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3. 15:39

ㄴ왜 휴식이 중요한지, 월화수목금금금이 능사가 아닌지 보여줌



적당한 휴식과 압박 해소 방법이 있어야
효율성과 윤리성을 확보할 수 있어 

15년 전 박사학위를 마친 후 미국대학에서 연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환경청의 'STAR'라는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스타과학자를 위한 연구비가 아니라, '결과를 성취하기 위한 과학'이라는 말의 머리글자였다.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 뚜렷한 결과를 내어 놓으라는 관료들의 압박이 반영된 것이었다.

지난 연말연초에 걸쳐 세 가지 흥미로운 뉴스를 접하였다. 첫 번째는 하버드 대학에서 있었던 폭탄설치 위협 사건이다. 학교에 폭탄이 설치되었다는 위협메일 때문에 FBI가 출동하고 기말고사를 보던 학생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며칠 후 심리학 전공의 한국계 신입생이 협박 메일을 보낸 혐의로 체포되었다. 두 번째 기사는 한 펀드 매니저의 재판 이야기였다. 이 사람은 불법적인 내부자 거래로 27억 달러의 부당 이익을 취한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 받는 중이었는데 정작 뉴스거리는 그가 15년 전 학생시절에 한 일이었다. 마지막 이야기는 미국 프로 야구선수 알렉스 로드리게스에 관한 것이었다. 로드리게스는 뉴욕 양키스 3루수로 최다홈런과 연봉 기록을 기록한 인기 절정의 메이저리그 선수였다가 불법 약물 복용 혐의로 출장 정지된 상태이다. 그런데 약물 복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담은 보고서가 언론에 알려지면서 그의 이야기가 다시 수면위에 떠올랐다.

불법적인 일을 하다가 처벌을 받게 되었다는 점 이외에도 이 세 가지 에피소드의 배경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이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각 분야에서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천재들이란 점이다. 어느 분야의 엘리트라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윤리적일 것이란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성적이 좋은 학생, 높은 공직에 있는 관료, 대기업의 임원, 연구와 강의를 잘하는 교수, 모두 비윤리적인 행동을 할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엘리트들의 비윤리적인 행동은 보통사람의 것을 뛰어 넘는다. 폭탄 위협 메일을 보낸 학생은 자신의 IP를 숨기려고 두 가지 프로그램까지 사용했고, 펀드 매니저의 경우에는 성적 조작이 들통 난 후에도 가짜 이메일과 유령 컴퓨터 회사 보고서까지 조작하다 결국 학교에서 퇴학당했고 이름까지 개명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로드리게스의 경우 처음 주장과 달리, 사실은 요일별로 또 경기 일정별로 자세한 약물 주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불법적인 행동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성공에 대한 주위의 강한 압박이다. 정황을 보면 하버드대 학생은 어려서부터 학업에 대한 주위의 기대가 매우 컸고, 결국은 기말고사를 중단시키겠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이르게 되었다. 펀드 매니저는 처음에 성적 조작을 한 이유가 좋은 성적을 기대한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실토했다. 로드리게스의 경우 약물 복용을 정기적으로 시작한 시점은 그의 연봉과 인기가 치솟기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쉴 틈 없이 결과를 독촉하면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도 비윤리적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연구실의 일주일은 '월화수목금금금'이라던 어느 한국 과학자의 표현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돈 버는 동물이라 불리는 미국 금융계의 대표 회사들조차 비윤리적인 행위를 줄이고자 제시한 첫 번째 방안이 직원들을 휴일에 쉬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 가족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 종교 활동이나 사회봉사에 참여하는 것 등이 오히려 업무 성과를 더 높인다는 연구 결과들 또한 생각해볼 점이다. 내 주위를 보면 '열심히 연구하는 것'과 '실험실에 늦게까지 남아 있는 것'을 혼동하는 과학자들이 많다. 회사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위에서 결과만 독촉하고 밑에서는 자리에 앉아 전전긍긍 하고 있는 것, 이것이 비윤리와 비효율의 시작점이다. 휴식과 사람 관계의 회복, 이것이 높은 윤리성과 우수한 결과를 얻는 상책이다. 이는 내 개인적인 경험과도 일치한다. 박사과정 때부터 지금까지의 내 연구 경력을 되돌아보면, 'STAR'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 정작 결과물은 제일 초라했었다. 

강호정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2465067


Posted by 겟업
2014. 12. 3. 15:35

산업혁명으로 출현한 철도는 19세기 사람들의 시ㆍ공 개념을 바꿔 놓았다. 프라이버시(Privacy) 개념이 싹튼 것도 철도여행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영국인들은 덜컹거리는 객실에서 난생 처음 보는 사람들과 오랜 시간 마주 앉아 있어야 했고, 어색함을 덜기 위해 책을 읽었다. 그래도 상대와 눈이 자꾸 마주치는 난감함은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혼자 있을 권리라는 의미의 프라이버시가 '사람의 눈을 피하다'는 뜻의 라틴어 프리바툰(Privatun)에서 유래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 프라이버시를 실정법상 권리 개념으로 끌어올린 건 1890년 미국의 새무엘 워렌과 친구인 루이스 브랜다이스였다. 보스턴에서 잘 나가는 변호사였던 워렌은 자신의 딸 결혼 소식이 지역언론에 가십성으로 시시콜콜 보도되자, 브랜다이스와 함께 사생활 보호를 위한 법 이론을 궁리해 냈다. 이들은 하버드로리뷰((Harvard Law Review)에 기고,'혼자 있을 권리(The right tobe let alone)'를 '프라이버시권'이라는 개념으로 구체화했다.

■ 디지털시대에 프라이버시는 자신의 정보를 언제, 어떻게, 어느 정도로 타인에게 전달하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 이른바 정보의 자기결정권으로 확장된다. 문제는 디지털의 특성상 한번 기록된 정보는 지워지지 않을뿐더러, 쉽게 복제ㆍ유출돼 당사자의 족쇄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에서 생성ㆍ저장ㆍ유통되는 글과 사진 등 개인정보에 대해 삭제ㆍ수정ㆍ영구파기를 요청할 수 있는 '잊혀질 관리(The right to be forgotten)'가 대두한 것도 그 때문이다. 유럽연합(EU)이 가장 먼저 이를 명문화한 정보보호법 개정안을 확정, 올해 발효를 추진 중이다.

■ 유례 없는 신용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사건으로 국민의 불안감이 높아지자, 정부는 주민등록번호제도 개편에 나섰다. 하지만 이런 조치만으로 개인정보를 온전히 지킬 수는 없다. 각자의 경각심이 있어야 한다. 온라인에서 무심코 흘린 정보들이 때로 혼자 있고 싶을 자유마저 빼앗게 된다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박진용 논설위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2464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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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3. 15:33

병리적 현상으로 자리잡은 공격과 저주의 사회
이해하고 협상하여 타협하는 게 사회통합의 출발 


최근 일본인 친구가 내게 "도쿄 시내에서 자동차 경적음이 자주 들린다"며 심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여러 의미에서 탄성이 나왔다. 일본인은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많기로 정평이 나 있다. 역사 문제에서 계속 말썽을 부리지만, 내부적으로 화합을 중시하는 특유의 인내심과 친절도 등은 높이 사줄 만 하다. 때문에 차량 경적음은커녕 다른 승객에게 피해를 줄까 봐 지하철에서 전화 통화하는 이들도 보기 어렵고, 다리를 꼬고 앉는 이도 드물다. 그런데 최근에는 야간에도, 주택가에도 경적음이 심심찮게 들린다니 분명 변화는 변화인 것 같다.

그는 장기 불황 탓에 경제불안 요소 등이 커지게 되자 사회 전체가 점점 자기중심적으로 변하면서 사납게 거칠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논리의 비약일 수는 있다. 그러나 단순히 경적음을 갖고도 타인에 대한 공격성 점증을 걱정하는 것을 보고 좀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우린 어떤 모습인가.

경기침체가 계속되면서 양극화 심화와 취업난 가중, 물가고 등은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여기에 대선을 몇 차례 거치면서 정치 노선과 이념은 극단적으로 이분화했다. 국민 갈등이나 분노가 생길만한 요소는 분명히 존재한다. 원인제공 측면에서 보면 일본보다 덜할 게 없다. 문제는 불만감 표출의 정도다.

얼마 전 임순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교양방송특위 위원은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경축! 비행기 추락 바뀐애 즉사'라고 적힌 종이를 찍은 사진을 리트윗하면서 청와대로 보내자고 적어 파문이 일었다. 즉사를 축하한다니 이 무슨 섬뜩한 내용인가. 또 국회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피살을 언급하면서 딸이 전철을 밟을 수 있다거나, 귀태(鬼胎ㆍ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의 후손이라고 칭하는 등 온갖 저주의 비수가 난무했다. 일각의 저급한 돌출 행동으로 보기엔 너무나 도가 지나치다.

인터넷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진보진영을 적대시하는 '일베'란 사이트에는 특정 지역 비하에서 종북 덧씌우기 등 차마 옮겨 적기 힘든 내용이 대부분이다. 일반 사이트에도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에 대한 공격성 글은 특정인을 자살에 이르게 할 정도로 심각하다.

작은 일에도 적개심부터 들이대는 것은 직장이나 학교 등 가까운 주변에서 흔히 눈에 띈다. 심지어 종교계에서도 천주교 염수정 추기경이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치개입 자제를 호소하자 한 교인이 "차라리 하늘로 올라가시라"는 폭언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야만사회다. 다혈질 민족성을 따질 게 아니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폭력적으로 바뀌었는지 개탄스럽다.

사회적 분노가 커지면 합리성은 줄어든다. 애정 어린 비판은 사라지고 자신만의 정당성만 앞세우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우리가 후대에게 물려줄 암울한 자화상이다. 이와 관련 사회학자들은 "극단적인 분노를 쏟아내는 내면엔 사회적 불만에 대한 공허함이 있기 때문에 정치권에서부터 이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서둘러 모색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박 대통령을 포함해 정치권에서는 입만 열만 사회통합을 외친다. 여야 모두 할말은 많겠지만 국정의 무한 책임을 지는 여권이 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는 점은 불문가지다. 때문에 박 대통령도, 정부 여당도 반대세력과의 타협이나 협상은 굴욕이나 불의가 아니라 사회통합으로 가는 단계적 과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시간이 걸려도 그 길로 가야 한다.

하지만 정치권에만 해법을 요구하는 것도 무책임하다. 교과서적인 이야기지만 개개인이 생각과 방법이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마음가짐부터 갖도록 해보자. '악(惡)을 악으로 대하면 본인이 악이 된다'는 단순한 사실만 새겨둔다면 변화하지 못할 것도 없다. 여기서 염 추기경이 서임에 즈음해 한 말이 내 가슴에 남아 있다. "저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웃을 넘어 형제처럼 살아가는 꿈입니다. 그 꿈을 이룰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꿈이 아주 작게라도 현실화했으면 좋겠다. 

염영남 논설위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2464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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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3. 15:12

새 정부가 내건 창조경제의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논란이 많다. 그러나 정부가 그것을 반드시 정의할 필요가 있을까? 이를 굳이 정의하려 들면 뜻이 좁아지고, 오히려 왜곡이 생기게 된다. 국민들은 이를 굳이 정의하지 않더라도 대충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같이 자본, 노동의 투입 증가를 통해 높은 성장률을 지속하는 것은 이제 한계에 달했으니 생산성을 높여 고성장을 지속하자는 뜻이 아닐까.

