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22:54

6월 27일 열릴 한·중 정상회담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한반도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다. 박근혜·시진핑 회담은 김정은의 방중을 교섭했을 북한 특사 최룡해의 중국 방문과 갑작스레 결렬된 남북당국회담에 이어 한국·북한·중국 사이에 전개되어 온 국가 대(大)전략 게임의 중요한 한 수(手)다. 이 시점에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역사를 긴 호흡으로 차분하게 보는 태도다. 남북당국회담 개최 여부에 호들갑스럽게 반응하는 것은 개성공단 입주 업체와 이산가족들을 포함해 그 누구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대북 행보의 첫 단추를 냉철하게 끼우는 중이다.

한반도 그레이트 게임은 남북 외에 미국과 중국을 비롯해 일본·러시아·EU·UN까지 포함하지만 핵심 중 핵심은 한반도와 중국의 관계다. 극단적 가정이긴 해도 미국이 한반도에서 손을 떼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인 데 비해 지정학적 이유에서라도 중국과 한반도의 관계를 단절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화제국의 존재는 한반도 주민에게 운명과도 같다. 중국적 세계 질서인 조공(朝貢) 체제의 구성원이었던 2000년 한반도 역사가 그걸 웅변한다.

20세기에서 21세기에 걸쳐 70년 가까이 진행되어 온 현대 한반도 그레이트 게임의 본질은 남북 '이국(二國) 통일의 정치학'이다. 우리 역사에서 이는 결코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장장 700여년이란 세월이 걸려 7세기 후반에 신라가 이룬 '삼국 통일의 정치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삼국 통일 과정에서 신라의 노력과 함께 중화제국이 결정적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史實)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않는 자는 역사에 보복당한다.

당 태종 이세민(599~649)이 돌궐의 위협을 제거한 640년대 이후 한반도 삼국 정립 상황에 본격적으로 개입한 중화제국은 삼국의 조공 사절들에게 '서로 평화롭게 지낼 것'을 주문한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피격 같은 북한의 도발에 대해 '유관국들의 자제'를 촉구한 현대 중국과 판박이처럼 닮았다. 그러나 중원의 통일 왕조인 수와 당은 고구려가 중국과 전투를 거듭하는 와중에 조공을 계속했음에도 중화제국의 안보를 위협한다고 보았고,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북핵이 중화제국의 국익을 심각하게 침해한다고 중국이 판단할 때에만 남북통일의 정치 동학(動學)이 시작될 수 있으며 자신의 안보에 위협이 될 통일 한반도를 중국은 절대 용인치 않을 것이다.

대륙의 정세를 정확히 읽고 군사력과 외교력을 결합해 고구려의 전성기를 연 장수왕에 비해 중원의 세력 판도를 오독한 연개소문은 선군 정책으로 국력을 소모해 멸망의 길을 간다. 한강 유역과 비옥한 호남을 차지해 삼국 경쟁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던 백제는 중국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그 노력에는 삼국사기가 기록한 대로 고구려와 백제의 연이은 침공에 맞서 '북쪽을 치고 서쪽을 막느라' 영일이 없던 신라의 절박감이 결여되어 있었다. 결국 신라의 삼국 통일을 가능케 한 것은 생사를 건 신라의 부국강병책과 중화제국의 의도를 꿰뚫은 나당 동맹의 외교력이었다. 이처럼 21세기에도 한반도 그레이트 게임 골격에는 변화가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반도 그레이트 게임에 미국이 부가되었지만 중국의 사활적 중요성은 줄지 않는다. G2 미국과 중국이 북핵을 미·중 제국의 안보에 대한 위협이라고 판정한 오바마·시진핑 정상회담은 남북통일의 정치학이 개시되었음을 뜻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그 흐름을 본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 경제 교류와 외교 동맹에 기초한 한·중 우호 관계가 한·중 군사 동맹의 가능성까지 타진할 때 한반도 판세가 일변할 것이다. 북한의 '핵 보검'은 아무것도 벨 수 없는 녹슨 칼이 된다. 그때에만 북한의 진정한 변화가 가능할 터이다.

중국이란 존재는 한반도의 운명이다. 하지만 중국의 대국굴기에도 팍스 아메리카나를 대체할 팍스 시니카 시대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일취월장하면서 강력한 국가를 자랑하는 중국이지만 진정한 의미의 '법치주의와 책임 정부'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대한민국은 강한 국가와 법치주의, 책임 정부를 시민의 힘으로 결합해 선진국으로 약진하는 중이다. 소프트 파워를 갖춘 매력(魅力) 국가로서 중강국(中强國)의 길을 힘차게 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통일신라와 당처럼 한국과 중국도 한반도 그레이트 게임의 공동 승자가 될 수 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13/2013061304294.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