 의견이 모아진다.

두 질문을 끝낸 후 학생들에게 얘기해준다. “창업자는 어항 속 금붕어 같은 존재이다. 금붕어가 눈을 깜빡이거나, 꼬리를 살짝 흔들기만 해도 우리는 금박 알아 차린다. 마찬가지로 창업자가 가진 생각을 투자자는 손쉽게 파악할 수 있다. 창업자는 투자자를 속이려 해도 안되고 속일 방법도 없다. 열정이나 전문성은 많고 적음의 문제이지만, 정직성은 있고 없음의 문제이다. 따라서 정직성은 창업의 필요조건이자 출발점이다. 정직하지 않은 사람은 아예 창업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학생들은 내 의견에 동감해준다.

정직성은 무엇인가? 쉽게 들통나는 거짓말, 까만 것을 하얗다고 하는 거짓말쟁이는 우리 주변에 별로 없다. 창업자가 자칫 하기 쉬운 거짓말은 앞으로 사업을 해나가는데 있어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기 전까지는 투자자에게 말해주지 않는 것이다. 보통 창업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 중에서 낙관적이거나 좋은 이야기는 잘 하지만, 비관적이거나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일들은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나쁜 마음으로 숨기려 한다기 보다는 투자자를 불필요하게 마음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취지에서 안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창업자들은 성공하기 어렵다.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하지 않으면 스스로 미리 준비하고 대처할 방법을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투자자로부터 도움을 받을 길도 없기 때문이다.

투자자에게 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을 의도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사람을 보통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의도적으로 어려움을 숨기는 사기꾼이건, 투자자 마음을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얘기하지 않는 마음 약한 사람이건 결과는 같다. 실패한 창업자이다.

사업계획서를 발표하는 학생들 중에서 장래 닥쳐올 어려움에 대해 당당하게 얘기할 수 있는 학생을 발견하면 그를 엔젤이나 창업투자사에 소개해준다. 이런 창업자를 선택한 투자자들은 대화를 통해 어려움을 함께 극복해 나가면서 사업을 성공궤도에 올릴 수 있게 된다.

창업에서 성공하는 사람은 열정적인 눈을 가지고, 솔직하게 어려움을 털어놓으며 전문성을 가지고 사업하는 사람이다. 사업계획서를 잘 만드는 사람에게 투자할 것이 아니라 정직한, 흔들리지 않는 입을 가진 사람에게 투자한다면 그 투자에서 성공할 확률은 크게 높아질 것이다.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학 명예교수·


http://www.hankookilbo.com/v/15313643802b41bfb33cef8da06633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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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4. 00:18

60년 전의 초등학교 시절, 나는 밥 먹는 것보다 만화를 더 좋아했다. 당시 본 만화 중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스토리가 하나 있다. 어느 소년이 개울가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물건을 주웠다. 깨진 거울조각이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거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울 안에는 생전 보지 못한 동네가 있었다. 소년은 그 동네 아이들과 친구가 돼 한참 놀다가 거울 밖으로 나왔다. 나와보니 이미 저녁이 됐고 소년은 집에 들어가 어머니로부터 늦게 왔다는 꾸지람을 들었다.


휴대전화가 스마트폰으로 바뀌면서, 만화에 등장한 소년처럼 우리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안에는 동호인들이 모인 사이버카페, 관심 이슈에 대해 정보를 주고 받는 사이트 등 다양한 커뮤니티가 무궁무진하게 있다. 매일 새로운 인간관계가 생기고 색다른 삶이 만들어지고 있다. 60년 전 어느 만화가가 상상했던, 깨진 거울조각 안에 있는 새로운 세상이 현실로 구현된 것이다.


1980년대에 우리는 컴퓨터 혁명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1990년대에는 인터넷 혁명이 일어났고, 2000년대 들어서는 모바일 혁명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보니 이들은 본격적인 혁명이 아니었다. 스마트 혁명의 준비작업에 불과했다.


혁명은 단순한 기기나 제도의 변화가 아니다. 우리 생각의 변화이고, 삶의 변화이며 가치창출 원천의 변화이다. 스마트 혁명은 물질적인 풍요와 함께 창조적인 생각과 자유를 맘껏 누리는 삶을 찾게 해주고, 안전하고 행복한 세상을 제공해줘야 한다.


