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있는삶/Asia'에 해당되는 글 99건

  1. 2015.03.08 [임마누엘 칼럼] 통일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2. 2015.01.22 [펌]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3. 2014.12.04 [특파원 칼럼]日서 본 한국의 ‘기메라레나이 정치’
  4. 2014.08.18 [조동성 칼럼] 나눔과 봉사로 해가 지지 않는 대한민국
  5. 2014.08.18 북한 주민의 마음 못 사는 ‘통일’은 또 다른 분단의 시작일 뿐
  6. 2014.08.18 [서소문 포럼] '독도 마누라론'의 함정
  7. 2014.08.18 [삶의 향기] 외국인의 눈에 비친 '통일 대박'
  8. 2014.08.18 [편집국에서] 모르쇠 외교
  9. 2014.03.06 일본은 왜 독일과 정반대의 길로 갈까
  10. 2014.01.27 [황호택 칼럼]개성공단 신뢰 프로세스
  11. 2013.10.13 [남윤호의 시시각각] 너무 멀리 앞선 듯한 싱가포르
  12. 2013.09.20 [김창균 칼럼] 놀이공원서 '꿩 먹고 알 먹겠다'는 김정은
  13. 2013.09.20 [박정훈 칼럼] '毛澤東의 축복' 약발은 끝나고
  14. 2013.09.20 [초대석]개성공단 북한 환자 8년간 돌본 ‘그린닥터스’ 정 근 이사장
  15. 2013.09.20 [특파원 칼럼/전승훈]아시아의 사이먼 비젠탈이 있었다면
  16. 2013.09.20 [김태훈의 동서남북] 그래도 '歷史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17. 2013.09.20 [만물상] 김일성경기장의 하품
  18. 2013.09.19 [특파원 리포트] 중국은 왜 축구를 못할까?
  19. 2013.09.19 [이선민의 동서남북] '21세기의 최치원'을 부르는 중국
  20. 2013.09.19 [서소문 포럼] '일본 왕따'가 능사인가
2015. 3. 8. 00:09

얼마 전 수업 시간에 한국의 미래와 통일에 관한 토론 시간을 가졌다. 통일로 가는 올바른 길이 무엇이냐고 묻자 한 학생은 확신에 찬 듯 “엄청난 통일비용을 감안할 때 우리 세대에는 통일을 선택하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수업을 마치고 학생의 말을 오랫동안 곱씹어 봤다. 혹시 많은 한국인이 그 학생처럼 역사가 우리에게 그런 선택을 제공한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 운명에 대한 선택지는 여러 가지일지라도 통일은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통일에 관한 불후의 문구는 중국의 『삼국지』 서문에서 찾을 수 있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롭던 한(漢)조 말에 쓰인 그 유명한 역사소설의 서문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分久必合, 合久必分(오랫동안 분열된 나라는 반드시 다시 통일되고, 오랫동안 통일된 나라는 반드시 분열한다)’.

 이 말의 함축된 의미는 국가의 통일과 분열은 본질적으로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공적인 통일이냐, 실패한 통일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통일 자체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 과정은 이미 시작됐다. 한국이나 미국의 정책과 무관하게 북한은 글로벌 경제 속에 계속 편입되고 있다. 평양의 특권층은 이미 베이징이나 모스크바에서 명품을 구입하고, 외화를 획득하거나 심지어 해외 계좌를 통해 전 세계에 은밀한 투자가 가능하다. 중국의 대규모 북한 투자도 북한의 세계 경제 편입을 촉진한다. 다시 말해 남북한의 경제·금융 통합은 수면 아래에서 꾸준히 계속될 것이다.

 남북 간의 이념 장벽도 무너지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옷과 표정만 봐도 북한 사람을 분간할 수 있었지만 그런 차이가 갈수록 무뎌진다. 북한 지도자 김정은의 말·몸짓·복장은 베이징이나 서울에 사는 또래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공산주의 이념에 지배되던 당과 군이 사익을 추구하는 과두집단으로 변모하면서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도 계속 흐려질 것이다.

 만일 남북의 통합 과정이 은밀하게만 이뤄진다면 정부나 민간의 정상적인 채널보다는 비정상적인 채널을 통해 통합될 위험이 있다. 이렇게 되면 향후 100년간 한반도를 문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후퇴시킬지 모를 비극을 맞을지 모른다. 통일 자체보다 통일 방법이 중요한 이유다.

 이처럼 잘못된 통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문화적·제도적 통합을 위한 실질적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우리의 책임도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 이를 방기한다면 통일은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매우 위험한 상태가 될 수 있다. 

 남한과 북한은 비무장지대(DMZ)로 나뉘어져 의사소통과 인적 교류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DMZ가 한국의 유일한 장벽이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남한과 북한에는 저마다 경제적·이념적 분열을 조장하는 세력이 이미 등장해 공통의 미래를 방해하고 있다. 이들이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위험한 장벽이다. 1960~70년대 한국의 발전을 이끈 놀라운 공동체의식도 허물어지고 있다. 이런 이웃과의 문화적·사상적 장벽은 DMZ 보다 더 무섭다.

 최악의 경우 남북은 돈과 재화의 흐름에서만 통합된 나라로 귀결될 수도 있다. 남북이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양국에 투자 중인 중국·러시아 또는 다른 나라의 발전 전략에 휘말려 통합되는 경우도 상정이 가능하다. 그런 식의 통일이 이뤄진다면 스스로 새로운 통일 한국의 구체적인 청사진을 만들지 못한 채 모든 수준에서 여러 세대 동안 갈등을 부추기는 엄청난 분열이 뒤따를 것이다.

 우리 사회 모든 수준에서 통합을 실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통해 남북 모두가 동등한 시민이 되고, 공통의 가치관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만일 남과 북이 문화적·사회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현재진행형인 경제적 통합 흐름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통일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처럼, 지금의 DMZ가 매우 착취적이고 부정적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다. 

 환경적인 문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은 이미 과도한 경작과 삼림 파괴로 토양이 피폐해지고 있는 데다 기후변화까지 겹쳐 상당한 면적이 끔찍할 정도로 사막화되고 있다. 이 건조지역이 DMZ를 넘어 남한 땅에 영향을 미치면 가뜩이나 부족한 물 부족 사태를 부채질할지도 모른다. 남한 정부가 아무리 노력해도 한반도의 사막화를 막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결국 긴밀한 협력밖에 없다.

 이제 우리는 통일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고,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정책을 수립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만일 지금 이 순간 한국 사회의 내적 통합에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경제적 통합은 계속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무책임한 통일은 우리 사회에 분열을 초래할 수 있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분열은 DMZ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고 위험하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687079&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5. 1. 22. 23:49

허성도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의 강연 녹취록

 

사단법인 한국엔지니어클럽

일 시: 2010 6 17 (오전 7 30

장 소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521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2층 국화룸

 

 

○ 저는 지난 6 10일 오후 5 1분에 컴퓨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로호가 성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도 크셨겠지만 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그런데 대략 6시쯤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7시에 거의 그것이 확정되었습니다저는 성공을 너무너무 간절히 바랐습니다그날 연구실을 나오면서 이러한 생각으로 정리를 했습니다제가 그날 서운하고 속상했던 것은 나로호의 실패에도 있었지만 행여라도 나로호를 만들었던 과학자기술자들이 실망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이 의기소침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더 가슴 아팠습니다그분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더 일할 수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어떻게 이것을 학생들에게 말해 주고 그분들에게 전해 줄까 하다가 그로부터 얼마 전에 이런 글을 하나 봤습니다.

 

1600년대에 프랑스에 라 포슈푸코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그러나 큰 불은 바람이 불면 활활 타오른다.’라는 말을 했습니다저는 우리의 우주에 대한 의지가 강열하다면 또 우리 연구자과학자들의 의지가 강열하다면 나로호의 실패가 더 큰 불이 되어서 그 바람이 더 큰 불을 만나서 활활 타오르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그런데 이 나로호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역사와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이 실패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하고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을 국민이 부끄러움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1957 년입니다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라고 하는 인공위성을 발사했습니다그 충격은 대단했다고 하는데초등학교 학생인 저도 충격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습니다그러고 나서 미국이 깜짝 놀랐습니다그리고 뱅가드호를 발사했는데 뱅가드호는 지상 2m에서 폭발했습니다이것을 실패하고 미국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습니다왜 소련은 성공하고 우리는 실패했는가그 연구보고서의 맨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이 나 있습니다.

 ‘우리나라(미국)가 중학교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꿔야 한다.’ 아마 연세 드신 분들은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한 것도 독일 과학자들의 힘이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미국이 뱅가드호를 실패하고 그 다음에 머큐리재미니여러분들이 아시는 아폴로계획에 의해서 우주사업이 성공했습니다그런데 그것도 미국의 힘이 아니라 폰 브라운이라고 하는 독일 미사일기술자를 데려다가 개발했다는 것도 여러분이 아실 것입니다.

 

 

○ 중국은 어떻게 되냐면 여기는 과학자들이니까 전학삼(錢學森)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실 텐데요전학삼은 상해 교통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캘리포니아에 공과대학에서 29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교수를, 2차대전 때 미국 국방과학위원회의 미사일팀장을그리고 독일의 미사일기지 조사위원회 위원장을 했습니다미국에서는 핵심기술자입니다.

 

그런데 이 전학삼이라는 인물이1950년에 미사일에 관한 기밀문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귀국하려다가 이민국에 적발되었습니다그래서 간첩혐의로 구금이 되었고 그때 미국에서는 ‘미국에 귀화해라미국에 귀화하면 너는 여기서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고 전학삼은 그것을 거절하고 있었습니다중국에서는 모택동이 미국 정부에 전학삼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 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때 중국 정부는 미국인 스파이를 하나 구속하고 있었고이 둘을 1  1로 교환하자고 그랬어요그런데 미국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전학삼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우리는 너와 우리의 스파이를 교환하지만 네가 미국에 귀화한다면 너는 여기 있을 수 있다.’ 그랬더니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어요그러니까 미국에서 전학삼에게 ‘너는 중국에 가더라도 책 한 권노트 한 권메모지 한 장도 가져갈 수 없다맨몸으로만 가라.’ 그래도 전학삼은 가겠다고 했습니다.

 

나이 마흔여섯에 중국에 가서 모택동을 만났습니다여기서부터는 일화입니다모택동이 ‘우리도 인공위성을 쏘고 싶다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전학삼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내가 그것을 해낼 수 있다그런데 5년은 기초과학만 가르칠 것이다. 그 다음 5년은 응용과학만 가르친다그리고 그 다음 5년은 실제 기계제작에 들어가면 15년 후에 발사할 수 있다그러니까 나에게 그동안의 성과가 어떠하냐 등의 말을 절대 15년 이내에는 하지 마라그리고 인재들과 돈만 다오15년 동안 나에게 어떠한 성과에 관한 질문도 하지 않는다면 15년 후에는 발사할 수 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택동이 그것을 들어 주었습니다그래서 인재와 돈을 대주고 15년 동안은 전학삼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 나이 61, 1970 4월에 중국이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습니다그리고 중국 정부가 이 모든 발사제작의 책임자가 전학삼이라는 것을 공식 확인해 주었습니다이렇게 보면 오늘날 중국의 우주과학 이러한 것도 전부 전학삼에서 나왔는데 그것도 결국은 미국의 기술입니다미국은 독일의 기술이고 소련도 독일의 기술입니다.저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가 러시아의 신세를 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선진국도 다 그랬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 한국역사의 특수성

 

○ 미국이 우주과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수학 교과과정을 바꾸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알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결론은 그것 입니다.

 

-역사를 보는 방법도 대단히 다양한데요우리는 초등학교 때 이렇게 배웠습니다‘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다.’ 아마 이 가운데서 초등학교 때 공부 잘하신 분들은 이걸 기억하실 것입니다500년 만에 조선이 망한 이유 4가지를 달달 외우게 만들었습니다기억나십니까“사색당쟁대원군의 쇄국정책성리학의 공리공론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러면 대한민국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우리는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까 나로호의 실패를 중국미국소련 등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듯이 우리 역사도 다른 나라에 비추어 보아야 됩니다.

조선이 건국된 것이 1392년이고 한일합방이 1910년입니다금년이 2010년이니까 한일합방 된 지 딱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그러면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세계 역사를 놓고 볼 때 다른 나라 왕조는 600, 700, 1,000년 가고 조선만 500년 만에 망했으면 왜 조선은 500년 만에 망했는가 그 망한 이유를 찾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그런데 만약 다른 나라에는 500년을 간 왕조가 그 당시에 하나도 없고 조선만 500년 갔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선은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갔을까 이것을 따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1300 년대의 역사 구도를 여러분이 놓고 보시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실제로 하나도 없습니다서구에서는 어떻게 됐느냐면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닙니다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닙니다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습니다에스파냐왕국입니다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불행히도 에스파냐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닙니다예를 들면 나폴레옹이 ‘어이 녀석들이 말을 안 들어이거 안 되겠다형님에스파냐 가서 왕 좀 하세요.’ 그래서 나폴레옹의 형인 조셉 보나파르트가 에스파냐에 가서 왕을 했습니다이렇게 왔다 갔다 한 집권체이지 단일한 집권체가 500년 가지 못했습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잠깐 위로 올라가 볼까요

고려가 500년 갔습니다통일신라가 1,000년 갔습니다고구려가 700년 갔습니다백제가 700년 갔습니다.  신라가 BC 57년에 건국됐으니까 BC 57년 이후에 세계 왕조를 보면 500년 간 왕조가 딱 두 개 있습니다러시아의 이름도 없는 왕조가 하나 있고 동남 아시아에 하나가 있습니다그 외에는 500년 간 왕조가 하나도 없습니다그러니까 통일신라처럼 1,0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고구려백제만큼 700년 간 왕조도 당연히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것은 과학입니다.

 

-그러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신기한 나라입니다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 700, 1,000년을 갔습니다왜 그럴까요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합니다.하나는 우리 선조가 몽땅 바보다그래서 권력자들,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다그러면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 700, 1,000년 갔을 것입니다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다시 말씀드리면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다면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다면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조세적인 합리성법적인 합리성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지 않으면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 기록의 정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동학란이나 이런 것은 전국적인 규모이고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합니다우리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백성들이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냅니다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편지를 하려면 한문 꽤나 써야 되잖아요‘그럼 글 쓰는 사람만 다냐글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 그렇게 해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습니다‘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습니다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여러분신문고를 왕궁 옆에 매달아 놨거든요그러니까 지방 사람들이 뭐라고 했냐면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하게 만들었느냐우리는 뭐냐’ 이렇게 된 겁니다그래서 격쟁(?)이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격은 칠격(?)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자입니다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습니다이것을 격쟁이라고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제도가 흔히 형식적인 제도겠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정조가 왕 노릇을 한 것이 24년입니다24년 동안 상소신문고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 입니다이것을 제위 연수를 편의상 25년으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입니다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습니다.

 

여러분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 보셨습니까? 이것이 무엇을 말하느냐면 이 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합니다그러면 이 나라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아까 말씀 드린 두 가지 사항 가운데 후자에 해당합니다이 나라 백성들은 만만한 백성이 아니다. 그러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었을 것이다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금 김새시겠지만 기록의 문화입니다.여러분이 이집트에 가 보시면저는 못 가봤지만 스핑크스가 있습니다그걸 딱 보면 어떠한 생각을 할까요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아마도 여기 계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이집트 사람중국 사람들은 재수도 좋다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가 모이는 구나’

 

여기에 석굴암을 딱 가져다 놓으면 좁쌀보다 작습니다우리는 뭐냐이런 생각을 하셨지요저도 많이 했습니다그런데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그러한 유적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베르사유의 궁전같이 호화찬란한 궁전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습니다.

 

여러분만약 조선시대에 어떤 왕이 등극을 해서 피라미드 짓는 데 30만 명 동원해서 20년 걸렸다고 가정을 해보죠그 왕이 ‘국민 여러분조선백성 여러분내가 죽으면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싶습니다그러니 여러분의 자제 청·장년 30만 명을 동원해서 한 20년 노역을 시켜야겠으니 조선백성 여러분양해하시오.’ 