 경제학에서는 이 생산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총요소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자본, 노동과 같은 요소 투입의 증가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성장의 증가를 뜻한다. 즉 자본과 노동을 2%씩 증가시켰는데 경제는 5% 성장했다면 총요소생산성 증가에 의해 나머지 3%의 성장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일종의 ‘잔여(residual)’ 개념이다. 이 속에는 생산기술의 혁신뿐 아니라 노사관계, 경영효율성, 법, 제도의 개선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따라서 우리가 ‘창조’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향상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창조경제를 실현할 능력은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지식 수준과 각종 제도의 합리성에 달려 있으며, 이들을 얼마나 높여갈 수 있는가가 창조경제의 성패를 가르게 된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나누는 가장 큰 잣대가 바로 기술과 지식을 선도하고 있는가, 제도와 법 적용이 합리적인가 하는 것일진대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 시점에서 창조와 혁신을 강조하는 것은 적절하고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지식 수준과 합리성을 어떻게 높일 것인가? 교육개혁이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필자는 여기서 우리의 사회문화를 먼저 말하고 싶다. 지식은 독서와 사색, 그리고 토론과 실험을 통해 축적된다. 그리고 이는 절대적 시간의 양을 필요로 한다. 잦은 술자리와 경조사를 챙겨야 하는 집단주의 문화에서 지식이 자라기는 어렵다. 아마도 일제의 유산인지 모르나 오늘날 우리는 매우 집단적인 사회문화를 가지고 있다. 런던정경대 교수였던 미치오 모리시마는 『왜 일본은 성공했는가?』(1982)라는 저서에서 유교의 충(忠)이라는 말이 원래 중국에서는 스스로 마음의 중심을 가지는 것, 즉 자신에 대한 충실을 뜻했으나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와서는 자기가 속한 집단에 대한 충성이 더 강조되었다고 한다. 

 집단에 대한 충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는 양적 성장을 이루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될지 모르나 혁신과 창의에 의한 질적 성장을 도모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스터 엔’으로 잘 알려진 사카키바라 전 일본 대장성 재무관은 2003년 브루킹스연구소에서 출간한 『일본의 구조개혁: 철의 삼각구조를 깨야』라는 저서에서 일본 경제는 10%만이 자유시장경제이고, 나머지 90%는 사회주의경제라고 비판한 바 있다. 계열사나 협회를 통한 담합으로 보호와 진입장벽을 쳐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담합주의, 특히 정부 관료와 각종 협회, 자민당의 결속으로 대표되는 철의 삼각구조로 도요타, 소니와 같이 세계 경쟁에 노출된 약 10%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 경제는 묵시적 담합구조로 편안히 ‘나누어 먹기’에 안주해 일본이 90년대 이후 더 이상 자본, 노동의 증가에 기댈 수 없게 되자 곧 잃어버린 10년을 맞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담합에 기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각종 모임에 빠지지 않고 경조사, 명절에 얼굴을 내밀며 바쁘게 뛰어다니는 일본 사회는 지식과 창의력 면에서는 여전히 서구 선진국들에 뒤지는 상황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일본 사회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담합적 모임 중시적 문화와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실력보다 연줄이나 관계가 중시되는 사회는 결코 지식사회, 창조경제로 나아가기 어렵다. 창의와 혁신은 치열한 경쟁에서 나오며,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것은 그 사회의 지식 수준과 합리적 제도, 관행이다. 담합구조의 혁파, 실력에 의한 공정 경쟁, 인사제도의 혁신이 바로 창조경제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미래창조과학부만이 창조경제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정부의 지원을 강화해 창조경제를 이루려 해서는 지대추구(rent seeking) 행위만 성행시킬 뿐이다. 모든 정부 부처가, 그리고 국회와 정치권이 현재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각종 제도와 관행의 합리성을 제고시키고, 사회 전 분야에서 담합구조를 혁파해 공정경쟁 기반을 확대해 나갈 때 비로소 창조경제를 이뤄나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좀 더 개인주의적 문화를 존중할 필요도 있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1936793

Posted by 겟업
2014. 10. 18. 18:29

1996년 미국 프로미식축구팀 탬파베이 버커니어스는 연전연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영입된 감독이 토니 던지다. 그는 1년 만에 이 팀을 최강으로 바꿔 놓았다. 비결은 무엇이었나. 미식축구에서는 1000분의 1초가 중요하다. 공을 던지는 짧은 순간에 선수들이 어떤 전략을 취할까 머뭇거리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도록 몇 개의 동작 패턴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신체반응을 자동화한 것이다.

▷지난해 7월 아시아나항공의 여객기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비상착륙하다가 추락했다. 항공기 꼬리 부분이 떨어져 나간 엄청난 사고였지만 중국 소녀 2명의 희생자 외에 대부분 무사했다. 승객들이 안전하게 대피한 데는 이윤혜 최선임 두 여승무원의 힘이 컸다. 이들은 자신들도 부상당한 몸으로 승객을 모두 내보낸 뒤 마지막에야 빠져나왔다. 두렵다는 본능을 이기고 이들이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훈련에 훈련을 거듭한 결과였다.


▷영원한 여왕 김연아도 마찬가지다. 19일 쇼트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 그의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경기 직전 워밍업 시간에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연습 때 편하게 뛴 점프가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그랬던 김연아가 실전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한 마리 노랑나비처럼 가볍고 우아한 점프를 선보였다. 김연아의 말을 들으면 왜 운동선수들이 “실수도 실력”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 같다. 어떤 일에 1만 시간을 투자하면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 김연아는 하루 8시간씩 줄잡아 3만 시간을 연습했다.


▷골프선수들에게 골프를 잘 치는 비결을 물으면 그냥 힘을 빼고 툭 친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는 머리가 아니라 손가락이 음표를 기억한다고 말한다. 훌륭한 배우는 몸에 자세와 몸짓이 저장되어 있고 필요에 따라 꺼내서 쓰는 듯하다. 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몸은 자신의 지성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몸이 저절로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 평소 얼마나 피나는 연습을 했겠는가. 평범한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http://news.donga.com/List/Column/3/04/20140224/61148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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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8. 17:45

中, 끊임없이 동북공정 주장… 日, 한반도 분쟁시 개입 노골화 
美는 日의도 용인하는 움직임 
한반도 둘러싼 냉엄한 국제정치, 제국주의 날뛰던 구한말과 비슷 
복지논쟁으로 국방예산 줄어 필요한 전투기도 못산대서야…


최중경 객원논설위원 미국 헤리티지재단 연구위원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출했을 때 프랑스신문 삽화에 묘사된 베트남을 보면 조선과 유사한 관복을 입은 관리와 임진왜란 때 사용했던 총통 같은 공용화기를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강토를 침입하는 외적에게 대포를 쏘며 저항할 수 있는 나라는 몇 개쯤 존재했을까? 임진왜란이 있었던 16세기 말에는 몇 나라가 자체 기술로 만든 대포를 보유했을까? 2차방정식 ‘근의 공식’을 알았던 조선의 수학 수준은 세계 몇 위의 실력이었을까? 개성상인이 사용했던 회계장부(송도사개치부법)는 서구의 회계장부(복식부기)와 같은 방식인데 어느 것이 앞선 것이었을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으니 형편없는 꼴찌 국가였을까? 한국은 21세기 들어 주요 20개국(G20)이 됨으로써 역사상 최고의 시절을 맞이한 것일까?

한 가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16세기 말 조선은 세계 20위 이내에 드는 국가였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보다 큰 나라는 중국 인도 터키와 유럽의 몇 개 국가에 불과했으니 20위 안에 확실히 들었고, 10위권에 근접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전쟁사학자들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육군이 오랜 내전 경험과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돼 있어 당시 세계 최강이었다고 평가한다. 이것을 보더라도 접전을 벌이던 동양 3국의 무력 수준이 세계 수준이었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 이끌던 조선해군은 산탄포(조란탄), 로켓화살(신기전) 등 세계 최첨단을 달리는 해상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역사 얘기를 하는 이유는 20세기 초 대한제국이 세계 순위로는 결코 우스운 나라가 아니었음에도 식민지가 된 이유를 말하기 위해서다. 그것은 강한 주변 국가들이 제국주의를 실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통해 고구려가 중국의 한 지방정권이었다고 꾸준히 주장하고 있다. 이는 북한에 권력진공 상태가 올 때 군대를 진주시킬 명분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한글 문자판 표준화를 주도할 뜻을 비친 중국을 곱게 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은 집단자위권 행사를 계기로 한반도 분쟁에 적극 개입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미국이 이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우리에게는 부담이다. 현재 상황이 구한말의 상황과 유사하다는 언급이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고 식자(識者)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것이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의 국방능력 평가는 북한을 상대로 하는 비교평가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중국 일본 등 주변국과 비교해 어떤 위치에 있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태평양전쟁의 적이었던 미국과 일본이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중국이 이어도를 방공식별구역에 포함시킨 가운데 한국의 입지가 점점 더 좁아지고 있는 현실이 답답해 보인다. 

미군의 화력에 국방을 의존하는 상황을 편하게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부국강병 자주국방을 외친 이유를 오늘에 새겨야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명과 재산을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자주국방’의 깃발이 왜 사라졌는지 심각하게 반성해야 한다. 먹고살 만하게 되고 G20이니, 세계 7위의 수출대국이니 하니까 무력도 세계 수준인 것으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세계 2위 국가라도 바로 옆에 있는 세계 1위 국가가 제국주의 야욕에 휩싸이면 종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국내 상황을 보면 걱정이 태산이다. 복지논쟁으로 국방예산의 운신 폭이 좁아져 제대로 된 신형 전투기를 필요한 만큼 사기 어려운 것은 개탄할 일이다. 적이 코앞까지 진격해 와도 잔치는 해야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점점 꼬이는 환경에서 민족이 살아남는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방책을 내놓는 일에 모두 나서야 한다. 성장동력을 발굴하고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일이 더없이 중요하지만 발등 위의 안보불씨가 연기를 피워내는 형국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부국강병 자주국방의 기치를 높이 세워야 한다. 지난 50년의 경제적 성취에 자부심을 가져도 되지만 ‘아무도 넘볼 수 없는 번영의 반석’ 위에 오르려면 갈 길이 멀다.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소명이라고 생각한다면 한반도 주변을 돌아보고 숨을 고를 때다. ‘스스로 지킬 힘이 없는 복지국가’는 의미가 없다. 날지 못하는 때깔 좋은 메추리는 사냥감이 되기 쉽다.


최중경 객원논설위원 미국 헤리티지재단 연구위원


http://news.donga.com/List/Column/3/04/20140228/61265487/1#replyLayer



Posted by 겟업
2014. 10. 18. 16:26

251억원 생산유발, 107억원 부가가치, 외국인 관광객 62만명 증가, 876억원 수익창출, 300여명의 고용, 지역경제 활성화, 더 나아가 4000억원 규모의 직접 홍보, 국가브랜드 상승 등 총 2조원 규모의 경제 효과.

