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있는삶/사설 노트'에 해당되는 글 715건

  1. 2018.01.06 [아침 편지] 오래 사는 것이 미안하지 않은 나라를
  2. 2018.01.06 [김명환의 시간여행] [68] 어린이날마다 초대형 매스게임 벌여… 수천 아동, 대통령 앞 재롱떠느라 진땀
  3. 2018.01.06 [시선 2035] 이제는 밥상 민주화다
  4. 2018.01.06 [직장인을 위한 김호의 ‘생존의 방식’]팔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5. 2018.01.06 [이정모 칼럼] ‘총 균 쇠’, 화물숭배와 500만 명
  6. 2018.01.06 [기고]윤리적 귀족
  7. 2018.01.06 [기자칼럼]‘4대강의 오류’
  8. 2018.01.06 [오철우의 과학의 숲] 아프리카 산족이 연구윤리 요구한 까닭
  9. 2018.01.06 [삶의 향기] 악에 대하여
  10. 2018.01.06 [중앙시평] 유아기 외국어 교육 강요는 아동학대다
  11. 2018.01.06 [박권일, 다이내믹 도넛] 혼자 존엄할 수는 없다
  12. 2018.01.06 [36.5]당신은 왜 그 월급을 받는가
  13. 2015.03.09 [동아광장/김인규]청춘이여, 인문학 힐링 전도사에게 속지 마라
  14. 2015.03.08 [The New York Times] 파리 사람 특유의 넉살 좋은 위트가 테러당했다
  15. 2015.03.08 [36.5˚] "고객님, 댁은 왕이 아니십니다"
  16. 2015.03.07 [특파원 칼럼/전승훈]혜성 탐사와 대성당의 정신
  17. 2015.03.07 [세상읽기] 중국, '우산혁명'으로 분열될까
  18. 2015.03.07 [중앙시평] 규제 혁파만큼이나 중요한 시민교육
  19. 2015.03.07 [이철호의 시시각각] 오히려 아모레 설화수가 창조경제!
  20. 2015.03.07 [중앙시평] 지구촌 고난 치유에 기여하려면
2018. 1. 6. 17:05
서울의 민간 재가복지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시행된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에 따라 치매나 뇌혈관 문제 등 노인성 질환을 앓는 어르신 댁을 요양보호사들이 찾아가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저도 20명가량을 담당하는데, 매달 한 번 댁으로 가서 신체, 질병, 인지, 영양, 의사소통 상태를 체크하고 보호자와 요양보호사들의 의견을 듣습니다. 어르신 20여명 중 대부분이 할머니입니다.

서울에 사는 87세 할머니는 1남 4녀가 있는데 서울에만 1남 2녀가 삽니다. 하지만 셋 모두 형편이 어려워 줄곧 모실 처지가 아니어서 한 달씩 번갈아가며 모십니다. 신림동 작은딸네서 한 달, 그 부근 아들네서 한 달, 사당동 큰딸네에서 한 달, 이런 식입니다. 난청이 심해 큰 소리로 말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이가 없는데 틀니를 못해 늘 소화 장애에 시달립니다. 작년 가을 화장실에서 넘어진 후로는 걷지도 못합니다. 치매와 시공간 감지력 저하로 밤과 낮 구분이 안 돼 한밤에 기어가 이 방 저 방 문을 여니 자식과 손주들 모두 힘들어합니다. 제가 가면 "왜 아직까지 사는지 모르겠다"며 "하지만 병원(요양원)은 안 간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요양원에 보내질지 모른다는, 즉 집에서 내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겁니다. 요양원 입소는 당사자들이 극력 꺼리기도 하지만 국공립은 대기자가 많아 '하늘의 별 따기'이고 민간 역시 자리가 비어야 합니다. 대상 어르신의 수는 급격히 늘어나는데 시설 자체가 크게 부족합니다.

/조선일보 DB
평택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하는 곳에 홀로 사는 90세 할머니가 계십니다. 너무 외져서 요양보호사들도 맡기를 꺼립니다. 지하 창고를 개조해 환기가 잘 안 되는 악취 심한 방에 삽니다. 시력이 나쁜데도 불을 켜면 눈물이 나서 사실상 암흑 속에서 지내다시피 합니다. 제가 돌아갈 때마다 "왜 벌써 가려느냐"며 붙잡으십니다. 저는 화재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 늘 불안합니다. 이분도 자녀는 많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고, 서울·수도권에 사는 자녀는 다들 살기가 어려워 함께 지낼 여건이 아닙니다. 구리에서 혼자 사는 90세 할머니는 생활 형편은 훨씬 좋습니다. 하지만 그분도 저만 보면 "나보다 나이 먹은 사람도 있느냐"며 물어보시는데 제가 "그럼요. 많이 계셔요"라고 답해야 안심하십니다.

어르신들이 왜 오래 사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나. 왜 자녀들 힘들게 만든다며 죄의식을 갖고, 내쳐질까 봐 두려워해야 하나. 이분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의 내일을 미리 보는 것 같아 서글프고 불안해집니다.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릅니다. 그리고 노인 빈곤율은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라고 합니다. 한편 불황과 청년 실업 문제는 개선되지 않으니 사회가 어르신을 모실 능력을 점점 더 상실해가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우리의 부모인 어르신을 모시는 문제는 이제 가족만이 감당할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끼곤 합니다. 어르신이 오래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나라, 자녀에게 피해를 준다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지요. 이제부터라도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워 실천합시다.



김지은 굿모닝복지센터 책임연구원·사회복지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4/20170504026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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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7:02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

1923년 5월 1일이 '어린이날'로 처음 제정됐을 때 어린이 운동가들이 외친 구호다. 아이들에게 뭘 해주자는 게 아니라 뭘 하지 말자는 부작위의 호소였다. 뒤집어보면, 90여 년 전 우리 아이들 처지가 얼마나 고달팠는지 알 수 있다. 제1회 어린이날에 아이들의 가장 간절한 희망사항 10가지를 담아 배포한, '어른에게 드리는 선전문' 속에는 '이발이나 목욕을 때맞춰 해주세요'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해주세요' '산보와 소풍을 가끔 시켜주세요' 같은 것도 있었다(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자). 이런 외침도 어린이날만 지나면 잠잠해졌다.


1956년 어린이날 행사 때 땡볕 아래서 매스게임을 하는 어린이들(왼쪽 사진·조선일보 1956년 5월 6일 자)과 1963년 어린이날 나들이 나왔다가 미아가 되어 미아보호소에서 새우잠을 자는 어린이들(동아일보 1963년 5월 6일 자).
1956년 어린이날 행사 때 땡볕 아래서 매스게임을 하는 어린이들(왼쪽 사진·조선일보 1956년 5월 6일 자)과 1963년 어린이날 나들이 나왔다가 미아가 되어 미아보호소에서 새우잠을 자는 어린이들(동아일보 1963년 5월 6일 자).


















초창기 어린이날이란 잔칫날이라기보다는 '어린이날이란 무엇인가'를 어른들에게 알리는 날이었다. 전국 거리를 행진하면서 전단지 등을 나눠주는 일을 어린이들이 했다. 1925년 행사 땐 어린이 30여 만명이 길거리에 나갔다. 1933년 어린이날에 소년단 소속 어린이들은 새벽 6시부터 어린이날을 고하는 새벽나팔을 분 뒤, 선전지 배포에 총동원됐다. 평소보다 몇 배 고단한 하루였다.

광복 이후엔 어린이날 행사들이 볼거리 위주로 크게 열렸다. 이승만 정권 시절 어린이날마다 서울운동장(옛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대규모 행사 역시 아이들을 힘들게 했다. 초대형 매스게임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1955년의 경우 초등학생 5000여 명은 몇날 며칠을 수업도 줄여가며 연습한 '합동체조'를 이 대통령과 고관들 앞에서 선보였다. 얻어맞아 가며 연습했다는 말도 있었다. 이날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할 어린이들이 땡볕 쏟아지는 운동장에서 진땀을 뺐다. 보다 못한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아이들이) 알아듣기도 힘든 축사 강연을 들었으며 무의미한 고행을 했다… 어린이날이 아니라 아동 곤욕의 날"이라며 당국자들을 맹비난했다(조선일보 1955년 5월 10일자). 그러나 이런 지적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1956년에도 어린이 5000명이 합동무용에 동원됐다. 공연 도중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기념식이 중단됐다. 운동장에서 고생하던 어린이들은 아마도 좋아했을 것이다. 아동문학가 윤석중(새싹회 대표)은 "어린이날엔 어린이들 재롱을 어른들이 구경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알맞은 얘기랑 노래랑 춤이랑 연극이랑 들려주고 보여주는 잔치를 베풀어 줘야만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어린이날 행사에서 어린이들의 고생이 줄어들기는 했다. 하지만 어린이들의 매스게임 동원은 1980년대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이날이면 나들이 나왔다가 부모를 잃어버린 미아도 1000명 안팎씩 발생했다. 1963년 어린이날엔 미아 105명이 그날 밤까지도 부모를 못 만나 적십자 미아보호소에서 새우잠을 잤다. 

고달픈 어린이날의 과거는 역사 속으로 흘러갔고, 오늘날  어린이날이면 많은 아이가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도 지난주 보도에 따르면 세계 16개국 12세 아이들의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가 최하위였다고 한다. 

특히 '외모에 대한 불만'이 12세들의 행복도를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외모 중시 풍토가 아이들 행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방정환 선생님이 이런 사실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2/20170502030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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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6:54

오이와 함께 비벼버린 냉면 사진에 8만 오싫사(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가 통곡했다. 오이 냄새만 맡아도 피부 말단의 DNA 세포부터 쭈뼛 서버리는 것 같다는 이들은 오싫사를 ‘살면서 가장 소속감을 느낀 집단’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선생님이 억지로 입에 넣은 오이를 토해버린 트라우마가 자신만의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52소수자(오이라는 글자에서도 오이 냄새가 난단다)들은 뭉친 지 며칠 사이에 많은 것을 성취했다. 한 분식 체인점이 큐컴버-프리 김밥을 출시했고 언론은 OE혐오자들이 쓴맛을 다른 사람보다 1000배 더 느끼는 유전자를 가졌단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정당성까지 확보한 셈이다. 이쯤 되면 과거 오이 싫어하는 친구를 놀리려 친구 핸드폰에 오이 비누를 문댔던 나의 장난이 씻을 수 없는 만행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들 최대의 적은 오이가 아닌 오이 패권주의자다. “오이 빼주세요”란 말에 “오이 없이 무슨 냉면 맛이야”라며 덤퍽 오이를 올리는 오이 탈레반을 의미하는 거다. 오싫사 회원들은 지난 며칠간 오이 사진과 함께 “오이는 오이시이(맛있다의 일본말)” “오이미역냉국 한 사발 하세요” 등의 메시지 테러까지 당했다. 편식은 나쁜 것이란 뿌리 깊은 인식, 똑같이 안 먹으면 실눈 뜨는 전체주의적 문화. 거기서 오는 오득권자들의 만행은 익숙하다며 한숨을 내쉰다.


