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관람자가 필요하다’는 말은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디드로가 편찬한 백과사전에서 ‘비평’을 정의한 장프랑수아 마몽텔(1723~1799)은 이 말을 통해 예술의 조건을 적시했다. 작품이 예술이 되려면 관람자 자신이 의미를 만드는 협업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술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인 송상희의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는 세 개의 스크린에 펼쳐진 영상이다. 지역마다 변형돼 전해 온 ‘아기장수’ 설화를 얼개로 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기는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염원하던 영웅이 될 운명이다. 하지만 비천한 신분의 영웅은 곧 역적이 되는 법. 살려두면 가족은 물론 온 마을이 관군에게 몰살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부부는 돌을 굴려 아이를 죽인다. 주인공 아기장수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지만 마을 사람들과 권력의 손에 재차 죽임을 당한다.
1970년대 말 희곡으로 만들어진 설화는 당시 군부정권의 폭력성과 민중의 무력감을 이야기에 빗대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야기는 전 지구적 맥락으로 확장되어 민족 간 전쟁과 이념의 차이로 희생된 수많은 약자를 대변한다.
![송상희 영상작품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의 한 장면. 역사와 설화 속 희생자들 얘기다. [사진 송상희]](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09/30/6913f529-358e-41b9-bce5-a7abf3a527fc.jpg)
송상희 영상작품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의 한 장면. 역사와 설화 속 희생자들 얘기다. [사진 송상희]
카메라는 상처를 대하듯 땅을 어루만진다. 바이마르 유대인 강제수용소, 홋카이도의 폐탄광, 노근리 쌍굴다리, 보도연맹 학살지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들짐승이 다닌다.
‘우리는 같은 사람을 쫓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이 아닌가!’ 인종 청소, 강제징용과 양민 학살의 희생자는 작품 속에서 기형이 된 물고기와 곤충의 입을 빌려 인간의 잔혹성을 꾸짖는다.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아기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불편한 심기의 관람자가 선뜻 자리를 뜰 수 없는 이유는 아기장수를 죽이자고 공모하는 이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죄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권력에 거스르지 않기 위해 타인의 고통에 귀를 막고 공동체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폭력을 합리화하고 방관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곧 추석이다. 많은 이가 분주한 삶의 자리를 떠나서 나고 자란 고향과 조상이 묻힌 땅을 밟을 것이다. 죽은 자를 거두고 생명을 품어 온 땅은 차별을 두지 않는다. 예술이 전달하는 설화와 역사의 교훈이 무거운 것은 아직도 평화와 포용이 요원한 현실의 무게 때문이다.
이지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
http://news.joins.com/article/21985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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