정부가 역대 세 번째 흥행기록을 보유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어벤져스2'의 국내 촬영으로 기대되는 성과로 제시한 수치들이다. 오는 30일부터 다음달 14일까지 서울 곳곳의 교통을 통제하며 촬영할 예정인 이 영화에 국무총리까지 나서 한국의 위상을 알릴 좋은 기회라며 격려하고 서울시장도 협력을 다짐했다. 범 국가차원에서 국가홍보의 대박이 터질 것 같은 기대감을 불어넣는 모양새다.

정부 주장대로 전 세계 관객들에게 대한민국 호감도를 높이고 스크린 투어리즘 즉 국내 관광 활성화에 대한 기대를 현실화시키려면 국가의 해외 홍보 매체로 할리우드 영화를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첫째 해당 영화의 전편을 관람했던 국내외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에 등장한 도시를 기억하고 있는지, 둘째 영화 스토리 상 배경이 된 도시에 대한 호감정도, 셋째 영화에 등장한 도시가 실제 존재한다면 방문할 의도가 있는지에 대한 검증이다. 검증 후 확신이 생기면 수십억을 투자하고 전폭적 지원을 해도 문제될 것 없다. 그런데 매번 국가홍보를 논할 때 경제효과는 제시하면서 현 상황인식은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도 해외에서 한국을 잘 모른다는 문제로부터 시작되는 소통인지, 아니면 한국을 아는 외국인들이 많아진 상태에서 그들의 호기심에 답하는 방식의 소통을 할 것인지 국가홍보의 출발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홍보가 지향하는 메시지는 무엇이며 핵심적으로 공략하려는 대상과 전달해야 할 홍보 자산의 우선순위를 결정할 수 있다.

영화를 통해 첨단 IT 도시국가의 이미지를 보여 주겠다는 논리도 좀 궁색하다. 지금 우리가 세계에 알려야 하는 서울의 모습은 첨단 IT 도시가 아니라 역사와 첨단이 작은 골목까지도 묻어나는 융합형 도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벤져스2'에서 대한민국을 어느 정도 분량으로 어떤 영상에 담아낼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양해각서를 체결한 정부가 지향한 목적, 진행 과정과 성과를 제대로 평가해 향후 국가홍보에 대한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통령도 영화를 비롯한 콘텐츠 산업의 중요성과 창조경제를 주창하는 이 때 배급과 상영이 제작편수를 소화하지 못하는 우리 독립영화 시장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자칫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겠다는 정부의 좋은 의도가 시민의 불편만 초래한 것으로 왜곡되고 국가홍보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국내 마케팅 효과만 극대화시켜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융합의 도시 서울을 알리는 홍보 전술로는 한편의 할리우드 영화보다 대한민국 창조경제의 주체들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독립영화가 더 유효할 수 있다. 국가홍보에 있어 우리만의 방식과 콘텐츠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다. 할리우드발 문화콘텐츠 '어벤져스2' 영상 일부를 활용해 국가 홍보영상을 만들겠다는 발상도 그래서 좀 어색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국제사회에서 높아진 위상에 걸맞은 해외홍보의 틀을 갖춰야 할 때다. 따라서 국민에게 아리랑국제방송원법과 같은 해외 홍보 지원법이 빨리 통과되어 국가홍보에 숨통을 터주어야 한다는 여론의 지지를 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국제방송에 대한 지원과 관련 제도를 보완해 국격에 맞는 해외홍보의 교두보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 관점에서 대한민국 콘텐츠 크레에이터들의 다양한 결과물을 축적시켜 나가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한건주의 국가홍보로 단기적 성과만 좇는 데 급급했다. 또한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국내에 특정 조직이나 개인을 알리기 위해 대한민국을 활용하는 조악한 국가홍보가 만연한 현실이었기에 이제 정부만이라도 중심을 잡아달라는 간언이다.


이종혁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http://www.hankookilbo.com/v/185926b044f34557ae35442e6900061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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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0. 16:28

저녁 모임에서 한 선배가 말했습니다. “목표와 꿈은 다른 거라고 생각해.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 만약 네가 의대에 진학하려고 한다면 그건 너의 목표이지, 너의 꿈은 아니다.” 그러자 아이가 물었답니다. “목표와 꿈이 어떻게 달라?” 선배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가령 네가 ‘나는 의사가 될 거야’라고 한다면 그건 너의 목표라고 봐. 대신 ‘나는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될 거야’라고 말한다면 그건 너의 꿈이라고 봐.”

 흥미롭더군요. 목표와 꿈, 둘의 차이는 과연 뭘까요. 사람들은 다들 ‘목표’를 좇습니다. 특목고를 좇고, 일류대학의 인기학과를 좇고, 높은 연봉의 근사한 직장을 좇습니다. 그걸 위해 앞만 보고 달립니다. 부모도 그걸 원하고, 선생님도 그걸 원하고, 자신도 그걸 원합니다. 목표만 달성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저절로 풀릴 것만 같습니다. 

 막상 그걸 성취한 사람들은 달리 말합니다. “허전하다”고 말합니다. 대기업의 CEO가 된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더군요. 삶이 허전하다고, 이유를 모르겠다고. 대체 왜 그럴까요. 무엇이 빠졌기에 그런 걸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 때도,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자신을 향해 “왜 나는 공부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음을 던지지 않으면 꿈이 싹트지 않습니다. 왜냐고요? 물음이 바로 ‘꿈의 씨앗’이기 때문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는 사람에게는 ‘목표’만 있을 뿐입니다. 목표를 달성한 뒤에는 허전함만 밀려옵니다. 그래서 또 다른 목표를 만들고, 또 만듭니다. 

 그럼 슈바이처는 어땠을까요. 그는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도, “슈바이처 같은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대신 무엇을 했을까요. 먼저 자신을 향해 물음을 던졌을 겁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왜 의사가 되고 싶은가?” “의사가 된다면 어떤 의사가 될 것인가?” “왜 그런 의사가 되고 싶은가?” “그건 내 삶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걸 진지하게 묻고, 묻고, 또 물었을 겁니다. 그렇게 씨앗을 심으니 싹이 트는 겁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이에게 저는 계속 묻습니다. “너는 왜 공부를 해?” 아이는 처음에 답을 못했습니다. 좀 더 지나자 나름의 답을 합니다. “모르겠어. 나는 커서 뭘 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어.” 저는 또 묻습니다. “그래? 그래도 괜찮아. 그건 나중에 싹이 틀 수도 있고, 바뀔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너는 왜 공부를 해? 공부가 왜 네게 필요하지? 네가 왜 학교에 가고, 왜 학원에 가는 거지? 힘들고 피곤할 텐데.” 저는 그저 물음만 던집니다. 

 그럴 때마다 아이는 생각에 잠깁니다. 골똘하게 이유를 찾습니다. 자기 안으로 내려가 묻습니다. “정말, 나는 왜 공부를 하지?” 저는 그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길어 올리는 과정. 거기서 생각의 근육이 생기니까요. 답은 하루 이틀 사이에 툭 튀어나오진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대답합니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저는 속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그건 아이가 직접 찾은 ‘내가 공부하는 이유’였습니다. 그날부터 아이가 조금씩 달라지더군요. 혼자서 계획을 세우고 자기가 알아서 책상에 앉습니다. 저게 남들이 말하는 자기 주도 학습인가 싶더군요. 

 “왜?”라는 물음은 자기 마음에 심는 씨앗입니다. 그 씨앗에서 싹이 틉니다. 그 싹이 자라서 꿈이 됩니다. 그래서 꿈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목표에는 뿌리가 없습니다. 목표 달성 후에 허전함이 밀려오는 까닭입니다. 그러니 “왜?”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주도 학습도, 자기 주도적 삶도 가능하니까요.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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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0. 16:27

기업의 이윤과 주주 이익의 극대화에 몰두했던 주주자본주의가 도전 받고 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많은 나라가 소득 양극화, 저성장과 고실업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다보스포럼에서도 승자 독식의 신자유주의 경제 운영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상대적 빈곤감, 복지 사각지대, 소외계층, 노사 갈등이 심화되고 세월호 침몰 이후 사회 구성원 간 불신과 반목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기업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고 심지어 반기업 정서마저 감돌고 있다. 이제 국민과 사회로부터 받는 사랑은 기업 생존의 필수요건이 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최근 저성장과 사회적 갈등을 치유하고 지속가능 성장을 위해 공유가치 창조(Creating Shared Value·CSV)가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버드 경영대학의 마이클 포터 교수와 미국의 상생연구재단 마크 크레이머 대표가 CSV를 개념화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학자들과 기업인들이 CSV 연구회를 결성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CSV의 관점에서 보면 우선 글로벌 시대에 대·중소기업이 상호 보완적 협력을 네트워크화하면 상생의 길이 열린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기업이 추구하는 이익활동을 사회가 추구하는 목표에 조준해 사회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수익성 비즈니스 모델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일부 기업들은 지금 CSV경영 이념을 도입하고 있다. 지금 절실히 필요한 우리 경제의 재도약과 사회적 통합을 위해 한국형 CSV 경영전략을 적극 실천할 때이다.

 유엔은 회원국의 사회발전을 위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강조하고 있다. 기업은 그동안 사회의 성원에 의해 성장하였으므로 이제는 사회에 이익의 일부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하지만 기업은 아직도 CSR활동을 기업의 비용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CSV는 CSR에서 진일보한 개념으로 기업의 핵심 역량으로 사회 문제도 해결하고 수익 창출의 기회를 찾는다는 것이다. 한국형 CSV는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우선 내부 구성원 간의 기업 목표에 대한 합의, 대기업과 중소기업과의 상생협력, 그리고 기업·사회와의 공생을 통한 3차원의 공유가치 창조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 경제가 당면하고 있는 최우선 과제는 일자리를 늘리는 일이다. 우리 경제에서 일자리의 88%는 중소기업이 제공하고 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함께 CSV활동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반성장위원회가 관여한 몇 개의 CSV 사례를 보자. 대기업의 전문인력 지원을 받아 멀티미디어 연결소자를 만든 중소기업의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해당 중소기업은 종래의 청동자재를 스테인리스로 바꾸고 제조공법 자체를 부품 결합형에서 단순 일체형으로 바꾼 결과, 연 매출이 재작년 28억원에서 작년에는 72억원으로 늘어났다. 연결소자의 개당 공급가격도 낮아져 대기업도 부품조달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철강의 생산과 가공공정에 필요한 냉각기를 대·중소기업이 공동 개발해 수입품을 대체한 결과 52억원의 새로운 매출이 발생했고 대기업은 원가 절감을 거둘 수 있었다. 최근 미국 LA에서 한 대기업이 한류 문화 행사에 해외 홈쇼핑과 연계해 중소기업의 상품전시회를 개최했다. 행사 기간 동안 중소기업들이 제작한 미니 가습기, 치약 부착 칫솔, 컵 등이 매진되었고 온라인으로 추가 주문까지 받고 있다. 저소득층 난청 노인을 위해 표준 모듈화로 저가 보청기를 개발한 중소기업은 어려운 노인의 복지 향상과 자체 수익을 증진시킬 수 있었다.