중국 관광객 대신 중동 관광객을 대거 유치하겠단 계획에 의구심이 드는 것도 곳곳의 음식 패권주의 때문이다. 식도락을 즐기기 어려운데 관광객이 ‘유치’될까. 중동 사람들이 대장금을 재미있게 봤다 해도 그렇다. 할랄을 꼼꼼히 따지지 않는 이들도 한국 식당에선 믿고 먹기 어려운 경우가 많단다. 한국 대학에 다니는 중동 석사생이 “돼지를 아예 안 먹으면 돼지고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은 뭐가 돼”란 말을 자주 듣는다며 하소연한 글이 외국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일도 있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는 우문현답에도 돼지 권유는 끊이지 않았단다. 공영방송에서 시어머니와 남편이 무슬림 며느리를 속여 돼지고기를 먹이는 에피소드가 나온 것도 불과 지난해다. 좋아하는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입장 바꿔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 ‘고수 안 넣으면 동남아 음식이 아니다’며 고수를 고수하는 식당이 있다면 실격이다.
 
다행인 건 우리나라가 학습이 빠른 나라란 거다. 10년 사이에 취향 존중 문화가 확산된 것만 봐도 그렇다. 10년 전엔 욕이었던 ‘오타쿠’ ‘빠순이’도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로 시선이 많이 중화됐다. 취향을 평가하려 드는 이에게 ‘취향 존중 부탁드립니다’는 매너가 됐다. 이제 식문화 차례다. 탕수육 찍먹파가 부어 먹음 당하지 않는 세상, 생선회에 레몬을 각자 뿌려 먹을 수 있는 밥상 민주화를 원한다.
 
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 



http://news.joins.com/article/2144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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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6:50

직장인의 미래를 예술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면 엉뚱할까.

여행사에 근무하는 지인에게서 앞으로 이 직종이 얼마나 살아남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여행사를 통해 비행기표를 구매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근 만난 동시통역사는 10년 이내에 기계에 일을 내어 줄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내가 아는 미용사는 1990년대 20대 말에 어쩔 수 없이 퇴사해서 미용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자기 가게를 운영한다. 그녀는 5월에 연휴가 많아 손님이 줄어들까 걱정하지만, 직업이 없어질 것 같은 걱정은 없다. 오히려 40대인 지금까지 직장에 있었다면 나와서 막막했을 거라 말한다. 

베스트셀러 ‘일의 미래’에서 저자 선대인 소장은 ‘5년 뒤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을 던진다. 직장인들은 이에 대해 답이 없고 불안하다.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지난주 나무와 진흙으로 주로 작업하는 영국의 젊은 예술가이면서 한국에서도 전시를 한 바 있는 닉 웹과 이틀 동안 그의 작업실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직장인의 미래에 대한 힌트를 예술가에게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째, 예술가들은 조직이 아니라 자신의 기술에 의존한다. 2월 월스트리트저널은 ‘(정규직) 직원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업들이 정규직 채용을 줄이고, 아웃소싱, 계약직으로 전환하는 트렌드를 보도했다. 예전 어른들은 공부를 못하면 “기술이나 배워라”라고 했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자기만의 기술이 없어 미래가 불안하다. 50세를 전후하여 직장을 떠난 뒤 자기 기술이 있는 사람은 독립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결국 프랜차이즈 등을 통해 조직의 기술에 의존하고, 독립이 힘들어진다. 직장인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조직이 아닌 나만의 기술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둘째, 예술가들은 조직에 기대지 않기에 정기적인 급여를 받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자기 작품을 팔거나 돈벌이를 하게 된다. 미술이나 음악 하는 사람이 교습을 하거나 작가가 인세를 받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그렇다. 직장인이 회사를 떠나 정기적인 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빨리 온다. 정기적 급여를 받으며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팔 수 있는’ 기술을 축적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냥 기술’과 ‘팔 수 있는 기술’은 매우 다르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요리를 팔아서 식당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판매할 수 없다면 정기 급여가 없는 상황을 헤쳐 나가기 힘들다.

셋째, 예술가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하고, 회사에서 배정한 부서에서 일한다. 예술가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비교적 뚜렷하다. 빅데이터는 유망한 직종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빅데이터 산업에 뛰어들 수는 없다. 세상의 변화를 쫓아가기 위해 우리는 외부에 눈을 돌린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물어보면 말문이 막힌다. 


자신을 조직과 직책의 이름으로만 규정하면 미래는 매우 좁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기술을 만들어 내야 자신만의 지속적인 연구와 개발도 가능하고 팔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진다. 생각을 확대해 보자. 여행사 직원보다는 사람들이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여행하도록 만들어 주는 전문가로, 미용사보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에 더 자신감을 갖게 도와주는 전문가로 자신을 바라보면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혼자만의 시간과 자신과의 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많은 사람은 미래에 대한 걱정만 하지 정작 깊이 있는 고민은 회피한다. 일단 월급은 나오기 때문에 고민을 미룬다. 

웹은 좋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확실한 기술을 가진 장인(匠人)이 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감정과 연결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선 소장 역시 공감과 소통 능력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라 말한다. 

예술가의 특성에서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어 보자. 삶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 분야의 탄탄한 기술을 갖고 있는가. 그 기술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날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조직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http://news.donga.com/Column/3/70030300000055/20170405/83695473/1#csidx4939ff3de601590992b50a5bd3240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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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6:40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 균 쇠’는 서울대생이 학교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보는 책 가운데 하나다.


물론 생물지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책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왜 그리 많이들 읽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선배들이 많이 봤다고 하니까 후배들도 덩달아 너도 나도 따라서 읽은 것일 테다.


‘총 균 쇠’는 752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지만 단 한 가지 질문에 집중한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같은 조상에서 나온 호모 사피엔스다. 그런데 왜 문명 발달 속도가 저마다 다를까?”


여기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유전자의 차이라는 것이다. 흑인, 황인, 백인의 유전자가 다르며 그에 따라 지능도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계에서는 이미 ‘인종’이란 단어는 퇴출되었다. 대륙마다 유전자가 다르다는 증거가 없다.


두 번째 해석은 필요의 차이, 기후에 따른 천성 같은 게 원인이라는 것이다. 창의성은 기후가 추운 곳에서 발휘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문명 발달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바퀴, 문자, 농업, 야금술은 모두 더운 지방에서 발명된 후 추운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는 1532년 스페인의 피사로 장군과 잉카제국의 알타우알파 왕의 전투를 예로 든다. 피사로의 군대는 기병 62명과 보명 106명이 전부였다. 알타우알파 뒤에는 자그마치 8만 명의 대군이 서 있었다. 19대 1로 싸워서 이겼다는 허풍은 많이 들어봤어도 400 대 1로 싸워서 이겼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결과는 스페인의 압승이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무기다. 둘째는 유럽인이 가져온 전염병이고 셋째는 대양을 건너는 해양기술과 문자였으며 강력한 통솔력을 발휘하는 정치조직이다. 그런데 왜 유럽인에게 가능했던 일이 잉카인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농업의 발전이 대륙의 모든 차이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어느 지역은 농업의 발전이 빨랐고, 어느 지역은 발전이 더디거나 아예 농업을 시작하지도 못했을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해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기후, 고도와 지형의 변화 정도, 가축화할 수 있는 포유류와 곡물화할 수 있는 야생식물의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환경적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족과 대륙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까닭은 민족의 생물학적인 차이가 아니라 환경적인 차이 때문인 것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논리는 명확하다. 문명 발달의 기초는 농업이며, 잉여생산물이 생기면 기술을 발달시킬 전문가들이 생기고 결국에는 문자와 정치조직이 발달했다. 그런데 농업의 발달 정도를 결정한 것은 바로 환경이라는 것이다. ‘총 균 쇠’는 인종의 차이를 뛰어넘는 인류사의 중요한 요소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분명히 전 세계 사람들에게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원래 생리학자로 과학계에 발을 내딛었다. 그를 생물지리학자로 변신시킨 질문은 뉴기니에서 나왔다. 1972년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조류학자와 진화생물학자로서 뉴기니 해변에서 새의 진화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뉴기니의 정치가 얄리와 함께 길을 걸었다. 얄리가 물었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여기서 화물이란 쇠도끼, 성냥, 의약품, 옷, 청량음료, 우산에 이르는 온갖 물건을 말한다. 뉴기니 사람들에게 화물은 하나의 신앙이었다. 카고 컬트(cargo cult), 즉 화물숭배가 바로 그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태평양의 섬에는 미군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미군 비행기가 착륙할 때마다 신기하고 쓸모 있는 화물들도 함께 왔다. 미군들은 물건을 조금씩 원주민들에게 넘겨주었다. 하얀 알을 먹으니 설사가 멎었다. 기적이었다. 원주민에게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물건을 넘겨주는 미군들은 아무런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물은 비행기에서 저절로 생겨났다. 화물은 신이 내려준 선물 같았다.


전쟁이 끝났다. 미군 비행장은 폐쇄되었다. 원주민들은 더 이상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원주민은 대나무로 비행기와 관제탑 모형을 만들어 놓고는 제사를 지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줄 것처럼 제사를 지냈다. 후에 미국인들이 와서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려고 해도 그들의 깊은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뉴기니에는 아직도 화물숭배 신앙이 남아 있다. 심지어 매년 2월 15일 되면 USA라는 그림을 그리고, 성조기를 펼쳐 들고 대나무 막대기로 만든 총을 어깨에 걸치고 사열하는 부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깊은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화물은 내려오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게 남의 일이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화물숭배 신앙은 활개치고 있다. 지난 3월 1일 서울 시청 앞에는 성조기와 태극기, 심지어 뜬금없이 이스라엘 국기를 든 사람들이 500만(!) 명이나 모였다. (500만 명이 한군데에 모여도 서울시 교통은 전혀 마비되지 않았으며 생수를 비롯한 생필품 공급과 화장실 사용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단 1만 6천 명의 경찰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정도 대처라면 웬만한 전쟁이 나도 서울시민은 무사할 것 같다. 서울시 만세! 경찰청 만세!)


이것은 한국전쟁의 기억 속에서 북한을 블레셋으로 미사일과 핵을 골리앗으로 섬기며 저주하는 또 다른 화물숭배 신앙이다. 화물숭배 신앙인에게는 답이 없다. 시간이 흘러 자연적으로 소멸하기를 바라야 한다. 다만 뉴기니보다 대한민국의 화물숭배 신앙이 더 먼저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총 균 쇠’를 읽을 이유가 분명한 것 같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http://www.hankookilbo.com/v/a0ecdee3e0f74d9097ac2a954f9dd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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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6:36

독일의 경제학자 빌헬름 뢰프케는 평생 화두 하나를 붙들고 살았다. 바로 "칸트 괴테 베토벤의 나라 독일이 어쩌다 미치광이 히틀러에게 몰표를 몰아주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인류에게 안겨주었는가?"였다.


