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는 경제의 체온계다. 필자는 10여 년 전 증권거래소 출입기자를 했다. 지난주 우연히 시가총액 상위 종목을 다시 챙겨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엄청난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2004년 시가총액은 ①삼성전자 ②SK텔레콤 ③포스코 ④한국전력 ⑤국민은행(KB) ⑥KT ⑦현대차 ⑧LG전자 ⑨삼성SDI ⑩신한은행 순이었다. 전자와 통신, 그리고 금융이 주력이었다. 모두들 ‘수출 한국-IT(정보기술)강국’에 따라 이 서열이 영원히 굳어지리라 오해했다.
지난 10년간 증시의 미인주는 단연 네이버다. 주가가 20배나 올라 80만원이 됐다. 일본 증시에 ‘라인’까지 상장하면 시가총액은 50조원을 넘본다. 현대·기아차와 시가총액 2위 자리를 다투게 된다. 인터넷·모바일 시대의 무시무시한 단면도다.
하지만 진짜 눈길을 끄는 종목은 따로 있다. 화장품의 아모레, 먹거리의 오리온과 삼립식품, 의류의 영원무역과 한세실업이 그것이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10년 전 한결같이 외면받던 내수업종이란 점이다. 한물간 사양산업으로 여겨졌다. 하루 거래량이 1만 주도 안 됐다.지금은 어떨까. 예전 ‘태평양’이던 아모레퍼시픽 주가는 100배나 올라 250만원 선이다. 중국에서 ‘설화수’가 대박을 터뜨렸다. 해방 이후 만성 적자였던 화장품 수출입을 단번에 흑자로 돌려놓았다. 지주회사인 아모레G와 합치면 시가총액이 23조원으로 6위다. 증시 관계자는 “주가수익비율(PER)이 60을 넘어 부담스럽다. 하지만 아모레의 중국 시장 점유율이 현재 1.7%에서 5%로 오른다고 상상해 보라”고 말했다. PER이 6인 삼성전자를 압도하는 최첨단 성장주로 변신한 것이다. 이런 기대감에 외국인 보유 비중도 30%나 된다.
옷을 파는 영원무역도 4년 만에 주가가 10배나 올라 시가총액이 3조원을 넘었다. 한세실업 역시 5년간 주가가 10배 넘게 올랐다. 주식전문가 구재상 KCLAVIS 대표는 이렇게 접근한다. “영원무역은 방글라데시 등에서 7만 명 넘는 해외 근로자를 데리고 고급 옷을 전 세계에 수출하는 노하우가 탁월하다. 한세실업도 3만6000명의 해외 근로자를 관리하며 미국인 3명 중 한 명꼴로 자신의 옷을 입힌다. 세계 어디에도 월 10만원의 저임 근로자들을 이 만큼 무리 없이 이끄는 경쟁력은 흔치 않다.” 1980~90년대 국내의 혹독한 파업 속에서 갈고 닦은 노무관리 실력이 재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삼립식품은 고급 빵을 찾기 시작한 중국·동남아 중산층의 입맛에 맞춰 현지에 파리바게뜨 100호점까지 진출시켰다. ‘초코파이’의 오리온도 10년간 주가가 15배나 올라 시가총액이 5조원을 넘나든다. 그 작은 초코파이 하나로 거대한 대우해양조선을 제쳤고, 삼성중공업의 시가총액을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이에 비해 전통적 강자들의 주가는 초라한 추풍낙엽 신세다. 5년 전과 비교하면 조선의 강자인 현대중공업은 42%, 정유의 대명사인 SK이노베이션은 35%, 차세대 태양광의 황태자로 꼽히던 OCI는 61%나 주가가 곤두박질했다. 중국의 추격이 거센 데다 미국의 셰일가스 혁명으로 해양 시추와 태양광발전 수요가 뚝 끊겼기 때문이다.
경제는 움직이는 생물이다. 이미 수출제조업과 내수산업이란 구분조차 낡은 개념이다. 아모레가 97년 설화수를 선보였을 때 국내에 50만 개가 팔렸다면 이제 중국·동남아에서 1000만 개가 소화되는 세상이다. 또한 꼭 벤처만 창의적인 것도 아니다. 굴뚝업체인 영원무역·한세실업의 노무관리가 창조적 기술로 대접받는 시대다. 창조적인지 도태될 기업인지는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 결정한다. 더 이상 첨단 기술만 기술이 아니다. 이웃 일본의 최첨단 반도체를 만들던 도시바·후지쓰·파나소닉 생산라인에 요즘 야채가 자라고 있다. 경쟁력 상실로 반도체 클린룸을 무균 유리온실로 바꾼 것이다. 거꾸로, 전기 밥솥의 쿠쿠전자는 시가 총액이 2조원을 넘어 대한항공까지 추월했다. 이런 패러다임 대전환기에 뭐 중뿔난 ‘창조경제’가 따로 있겠는가. 더 많은 고용과 더 많은 수익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차라리 ‘아모레의 설화수가 창조경제!’라는 게 훨씬 피부에 와 닿을 듯 싶다.
이철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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