 공유가치 창조의 실천을 위해서는 선결 과제가 있다. 우선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공유가치 창조에 대한 확고한 비전과 실천의지를 보여야 한다. 그리고 기업이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구성원 간 합의도 유도해야 한다. 기업이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에 합의하면 우리의 만성적 노사 갈등의 해법도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민과 사회의 모든 이해관계 당사자들이 협동의 가치를 공감하고, 소통하고, 나눌 때 기업의 CSV활동은 성공을 거둘 수 있다.

 추석이 다가온다. 경향 각지로 흩어졌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송편을 함께 빚는다. 우리는 오랜 역사를 통해 쌀 중심의 농경문화를 지니고 있다. 적기에 모내기를 하고 김매기를 부락민이 함께하는 품앗이의 DNA를 지니고 있다. 동반성장위원회는 기업의 공유가치 창조에 민간 촉매제 역할을 가속화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지녀온 상생의 DNA를 일깨워 공유가치 창조로 지속가능 성장과 사회적 통합을 함께 일궈낼 수 있다. 이제 주주자본주의는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해야 한다.


안충영 동반성장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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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0. 16:18

얼마 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를 인용해 한국의 기현상을 보도한 적이 있다. 한국 근로자 수면 시간(7시간49분)은 조사 대상 18개국 중 가장 짧은데, 근로 시간(2237시간)은 2위로 회원국 평균보다 393시간이나 많고, 노동생산성은 평균의 66% 수준이라는 것. 잠도 안 자고 일하는데 생산성은 왜 이렇게 낮냐는 거다. 실제로 오래 일하는 부지런한 근로자의 인당 노동생산성은 OECD 33개국 중 28위, 1등인 노르웨이에 비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통계로만 보면 일당백(一當百)은커녕 일당 3분의 1밖에 안 되는 게 우리 근로자 경쟁력의 현주소다.

물론 근로 시간이 긴 건 자영업자가 많아 생긴 착시라는 등의 변명은 있다. 하지만 기업부문 효율이 떨어진다는 점은 기업 스스로도 인정한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이런 비효율 사례를 들어 한국 기업의 문제를 ‘부지런한 비효율’이라고 꼬집는 보고서를 냈다. 

지난주엔 현대자동차 노조 파업으로 국내 최대 기업 생산현장의 낮은 생산능력도 목격했다. 차 한 대 생산에 걸리는 시간은 미국이 14.8시간인데 한국은 27.8시간이란다. 이에 현대차 근로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오래 일하는지 강조한다. 특근과 잔업 등으로 보통 2800~3000시간씩 일한단다. 한데 물어보면 이유는 수당 때문이다. 기본급이 적어서 수당으로 채우지 않으면 생활이 어렵다고도 했다.

한 인사관리 전문가는 "모든 문제는 임금 체계로 통한다”고 했다. 현대차는 강성 노조 등 특수성이 있지만 그들의 생산성 문제도 결국 임금체계 실패의 한 사례라는 지적이다. 현대차의 임금 설계가 근로자들의 비효율과 생산성 저하를 합리화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생산성은 떨어뜨리고 더 오래 일하는 게 이익이 되는 임금 체계의 덫으로 근로자 삶의 질도 함께 떨어졌다.

실제로 우리 임금 체계는 시대가 변해도 연 공급에 따른 호봉제와 시간급제가 굳건해 이 틀을 깨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에 올 3월 고용노동부는 기본급을 중심으로 임금 구성을 단순화하고 성과급 비중을 높인다는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을 발표하기도 했다. 내용은 비교적 합리적이었는데 지금은 이 매뉴얼을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다.

이유가 뭘까? 지난주 전문가, 관련 분야 기자, 젊은 직장인들과 틈만 나면 이 얘기를 해봤다. 물론 그들은 임금체계 문제를 많이 지적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느낀 것은 어쩌면 우리의 낮은 효율과 생산성은 임금 문제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직장인들은 자기 회사를 믿지 못했다. 몇 차례의 경제위기 이후 구조조정 명목으로 가차없이 사람한테 손을 대고, 능률보다 값싼 노동력을 찾아 계약직만 쓰고, 능력에 따른 연봉제를 도입했다지만 실제로는 혜택 적은 호봉제로 꼼수를 부리며, 능력을 평가하겠다면서도 각종 연줄이나 상사의 개인 취향 같은 비합리적인 평가가 횡행하는 등 신뢰할 구석이 없다는 거다.

많은 직장인들의 목표가 ‘어떻게든 한몫 잡아 회사를 탈출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기업들이 하나의 가치를 좇는 ‘공동체적 조직’이 아니라 구성원 각각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용병 조직’으로 변모되는 조짐마저 보인다. 용병은 원래 내부에선 용감한 척 과시하며 보여주기에 집착하지만 적을 만나면 비겁해지는 특징이 있다. 더구나 우리 조직은 여전히 근면·성실·형식주의라는 전근대적 미덕에 집착한다. 그러니 오랜 시간 회사에서 버티는 인내력만으로도 좋은 사원으로 인정받는데 굳이 생산성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

문제는 우리가 사는 21세기엔 근면·성실이 아니라 지식과 창의력, 소비할 시간의 여유가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거다. 한데 기업들의 인력 관리는 거꾸로다. 통계가 보여주는 우리의 현실은 단순히 생산성 문제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따라가지 못해 발목 잡혀 있는 모습일 수 있다. 걱정이다. 우리는 21세기에도 계속 발전해야 하는데….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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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10. 10. 16:16

한국은 왜 미국에서 더 주목받고, 더 중시되지 않는지 궁금해 하는 나의 한국 친구들이 있다. 그들은 일련의 질문을 쏟아낸다. 왜 미국 관료들과 싱크탱크는 한·일 간의 역사·영토 갈등에서 서울의 편을 들지 않는가. 한국의 공공외교가 비효과적이기 때문인가. 한국 정부는 로비 활동을 강화해야 하나.

 워싱턴에서 한국이 더 눈에 잘 띄는 나라가 되려면 다음 몇 가지 역사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역사적으로 미국은 아시아보다는 유럽, 한국보다는 일본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경향에 빠른 변화가 일고 있다. 조지 워싱턴은 이임사에서 미국이 늙은 유럽의 동맹 외교에 휩쓸리지 말 것을 국민에게 호소했다. 하지만 20세기 미국의 전략은 항상 아시아보다 유럽을 중시했다.

 둘째, 최근 몇 년간 역전이 일어났다. 미 군사력의 중심은 유럽에서 아태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다. 역사상 처음이다. 또 여론조사를 해보면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아시아가 유럽보다 중요하다고 응답한다. 한데 일본을 우선시하는 미국의 정책이 한국에 항상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트루먼 행정부가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것은 일본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지미 카터의 주한 미군철수 백지화는 일본의 워싱턴 로비 결과물이다. 미국을 둘러싼 한·일 관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제로섬이 아니다.

 셋째,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의 대미 외교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백악관 관리들이 내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2009년 오바마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담은 그해 가장 중요한 정상회담이었다는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미국이 한국의 발전과 안보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했다. 그는 또 미국의 외교와 발전을 위해 한국이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제안을 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출범 당시 중국에 대한 관여(engagement) 정책과 미·일 동맹을 통한 세력균형 유지를 공약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관리들은 한국이 주요 방산품 수출국이라는 것과 가장 신뢰할 만한 파트너라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그래서 백악관은 한국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핵안보정상회의·세계개발원조총회의 개최와 한국의 대북정책을 강력히 후원했다. 한덕수(2009~2012년 재임) 주미 한국대사는 미 의회를 지극히 효과적으로 설득해 한·미 자유무역협정(KORUS) 체결에 기여했다.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의원들을 맨투맨으로 접촉해 KORUS가 의원들의 지역구에 가져다줄 경제적 이익을 설명했다. 미·호주 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위해 주미 호주 대사가 한 대사의 외교술을 벤치마킹하기도 했다. 한 대사의 후임들 또한 미 의회와 강력한 관계를 유지했다. 한국 정부만큼 워싱턴 정가에서 영향력 있는 정부는 극소수다.

 넷째, 일본을 겨냥하는 한국의 로비는 종종 한국이라는 외교 브랜드에 손상을 끼치고 있다. 워싱턴의 일본 전문가들은 모두 일본에 압력을 넣어 역사 문제에 대해 보다 전향적이 될 것을 요구했다. 한국의 로비 때문이 아니다. 한·일 갈등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국가이익을 저해하기 때문이다. 워싱턴의 일본 전문가들은 일 정부의 이런저런 발언이나 행동이 한·일 관계를 해친다는 한국 정부의 설명을 경청한다. 하지만 한국 관리들이 아베의 ‘위험한 민족주의’를 거론하며 미국이 일본에 전략적으로 등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하면, 미국의 관리나 학자들은 한국이 중국 쪽으로 기운다는 느낌을 받고 당혹해 한다. 상황을 꿰뚫고 있는 아시아 전문가들은 한·미 동맹이 얼마나 강력한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일부 인사들은 한국의 일본 비판을 지목하며 이러한 전제에 도전한다. 대부분의 워싱턴 전문가들은 영토 문제와 관련된 한국의 로비가 한국 국내용이라고 보기 때문에 미국의 정책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미 정부는 독도나 동해 호칭 문제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워싱턴에서 두 문제와 관련된 세미나가 개최되거나 주 정부가 교과서와 관련된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해서 미국 정부가 한국·일본 중 한쪽을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일 양국 모두 미국에 핵심 동맹국이다. 또 한국의 재단들은 미국 학자들을 후원할 때 신중해야 한다. 한국 편을 들도록 유도하는 연구비 지원은 학문의 독립성이라는 가치와 상충된다.

 워싱턴에서 한국의 영향력은 계속 증대했다. 한국은 긍정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세계전략에서 아시아는 더욱 중요한 지역이 됐다. 중국에 대한 신뢰나 일본 정치의 안정성에 의문이 생길 때마다 한국의 가치는 올라간다. 한국의 외교 브랜드가 가장 효과적일 때는 ‘글로벌 코리아’가 빈곤·핵확산·원조·무역 등의 분야에서 해결책을 내놓을 때다. 한국이 일본에 상대적인 이득을 취하려고 하면 한국은 덜 글로벌하고 덜 긍정적인 모습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이 동일한 입장에서 미국에 뭔가를 요구할 때에 양국의 외교력이 증가한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동북아에서 가장 가까운 동맹국들이 한목소리로 나올 때 ‘아니오’라고 하기 힘들다. 효과적인 외교는 효과적인 정치와 마찬가지로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느냐’를 묻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를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 

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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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10. 10. 15:59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장과 주한 미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86)가 쓴 회고록을 읽었다. 지난 4월 뉴욕주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인터뷰를 한 게 인연이 돼 회고록이 나오자마자 한 권을 보내왔다. CIA 요원과 외교관, 또 백악관 정책담당자로 40년 넘게 공직을 수행하면서 경험한 일들을 개인적 에피소드 및 소회(所懷)와 잘 버무렸다. 수시로 빛을 발하는 그의 유머감각 덕분에 330쪽 분량의 책을 마치 소설책 보듯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레그는 국가를 위해 봉직한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며 후세에 전하는 교훈을 회고록의 마지막 장에 담았다. ‘악마화의 위험(Dangers of Demonization)’이란 장이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내가 관찰하거나 직접 참여한 미 대외정책의 다양한 패턴들을 돌아볼 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가 싫어하거나 잘 모르는 외국 지도자나 단체를 악마화하는 경향이 있고, 그때마다 미국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상대에 대한 무지(無知)의 간극을 편견으로 메우게 되면 선동이 분쟁을 촉발하고, 그 결과는 모두에게 손해라는 것이다.