 

그랬으면 무슨 일이 났을 것 같습니까‘마마마마가 나가시옵소서.’ 이렇게 되지 조선백성들이 20년 동안 그걸 하고 앉아있습니까안 하지요.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화적 유적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어떤 왕이 베르사유궁전 같은 것을 지으려고 했으면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당신이 나가시오우리는 그런 것을 지을 생각이 없소.’ 이것이 정상적일 것입니다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러한 유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 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습니다. 여기에 왕이 있다면바로 곁에 사관이 있습니다

여러분이렇게 생각하시면 간단합니다여러분께서 아침에 출근을 딱 하시면어떠한 젊은이가 하나 달라붙습니다그래서 여러분이 하시는 말을 다 적고여러분이 만나는 사람을 다 적고둘이 대화한 것을 다 적고왕이 혼자 있으면 혼자 있다언제 화장실 갔으면 화장실 갔다는 것도 다 적고그것을 오늘 적고내일도 적고다음 달에도 적고 돌아가신 날 아침까지 적습니다기분이 어떠실 것 같습니까?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왕은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고 경국대전에 적혀 있습니다우리가 사극에서 살살 간신배 만나고 장희빈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으니까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습니다거기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마마를 놓쳤습니다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습니다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습니다‘마마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적었습니다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습니다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습니다이렇게 500년을 적었습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입니다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아무리 높아도 사무관을 넘지 않습니다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습니다이걸 500년을 적는데어떻게 했냐면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썼을 것 아닙니까그날 저녁에 집에 와서 정서를 했습니다이걸 사초라고 합니다그러다가 왕이 돌아가시면 한 달 이내이것이 중요합니다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 편찬위원회를 구성합니다사관도 잘못 쓸 수 있잖아요그러니까 ‘영의정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확인합니다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합니다. 4부를 출판했습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4부를 찍기 위해서 활자본을 만드는 것이 경제적입니까사람이 쓰는 것이 경제적입니까쓰는 게 경제적이지요그런데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 빼먹을 수 있습니다글자 하나 잘못 쓸 수 있습니다하나 더 쓸 수 있습니다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습니다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습니다그러니까 목판활자금속활자본을 만든 이유는 틀리더라도 똑같이 틀려라그래서 활자본을 만들었습니다이렇게 해서 500년 분량을 남겨주었습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했습니다왕의 옆에서 사관이 적고 그날 저녁에 정서해서 왕이 죽으면 한 달 이내에 출판 준비에 들어가서 만들어낸 역사서를 보니까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이것이 6,400만자입니다. 6,400만자 하면 좀 적어 보이지요그런데 6,400만자는 1초에 1자씩 하루 4시간을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입니다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러한 생각 안 드세요‘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가끔 드시겠지요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씀드리죠.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습니다뭐냐 하면 태종실록입니다‘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했습니다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습니다‘보지 마시옵소서.’ ‘왜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이 참았습니다몇 년이 지났습니다또 보고 싶어서 환장을 했습니다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 희 정승이 나섰습니다‘마마보지 마시옵소서.’ ‘왜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 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 그랬습니다이걸 세종이 들었겠습니까안 들었겠습니까들었습니다‘네 말이 맞다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습니다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중종은 슬쩍 봤습니다봤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그러나 그 누구도 안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여러분왕이 못 보는데 정승판서가 봅니까정승판서가 못 보는데 관찰사가 봅니까관찰사가 못 보는데 변사또가 봅니까이런 사람이 못 보는데 국민이 봅니까여러분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조선시대 그 어려운 시대에 왕의 하루하루의 그 행적을 모든 정치적인 상황을 힘들게 적어서 아무도 못 보는 역사서를 500년을 썼습니다.

누구 보라고 썼겠습니까? 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이 땅은 영원할 것이다그리고 우리의 핏줄 받은 우리 민족이 이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다그러니까 우리의 후손들이여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우리가 살았던 문화제도양식을 잘 참고해서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멋지고 강한 나라를 만들어라이러한 역사의식이 없다면 그 어려운 시기에 왕도 못 보고 백성도 못 보고 아무도 못 보는 그 기록을 어떻게 해서 500년이나 남겨주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인의 보물일 뿐 아니라 인류의 보물이기에유네스코가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을 해 놨습니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있습니다승정원은 오늘날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입니다사실상 최고 권력기구지요이 최고 권력기구가 무엇을 하냐면 ‘왕에게 올릴 보고서어제 받은 하명서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습니다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습니다아까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지요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습니다이 승정원일기를 언제까지 썼느냐면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습니다누구 보라고 써놓았겠습니까대한민국 국민 보라고 썼습니다유네스코가 조사해보니 전 세계에서 조선만이 그러한 기록을 남겨 놓았습니다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지금288년 분량이 남아있습니다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입니다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납니다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습니다이것이 우리의 선조입니다.

 

○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날 日자반성할 省자입니다왕들의 일기입니다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습니다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습니다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습니다선대왕이 썼으니까 손자왕도 썼습니다언제까지 썼느냐면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습니다

아까 조선왕조실록은 왕들이 못 보게 했다고 말씀 드렸지요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조직적으로 썼습니다국방에 관한 사항경제에 관한 사항과거에 관한 사항교육에 관한 사항 이것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습니다

 

여러분,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가서 찾아보십시오

저는 우리가 서양에 가면 흔히들 주눅이 드는데 이제부터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언젠가는 이루어졌으면 하는 꿈과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책들을 전부 한글로 번역합니다. 이 가운데 조선왕조실록은 개략적이나마 번역이 되어 있고 나머지는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이것을 번역하고 나면 그 다음에 영어로 하고 핀란드어로 하고 노르웨이어로 하고 덴마크어로 하고 스와힐리어로 하고 전 세계 언어로 번역합니다그래서 컴퓨터에 탑재한 다음날 전 세계 유수한 신문에 전면광고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세계인 여러분아시아의 코리아에 150년간의 제왕의 일기가 있습니다. 288년간의 최고 권력기구인 비서실의 일기가 있습니다실록이 있습니다혹시 보시고 싶으십니까아래 주소를 클릭하십시오당신의 언어로 볼 수 있습니다.’ 해서 이것을 본 세계인이 1,000만이 되고, 10억이 되고 20억이 되면 이 사람들은 코리안들을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야이놈들 보통 놈들이 아니구나어떻게 이러한 기록을 남기는가우리나라는 뭔가.’이러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그게 뭐냐면 국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한국이라고 하는 브랜드가 그만큼 세계에서 올라가는 것입니다우리의 선조들은 이러한 것을 남겨주었는데 우리가 지금 못 하고 있을 뿐입니다.

 

○ 이러한 기록 중에 지진에 대해 제가 조사를 해 보았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지진이 87회 기록되어 있습니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3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249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조선왕조실록에는 2,029회 나옵니다다 합치면 2,368회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 방폐장핵발전소 만들 때 이것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이것을 통계를 내면 어느 지역에서는 155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어느 지역은 200년마다 한 번씩 지진이 났었을 수 있습니다이러한 지역을 다 피해서 2000년 동안 지진이 한 번도 안 난 지역에 방폐장핵발전소 만드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이렇게 해서 방폐장핵발전소 만들면 세계인들이 틀림없이 산업시찰을 올 것입니다그러면 수력발전소도 그런 데 만들어야지요정문에 구리동판을 세워놓고 영어로 이렇게 썼으면 좋겠습니다‘우리 민족이 가진 2,000년 동안의 자료에 의하면 이 지역은 2,000년 동안 단 한번도 지진이 발생하지 않았다따라서 이곳에 방폐장핵발전소수력발전소를 만든다대한민국 국민 일동.’ 이렇게 하면 전 세계인들이 이것을 보고 ‘정말 너희들은 2,000년 동안의 지진에 관한 기록이 있느냐?’고 물어볼 것이고제가 말씀드린 책을 카피해서 기록관에 하나 갖다 놓으면 됩니다.

 

이 지진의 기록도 굉장히 구체적입니다어떻게 기록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물가의 버드나무 잎이 흔들렸다’ 이것이 제일 약진입니다‘흙담에 금이 갔다흙담이 무너졌다돌담에 금이 갔다돌담이 무너졌다기왓장이 떨어졌다기와집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현재 지진공학회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리히터 규모로 계산을 해 내고 있습니다대략 강진만 뽑아보니까 통일신라 이전까지 11회 강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11회 강진이조선시대에는 26회의 강진이 있었습니다합치면 우리는 2,000년 동안 48회의 강진이 이 땅에 있었습니다이러한 것을 계산할 수 있는 자료를 신기하게도 선조들은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 정치경제적 문제

 

○ 그 다음에 조세에 관한 사항을 보시겠습니다.

 세종이 집권을 하니 농민들이 토지세 제도에 불만이 많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옵니다세종이 말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나는가?’ 신하들이 ‘사실은 고려 말에 이 토지세 제도가 문란했는데 아직까지 개정이 안 되었습니다.

 

세종의 리더십은 ‘즉시 명령하여 옳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해결 한다’는 입장입니다그래서 개정안이 완성되었습니다세종12 3월에 세종이 조정회의에 걸었지만 조정회의에서 부결되었습니다왜 부결 되었냐면 ‘마마수정안이 원래의 현행안보다 농민들에게 유리한 것은 틀림없습니다그러나 농민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렇게 됐어요‘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 하다가 기발한 의견이 나왔어요

 

‘직접 물어봅시다.’ 그래서 물어보는 방법을 찾는 데 5개월이 걸렸습니다세종12 8월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습니다그 결과 찬성 9 8,657반대 7 4,149표 이렇게 나옵니다찬성이 훨씬 많지요세종이 조정회의에 다시 걸었지만 또 부결되었습니다왜냐하면 대신들의 견해는 ‘마마찬성이 9 8,000, 반대가 7 4,000이니까 찬성이 물론 많습니다그러나 7 4,149표라고 하는 반대도 대단히 많은 것입니다이 사람들이 상소를 내기 시작하면 상황은 전과 동일합니다.’ 이렇게 됐어요.

 

세종이 ‘그러면 농민에게 더 유리하도록 안을 만들어라.’해서 안이 완성되었습니다그래서 실시하자 그랬는데 또 부결이 됐어요그 이유는 ‘백성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였어요‘그러면 어떻게 하자는 말이냐’하니 ‘조그마한 지역에 시범실시를 합시다.’ 이렇게 됐어요시범실시를 3년 했습니다결과가 성공적이라고 올라왔습니다‘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조정회의에서 또 부결이 됐어요‘마마농지세라고 하는 것은 토질이 좋으면 생산량이 많으니까 불만이 없지만 토질이 박하면 생산량이 적으니까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다그래서 이 지역과 토질이 전혀 다른 지역에도 시범실시를 해 봐야 됩니다.’ 세종이 그러라고 했어요다시 시범실시를 했어요성공적이라고 올라왔어요.

 

세종이 ‘전국에 일제히 실시하자’고 다시 조정회의에 걸었습니다또 부결이 됐습니다이유는 ‘마마작은 지역에서 이 안을 실시할 때 모든 문제점을 우리는 토론했습니다그러나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할 때 무슨 문제가 나는지를 우리는 토론한 적이 없습니다.’ 세종이 토론하라 해서 세종25 11월에 이 안이 드디어 공포됩니다

 

조선시대에 정치를 이렇게 했습니다

세종이 백성을 위해서 만든 개정안을 정말 백성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를 국민투표를 해 보고

시범실시를 하고 토론을 하고 이렇게 해서 13년만에 공포·시행했습니다.

 

대한민국정부가 1945년 건립되고 나서 어떤 안을 13년 동안 이렇게 연구해서 공포·실시했습니까

저는 이러한 정신이 있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법률 문제

 

○ 법에 관한 문제를 보시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3심제를 하지 않습니까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습니다그런데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습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은 시골 감형에서 하고두 번째 재판은 고등법원관찰사로 갑니다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습니다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 했습니다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썼어요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렇습니다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입니다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습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 가시면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습니다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 입니다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합니다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집니다이래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습니다이런 것이 조선의 법입니다이렇기 때문에 조선이 500년이나 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 과학적 사실

 

○ 다음에는 과학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고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1543년입니다그런데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는 이미 다 아시겠지만 물리학적 증명이 없었습니다물리학적으로 지구가 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1632년에 갈릴레오가 시도했습니다종교법정이 그를 풀어주면서도 갈릴레오의 책을 보면 누구나 지동설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 책은 출판금지를 시켰습니다그 책이 인류사에 나온 것은 그로부터 100년 후입니다. 1767년에 인류사에 나왔습니다.

 

-동양에서는 어떠냐 하면 지구는 사각형으로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사각형이다이를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이라고 얘기합니다그런데 실은 동양에서도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얘기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대표적인 사람이 여러분들이 아시는 성리학자 주자입니다주희주자의 책을 보면 지구는 둥글 것이라고 나와 있습니다황진이의 애인고려시대 학자 서화담의 책을 봐도 ‘지구는 둥글 것이다지구는 둥글어야 한다바닷가에 가서 해양을 봐라 지구는 둥글 것이다’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떠한 형식이든 증명한 것이 1400년대 이순지(李純之)라고 하는 세종시대의 학자입니다이순지는 지구는 둥글다고 선배 학자들에게 주장했습니다그는 ‘일식의 원리처럼 태양과 달 사이에 둥근 지구가 들어가고 그래서 지구의 그림자가 달에 생기는 것이 월식이다그러니까 지구는 둥글다.’ 이렇게 말했습니다이것이 1400년대입니다그러니까 선배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우리가 일식의 날짜를 예측할 수 있듯이 월식도 네가 예측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이순지는 모년 모월 모시 월식이 생길 것이라고 했고 그날 월식이 생겼습니다이순지는 ‘교식추보법(交食推步法)이라는 책을 썼습니다일식월식을 미리 계산해 내는 방법이라는 책입니다그 책은 오늘날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적인 업적을 쌓아가니까 세종이 과학정책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이때 이순지의 나이 약관 29살입니다그리고 첫 번째 준 임무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여러분동지상사라고 많이 들어보셨지요동짓달이 되면 바리바리 좋은 물품을 짊어지고 중국 연변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뭘 얻어 옵니다다음 해의 달력을 얻으러 간 것입니다달력을 매년 중국에서 얻어 와서는 자주독립국이 못될뿐더러또 하나는 중국의 달력을 갖다 써도 해와 달이 뜨는 시간이 다르므로 사리/조금의 때가 정확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조선 땅에 맞는 달력이 필요하다 이렇게 됐습니다.

 

수학자와 천문학자가 총 집결을 했습니다이순지가 이것을 만드는데 세종한테 그랬어요‘못 만듭니다.’ ‘왜?’ ‘달력을 서운관(書雲觀)이라는 오늘날의 국립기상천문대에서 만드는데 여기에 인재들이 오지 않습니다.’ ‘왜 안 오는가?’ ‘여기는 진급이 느립니다.’ 그랬어요오늘날 이사관쯤 되어 가지고 국립천문대에 발령받으면 물 먹었다고 하지 않습니까행정안전부나 청와대비서실 이런 데 가야 빛 봤다고 하지요옛날에도 똑같았어요그러니까 세종이 즉시 명령합니다‘서운관의 진급속도를 제일 빠르게 하라.’ ‘그래도 안 옵니다.’ ‘왜?’ ‘서운관은 봉록이 적습니다.’ ‘봉록을 올려라.’ 그랬어요‘그래도 인재들이 안 옵니다. ‘왜?’ ‘서운관 관장이 너무나 약합니다.’ ‘그러면 서운관 관장을 어떻게 할까? ‘강한 사람을 보내주시옵소서왕의 측근을 보내주시옵소서.’ 세종이 물었어요‘누구를 보내줄까? 누구를 보내달라고 했는 줄 아십니까‘정인지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랬어요. 정인지가 누구입니까고려사를 쓰고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측근 중의 측근이고 영의정입니다.


