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와 함께 비벼버린 냉면 사진에 8만 오싫사(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가 통곡했다. 오이 냄새만 맡아도 피부 말단의 DNA 세포부터 쭈뼛 서버리는 것 같다는 이들은 오싫사를 ‘살면서 가장 소속감을 느낀 집단’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선생님이 억지로 입에 넣은 오이를 토해버린 트라우마가 자신만의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52소수자(오이라는 글자에서도 오이 냄새가 난단다)들은 뭉친 지 며칠 사이에 많은 것을 성취했다. 한 분식 체인점이 큐컴버-프리 김밥을 출시했고 언론은 OE혐오자들이 쓴맛을 다른 사람보다 1000배 더 느끼는 유전자를 가졌단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정당성까지 확보한 셈이다. 이쯤 되면 과거 오이 싫어하는 친구를 놀리려 친구 핸드폰에 오이 비누를 문댔던 나의 장난이 씻을 수 없는 만행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들 최대의 적은 오이가 아닌 오이 패권주의자다. “오이 빼주세요”란 말에 “오이 없이 무슨 냉면 맛이야”라며 덤퍽 오이를 올리는 오이 탈레반을 의미하는 거다. 오싫사 회원들은 지난 며칠간 오이 사진과 함께 “오이는 오이시이(맛있다의 일본말)” “오이미역냉국 한 사발 하세요” 등의 메시지 테러까지 당했다. 편식은 나쁜 것이란 뿌리 깊은 인식, 똑같이 안 먹으면 실눈 뜨는 전체주의적 문화. 거기서 오는 오득권자들의 만행은 익숙하다며 한숨을 내쉰다.
중국 관광객 대신 중동 관광객을 대거 유치하겠단 계획에 의구심이 드는 것도 곳곳의 음식 패권주의 때문이다. 식도락을 즐기기 어려운데 관광객이 ‘유치’될까. 중동 사람들이 대장금을 재미있게 봤다 해도 그렇다. 할랄을 꼼꼼히 따지지 않는 이들도 한국 식당에선 믿고 먹기 어려운 경우가 많단다. 한국 대학에 다니는 중동 석사생이 “돼지를 아예 안 먹으면 돼지고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은 뭐가 돼”란 말을 자주 듣는다며 하소연한 글이 외국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일도 있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는 우문현답에도 돼지 권유는 끊이지 않았단다. 공영방송에서 시어머니와 남편이 무슬림 며느리를 속여 돼지고기를 먹이는 에피소드가 나온 것도 불과 지난해다. 좋아하는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입장 바꿔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 ‘고수 안 넣으면 동남아 음식이 아니다’며 고수를 고수하는 식당이 있다면 실격이다.
다행인 건 우리나라가 학습이 빠른 나라란 거다. 10년 사이에 취향 존중 문화가 확산된 것만 봐도 그렇다. 10년 전엔 욕이었던 ‘오타쿠’ ‘빠순이’도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로 시선이 많이 중화됐다. 취향을 평가하려 드는 이에게 ‘취향 존중 부탁드립니다’는 매너가 됐다. 이제 식문화 차례다. 탕수육 찍먹파가 부어 먹음 당하지 않는 세상, 생선회에 레몬을 각자 뿌려 먹을 수 있는 밥상 민주화를 원한다.
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
http://news.joins.com/article/2144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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