의문은 곧 이런 재앙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독일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성찰로 이어졌다. 뢰프케가 도달한 결론은 한 사회가 건강하려면 사회적 계층질서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소수의 '윤리적 귀족'이 존재해야 하며, 무지한 대중들로 인해 세상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진정한 성직자 혹은 지식인과 같은 엘리트가 자기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뢰프케는 두 가지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25세 때 예나대학교의 교수에 임용됨으로써 독일 역사상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 기록은 나치정권이 해직한 대학교수 리스트 상단에 그의 이름이 위치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치의 집권 이전부터 장차 나치가 독일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것을 예견하고, 강연과 기고를 통해 격렬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히틀러의 미움을 샀다. 마침내 현실화된 나치의 박해를 피해 그는 터키를 거쳐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뢰프케는 나치체제가 가져온 재앙을 복기하면서 모름지기 건강한 사회에는 윤리적 귀족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윤리적 귀족은 ‘범할 수 없는 규범과 가치를 지키는 공동체의 수호자를 자임하고 또 그것을 몸소 엄격하게 실천하는 소수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 그룹’을 의미한다. 윤리적 귀족은 절제된 생활을 위해 헌신하고, 진리와 법을 수호하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며, 마침내 국가의 양심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자유사회의 지속적인 존립여부는 우리 시대가 윤리적 귀족을 얼마나 충분히 창출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목전의 이해에 눈멀지 않고 중요한 경제정책을 바라볼 수 있는 사업가, 금융인, 노조지도자, 재판관, 언론인과 학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순실 사태 이후 광장에 촛불이 켜지고 연이어 태극기 물결이 등장하면서 나라는 의식적으로 두 쪽이 났다. 현대 국가의 가장 큰 책무인 갈등조정은 교과서 속으로 퇴장하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절한 대응은커녕 한국은 정부부재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사드의 중국, 소녀상의 일본, 트럼프의 미국 등 국제문제가 우리를 옥죄고 있으나 정부는 아무 손을 쓰지 못한다. 정치권은 온통 대통령선거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민생이라든지 청년 일자리 같은 국내현안도 표류하고 있다. 가위 국난이다.


미증유의 국난을 맞아 우리에게도 윤리적 귀족이 있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존경하는 정치인, 믿고 따를 수 있는 성직자, 올곧은 언론인, 신뢰하는 법조인, 시대정신을 발현하는 지성인이 우리에게 있는가. 지금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대중이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런 판국에 국민이 존경할 만한 인물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기에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어쩌다 언론이 국가 원로라는 포장으로 전직 고위인사 몇 사람의 의견을 묶어 보도하지만 그들의 말은 국민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어른도 원로도 지도자도 존경할 만한 인물도 없는 사회야말로 비극의 무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세상에서는 국민이 자포자기하기 쉽고 부박해진다. 광장은 이미 그런 기류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믿고 따를 인물이 없는 우리에게 뢰프케의 윤리적 귀족 처방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향후 한국사회가 건강성을 유지하려면 우리에게도 윤리적 귀족에 해당하는 다음 세 집단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이다. 지식인의 책무는 건강한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것이다. 언론인은 사회가 썩지 않도록 감시하고 계도하는 것이 기본 책무다. 종교인은 국민들이 저마다 가치 있게 살아가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들이 절제된 생활을 위해 헌신하고, 진리와 법을 수호하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국가의 양심이라 칭할 만한 인물로 성장한다면, 비로소 국민의 가치관이 바로 서게 되며 그때 가서야 나라가 반듯해질 것이다.


서재경 아름다운서당 이사장

http://www.hankookilbo.com/v/8e959b7f133d4f67bf2be7c854e536c0

Posted by 겟업
2018. 1. 6. 16:33

빵집 아들이 자기집 유리창을 깼다. 빵집 주인이 아들을 심하게 탓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렇게 볼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빵집 주인이 새 유리를 사면 유리창 수리 업자는 돈을 벌게 된다. 수리업자는 그 돈을 다른 곳에 쓸 것이고, 그러면 또 다른 곳에서 소득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빵집 아들은 마을의 소득과 고용창출에 기여했다. 그러니 창을 깬 것은 마을경제로 보면 잘한 일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직도 4대강 사업이 좋은 사업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4대강 사업으로 금융위기 당시 고용이 창출됐다거나, 백제보를 통해 가뭄이 심각한 충남 보령댐에 물을 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주장이다. 바스티아는 이런 사람들을 ‘사이비 경제학자’라고 말했다.
 빵집 주인은 신을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리창을 사느라 신을 사지 못했다. 아들이 유리창을 깬 것은 빵집 주인의 지출 방향만 바꾸었을 뿐 새로운 소득을 창출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신발장수는 신발을 팔지 못했으니 오히려 손해를 봤다. ‘깨진 유리창의 오류’라고 명명된 유명한 경제학의 우화다. 프랑스 경제학자인 프레데릭 바스티아가 1850년에 쓴 에세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나오는 얘기다.

강 정비의 필요성을 전면 부인하자는 게 아니다. 정비가 필요한 강에는 그 수요에 맞게 돈을 썼으면 됐다. 10분의 1인 2조원 정도였다면 차고도 남았을지 모른다.

말이 쉬워서 1조원이지, 1조원은 작은돈이 아니다. 한 사람이 하루 3000만원씩 쓴다고 해도 무려 100년간 쓸 수 있는 돈이다. 그런 돈 22조원을 강바닥에 썼다. 그것도 국채를 발행해 빚까지 내서 말이다. 그 돈은 시급히 써야 할 데가 많았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기획재정부의 한 고위 간부는 “김대중 정부 때 인터넷 인프라를 까는 데 47조원을 썼고, 그 덕에 IT강국이 됐다”며 “4대강 대신 신성장동력에 과감하게 투자했더라면 지금쯤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 그까짓 것 한번 질펀한 돈잔치를 벌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4대강 사업이 완공된 2012년 이후 유지비로 매년 5000억원씩, 이미 2조5000억원을 더 썼다. 수자원공사가 빌린 8조원의 이자, 생태하천 등 4대강 사업 구간 관리, 준설토 관리 등을 합친 액수다. 예정에 없던 새 계산서도 제출됐다. 녹조 관리다. 거기다 향후 지출이 확정된 비용 등을 모두 따지면 전체 사업비는 30조원에 이를 수 있다. 차라리 보를 부수고 물길을 터주자고 애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는 안된다고 한다. 이미 쓴 돈이 얼마냐는 것이다. 이면에는 4대강 사업 실패를 인정할 수 없는 자존심도 있다. 

세계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는 경제성이 없었다. 연료소모량은 많고 탑승인원은 적었다. 하지만 콩코드를 만든 영국과 프랑스는 운항을 중단하지 못했다. 콩코드는 양국의 자존심이었다. 개발에 많은 자금도 투자됐다. 2003년 콩코드는 운항 27년 만에 중단을 선언했다. 누적된 적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콩코드의 오류’라 부른다. 매몰비용(이미 쓴 비용)에 집착하다 상황을 더 악화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깨진 유리창의 오류’로 시작한 4대강 사업은 ‘콩코드의 오류’로 넘어가고 있다. 정부가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4대강 사업은 새 경제용어를 남길지도 모르겠다. 깨진 유리창과 콩코드, 두 오류를 합친 ‘4대강의 오류’라고 말이다. 4대강 사업은 시작도 잘못됐고, 끝도 잘못되고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3012112035&code=990100#csidxd50d0c3754599e18345c1ccd6c92264 



Posted by 겟업
2018. 1. 6. 16:30

‘부시맨’은 같은 제목으로 국내에도 개봉한 1980년대 영화 덕분에,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아프리카 원시부족을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부락 위를 날던 비행기에서 우연히 떨어진 콜라병을 두고서 부락 안에서 분란이 일고, 결국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신에게 돌려주려고 추장은 땅끝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여정 중에 마주치는 문명사회에서 겪는 코미디 같은 에피소드가 줄거리다. 순진무구해서 도리어 우스꽝스러운 부시맨은 문명의 맥락에서 동떨어진 아프리카 부족을 부르는 자연스러운 이름으로, 그렇게 불리었다.


부시맨이라는 말이 당사자인 아프리카 ‘산족’(San people)에겐 모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해외 매체에 실린 뉴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것도 연구윤리를 다루는 뉴스에서.


서양사람이 붙여준 부시맨 또는 코이산족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아프리카 산족들 중에서 남아공 산족평의회(SASC)가 앞으로 산족을 연구하기 위해선 연구윤리를 지켜야 한다며 연구자사회를 향해 자신들이 만든 연구윤리규약을 발표했다. <네이처>와 <사이언스>를 비롯해 여러 매체가 관심을 보이며 그 내용과 반응을 보도했다.


산족평의회는 원주민 연구의 윤리 원칙으로 존중, 정직, 정의와 공정, 배려를 요구했다(bit.ly/2nEscvQ). 산족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고 산족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줄 것, 연구 목적이나 연구비 정보 등을 산족에게 투명하고 정직하게 밝힐 것, 연구에 참여해 얻을 혜택을 분명하게 논의하고 보장할 것, 산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복잡한 과학 언어로 혼란을 주거나 무지한 이로 취급하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산족이 연구윤리에 이처럼 심각해진 이유는 뭘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원시 종족”으로 불리는 산족은 그동안 각지에서 찾아온 연구자들로 시달려왔다고 한다. 이른바 문명사회에선 보기 힘든 전통 의례와 풍습들, 그리고 환경과 어울려 살 줄 아는 산족만의 건강 비법과 약초 지식들, 오래된 유전자를 간직해 인류 집단의 분기와 진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전체(게놈), 이런 것들이 산족 바깥 세계로 연구자들이 가져간 산족의 지식, 경험, 문화, 생체정보였다.


한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 ‘트러스트 프로젝트’라는 단체의 보고서(bit.ly/2nkVP2g)를 보면, 산족과 반투족의 게놈을 비교분석해 2010년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이 문제가 됐다. 논문 부록에서 무지한 부시맨 또는 비문명인처럼 묘사된 데 대해 산족은 모멸감을 느꼈다. “부족 열등감으로 많은 부시맨 여성은 반투족 남성과 결혼해 신분 상승을 꾀하려 한다”는 말은 산족의 화를 돋우었다. 프라이버시 원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산족 지도자들은 <네이처>에 항의편지를 보냈고, 그동안 산족 지도자와 게놈 연구자, 윤리학자, 법률가 등이 모여 윤리규약을 마련해왔다.


산족 연구윤리 선언의 의미를 조금 넓혀 바라본다면, 특정 집단을 우리와 다른 존재, 분리된 존재로서 흥미의 대상이나 연구 자원으로만 바라보는 이른바 ‘타자화’의 위험을 지적하고 경계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머나먼 아프리카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타인에 의해 분석되고 설명될 뿐인 이들은 또 없을까?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차별을 받는, 자신을 방어할 마땅한 수단이 없는, 그래서 주류와 정상의 시선에서 손쉽게 재단되고 타자로 분리되어 이야기되는 소수자 집단이 우리 주변에도 있을 것이다. 산족이 알려준 존중, 정직, 정의, 배려의 원칙은 단지 연구자들의 윤리규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의미 있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오철우 삶과행복팀 선임기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8691.html#csidx1aced828f4f69ed83318153d32630b9 

Posted by 겟업
2018. 1. 6. 16:28

지난 2월 하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에 의해 진주 용산고개 일대에서 한국전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유골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학살 당시의 목격자에 의하면 용산고개 3개 골짜기 5개 지점에 718구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카빈소총, 5구경 권총 및 M1 소총으로 살해당한 이들은 대부분 ‘보도연맹’에 연루된 양민들이었고, 살해 총기를 근거로 추정컨대 살해자들은 당시의 경찰과 국군이었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한 집단으로 하여금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게 했을까. 도대체 무엇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밉게 만들었을까.
 