세종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영의정 정인지를 서운관 관장으로 겸임 발령을 냈습니다그래서 1,444년에 드디어 이 땅에 맞는 달력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이순지는 당시 가장 정확한 달력이라고 알려진 아라비아의 회회력의 체제를 몽땅 분석해 냈습니다일본학자가 쓴 세계천문학사에는 회회력을 가장 과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책이 조선의 이순지著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달력이 하루 10, 20, 1시간 틀려도 모릅니다 100, 200년 가야 알 수 있습니다이 달력이 정확한지 안 정확한지를 어떻게 아냐면 이 달력으로 일식을 예측해서 정확히 맞으면 이 달력이 정확한 것입니다이순지는 '칠정산외편'이라는 달력을 만들어 놓고 공개를 했습니다1,447년 세종 29년 음력 8 1일 오후 4 50 27초에 일식이 시작될 것이고 그날 오후 6 55 53초에 끝난다고 예측했습니다이게 정확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세종이 너무나 반가워서 그 달력의 이름을 ‘칠정력’이라고 붙여줬습니다. 이것이 그 후에 200년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 1,400년대 그 당시에 자기 지역에 맞는 달력을 계산할 수 있고 일식을 예측할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에 세 나라밖에 없었다고 과학사가들은 말합니다하나는 아라비아하나는 중국하나는 조선입니다그런데 이순지가 이렇게 정교한 달력을 만들 때 달력을 만든 핵심기술이 어디 있냐면 지구가 태양을 도는 시간을 얼마나 정교하게 계산해 내는가에 달려 있습니다‘칠정산외편에 보면 이순지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365일 5시간 48 45초라고 계산해 놓았습니다. 오늘날 물리학적인 계산은 365일 5시간 48 46초입니다1초 차이가 나게 1400년대에 계산을 해냈습니다. 여러분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홍대용이라는 사람은 수학을 해서 담헌서(湛軒書)’라는 책을 썼습니다. ‘담헌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큰 도서관에는 다 있습니다이 담헌서’ 가운데 제5권이 수학책입니다홍대용이 조선시대에 발간한 수학책의 문제가 어떤지 설명 드리겠습니다‘구체의 체적이 6 2,208척이다이 구체의 지름을 구하라. cos, sin, tan가 들어가야 할 문제들이 쫙 깔렸습니다

 

조선시대의 수학책인 ‘주해수용(籌解需用)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sinA를 한자로 正弦, cosA를 餘弦, tanA를 正切, cotA를 餘切, secA를 正割, cosecA를 如割, 1-cosA를 正矢, 1-sinA를 餘矢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그러면 이런 것이 있으려면 삼각함수표가 있어야 되잖아요이 주해수용의 맨 뒤에 보면 삼각함수표가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제가 한 번 옮겨봤습니다. 예를 들면 正弦 25 42 51다시 말씀 드리면 sin25.4251도의 값은 0.4338883739118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제가 이것을 왜 다 썼느냐 하면 소수점 아래 몇 자리까지 있나 보려고 제가 타자로 다 쳐봤습니다소수점 아래 열세 자리까지 있습니다이만하면 조선시대 수학책 괜찮지 않습니까?

 

다른 문제 또 하나 보실까요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眞線에 있다조선시대 수학책 문제입니다이때는 子午線이라고 안 하고 子午眞線이라고 했습니다이런 것을 보면 이미 이 시대가 되면 지구는 둥글다고 하는 것이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甲地와 乙地는 동일한 子午線上에 있다甲地는 北極出地北極出地는 緯度라는 뜻입니다甲地는 緯度 37도에 있고 乙地는 緯度 36 30분에 있다甲地에서 乙地로 직선으로 가는데 고뢰(?) 12번 울리고 종료(鍾鬧) 125번 울렸다. 이때 지구 1도의 里數와 지구의 지름지구의 둘레를 구하라이러한 문제입니다.

 

이 고뢰(? ) , 종료(鍾鬧)는 뭐냐 하면 여러분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초등학교 때 사회책에서 보면 오늘날의 지도와 상당히 유사하지 않습니까옛날 조선시대의 지도가 이렇게 오늘날 지도와 비슷했을까이유는 축척이 정확해서 그렇습니다대동여지도는 십리 축척입니다십리가 한 눈금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이 왜 정확하냐면 기리고거(記里鼓車)라고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기리고거가 뭐냐 하면 기록할 記자리는 백리 2백리 하는 里자里數를 기록하는고는 북 鼓자북을 매단 수레 車수레라는 뜻입니다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수레가 하나 있는데 중국의 동진시대에 나온 수레입니다바퀴를 정확하게 원둘레가 17척이 되도록 했습니다17척이 요새의 계산으로 하면 대략 5미터입니다이것이 100바퀴를 굴러가면 그 위에 북을 매달아놨는데 북을 ‘뚱’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북을 열 번 치면 그 위에 종을 매달아놨는데 종을 ‘땡’하고 치게 되어 있어요여기 고뢰종료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그러니까 이것이 5km가 되어서 딱 10리가 되면 종이 ‘땡’하고 칩니다김정호가 이것을 끌고 다녔습니다.

 

우리 세종이 대단한 왕입니다몸에 피부병이 많아서 온양온천을 자주 다녔어요그런데 온천에 다닐 때도 그냥 가지 않았습니다이 기리고거를 끌고 갔어요그래서 한양과 온양 간이라도 길이를 정확히 계산해 보자 이런 것을 했었어요이것을 가지면 지구의 지름지구의 둘레를 구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그러니까 원주를 파이로 나누면 지름이다 하는 것이 이미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 있었습니다.

 

 

 

◈ 수학적 사실

 

○ 그러면 우리 수학의 씨는 어디에 있었을까 하는 것인데요,

 여러분 불국사 가보시면 건물 멋있잖아요석굴암도 멋있잖아요불국사를 지으려면 건축학은 없어도 건축술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최소한 건축술이 있으려면 물리학은 없어도 물리술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물리술이 있으려면 수학은 없어도 산수는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이게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가졌던 의문입니다이것을 어떻게 지었을까.

 

그런데 저는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 선생님을 너무 너무 존경합니다여러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이 어디인 줄 아십니까에스파냐스페인에 있습니다.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습니다여러분이 아시는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는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입니다우리는 언제 국립대학이 세워졌느냐삼국사기를 보면 682신문왕 때 국학이라는 것을 세웁니다그것을 세워놓고 하나는 철학과를 만듭니다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맹자를 가르쳐야지요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습니다김부식 선생님은 어떻게 써놓았냐면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명산과입니다밝을 明자계산할 算자계산을 밝히는 과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입니다수학과를 세웠습니다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됩니다수학을 잘 하면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서 찾아보십시오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 찾아보십시오이것을 산관이라고 합니다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습니다이 산관이 수학의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하게 됩니다산관들은 무엇을 했느냐세금 매길 때성 쌓을 때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가서 했습니다세금을 매긴 것이 산관들입니다

 

그런데 그때의 수학 상황을 알려면 무슨 교과서로 가르쳤느냐가 제일 중요하겠지요정말 제가 존경하는 김부식 선생님은 여기다가 그 당시 책 이름을 쫙 써놨어요삼개(三開), 철경(綴經), 구장산술(九章算術), 육장산술(六章算術)을 가르쳤다고 되어 있습니다그 가운데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구장산술이라는 수학책이 유일합니다구장산술은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중국에서 나왔습니다최소한도 진나라 때 나왔을 것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어떤 사람은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좋은 책이면 무조건 다 주나라 문왕이 썼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제 8장의 이름이 방정입니다방정이 영어로는 equation입니다방정이라는 말을 보고 제 온 몸에 소름이 쫙 돋았습니다저는 사실은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부터 방정식을 푸는데방정이라는 말이 뭘까가 가장 궁금했습니다어떤 선생님도 그것을 소개해 주지 않았습니다그런데 이 책에 보니까 우리 선조들이 삼국시대에 이미 방정이라는 말을 쓴 것을 저는 외국수학인 줄 알고 배운 것입니다.

 

 9 장을 보면 9장의 이름은 구고(勾股)입니다갈고리 勾자허벅다리 股자입니다맨 마지막 chapter입니다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이 나옵니다그리고 미지수는 다섯 개까지 나옵니다그러니까 5원 방정식이 나와 있습니다중국 학생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라는 말을 모릅니다여기에 구고(勾股)정리라고 그래도 나옵니다자기네 선조들이 구고(勾股)정리라고 했으니까.

 

 여러분 이러한 삼각함수 문제가 여기에 24문제가 나옵니다24문제는 제가 고등학교 때 상당히 힘들게 풀었던 문제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옵니다이러한 것을 우리가 삼국시대에 이미 교육을 했습니다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들이 전부 서양수학인 줄 알고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밀률(密率)이라는 말도 나옵니다비밀할 때 密비율 할 때 率밀률의 값은 3으로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고려시대의 수학교과서를 보면 밀률의 값은 3.14로 한다이렇게 되어 있습니다아까 이순지의 칠정산외편달력을 계산해 낸 그 책에 보면 ‘밀률의 값은 3.14159로 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우리 다 그거 삼국시대에 했습니다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는 오늘날 플러스마이너스정사각형 넓이원의 넓이방정식삼각함수 등을 외국수학으로 이렇게 가르치고 있느냐는 겁니다.

 

저는 이런 소망을 강력히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나 중·고등 학교 책에 플러스마이너스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우리 선조들은 늦어도 682년 삼국시대에는 플러스를 바를 正자 정이라 했고 마이너스를 부채부담하는 부()라고 불렀다그러나 편의상 正負라고 하는 한자 대신 세계수학의 공통부호인 +-를 써서 표기하자또 π를 가르치는 chapter가 나오면 682년 그 당시 적어도 삼국시대에는 우리는 π를 밀률이라고 불렀다밀률은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뜻이다오늘 컴퓨터를 π를 계산해 보면 소수점 아래 1조자리까지 계산해도 무한소수입니다그러니까 무한소수라고 하는 영원히 비밀스런 비율이라는 이 말은 철저하게 맞는 말이다그러나 밀률이라는 한자 대신 π라고 하는 세계수학의 공통 부호를 써서 풀기로 하자 하면 수학시간에도 민족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없는 것을 가지고 대한민국이 세계 제일이다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선조들이 명백하게 다큐멘트문건으로 남겨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그것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서양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이러한 것이 전부 정리되면 세계사에 한국의 역사가 많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이것은 우리가 잘났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인 세계사를 풍성하게 한다는세계사에 대한 기여입니다.

 

 

 

◈ 맺는 말

 

○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습니다그런데 여러분 주위에 한문 전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정말 엔지니어가 중요하고 나로호가 올라가야 됩니다그러나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합니다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입니다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의 문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언젠가는 동경대학으로 가고 북경대학으로 가는 상황이 나타날 것입니다그러나 어떤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되냐 하면 공대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합니다그래야 한국물리학사건축학사가 나옵니다수학과 나온 사람이 한문을 해야 됩니다그래야 허벅다리갈고리를 아딱 보니까 이거는 삼각함수구나 이렇게 압니다밤낮 논어·맹자만 한 사람들이 한문을 해서는 ‘한국의 과학과 문명’이라는 책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사회에 나가시면 ‘이 시대에도 평생 한문만 하는 학자를 우리나라가 양성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여론을 만들어주십시오

이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이런 데서 강연 요청이 오면 저는 신나게 와서 떠들어 댑니다.

 

감사합니다.

Posted by 겟업
2014. 12. 4. 00:33

불과 2년 전 일본은 앞이 캄캄한 나라였다.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장기불황 속에 경제 규모는 중국에 역전당했다. 소니 파나소닉 등 간판 전자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한국 기업에 줄줄이 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일본 대지진이 터졌고 전국 54개 원전은 가동이 중단됐다. 그런데도 세계 경제의 불안 속에 엔화 가치는 치솟아 수출 기업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나랏빚은 국내총생산(GDP)의 2배를 넘었다. 더 큰 문제는 정치 리더십이었다. 1년마다 바뀌는 총리는 대책은커녕 정권 유지에도 벅찼다. 국제사회는 일본 총리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의미의 ‘기메라레나이(決められない) 정치’가 일본병의 근원으로 지목됐다. 언론은 국가 파탄 시나리오를 그린 ‘일본의 자살’을 대서특필했다.

우경화 논란과 별도로 지금 일본은 활력이 넘치고 있다. 돈이 돌면서 도쿄 시내 곳곳에는 주택 건설 붐이 불고 있다.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3대 도시 택지 기준지가(공시가격)가 6년 만에 상승했다는 뉴스가 신문 1면을 장식한다. 2020년 도쿄 올림픽 특수도 불어 일손이 부족할 정도다. 올 4∼6월 약 99만 명의 비정규직 근로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일본 제조업의 발목을 잡던 엔화 가치는 18일 한때 6년 만의 최저 수준인 달러당 108엔대로 떨어졌다. 소비자물가가 오르면서 20년 경기 침체를 초래한 디플레이션에서도 벗어날 조짐이다.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는 아베노믹스에 대한 논란은 여전하지만 어쨌든 일본 경제는 실로 오랜만에 움직이고 있다. 국민 과반수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를 지지하는 이유다.

한때 일본은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외환위기 이후의 금융개혁과 기업혁신뿐만이 아니다. 총무상을 지낸 가타야마 요시히로(片山善博) 게이오대 교수는 2003년 돗토리(鳥取) 현 지사 시절 이렇게 말했다. “새로운 정책을 추진할 때마다 한국에서 힌트를 얻는다. 한국은 빠른 속도로 많은 실험과 개혁을 거듭했다. 어떤 제도든 한국을 보면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요미우리신문은 18일자 국제면에 ‘한국 국회 마비’를 대서특필했다. 세월호 참사 여파로 5월 3일 이후 국회에서 법안을 한 건도 처리하지 못했고 국민은 분열돼 있다는 것이다. ‘기메라레나이 정치’는 이제 한국을 위한 수식어가 될 판이다.

오랜만에 일본을 찾은 한국의 한 경제 전문가는 “달라진 일본의 모습에 등골이 서늘했다”고 털어놓았다. “정책 결정 속도가 한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빠르다. 성장전략 등 새로운 정책을 추진할 때 전문가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회의 몇 번 하면 금방 핵심 이슈와 대안이 정리된다. 그만큼 참여한 전문가 층이 두껍다. 정부는 이를 바탕으로 정책안을 만들면서 쟁점을 언론에 다 노출해 자연스럽게 국민 의견을 수렴한다. 의회에서 발목을 잡을 일도 없다. 반면 한국에서는 새 정책을 추진하려면 우선 전문가가 없다. 연구기관에 조사·연구 용역부터 발주하는 데 1년은 기본이다. 정책화 과정도 대부분 비밀리에 추진해 발표가 되면 그제야 논란이 시작된다. 이를 야당이 정치 쟁점으로 몰아가면서 아무것도 되는 게 없다.”


물론 일본의 달라진 모습은 자민당 독주 체제와 무관치 않다. 지나친 쏠림은 민주주의의 적으로 언제나 경계 대상이다. 하지만 무섭게 변해가는 글로벌 경쟁 환경 속에 정치 불능은 20년 디플레이션보다 무섭다는 게 일본의 경험이다. 요즘 한국이 2년 전 일본을 닮아가는 것 같아 걱정이다.

배극인 도쿄 특파원



http://news.donga.com/3/all/20140922/66606974/1



Posted by 겟업
2014. 8. 18. 02:53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마케도니아와 로마제국의 젊은이들은 말과 전차를 타고 세계를 정복했고,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유럽의 젊은이들은 함대와 제국주의적 무역상을 내세워서 식민지를 지배했다. 이렇듯 역사 속의 세계화는 전쟁과 약탈을 통해 피지배국에게 파괴와 아픔을 줄 뿐이었다. 한국은 5,000년 역사에서 타국을 단 한 차례도 지배 목적의 공격을 하지 않은 평화국가로서, 피지배국으로서의 파괴와 아픔을 극복하고 단 반세기 만에 산업화, 민주화를 달성했다.

한국은 외국인근로자 200만 시대를 맞이할 정도로 일자리가 많은 나라이다. 반면 청년실업자 100만 명을 포함한 실업자가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유럽 젊은이들이 외국인근로자를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경쟁자로 보고 테러를 일삼는 반면, 한국 청년실업자들은 외국인 근로자에게 자신들이 담당해야 할 3D직업을 대신 해준다고 고마워하는 독특한 나라이다. 정부는 청년실업자들이 원하지 않는 직장을 만들고 이들에게 취업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이들이 원하는 고품격,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

선진국 중심 세계화의 두 가지 모델이었던 전쟁과 약탈을 통한 세계지배는 잘못된 세계화 모델이다. 한국은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참전한 16개 국을 비롯하여 물자 및 의료 지원을 해준 67개 국가에 보은하고, 도움을 기다리는 100여 개발도상국에 나눔과 봉사를 실천함으로써, 바람직한 세 번째 세계화 모델을 제시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꿈과 야심을 가진 한국의 젊은이들이 원하는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그 동안 이루어진 수많은 한국형 성공모델 소개에도 불구하고 한국 모델을 이용해서 큰 성공을 이룬 대표적인 국가는 아직 없다. 경제개발계획, 새마을운동 등 한국의 성공을 이루어낸 여러 가지 모델을 담당하는 부서 간에 통합은 말할 것도 없고 단순한 소통과 협조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결과, 충분한 성공을 끌어내지 못한 동시에 나눔과 봉사에 대한 수혜국의 경제 및 사회 상황 변화와 수혜국 국민의 문화 및 인식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한국의 성공을 다른 나라에 소개하는 전담조직, 즉 '세계화 플랫폼'이 없기 때문에 한국의 시대적 소명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무총리가 위원장인 '국제개발협력위원회'를 대통령직속 '세계화위원회'(가칭)로 승격하여 종합적, 네트워크적, 동태적, 지속적인 세계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할 것을 제안한다. 이 위원회에서는 지난 반 세기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한국의 발전경험을 기반으로 평화, 번영, 문화 등 다양한 핵심 가치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통합국가발전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이 모델에는 평화 면에서 민주화, 안전행정, 교육, 의료, 소방방재 등을 포함시키고, 번영 면에서 경제개발5개년계획, 새마을운동, 무역투자, 과학기술, ICT, 농업기술, 행정시스템 등을 포함시키며, 문화 면에서 한글, 한식, 태권도, K팝 등을 포함시킬 만하다. 100만 청년 실업자들에게 통합국가발전모델을 다른 나라에 적용해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을 시켜 한국의 성공경험을 공유하기 원하는 세계 각국에게 파견함으로써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는 한국,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는 세계를 창조하자. 이와 별도로 '국제교사자격증'(가칭) 제도를 만들어 원하는 청년 실업자들에게 이 자격증을 갖게 하고, 이들을 한국 제도를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을 갖지 않는 세계 여러 나라의 초중고교에 파견하여 이들 나라의 차세대 지도자들을 교육시키는 역할을 부여하자. 