 베트남전쟁 당시 CIA 요원으로 현지에서 활동했던 그는 미국이 베트남의 독립영웅인 호찌민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베트남전쟁은 충분히 피할 수 있는 비극이었다고 주장한다. 호찌민은 미국에 대해 깊은 호감을 갖고 있었고, 특히 미 헌법을 제정한 토머스 제퍼슨의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호찌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에 여러 차례 손을 내밀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베트남의 독립만 인정해 주면 미국과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친서까지 보냈지만 미국은 이를 묵살했다. 1972년 친서가 비밀해제될 때까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숨겼다. 

 특히 베트남을 북한과 동일시한 것은 미국의 결정적 실수였다고 그레그는 회고한다. 두 나라는 중국과의 관계에서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은 김일성에 대해서는 전폭적 지지를 보낸 반면 호찌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호찌민의 유일한 목적은 독립과 통일이었는데도 미국은 베트남을 중국의 졸(卒)로 보고,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동남아 전체가 공산화된다는 ‘도미노 이론’에 사로잡혀 안 해도 될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역사는 실패한 개입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CIA의 비밀공작을 통해 쿠데타를 사주(使嗾)하고, 반(反)정부 세력을 지원하거나 심지어 무력개입까지 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독재정권이 등장해 역효과를 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양이 자리에 호랑이를 앉힌 꼴이다. 뉴욕타임스 중남미 특파원 출신으로 미국의 대외 개입 역사를 심층 추적한 스티븐 킨저는 『하와이에서 이라크까지 미국의 체제전복 세기』(2006)란 책에서 세계 도처에서 시도된 미국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공작은 미국의 안보를 강화하기보다 되레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분석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의 새로운 두통거리로 등장한 이슬람 수니파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도 따지고 보면 잘못된 무력개입의 부작용이다. 미국은 왜곡된 정보를 근거로 사담 후세인을 악마로 몰아 처단하고, 이라크 정권을 교체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IS의 발호를 부추긴 꼴이 됐다. 미국이 옹립한 시아파 총리 누리 알말리키의 전횡으로 코너에 몰린 알카에다의 한 분파가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의 지도 아래 IS로 발전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전임자인 조지 W 부시의 잘못된 이라크 개입이 후임자인 오바마에게 두고두고 짐이 되고 있다. IS 격퇴 범위를 이라크에서 시리아로 확대하면서 막이 오른 오바마판 중동전쟁은 다시 그의 후임자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게 분명하다.

 세습 왕조정권을 물려받아 문을 걸어잠근 채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고, 인권을 탄압하고, 강제수용소를 운영하는 북한은 미국의 눈에 악마로 비치기 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악마로 보이는 것과 실제로 악마인 것은 별개의 문제다. 상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악마화하는 것은 위험하다. 베트남과 이라크에서 저지른 뼈아픈 실수를 되풀이할 수 있다. 

 회고록에서 그레그는 “북한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정보 실패 사례”라고 고백한다. 정보기관 차원의 실패일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 지적인 사고의 실패라고 실토한다. 상대를 잘 모른다면 일단 접촉하고 대화해야 한다. 악마인지 아닌지는 그 다음에 판단할 문제다. 싫다고 외면하고 무시하는 것은 미국이 자부하는 지성에 대한 모욕이고 배신이다. 북한에 억류돼 있는 3명의 미국인은 북·미가 만날 수 있는 좋은 구실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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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0. 15:58

“아들 봐야지.”

할머니가 갓 결혼한 손자 부부에게 권유한다.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번에 어머니가 아들 부부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이른다. 

“딸이 최고다.”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젊은 부부는 결심한 듯, 두 어르신에게 선포한다. 

“웬만하면, 안 낳으려고요.”

추석에 지인(知人)의 집안에서 벌어진 3대의 대화다. 아들 선호에서 딸 선호로, 다출산에서 저출산으로 확 바뀐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출생통계가 나왔다. 딸 100명당 아들 출생이 105명까지 떨어졌다. 1981년 이후 아들 성비가 가장 낮았다. 수명이 짧고 사고를 많이 당하는 수컷의 태생적 한계를 감안하면 105~107을 밑돌면 실질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적어진다.

‘남아 부족 사회’가 곧 닥칠 미래라면 ‘총각 과잉 사회’는 엄연한 현재다. 올해 예비신랑(결혼적령기 29~33세)은 예비신부(26~30세)보다 38만 명 정도 많다. 내년부터 신랑 초과가 20만 명대로 떨어진다고 하니, 이 땅의 총각들은 최악의 2014년을 견뎌내는 중이다. 아무튼 ‘남아 출산 역대 최저’와 ‘총각 과잉 역대 최고’가 동시에 벌어지는 기막힌 사회에 우리는 산다. 역설의 씨앗은 40년 전에 뿌려졌다.

1970년대 한국에는 아들 선호 사상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 생각이 그렇다고 곧바로 성비 불균형이 오지는 않는다. ‘태아성감별’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생각과 합체하면서 성비의 조화는 급격히 무너진다. 그때 태아성감별 기법은 정교화·대중화한다. 이 기법은 사회의 위협요소가 아니라 경이로운 첨단이었다. 74년 한 일간지는 태아성감별 기술을 이렇게 칭송한다.

‘양막세포의 성염색체질을 분석하는 기법으로 무려 90%나 정확하게 태아의 성별을 감별하는 기술이 개발돼 화제를 모으고….’

아들 출생성비는 81년 107에서 90년 116까지 가파르게 올라간다. 상승곡선을 보면서도 정부와 의료계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성비가 115 선을 육박하던 87년이 돼서야 정신을 차려 태아성감별을 처벌할 수 있게 의료법을 손질했다. 정신만 차렸을 뿐 실제 행동은 한참 뒤인 90년대 중반에 들어간다. 의협의 자체고발 선언(95년), 복지부의 의사면허 취소 발표(96년), 검찰의 첫 의사 구속(96년) 등 강력한 제재 기류가 일어난다.

 하지만 어찌하랴. 96년 성비는 이미 111을 기록, 급격히 떨어지는 추세였다. 아들 선호 사상이 퇴장하는 시점에서 ‘강력한’ 뒷북 정책이 출현한 것이다. ‘남아 출산 최저’와 ‘총각 과잉 최고’가 같은 시대에 출현한 까닭은 바로 인구·기술의 동향을 무시하고,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탓이었다.

사회변화를 촉발하는 근원적인 요인을 미래 동인(動因)이라고 부른다. KAIST 미래전략대학원은 7가지 동인을 ‘STEPPER’라는 영문이니셜로 제시한다. 사회·기술·환경·인구·정치·경제·자원을 뜻한다. 7가지 중에서도 미래 변화를 설명하는 데 항상 빠지지 않는 동인은 인구·기술(PT) 두 가지다. 지난 40년간 우리의 미래전략은 번번이 실패했다. 아니, 미래전략 자체가 없었다. 인구와 기술의 변화를 제때 읽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문제가 가라앉는 상황에서야 극약처방을 쓰는 잘못을 저질렀다.

앞선 나라의 경제·사회 체제를 빨리 베껴 발전하던 시절에는 미래전략의 실패는 용납될 수 있었다. 지금은 베낄 데가 거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스스로 미래의 변화요인을 찾아내 관리하지 않으면 미래의 기습을 받게 된다. 누가 인구변화와 신(新) 기술의 영향력을 가늠하고 대책을 세울 건가. 국가든, 기업이든, 단체든 그런 사람이 미래의 리더이어야 한다.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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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0. 15:57

어느 날 문득 “세월이 이렇게 흘렀나” “세상이 이렇게 변했나” 새삼 깨닫게 되는 때가 있는데, 내겐 중국인 관광객이 그랬다. 어느 틈에 이렇게 많아진 걸까. 굳이 중국을 가지 않아도 중국인이 한국인보다 많은 곳을 찾기 어렵지 않다. 중국 인파로 가득 찬 명동이며 중국어 안내문 천지가 된 백화점들은 이젠 얘깃거리도 안 된다.

휴일 아침 동네 산책길은 또 어떤가. 부암동에서 삼청동으로 향하는 청와대 정문 앞은 사진 찍는 중국인들로 막혀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다. “실례합니다” 대신 “두이부치(對不起)”로 인사말을 바꿔야 할 판이다. 어느새 내 삶에 들어온 중국인,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할 때란 생각이 든 것도 그래서였다. 문제는 그 중국인 관광객이 ‘어글리 & 리치’, 두 얼굴이란 점이다. 어글리는 떼어버리고 리치만 상대할 순 없을까. 하지만 어디 세상사가 입맛대로 다 되겠나.

‘어글리 중국인’과 살아가기는 결코 만만치 않다. 추한 중국인은 중국 정부에도 골칫거리다.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 낙서를 하고, 뉴욕 월가 황소 동상에 올라타 사진을 찍고 돈 자랑하다 베트남에서 납치돼 나라 망신시킨 사례가 수도 없다. 급기야 중국 정부는 지난해 ‘문명여행지침서’를 만들었다. 외국 가면 줄 잘 서고, 돈 자랑 말고, 그 나라 문화와 질서에 잘 따르라는 내용이 주다. 그것도 모자라 외국의 문화재나 유적지에 낙서하면 최대 10일의 구류형을 받게 되는 새 여행법도 통과시켰다.

한국만 깔봐서 그런 건 아닌 듯하니 그나마 위안이다. 하지만 추한 중국인이 한국에서 벌이는 작태는 목불인견이다. 한국여행업협회로 날아드는 공문 몇 장만 봐도 실태를 알 만하다. 지난달 경복궁관리사무소가 여행협회에 보낸 공문의 요지는 이렇다. ‘중국 관광객들의 쓰레기 무단 투기와 흡연, 경내 노상 방뇨가 도를 넘었다. 우리 민족의 격조를 상징하는 제1의 법궁에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여행사가 주의시켜 달라.’

이화여대의 공문은 점입가경이다. 추한 중국인들이 수업시간에 불쑥 들어와 아무나 사진을 찍고, 교실에서 담배를 피워대기 일쑤니 주의해 달라는 내용이다. 이화가 ‘돈을 벌다(利發)’란 중국어 발음과 비슷한 데다 학교 정문에서 사진을 찍으면 부자가 되거나 딸이 시집을 잘 간다고 중국에서 소문나 관광명소가 된 지 몇 해. 이대 관계자는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는 추한 중국인 몸살에 앓아누울 지경”이라고 말했다.

