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바이마르 헌법을 아무도 모르게 바꾼 그 수법을 배우면 어떤가"라는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의 망언을 접하고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할 때 했던 말을 떠올렸다. 1939년 8월 22일 히틀러는 독일군 사령관들을 모아놓고 "사람들을 주저없이 많이 죽이라"고 했다. 혹시라도 장군들이 망설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요새 누가 있소?" 1차대전 중 터키가 아르메니아인 100만명을 학살했다는 비난이 일었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가 거의 없어 단죄 노력이 흐지부지됐던 사실을 거론한 것이다. 이웃 나라, 다른 민족에게 어떤 만행을 저지르든 나중에 오리발을 내밀면 된다는 얘기였다.
아소 부총리가 웬만한 세계사 지식을 가진 사람도 알지 못하는 바이마르 헌법 개정 과정을 언급한 것을 보면 '일본 정치인의 망언이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됐다'는 지적은 잘못된 진단이다. 아소에게 부족한 것은 역사 지식이 아니라 피해자의 고통을 상상하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이라 해야 맞는다.
얼마 전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존경받고 있는 위대한 인물이다. 그점을 한·일 양국이 존중해야 한다"고 망언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이토가 초대 조선통감을 지냈고 한반도 침략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역사를 몰랐을 리 없다. 아베 총리에게도 문제는 역사 지식 부족이 아니라 그의 뇌에 이토 때문에 반세기 가까이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을 상상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역사를 똑바로 배우라는 요구만으로 이런 사람들을 개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국제사회가 경고하면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이웃 나라에 상처를 주는 행동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야 한다. 그들에게 남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상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난 주말, 가족과 함께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 전시를 보다가 인간이면 누구나 공감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해 생각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이웃집 토토로' 원화들 앞에서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나선 언니, 퇴근하는 아빠를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자매를 화제 삼아 이야기꽃을 피운 뒤였다. 일본 만화영화 주인공들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그것은 미야자키 감독의 만화가 국적과 상관없이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를 지향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지난달 '열풍'이란 잡지에 "아베는 생각이 모자라는 인간이다. 위안부는 확실히 사죄하고 제대로 배상해야 한다"는 말로 국제사회의 공감대를 상실한 아베의 역사관을 비판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젊은 날의 상처와 극복'이란 보편적 주제를 내세워 세계인의 공감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가 올해 발표한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지금 한국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달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하루키는 등장인물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기억을 어딘가에 감추었다 해도,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된 역사를 지울 수는 없어." 얼마 전 동아시안컵 축구 한·일전에서 우리 응원단이 내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플래카드 내용과 같은 취지다. 시모무라 하쿠분 문부과학상은 우리 응원단을 향해 '한국인의 민도가 문제'라고 망언할 게 아니라, 일본 작가와 우리 응원단이 어째서 역사에 대해 같은 말을 했는지 따져봤어야 한다. 아베 총리와 아소 부총리도 마찬가지다.
김태훈 문화부차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04/20130804019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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