대한민국 청년들을 5대양 6대주 개발도상국에 파견하여 산업화 및 민주화를 도와주고 초중고 선생님으로 파견함으로써 한국은 전쟁과 약탈의 1, 2차 세계화에서 나눔과 봉사의 3차 세계화라는 새로운 모델의 주역이 될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의 힘으로 나눔과 봉사로 해가 지지 않는 대한민국을 만들어내자. 


조동성 서울대 명예교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2488620



Posted by 겟업
2014. 8. 18. 02:49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 발언 이후 통일 논의가 활발하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남북을 다 같이 경험한 탈북 지식인으로서 볼 때 최근의 통일 논단에서 공감이 되는 글을 찾기 어렵다. 시장경제 체제라 그런지 한국의 통일 담론은 대개 경제 논리 위주로 접근해 “대박이다”를 외치며 핑크빛 그림만 그리고 있다. 

그래서 직접 쓰기로 결심했다. 통일이 가져올 무수한 문제 중 개인적으로 풀기 어렵다고 보는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해 보려 한다. 이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면 통일은 대박보다는 쪽박이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첫째는 통일 이후 북한 지역의 공동화(空洞化)를 어떻게 막을지에 대한 해답이다. 통일이 됐다는 것은 김정은 체제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북한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남쪽이나 외국으로 나가려 할 것이다. 치안 불안이나 처벌 우려 때문이 아니라 외국에서 1년만 벌면 북한에선 엄청날 거액을 벌 수 있다는 단순한 경제논리 때문이다. 한국에 온 탈북자 2만6000여 명 대다수의 탈북 동기도 경제적 이유다.

독일은 통일 10년 만에 동독 인구 5명당 1명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통일 10년 뒤 동서독 임금 비율이 4 대 3에 이르렀는데도 이에 만족을 못한 것이다. 2020년이 되면 동독 인구의 40%가 이주한다는 추정도 있다. 남북의 경제격차는 독일과 비교조차 안 된다. 통일 10년 뒤 북한 임금 수준이 남쪽과 3 대 1 정도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희박하다. 북한의 실업률 역시 동독과 비교조차 안 될 것이다. 그러니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의 몇 %가 해외로 나갈지 가늠조차 불가능하다.

한국에 오는 북한 주민들을 세계가 보는 앞에서 내칠 수도 없다. 그렇다고 거대한 수용소를 만드는 것도 답이 아니다. 탈출에 필사적인 그들은 잡히면 운이 나빠 잡혔다고 생각하고 또 내려올 것이다. 그렇다고 탈출이 불가능한 수용소를 곳곳에 만든다면 그런 통일이 과연 ‘대박통일’일까. 만약 북한 주민들은 정 한국에 오기 어렵다면 북송돼도 처벌받을 공포가 없어졌으니 중국으로 갈 것이다.

북한의 공동화가 무서운 이유는 첫째로 북한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젊은 세대와 지식층부터 탈출할 것이라는 점이며 둘째는 해외에 나가 2년만 자리 잡으면 북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사회학적으로 검증된 사실이다. 통일 후 2, 3년만 지나면 북한은 공동화될 확률이 크며 그 이후엔 엄청난 예산을 투입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이다. 젊은이들이 떠나간 한국 농촌에 천문학적 예산을 퍼붓는다고 경제가 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북한 주민들의 탈출을 막으려면 떠나지 않은 사람에게 보조금을 주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으나 해외에 나가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이 되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돈을 써야 할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돈 대신에 일자리를 주는 방법도 있으나 그 일자리를 2, 3년 안에 만들어주어야 하니 그게 진짜 문제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은 빠져나간다. 

공장은 빨리 건설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북한엔 전력 철도 도로 항만 통신 등 공장 가동에 필요한 인프라가 형편없다. 통일 뒤 인프라를 구축하려면 늦다. 그래서 토지와 인력이 거의 공짜인 지금 북한에 인프라를 건설하는 것은 통일을 대비한 최소한의 보험이 될 수도 있지만 문제는 북한 체제를 연장시킨다며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다. 일리가 있어 더 넘기 어려운 장벽이다. 하지만 둘 다 싫어도 한 길은 선택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둘째로, 차별에 따른 남북의 갈등을 어떻게 풀 것인지도 숙제다. 이는 공동화보다 더 어려운 숙제다. 서독의 TV를 시청하던 동독과 분단 44년 만에 통일한 독일도 지금까지 옛 서독인들은 동독 출신들이 게으르다며 ‘오시(Ossi)’로 부르고 동독 출신은 서독인들이 오만하고 거만하다며 ‘베시(Wessi)’라 부르면서 서로 차별한다. 남북 주민의 사고방식 격차는 독일과 비교조차 어렵다. 

탈북자로 한국에서 살아본 경험상 한국의 배타성과 약자에 대한 무시는 심각하다. 남쪽으로 온 탈북자는 스스로 자신이 선택한 길이고, 사회적 소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한다. 그렇다 해도 이미 한국으로 온 탈북자의 10% 정도가 외국으로 다시 떠났다. 북한 주민들이 자의가 아닌 뜻밖의 통일을 맞아 결집된 힘으로 남쪽의 차별에 맞선다면 상상하기 싫은 결과가 나타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한국이 엄청난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안겨주면 북한 주민들이 고마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먹고사는 걱정에서 벗어난 인간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차별과 멸시다. 통일 뒤 고맙다는 말보단 당장 북한 땅에서 나가달라는 목소리가 크게 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는가. 민족주의가 강한 북한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차별을 받아도 동족에게 차별 받는 것은 견디지 못한다.

상상이 어렵다면 한국에 돈 벌러 간 사람이 없는 집을 찾기 힘든 옌볜을 보라. 중국에서 반한 감정이 가장 높다. 바로 한국의 동족들에게서 겪은 멸시 때문이다. 통일 이후 남쪽 사람들이 북한에서 지금 동남아에서 일부 한국인이 보이는 것과 같은 차별과 멸시를 연출한다면 어떻게 될까. 자존심 강한 북한 남성들이 딸과 누이들이 돈에 농락당하는 모습을 본다면 왜 이런 통일을 했는지를 후회하며 분노할 것이다.


영호남 갈등도 치유 못하는 남쪽이, 정쟁으로 지새우는 한국 정치권이 이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풀어낼 수 있을까. 그러나 해답을 내놓지 못하면 남북은 다 같이 통일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위의 두 가지 문제 외에도 통일을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많다. 경제는 그중 하나일 뿐이다. 


통일은 헤어졌던 둘이 한집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부자인 남쪽의 입장에서 경제적 이해관계만 따지면 억지로 합쳐져도 절대 화목해질 수 없다. 이왕 합쳐 행복하게 살기로 결심했다면 가난하고 자격지심이 많은 쪽을 먼저 의식하고 배려해야 한다. 북한 주민들이 공감하지 못하는 통일 대박은 잘해봐야 남쪽만의 ‘반쪽 대박’일 뿐이며 또 다른 분단의 시작이다. 


주성하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40311/61595890/1



Posted by 겟업
2014. 8. 18. 02:24

한국인들은 일본과의 분쟁·경쟁이라면 덮어놓고 격해진다. 독도·위안부에서 축구·피겨스케이팅에 이르기까지 죄다 그렇다. 무조건 제압해야 직성이 풀린다. 한 맺힌 역사라 이해할 만도 하다. 그러나 대응방식만은 사안별로 정교하게 달라야 옳지 않겠나.

 먼저 독도. 지난달 말 미국의 일본통 제럴드 커티스 컬럼비아대 교수가 방한했다. 강단에선 그는 “아베로선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인정하진 못하겠지만 실효적 지배까진 막진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니 “무대응이 최선”이라는 게 그의 충고였다.

 그러자 한 방청객이 손들고 따졌다. “아내를 실효적으로 잘 데리고 산다 치자. 그렇다고 누가 ‘저 여자는 내 마누라다’라고 우기면 그래도 가만있어야 하느냐”고. 강연장엔 가벼운 웃음이 번졌다. 강공을 선호하는 한국인들의 심리를 적확하게 대변해서일 게다. ‘독도 마누라론’이다.

 이런 자세는 통쾌할진 모르나 함정에 빠지기 십상이다. 한국인 시각으로만 사태를 보는 탓이다. 전 세계에 걸친 영토분쟁은 무려 200여 건. 대서양의 섬 포클랜드를 두고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1982년 전쟁까지 벌였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한반도만 한 카슈미르를 놓고 60년간 으르렁거렸다. 독도만 한 섬을 놓고 다투는 분쟁은 셀 수도 없다.

 그러니 바다 건너에서 독도 분쟁을 보면 어떻겠나. 손바닥만 한 땅을 놓고 옆 동네 주민끼리 옥신각신하는 꼴이다.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뉴욕타임스에 전면광고를 내고 고속도로 옆에 집채만 한 광고판을 세운들 큰 관심 가질 리 없다.

 심리학에서 ‘주의 끌기(attention seeking)’란 게 있다. 반응이 나빠도 유리하다 싶으면 큰소리로 관심을 끄는 전략이다. 일부러 크게 재채기를 하거나 코를 푸는 게 그 예다. 주변에서 찡그릴지언정 자신의 감기를 알려 이익을 볼 수 있단 심리가 발동한 거다. 아이의 이유 없는 짜증도 주의 끌기일 공산이 크다. 이게 바로 일본의 작전이다.

 이 악습을 고칠 묘책은 뭘까. 바로 ‘전술적 무시(tactic ignoring)’다. 아무리 떠들어도 못 들은 척하면 그뿐이다. 좀 지나면 저절로 조용해진다. 사석에서 만난 외교관들은 늘 독도에 대한 전술적 무시를 역설해왔다. 요즘 독도 분쟁 알리기에 혈안인 외교부 방침과는 딴판이다. 중심을 잡아줘야 할 외교 당국마저 정치권에 휘둘려 일본 작전에 말려드는 분위기다.

 늘 입 다물라는 게 아니다. 위안부 문제는 목청껏 외쳐야 한다. 위안부는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된 사안이다. 가녀린 소녀들이 참혹하게 짓밟힌 사연엔 누구나 피가 거꾸로 솟는다. 미국·캐나다·네덜란드 등 7개국에서 16개의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된 것도 다 그래서다.

 그럼에도 일본 우익들은 위안부 강제동원을 부정한다. 스스로 몸을 판 거라는 억지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는 무수하다. 성노예로 내몰렸던 네덜란드 여성 7명은 이들에겐 특히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네덜란드인까지 자발적 매춘부라 우기긴 어려운 탓이다.

 이들 벽안의 위안부 중에는 얀 뤼프 오헤르너라는 91세 된 할머니가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네덜란드령 자바섬에서 살았던 그는 1994년 위안부의 참상을 고발하는 책을 내고 미 의회 청문회에도 섰다. 그런 그는 영국인과 결혼 후 호주로 이민 간다. 아시아를 넘어 네덜란드·호주까지 위안부 문제 당사국이 된 것이다.

 게다가 최근 전쟁터에서의 성폭력은 국제사회의 최대 현안으로 떠올랐다. 보스니아·콩고·르완다 내전에서 벌어진 집단강간의 처참함이 낱낱이 공개된 덕이다. 유엔도 2008년 성폭력 퇴치를 위한 대대적 캠페인을 시작했다. 14일 아베 총리가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계승하겠다고 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꺼림칙한 건 아베 정부가 표변해 왔다는 거다. 이번에도 “고노 담화의 검증은 계속하겠다”고 토를 달았다. 계승한다면서 검증은 또 뭔가. 일본 우익 언론에서도 “궤변에도 정도가 있다”는 질타가 나왔다.

 때마침 6월 런던에선 ‘분쟁지역 내 성폭력 정상회의’가 열린다. 아베 정부가 말을 뒤집으면 위안부 만행과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 정부를 규탄할 호기로 삼을 만하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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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1:51

요즘 한국 사람들 사이엔 ‘통일 대박’이 대단한 화두다. 그러나 외국인들은 그런 큰 기회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물론 한반도의 통일은 전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의미에서, 국제사회와 청소년들의 관심과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성공적 통일을 이루려면 국내와 해외의 적극적인 참여와 열정도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남북 통일에 대한 시각부터 다시 정립했으면 한다. 남북 통일은 한반도라는 범주를 넘어 세계의 미래와 국제 지정학적으로도 엄청난 혁신이다. 물론 북한에 많이 매장돼 있는 석탄·희토류 등의 지하자원처럼 통일이 되면 손에 쥐는 분명한 이득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자원을 이용하느냐에 따라 경제에 반드시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단언할 수 없다.

 고도로 훈련되고 값싼 북한의 노동력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많다. 이는 중국이나 다른 나라와의 경쟁을 생각하면 중요한 포인트다. 하지만 이 또한 잠정적인 추정일 뿐이다.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통일 한국의 노동 임금이 하향 평준화될 공산이 크다. 값싼 북한 노동력이 통일 한국에 긍정적으로 이바지할 것이란 예측은 장기적인 측면에서 정치적 판단 오류가 될지 모른다. 무엇보다 위에서 열거한 장점들은 한반도 통일을 향한 국제사회의 협력을 이끌어 내기에는 역부족이다.

 오히려 한반도 통일의 중요성은 지난 세기 우리가 한번도 목격해본 적이 없는 대규모 실험이라는 데 있다. 새롭게 국가를 건설하고 엄청난 혁신이 수반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독일 통일과 비교할 때 한반도 통일의 조건이 훨씬 열악하다고 보고 있다. 이는 거꾸로 한반도 통일이 야기할 변화의 깊이가 독일 통일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대할 것임을 의미한다.

 통일이 되면 남한 정부가 극도로 가난한 북한의 수백만 주민들의 생활을 떠안게 될 것이란 우려도 있다. 하지만 이는 통일이라는 도전에 임하는 올바른 응전 태세가 아니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인스티튜트 세미나에서 국제 관계 전문가인 존 페퍼(John Feffer)는 이렇게 강조했다. “한반도 통일은 부국(富國)과 저개발 국가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역사적인 일이 될 것이다. 만약 통일 한국이 문화와 사회 영역에서의 개혁을 통해 성공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이것은 전 세계를 위한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의 극단적인 임금 격차가 비극적인 역사적 환경에 의해 오로지 한반도에서만 일어난 현상이라고 보는 것은 오해다. 세계 도처에서 이러한 극단적인 빈부격차 현상을 목격할 수 있으며, 그 정도는 점점 심화되고 있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가들 간의 괴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의 분리가 전 세계 미래의 가장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사람들은 스마트폰과 자동차 디자인에 천재성과 열정을 기울여 왔다. 이번에는 한국인들이 그런 노하우를 되살려 남북이라는 이질적인 두 사회의 통합에 적용할 수 없을까. 그래서 새로운 문명 창조라는 시각에서 전 세계에 영감을 주는 역동적인 통일 한국을 만들어 나갈 수는 없을까.

 ‘통일 대박’이 단지 경제 성장을 자극하는 북한에 대한 광범위한 투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통일 한국이 전 세계에 모범이 될 최고의 국가 경영·행정 기술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싶다.