문을 닫아 걸고 외면할 수도 없다. 중국인을 겨냥한 관광산업은 미래의 먹거리다. 한국을 찾는 중국 관광객은 매년 25%씩 늘고 있다. 올해엔 500만 명에 달할 전망이다. 덕분에 생겨난 일자리가 24만 개, 47개 국내 대기업이 지난해 새로 만들어낸 일자리의 4배다. 지난주 정부가 내놓은 관광산업 활성화 방안이 실행되면 중국 관광객은 더 늘어날 것이다. 덩달아 추한 중국인도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중국인은 무슨 일이든 떼로 행동하는 데 익숙하다. 이때 상식이나 논리는 필요 없다. ‘소변이 건강에 좋다’면 금세 유행을 타는 식이다. 루쉰(魯迅)은 이를 중국인의 ‘벌떼 근성’이라고 불렀다. 이런 벌떼 근성이 추한 중국인과 결합하면 강도가 더 세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손가락질이 능사는 아니다. 우리는 어땠나. 먼저 반성해야 한다. 1994년 공보처는 ‘추한 한국인’ 사례집을 펴냈다. 조금 살게 된 한국이 특히 중국에서 갖은 추태를 부리던 시절이다. 문화재에 낙서하기, 줄 안 서기, 돈 자랑하기, 싹쓸이 쇼핑, 오만방자한 졸부행각, 중국에서의 추태를 낱낱이 고발했다. 20년 전 중국 땅에서 추한 한국인이 뿌린 씨가 시간과 공간을 돌아 지금 대한민국에서 악과(惡果)의 싹을 틔운 건 아닐까. ‘흉보면서 닮는다’는 말도 있잖은가.

지금은 어떤가. 20년 전 길거리에 카~악하고 가래침 뱉던 아저씨·아줌마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인도를 달리는 무법 오토바이에 새치기·욕설과 난폭운전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남 욕할 때가 아니란 얘기다. 그러니 추한 중국인과 살아가기, 밋밋하겠지만 ‘우리부터 바꾸고 가르치기’가 답이다. 




중국인이 바꿔 놓은 한국은 서울 명동과 제주의 거리 풍경뿐만이 아니다. 구구한 설명 대신 숫자 몇 개를 보자. 진실은 늘 숫자 뒤에 숨어 있다지 않은가.

첫 번째 숫자는 54.7%다. 중국 자본이 올 들어 7월 말까지 사들인 한국 주식은 1조8900억원어치다. 외국인들이 사들인 주식의 54.7%다. 50은 과반수다. 50을 넘게 가지면 주도권을 쥐게 된다. 한국 기업의 주가는 중국 자본에 의해 움직인다는 말이 나올 만하다. 실제 아모레퍼시픽(화장품)이나 리홈쿠첸(전기밥솥) 같이 중국인이 즐겨 찾는 물건을 만드는 회사 주가는 1년 새 두세 배 뛰었다.

어디 그뿐이랴. 요즘 한국의 인수합병 시장은 중국 자본의 독무대다. 중국 자본의 한국 투자는 올 상반기에만 9600억원, 6년 새 80배가 늘었다. 아가방·키이스트(연예기획사) 등 100억원 이상 투자도 9건이다. K투자자문사 K사장은 “한국 기업과 중국 자본을 연결해주는 비즈니스가 가장 큰 돈이 된 지 오래”라며 “중국 자본과의 친분 여부가 국내 금융업의 실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두 번째 숫자 5807억원, 중국인이 제주도에 소유한 땅의 공시지가를 합한 금액이다. 5년 전보다 넓이는 296배, 금액은 1452배 늘었다. 5억원 이상 휴양시설에 투자한 외국인에게 5년 후 영주권을 주는 부동산투자이민제가 2010년 도입된 후 일어난 일이다. 제주엔 요즘 몰려드는 중국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대한상의 박용만 회장은 지난여름 모처럼 제주도를 찾았다가 신라호텔을 가득 메운 중국 관광객을 보고 “여기가 중국이야, 한국이야” 하며 놀랐다고 한다. 급기야 ‘중국인 장기매매 조직이 상륙했다’ ‘자본으로 위장한 중국 마피아가 날뛴다’는 악성 괴담이 퍼질 정도였다. 이런 괴담은 대개 이유도 근거도 없이 반중국인·중국 자본 정서를 부추긴다.

세 번째 숫자 3.2%. 한국의 대중 수출에서 소비재가 차지하는 비중이다. 중국은 세계의 공장에서 세계의 시장으로 이미 변화했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권이다. 세계 명품의 28%를 소비한다. 이런 중국에 우리는 주로 부품·소재·자본재를 팔아왔다. 중국 기술 수준이 높아질수록 팔 수 있는 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 올 들어 8월까지 우리 수출은 지난해보다 2% 넘게 늘었지만 중국에 대한 수출은 되레 4% 넘게 줄었다. 더는 중국 옆에 붙어 있다는 것만으로, 적당한 기술과 제품만으로 중국에 팔아먹을 수 없게 됐다는 의미다.

네 번째 숫자 330만원. 중국인 한 사람이 지난해 해외여행에서 쓴 평균 금액이다. 10년 전(987달러)보다 세 배 넘게 늘었다. 늘어난 요우커(遊客)의 씀씀이는 한국의 관광수지 통계도 바꿔놓았다. 지난 7월 한국의 관광 수입은 16억1590만 달러(약 1조6500억원)였다. 역대 최고다. 7월엔 한국인의 해외 관광도 사상 최대(18억2370만 달러)를 기록했지만 관광수지 적자 규모는 13년 만에 최저로 되레 줄었다. 중국 관광객 덕분이다. 요우커는 올해 외국인 관광객의 42%를 차지했다. 일본의 3배다.

숫자들이 보여주는 중국은 두 얼굴이다. 어떤 숫자는 우리 경제에 독이고 어떤 숫자는 약이다. 여기까지는 과거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크게 달라진 게 하나 있다. 중국인·중국 자본의 규모다. 많아지면 달라진다. 사용자가 많아지면 새로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뜨는 식이다. 중국인이, 중국 자본이 이 땅에 많아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최고 기업 순위가 바뀌고, 더 이상 중국 수출로 먹고살 수 없는 시절이 올 것이며, (지금 북한의 어린아이들이 그렇듯이) 중국인이 던져주는 사탕을 과거 미국인의 초콜릿처럼 아이들이 받아먹는 세상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한 기업인은 몇 년 전 중국 경제의 약진이 두렵다며 이런 말을 했다. “한·중의 5000년 역사상 우리 세대가 중국인들에게 발마사지를 받고 산 최초이자 마지막 세대가 될지 모른다.” 그의 불길한 예언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숫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요리하느냐에 따라.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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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10. 10. 15:53

가끔 만취하여 길가에 몸을 부려놓은 남자를 보면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저 사람은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사람들 발길 채이는 곳에 몸을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스릴을 즐긴다는 명목으로 위험 속으로 뛰어들고, 관계 사이를 오가며 정서적으로 고갈되고, 세상을 욕하고 타인을 비난하면서 생을 낭비하는 것, 남자들의 그런 행동을 볼 때도 생각한다. 왜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까.

유년기에 엄마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란 아기는 안정된 정서를 가진 건강한 사람이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대체로 엄마의 유난스러운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란다. 그렇기에 의문이 깊어진다. 왜 어떤 남자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좋은 것들을 외부에 있는 여자에게서 받아야 한다고 믿을까. 자기중심적 선택, 근거 없는 자신감을 자기 사랑과 구별하지 못하는 걸까. 그들이 받은 엄마의 사랑에 나쁜 것이 섞여 있었던 걸까.

사실 아들이 태어나면 가장 기뻐하는 사람은 엄마 본인이다. 우선 기본적인 임무를 수행했다는 홀가분함이 있다. 집안의 대를 이어주고, 남편의 불멸 욕망을 충족시켰으니 이제는 기를 펴도 된다고 느낀다. 또한 아들의 엄마로서 생존 근거를 얻었으며, 노년까지 유효한 보험이 생겼다고 믿는다. 의식 차원에서 아들은 엄마의 존재 증명이 되는 셈이다. 무의식 차원에서 아들은 여성들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페니스 엔비(envy)’를 보상받는 기회가 된다. 여성은 아들을 낳으면 “나도 드디어 페니스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어떤 엄마는 “아들 고추가 미학적으로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치 금강초롱꽃 같더라”고 표현했다. 아들 탄생을 기뻐하는 엄마 마음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유익한 대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다. 그러니 평생을 두고 아들이 받은 엄마 사랑에는 아들이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 할 만한 요소가 충분히 들어 있었을 것이다.

고부간의 갈등은 아들을 놓고 엄마와 아내가 벌이는 사랑의 경쟁 행위이다. 아들을 존재 증명처럼 여기는 엄마는 성인이 된 아들을 떠나 보내지 못한다. 며느리는 기필코 남편의 사랑을 독점하고자 한다. 내가 읽은 모든 세계 문학, 외국 영화, 해외 사례들을 떠올려봐도 우리의 고부 갈등 같은 스토리를 본 기억이 없다. 정신분석적으로 그것은 오이디푸스적인 금기 영역의 이야기다. 이번 명절에도 어떤 남자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두 여자 사이에서 눈치 살피며, 자기 파괴적 행동을 할 것이다.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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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10. 10. 15:47

국회는 마비되고 민심도 갈라졌다. 세월호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줘야 한다는 여론과 여야의 기존 합의안을 존중해야 한다는 여론이 맞선다. 전대미문의 대참사에 온 국민이 함께 국상(國喪)을 치른 '순수의 시대'는 사라졌다. 진상 조사와 재발 방지의 공감대로 만난 유가족과 국민의 순정(純情)을 넘어 세월호 문제는 진흙탕 권력 투쟁으로 비화했다. 세월호특별법을 두고 보수·진보 진영은 다음 총·대선까지의 정치적 득실을 따지느라 바쁘다. '만사(萬事)의 정치화(政治化)'라는 우리의 고질병이 다시 도졌다.

그러나 서늘한 가을바람은 당쟁(黨爭)으로 타락한 '세월호 정치'를 준엄하게 꾸짖으며 모두 정신 차려서 '세월호 이후'를 준비하라고 경고한다. '세월호 이후'를 예비하는 자기 성찰의 최대 화두는 직업윤리 문제다. 세계 해운인의 수치로 지적된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의 행태가 대표적이다. 이를 특정 해운사의 횡포 앞에 무력했던 선박 노동자의 일탈로 좁히는 건 안이한 설명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던 정부와 공무원들의 행태도 직업윤리 부재라는 맥락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직업윤리의 척박함은 한국인의 행복도가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인 이유를 설명한다.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감정 인플레 현상이 휩쓰는 것도 한국인의 삶에서 마음의 중심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마음의 중심은 과거처럼 정신 수련이 아니라 성숙한 직업윤리에서 나온다. 현대인은 자기가 선택한 직업에서 열심히 일함으로써 돈도 벌고 공동체에 기여하며 자아실현을 꾀한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중심 잡힌 마음이 곧 직업윤리다.

우리 사회는 자연스럽게 직업윤리를 생성하는 '돈벌이-사회에 대한 기여-자기실현' 사이의 연결고리가 사회문화적 압력에 의해 단절되어 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민감해서 남이 인정하는 직업에 연연한다. 인정받는 직업이란 돈을 많이 벌거나 권력이 있는 자리를 뜻한다. 물론 그것은 다른 나라도 비슷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은 유별나다. 살인적인 입시 경쟁도 좋은 학벌이 좋은 직업으로 이어지고 좋은 직업이 성공한 인생으로 연결된다는 확신 때문이다.