미래창조과학부에 의하면 2014년 7월말 기준으로 스마트폰을 쓰는 사람이 3,935만명이다. 한 달에 30만명씩 늘고 있으니 10월 이내에 4,000만명을 돌파할 것이 확실하다. 12세 이상 한국인 4,500만명의 90%가 사용자인 셈이다. 우리나라는 스마트 시대를 가장 먼저 열고, 스마트 시대를 제일 앞에서 이끌 수 있는 나라이다. 비록 10년째 2만달러 대에 머물고 있지만, 우리가 스마트 선진국이 된다면 몇몇 국가를 빼놓고는 1인당 소득 10만달러를 제일 먼저 달성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스마트 사회를 만들고 이를 통해 세계를 선도하려면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모든 성인은 스마트폰을 가져야 한다. 스마트폰을 안 가지고 있는 국민에게는 정부가 무료로 보급해야 한다. 이를 위해 원가 5만원 이내의 스마트폰이 보편화돼야 한다. 모든 성인이 스마트폰을 가지게 되면 주민등록증을 스마트폰에 탑재하도록 한다. 운전면허증을 비롯한 각종 면허증이나 학생증과 같은 신분증, 크레디트카드 역시 스마트폰에 탑재함으로써 우리 국민은 두툼한 지갑 대신 스마트폰 하나만 들고 다녀도 된다. 상거래는 물론, 모든 계약도 스마트폰으로 이뤄지게 된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창업에 18분 걸린다고 한다. 스마트폰으로 창업 절차를 진행할 수 있다면 3분에 끝낼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삶은 감성이 주도하는 분야로 국한될 것이다.


둘째,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첨단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이성적인 우리 삶이 모두 스마트폰에 들어가려면 하나하나의 행위를 소프트웨어프로그램으로 개발해서 스마트폰에 장착해야 한다. 우리가 세계에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제일 먼저 개발하고, 이를 세계 표준으로 만들면 전세계는 우리가 만든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1인당 10만달러 수준의 국가소득과 경쟁력을 창출할 수 있다.


셋째, 인권에 대한 국민의식이 높아져야 한다. 스마트 혁명에 대한 인식이 충분하지 않거나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사용하지 못하는 국민들을 위한 교육과 배려는 선결과제이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서의 보안장치는 안전장치이다. 휴대폰을 분실할 때 오는 삶의 중단과 파괴라는 황당한 상황, 그리고 휴대폰의 내용이 외부로 유출될 때 나타나는 인권 면에서의 심각한 문제점을 사전에 대비하는 것은 필요조건이다. 인권 보호에 대한 정부와 국민의 인식은 충분조건이다.


이 세가지 조건이 갖춰질 때 우리나라는 거울 속에 있는 세상, 1인당 소득 10만달러를 넘는 스마트 사회를 선도하는 최선진국이 될 것이다.


조동성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ㆍ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장


http://www.hankookilbo.com/v/1c9663af563541989ed83e135bf4d36d



Posted by 겟업
2014. 12. 4. 00:11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한국 정치 시스템의 변화를 위한 대대적인 압박이 가해지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정부기관 개편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적지 않은 이들이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뭔가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듯이 국민을 안심시키려는 의도가 아닐까 의심한다.

전방위로 펼쳐지는 정부의 신속한 조치는 일시적인 만족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장관 교체나 정부조직 개편, 또는 세월호 사태에 직접 관련된 몇 명을 처벌한다고 해서 앞으로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이 겪는 문제는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다. 탐욕스러운 기업과 자신의 잇속만 챙기려는 정부 관리 간의 불투명한 거래 관행은 한국 사회 전반에 걸친 부패 문화의 한 단면일 뿐이다. 덕분에 우리 아이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정부 불신이 심화된다.

이 문제는 어떤 정책도, 어떤 정치인도 풀기 어렵다.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일반 국민들은 진정한 지도자를 원하기보다는 기적을 행할 ‘마술사’를 원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도자란 우리가 선출하고 몇 년간 우리를 대신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인물이 아니다. 우리의 기대에 어긋날 경우 쫓아내면 그만인 사람은 더더욱 아니다. 지도자란 바로 우리의 지지를 바탕으로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는 자들이다. 그런 지도자가 우리를 도울 순 있겠지만 문제 해결의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지도자에게서 어떤 기적을 바라고 표만 던지면 변화가 오리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번지르르한 법안이 세상을 바꾸리라는 환상도 떨쳐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습관의 정치’다. 문화란 정책을 통해 바뀌기보다 각 개인이 자신의 습관을 바꿈으로써 서서히 바뀐다. 일단 위기를 넘기고 법안만 통과시키면 된다고 스스로를 기만할 게 아니라 사회 문제가 각 개인의 일상적인 행동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의 행동이 보다 더 투명해지고, 각자 속한 직장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할 때만이 사회 전반에 정책적 차원을 능가하는 변화가 일어난다. 그렇게만 되면 이기적인 무리들도 태도를 바꾸도록 압박이 가해질 것이다. 보통 사람들의 태도가 건전해지면 정부도 예전의 활력을 되찾고 잘못된 시스템도 제자리를 찾는 법이다.

