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3. 6. 14:11

독일은 전쟁 범죄를 계속 속죄하는데 일본은 왜 정반대의 길로 갈까. ‘속죄의 도시’ 베를린에서 동양인이든 서양인이든, 이렇게 묻는 방문객들이 적지 않았다.

답답했다. 그래서 엉뚱한 공상도 해봤다. 만일 일본 도쿄 시내 국회의사당 앞이나 일왕의 거처 앞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로하는 ‘소녀상’이 세워지고, 난징대학살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관이 설립된다면? 야스쿠니신사 같은 1급 전범이 묻혀 있는 시설에 참배하는 사람은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된다면? 한반도와 중국, 동아시아 곳곳에서 학도병 노무자 위안부 등으로 끌려간 뒤 각종 학대와 인체실험 등으로 목숨을 잃었던 피해자들이 살았던 집 앞에 그들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이 생긴다면?

일본이 그렇게 할 가능성은 지금으로선 거의 제로다. 반면 독일은 주변국과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 프로그램을 행동으로 계속 보여주고 있다. 그 차이는 어디서 빚어지는 걸까.

독일은 정치 지도자부터 뼈아픈 반성으로 출발했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의 제2차 세계대전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 앞에선 57세 독일 정치인이 헌화 도중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양복바지는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 떨어지는 빗물에 젖어 들어갔다. 당시 나치의 범죄를 무릎 꿇고 사죄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나는 역사의 무게에 눌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행동을 했다”고 말했다. 세계 언론은 “그날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평가했다. 

2009년 9월 1일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발발 70주년 기념식에서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독일 정상으로서는 두 번째로 무릎을 꿇었다. 이후로도 메르켈 총리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다하우 강제수용소 등을 찾아 “나치 범죄의 책임은 영원하다”며 여러 차례 사과했다. 

독일은 끊임없는 사죄와 피해보상금 지급은 물론이고 영토 반환과 공통 역사교과서 편찬을 통해 주변국과 화해를 시도했다.

반면 일본은 홀로코스트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며 독일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전후처리 과정에서 주변국을 침략한 ‘가해자’ 의식보다는, 자신들이 태평양전쟁에서 원폭 피해를 본 ‘피해자’ 의식을 더욱 키워왔다. 독일 전범을 다룬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나치의 ‘반(反)인륜 범죄’가 단죄된 반면 일본의 도쿄 전범재판에서는 서방 연합국에 대한 전쟁 행위와 관련된 범죄만 재판에 넘겨졌을 뿐 식민지배 과거사, 세균전, 일본군 위안부 등 반인륜 범죄는 처벌 대상에서 빠졌다. 당시에는 연합국의 포고에 따른 조치라고 합리화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최근 진행되는 강제 노역자에 대한 보상 문제에서 독일과 일본은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독일은 전쟁 학살범죄 피해자들뿐 아니라 외국인 강제 노역자들에 대한 보상까지 하고 있다. 독일도 당초에는 국가가 주도한 홀로코스트 범죄에 대한 배상에는 적극적이었지만, 일반 기업과 관련된 외국인 강제노역에 대한 보상은 거부해왔다. 나치의 불법 행위란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이유나 세계관에서 비롯된 박해’에만 해당하며, 민간 기업에서의 강제노역은 ‘이미 국가 간 배상으로 마무리됐다’는 논리였다. 지금 일본이 내세우는 주장과 비슷했다. 

그랬던 독일 정부와 기업이 2000년부터 총 100억 마르크에 이르는 기금을 조성해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EVZ)을 설립해 외국인 강제노역 피해자 170만 명에게 보상을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6일 오후 베를린에 있는 EVZ 사무실을 찾아 마르틴 살름 이사장에게 재단 설립의 배경을 물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나치의 강제노동 피해자들이 임금을 받기 위한 집단 손해배상 소송이 잇따라 제기됐습니다. 소송 결과에 따라 천문학적인 배상액을 지불할 수도 있는 데다 수출에 주력하는 독일 기업들의 이미지가 크게 나빠질 수가 있었어요. 또한 피해자들이 고령이어서 독일 기업과 정부가 ‘자연 사망 해결 방법’에 기대는 것이 아니냐는 세계적 비난 여론에 휩싸였습니다.”

이런 압력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외국인 노동력을 활용했던 다임러크라이슬러-벤츠 지멘스 폴크스바겐 바이엘 등 대기업들이 모여 기금 마련을 논의했다. 결국 독일의 6000개 회사들이 50억 마르크, 독일 정부가 50억 마르크를 출연해 총 100억 마르크(약 8조3800억 원)의 기금을 마련해 재단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2007년까지 폴란드 헝가리 우크라이나 러시아 등지에서 동원했던 강제노동 피해자 166만 명에게 44억 유로(약 6조5843억 원)를 보상했다. 

전쟁 당시 독일군 아래에서 일한 외국인 강제노역자는 1200만∼1500만 명으로 추산됐다. 당시 독일 전체 경제활동 인구의 25%를 차지했다. 이들은 군수산업뿐 아니라 농업 숙박업 공공기관, 심지어 교회나 가정에서 일하기도 했다.

대기업들이 주로 출연했던 기금은 금방 바닥났다. 그러자 교회에서도 돈을 내고, 전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중소기업들도 독일 기업으로서 책임과 연대의식으로 뭉쳐 모금에 참여했다.