겉은 민주 다원(多元) 사회지만 우리 사회의 내적 가치관은 매우 단원적(單元的)이며 봉건적이다. 무릇 인재라면 '출세'해야 하고, 출세의 종착점은 '벼슬'하는 데 있다고들 한다. 이런 인식이 일상화된 사회는 관(官)과 정치 영역의 이상 비대화가 불가피하다. 현대 정당정치로 포장한 한국 정치가 중세적 당쟁에 매몰되기 일쑤인 근본 배경이다. 극소수 직업이 사회적 인정을 독차지할 때 건강한 직업윤리 생성은 요원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아직 중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돈·권력·명예라는 희소 자원이 몇몇 직업으로 집중되는 한국적 메커니즘을 끊어내야 진정한 현대로의 진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깊은 실존적 통찰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답게 살 만한 수입이 어느 정도 확보되면 그다음 단계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일에 자족(自足)하는 것이다. 르상티망(강자와 승자에 대한 약자와 패자의 질투 서린 원망)이 유독 강한 한국 사회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보다 희귀한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노동의 종말'이 현실로 닥쳐오는 사회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도 귀한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일에 대한 자족감이 현실에 대한 안주(安住)로 퇴행하지 않게끔 자계(自戒)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어떤 일에 자족하면서도 자계하게 되면 이윽고 그 일을 잘할 수 있게 된다. 자족하면서 자계함으로써 잘할 수 있게 된 일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행복감이다. 일 자체에 대한 몰입에서 오는 행복감은 자기 충족적이어서 세상의 인정과 돈의 보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족과 자계의 사이클이 만드는 뛰어남(arete·아레떼)은 모든 직업윤리의 핵심이다. 그 뛰어남에서 비롯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한국인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마음의 습관이다.

세월호특별법 논란으로 시끄러운 판국에 직업윤리는 한가한 얘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세월호 사태는 직업윤리야말로 오늘의 한국인에게 진정 중요한 덕목임을 웅변한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삶의 기쁨과 진실이 평범한 데 있다는 걸 함께 확인하게 되는 한가위가 다가온다. 이제는 우리도 '세월호 이후'를 준비해야만 한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04/201409040463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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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0. 15:40

치권에서 세월호 사태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세월호 가족대책위의 유경근 대변인이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세월호 유족을 이끄는 실질적 리더로 유씨를 꼽고 있다. 유씨는 세월호 침몰로 쌍둥이 자매 중 둘째를 잃었다.

유씨는 정의당 당원이라고 한다. 정의당은 통합진보당을 탈당한 유시민·심상정·노회찬 의원 등이 2012년에 만든 정당이다. 그는 유시민 전 의원을 지지하는 팬 클럽 회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씨가 유족 대변인으로 나서면서 그가 2013년 11월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논란이 됐다. 유씨는 '바뀐애는 물러나야 한다'고 썼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름을 그렇게 바꿔 부르며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니기에 훔친 거 내놓고 나가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유씨는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거나 실종된 304명 피해자 가족 중 한 사람이다. 가족을 잃은 참기 힘든 슬픔을 함께하는 유족들이라 해도 정치적 신념과 성향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실제 유족들은 참사 초기에 각 정당과 정치인들이 혹시라도 세월호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할 가능성을 가장 경계했다. 여당이라고 박대하거나 야당이라고 반기는 일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이들의 판단 기준은 하나였다. 어느 정치인, 어느 정당이 진심으로 자신들을 대하고 세월호 진상 규명 의지를 보여주느냐를 따졌을 뿐이다. 이 관문을 가장 성공적으로 통과한 인물이 새누리당 4선(選) 의원 출신으로 세월호 참사 직전에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은 이주영 장관이다.

이 장관은 지난 추석 연휴 내내 세월호 침몰 현장인 진도에 머물렀다. 이 장관은 요즘도 외부 일정을 마치면 무조건 진도로 향한다. 그러곤 유족들을 만나고 진도군청 사무실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잠을 청한다. 벌써 다섯 달이 넘게 이런 생활을 해 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난 8월 하순 이란·일본 출장에 맞춰 넉 달간 길게 자랐던 수염을 자른 정도다. 처음엔 이 장관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던 유족들이 이제는 이 장관이 한동안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이 장관은 해양 관련 안전 대책을 다시 세우고 10명 남은 실종자 수색 및 구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진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세월호 사태의 본무대는 참사 발생 한 달 뒤부터 서울로 옮아왔다. 각종 시위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단체들이 대거 참여한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가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이때부터 유족들의 국회 방문과 항의 농성이 시작됐다. 그런데도 이 정권의 누구도 팽목항의 이주영 장관처럼 서울로 올라온 유족들을 만나 이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당에선 유족들을 노숙자에 비유하는 등 상처를 주는 발언이 줄을 이었다.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6번이나 사과하고 정부 전체가 사고 수습에 매달렸던 노력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정권과 유족 단체가 대립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여권 고위관계자는 "세월호 참사 첫 한 달과 그 이후의 유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얼마 전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18세 흑인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후 이 도시는 열흘 넘게 대규모 흑인 소요(騷擾)를 겪었다. 한밤중에는 약탈까지 횡행했다. 이 사태는 흑인인 에릭 홀더 법무장관이 현지에 투입되면서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흑인들이 자신들의 분노와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 나타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 박근혜 정부에는 인종이 다른 것도 아니고 무장 폭력 시위를 벌이는 것도 아닌 세월호 유족들과 얼굴을 맞대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줄 사람도 마땅히 없었다.

정부·여당과 달리 유족들을 에워싼 단체들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유족 곁을 지켰다. 여당 관계자는 "유족의 마음을 얻는 데서 전문가 수준인 이들을 당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 단체들은 군 기지 건설이나 송전탑 문제 등 사회적 갈등 요인이 있는 현장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판판이 이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이주영 장관의 성공 사례는 재현(再現) 불가능한 예외적인 경우인가.

사실 세계에서 민족·인종·종교 같은 대형 갈등 유발 요인이 우리만큼 적은 나라는 드물다. 그런데도 어느 나라보다 더 큰 사회적 갈등 비용을 치르느라 스스로 손발을 묶어 놓고 있는 게 지금 우리 실정이다. 선진적인 갈등 관리 모델을 찾는 것이야말로 세월호 후속 대책의 핵심 내용이 돼야 한다.

며칠 전 세월호 가족대책위는 국회를 찾아가 "새누리당이 강조하는 민생 법안은 서민에게만 세금 많이 내라는 것이고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며 의료비를 폭등시킬 우려가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변인 유씨가 주도했다. 야당 대변인이나 다를 게 없다.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일관한 정부·여당의 무능·무책임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박두식 논설위원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16/20140916043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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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0. 15:38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난 2일 미국의 공유경제(Sharing Economy) 전문가 2명을 만났다. 박 시장은 민선 2기 임기 동안 공유경제 정책을 더욱 확대하겠다고 밝히고, 이들로부터 조언을 들었다.

공유경제는 자동차를 비롯해 집·주차장·옷·사무실·기술 등 유무형 재산을 인터넷을 통해 수요자와 공급자 간에 중개하는 신종 서비스 모델을 뜻한다. 숙박 공유에서는 에어비앤비(Airbnb)가 10조원 가치를, 교통 중개에서는 우버(Uber)가 18조원 가치를 인정받을 정도로 초고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벤처 분야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주목받기 시작한 공유경제는 미국 진보 진영에서 최고로 꼽는 혁신 아이템이기도 하다. 그들은 공유경제가 과잉생산, 불균형 배분 등 자본주의의 근본 약점을 '개인 대 개인 간 거래(peer to peer)' 시스템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본다.

박 시장은 시민운동가 출신답게 공유경제의 철학과 가치를 일찌감치 꿰뚫고 구체적 정책을 제시함으로써 지구촌 공유경제 진영으로부터 박수를 받고 있다. 박 시장은 2012년 공유경제 촉진을 위한 조례를 만들어 공유경제 정책 기반을 체계적으로 조성했다. 아울러 공유경제의 일자리 창출 능력을 적극 활용하는 실용주의 리더십도 발휘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공유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서울시는 3년 만에 스타 도시로 부상했고, 박 시장도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최근 박 시장의 공유경제 드라이브가 암초를 만났다. 올 초부터 세계 주요 도시에서 '안티 공유경제' 움직임이 일면서 논란을 계속 낳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기존 호텔과 택시업계가 공유경제 벤처들의 불법성을 부각시키면서 규제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샌프란시스코의 경우 집 공유 유행이 부동산 소유주의 배만 불리는 등 빈부 격차를 더 심화시키면서 풀뿌리 지지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공유경제의 또 다른 논란은 글로벌 공유기업이 각국 지역 공유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점이다. 에어비앤비의 경우 실리콘밸리의 막강한 자금을 바탕으로 전 세계 도시에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면서 지역 공유업체의 숨통을 죄고 있다. 일각에선 공유경제는 미국 실리콘밸리식 마케팅 수사에 불과하고 결국 극소수의 수퍼 리치만 탄생시키는 수단에 그칠 것이라고 비판한다.

박 시장은 4년 임기 동안 공유경제에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내려면 당장 서울시내 택시업계와 우버의 충돌부터 새로운 프레임으로 해결해야 한다. 서울에서도 다른 도시에서처럼 택시업계가 우버 견제에 나섰고, 서울시의 교통 관련 직업 관료들은 우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코자자, 비앤비히어로 등 서울에 뿌리를 둔 숙박 공유 벤처기업이 글로벌 공유기업의 공세에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도 찾아야 한다. 외국 업체의 배만 불리는 공유경제 정책으로 서울시민의 지지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아가 중앙정부와 머리를 맞대고 공유경제 관련 난제들의 해결책을 함께 찾고 도움도 받아야 한다.

박원순 시장이 대립적 요소와 미래 지향적 요소가 얽혀 있는 공유경제의 실타래를 어떻게 풀지 궁금하다.



우병현 조선경제i 총괄이사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11/201409110065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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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0. 15:33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얼마 전 <한겨레>에 “사생활 보호와 알 권리, 무엇이 우선일까요”라는 기사가 실렸다. 권리 간 충돌 문제를 다룬 내용이었다. 집회의 권리와 통행의 권리가 부딪친다면, 학생인권과 교권이 맞선다면, 죄수의 권리와 간수의 권리가 대립한다면, 노동자의 권리와 기업의 경영권이 갈등한다면 등등, 권리들끼리 싸우는 사례는 많다. 필자가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동전을 모았더라면 지금쯤 돼지저금통이 하나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이슈다. 권리 간 충돌 문제는 인권에서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민감하고 골치 아픈 난제다.

권리간 충돌은 21세기 들어 커다란 쟁점이 되었다. 9·11 이후 핵심쟁점이 국가안보냐 개인 자유권이냐 하는 질문이었다. 일률적 잣대로 판단하기 어렵지만 이 문제를 해소할 기본원칙은 있다. ‘대다수 권리는 절대적 권리가 아니다’ ‘권리들 간에 서열을 매길 수 없다’ ‘어떤 권리를 모두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등.