그러나 요즘 한국에선 정치인들이 전혀 일관성 없는 공약을 남발한다. 그들은 TV에 출연할 때는 선량한 군자인 양하지만 이내 최고급 승용차를 타고 돈 많고 힘 있는 자들과 만나러 달려간다. 정치인들은 학부모들에게 교육 개혁이 필요하다고 열을 올리지만 몇 시간 뒤엔 엘리트 집단을 만나 부동산 투기와 자녀의 해외유학 문제를 이야기한다.

정치를 바로잡으려면 우리 주변에 올곧은 정치인들이 있을 때만 해결 가능하다. 항상 대중교통만 고집하고, 자신과 가족에게 득이 되는 거래를 거부하고, 연설할 때나 CEO를 만날 때나 일관되게 서민을 위해 이야기할 때만 진정한 변화가 시작된다.

나는 가끔 서울에서 열리는 환경 기술 세미나에 참석한다. 많은 경우 고급 호텔에서 열리고 냉방은 춥게 느껴질 만큼 빵빵하게 튼다. 참석자 대부분은 기사가 모는 고급차를 타고 온다. 만찬장에는 먹을 수 없을 만큼 푸짐한 음식이 나오고, 그 절반 이상이 음식 쓰레기로 버려진다. 이처럼 환경을 사랑한다는 이들조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적으로 환경을 해치는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습관의 정치’는 생소한 개념이 아니라 한국의 오랜 전통이다. 조선시대가 500년을 지탱한 것은 이런 형태의 정치를 포용한 놀라운 문화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중용(中庸)에 “군자란 홀로 있을 때도 조심스레 행동한다(君子愼其獨)”란 구절도 있지 않은가. 건전한 정치의 시작은 ‘사회 전체를 위해 과연 무엇이 옳은가’라는 끝없는 고민에서 시작된다. 최고의 지도자란 이처럼 올바른 습관이 체질화돼 심지어 홀로 있을 때도 쓸데없는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요란한 정책적 변화보다 우리의 일상 습관을 바꿈으로써 사회를 바꿀 수 있다. 20세기 최고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말씀을 떠올려 본다. “세상의 변화를 원한다면 자기 습관부터 바꾸어야 한다.” 그의 비폭력 저항 운동, 스스로 물레를 돌리고 손수 옷감을 짜는 카디 운동과 스와데시 운동도 그렇게 습관에서 시작됐다. 만일 우리가 보다 평등한 사회를 원한다면 주변 사람들부터 보다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투명한 정부를 원한다면 우리의 일상생활부터 투명해져야 한다. 정치에 신념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습관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세상을 바꾸고 문화를 바꾸려면 하루하루 우리의 습관부터 ‘작은 혁신’을 이어가야 성공할 수 있다.


엠마뉴엘 페스트라이히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486829&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4. 12. 3. 16:07

3월 새 학기가 시작되고 온 나라가 새로운 배움의 에너지로 꿈틀거리고 있다. 

‘본성인가 환경인가(nature or nurture)’라는 유명한 구절은 교육학 이론으로서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데 유효한 사고의 틀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천재는 천재로 낳아진 것인가 또는 그렇게 키워진 것인가. 

물론 어느 한쪽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유전자도 좋아야 하겠지만 좋은 환경에서 잘 길러지는 것도 중요하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 유전자의 영향 지수가 환경의 영향보다 약간 더 높다고 한다. 

인지과학과 생명과학의 발달은 현재의 논의를 새로운 국면으로 가져왔다.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고 같은 환경 속에서 자란 두 쌍둥이도 인생의 경로가 갈라지기도 하는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들 각각의 유전자에도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현재 내가 겪는 인생의 경험들이 내 유전자를 바꾼다는 것으로, 환경이 본성을 지배하며, 본성의 결함은 환경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까지 넓게 해석할 수 있는 충격적인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발견이 가지는 사회적 또는 철학적 함의는 말할 수 없이 크다. 삶의 방식이 바뀌면 삶의 내용이 바뀔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존재란 계속 새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이런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교육의 의미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필자가 17년 전 미국에서 겪은 개인적 경험 하나. 

늦게 둘째 아이를 갖고 십여 년 전 첫아이 때 한국에서 실패하였던 모유 수유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출산의 날이 다가왔고 그 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였다. 산모인 나와 아이는 고요한 장소로 옮겨져 그대로 잠에 들었다. 깨어났을 때 휴식을 취한 몸은 강한 생물학적 의욕을 느끼게 했다. 간호사는 이제 아기가 첫 식사를 할 때라고 농담을 하면서, 아기를 미식축구 공처럼 들더니, 엄마 가슴 쪽으로 천천히 스윙하듯 갖다 댔다. 엄마 젖 근처에 다가가자 아기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입을 짝 벌렸는데 그때 간호사가 매정하게 물리쳐 버리는 게 아닌가. 간호사는 그런 행동을 몇 차례 반복했고 배고픈 아기는 급기야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큰 울음을 터뜨렸다. 