 많은 사람이 독일 통일과 한국 통일의 차이점을 주로 사상적·경제적 관점에서 서술해 왔다. 하지만 나는 정작 가장 본질적인 차이는 기술의 변화 자체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술은 어지러운 속도로 발전해 왔고, 정보 처리 능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세계 도처에서 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는 낡은 통치 체제들이 삐걱대거나 허물어지고 있다.

 이쯤에서 통일 한국이 역사상 어떤 정부도 해 보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통치 체계로 수많은 도전들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단기적인 통일 비용(주로 돈)에 과도하게 시선을 집중하기보다 새로운 국가 경영이라는 좀 더 본질적인 측면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로 삼았으면 한다. 1215년 입헌 정부를 만들어 낸 영국의 전설적인 마그나 카르타(大憲章)처럼 통일 한국 또한 고도로 혁신된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예를 들어 기후 변화·노령화 사회·민주주의 침해와 같은 광범위한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적 개혁을 이뤄내고, 그 성과를 전 세계에 소개하는 것이다. 지나친 이상주의라 탓할지 몰라도, 나는 통일 한국이 긴 안목에서 성공하려면 이런 역사적인 관점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이만열)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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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0:55

돌아보면 꽤 오래 기자 생활을 해왔지만 잘 했다고 기억에 남는 일이 별로 없다. 기사로 사회의 반향을 일으킨 것은 고사하고 몇 안 되는 사람 눈물 닦아준 일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런 대의명분과는 별개로 '특종'이라도 해서 다른 기자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개인적인 성취감을 맛 본 적도 그다지 없었다. 반대로 기억에 남는 건 다른 기자들에게 기사를 뺏기는 '낙종'이나, 함께 취재를 하고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헤아리지 못해 눈뜨고 기사를 놓친 경험이다. 몇 해 전 아주 짧게 외교부를 들락날락하며 외교 정책을 취재할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아랍 민주화의 봄 이후 리비아 상황이 매우 불안정할 때였다.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반군의 공격이 4개월째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외교부 고위 당국자가 기자실에서 현지 상황을 설명했다. 리비아는 지금 어떤 국면인지, 반군과 카다피 정권의 싸움은 누구의 승리로 끝날지, 한국인 안전에 문제는 없는지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당국자는 이미 미국과 서유럽 심지어 일본도 비판하고 나선 독재자 카다피 정권이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카다피 정권이 바뀌더라도 기존 정부와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라고 볼 수 없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분쟁과 상관없이 전문 관료들은 계속 이어질 것이고, 한국 기업들이 그들과 30년 이상 이어온 관계는 물론 전후 복구사업까지 생각하면 단절이 이로울 게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공습으로 반군을 지원하는 영국이나 프랑스에도 거부감이 있었지만 이미 세계가 독재자로 알고 있는 카다피 정권을 대놓고 비판하지 않는 모습도 갸우뚱했다. 한국 기업에 이익이라니, 그게 국익이라니 뭐 그런가 보다 했다. 다음 날 한 신문이 1면 머리기사로 이 당국자의 설명을 비판했다. 그 신문은 다음 날 사설로 또 문제를 삼았다. 요약하면, 경제적 손익만 따지는 근시안적 외교는 국가의 품격을 떨어뜨려 오히려 국익을 해친다는 지적이었다. 다른 기자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기사를 보고 속으로 '물먹었네' 했다. 얼마 뒤 자원해서 외교부를 떠났다. 문제 의식과 기사 감각, 취재력에서 탁월한 그런 기자들에게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최근 소치 동계올림픽 기사를 쓰면서 그때 일이 생각났다. 소치 올림픽은 러시아 푸틴 정부의 동성애자 차별 등 인권문제를 이유로 각국 정상들이 개막식에 대거 불참한 이례적인 올림픽이었다. 주요 8개국 중에는 일본과 이탈리아를 제외한 정상이 아무도 개막식에 가지 않았다. 리비아의 경우와는 또 달라서 러시아의 인권 차별을 문제 삼는 것은 러시아를 건드려 외교관계에 손해를 보면 봤지 무슨 이득이 있을까 싶지만 서구 지도자들은 그 쪽을 선택했다. 개막식에 시진핑 중국 주석과 아베 일본 총리는 고민 없이 달려갔다. 국익을 매우 중시하는 국내 일부 신문이 그런 외교의 장에 우리 대통령은 왜 안 갔느냐고 따지고 들자 일정이 맞지 않았다고 청와대가 해명한 걸 보면 박근혜 대통령도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 건 아닌 듯하다. 그런데 푸틴 대통령은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어떤 일을 벌이고 있는가. 외교에서 국익을 우선해야 하는 것은 틀리지 않지만 그를 위해 자기 잇속 챙기기나 떼쓰기, 눈치보기나 모르쇠를 되풀이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주요 20개국에 이름을 올리는 나라라면 명분을 앞세워 국익을 창출해야 한다. 영국 외교관이자 작가인 해롤드 니콜슨은 외교 입문서로 널리 읽히는 그의 저서 <외교(Diplomacy)>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 자신의 실질적인 경험과 외교를 통해서 나는 여러 해 동안 연구를 통해 '도덕적 외교'가 궁극적으로 가장 효과적이며 '부도덕한 외교'는 목적을 그르친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다.' 할 말은 좀 하고 살자. 


김범수 국제부장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2474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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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3. 6. 14:11

독일은 전쟁 범죄를 계속 속죄하는데 일본은 왜 정반대의 길로 갈까. ‘속죄의 도시’ 베를린에서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이렇게 묻는 방문객들이 적지 않았다.

답답했다. 그래서 엉뚱한 공상도 해봤다. 만일 일본 도쿄 시내 국회의사당 앞이나 일왕의 거처 앞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는 ‘소녀상’이 세워지고, 난징대학살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관이 설립된다면? 야스쿠니신사 같은 1급 전범이 묻혀 있는 시설에 참배하는 사람은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된다면? 한반도와 중국, 동아시아 곳곳에서 학도병 노무자 위안부 등으로 끌려간 뒤 각종 학대와 인체실험 등으로 목숨을 잃었던 피해자들이 살았던 집 앞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이 생긴다면?

일본이 그렇게 할 가능성은 지금으로선 거의 제로다. 반면 독일은 주변국과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 프로그램을 행동으로 계속 보여주고 있다. 그 차이는 어디서 빚어지는 걸까.

독일은 정치 지도자부터 뼈아픈 반성으로 출발했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제2차 세계대전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선 57세 독일 정치인이 헌화 도중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양복바지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 떨어지는 빗물에 젖어 들어갔다. 당시 나치의 범죄를 무릎 꿇고 사죄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나는 역사의 무게에 눌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행동을 했다”고 말했다. 세계 언론은 “그날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평가했다. 

2009년 9월 1일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70주년 기념식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독일 정상으로서는 두 번째로 무릎을 꿇었다. 이후로도 메르켈 총리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다하우 강제수용소 등을 찾아 “나치 범죄의 책임은 영원하다”며 여러 차례 사과했다. 

독일은 끊임없는 사죄와 피해보상금 지급은 물론이고 영토 반환과 공통 역사교과서 편찬을 통해 주변국과 화해를 시도했다.

반면 일본은 홀로코스트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며 독일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주변국을 침략한 ‘가해자’ 의식보다는, 자신들이 태평양전쟁에서 원폭 피해를 본 ‘피해자’ 의식을 더욱 키워왔다. 독일 전범을 다룬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나치의 ‘반(反)인륜 범죄’가 단죄된 반면 일본의 도쿄 전범재판에서는 서방 연합국에 대한 전쟁 행위와 관련된 범죄만 재판에 넘겨졌을 뿐 식민지배 과거사, 세균전, 일본군 위안부 등 반인륜 범죄는 처벌 대상에서 빠졌다. 당시에는 연합국의 포고에 따른 조치라고 합리화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최근 진행되는 강제 노역자에 대한 보상 문제에서 독일과 일본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독일은 전쟁 학살범죄 피해자들뿐 아니라 외국인 강제 노역자들에 대한 보상까지 하고 있다. 독일도 당초에는 국가가 주도한 홀로코스트 범죄에 대한 배상에는 적극적이었지만, 일반 기업과 관련된 외국인 강제노역에 대한 보상은 거부해왔다. 나치의 불법 행위란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이유나 세계관에서 비롯된 박해’에만 해당하며, 민간 기업에서의 강제노역은 ‘이미 국가 간 배상으로 마무리됐다’는 논리였다. 지금 일본이 내세우는 주장과 비슷했다. 

그랬던 독일 정부와 기업이 2000년부터 총 100억 마르크에 이르는 기금을 조성해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EVZ)을 설립해 외국인 강제노역 피해자 170만 명에게 보상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6일 오후 베를린에 있는 EVZ 사무실을 찾아 마르틴 살름 이사장에게 재단 설립의 배경을 물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나치의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임금을 받기 위한 집단 손해배상 소송이 잇따라 제기됐습니다. 소송 결과에 따라 천문학적인 배상액을 지불할 수도 있는 데다 수출에 주력하는 독일 기업들의 이미지가 크게 나빠질 수가 있었어요. 또한 피해자들이 고령이어서 독일 기업과 정부가 ‘자연 사망 해결 방법’에 기대는 것이 아니냐는 세계적 비난 여론에 휩싸였습니다.”

이런 압력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외국인 노동력을 활용했던 다임러크라이슬러-벤츠 지멘스 폴크스바겐 바이엘 등 대기업들이 모여 기금 마련을 논의했다. 결국 독일의 6000개 회사들이 50억 마르크, 독일 정부가 50억 마르크를 출연해 총 100억 마르크(약 8조3800억 원)의 기금을 마련해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2007년까지 폴란드 헝가리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지에서 동원했던 강제노동 피해자 166만 명에게 44억 유로(약 6조5843억 원)를 보상했다. 

전쟁 당시 독일군 아래에서 일한 외국인 강제노역자는 1200만∼1500만 명으로 추산됐다. 당시 독일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25%를 차지했다. 이들은 군수산업뿐 아니라 농업 숙박업 공공기관, 심지어 교회나 가정에서 일하기도 했다.

대기업들이 주로 출연했던 기금은 금방 바닥났다. 그러자 교회에서도 돈을 내고, 전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중소기업들도 독일 기업으로서 책임과 연대의식으로 뭉쳐 모금에 참여했다.

살름 이사장은 “유대인의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단체도 많고, 기관도 많기 때문에 많은 관심과 보상이 집중된 반면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등 한목소리를 내기 힘든 소외된 이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재단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일본 정부와 기업은 1965년 한일 수교협정을 근거로 모든 배상이 끝났다는 태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을 강제 징용했던 신일철주금(옛 일본제철)은 19일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게 4억 원을 배상하라는 서울고법의 판결에 대해 “어쩔 수 없다면 배상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일본 정부와 우익 단체들은 ‘나쁜 선례’를 남길 것이라며 경계한다.

독일의 경우에도 국가 간 배상으로 개인 보상이 끝났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법을 좋아하는 나라도, 법률 규정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을 버렸다.

“유럽통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독일이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라는 식의 독불장군처럼 더이상 살아갈 수는 없어요. 독일 입장에선 동유럽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싶은데 주변국의 압력을 무시할 수가 없는 거죠. 단기간에 금전적 손해를 보더라도 과거사 해결을 위한 정치적 경제적인 해법을 찾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득이 됩니다.”(살름 이사장) 

일본이 1955∼1976년 아시아 각국에 지불한 배상 액수는 총 6200억 엔(약 7조1154억 원). 한일 양국은 1965년 체결된 수교협정에서 총 5억 달러(5592억 원·이 중 2억 달러는 유상지원)로 개인 및 국가 보상을 일괄 타결했다. 이를 근거로 일본 정부는 민간 차원의 개인보상권 소송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원칙만을 되풀이한다. 

반면 독일의 과거사 정리는 일본과 비교해 가히 경이롭다고 할 만하다. 전후 독일은 1953년부터 피해자보상법 몰수재산반환법 보상연금법 나치박해자보상법 등을 만들어 선제적인 대응책을 내놓았다. 독일이 만든 법에서 개인보상에 적용되는 피해자의 범주는 매우 다양했다. 인종학살의 희생자였던 유대인을 비롯해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제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안락사 프로그램’ 희생자, 강제불임 희생자, 생체실험 희생자, 전몰 군인, 상이용사, 군법재판소 희생자 등 국내외를 망라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독일이 나치 희생자에게 지불한 보상액은 약 1300억 마르크(약 80조 원)에 이른다. 보상금 지급방식은 일시불과 연금 형태로 나뉘었으며,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고 생활재건자금도 융자됐다.

독일은 패전 직후 영토를 반환했다. 독일 정부는 폴란드에 오데르나이세 동쪽 지역 영토 11만 km²를 떼어줬고, 1800년대부터 독일-프랑스 긴장의 진앙이었던 알자스로렌 지방은 완전히 프랑스의 손에 넘겼다. 독일은 나치에 동조한 전쟁 범죄자들을 단죄하는 데 공소시효를 두지 않고 있다. 현재 베를린 시 등 독일 전역에는 사이먼 비젠탈 센터의 나치전범 현상수배 캠페인 포스터가 2000장이나 붙어 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3년간의 연구 끝에 공통 역사교과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독일과 일본이 이처럼 극명하게 다른 길을 걷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두 민족의 도덕성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본의 사학자 모치다 유키오는 전후 두 나라가 겪은 점령체제의 차이에서 원인을 찾는다. 독일은 4개 연합국에 의해 분할 통치된 데 비해 일본은 미국의 단독 점령 아래 있었다. 연합국은 독일에 처음부터 경쟁적으로 전쟁 범죄를 철저히 추궁한 반면에 일본에서는 미국이 동서냉전 시기 일본을 우방으로 만들기 위해 일왕의 전쟁 책임과 식민지 지배 등에 대한 철저한 추궁을 피해갈 조건을 만들어주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테러의 지정학’ 전시관 총책임자 토머스 루츠 박사는 전후 경제성장 과정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그는 “독일은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 과정에서 유럽 지역 내에서의 교역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끊임없는 사죄와 보상 노력이 필요했지만, 일본은 피해를 끼친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보다는 서방 강대국인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훨씬 중요시함으로써 주변국에 대한 배려가 소홀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국제사회와 전범 피해국의 압력의 차이도 주요한 요인이다. 유대인 연합회는 미국, 서방 연합국, 이스라엘 등을 내세워 과거청산에 대한 엄청난 압력을 행사해온 데 비해 한국 등 동아시아의 피해 국가들은 전후 한동안 냉전극복, 민주화, 경제성장 과제에 몰두하느라 제대로 된 과거청산 요구를 못했다. 

우베 노이베르거 나치 희생자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기자에게 “독일의 과거사 청산에서는 유대인 연합회를 비롯해 국제사회의 강력하고 끈질긴 압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며 “과거사 청산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주변국들의 압력과 지식인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과 중국 정부, 일본 내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 들려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베를린=전승훈 특파원


http://news.donga.com/3/all/20130824/57197903/1



Posted by 겟업
2014. 1. 27. 10:10

개성공단에서는 북한 근로자들에게 밥을 주지 않고 국만 제공한다. 사정을 잘 모르면 우리 기업들이 인색하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남북 협약 때 식사 제공 대신에 인건비를 올려 달라는 북의 요구 때문에 그렇게 됐다. 근로자들은 도시락과 찬거리를 싸온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쇠고기 돼지고기 북엇국을 3일 간격으로 번갈아 낸다. 북한 근로자들은 밥을 국물에 말아먹기 전에 고깃덩어리를 건져내 가족에게 갖다 주려고 도시락에 담는다. 북한 근로자들은 개성공단에 출근하기 시작한 지 석 달만 지나면 얼굴에 부옇게 기름기가 돈다. 

개성공단에서 간식으로 주는 초코파이는 북한 장마당의 주요 상품이 된 지 오래다. 개성공단에서 하루 풀리는 초코파이는 40만 개. 뜨뜻한 물에 초코파이를 풀어서 먹으면 어느 정도 허기를 달랠 수 있다. 유통기한이 6개월인 초코파이가 여러 경로를 거쳐 함경북도 장마당에서도 팔리고 있을 정도다.

북한은 북한 근로자의 임금을 통해 연간 약 9000만 달러를 거둬들이고 있다. 이 돈을 무역을 통해 벌자면 수십억 달러를 수출해야 할 판이다. 북한의 무역 규모나 국내총생산(GDP)에 비춰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돈이다. 북한은 “괴뢰역적들이 외화 수입의 원천이기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한다느니 하며 우리 존엄까지 모독하고 나서고 있다”고 발끈했다. 한국 언론이 이 이야기를 어제오늘 쓰는 것도 아닌데 공연한 트집을 잡고 있다. 

