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봐야지.”
할머니가 갓 결혼한 손자 부부에게 권유한다. 할머니가 자리를 비운 사이, 이번에 어머니가 아들 부부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타이른다.
“딸이 최고다.”
잠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젊은 부부는 결심한 듯, 두 어르신에게 선포한다.
“웬만하면, 안 낳으려고요.”
추석에 지인(知人)의 집안에서 벌어진 3대의 대화다. 아들 선호에서 딸 선호로, 다출산에서 저출산으로 확 바뀐 우리 사회의 단면이다. 출생통계가 나왔다. 딸 100명당 아들 출생이 105명까지 떨어졌다. 1981년 이후 아들 성비가 가장 낮았다. 수명이 짧고 사고를 많이 당하는 수컷의 태생적 한계를 감안하면 105~107을 밑돌면 실질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적어진다.
‘남아 부족 사회’가 곧 닥칠 미래라면 ‘총각 과잉 사회’는 엄연한 현재다. 올해 예비신랑(결혼적령기 29~33세)은 예비신부(26~30세)보다 38만 명 정도 많다. 내년부터 신랑 초과가 20만 명대로 떨어진다고 하니, 이 땅의 총각들은 최악의 2014년을 견뎌내는 중이다. 아무튼 ‘남아 출산 역대 최저’와 ‘총각 과잉 역대 최고’가 동시에 벌어지는 기막힌 사회에 우리는 산다. 역설의 씨앗은 40년 전에 뿌려졌다.
1970년대 한국에는 아들 선호 사상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 생각이 그렇다고 곧바로 성비 불균형이 오지는 않는다. ‘태아성감별’이라는 새로운 기술이 생각과 합체하면서 성비의 조화는 급격히 무너진다. 그때 태아성감별 기법은 정교화·대중화한다. 이 기법은 사회의 위협요소가 아니라 경이로운 첨단이었다. 74년 한 일간지는 태아성감별 기술을 이렇게 칭송한다.
‘양막세포의 성염색체질을 분석하는 기법으로 무려 90%나 정확하게 태아의 성별을 감별하는 기술이 개발돼 화제를 모으고….’
아들 출생성비는 81년 107에서 90년 116까지 가파르게 올라간다. 상승곡선을 보면서도 정부와 의료계는 뒷짐을 지고 있었다. 성비가 115 선을 육박하던 87년이 돼서야 정신을 차려 태아성감별을 처벌할 수 있게 의료법을 손질했다. 정신만 차렸을 뿐 실제 행동은 한참 뒤인 90년대 중반에 들어간다. 의협의 자체고발 선언(95년), 복지부의 의사면허 취소 발표(96년), 검찰의 첫 의사 구속(96년) 등 강력한 제재 기류가 일어난다.
하지만 어찌하랴. 96년 성비는 이미 111을 기록, 급격히 떨어지는 추세였다. 아들 선호 사상이 퇴장하는 시점에서 ‘강력한’ 뒷북 정책이 출현한 것이다. ‘남아 출산 최저’와 ‘총각 과잉 최고’가 같은 시대에 출현한 까닭은 바로 인구·기술의 동향을 무시하고, 적절한 대책을 세우지 않은 탓이었다.
사회변화를 촉발하는 근원적인 요인을 미래 동인(動因)이라고 부른다. KAIST 미래전략대학원은 7가지 동인을 ‘STEPPER’라는 영문이니셜로 제시한다. 사회·기술·환경·인구·정치·경제·자원을 뜻한다. 7가지 중에서도 미래 변화를 설명하는 데 항상 빠지지 않는 동인은 인구·기술(PT) 두 가지다. 지난 40년간 우리의 미래전략은 번번이 실패했다. 아니, 미래전략 자체가 없었다. 인구와 기술의 변화를 제때 읽어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사회문제가 가라앉는 상황에서야 극약처방을 쓰는 잘못을 저질렀다.
앞선 나라의 경제·사회 체제를 빨리 베껴 발전하던 시절에는 미래전략의 실패는 용납될 수 있었다. 지금은 베낄 데가 거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스스로 미래의 변화요인을 찾아내 관리하지 않으면 미래의 기습을 받게 된다. 누가 인구변화와 신(新) 기술의 영향력을 가늠하고 대책을 세울 건가. 국가든, 기업이든, 단체든 그런 사람이 미래의 리더이어야 한다.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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