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23:34

열두 살에 아버지에게 등을 떠밀려 중국으로 조기 유학을 떠났던 최치원(857 ~?)은 스물여덟 살이 되어 신라로 금의환향했다.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당(唐)이 그 영향권 아래 있던 나라들에서 모여든 외국인 유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빈공과(賓貢科)에 수석 합격한 뒤 당나라의 지방과 중앙 관리를 역임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던 그가 이 무렵 지녔던 의식을 알려면 귀국하면서 지은 '범해(泛海·바다에 배를 띄우다)'라는 시를 보면 된다.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 국가주석이 '괘석부창해 장풍만리통(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돛 달아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이라는 앞부분을 인용해 유명해진 이 시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다음에 나오는 '승사사한사 채약억진동(乘槎思漢使 採藥憶秦童·뗏목 탔던 한나라 사신이 생각나고 불사약 찾던 진나라 아이도 생각나네)'이라는 구절이다.

16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왜 최치원은 고국이 아니라 중국의 고사(故事)를 떠올렸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당시 그의 신분에 들어있다. 그는 신라에 파견되는 당나라 황제의 사신이었다. 또 어려서부터 중국에서 자란 그는 신라보다 당의 문화가 더 친숙했다. 학자들은 그의 귀국이 당초 일시적이었는데 후견인인 당나라 희종이 죽는 바람에 신라에 주저앉은 것으로 본다. 그는 귀국 이후 상당 기간 당의 관직명을 사용했고, 신라를 당 제국의 일부로 간주하는 '대당신라국(大唐新羅國)' '유당신라국(有唐新羅國)'이란 표현을 즐겨 문장에 썼다.

최치원은 동아시아가 19세기 말 서양 문명의 영향 아래 들어가기 전까지 유일한 표준이었던 중국 문명을 한국에 이식한 선구자였다. 그가 중국 문명의 상징인 공자를 모시는 우리의 문묘(文廟)에 한국 유학자로는 가장 먼저 들어갔다는 것은 후세 유학자들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치원은 또 관리로 일했던 중국의 지방에서 그를 기리는 행사가 열릴 정도로 중국인에게 사랑받는 한국인이다.

역사에 밝은 중국 지도부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시진핑 국가주석이 최치원을 언급한 것이 '한·중의 오랜 유대'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만 생각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동아시아의 문명 표준이 다시 중국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도 직시하고 훌륭한 조상에게서 배우라는 권유로 들린다.

'21세기의 최치원'을 부르는 중국의 손짓에 대한 호응은 이미 한국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미국에 대한 거부감이 강한 좌파는 중국이 만들고 있는 '새로운 중화(中華) 질서'에 편입되자고 주장한다. 중국의 커지는 경제적 위력을 실감하는 우파는 '친중(親中)' '지중(知中)'을 역설하며 중국어 배우기에 여념이 없다. 한반도의 통일은 중국의 동의 없이 어렵고 미국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력은 점점 줄어든다며 통일 한국은 중국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학자도 늘고 있다.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 동안 중국을 어떻게 상대할지가 가장 큰 대외적 고민이었다. 겨우 한 세기 남짓 잊고 지냈던 중국 문제가 다시 우리 민족의 삶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음을 실감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하지만 최치원이 살았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진 국제 정세는 우리의 선택을 어렵게 만든다. 중국은 지금 과연 당나라 때처럼 동아시아의 문명 표준으로 떠오르고 있는가? 실리적 측면뿐 아니라 긴 역사적 관점에서도 대중(對中) 관계를 본격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이다.



이선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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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