테리 이글턴은 “악이란 이해 너머에 있는 것, 이해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악의 치열성이고 절대성이다. 악인들은 본인들이 악하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는다. 다시 이글턴을 인용하면 “악이란 자기 너머에 있는 어떤 것, 가령 대의(大義) 같은 것과 아무런 관련을 갖고 있지 않다.” 악은 악 그 자체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악인들은 자신들을 향한 모든 비난에 대해 (그들의 입장에서는) 정당하게(?!), 진실하게(?!) 분개하는 것이다. 그들의 억울함과 분노는 가짜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폭력에 가담한 많은 사람들이 개인 단위에서는 양심적이고 선하며 순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한 ‘개인’들을 악한 ‘집단’으로 몰고 갈까. 그것은 바로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그러나 개인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해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보여준 것처럼,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깊이 연루되었던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당시 그를 진찰했던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그의 정신 상태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심지어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법원에서 그의 항소를 지켜보고 그를 자주 방문한 한 성직자는 실제로 그가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하였다.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이야기한 바, “악의 평범성”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은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는데, 이 “명령”이 바로 선한 개인들을 악인으로 만드는 시스템의 (허상이라는 의미에서)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나치들은 소위 “민족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념에 포획되어 ‘민족’과 ‘혁명’의 시뮬라크르에 충실했던 사람들이다. 알랭 바디유에 의하면 정치적 시뮬라크르는 “충성의 형식을 실제로 지니기 때문에… ‘어떤 자’에게 희생과 줄기찬 참여를 요구”하며 “전쟁과 학살을 그 내용으로 한다.” 말하자면 ‘명령’ ‘민족’ ‘혁명’ 이런 기표들이 형식(허상)으로서의 시뮬라크르라면, 전쟁과 학살은 그 내용(실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한 사회를 집단 광기로 몰고 가는 여러 가지 시뮬라크르들이 있다. 근대 국가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것들이 바로 ‘민족’ ‘애국’ ‘혁명’과 같은 시뮬라크르들이다. 이런 기표들은 대부분 ‘국가주의’의 기의(記意)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들을 ‘애국’의 이름으로 적대시한다. 대신 그것들은 그 안에 참여하는 개인들을 동질성의 확고한 틀로 묶어내며,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정의의 투사’라는 판타지를 갖게 만든다. 그들은 개인 단위에서 자신들이 겪은 비극들을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승화시키며, 헌신의 숭고미(崇高美)에 빠져 자신들을 역경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구조적 악을 망각한다. 자신들이 지나온 불행의 역사를 조국을 위한 헌신으로 해석할 때, 그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숭고한 전사로 둔갑되는 것이다.
 
지금은 근대가 아니라 후기 근대 혹은 탈(脫)근대의 21세기이다. ‘상식’에 근거하여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가 “상상적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로서의 민족보다 더 중요한 시대이다. 상식이 존중될 때, 민족에 집착하지 않아도 민족은 아무 탈 없이 무사하다. 비상식이 상식을 덮을 때마다 민족이 위태로워지고, 그 틈에서 애국애민의 판타지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시스템이 가동되는 것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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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5:58

어른이 돼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한국 사람 뺨치게 한국말을 잘하는 것을 보면 외국어 학습이 나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가 늦게 배웠기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며 아직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육아정책연구소에서는 외국어 교육의 적절한 시작 시기를 알아보기 위해 중국어로 실험교육을 실시했다. 영어와 달리 중국어는 아직 배워 보지 않은 생소한 언어라 실험에 적합했다. 세 그룹으로 나눠 5세 유아, 초등 3년생, 대학생 각각 20명에게 일주일에 5회씩 총 20회의 교육을 실시했다. 유아들은 깔깔거리는 소리가 실험실 밖까지 들릴 정도로 재미있게 중국어를 배웠다. 그동안 외국의 많은 연구는 유아들의 외국어 교육효과가 아동이나 어른들에 비해 매우 낮다고 했는데, 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연구 결과를 뒤집어 놓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4주 뒤 테스트 결과에서는 우리나라 유아들도 다른 나라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교육효과가 매우 낮았다. 말하기·듣기·읽기로 나눠 평가를 해 보니 세 영역 모두 유아의 점수가 가장 낮았다. 듣기와 읽기는 유아, 초등, 대학생 순이었고 말하기는 대학생의 점수가 초등생보다 약간 낮았지만 역시 유아의 점수가 가장 낮았다.

그뿐 아니었다. 실험교육 후 중국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검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실험 대상자들에게 자연스러운 중국어 문장과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을 보여 준 후 뇌파검사(Cz 부위)와 안구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그 결과 대학생들은 중국어 문장을 볼 때 뇌파와 안구의 움직임이 중국 원어민들과 유사한 패턴을 보여 중국 사람들처럼 문장의 의미를 이해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유아들은 그 패턴이 매우 달랐다. 이는 중국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실험이 보여 주듯 유아기는 외국어 교육의 적령기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유아 자녀를 위해 한 달에 수십만원 내지 수백만원을 내며 하루에 5~6시간씩 영어만 사용해야 하는 학원에 보내는 부모들도 있다.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잘해 국제경쟁력을 갖추도록 하겠다는 것이 부모들의 바람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오히려 사고가 움츠러들고 외국인 강사로부터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배우며 열등감마저 느끼게 된다.


언어학자 촘스키는 인간은 언어습득장치(LAD)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특별한 장애가 없는 한 누구든지 모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간혹 우리나라에서는 이 장치의 기능이 나이가 들수록 저하된다며 조기 외국어 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언어습득장치는 가상의 장치이며 나이가 든다고 쇠퇴하는 게 아니다. 모국어는 결정적 시기에 적절한 언어 자극이 없으면 습득이 어렵지만 일단 모국어를 습득한 사람은 언제든지 외국어 학습이 가능하다. 다만 배우려는 동기의 절실함이나 각자의 언어 능력에 따라 외국어 학습효과는 달라질 수 있다.

유아들은 아직 외국어를 배우겠다는 간절한 동기가 없다. 게다가 인지 발달, 뇌 발달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유아들의 외국어 학습효과는 매우 미미하다. 반면 유아기는 뇌의 발달이 가장 왕성해 포도당의 소모가 성인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 이 시기에 힘든 외국어를 배우느라 뇌 발달에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탕진해 버린다면 뇌 자체의 발달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뇌에 과부하가 걸려 다른 발달의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뇌 발달을 저해하는 외국어를 유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어른들의 무지로 인한 아동학대다.



현재의 유아들이 살아갈 미래는 빅데이터를 활용하고 인공지능(AI)이 대세가 될 4차 산업혁명 시대다. 그 시대에는 통역기가 발달해 외국어를 전혀 몰라도 앱을 깐다거나 귀에 간단한 장치 하나만 끼우면 소통이 가능해진다. 어려서부터 힘들게 배운 외국어가 쓸모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반대로 빅데이터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려면 튼실하게 잘 발달된 뇌가 필요하며, AI로부터 살아남으려면 AI에게 없는 감성과 창의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유아기는 모국어 습득으로 사고력과 창의력이 가장 활발하게 발달하는 시기다. 신나게 뛰놀면서 오감을 통해 방대한 세상의 자극을 받아들여 상상력과 창의력이 쑥쑥 자랄 수 있도록 아이들을 제발 좀 내버려 두자. 쓸모가 없어질 외국어 교육을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는 부모들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더 이상 자녀를 학대하지 말자. 정부도 교사 자격은커녕 근원도 모르는 원어민을 데려다가 학부모들을 현혹해선 안 되고 자칫 아이들의 발달을 저해할지 모를 영어학원도 방관해선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랄 때 진정 우리나라도 행복하고 건강한 나라로 발전할 것이다.


우남희 육아정책연구소장



http://news.joins.com/article/21333536

Posted by 겟업
2018. 1. 6. 15:53

사람들은 타인의 존엄을 짓밟아선 안 된다는 걸 몰라서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그래 왔으니까” “그래도 되니까” 기꺼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제법 그럴듯하게 갖춰져 있음에도 전혀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인 누구나 알고 있다. 재벌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감옥에 가지 않고, 만약 1등 재벌일 경우 구속조차 되지 않는다.


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시발비용’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욕설 ‘○발’을 순화시켜 ‘비용’과 합친 말로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아도 될 비용’이란 뜻이다. 홧김에 마신 술, 열 받아서 먹은 치킨, 힘들어서 잡은 택시…. 이런 소비가 전부 시발비용이다. 이 말이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 건 오늘 우리의 노동이 그만큼 비참하다는 증거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월급을 ‘한 달 동안 모멸을 견딘 대가’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높은 자영업자 비율의 배경에는 이런 요인도 있지 않을까. 자영업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면서도, 어떤 이들은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시달리다 완전히 소진되는 것보다 자영업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물론 창업했다고 지옥을 벗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비합리적인 상사보다 한술 더 뜨는 ‘진상고객’, 업계 ‘갑’들의 복마전이다.


존엄(dignity)의 훼손은 일상이 되었다.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존엄을 짓밟히며 살아간다.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부모들, “10분만 더 공부하면 아내 얼굴이 바뀐다(남편 직업이 바뀐다)” 같은 말을 급훈으로 거는 교사들이 과거에 너무나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많다. 그러니까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학습되고 누적되어온 습속이다. 달라진 부분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늘어났다는 점이다. 인간은 경제적 손실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존엄의 훼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역사학자 톰슨은 피착취자의 단결과 저항이 경제적 이해관계의 기계적 반영이 아니라 도덕적 정당성, 사회적 인정 같은 요소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 바 있었다.


‘경영 멘토’ ‘인문 멘토’로 불리는 사람들은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말을 써가며 사회의 무자비함을 강조하길 좋아한다. 이들 중 몇몇은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자본주의를 어찌나 준열하게 비판하는지, 거의 반자본주의 혁명가처럼 보일 지경이다. 저들은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체제나 사회를 마치 자연재난처럼 묘사한다. 자연재난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각자의 적응과 생존 문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논의는 나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수렴한다. 답은 대동소이하다. 잔혹한 세계를 헤쳐나갈 만큼 ‘강한 자아’가 되는 것, 살벌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식으론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대다수가 존엄하지 못한 사회에서 극소수만 존엄해지는 것, 그건 존엄이 아니라 ‘특권’이다. 나의 존엄을 인정받으려면 타인의 존엄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현실에서 이 원칙이 권력의 작동에 의해 심각하게 침식되고 있음을 안다. 한국 사회에서 유독 존엄의 훼손이 극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말한 오랜 습속과 관성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제재 수단의 결여다. 사람들은 타인의 존엄을 짓밟아선 안 된다는 걸 몰라서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그래 왔으니까” “그래도 되니까” 기꺼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제법 그럴듯하게 갖춰져 있음에도 그것이 전혀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인 누구나 알고 있다. 재벌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감옥에 가지 않고, 가더라도 금방 특별사면되며, 만약 1등 재벌일 경우 구속조차 되지 않는다.