2009년에는 한미 연합군사연습인 키리졸브에 반발해 입출경(入出境)을 다 닫는 일을 3차례나 반복했지만 이번에는 남에서 북으로 가는 인원만 막았다. 북한도 개성공단에 잔류한 남측 인원이 인질로 비치는 상황을 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지금은 벼랑 끝 전술을 펴고 있지만 개성공단을 폐쇄하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 근거 가운데 하나는 개성공단이 김정일의 유훈(遺訓)사업이라는 점이다. 김정일은 “개성공단에 인력이 모자라면 한두 개 사단을 해체해서라도 인력을 공급하겠다”고 남측 관계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공단에 근무하는 북한 근로자가 받는 임금은 평균 150달러. 북한은 2009년 6월 남북 당국 간 회담에서 토지임대료를 5억 달러, 평균임금을 300달러, 현재 5%인 임금인상률 상한선을 10∼20%로 올려 달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북한의 개성공단 폐쇄 협박은 이러한 현금수입 증대를 노린 것이라고 보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개성공단 상황이 안정돼야 임금인상 협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개성공단을 통해 북한만 일방적으로 득을 보는 것은 아니다. 개성공단이 문을 닫으면 입주 중소기업 123개사는 2조 원대에 이르는 매출 손실을 입는다. 개성공단의 한국 기업들은 생산에 필요한 원부자재를 모두 남쪽에서 가져다 쓴다. 입주기업과 연계된 협력사만도 3000여 개에 이른다. 중국에서 한국 기업이 현지인 한 명을 채용하자면 30만 원가량 들지만 개성공단에서는 15만 원이다. 북한 근로자들은 말이 통하고 교육 수준이 높아서 불량률도 적다. 

개성공단은 북한 주민에게 시장경제의 학습장이다. 관광객들이 입산료를 내고 북한 주민과 일절 접촉이 없는 상태에서 경치만 둘러보고 돌아오는 금강산 관광과는 다르다. 개성공단 사무실에서 쓰는 복사지도 한국 것이다. 북의 교과서는 질이 떨어지는 신문용지다. 북한 당국도 이러한 사정을 뻔히 들여다보고 있으면서도 개성공단 가동을 허용했다. 

현재 개성시와 개풍군 주민 중에 일할 능력을 갖춘 사람은 모두 개성공단에서 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성공단이 인력을 늘리려면 더 먼 곳에서 인력을 데려올 수밖에 없어 한국이 기숙사를 지어줘야 한다. 지금도 공단 근로자 출퇴근 버스 278대를 모두 한국이 지원하고 있다. 현재의 전쟁 위협 분위기가 사라지고 나면 박근혜 대통령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실험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개성공단이다. 

유엔 제재 결의는 군사무기나 민군(民軍) 이중 용도의 첨단 제품은 물론이고 사치품의 북한 반입도 막고 있다.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이 파워 엘리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는 선물로 이용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사치품이 직접 우리의 안보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사치스러운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달러가 아쉬울 것이라는 점에서 사치품 반입 금지는 현명한 제재가 아닌 듯하다. 개성공단을 통해 북에 들어가는 달러는 김정은의 통치자금으로 쓰이고 군과 당의 최고 엘리트들에게도 분배되겠지만 북한 경제의 남한 의존도를 심화할 것이다. 

개성공단의 명맥이 바람 앞의 등불 같다. 북이 개성공단 폐쇄라는 마지막 카드를 아직 남겨두고 있어 일말의 기대가 남아 있긴 하다.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북한을 안정적으로 관리하자면 우리 쪽에서 개성공단을 조심스럽게 다룰 필요가 있다. 이것을 눈치 채고 북이 더 협박의 강도를 높여가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황호택 논설주간 채널A 시사프로 ‘눈을 떠요’ 진행


http://news.donga.com/3/all/20130411/54350504/1

Posted by 겟업
2013. 10. 13. 22:43

실용과 개방이 이끈 적도의 기적, 아시아의 금융·물류 허브, 투명하고 깨끗한 정부…. 싱가포르에 따라붙는 수식어들이다. 흠잡을 데 없는 그들의 효율이 부럽다 못해 얄미울 정도다.

그 싱가포르에서 지난주 반관반민 형태의 한국·싱가포르 포럼이 개최됐다. 양국 협력을 강화하자는 취지의 대화 채널인 셈이다. 포럼 참석차 방문한 싱가포르의 도심엔 대형 크레인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건설경기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풍경이었다. 또 13일부터 열릴 자동차 경주대회 F1 그랑프리를 위해 도로변에 안전망을 설치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휘청휘청하는 인도네시아·인도와는 달리 경제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포럼 당일인 8월 29일 현지 신문들의 1면 톱은 개각이었다. 장관이 된 이들의 사진과 프로필이 큼지막하게 실렸다. 현지 언론이 분석한 개각의 포인트는 세 가지. 벤치에 앉아 있던 선수들에게 뛸 기회를 줬고, 여성 각료 비중을 높였으며, 30~40대를 과감히 등용했다는 것이다. 그날 포럼 만찬장에서 옆에 앉은 추아타이컹 전 주한 싱가포르 대사는 “10년 뒤의 리더를 키우기 위한 훈련”이라고 분석했다.

싱가포르에선 인재를 숙성시키는 데 드는 시간을 그처럼 길게 잡는다. 정권 바뀔 때마다 물갈이다, 보복이다 하며 인사 파동을 겪는 우리와 달리 일관성 있는 인재 육성 프로그램이 돌아간다는 얘기다. 정치는 짧고 경제는 길다지만, 싱가포르에선 둘 다 길다. 리더십의 혼란으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없다. 도처에서 터져나오던 ‘점령하라’ 시리즈도 싱가포르에선 맥을 못 췄다. 다소 관헌(官憲)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안정적이고 효율적인 국정관리가 뿌리내렸다. 이거야말로 싱가포르 번영의 비결 아닌가.

새삼스러운 얘기도 아니다. 1980~90년대를 기억하는가. 정치인·공무원·학자에다 언론까지 한 수 배우겠다며 싱가포르로 달려갔다. 모두 똑같은 질문을 하고, 똑같은 답변을 듣고 왔다. 그런데 20여 년이 지나도록 배운 게 뭔가. 깨끗하고 효율적인 정부? 감탄은 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 풍토에 기대하기 쉽지 않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경제? 좋다면서도 이해관계에 얽혀 못 하고 있다. 선하고 지혜로운 장기 집권체제? 어림도 없는 얘기다. 싱가포르의 성공 비결은 이해할 수는 있어도 따라 하기는 어렵다는 게 문제다.

물론 싱가포르라고 왜 고민이 없겠나. 야당 지지율이 슬슬 높아지고, 지난해엔 26년 만에 파업도 일어났다. 지난 2월엔 독립 후 최초로 4000명 규모의 군중집회도 있었다. 얌전하던 택시 기사들도 심심찮게 난폭운전을 한다. 국민의 불만과 스트레스가 슬슬 표출되고 있는 분위기다.

포럼 다음날 박병석 국회 부의장 등 한국 측 참석자들을 관저에서 맞이한 고촉통 명예 선임장관(전 총리)은 그에 대해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했다. 싱가포르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다. 실제 싱가포르 정부는 국민 불만을 의식해 정치 개혁과 소통 강화를 약속했다. 그 가시적 조치로 고위 공직자들의 거액 연봉을 왕창 깎았다. 총리는 28% 삭감, 대통령·국회의장은 아예 반 토막을 냈다. 그런 노력들이 외국에 더 좋은 인상을 준 모양이다. 조셉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얼마 전 뉴욕타임스에 싱가포르 예찬론을 썼다. 정치가 제대로만 하면 성장과 평등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데, 싱가포르가 모범사례라는 내용이었다.

포럼을 마치고 귀국 비행기에서 집어 든 신문은 왠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종북세력은 총을 들자 하고, 야당은 길거리에 진을 치고, 귀족노조는 배부른 파업을 하고…. 싱가포르라면 전혀 겪지 않을 갈등들 아닌가. 포럼에 참석한 한 교수는 이런 말을 했다. “10년쯤 전엔 만만해 보이던 싱가포르가 지금은 따라잡기 어렵겠다 싶을 만큼 앞서 있다.” 짧은 일정 중 들었던 가장 아픈 말이었다.


남윤호 논설위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2503263&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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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0. 01:26

얼마 전까지 북한 뉴스 하면 핵이나 미사일 같은 국방(國防)색이었다. 지난 주말 전해진 북한발(發) 뉴스 세 건은 때깔이 달랐다.

#1. 최룡해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은 24일 선군절 기념행사에서 "인민은 전쟁보다 평화를 원한다"면서 "마식령 스키장, 문수 물놀이장 같은 주요 대상 건설을 최상의 수준으로 다그쳐 끝내야 한다"고 했다.

#2. 북한스키협회 대변인은 24일 스위스·이탈리아 정부가 스키장 리프트 설비의 대북(對北) 수출을 금지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유엔헌장에 대한 난폭한 유린"이라고 비난했다.

#3. 조선 국제여행사는 24일 북한 주재 각국 대사관 관계자 및 중국·영국·독일 여행사 대표들을 평양 양각도호텔에 초청해 관광특구 설명회를 개최했다.

김정은에 이어 군 서열 2위인 최룡해가 김정일의 선군(先軍) 통치를 기리는 행사에서 스키장, 물놀이장 얘기를 했다. 합참의장이 국군의 날 행사에서 스키 리조트, 물놀이 테마파크 타령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머지 뉴스 두 건도 우리로 치면 문화체육관광부 소관 업무에 해당한다.

요즘 북한에서 나오는 뉴스는 십중팔구가 놀이 시설과 관련된 것들이다. 원산 마식령에선 스키장 건설이 한창이고, 압록강변엔 대형 수영장이 들어서고 있다. 원산시 해변엔 우주비행선, 회전그네 등 현대식 놀이 시설이 도입됐고 평양 문수 물놀이장도 전면 개축 공사를 벌이고 있다.

김정은이 올 들어 현지지도를 하다 크게 역정을 낸 것도 놀이 시설에서였다. 미림 승마 구락부 건설 현장에서는 "다른 나라 승마학교 자료를 많이 보내줬는데 전혀 참조하지 않았다"고 질책했고, 만경대 유희장에서는 놀이 시설 페인트칠이 벗겨졌고, 도로가 파손됐으며, 분수대 청소 상태가 마음에 안 든다고 조목조목 관리 소홀을 나무랐다.

지난 몇 달 새 김정은은 전국을 돌며 놀이 시설의 신설·확충 공사를 독려하는 한편 기존 시설 관리 상태도 감독하고 있다. 북한 관영 매체들은 김정은의 놀이 시설 챙기기를 '인민 사랑 앞세우기'라고 의미 부여를 했다.

김정은은 삶 전체가 놀이 문화였다. 어려서부터 미 NBA 농구에 열광했고, 스위스 유학 시절엔 스키를 즐겼다. 생모 고영희와 일본 도쿄 디즈니랜드에도 가봤다. 수퍼 마리오, 테트리스 같은 컴퓨터 게임도 잘했다고 한다. 10대 시절 김정은은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에게 "나는 매일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농구도 하고 여름이면 제트스키도 타는데 밖의 인민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북한 인민들이 자신만큼 놀거리를 즐기고 있을지 궁금해 했다는 것이다. 그때 그 마음 씀씀이가 오늘날 놀이 시설을 통한 인민 사랑으로 구현되고 있는 셈이다.

북한 주민의 절대다수는 하루하루 먹고 입고 자는 문제를 해결하느라 허덕이는데, 김정은은 북한 주민이 제대로 놀고 즐기지 못할까 고민하고 있다. 그 엇나간 인민 사랑이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될 것 아니냐"고 했다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김정은은 부가가치가 높은 오락 산업을 북한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삼겠다는 계산도 하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선도 프로젝트로 삼고 있는 것이 마식령 스키장이다. 북한 당국은 마식령 스키장이 완공되면 하루 평균 이용객이 5000명쯤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키장을 250일 운영하면 연인원이 125만명에 이른다. 이들이 50달러씩 입장료를 내면 마식령 스키장 연간 수입이 6000만달러를 넘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개성공단 9000만달러, 금강산 관광 4000만달러와 비교해 봐도 만만치 않은 수입이다.

이런 주판 셈처럼 황금알을 쑥쑥 낳아준다면 오죽 좋겠는가. 중국의 북한 여행 전문업체 '고려투어' 영문 홈페이지에는 북한 여행 때 주의사항이 적혀 있다. '사진을 함부로 찍으면 안 된다. 가이드 없이 홀로 돌아다니면 안 된다. 위대한 지도자 기념 장소에서 무례한 행동을 하면 안 된다. 규칙을 어기면 심각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으스스한 경고를 무릅쓰고 매년 125만명의 해외 관광객이 마식령 스키장을 방문해 줄 것인가. 북한 1인당 소득 한 달치와 맞먹는 50달러 입장료를 내고 스키장을 찾을 북한 주민은 또 몇 명이나 될까.

김정은은 북한 땅 곳곳을 파헤쳐 놀이 시설을 만들 태세다. 스키장, 승마장, 수영장, 테마 파크로 인민 사랑을 실천하면서 노다지도 캐겠다는 것이다. 젊은 영도자의 '꿩 먹고 알 먹고' 구상이 머잖아 신기루로 판명 날 텐데 그 후과(後果)는 또 누가 치르게 될 것인가.


김창균 정치 담당 에디터 겸 부국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27/2013082704588.html



Posted by 겟업
2013. 9. 20. 01:15

올여름도 세계의 관광지는 중국 여행객 등쌀에 몸살을 앓았다. 큰 소리로 떠들고 새치기하고 함부로 담배 피우는 등의 무질서·민폐 사례가 곳곳에서 목격됐다. 프랑스에선 중국인들이 루브르 박물관 분수대 물에 발을 씻는 사진이 인터넷에 올랐다. 3000년 된 이집트 신전에 '왔다 간다'고 쓴 중국어 낙서가 발견돼 세계를 경악시키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북한에 간 중국인들 소식이었다. 중국 관광객이 북한 어린이들에게 사탕과 음식을 던져주는 등 오만함이 도를 넘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 실태를 전한 홍콩 신문은 "오리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것 같았다"고 비유했다. 아무리 '어글리 차이니스(Ugly Chinese)'라도 잘사는 나라에선 조심하는 척을 한다. 하지만 자기네보다 못사는 북한에 가선 사람들을 거지 취급하며 모욕하고 있었다. 서글프면서도 소름 끼치게 무서운 얘기였다.

중국인의 해외여행 추태는 아마도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우리에게도 과거 '어글리 코리안(추한 한국인)'으로 악명 높던 시절이 있었으니 크게 할 말은 없다. 유커(遊客·중국 관광객) 유치에 목을 건 우리 입장에선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하다. 와서 돈을 써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이것저것 따질 입장이 아니다.

문제는 관광객의 눈살 찌푸리는 행동 같은 지엽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이 아무리 발전해도 어쩔 수 없는 국가 본능이 있다. '중화(中華) 제국주의'라는 DNA다. 중국 공산당의 국가 경영이 당(唐)·청(淸) 제국의 영광을 추구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의 힘이 커지는 것과 비례해 제국주의 본능은 거세질 것이다. 아마 주변국을 신하처럼 부렸던 '조공(朝貢)의 추억'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제국주의란 군사력·경제력 같은 하드파워로 남을 굴복시키려는 국가 의지다. 초강대국이 되기도 전에 중국은 이미 세계의 만만한 국가를 상대로 '힘의 외교'를 휘두르고 있다. 엊그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세계 1위 연어 수출국 노르웨이가 겪는 수난을 전했다. 노르웨이산 연어의 대(對)중국 수출이 3년 새 3분의 1로 급감했다는 것이다. 반체제 인사 류샤오보에게 노벨 평화상을 준 데 대한 중국의 보복이었다.

우리 역시 중국의 완력에 휘둘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몇 년 전엔 중국산 마늘을 건드렸다가 무지막지한 무역 보복을 받고 백기 투항한 일이 있었다. 고구려를 자기네 역사로 편입하려는 동북공정은 갈수록 노골화하고 있다. 옌볜(延邊)의 윤동주 생가에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 시인'으로 표기해 놓았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요즘 한·중 관계가 좋아지자 일부에선 중국 환상론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착각도 보통이 아니다. 수천년 한·중 관계사(史)에서 중국이 '선의(善意)'면서 '동반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중국이 그나마 우리를 함부로 못 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아직은 우리가 더 잘살고, 문화 수준이나 라이프 스타일이 앞서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배울 것이 있고 얻을 게 있으니까 패권 본능을 자제하는 것뿐인데, 이런 상황이 반전되는 것도 시간문제 같아 보인다.