간호사는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아기를 엄마에게 돌진시켰다. 한입 가득 엄마의 젖무덤을 물고 엄마 몸에서 나온 젖을 꿀꺽 삼킨 아이는 그 후 마치 그것이 본성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모유를 먹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간호사의 행동이 없었다면 아이는 엄마의 젖꼭지만 물고서 빨게 되고 계속 그 습관이 반복되면 젖을 물리는 엄마는 아파서 고통받고 아기는 모유가 부족해 불안한 유년기를 보낸다는 것이었다. 

당시 짧지만 진한 경험을 통해 나는 일생일대의 큰 깨달음을 얻었다. 우선, 엄마는 바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 배우고 노력해야 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이었다. 

수유(授乳)라는 간단한 일에도 원리가 있고 교육은 이것을 잘 가르쳐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체계적인 배움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배운 기술은 깊은 인식과 진한 경험을 가져오며, 결국 모성은 더 풍부해지고 아기와 엄마 간의 연대도 더욱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전문 기술, 고도의 과학에서만 교육을 말한다. 그러나 젖을 먹이는 법도 배워서 하면 더 잘할 수 있다. 계측되고 수량화되고 특정 범주의 지식에만 적용하는 교육이라면 우리 교육관의 첫 단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지식의 서열화가 그러한 교육관 속에 들어있다. 그러한 사고방식 속에서는 어떤 종류의 일들은 하찮은 일로 소외된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 공사장에서 양편에서 오는 차를 차단하기 위해 깃발을 흔드는 사람은 어떤 훈련을 거쳐서 그 일을 시작했을까. 맞은편에서 오는 운전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표정을 만들고 적절한 거리에서 특별한 형태로 깃발을 흔듦으로써 가장 효과적으로 통행 흐름을 유도하는 방법을 배우고 실습하는 기회들이 과연 주어졌을까.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비정규직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라고 한다. 여성과 고령자의 비정규직 비율도 계속 늘고 있다. OECD는 ‘직업교육을 확대하라’고 조언한다. 노동의 질을 높이고 그것의 전문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교육’ 말이다. 교육 현장은 교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40306/61474123/1#replyLayer


Posted by 겟업
2014. 10. 10. 15:44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주인공 햄릿의 독백(soliloquy)이다. 그런데 미국 코넬대와 콜로라도대 연구팀은 'To do or to have'라는 화두를 던졌다(bring up a conversation topic). 다양한 경험이냐, 물질적 소유(diverse experiences or material possessions)냐, 그것이 인생 행복에 문제라는 것이다.

연구팀은 경제적 선택이 '웰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입을 모은다(join in the chorus). 경험적 구매(購買·experiential purchase)와 물질적 구매(material purchase) 중 돈을 주고 무언가를 '하는' 것이 물건을 사서 '갖는' 것보다 더 큰 행복감을 준다고 한다. 가령 같은 값이라면 고급 시계나 보석을 사느니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거나 영화·음악회·스포츠 경기를 보러 다니는 것이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improve the quality of life) 얘기다.

[윤희영의 News English] To do or to have, that's the question


쌓이는 물질적 재화의 증가(the increase in our stocks of material goods)는 정신적·신체적 웰빙에 이렇다 할 도움이 거의 되지 않는다(produce virtually no measurable gains in our psychological or physical well-being). 더 큰 집, 더 멋진 차를 산다고 해서 행복도 그만큼 커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도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consist in the abundance of possessions) 아니하니라'(누가복음 12장 15절)라고 했다.

물질주의적인 사람(materialistic person)은 주관적 행복감(subjective feeling of happiness)과 삶에 대한 만족도(level of satisfaction with life)가 낮은 경우가 많다. 우울증에 빠지기 쉽고(be prone to depression) 피해망상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be likely to be paranoid). 사회 비교에 취약한(be vulnerable to social comparisons) 탓이다. 남이 2억원을 받고 자신은 1억원을 받을 바에야 남은 2500만원 자신은 5000만원 받기를 원한다. 내가 얼마 버느냐가 아니라 남에 비해 얼마 더 받느냐에 집착, 행복할 틈이 없다.

이에 비해 인생 경험에 투자를 하는 사람은 그런 달갑지 않은 비교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경험이라는 독특한 속성 때문에(owing to the unique nature of experience) 견주어보거나 비교당할 대상이 없어 평온하다. 더 큰 집도 집, 더 멋진 차도 차, 그대로 낡아만 가지만, 경험은 시간이 갈수록, 쌓이면 쌓일수록 인생을 훨씬 풍요롭게 한다(make our life a lot richer).