명시된 법도 지킬 생각 없는 이들에게 “타인의 존엄을 지켜주세요”라고 부탁하면 그들이 ‘아 그랬구나, 우리가 잘못했구나’ 눈물 쏟으며 회개할까? 그럴 거였으면 애당초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테다. 사태가 별반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개별 해법 말고는 대처 수단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혈연·지연·학연 공동체, 종교 공동체는 넘쳐나지만, 오랜 반공주의 등의 영향으로 정당과 노동조합 같은 결사체가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사회다. 이런 결사체는 정부와 자본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할 뿐 아니라 시민 각자의 이해관계를 공적 관심사로 번역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우리의 일터와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건, 5년짜리 대통령이 아니라 체제와 개인을 일상적으로 매개하는 이런 조직들이다. 혼자 존엄할 수는 없다. 오직 같이 존엄해질 수 있을 뿐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0933.html#csidx3bc572a8672940d800e3416452900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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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5:48

지난해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던 한 교수님은 “지금은 절대적 빈곤만 줄어들었을 뿐, 불평등 수준은 ‘레미제라블’시대(19세기)와 비슷해졌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저런 그래프를 살펴보니 맞는 말이었다.


얼마 전 이틀간 굶은 실직자가 막걸리를 훔치다 경찰에 잡혔다. 월세가 밀려 방을 빼야 했던 날, 목을 맨 세입자도 있었다. 상위 10%에 몰린 소득 집중도(48.5%),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 비율(53.5%), 월급 7,810만원이 넘는 초고소득 직장인 급증(3,403명) 등 모든 불평등 통계가 사상 최대를 갈아치우고 있다.


하지만 이런 뉴스들은 익숙해서 신문 지면에서도 눈에 띄는 공간에서 밀려날 때가 많다.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2위를 오간 지 오래된 현실에서, 불평등에 대한 자포자기는 공기처럼 퍼졌다. 너무 편재해서 문제라는 감각도 무뎌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장 저항해야 할 인식의 모순인지 모른다.


임금 문제는 노동의 수요- 공급 법칙을 들이미는 경제학의 우격다짐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어떤 학자와 이야기하다가 “정책 만든다는 교수들도 저소득층이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는 게, 참 단점이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속한 언론계도 마찬가지이다. 계층간 사다리는 붕괴됐고 정계, 학계, 언론계 사람들 대부분 평균 이상의 배경과 소득을 가진 계층에 속하니, 다시 도래한 ‘가난의 시대’의 실체와 팽배한 아픔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죄책감도 든다. 19세기 지주와 소작농의 시대처럼, 동시간을 살지만 경험조차 단절됐다.


미국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저임금 직업들을 직접 경험해보고 쓴 ‘노동의 배신’에서 “노동 인구의 30%가 시간당 8달러 이하(1998년 당시)를 받는 게 사실이라면 그들은 내가 모르는 생존 비법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예상했다. 겪어본 결과는 반대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만 아는 절약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드는 비용이 수두룩하다…보증금이 없으니 엄청난 방세를 내고, 정기 건강검진을 받을 수 없어 결국 대가를 치른다”고 했다.


하나의 답은 스웨덴에서 찾을 수 있다. 전국단위 노조가 과거 장기간 연대임금 정책을 내걸고 경영자단체와의 협상에서 상위 근로자의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하위층의 임금을 끌어올린 그 유명한 사례에 대해 누군가는 “눈물 나는 이야기”라고 했다. 일정 수준의 임금을 주지 못하는 기업은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그들의 기조는, 한국의 수준 따위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해도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서 존재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임금을 줄이거나 동결하고, 비정규직ㆍ하청근로자 임금을 올리라고 협상을 할 수 있을까? 지난해 300명 이상 대기업 중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확보한 재원을 신규채용, 비정규직 처우개선 등에 활용한 기업은 18.8%에 불과했다.


국내에서 드물게 산별 임단협 협상을 하는 금융노조는 고연봉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은행원의 평균 연봉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203%(미국 101%), 절대 액수도 미국 은행원의 평균 연봉보다 많다. 이들의 고연봉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러니 당신은, 특히 남들이 부러워하는 연봉을 자랑하는 당신은 분명 알아야 한다. 대기업 총수의 변론을 맡아 수십억원을 받는 변호사는 그 돈이 하청업체의 노동자에게 돌아갈 몫이었다는 것, 의사의 고액 임금에는 박봉의 간호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포함돼 있다는 것, 은행원의 억대 연봉에는 사내 비정규직의 눈물과 후배들을 덜 뽑는 대가가 들어 있다는 것. 아 이쯤에서, ‘나는 남들 놀 때 공부 열심히 했고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은 제발 말아달라.


근본적인 원인은 강력한 비정규직 제도 및 노조 배제정책을 써온 정부, 또 부도덕한 경영자들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할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맞는 말이다. 나는 애초 이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조와 노동자끼리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눈에 띄는 지도자 한 명 나오지 않고, 찢기고 축소된 한국의 노동계가 하루 빨리 힘을 얻고 연대의식을 갖춰 제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또 조만간 ‘최순실 정권’이 끝나고 최소한의 신뢰라도 갖춘 차기 정부가 들어선다면,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를 바란다.


이진희 정책사회부 기자 river@hankookilbo.com



http://www.hankookilbo.com/v/6ec3040f442645e6b9373074ffde62a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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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9. 22:52

중세 유럽의 이야기다. 사악한 용(龍)을 잡는 방법을 가르치는 ‘용잡이 학원’이 있었다. 학생들은 비싼 수업료를 내고 기초부터 고급 과정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연마했다.

졸업반 학생 하나가 스승에게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용은 어디 있습니까?” 스승이 대답했다. “용은 없다.” 화들짝 놀란 학생이 “그러면 지금껏 배운 공부가 무용지물이란 말씀입니까?”라고 따지자 스승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도 나처럼 학원을 차려 학생들을 가르치면 될 것 아니냐.”

대학 공부, 특히 인문학이 용잡이 학원 수업을 닮았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는다. 이에 대해 인문학 교수나 소위 힐링 전도사들은 인문학이 상상력을 키워 주는 쓰임새가 큰 학문이라고 역설한다. 애플 창업주인 스티브 잡스가 대학에서 철학을, 페이스북 창업주인 마크 저커버그가 심리학을 전공한 것을 즐겨 예로 든다.

그런데도 왜 기업들은 잡스나 저커버그를 배출한 인문사회계를 외면하고 이공계나 상경계 졸업생을 선호할까?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고교 시절 잡스는 HP 인턴으로 컴퓨터 기초를 다졌고, 저커버그는 컴퓨터 신동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 성공의 원동력은 컴퓨터 공부다. 인문학 지식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일반 대졸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모 일간지 기자가 “인문계 인재를 뽑아 직무 능력을 키워 주면 되지 않느냐”고 어느 재벌 그룹 인사 담당자에게 물어봤다. 그 담당자는 “인문계를 뽑아 하나부터 열까지 직무 교육을 하느니 차라리 이공계를 뽑아 인문학 강의를 해 주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둘째, 잡스와 저커버그는 천재 중의 천재다. 천재(天才)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재주라 대학에서 뭘 전공해도 성공한다. 보통의 학생들은 이런 예외적인 천재의 성공 스토리에 현혹되지 말고 인문계의 평균적인 모습을 살펴봐야 한다.

3주 전 어느 일간지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SKY) 인문사회 계열 졸업생의 취업률은 45.4%로 나타났다. SKY가 이럴 정도니 다른 대학들은 어떻겠는가. 그래서 나온 씁쓸한 신조어가 “인문계 90%가 논다”는 ‘인구론’이다. 이것이 인문학 전공자의 평균적 모습이다.

두 달 전 서울의 어느 명문대는 비인기 인문계 학과의 통폐합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학제 개편은 곧 해당 학과 교수들의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 개편이 유야무야되면 교수의 기득권이야 지켜지겠지만 학생은 ‘인구론’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

대학의 인문학 위기와는 달리 지난 몇 년간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그 이유는 인문학이 ‘사치재(luxuries)’이기 때문이다. 사치재란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 수요가 급증하는 재화를 일컫는 경제학 용어다. 어느 개인의 평생 소득의 변화를 보면 중장년 무렵에 최고조에 달하는데 그때 인문학 수요가 급증한다.

인문학이 사치재란 걸 받아들이면 학제 개편의 방향은 명확해진다. 먼저, 인문계 정원을 필요 최소한으로 축소할 필요가 있다. 그 대신 이공계 학생을 포함한 전교생의 인문학 교양 교육을 강화하라. 그래서 학생들이 중장년층이 됐을 때 인문학을 다시 찾도록 만들어라. 그리고 현재 중장년층의 인문학 수요에 부응해 새로운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라.

인문학 힐링 전도사들 역시 ‘인구론’에 일조한다. 작가인 남정욱 숭실대 교수는 ‘차라리 죽지 그래’라는 저서에서 철학자 강신주 박사나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그런 전도사라고 주장한다. “일하는 것은 노예가 되는 것”이라는 등 인문학을 빙자한 반(反)자본주의 논리로 청춘을 오도(誤導)하는 강 박사가 정작 자신은 일의 노예가 돼 자본주의적 돈벌이에 몰두한다고 남 교수는 개탄한다.

남 교수는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서울대생처럼 선택받은 소수가 아닌 대다수 청춘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김 교수가 설파하는 ‘인문학적 방황’을 믿고 따르다간 낭패 보기 십상인 게 ‘인구론’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틀 뒤면 입학식과 함께 신학기가 시작된다. 인문학 전도사에게 속아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인문학을 선택해 열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초래할 결과가 어떨지는 미리 헤아려라. 그래야 ‘용잡이 학원’이나 ‘인구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김인규 한림대 교수·경제



http://news.donga.com/3/all/20150228/69852847/1#replyLa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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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8. 01:30

2012년 9월 프랑스 풍자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는 정부의 권고를 무시하고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를 외설적으로 묘사한 여러 그림을 실었다. 당시 필자는 튀니스에 있었다. 이슬람 사원 밖에 탱크와 군인이 있었고, 외벽은 영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로 서구와 이슬람 증오 세력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혁명을 외치는 낙서로 도배돼 있었다. 튀니스 주재 미국 대사관이 공격받고 미국인 학교가 방화로 소실된 며칠 후였다. 그 바로 전에는 리비아 주재 미국 대사가 지하드 반군에 살해당했다.