권리 간 충돌은 21세기 들어 전세계적으로도 커다란 쟁점이 되었다. 9·11 사태 이후 대테러 전쟁에서 논란이 되었던 핵심쟁점이 국가안보냐 개인 자유권이냐 하는 질문이었다. 중국의 한 자녀 정책으로 비롯된 논란 역시 비슷한 구도였다. 부부가 자녀를 가질 수 있는 재생산권과 사회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우선시하는 공리주의적 요구가 대결했던 것이다. 프랑스 무슬림들의 히잡 착용 권리와 모든 공공교육 시설에서 종교적 상징물을 금지하는 정부의 입장 대립, 이 역시 권리 간 충돌 사례였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리 간 충돌 문제에 관해선 확실한 정답이 없다가 정답이다. 사례별로 따져봐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인권은 무조건 우선시되어야 할 절대적 규범이라고 배웠는데 어째서 이렇게 어중간한 답이 나온단 말인가.

우선 권리의 충돌에도 여러 유형이 있음을 지적해야 하겠다. 다른 종류의 권리들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대중의 알 권리와 공인의 사생활 권리를 생각하면 된다. 동일한 권리의 행사방식과 한계설정을 놓고 갈등하는 경우도 있다. 표현의 자유가 소중하지만 일베들의 행태에 어떤 제한을 가해야 할지 고심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서로 다른 권리들이 충돌하기도 한다. 내가 믿는 종교의 가르침과 시민으로서의 의식이 갈등하는 게 좋은 예다. 법적 권리와 사람들의 가치가 충돌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권리’라는 말에 여러 차원이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무 데나 ‘권’자를 붙인다고 해서 무조건 인권이 되는 건 아니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자면 제일 중요한 권리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인권규범에 부합하는 권리다. 국제 인권규범은 대개 국내법으로도 인정되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인권은 아니지만 법적 효력을 지닌 권리도 있다. 그다음 단계로, 중요한 이익 또는 권익이 있을 수 있다. 이 역시 현실에서나 법정에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또한 법에 명시되진 않았지만 어떤 집단에서 극히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다면 그것의 문화적 영향력을 감안해 권리 비슷하게 인정해 주기도 한다.

특히 신앙이나 정체성,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권리는 정서적 인화성이 강해 민감한 충돌과 파열음을 일으키기 쉽다. 그렇다면 권리 간 갈등 문제를 해소할 방안이 있는가. 몇 가지 기본원칙이 있다. 첫째, 대다수 권리는 절대적 권리가 아니다. 가장 오해가 많은 부분이다. 자연법 전통의 천부인권론이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끼치면서 인권은 신성불가침이고 절대적이라는 믿음이 정설처럼 자리잡았다. 권리 간 충돌의 근원을 따져 보면 이런 오해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하지만 남을 해치면서까지 내 권리를 주장할 순 없다. 표현의 자유가 아무리 중요해도 아동 음란물을 제작할 자유는 인정되지 않는다. 아무리 확실한 권리라 하더라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일정한 한도 내에서 행사되어야 한다. 오늘날 인권이 대단히 매력적인 담론으로 떠오르면서 이런 초보적인 사실조차 헷갈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에서 명쾌하게 정의했던 유명한 구절을 기억해 보라.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자유란 “닭장 속의 여우가 제멋대로 누리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둘째, 권리들 간에 서열을 매길 수 없다. 정책적으로 어떤 권리를 먼저 시행할 수는 있겠지만 원칙적으로 모든 인권의 가치가 중요하다. 권리들이 충돌할 때 어떤 권리를 배제할 것이 아니라 모든 권리를 반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도를 찾아야 한다. 최선이 어려우면 차선책이라도 모색해야 한다. 즉 인권에서도 균형과 타협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셋째, 어떤 것에 대한 청구권이 있다 하더라도 그 권리를 모두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했다 해서 다산콜센터의 상담사에게 모든 맛집 정보를 요구하거나 어떤 속옷을 입고 있느냐고 묻는 따위의 성희롱을 할 권리는 세상에 없다.

넷째, 권리들끼리 충돌할 때엔 각 권리의 범위를 정해야 하고 사안의 맥락을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 누구나 공개적으로 말할 자유가 있지만 어떤 맥락에서 그것이 표출되는지를 따져야 한다. 사람이 가득 찬 소방서에서 “극장이야”라고 소리치는 건 별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사람이 가득 찬 극장에서 “불이야”라고 소리칠 자유는 인정되지 않는다. 전혀 다른 맥락의 행동이고,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사회의 법적, 문화적 규범도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 예컨대 ‘동방예의지국’에서 자식이 부모에게 욕설을 퍼붓는 행위를 표현의 자유라는 식으로 옹호하기는 어렵다.

다섯째, 본질적 권리와 부차적 권리 사이의 무게를 달아 경중을 판단해야 한다. 이것을 핵심적 권리와 주변적 권리로 구분하기도 한다.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어떤 가치에다 ‘권’자를 붙여 절대적 권리로 내세울 때 제로섬 게임 같은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모든 ‘권리’의 무게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사안별로 권리들의 무게가 다르고, 같은 권리라 해도 경우에 따라 무게가 달라진다. 서구에서 간혹 인용되는 사례가 있다. 소수자 정체성을 가진 어떤 사람이 자기 정체성과 관련된 업무로 관공서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종교적 이유로 그런 정체성에 반대하는 공무원이 창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직원은 자신의 신앙 때문에 그 업무를 볼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직원을 불러 주겠다고 했지만 차별적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다. 하지만 법원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업무 거부가 본질적 권리에 해당한다고 공무원의 손을 들어줬다. 비슷한 사례가 또 있었다. 특정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인쇄업자가 소수자 단체에서 요청한 책자 제작을 거부했다 제소당했다. 이번에는 법원이 인쇄업자의 행동을 차별이라고 판결했다.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 해도 영업 거부는 주변적 권리에 불과하다고 본 것이다.

‘잊혀질 권리’ 논란과 같이 새로운 권리 충돌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은 그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권리 충돌이 발생할 때 되도록이면 약한 사람과 소수자의 눈높이에 인권의 눈금을 맞춘다는 원칙과 상식을 지켜야 한다. 이 점에서 법률가들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이처럼 권리 간 충돌 문제는 일률적인 잣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원칙, 상식, 균형감각을 발휘해서 황금비를 찾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원칙인지, 어떤 상식인지를 면밀히 따질 필요는 있다. 인권의 원래 취지가 인간의 본질적 이익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적 다수결 원칙으로도 인권을 침해하진 못한다. 그렇다면 권리 충돌이 발생할 때 되도록이면 약한 사람과 소수자의 눈높이에 인권의 눈금을 맞춘다는 원칙과 상식을 지켜야 한다. 이 점에서 법률가들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권리 간 충돌은 앞으로도 계속 발생할 문제다. 인권의 목록이 늘어나고, 신념과 이념에 근거하여 인권이 제기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권의 불확실성 때문에 권리 간 충돌이 인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또한 권리들이 서로 충돌해 온 과정이 인권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인권이 발전한다는 말은 인간사회가 진보한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인간사회가 전진할 때 갈등과 긴장이 없을 수 없다. 권리 간 충돌은 인류 진보의 성장통인 셈이다. “권리들의 충돌은 사법부도, 입법부도 어떤 일관된 원칙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독특한 문제”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권리 충돌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은 그 사회가 정체되지 않고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다. ‘잊혀질 권리’, ‘존엄하게 죽을 권리’ 혹은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과 같은 논란을 보라. 단시간에 인권 목록에 오르는 권리 요구도 있지만 오랜 논쟁을 거쳐도 풀리지 않는 문제가 적지 않다. 권리 간 충돌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인권은 그 시대에 특유한 억압권력에 맞서는 투쟁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규정된다는 사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078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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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 10. 15:15

'우리 기업인들의 기개(氣槪)가 지금처럼 위축되고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적이 있을까?' 요즘 고위 임원·CEO들을 만나 얘기를 나눌 때 수시로 드는 생각이다. 이들이 말하는 사정은 여럿이다. 국내에선 중앙·지방정부와 입법부가 기업 발목을 잡고 있다. 세계경제는 저(低)성장이 정상(正常)으로 불릴 만큼 동력을 잃었다. 웅진·STX그룹은 해체됐고, SK· CJ·동양그룹 오너는 수감됐거나 재판 중이다. 재계에서 "현상을 유지하며 내 한 몸만 보전해도 대성공"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거스르는 기업도 있다. 1980년 서울 신촌 이화여대 앞 작은 가게에서 시작해 1998~99년 부도 위기를 겪었던 이랜드그룹이 주인공이다. 성장세부터 다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인 2009년부터 매년 두 자릿수 성장을 거듭 중이다. 지난해엔 매출 10조원 고지(高地)를 넘었고 영업이익은 1년 새 25% 정도 늘었다. 최근 5년간 국내외에서 20여개 업체·사업 부문을 인수·합병(M&A)하는 공격 경영도 주목된다. M&A 목록에는 세계 30여개국에서 판매되는 글로벌 브랜드인 K-SWISS와 코치넬리·만다리나덕 같은 유명 상표, 퍼시픽아일랜즈클럽(PIC·사이판), 계림(桂林)호텔(중국) 등이 올라 있다.

흥미롭게도 이랜드가 명품·레저·호텔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데는 '중국'이란 확실한 키워드가 있다. 글로벌 고가(高價) 브랜드를 직접 사들여 중국 시장을 더 깊고 더 넓게 파고든다는 '중생중사(中生中死·중국에서 살고 중국에서 죽는다) 전략'이다.

얘기가 여기까지라면 다른 기업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이랜드에는 '필살기(必殺技)'가 있다. 1999년 도입한 '지식 경영'이다. 매장 판매사원부터 최고위 임원까지 참여하는 지식 경영은 현장에서 모은 시장 자료·정보와 신사업 아이디어를 데이터베이스(DB)화해 활용하는 것이다. 매년 4000건 이상을 엄선해 이 중 5%는 '기업 비밀'로 특별 관리한다. 임원급 최고지식경영책임자(CKO)가 직접 챙기고 매년 두 차례 '지식 페스티벌'을 열어 특진(特進)·포상·발탁 등을 한다. 최종양 사장은 중국법인장이던 2012년 3개월간 중국 22개 도시의 81개 백화점 내 720여개 매장에서 현장 관리자 4414명과 면담한 내용을 지식 경영 인트라넷에 올렸다. 2003년 440억원 매출(매장 130개)을 올리던 이랜드중국이 지난해 매출 2조2000억원(매장 6200개)짜리 패션 강자(强者)로 도약한 비결이다.

물론 그룹 전체 차입금(借入金·연결 기준)이 4조원을 넘고, 부채비율이 390%(작년 6월 기준)에 이르는 재무구조를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이랜드 측은 "현금 보유액이 충분해 문제없다"고 말하지만 과도한 금융비용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는 시샘 섞인 관측도 많다.

하지만 최소한 이랜드의 과감한 '도전'이 지금까지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더욱이 한국 기업가들에게 사라져가는 야성(野性)과 용기(勇氣) 치밀한 전략, 이 세 덕목을 이랜드만큼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한국 기업은 드물다. 이랜드의 처지를 걱정하거나 조롱하기에 앞서 더 지독하게 벤치마킹해 이 회사를 능가하는 기업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그래야 한국도 산다.

송의달 산업1부장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17/201404170338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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