경험은 물질적 소유물에 비해 사회적 가치가 더 높다(have more social value than material possessions). 사회적 관계가 다양해져 행복을 느낄 기회도 많아지고, 다른 사람들과 경험을 나누다 보면 사회적으로 더 환영받는(be more socially acceptable) 존재가 된다. 그런데 속에 든 건 없으면서 겉으로 가진 것들에 대해서만 떠들어대고 으스대는(bang on and boast about their possessions) 사람은…, 시쳇말로 '진상'이라는 소리 듣는다.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17/2014091704738.html




Posted by 겟업
2014. 10. 10. 15:17

불과 몇십 년 전까지 뭐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던 나라. 기술도, 자원도 없어 머리카락이나 주워 모아 가발을 만들어 수출하던 나라. 외화 벌이를 위해 간호사·광부·군인들을 해외로 파견하던 나라. 대한민국 이야기다.

그러던 나라가 어느덧 세계인 절반이 사용하는 휴대폰을 만들고 반도체를 생산한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나라 감독과 배우들이 만들어낸 드라마를 보려고 듣지도 못한 먼 나라 국민이 저녁마다 TV에 시선을 집중한다. 참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우리 기업들이 만든 최신 제품들. 얼마 전부터 세계시장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 나쁘지 않다고. 많이 노력한 게 보인다고. 하지만 뭔가 부족하고 실망스럽다고.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실망스럽다는 걸까? 바로 꿈과 희망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뇌가 만들어내는 대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답 또는 질문이다. 배가 고프기에 사냥을 해야 하고, 발이 아프기에 튼튼한 신발이 필요하다. 최첨단 스마트폰은 더 빨라야 하고, 고급 TV는 지금보다 더 좋은 화질을 가져야 한다. 모두 이미 주어진 질문에 찾아야 하는 정답들이다. 전쟁, 배고픔,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역사는 이렇게 험한 세상이 우리에게 던져준 수많은 문제의 정답을 찾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갑이고, 우리는 항상 을이었으니 말이다.

대한민국이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는 사실 간단하다. 우리의 미래는 세계인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질문들에 달려 있으니 말이다. 도대체 왜 IT 기계들을 '입고'다녀야 할까? 왜 기계들에 인공지능을 주어야 할까? 어떻게 사는 게 진정한 행복일까?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 사는 젊은이들이 밤새워 공부하는 순간. 드디어 우리나라, 우리 기업들, 우리나라 국민이 이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서 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우리에게 던진 문제에 답을 찾던 것이 지금까지의 경제라면, 우리가 던진 문제를 세상이 풀도록 하는 게 창조경제일 수도 있다.

김대식 카이스트 뇌과학 교수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23/2014042303247.html

Posted by 겟업
2014. 9. 14. 10:06

예전에 비디오 영화 앞에 모 그룹의 기업광고가 있었다. 무당벌레가 풀잎을 오르고, 청개구리가 물속으로 뛰어들고, 거위가 홰를 치고, 민들레가 날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기업의 이미지로 차용한 광고다.


난 그 광고의 조감독이었다. 내 선임조감독은 어디서 청개구리와 무당벌레를 구해야 하냐며 걱정이 태산같았다. 나는 선임조감독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친 뒤 1990년 6월 어느 일요일 경기도 양평 근처에 있는 ‘국수역’에 갔다. 그곳에서 놀고 있는 초등학생들을 모아놓고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준 뒤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이 형이 다음주 일요일에 올 테니 그때까지 너희들은 청개구리와 무당벌레를 잡아놓아라. 그러면 청개구리는 한 마리당 200원, 무당벌레는 한 마리당 100원씩 주겠다”라고.


일주일이 지난 후 난 선임조감독과 함께 아이들을 만나러 국수역으로 갔다. 국수역에는 예닐곱명의 그 지역 초등학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뒤에는 서너명의 어머니들이 잔뜩 화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서 계셨다. 아이들 앞에 내가 나타나자 한 아주머니가 레이저급의 안광을 쏘아대면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아이들에게 청개구리하고, 무당벌레 잡으라고 시킨 사람입니까” 난 영문을 몰라서 “왜 그게 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하고 되물었다. 아주머니는 바닥에 펴놓은 우산을 치우셨다. 그 안에 과실주를 담그는 커다란 유리병이 무려 세 개나 놓여져 있었다. 알고 보니 내 제의를 받고 아이들은 지난 일주일간 들로 산으로 물가로 다니면서 무당벌레 한 병, 그리고 청개구리를 두 병 가득 잡아놓았다. 몇몇 아이들은 학교도 안가고 청개구리와 무당벌레를 잡으러 다녔으니 어머니들로서는 화가 단단히 날 만도 했다. 아이들은 무려 청개구리 300여 마리, 무당벌레 500여 마리를 잡아놓았다. 어머니들은 무섭게 나를 바라보시면서 어서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고 빨리 이곳을 떠나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내고 계셨다.