 필자는 30분간 튀니스 중심부인 하비브 부르기바 거리에 초조하게 서 있었다. 통행금지가 떨어지기 전 돌아가야 하는데 아무리 해도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거리엔 유럽인이라곤 혼자밖에 없어 눈에 확 띄었다. 마음속으로 지난 수년간 고의적이고도 불필요한 도발을 계속한 샤를리 에브도를 저주했다. 샤를리 에브도는 2006년 덴마크 신문에 처음 등장했던 마호메트 풍자 만화를 재발행했다. 2011년에는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패러디한 ‘샤리아 에브도’를 발간해 편집국이 화염병 공격을 받는 일도 있었다.

 지난주 수요일 아침, 우리 사무실에서 20분 거리인 샤를리 에브도 본사가 무차별 총격을 받아 12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필자는 파리의 다른 모든 시민과 마찬가지로 깊은 충격을 받았다. 중무장한 경찰과 군인이 골목마다 서 있고 군용 차량이 다른 차량을 견인하는 것을 봤을 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커피숍에 들어가자 모두 TV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TV에서는 경찰관 2명과 스테판 샤르보니에 편집장과 여러 만평가가 목숨을 잃은 대학살 현장을 중계하고 있었다. 필자 옆의 남자가 “또 다른 단계로 접어들었을 뿐”이라고 말을 건네왔다. “무슨 말이오?”라고 묻자 “아랍과의 전쟁 말이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샤를리 에브도는 정당성 없는 폭력의 예상치 못한 피해자였다고 할 수밖에 없다. 요즘의 파리 사람들에게 샤를리 에브도는 충격을 줄 힘을 잃어버린 1960~70년대의 진기한 유물일 뿐이다. 테러 전날 신문 가판대에 있는 샤를리 에브도 최신호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멍한 표정의 성모 마리아가 더 멍한 표정의 예수 그리스도를 낳는 그림이었다. 길을 가면서 요즘 저 잡지를 도대체 누가 보는지, 어떻게 적자를 갓 벗어나기 시작했는지, 어쩌다 박물관에나 진열될 법한 유물이 된 건지를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이번 테러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유명 만평가 두 명의 나이에서도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장 카뷔와 조르주 볼린스키는 각각 76세와 80세였다. 무엇보다 이들은 1968년 5월 혁명 세대였다. 무제한적 자유를 믿고 거리낌없는 성적 표현과 마약 복용을 하는 세대 말이다.

 무엇보다 이들은 모든 형태의 윤리적·종교적 권위를 조롱할 자유를 굳게 믿으며 드골 정부의 고압적 가부장주의에 반발했다. 샤를리 에브도의 끈질긴 도발(provocation) 추구는 파리 사람들 특유의 전통에 속한다. 이 태도는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 창간된 샤를리 에브도를 프랑스 잡지답게 만든 건 바로 전투적이고도 공격적인 세속주의였다. 이 또한 프랑스 문화의 오랜 전통이다. 역사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힘을 견제하는 한 방식이었다. 68년 5월 혁명은 구세대를 향한 청년세대의 저항이었고, 반종교 풍자는 저항의 핵심이었다. 

 현재 프랑스에서 68혁명에 가담했던 세대는 문화적 기득권층이 된 지 오래다. 그들이 젊은 시절의 좌파적이고 자유주의적 사상을 아직 신봉한다 해도 기성세대가 됐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샤를리 에브도 또한 마찬가지다. 아무리 무정부주의를 과시한다 해도 아주 오래전 기득권의 일원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프랑스 주변부 교외 지역에서는 샤를리 에브도를 그렇게 인지하고 있다. 프랑스 주요 도시를 둘러싸며 광범위하게 펼쳐진 교외 빈곤 지역은 중동과 아프리카, 아시아의 프랑스 식민지 이민자들이 상당수 거주하는 곳이다. 샤를리 에브도의 풍자는 파리 중심부에선 종교적·정치적 권위주의의 코를 비틀기 위한 풍자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교외 지역에서는 자신의 정체성 중에서 아직 프랑스 주류사회에 동화되거나 짓밟히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부분과, 마음 깊이 간직한 종교적 신념을 내키는 대로 조롱할 수 있는 주류 권력자의 오만으로 보고 있다.

 수요일 프랑스에서 총격으로 쓰러진 것은 누구에게든 자신의 생각을 발언할 자유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세대다. 파리 사람들은 넉살좋은 기지(wit)에 자부심을 가진다. 늘 권위에 저항해 왔던 이런 태도의 밑바탕에는 생각의 자유와 도발을 즐기는 자세가 깔려 있다. 샤를리 에브도를 향한 끔찍한 살해는 이 모든 것의 정반대에 서 있다. 이는 바로 파리 사람들의 정신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이다. 

앤드루 허시 런던대 파리분교(ULIP) 학장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916564&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5. 3. 8. 00:29

두 달 전 학교비정규직노조 파업 때의 일이다. 공립유치원에 다니는 큰 아이의 급식실 조리원들이 하루간 파업에 들어가니 도시락을 싸서 보내달라는 통신문이 나왔다. 유치원에서 빵과 우유를 나눠주기는 하지만 한 끼 식사로는 부족하니까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끔 집에서 준비해달라는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네이버에 개설된 학급 밴드를 통해 “도시락을 싸올 수 있는 친구들은 좀 넉넉히 싸와 형편이 여의치 않은 아이들과 나눠먹으면 좋겠다”면서 자신도 푸짐하게 준비해 아이들과 특별한 기분을 내보겠다고 공지했다. 한번도 김밥 재료들이 정중앙에 위치하게 말아본 적이 없는 형편없는 솜씨이건만, 나 역시 한 보따리 싸서 보내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던 것도 잠시. 나는 그 밑에 달린 댓글들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파업을 하더라도 애들 밥은 줘가면서 했으면 좋겠다는 불만, 도시락업체와 김밥 체인점이 그렇게 많은데 애들 배고프게 빵과 우유가 웬 말이냐는 항의가 담임교사에게 빗발쳤다. 급식실 조리원이 밥을 하면서 파업을 하면 그게 무슨 파업이며, 하루쯤 도시락 싸는 게 무슨 대수인가 싶었지만, 선생님마저 “어머님들 심정 십분 이해한다”며 어르고 달래는 어리둥절한 광경이 펼쳐졌다. 함께 아이를 키워가는 동반자적 관계 같은 것은 거기에 없었다. 그들은 다만 유치원의 고객이었고, 유치원의 서비스가 엉망이었으므로 항의는 당연한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가 고객과 고객센터 직원의 관계로 치환돼버린 현실을 목격한 나는 그저 씁쓸한 기분으로, 역시나 재료들이 한쪽으로 치우쳐버린 김밥을 찬합 가득 쌌을 뿐이다.

그간 한국사회의 제반 관계는 가족을 원형으로 하는 유사 가족체제였다. 학교 선배는 오빠고, 윗집 아이엄마는 언니며, 육아 도우미는 이모였다. 유교적 가족질서를 무한히 확장해나가는 한국 사회의 인간관계에 갑갑함을 느끼며 오빠를 선배로, 언니를 ○○엄마로, 이모를 아주머니로 부르는 대신 갑절로 깍듯하고 상냥하려 애써왔다. 그런데 이 모든 기성체제를 무력화하는 가공할 형태의 새로운 관계 원형이 세계를 석권했다. 이름하여 ‘고객주의’. 돈 내면 고객이고, 고객은 왕이다. 돈으로 매개되지 않는 관계가 거의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음만 먹으면 ‘갑질’할 곳은 도처에 널렸다.

내가 지불하는 돈은 내가 제공받는 재화 및 용역과 정확한 등가가치를 이룬다. 그 가격이 적절하게 책정됐든 아니든, 나는 화폐 지불을 통해 재화와 용역이라는 상품만을 구매할 뿐, 판매자의 인격까지 사는 것은 아니다.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 인간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인간적인 거래 형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상호간의 호의와 호혜에 기반해야 한다. 친절이라는 것은 판매자가 구매자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만나 “나는 인간이라는 종을 신뢰한다” “나는 당신이 이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서로간에’ 전달하는 일이다. “사랑합니다, 고객님”이 거북한 것은 이 일방적이고도 기계적인 언설이 발화자의 인격과 주체성을 말살했으므로 한낱 거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친절은 단지 허위와 허식인 것이 아니라 위험과 악의가 잠복해 있는 이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더 넓은 안전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인류가 개발해낸 유구하고도 세련된 생활양식이다. 나는 내 발을 밟고 놀란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인에게서, 아이를 위해 미지근한 물로 핫초코를 탔다는 카페 직원에게서, 계단에 얼음이 얼었다며 조심하라는 경비원 아저씨에게서 세계의 온기를 느꼈다. 그들에게 화답하며 나라는 인간이 이 낯선 세계에서 호의와 선의에 둘러싸여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감정을 얻었다.경비원에게 상한 음식을 던져준 압구정동 아파트의 할머니도, 주차요원의 무릎을 꿇린 백화점 VIP 모녀도, 땅콩회항의 히로인 조현아씨도 모두 촌스러운 사람들이다. 세계가 진심으로 자신을 환대한다고, 기꺼워한다고 느껴본 적이 아마도 없을 것이다. 촌스러운 것도 지나치면 사악한 것이 된다. 비유와 직설도 구분 못하는 이들을 위해 분명히 말하자면, 고객은 왕이 아니다. 너도, 나도, 누구도 왕이 아니다.

박선영 문화부 기자


http://www.hankookilbo.com/v/b4aa1b55f51e4f4c89d92df89a134b9f


Posted by 겟업
2015. 3. 7. 23:30

"이제 세상은 새로운 천년을 맞지/하늘의 별까지 닿고 싶은 인간은/유리와 돌 위에 그들의 역사를 쓰지/돌 위엔 돌들이 쌓이고, 백년이 지나 또 한 세기가 흐르고….”

빅토르 위고 원작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대성당들의 시대’란 노래로 시작한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은 루이 7세 시절인 1163년부터 짓기 시작해 1345년에 완성됐다. 짓는 데 182년이나 걸린 셈이다. 하늘에 가까이 닿고자 하는 사람들의 염원이 담긴 대성당은 이후 850년이 넘도록 보존되면서 파리 한복판에서 수많은 전설을 만들어냈다.

외신에서 꼽은 올해의 ‘10대 뉴스’ 중 하나는 유럽우주기구(ESA)가 발사한 로제타호의 로봇탐사선 필레가 최초로 혜성 착륙에 성공한 것이었다. 로제타호는 2004년 3월 프랑스령 기아나 우주센터에서 발사돼 10년 8개월 동안 65억 km를 날아갔다. 로제타호의 여정은 영화 ‘인터스텔라’ 열풍과 함께 온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 우주선이 블랙홀의 중력을 역이용했듯이 로제타호도 지구와 화성의 중력을 모두 4차례 역이용했고 영화에서 우주인들이 산소와 식량을 아끼기 위해 동면에 들어간 것처럼 로제타호도 전원을 끄고 운항하다가 3년 만에 깨어나 혜성에 안착했다.