우리는 중국 하면 싸구려 이미지를 떠올리고, 영원히 우리보다 못살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수천년 역사 속에서 우리가 중국보다 선진국이었던 것은 지난 30~40년에 불과하다. 나머지 기간 대부분을 우리는 중화 패권주의에 시달리거나 순응하면서 살았다.

1970년대 이후 우리는 근대화의 기적을 이뤄내 처음으로 중국에 앞설 수 있었다. 우리가 노력한 결과지만 운도 따랐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대혁명(1966~76)은 중국에 큰 불행이었지만, 우리로선 예기치 않게 찾아온 행운이었다. 마오가 이념의 광풍을 일으킨 덕에 우리는 중국보다 10여년 먼저 경제개발의 스타트를 끊었다. 만약 중국이 일찍 정신 차렸다면 우리는 지금쯤 중국의 하도급 기지 신세가 됐을 것이다. 중국의 뒤늦은 출발 덕분에 우리는 중국에 큰소리도 치는 짧은 호시절을 맛볼 수 있었다.

이젠 '마오쩌둥의 축복'도 약발이 다해가고 있다. 중국이 한국 턱밑까지 따라왔다는 뉴스가 요 며칠 새에도 쏟아졌다. 3년 전 2.5년이었던 중국과의 산업기술 격차가 이젠 1.9년으로 좁혀졌다(미래창조과학부). 포브스가 선정한 100대 혁신 기업에 한국 기업은 한 곳도 들지 못했다는 발표도 있었다. 중국은 5곳이었다.

거대 중국 옆에서 자존심 구기지 않고 살아갈 방법은 끊임없이 중국보다 앞서 달리는 길뿐이다. 기술 수준, 혁신 능력, 문화 창조력 같은 총체적 국가 경쟁력에서 우위를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 어느 누구도 중국의 추격을 따돌릴 국가 전략을 말하지 않는다. 중국 관광객들이 북한 주민에게 음식을 던져준다는 얘기에 소름 돋았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박정훈 부국장·기획에디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22/2013082204386.html



Posted by 겟업
2013. 9. 20. 01:02

개성공단 파행 133일째였던 14일, “다시 공단이 문을 연다”는 소식에 유달리 감회가 새로운 사람이 있었다. 2005년 1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만 8년 동안 개성공단에서 남북한 근로자들에게 무료 진료 봉사를 했던 재단법인 ‘그린닥터스’ 정근 이사장(53)이었다. 

그가 이끈 의료진은 개성에 들어가 하루 평균 200명에 달하는 북한 근로자들의 건강을 살폈다. 개성공단 북측 근로자 5만 명 대다수가 최소 한 번 이상 그린닥터스가 운영하는 진료소를 들른 셈이다. 이들이 가족들을 위해 받아간 의약품까지 감안하면 개성 사람 20만 명의 건강을 돌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순번을 정해 봉사를 떠난 남한 의사만 1300명이 넘는다. 


○ 처음엔 남-북 진료소 따로따로

정 이사장도 한 달에 최소 세 번씩 개성공단 병원으로 올라갔다. KTX가 생기기 전에는 떠나기 전날 새벽에 서울역에 도착해 찜질방에서 쪽잠을 자고 떠났으나 KTX가 생기면서 떠나는 날 당일 새벽 서울에 도착해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앞에서 버스를 타고 개성에 들어가는 강행군을 했다. 

기업인도, 정부 인사도 아닌 의료인 입장에서 그는 개성공단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16일 부산 서면에 있는 그의 병원에서 만난 정 이사장은 “통일한국의 미래는 북한에 있다. 따라서 개성공단이 다시 문을 여는 만큼 과거보다 더 잘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저소득층과 노인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시작한 이후 외국인 근로자 진료까지 활동의 폭을 넓혀온 그는 2004년 4월 개성공단이 가동되고 이듬해 2005년 1월부터 통일부의 허가를 받아 공단에서 진료소를 세우고 봉사활동을 했다. 그는 초창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처음에는 북한 근로자를 치료하는 진료소는 현대아산이 운영하고 남측 근로자를 치료하는 진료소는 우리가 운영하는 식으로 따로 돌아갔다. 각각 66m²(약 20평) 정도의 작은 규모였고 거리도 500m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서로 간에 교류는 있을 수 없었다. 우리도 처음 진료를 시작했을 때 남측 진료소에서 남한 근로자들만 진료했다.” 

―언제부터 북한 근로자까지 치료하게 된 건가.

“공단을 운영하면서 처음에는 북측 진료소에 필요한 각종 비용과 약품을 현대아산이 지원해줬는데 2006년 정몽헌 회장이 타계하면서 현대아산 쪽이 더 이상 지원해주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하면서 북측 진료소가 폐쇄될 위기에 처했다. 북측은 궁리 끝에 우리 쪽에 ‘북한 근로자까지 맡아줄 수 없겠느냐’며 도움을 청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단체 이름을 영어(그린닥터스)를 쓰는 ‘부르주아’ 의사들에, 자신들이 싫어하는 기독교 신자들까지 많다며 배척하던 그들이 태도가 바뀐 건 연탄가스중독 환자들 때문이었다. 북한은 연료 사정이 좋지 않아 겨울에 나무장작을 때는데 2000년대 중반 우리 정부가 연탄을 많이 보내줘 사정이 나아졌다. 문제는 집 안 문을 닫고 연탄을 피우다가 연탄가스중독 환자가 늘어난 것이었다. 어느 날 밤중에 병원 문을 누가 다급하게 두들겨 나가 보니 당(黨)의 높은 사람이었다. 인근에 유일하게 우리 병원에 고압 산소치료기가 있었다. 그 환자를 치료한 이후 어떻게 입소문이 났는지 우리를 대하는 북측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남북으로 갈라졌던 진료소는 마침내 2006년 12월 ‘개성종합병원’으로 합쳐지면서 430m²(약 130평) 규모의 새 건물도 세웠다. 내과, 외과, 산부인과, 치과, 한방진료까지 개설했으며 X선, 초음파, 수술실까지 마련했다. 


○ 남북환자 접촉 차단 시도 무용지물

―건물을 함께 쓰면서 어떤 변화가 있었나. 

“북측 간부들은 처음부터 주민들이 섞이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당 간부들은 ‘남한 환자와 북한 환자가 들어가는 입구를 다르게 만들라’ ‘건물 안에서 양쪽 사람들이 만나지 않도록 중간에 벽을 세우라’ 등 환자들이 섞이지 않게 하고, 의료진만 문을 잠깐씩 왕래하라고 했다. 이런 주문을 받아들여 건물을 만들다 보니 입구가 두 개인 기형적인 건물이 됐다. 왼쪽으로 북한 근로자들이 들어가고, 오른쪽으로 남한 근로자가 들어가는 식이었다. 한 건물에 내과도 2개, 외과도 2개… 그렇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분단의 장벽’은 쉽게 무너졌다. 

“입구를 아무리 분리해도 결국 안에서 뒤섞였다. 환자들이 X선 찍고 주사실로 이동하다 보니 자연스레 섞일 수밖에 없었다. 공장 안에서는 서로 눈도 안 마주치던 남북한 사람들이 병원 안에서는 인사도 하고, 서로 이야기도 나누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복도 대기실에 환자들이 죽 앉아있는데 남한 사람인지 북한 사람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보다 못한 당 간부들이 ‘복도 중앙을 가로막고 문을 새로 만들어 잠가 놓으라’고 하더라. 처음 3개월 동안은 그대로 했다가 나중엔 ‘이래서는 환자를 제대로 볼 수 없다’고 설득해 낮에만 문을 열어 놓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대화는 진료 과정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로 넘어갔다. 

“처음에 나도 그랬지만 남한 의사들은 실제 만난 북한 환자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군인이라고 하는데도 키가 우리나라 중학생 정도로 작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영양 상태도 좋지 않았다. 공단 근로자들 중에는 유난히 결핵 환자가 많았다. 젊은 사람들만 특별히 뽑았다는데도 그랬다. 너무 안타까운 마음에 북한 측에 ‘공단 직원 전체를 대상으로 건강검진을 해 보면 안 되겠느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날까 ‘안 된다’면서 질겁하다 결국 수락하더라. 나중에는 우리가 환자들을 적극적으로 찾아 약을 지속적으로 먹였다. 간염 접종도 시켰다.”


○ 부모님-자식 걱정까지 털어놔


―북한 의사들은 남한 의료진들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나. 

“진료소가 합쳐진 직후인 2007년 1월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북한 의사와 간호사 23명이 싹 사라졌다. 일주일 만에 나타났는데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으니 ‘교육받고 왔다’고 했다. 병원이 합쳐진 갑작스러운 변화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위에서 지시를 내린 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갑던 마음들은 눈 녹듯 녹았다. 나중에는 북한 의사가 먼저 ‘약 좀 더 갖다 주세요’ ‘의사 가운, 간호사복 좀 갖다 주세요’라며 도움을 청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한 젊은 치과의사는 임플란트 기술을 배우고 싶다며 재료를 구해줄 수 있는지 상의하기도 했다.”

“개성공단이 남북관계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보는가”라고 묻자 차분하던 그의 부산 말씨 톤이 올라갔다.

“처음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천양지차로 변했다. 우선 서로가 친숙해졌다. 공단 내 구내식당 TV에서 한국 방송이 나오는데 처음에는 북한 사람들이 화면을 힐끔거리지도 않고 오로지 밥만 먹었다. 그중에는 화면을 곁눈질로 쳐다보다 자아비판까지 하러 다니느라 고초를 겪은 사람들도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어떠냐고? 서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에서부터 어느 배우를 좋아하는지까지 이야기한다.”

그는 “나는 통일된 남북의 모습을 개성공단에서 보았다”면서 “개성공단이야말로 통일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북한의 20, 30대 근로자들이 남한에 대한 적대감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서 바로 이것이야말로 통일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가족들에게 약이 가고, 남한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게 되면 마침내 통일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생각 말이다. 처음에는 200명이 2000명에게, 마침내 2000만 명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나는 개성공단이 생기면서 남북을 가르는 분단선이 공단 쪽 뒤까지 물러났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원치 않는 북한 주민, 통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북한 주민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이야말로 통일의 출발점이다. 지금 남한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최소 월 150만 원을 주면서 쓰고 있다. 기업들은 인건비가 비싸다며 외국으로 공장을 옮기는 중이다. 하지만 개성공단 인건비는 남한 내 10분의 1도 들지 않는다. 제품도 ‘메이드 인 코리아’이다. 북한의 생활수준(국내총생산·GDP)을 높이는 것이야말로 통일비용을 줄일 수 있다. (주민들을) 말려 죽여 통일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 공단에서 만난 우리 누이들의 얼굴

정 이사장은 그동안 북한 근로자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면서 “1970년대 가발공장, 신발공장에서 동생과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던 여공 누이들을 떠올렸다”고도 한다. 

“처음 북한 환자들은 묻는 말에만 대답했다. 나중에는 부모님 이야기, 자식 걱정까지 털어놓았다. 근로자들이 와서 ‘밤샘근무를 하거나 연장근무를 하게 됐다. 이번 달은 수당을 좀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애처롭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30, 40년 전 우리 부모 세대, 누이 세대의 열정을 보는 듯했다.”

그린닥터스의 무료 진료는 남측 진료소를 유료 진료로 운영하겠다는 통일부 방침에 따라 2012년 12월 말 끝났다. 정 이사장은 “이번에 공단이 다시 문을 여는 만큼 무료 진료를 다시 시작했으면 한다”며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에 인도적 지원은 아끼지 않겠다고 한 만큼 좋은 소식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무료 진료를 통해 통일 체험을 한 그의 꿈은 크다. 한국결핵협회, 캐나다의사회, 그린닥터스가 손을 잡고 황해도 해주에 결핵병원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해주는 1927년 캐나다 선교사들의 지원하에 한반도 최초로 결핵병원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그가 들려준 개성공단 이야기는 기자에게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세 시간 가까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멀리서 머릿속으로만 느껴지던 ‘통일’이나 ‘북한 사람들’이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졌다. 개성공단이 한반도의 미래와 평화를 향한 실핏줄이 되어 힘차게 박동하는 날이 오기를 그와 함께 빌어본다. -부산에서

:: 그린닥터스 ::

1997 년 ‘백양의료단’이 전신으로 2004년 국경, 지역, 인종을 초월한 의료봉사단체로 출범했다. 인도 필리핀 카자흐스탄 중국 등에 의료진을 파견해 10년간 3만 건 이상의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2005년 1월∼2012년 12월 개성공단 남북협력병원을 운영했다.


인터뷰= 노지현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30819/570923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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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0. 00:53

“히틀러가 집시들을 더 충분히 죽였어야 했는데….”

지난달 말 프랑스 서부 숄레 시의 질 부르둘렉스 시장은 이렇게 중얼거렸다가 신세를 망칠 위기에 몰렸다. 100여 대의 캠핑카를 불법 주차해 놓은 동유럽 출신 집시들과의 언쟁 속에서 무심코 한 말이 현장에서 녹음됐고 지역신문에 실려 일파만파를 낳았다. 그는 나치의 ‘반인륜 범죄 찬양’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았다. 유죄가 확정되면 5년 이하 징역형에 벌금 4만5000유로(약 6680만 원)를 물게 된다. 그는 소속 정당에서도 쫓겨났다. 

이번엔 일본의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을 던졌다.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일본의 우익 세력이 민주적인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누구도 모르게 무력화시켰던 ‘나치식 개헌’ 수법을 배우자는 제안이었다. 나치의 개헌은 곧바로 제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 600만 명 대학살의 참극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유럽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소 부총리는 ‘은밀하고 위대하게’ 개헌을 해보자는 취지였겠지만 결과적으로 전 세계에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속내를 널리 알린 셈이 됐다. 

프랑스에서 요즘에야 한류(韓流) 마니아가 생겼지만 일본 문화에 대한 열정인 ‘자포니슴(Japonisme)’의 역사는 19세기부터 이어질 정도로 뿌리가 깊다. 일본을 문화적 경제적 이유로 좋아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독일과 달리 과거사에 대해 몰역사, 몰염치로 일관하는 평소 일본의 태도를 잘 지적하지 않는 프랑스인들을 이해할 수 없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이유에 대해 전직 외교관 출신인 프랑스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프랑스 영국 등도 식민 지배를 하며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제대로 사과한 적이 없다. 패전한 독일만 사과를 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같은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아픈 곳은 서로 건드리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유럽 언론들이 아소 부총리의 ‘나치 발언’에 대해서는 태도가 싹 달라졌다. 프랑스 르몽드지는 “아소 부총리의 망언 시리즈에는 늘 ‘나치즘’이 빠지지 않는다”고 꼬집었고, 독일 쥐트도이체차이퉁은 “마치 나치가 정당한 절차를 통해 개헌한 것처럼 발언했는데 실제 나치는 여러 특별법을 만들어 민주주의를 왜곡했다”고 비판했다. 

유럽 언론들의 아소 비판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그동안 일본의 정치인들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동아시아 침략에 관한 숱한 망언을 쏟아냈지만 ‘나치 망언’만큼 조명을 받은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중국 등의 항의는 무시하면서 유럽의 비판에는 잽싸게 발언을 철회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서구 사대주의’도 우습긴 마찬가지다. 

이번에 아소 부총리의 망언에 가장 무거운 비판을 가한 것은 유대인 인권단체인 사이먼 비젠탈 센터였다. 이 센터를 세운 사이먼 비젠탈(1908∼2005)은 50년간 1100명이 넘는 나치 전범을 찾아내 기소해 ‘최후의 나치 사냥꾼’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인물이다. 그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총괄 지휘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아르헨티나에서 잡아내기도 했다. 이 센터는 최근 독일에서 나치 전범 현상수배 작전을 또다시 시작했다. 

어느덧 우리도 ‘나치 미화’는 정신병자의 짓이라 생각하면서 일본 정치인들의 ‘군국주의 미화’ 망언에는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만일 아시아에도 비젠탈처럼 집요한 ‘일제 전범 사냥꾼’이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위안부 강제동원, 731부대의 세균전, 난징대학살 등에 관여했던 전범들이 잡힐 때마다 세계인들이 일본의 사죄를 촉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가해자의 참회다. 비젠탈은 생전에 이런 말을 했다. “가해자의 참회 없이 피해자의 용서가 가능한가.”