난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금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10만원이 넘게(90년에 10만원이면 꽤 큰돈이었다) 필요한데 지갑을 탈탈 털어도 돈은 5만원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난 어머니들에게 미안하지만 지금 가진 돈이 5만원 밖에 없다고 솔직히 말했다. 어머니들은 당신들 때문에 애들이 학교도 안가고 고생했는데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냐며 화를 내셨다.


난 솔직히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잡아 놓을 줄 예상하지 못했다. 5만원은 드리지만 청개구리 50마리 무당벌레 50마리만 가져가겠다고 제안하는 순간 선임조감독이 어머니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아주머니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저희는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잡아 놓을 줄 몰랐고 아이들과의 약속은 꼭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청개구리 10여 마리 무당벌레 10여 마리면 충분하니 나머지는 아이들과 함께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내겠습니다. 오늘 모자란 돈은 다음주 일요일에 다시 찾아와 꼭 드리고 주민등록증을 되찾아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때서야 아주머니들은 화를 푸시곤 아이들과 함께 돌아가셨다.


난 선임조감독에게 따져 물었다. “형, 5만원도 엄청 큰돈인데 뭐하러 그런 약속을 해요? 우리가 뭐 대단히 잘못한 것도 아니지 않아요?”그때 선임조감독이 말했다 “야, 저 아이들은 어쩌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과 처음 약속한 것일수도 있어. 그런 아이들에게 약속은 지키지 않아도 되는 거라는 인식을 심어줘서 되겠니?” 순간 난 그 형이 너무나 존경스럽고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얼마 전 우리는 우리지역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희생적으로 봉사하고, 또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많은 분들의 약속을 들었다. 이제 앞으로 4년간 우리는 그분들이 우리에게 하셨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국수역 앞마당에서 내 선임조감독이 초등학생들에게 보여줬던 약속의 중요성을 그분들이 절대 모르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원동연 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이사


http://www.hankookilbo.com/v/9acf8265b6a14029b8841404dd1a4e92



Posted by 겟업
2014. 9. 14. 10:04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배를 버리고 먼저 탈출하는 선장과 선원의 모습을 보며 분노한다. 동시에 의문스러워한다. 그래서 ‘악마’라는 답을 떠올린다. 그들이 아예 다른 종류, 가령 악마라면 분노가 치밀긴 해도 이해가 어렵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우리의 심각한 상태를 예시할 뿐이라고 생각하면, 명치끝에 뭔가 걸린 듯이 답답해진다.

“가만히 있으라.” 짐작건대 이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승객들 모두가 갑판으로 뛰쳐나오고 그러면 자신들이 구조될 확률이 낮아질 것을 우려한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해경이 공개한 동영상을 보면, 탈출할 때 그들은 아주 태연하다. 이들이 ‘악마’가 아니라면 이 태연함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해경이 도착했으니 그들이 승객들을 구하겠지”라고 믿었다고 보는 것이다. 선원들은 해경이 ‘자신들과 달리’ 선의를 가지고 직무에 충실할 것이라 믿었으며, 또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승객 수백명이 죽게 될 것을 예상했다면 구조 직후 전화나 걸며 한갓지게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통을 넘겨받은 해경 역시 선원과 같았다. 현장에 처음 도착한 123정 함장은 인터뷰에서 세월호 가까이 배를 대면 함께 침몰할 것을 우려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안전이 우선이었고, 장비도 훈련도 없었기에 사태에 대처할 방법도 몰랐던 것 같다. 이들은 다시, 자신과 가까운 언딘마린인더스트리는 ‘자신들과 달리’ 문제를 해결해주리라 믿은 것 같다. 구조작업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잘못도 잘 덮어주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언딘은 독점적 사업권에서 얻을 이익에는 관심이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구조 능력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이런 연쇄는 반대 방향으로도 이어진다. 회사는 불법 개조와 과적으로 사고 위험을 잔뜩 높여 놓고는, 선원들은 비상사태를 잘 처리할 것이고, 구조는 해경이 잘 해주리라 믿은 것 같다. 한국선급과 해운조합은 업무는 태만하게 처리하고 이권을 누리는 데 더 신경을 썼지만, 선사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도 배를 침몰시킬 수준의 어리석음을 저지르진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런 추론이 맞는다면, 우리가 사는 생태계는 부패와 배임의 연쇄로 심각하게 얼룩졌음을 인정해야 한다. 부패나 배임은 사회적 신뢰를 배반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이익이 가능하려면 다른 사람은 신의와 협동의 태도를 갖고 있어야 한다. 공연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줄을 섰을 때, 새치기하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만일 모든 사람이 새치기를 시도하고 있다면, 그는 새치기에 성공할 수 없다. 사기꾼을 생각해보라. 사기를 치기 위해서는 속는 사람 그러니까 순진하게 믿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모두가 사기꾼인 세계에서는 사기로 이익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세월호 참사에 대해 부끄러움을 갖는 이유는, 신뢰를 배반하고 선의를 약탈하는 일이 계속된 결과 그런 배반을 통해 이익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타자의 선의와 유대감이 이제 심하게 고갈되었고, 우리도 거기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직관 때문일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신뢰 약탈자들의 이익 추구를 가능하게 할지언정 그들이 내던진 공익적 가치를 지키는 ‘순수기업인’, ‘순수관료’, ‘순수대변인,’, ‘순수대통령’이 사라진 세상을 보여준다. 이런 악덕의 연쇄가 마침내 어린아이들을 수장시킨 것이며, 이제 그들은 ‘자신과 다르리라 믿었던’ 집단에 대해, 말단 해경에서 청와대까지 책임을 전가하는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김종엽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6760.html