20년 넘게 준비해 온 로제타 프로젝트의 성공에 대해 유럽 언론들은 “대성당 정신(Cathedral Spirit)의 복귀”라며 환영했다. 대성당 짓기처럼 우주 탐사도 내 생애에 목표를 이루기보다는 세대를 이어서 실현해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이다. 로제타 프로젝트에 들어간 돈은 약 14억 유로(약 1조9000억 원). 그러나 문제는 예산이 아니었다. 정책적 의지가 관건이다.

냉전시기 미국과 소련 간의 인공위성 발사와 달 착륙 경쟁을 씁쓸한 눈빛으로 바라봤던 유럽의 과학자들은 1975년 ESA를 설립했다. 본부는 파리에 있지만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 등에 수많은 연구시설이 분산돼 있다. 유럽의 기술이 총집결된 에어버스 항공기가 동체는 프랑스에서, 날개는 영국에서, 수평꼬리는 스페인에서, 도색은 독일에서 맡아 생산되는 것과 비슷하다.

언뜻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이 유럽의 힘이기도 하다. 유럽연합(EU)의 기구들은 수차례 토론을 통해 어렵게 합의를 이끌어내지만 일단 합의만 하면 각국의 정치 변동과 관계없이 프로젝트를 안정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왔다.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창조경제’ ‘디자인 서울’ ‘정보기술(IT) 생명공학 벤처 육성’ 같은 구호가 등장하지만 정권이 바뀌면 쉽게 잊혀지는 한국과는 다르다.


경제위기로 우울한 한 해를 보낸 프랑스인들에게 올해는 몇 가지 자존심을 세울 일이 있었다. 작가 파트리크 모디아노(문학상), 장 티롤 교수(경제학상) 등 노벨상 수상자 두 명을 배출했고 로제타호의 혜성 항해를 지휘한 인물도 프랑스 천체물리학자 장피에르 비브링이었다. 프랑스 일간 레제코는 “전 세계에서 ‘프랑스 때리기’가 유행이지만 프랑스인들은 기초학문 분야에서 묵묵히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도 올해는 참담한 비극적 사건이 줄을 이어 전 국민이 집단 우울증 증세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에 ‘대성당의 정신’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석굴암 불국사 같은 ‘천년사찰의 정신’이 왜 없겠는가. 내년엔 우리도 자기비하보다는 미래를 향한 큰 꿈을 준비하는 해가 되면 좋겠다. 꼴찌 팀을 맡아 가을야구에 성공한 LG 트윈스의 양상문 감독의 말을 되새기고 싶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하다.”


전승훈 파리 특파



http://news.donga.com/3/all/20141222/687059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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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7. 22:23

중화민족의 대부흥을 뜻하는 ‘중국몽(中國夢)’. 이 차이나 드림과 관련된 두 가지 의미심장한 일이 최근 한꺼번에 일어났다. 하나는 ‘우산혁명’으로 통하는 홍콩의 민주화 시위요, 또 하나는 중국 기업의 뉴욕 최고급 호텔 월도프 아스토리아 구입이다.

우산혁명의 불똥이 비슷한 처지의 마카오를 거쳐 본토로 옮겨붙으면 어떻게 될까. 시간은 걸리겠지만 중국 전체가 쪼개질 거라는 게 서방 언론들은 희망(?) 섞인 분석이다. 실제로 우파 언론 월스트리트저널은 “홍콩 사태가 중국 다른 지역에서 연쇄 파급효과를 미치지 않을까 중국 지도부는 두려워한다”고 전했다. 그렇지 않아도 끓고 있는 티베트·위구르 민족주의에 불을 댕겨 중국 대륙이 분열되길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다. 1990년대 소련이 쪼개지면서 급속히 약화됐던 즐거운 추억이 아직도 아련한 모양이다. 


반면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매입은 경제 패권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해석하건대 전자를 정치적 위기의 징조라면, 후자는 중국 경제의 굴기인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중국은 위기를 목전에 둔 것인가, 아니면 ‘팍스 시니카(Pax Sinica·중국에 의한 평화로운 시대)’를 향해 순항 중인가.


비관론이 맞다면 홍콩의 우산혁명은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지난해 한국의 전체 수출 5597억 달러 중 중국 시장 비중은 26.1%. 그 뒤를 잇는 미국(11.1%)·일본(6.1%)·홍콩(4.8%)·싱가포르(3.9%) 등 네 나라를 합쳐도 모자란다. 중국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가 어떻게 될지는 불문가지다.


그렇다면 이 상반된 양 신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이 시그널을 적확히 꿰뚫으려면 서방과는 현격히 다른 중국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다. 단적인 사례가 정치적 민주주의와 경제 발전 간의 상관관계다. 미국 남부의 명문 듀크대 경영대학원에는 설립 정신을 함축한 ‘다원성 선언문’이 걸려 있다. “기술 혁신의 원천인 우리 사회 내의 다원성을 활용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게 그 요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가 일찍이 설파했듯 경제 성장의 원동력은 창조적 파괴를 통한 혁신이다. 그럼 혁신은 어디서 나오나. 구미 학자들은 이질적 사고 방식을 포용하는 ‘다원주의’에서 비롯된다고 확신한다. 이를 증명하는 실증적 조사도 숱하다.

그렇다면 거주 이전의 자유마저 희미한 중국은 어떨까. 서방 논리대로라면 질식할 것 같은 사회 통제로 창의적 혁신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중국의 쇠퇴를 예견하는 강력한 논리 중 하나가 다양성의 결핍이었다. 하나 현실은 정반대로 진행돼 왔다. 2011년 이래 세계에서 3년째 가장 많은 특허를 낸 나라는 중국이다. 지난해 중국에선 40만 건의 특허 등록이 이뤄져 일본(25만 건), 미국(18만 건)을 훌쩍 제쳤다. 미국 잡지 패스트컴퍼니 선정 ‘2014년 가장 창조적 기업’ 랭킹 3위는 저가 핸드폰 돌풍을 일으킨 중국의 기업 샤오미(小米)였다. 인터넷 검색 엔진 바이두(百度), 온라인 쇼핑몰 알리바바 등도 세계적인 혁신기업으로 꼽힌다.

왜 이런 착오가 일어나게 된 걸까. 이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경제·산업 분야에서만큼은 거의 완벽한 수준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는 중국식 시스템이 잘 돌아간 덕분이다. 소련 공산주의에 익숙한 서양에선 정치는 막혀 있으되 경제는 한껏 풀려 있는 체제는 상상하기 어려웠을 거다.

 이 같은 문화적 몰이해에 따른 착시 현상으로 30년 전부터 ‘중국 붕괴론’은 유령처럼 떠돌아다녔다. 특히 92년 미 역사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소련의 붕괴 이후 『역사의 종언』을 출간한 무렵엔 극에 달했다. 그는 민주주의 진영의 완전한 승리를 선언하며 중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가 이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 예언했다. 그러나 중국은 그 후에도 무너지기는커녕 연평균 8~10% 수준의 고도 성장을 유지하며 일당지배 체제를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내부 모순에 따른 중국 붕괴가 이뤄지지 않자 그 후로 고개를 든 게 ‘중국 분열론’이었다. 티베트·위구르족을 위시한 중국 내 소수민족들이 들고 일어나 중국이 쪼개질 거라는 얘기다.그러나 내재적 접근을 중시하는 학자들은 이 역시 실정 모르는 이야기라고 비판한다. 민주화 운동이 가열돼 공산당이 전복되더라도 중국이 분열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민주화 운동의 주체세력 역시 한족이어서 나라가 쪼개지는 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또 중국 영토의 60%를 소수민족이 차지하긴 하나 인구 수에선 8% 안팎이다. 공산 정권 몰락 후 분열된 옛 소련의 경우 러시아인이 70%에 불과했다. 양쪽이 비교가 안 된다.

결국 홍콩의 우산혁명이 본토로 확산되더라도 중국의 분열이 촉발될 가능성은 낮다고 봐야 한다. 서방에서 중국을 분석할 때 문화적 배경을 도외시한 채 자신들의 분석 틀을 고집할 때가 잦다. 오피니언 리더 중 서양에서 유학한 이들이 유독 많은 한국이다. 화석처럼 굳어진 서양식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정적 오판을 범할 수 있음을 늘 유념해야 한다.


남정호 국제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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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7. 21:51

호주 여행 중의 일이다. 바닷가에 도착하니 거친 파도 위에서 서핑을 즐기는 이들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바닷가 쪽으로 몇 걸음 더 들어가니 흥미로운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내판에는 상어 그림을 배경으로 ‘Surf at your own risk’라고 쓰여 있었다. 간혹 상어가 나타나기도 하니 서핑을 즐길 사람은 그런 위험성까지 잘 고려해서 결정하라는 것이다. 아마도 과거에 상어로 인한 사고가 발생했던 것 같다. 그 안내판이 내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상어의 출몰에도 불구하고 바닷가에서의 서핑 여부에 대한 최종 판단을 시민 개인에게 맡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라면 어땠을까. 상어로 인한 사고가 생겨났는데 그 해안을 그대로 방치했다면 언론에서는 해당 관청의 무관심과 태만을 질책했을 것이고 결국 관청은 철망을 치든가 해서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을 것이다. 관청 입장에서는 가장 손쉽게 사고 재발을 막을 수 있고 책임도 면할 수 있게 되겠지만, 사람들은 그 바닷가에서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이처럼 국가가 개입하게 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암 덩어리’ ‘원수’라고 불렀던 관의 규제가 생겨나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은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모습을 송두리째 드러내 보였다. 국가의 무능이나 ‘관피아’와 같은 구조적 부패의 문제점도 심각한 것이지만, 수백 명의 승객을 가라앉는 배 안에 두고 제 목숨 살리겠다고 도망 나온 선장을 비롯한 일부 선원들의 책임 의식의 결여가 더욱 부끄럽다. 국가의 개입 이전에 세월호 내부에서의 노력만으로도 희생자를 크게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세월호 사건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전에 있었던 신안 홍도 유람선 구조사건이다. 유람선이 좌초되자 인근 지역 주민들이 유람선과 어선을 타고 제일 먼저 다가와 승객들을 모두 구출했다. 과거에 유사한 유람선 사고가 있었는데 사고가 터지면 관광객이 줄어 지역 경제가 타격을 입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끼리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구조훈련을 해 온 결과였다. 국가의 개입 이전에 시민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낸 것이다.

 홍도 유람선 구조사건은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국가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과도할 정도로 국가에 의존해 왔다. 민주화 이후에는 시민들의 권리 의식이 강해지면서 국가의 역할과 책임을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형태로 변화해 갔다. 민주주의에서는 국민이 주인이기도 하고 더욱이 세금도 냈기 때문에 국가가 당연히 모든 것을 처리해줘야 한다는 식이다. 불이 나면 소방서가 해결할 일이고, 도둑이 생기면 경찰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것이다. 국민은 그저 팔짱 끼고 정부가 하는 일을 지켜보면 될 뿐이고, 일을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비난하고 책임을 추궁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되었고 이해관계도 복잡해진 오늘날 국가에만 일을 떠맡기는 방식으론 문제가 효과적으로 해결될 수 없고, 더욱이 국가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결국 또 다른 규제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라”고 말한 바 있다.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이 유명한 연설 문구는 국가라는 공동체가 시민의 참여와 헌신 없이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유지와 발전을 위해 참여하고 헌신하려는 시민의식이 매우 취약해졌다. 극단적인 경쟁이 자기밖에 모르는 모래알과 같은 사회로 만들어버렸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에서부터 ‘우리’가 아니라 ‘나’를 가르치고 있고, 경쟁에서 남을 누르고 혼자 잘사는 방식을 강조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이 보여준 대로 이제는 국가가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국가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의존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월호 사건은 개인의 안전이나 발전 역시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운명을 같이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이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공동체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된 것이다. 국가가 사사건건 시민 생활에 간섭해온 불필요한 규제의 혁파는 매우 시급한 과제이지만, 이와 함께 시민사회가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다. 공동체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시민교육의 강화가 절실해 보인다.


