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 대학의 한국 교수가 물었다. 미국 학계가 끊임없이 새로운 학문적 성취를 하는 이유를 아느냐고. 국력과 영어의 힘이라고 답했다. 한국 교수가 미국 교수보다 무능해서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답했다. “꼭 그것만은 아닙니다. 자부심입니다. 나의 연구가 인류의 지혜를 한 단계 더 높인다는 자부심이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가 부연했다. “미국에 살아서 생긴 편견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미국과 다른 나라 학자를 가르는 큰 차이가 바로 이겁니다. 미국 학자는 내가 미지의 영역에 대한 인류 최초의 개척자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잘 났다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눈높이와 시야가 다르다는 거죠. 미국 프로야구 결승을 ‘미국 시리즈’가 아닌 ‘월드 시리즈’라고 하지 않습니까. 저도 한국에서 공부할 때 좋은 연구 결과를 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개척자로서 인류에 대한 기여 같은 생각은 못 했습니다.”
#2. 인기 인문학 강사인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그는 세월호 참사 후 온 나라가 안전 문제에 촉각이 곤두섰을 때 발생한 지하철 사고를 언급했다. “저는 이런 사고가 또 재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사고가 나면 매번 강조하는 게 뭡니까. 준비, 훈련 부족 아닙니까. 그런데 왜 매번 안 될까요.” 매뉴얼 부재 등의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최 교수의 답은 달랐다.
“준비와 훈련 모두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대비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족하다는 창의·전략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미 있는 것에 맞춰 일하는 데는 능숙합니다.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우리의 인식 밖에 있습니다. 선진국을 운영해 본 경험이 없어서입니다. 가지고 있는 물품을 보세요. 우리가 만든 것은 있어도, 우리가 처음 만든 것이 있는지요.”
#3. 법이 시행된 지 보름도 안 돼 사달이 났다. 단말기 유통구조 개선법(단통법) 말이다. 목소리 큰 소비자는 혜택이 줄었다고 분통이다. 한쪽에선 중저가폰을 쓰는 소비자의 혜택이 늘었다고 항변한다. 단말기 제조회사와 이동통신 3사의 이해도 갈린다. 시장에 맡기자는 주장과 과도기이니 보완하자는 의견이 맞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단통법은 한국이 세계 최초로 만든 법이다. 정보기술의 맨 앞줄에 있다 보니 베낄 참고서도, 준용할 기준도 없는 상태로 만든 법이다. 이렇게 처음 해 본 일에서 우리 실력이 드러나고 말았다. 좋은 법, 나쁜 법을 따지기 전에 아쉬운 게 이 대목이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열심히 쫓아가는 것으론 부족하다는 걸 이제 다 안다. 중국이 으르렁대는 통에 모를 수가 없는 상황이다.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할 수밖에 없다. 도전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생존의 문제다. 자문한다. 우리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갈 혜안과 역량을 가졌을까. 단통법 혼란은 그저 단통법만의 문제이길 바란다.
김영훈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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