Posted by 겟업
2014. 9. 14. 10:03

“디즈니랜드에서 커다란 미키마우스 인형을 들고 레스토랑에 들어갔어요. 남자친구하고 두 사람이라 당연히 두 명이 앉는 창가 자리로 안내받을 줄 알았죠. 그런데 웨이터는 4인용 테이블로 안내해 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미키 씨는 여기 앉으세요’ 하면서 의자를 끌어다 주더라니까요.”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디즈니랜드에서는 직원을 ‘배우(cast)’라고 부릅니다. 레스토랑 웨이터도 마찬가지. 그는 웨이터라는 배역을 ‘오디션’을 통해 따낸 배우입니다. 웨이터 복장 역시 무대의상일 뿐. 이들은 레스토랑에 밥을 먹으러 온 손님을 상대할 때도 자기 연기를 지켜보러 온 관객이라 여깁니다. 그러니 미키마우스가 비록 인형이라고 해도 엄연한 손님인 셈입니다. 이 연기 결과는 고객 감동으로 이어진 게 당연한 일.

이런 ‘배우 효과’는 보통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분야에서 더 두드러졌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실제로 디즈니랜드에서는 청소부가 제일 잘 훈련받은 배우라고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눈에 잘 띄어 관객들이 제일 질문을 많이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디즈니랜드에서 청소부에게 “지금 무얼 줍고 있나요”라고 물으면 “사람들이 떨어뜨린 꿈의 조각을 줍고 있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온다고 하네요. 

이렇게 디즈니랜드 배우들이 관객을 감동시킨 내용을 한데 묶은 이야기가 요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에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몇 개 더 소개하면 이런 식입니다.

어느 중년 부부가 음식을 주문하면서 어린이용 세트를 추가로 시키더랍니다. 점원이 의아해하자 “10년 전에 우리 아이가 세상을 떠났는데 생전에 여기서 음식을 맛있게 먹었거든요”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후 점원은 요리와 함께 어린이용 의자도 가져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자녀분이 여기 있는 걸 모르고 어린이용 의자를 이제야 가져왔습니다.” 저 부부는 아마 이 배우 연기를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한 꼬마 아이가 디즈니랜드에 있는 모든 캐릭터에게 사인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유람선을 타다가 사인 받은 종이를 모두 물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유람선이 선착장에 도착하자 직원은 “사인을 찾아 전부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정말 며칠 뒤 사인이 도착했는데 전에 없던 한 장이 늘어났습니다. 사인과 함께 도착한 편지에는 “인어공주가 사인을 찾아줬단다. 마지막 한 장은 인어공주 사인이야”라고 써 있었습니다.

감동은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합니다. “저는 화가 나면 제 팔에 칼로 상처를 내는 버릇이 있었어요. 그러다 디즈니랜드에 갔는데 피터팬이 보이더군요. 저는 피터팬을 보자마자 달려가 손을 흔들며 ‘당신이 내 영웅’이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피터가 ‘오, 아닙니다. 공주님께도 전쟁의 상처가 있잖아요. 냄새나는 해적들을 잔뜩 무찌르셨나 봐요. 공주님, 당신이 진정 저의 영웅입니다’ 하고 말해주더라고요. 그러고는 저를 꼭 안아주며 ‘넌 정말 예쁜 아이란다. 이제 네 팔에 상처 내는 일은 그만 하렴’이라고 속삭여줬어요. 저는 그날 하루 종일 울었답니다. 그날 이후로 자해하는 일도 없었고요.”

자, 샐러리맨 여러분, 오늘은 어떤 ‘윗것’이 또 어떤 방식으로 여러분을 괴롭혔습니까? 그럴 때 스트레스로 자기 몸과 마음만 다치지 말고 디즈니랜드 배우처럼 연기를 해 보면 어떨까요?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연구 결과에 따르면 무능한 상사일수록 아랫사람을 더 괴롭힌다고 합니다. 여러분, 회사생활이 힘든 건 여러분 잘못보다 상사 잘못일 확률이 높은 겁니다. 