강원택 서울대 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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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7. 21:42

증시는 경제의 체온계다. 필자는 10여 년 전 증권거래소 출입기자를 했다. 지난주 우연히 시가총액 상위 종목을 다시 챙겨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2004년 시가총액은 ①삼성전자 ②SK텔레콤 ③포스코 ④한국전력 ⑤국민은행(KB) ⑥KT ⑦현대차 ⑧LG전자 ⑨삼성SDI ⑩신한은행 순이었다. 전자와 통신, 그리고 금융이 주력이었다. 모두들 ‘수출 한국-IT(정보기술)강국’에 따라 이 서열이 영원히 굳어지리라 오해했다.

지난 10년간 증시의 미인주는 단연 네이버다. 주가가 20배나 올라 80만원이 됐다. 일본 증시에 ‘라인’까지 상장하면 시가총액은 50조원을 넘본다. 현대·기아차와 시가총액 2위 자리를 다투게 된다. 인터넷·모바일 시대의 무시무시한 단면도다. 


하지만 진짜 눈길을 끄는 종목은 따로 있다. 화장품의 아모레, 먹거리의 오리온과 삼립식품, 의류의 영원무역과 한세실업이 그것이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10년 전 한결같이 외면받던 내수업종이란 점이다. 한물간 사양산업으로 여겨졌다. 하루 거래량이 1만 주도 안 됐다.지금은 어떨까. 예전 ‘태평양’이던 아모레퍼시픽 주가는 100배나 올라 250만원 선이다. 중국에서 ‘설화수’가 대박을 터뜨렸다. 해방 이후 만성 적자였던 화장품 수출입을 단번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지주회사인 아모레G와 합치면 시가총액이 23조원으로 6위다. 증시 관계자는 “주가수익비율(PER)이 60을 넘어 부담스럽다. 하지만 아모레의 중국 시장 점유율이 현재 1.7%에서 5%로 오른다고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PER이 6인 삼성전자를 압도하는 최첨단 성장주로 변신한 것이다. 이런 기대감에 외국인 보유 비중도 30%나 된다.

옷을 파는 영원무역도 4년 만에 주가가 10배나 올라 시가총액이 3조원을 넘었다. 한세실업 역시 5년간 주가가 10배 넘게 올랐다. 주식전문가 구재상 KCLAVIS 대표는 이렇게 접근한다. “영원무역은 방글라데시 등에서 7만 명 넘는 해외 근로자를 데리고 고급 옷을 전 세계에 수출하는 노하우가 탁월하다. 한세실업도 3만6000명의 해외 근로자를 관리하며 미국인 3명 중 한 명꼴로 자신의 옷을 입힌다. 세계 어디에도 월 10만원의 저임 근로자들을 이 만큼 무리 없이 이끄는 경쟁력은 흔치 않다.” 1980~90년대 국내의 혹독한 파업 속에서 갈고 닦은 노무관리 실력이 재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삼립식품은 고급 빵을 찾기 시작한 중국·동남아 중산층의 입맛에 맞춰 현지에 파리바게뜨 100호점까지 진출시켰다. ‘초코파이’의 오리온도 10년간 주가가 15배나 올라 시가총액이 5조원을 넘나든다. 그 작은 초코파이 하나로 거대한 대우해양조선을 제쳤고, 삼성중공업의 시가총액을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전통적 강자들의 주가는 초라한 추풍낙엽 신세다. 5년 전과 비교하면 조선의 강자인 현대중공업은 42%, 정유의 대명사인 SK이노베이션은 35%, 차세대 태양광의 황태자로 꼽히던 OCI는 61%나 주가가 곤두박질했다. 중국의 추격이 거센 데다 미국의 셰일가스 혁명으로 해양 시추와 태양광발전 수요가 뚝 끊겼기 때문이다.

경제는 움직이는 생물이다. 이미 수출제조업과 내수산업이란 구분조차 낡은 개념이다. 아모레가 97년 설화수를 선보였을 때 국내에 50만 개가 팔렸다면 이제 중국·동남아에서 1000만 개가 소화되는 세상이다. 또한 꼭 벤처만 창의적인 것도 아니다. 굴뚝업체인 영원무역·한세실업의 노무관리가 창조적 기술로 대접받는 시대다. 창조적인지 도태될 기업인지는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 결정한다. 더 이상 첨단 기술만 기술이 아니다. 이웃 일본의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던 도시바·후지쓰·파나소닉 생산라인에 요즘 야채가 자라고 있다. 경쟁력 상실로 반도체 클린룸을 무균 유리온실로 바꾼 것이다. 거꾸로, 전기 밥솥의 쿠쿠전자는 시가 총액이 2조원을 넘어 대한항공까지 추월했다. 이런 패러다임 대전환기에 뭐 중뿔난 ‘창조경제’가 따로 있겠는가. 더 많은 고용과 더 많은 수익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차라리 ‘아모레의 설화수가 창조경제!’라는 게 훨씬 피부에 와 닿을 듯 싶다.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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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3. 7. 21:39

두 주일 전, 벨리즈(Belize)를 다녀왔다. 기획재정부가 한국개발연구원(KDI) 주관으로 시행하는 경제발전 경험 공유 사업(Knowledge Sharing Program·KSP)의 수석고문으로 프로젝트 착수회의를 위해서였다. 주제는 벨리즈의 ‘국가 과학기술 혁신 전략 및 액션플랜 수립’ 등이다.

 지난해 TV 방송사의 10부작 기획취재 등이 인기를 끌며 벨리즈는 카리브해의 보석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멕시코·과테말라와 국경을 접한 인구 30여만 명의 나라, 1800년대는 영국령 온두라스였다가 1981년에 독립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구매력 평가 기준)은 8000달러 남짓, 원유·설탕·과일·마호가니 등이 자원이다. 중남미 국가 중 유일하게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짧다. 2012년 녹색기후기금(Green Climate Fund·GCF) 사무국의 송도 유치를 위해 막강 선두 주자인 독일 등과 치열하게 겨룰 때, 벨리즈는 카리브공동체(CARICOM) 대표국으로 우리 손을 들어줬다. 당시 민간 유치위원으로서 한 표의 절실함을 실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내년 8월이면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 의장 선거를 놓고 또 개도국의 지지를 청해야 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GCF로 맺어진 호혜관계는 지난해 한·벨리즈 KSP로 이어졌다. 첫 과제는 ‘국가 교통 마스터플랜 수립’이었다. 마야 정글의 생물다양성 등 천혜의 자연자본을 지닌 벨리즈가 기댈 수 있는 건 관광산업이다. 심해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신비의 블루홀(Great Blue Hole)과 세계 2위의 산호초 보호구역인 배리어 리프(Barrier Reef)는 유네스코 자연유산이다.

 그런데 한반도의 10분의 1 정도인 벨리즈는 가로·세로를 잇는 도로망이 단절돼 있다. 게다가 해안선 둘레길은 최근 허리케인 빈발로 몇 년마다 쓸려나간다고 한다. 그러니 올해 초 한국을 찾은 벨리즈 대표단이 교통망 관제시설을 둘러보며 감탄을 연발한 것은 당연했다.

 지난 4월 말 벨리즈에서 열린 제1차 KSP 최종보고회에서 우리 대표단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의식을 치렀다. 장내를 꽉 메운 행사장에서 에너지·과학기술부 조이 그랜트(A Joy Grant) 장관이 예를 갖춰 세월호 참사자를 기리는 추도식을 진행한 것이다. 우리 교통체계를 한껏 뽐내놓은 처지에 차라리 그대로 넘어가 주면 싶었는데, 내색도 못한 채 괴롭고 부끄러웠다.

 이번 제2차 KSP 착수회의 때도 공무원 100여 명이 참석했다. 벨리즈 국가의 전통악기 연주에 이어 우리 대표단이 녹음에 맞춰 애국가를 제창했다. 1절부터 4절까지, 이역만리에서 부르는지라 더 눈시울이 뜨듯해졌다. 옆에 선 KDI 실장이 4절까지 다 외우고 있느냐고 했다. 그 자리에서 스쳐간 생각이다. 국내 행사에서도 국기에 대한 경례로 국민의례를 때우다시피 할 게 아니라 4절까지 애국가를 부르며 잠시라도 나라 사랑을 상기하면 어떨까. 국회부터 나서주면 좋겠다.

 제1차 KSP 보고서를 작성하며 하나 받았으니 하나 주고 마는 식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썼다. 왕복에만 이틀이 걸리고 자원외교 가치도 별로 없는 터, 실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우리를 모델로 여기는 개도국들의 리더가 되는 건 매우 소중한 일 같다. 이제 아쉬울 때만 손을 내미는 게 아니라 인류애 차원에서 타산 없이 베푸는 외교를 할 때도 됐다. 벨리즈는 이번에 국무회의에서 한국을 비자 면제국으로 정하기로 했다고 한다.

 벨리즈의 수도 벨모판(Belmopan) 방문길에 곳곳을 살피게 됐다. 우리 새마을운동을 들여보내면 딱 맞춤형 솔루션이 될 것 같았다. 공동체 스스로 농가공·주거·물·에너지·폐기물 처리 등 최적의 가용기술과 기법(Best Available Techniques) 전파운동에 나서는 것이다. 이 얘기에 주무장관은 크게 반겼다. 그들에게 절실한 것은 개인주의 극복의 공동체 정신이라며.

 그들은 제1차 KSP 사업의 최종보고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국내 사정을 보니 연구윤리 규정이 까다로워져 검증에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개도국으로의 지식전파사업에 대해 학술논문과 똑같은 연구윤리 잣대로 비용을 늘리고 시간을 지체시키는 게 합당한 일인지 모르겠다.

 해외 지원사업의 성공요건은 무엇일까. 대표단이 열정과 성실로 마음으로 통하는 자세가 기본이다. 상대국의 필요와 요구,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파악해 수요국 중심의 실질적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 한국의 성공신화를 전수하되 상대국의 상황에 맞는 재창조가 필요하다. 그리고 부처별로 추진하고 있는 각종 사업의 내용을 파악·연계·상생하도록 총괄 조정하는 기능이 제대로 작동돼야 한다. 이런 조건이 충족된다면 한정된 예산이라 하더라도 지구촌 곳곳의 고난을 치유하는 데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몫은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KAIST 과학기술정책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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