전승훈 파리 특파원



http://news.donga.com/3/all/20130805/56839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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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0. 00:51

"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아무도 모르게 바꾼 그 수법을 배우면 어떤가"라는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의 망언을 접하고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할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1939년 8월 22일 히틀러는 독일군 사령관들을 모아놓고 "사람들을 주저없이 많이 죽이라"고 했다. 혹시라도 장군들이 망설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요새 누가 있소?" 1차대전 중 터키가 아르메니아인 100만명을 학살했다는 비난이 일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가 거의 없어 단죄 노력이 흐지부지됐던 사실을 거론한 것이다. 이웃 나라, 다른 민족에게 어떤 만행을 저지르든 나중에 오리발을 내밀면 된다는 얘기였다.

아소 부총리가 웬만한 세계사 지식을 가진 사람도 알지 못하는 바이마르 헌법 개정 과정을 언급한 것을 보면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은 잘못된 진단이다. 아소에게 부족한 것은 역사 지식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을 상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이라 해야 맞는다.

얼마 전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존경받고 있는 위대한 인물이다. 그점을 한·일 양국이 존중해야 한다"고 망언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이토가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고 한반도 침략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역사를 몰랐을 리 없다. 아베 총리에게도 문제는 역사 지식 부족이 아니라 그의 뇌에 이토 때문에 반세기 가까이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을 상상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역사를 똑바로 배우라는 요구만으로 이런 사람들을 개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국제사회가 경고하면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이웃 나라에 상처를 주는 행동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그들에게 남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 주말, 가족과 함께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 전시를 보다가 인간이면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 생각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이웃집 토토로' 원화들 앞에서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나선 언니, 퇴근하는 아빠를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자매를 화제 삼아 이야기꽃을 피운 뒤였다. 일본 만화영화 주인공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것은 미야자키 감독의 만화가 국적과 상관없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지향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지난달 '열풍'이란 잡지에 "아베는 생각이 모자라는 인간이다. 위안부는 확실히 사죄하고 제대로 배상해야 한다"는 말로 국제사회의 공감대를 상실한 아베의 역사관을 비판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젊은 날의 상처와 극복'이란 보편적 주제를 내세워 세계인의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가 올해 발표한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지금 한국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하루키는 등장인물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기억을 어딘가에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얼마 전 동아시안컵 축구 한·일전에서 우리 응원단이 내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플래카드 내용과 같은 취지다.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과학상은 우리 응원단을 향해 '한국인의 민도가 문제'라고 망언할 게 아니라, 일본 작가와 우리 응원단이 어째서 역사에 대해 같은 말을 했는지 따져봤어야 한다. 아베 총리와 아소 부총리도 마찬가지다.



김태훈 문화부차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04/20130804019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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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20. 00:03

지난 주말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6·25 정전을 기념하는 '전승절' 열병식이 열렸다. 군인들은 무릎을 굽히지 않고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독특한 걸음걸이로 행진했다. '교차 차기'다. 다리를 곧게 편 채 지상 60㎝까지 올렸다가 내려 땅바닥을 힘껏 때리면서 그 반동으로 다른 발을 들어 올리는 방식이다. 무더위 속에 하루 종일 도로 바닥을 차다 보면 내장이 뒤틀려 장파열이 일어나고 기절하는 군인도 생긴다. 북한군 출신 탈북자는 "멀쩡한 사람도 병신 돼 나오는 게 열병식"이라고 했다.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아리랑축전은 북한 청소년의 피눈물로 완성된다. 초·중·고생 2만명이 여섯 달 동안 학교도 안 가고 정교한 카드 섹션을 연습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똑같은 동작을 수천, 수만 번 반복한다. 한 명이라도 틀리면 가혹한 체벌을 당한다. 기계체조를 하는 아이들은 쌓던 인간 탑이 무너져 다치기 일쑤다. 공연 날엔 화장실에 갈 수 없어 하루 전부터 물을 못 마시게 한다. 공연 중에 소변이 마려우면 그 자리에서 봐야 한다. 그래서 카드 섹션장엔 지린내가 진동한다.


▶아리랑 축전에는 평양과 주변 지역 초·중·고생 가운데 돈 없고 '빽' 없는 아이들이 동원된다. 당 간부와 특권층 부모는 질병진단서나 뇌물로 아이를 빼돌린다. 국제인권단체는 아리랑축전을 대표적 아동 학대 사례로 꼽지만 북한은 체제 선전과 외화 벌이 수단으로 삼는다. 2005년에는 우리 방문단 7500명이 1100달러(1박 2일)~1500달러(2박 3일)씩 들여 공연을 관람했다. 2007년엔 노무현 대통령도 지켜봤다.


▶북한 주민들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대규모 행사에 동원된다. 작년 12월만 해도 김정일 사망 1주기와 애도 행사, 김정숙 탄생 95주년 공연, 김정은 최고사령관 추대 기념, 미사일 발사 축하 행사가 잇따라 열렸다. 올 2월 말 핵실험 성공 축하 행사에는 초·중·고생이 동원돼 거리 행진을 벌였다. 대학생들은 양복과 한복을 차려입고 저녁마다 광장 무도회에 나가야 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군중 동원의 뒷모습들이 전승절을 맞아 평양에 들어간 서방 취재진 카메라에 잡혔다. 그제 저녁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전승절 경축 야회(夜會)에 동원된 관람객들이 하품을 하거나 조는 사진이 외신을 타고 바깥세상에 공개됐다. 전승절 열병식에서 실신한 병사가 업혀 나오는 사진도 나왔다. 북한 형법은 '상급으로부터 받은 직무를 태만히 할 경우 2년 이하 노동단련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사진에 찍힌 주민과 군인이 무사할지 걱정스럽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30/20130730037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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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23:37

낯선 외국인이 중국인에게 가장 좋아하는 운동이 뭐냐고 물어보면 "탁구"라고 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재차 물어보면 "실은 축구"라며 말꼬리를 흐리곤 한다. "축구를 정말 좋아하지만, 중국 대표팀의 성적을 떠올리면 창피해서 (중국이 제일 잘하는) 탁구라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자신을 '치우미'(球迷·열성적 축구팬)라고 말한다. 지난달 초 멕시코를 방문했을 때는 2002년 중국 대표팀을 월드컵 본선으로 이끌었던 밀루티노비치 전 감독이 1986년 월드컵 때 멕시코 대표팀을 지휘했던 인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시 주석의 슬로건인 '중국의 꿈(中國夢)'에는 월드컵 우승의 꿈이 포함돼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중국 축구는 '시진핑호' 출범 직후 참담한 패배를 맛봤다. 지난달 15일 만만하게 봤던 태국에 1대5로 무릎을 꿇었다. 당시 태국은 23세 이하 대표팀이었다. 이후 스페인 출신인 카마초(58) 중국팀 감독이 전격 경질된 것은 중국 최고지도부의 '격노'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 카마초는 2002년 월드컵 8강전에서 스페인 사령탑으로 한국과 맞붙었던 노련한 감독이지만 중국 축구의 체질을 바꾸지는 못했다.

중국인은 스스로 축구를 못하는 이유를 다양하게 분석한다. 자신들 입으로 "도박을 좋아해서 승부조작이 빈번한데 실력이 늘겠느냐", "중국인의 개인주의적 성향과 팀워크가 중요한 축구는 궁합이 안 맞는다", "고액의 몸값을 받는 대표 선수들이 더는 노력을 안 한다"고 말한다. 뉴욕타임스는 2010년 "중국 공산당이 '풀뿌리 운동'인 축구의 저변 확대를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지역의 축구 클럽이 활성화하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이는 공산당의 중앙집권적 통제에 부담될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중국에선 20~30명만 모여도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된다.

거스 히딩크 전 한국 대표팀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선수와 취재진의 귀에 못이 박이도록 강조했던 말이 있다. "창조적(creative) 플레이"였다. 제발 옛날 감독이나 선배들이 주입식으로 가르쳤던 플레이의 틀을 깨고, 선수 자신이 경기장에서 생각해낸 플레이를 맘껏 펼치라는 얘기였다. 히딩크 감독이 유럽으로 떠나면서 박지성과 이영표를 데려간 것도 이들의 '창조적 플레이'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요즘 '창조'란 단어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화두로 떠올랐다. 중국 새 지도부는 성장률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경제 구조 개혁을 밀어붙이겠다는 태도다. 이 과정에서 '창조'와 '혁신'을 부쩍 강조하고 있다. 값싼 노동력으로 선진 제품을 베껴서 수출하는 성장 방식은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고 판단한다. 문제는 중국의 정치·경제·사회·축구 전반이 여전히 공산당 통제에 묶여 있다는 점이다. 창조와 혁신이 꽃을 피울 공간이 좁을 수밖에 없다. 중국 경제나 축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려면 중앙의 통제 고삐가 느슨해질 필요가 있다는 건 중국 지도부도 안다. 그러나 '혼란'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 때문에 그 고삐를 쉽게 늦추지 못하는 게 중국의 딜레마다.



안용현 베이징특파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28/201307280202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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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9. 19. 23:34

열두 살에 아버지에게 등을 떠밀려 중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났던 최치원(857 ~?)은 스물여덟 살이 되어 신라로 금의환향했다.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당(唐)이 그 영향권 아래 있던 나라들에서 모여든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빈공과(賓貢科)에 수석 합격한 뒤 당나라의 지방과 중앙 관리를 역임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던 그가 이 무렵 지녔던 의식을 알려면 귀국하면서 지은 '범해(泛海·바다에 배를 띄우다)'라는 시를 보면 된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 국가주석이 '괘석부창해 장풍만리통(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돛 달아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이라는 앞부분을 인용해 유명해진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다음에 나오는 '승사사한사 채약억진동(乘槎思漢使 採藥憶秦童·뗏목 탔던 한나라 사신이 생각나고 불사약 찾던 진나라 아이도 생각나네)'이라는 구절이다.

1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왜 최치원은 고국이 아니라 중국의 고사(故事)를 떠올렸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당시 그의 신분에 들어있다. 그는 신라에 파견되는 당나라 황제의 사신이었다. 또 어려서부터 중국에서 자란 그는 신라보다 당의 문화가 더 친숙했다. 학자들은 그의 귀국이 당초 일시적이었는데 후견인인 당나라 희종이 죽는 바람에 신라에 주저앉은 것으로 본다. 그는 귀국 이후 상당 기간 당의 관직명을 사용했고, 신라를 당 제국의 일부로 간주하는 '대당신라국(大唐新羅國)' '유당신라국(有唐新羅國)'이란 표현을 즐겨 문장에 썼다.

최치원은 동아시아가 19세기 말 서양 문명의 영향 아래 들어가기 전까지 유일한 표준이었던 중국 문명을 한국에 이식한 선구자였다. 그가 중국 문명의 상징인 공자를 모시는 우리의 문묘(文廟)에 한국 유학자로는 가장 먼저 들어갔다는 것은 후세 유학자들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치원은 또 관리로 일했던 중국의 지방에서 그를 기리는 행사가 열릴 정도로 중국인에게 사랑받는 한국인이다.

역사에 밝은 중국 지도부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최치원을 언급한 것이 '한·중의 오랜 유대'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동아시아의 문명 표준이 다시 중국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도 직시하고 훌륭한 조상에게서 배우라는 권유로 들린다.

'21세기의 최치원'을 부르는 중국의 손짓에 대한 호응은 이미 한국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좌파는 중국이 만들고 있는 '새로운 중화(中華) 질서'에 편입되자고 주장한다. 중국의 커지는 경제적 위력을 실감하는 우파는 '친중(親中)' '지중(知中)'을 역설하며 중국어 배우기에 여념이 없다. 한반도의 통일은 중국의 동의 없이 어렵고 미국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력은 점점 줄어든다며 통일 한국은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학자도 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을 어떻게 상대할지가 가장 큰 대외적 고민이었다. 겨우 한 세기 남짓 잊고 지냈던 중국 문제가 다시 우리 민족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음을 실감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하지만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진 국제 정세는 우리의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중국은 지금 과연 당나라 때처럼 동아시아의 문명 표준으로 떠오르고 있는가? 실리적 측면뿐 아니라 긴 역사적 관점에서도 대중(對中) 관계를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선민 선임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19/2013071903075.html



Posted by 겟업
2013. 9. 19. 23:33

올여름 한국 문화계에는 일본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선두엔 2명의 무라카미가 우뚝 서 있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와 팝아티스트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다. 『1Q84』 이후 3년 만에 돌아온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4주째 베스트셀러 1위다. 만화를 팝아트로 구현한 세계적 작가 다카시. 그의 전시회를 연 미술관엔 평소보다 3배의 관객이 몰렸다. 일본의 공습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정신병적 환각을 그려 유명해진 구사마 야요이(草間彌生),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전시회도 대성황이다. 이쯤 되면 문화계 한복판에서 ‘일류(日流)’가 소리 없이, 도도하게 흐른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그러나 희한하게도 일본 자체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쪼그라드는 느낌이다. ‘일본어능력시험(JLPT)’이라는 게 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일본판 토플이다. 한데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 수험생이 2년 전보다 30%나 줄었다. 중국이 좀 뜬다고 일본은 싹 무시하는 얄팍한 세태 같아 서글프기도 하다. 일본 소설, 일본 미술 한두 번 봤다고 일본을 다 안다고 착각해서일 수도 있다.

이런 일본에 대한 무시·무지 분위기는 오피니언 리더들에게도 퍼져 나가는 듯하다. 요즘 한·일 간 막후 채널이 끊겨 문제라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물론 중국의 부상으로 동북아 외교 중심이 동해에서 서해로 이동한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고 요즘처럼 한·일 간 먹통은 곤란하다.

적잖은 사학자는 현 상황이 임진왜란 후와 비슷하다고 한다. 전란 후 일본에서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는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원했다. 하나 난리 통에 2만~3만 명의 조선인이 일본에 끌려갔다.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십만 명의 양민이 학살됐다. 조선왕조가 더 못 참을 일은 왜군이 왕릉을 파헤쳤다는 거였다. 그러나 “일본과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고 울분을 토했던 광해군은 국교 재개의 용단을 내린다. 북쪽에서 발흥하는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해선 화해가 필요했던 것이다. ‘대국굴기(大國<5D1B>起)’를 외치며 급속히 중국이 부상하는 현 정세와 여러모로 닮았다.

요즘 한국은 중견국(middle power) 소리를 듣는다. 그럼에도 국력을 자원이나 땅 크기로 재는 옛 기준으로 보면 한국은 여전히 소국이다. 미·중·일·러 4대 강국에 싸여 옴짝달싹 못하는 나약한 존재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고의 틀을 달리해 보라. 보이는 게 변한다. 요즘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주목받는 ‘네트워크 이론(network theory)’은 발상의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이 이론은 ‘힘이란 다른 행위자들과의 관계에서 나온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정보나 교류의 노루목에서 위치만 잘 잡으면 힘깨나 쓸 수 있다는 논리다. 심지어 ‘위치 권력(positional power)’이란 개념도 나온다. 더욱 눈길이 가는 건 비우호적 국가 간에서 중개자(broker) 역할만 톡톡히 해도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대목이다. 작금의 동북아에서 한국이 평화 중개자(peace maker) 노릇을 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북·미 그리고 중·일 관계다.

이런 판에 한국이 일본을 왕따시키고 블랙홀 같은 중국의 품 안으로 뛰어드는 건 좋을 게 없다. 한쪽에 기울어 어찌 중견국에 어울리는 중개자가 되겠나.

지난번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과 중국의 지극한 환대로 한·중 관계에는 훈훈한 바람이 불고 있다. 반면 한·일 간에는 더없이 싸늘한 냉기가 돈다. 매년 2~3차례 열리던 한·일 정상회담은 박 대통령 취임 후 5개월이 지났는데도 영 무소식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 일본 총리와 7번 만났었다. 물론 양국 관계 악화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우경화 바람에 기인한 바 크다. 21일 참의원 선거 대승 이후 아베 정권은 우경화 페달을 더 힘차게 밟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일본을 싹 무시하는 전략이 좋은가. 아니면 정상회담이나 다른 묵직한 채널을 통해 강력한 반대의 뜻을 전하는 게 효과적인지는 따져 봐야 한다. 친구는 고를 수 있지만 이웃은 택할 수 없는 법이다.


남정호 중앙SUNDAY 국제선임기자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2130681&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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