그러니 나만 스트레스 받지 말고 KBS 연속극 ‘정도전’ 대사를 떠올리며 연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전장에서 적을 만나면 칼을 빼들어야 하지만 조정(직장)에서 적(상사)을 만나면 웃으세요.” 이때 이 연속극에 나오는 대사처럼 “남을 속이려면 나부터 속여야 한다”는 것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진짜 연기에 심취한 배우만 감동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법이니까요.

황규인 스포츠부 기


http://news.donga.com/3/all/20140523/63695117/1


Posted by 겟업
2014. 9. 14. 09:44

지난 한 달간 카페를 빌려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이들을 위한 여행학교’를 열었다. 내가 여행학교를 꾸린 이유는 두 가지였다. 지속가능한 여행가로 살기 위해 정기적인 학교 운영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좋은 여행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적지 않은 참가비를 내고 누가 올까 걱정도 했지만 제법 많은 분들이 찾아왔다. 20대부터 50대까지, 여성이 압도적이었다. 첫 여행지가 몽골이나 요르단처럼 ‘센’ 여행자도 있었고, 고생하는 오지 여행 말고 편한 도시 여행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고백한 이도 있었다. 우리는 목요일 밤마다 모여 여행과 여행에서 만난 사람을, 여행을 빛내준 음악과 책을, 더 좋은 여행자가 되는 법을 이야기했다.


내가 처음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던 해가 1993년이니 어느덧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여행의 풍속은 많이 달라졌다. 첫 유럽 여행에서 만난 이들은 모두 배낭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허리색을 차고 있었다. 지금 유럽에는 트렁크를 끌고, 하이힐이나 구두를 신고, 명품 백을 든 여행자들이 넘친다. 그 시절 여행은 오랜 시간과 큰 돈을 들여 준비해야 하는 어려운 선택이었다. 이제는 TV 홈쇼핑이나 인터넷에서 클릭 한 번으로 쉽게 살 수 있는 상품이 됐다. 한 마디로 여행은 가장 잘 팔리는 소비재가 됐다. 1년에 1,500만명이 출국하니 어디를 가나 한국인 단체 여행자들과 마주친다.


여행을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자신이 쌓아온 생각의 성을 벗어나는 것’으로 본다면 몰려다니는 여행에서는 그 성을 벗어날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사고의 균열을 불러일으킬 만남 같은 것도 생기기 어렵다.


여행학교가 끝났을 때 함께 했던 이들은 가장 좋았던 시간으로 책임여행에 대해 이야기한 시간을 꼽았다. 책임여행은 아직 우리에게는 낯선 여행의 풍속도다. 여행자에게는 자신이 여행하는 지역의 자연과 경제, 문화적인 환경을 존중하고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개념이다. 지금까지의 여행이 공정하지 않고, 지속가능하지도 않으며, 생태적이거나 윤리적이지도 않았다는 반성에서 1990년대 유럽에서 시작된 여행의 새 흐름이다. 10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책임여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여행을 제법 다닌 이들이라면 자신이 괜찮은 여행자인지를 고민한다. 그들은 여행이 ‘어디로’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이며, ‘소비’가 아니라 ‘만남’이라고 믿는다. 자신이 쓰는 돈이 현지인들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자신이 먹는 음식이 로컬푸드인지를, 자신이 그곳의 문화를 존중하는지 짚어본다. 그들은 유명 관광지를 빠르게 훑으며 사진만 찍고 돌아오는 여행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교감하는 여행을 꿈꾼다. 그래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패키지 여행을 벗어나 혼자 떠난다.


책임여행자가 되는 길은 귀찮고, 번거롭고, 불편하다.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포터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는 여행사인지 꼼꼼히 따져야 하고, 호텔에서는 시트나 타월을 갈지 않아도 된다고 미리 알려줘야 한다. 인사말 같은 현지어도 익히고, 여행하는 지역의 문화나 역사에 대해 미리 공부하는 것은 기본이다. 스타벅스나 맥도날드 같은 다국적 기업의 체인점은 포기해야 한다. 여행 나와서까지 이렇게 해야 해?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가치 있는 일들은 그렇게 귀찮고, 번거롭고, 불편하다. 핵 발전소나 공장형 축산에 반대하는 환경운동도, 장애인이나 성적 소수자를 위한 인권운동도, 더 나아가 민주주의 자체도 그렇다. 세상이 흘러가는 속도나 방향과는 상관 없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이들은 언제나 소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 덕분에 느리게나마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결국 여행을 떠나야 하는 이유도 그런 것이 아닐까. 모두가 편리하고 빠른 것만을 찾는 이 시대에 느리고 불편한 것을 자발적으로 감내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 그래서 우리가 일상을 꾸려갈 이 공간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늘 떠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김남희 여행가


http://hankookilbo.com/v.aspx?id=2794b0840bff415992a397e77756bcbc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