살름 이사장은 “유대인의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단체도 많고, 기관도 많기 때문에 많은 관심과 보상이 집중된 반면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등 한목소리를 내기 힘든 소외된 이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재단이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일본 정부와 기업은 1965년 한일 수교협정을 근거로 모든 배상이 끝났다는 태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에 한국인을 강제 징용했던 신일철주금(옛 일본제철)은 19일 강제징용 피해자 4명에게 4억 원을 배상하라는 서울고법의 판결에 대해 “어쩔 수 없다면 배상하겠다”고 밝히고 있지만, 일본 정부와 우익 단체들은 ‘나쁜 선례’를 남길 것이라며 경계한다.

독일의 경우에도 국가 간 배상으로 개인 보상이 끝났다고 주장했었다. 하지만 법을 좋아하는 나라도, 법률 규정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생각을 버렸다.

“유럽통합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독일이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라는 식의 독불장군처럼 더이상 살아갈 수는 없어요. 독일 입장에선 동유럽이라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싶은데 주변국의 압력을 무시할 수가 없는 거죠. 단기간에 금전적 손해를 보더라도 과거사 해결을 위한 정치적 경제적인 해법을 찾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득이 됩니다.”(살름 이사장) 

일본이 1955∼1976년 아시아 각국에 지불한 배상 액수는 총 6200억 엔(약 7조1154억 원). 한일 양국은 1965년 체결된 수교협정에서 총 5억 달러(5592억 원·이 중 2억 달러는 유상지원)로 개인 및 국가 보상을 일괄 타결했다. 이를 근거로 일본 정부는 민간 차원의 개인보상권 소송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원칙만을 되풀이한다. 

반면 독일의 과거사 정리는 일본과 비교해 가히 경이롭다고 할 만하다. 전후 독일은 1953년부터 피해자보상법 몰수재산반환법 보상연금법 나치박해자보상법 등을 만들어 선제적인 대응책을 내놓았다. 독일이 만든 법에서 개인보상에 적용되는 피해자의 범주는 매우 다양했다. 인종학살의 희생자였던 유대인을 비롯해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제거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안락사 프로그램’ 희생자, 강제불임 희생자, 생체실험 희생자, 전몰 군인, 상이용사, 군법재판소 희생자 등 국내외를 망라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독일이 나치 희생자에게 지불한 보상액은 약 1300억 마르크(약 80조 원)에 이른다. 보상금 지급방식은 일시불과 연금 형태로 나뉘었으며, 의료 서비스가 제공되고 생활재건자금도 융자됐다.

독일은 패전 직후 영토를 반환했다. 독일 정부는 폴란드에 오데르나이세 동쪽 지역 영토 11만 km²를 떼어줬고, 1800년대부터 독일-프랑스 긴장의 진앙이었던 알자스로렌 지방은 완전히 프랑스의 손에 넘겼다. 독일은 나치에 동조한 전쟁 범죄자들을 단죄하는 데 공소시효를 두지 않고 있다. 현재 베를린 시 등 독일 전역에는 사이먼 비젠탈 센터의 나치전범 현상수배 캠페인 포스터가 2000장이나 붙어 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3년간의 연구 끝에 공통 역사교과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독일과 일본이 이처럼 극명하게 다른 길을 걷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두 민족의 도덕성 차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본의 사학자 모치다 유키오는 전후 두 나라가 겪은 점령체제의 차이에서 원인을 찾는다. 독일은 4개 연합국에 의해 분할 통치된 데 비해 일본은 미국의 단독 점령 아래 있었다. 연합국은 독일에 처음부터 경쟁적으로 전쟁 범죄를 철저히 추궁한 반면에 일본에서는 미국이 동서냉전 시기 일본을 우방으로 만들기 위해 일왕의 전쟁 책임과 식민지 지배 등에 대한 철저한 추궁을 피해갈 조건을 만들어주었다는 해석이 나온다. 

‘테러의 지정학’ 전시관 총책임자 토머스 루츠 박사는 전후 경제성장 과정의 차이점을 지적했다. 그는 “독일은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 과정에서 유럽 지역 내에서의 교역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끊임없는 사죄와 보상 노력이 필요했지만, 일본은 피해를 끼친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보다는 서방 강대국인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훨씬 중요시함으로써 주변국에 대한 배려가 소홀했던 것 같다”고 분석했다. 

국제사회와 전범 피해국의 압력의 차이도 주요한 요인이다. 유대인 연합회는 미국, 서방 연합국, 이스라엘 등을 내세워 과거청산에 대한 엄청난 압력을 행사해온 데 비해 한국 등 동아시아의 피해 국가들은 전후 한동안 냉전극복, 민주화, 경제성장 과제에 몰두하느라 제대로 된 과거청산 요구를 못했다. 

우베 노이베르거 나치 희생자 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기자에게 “독일의 과거사 청산에서는 유대인 연합회를 비롯해 국제사회의 강력하고 끈질긴 압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며 “과거사 청산에 대한 일본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데 주변국들의 압력과 지식인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과 중국 정부, 일본 내 양심적인 지식인들에게 들려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베를린=전승훈 특파원


http://news.donga.com/3/all/20130824/571979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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