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0. 15:47

국회는 마비되고 민심도 갈라졌다. 세월호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줘야 한다는 여론과 여야의 기존 합의안을 존중해야 한다는 여론이 맞선다. 전대미문의 대참사에 온 국민이 함께 국상(國喪)을 치른 '순수의 시대'는 사라졌다. 진상 조사와 재발 방지의 공감대로 만난 유가족과 국민의 순정(純情)을 넘어 세월호 문제는 진흙탕 권력 투쟁으로 비화했다. 세월호특별법을 두고 보수·진보 진영은 다음 총·대선까지의 정치적 득실을 따지느라 바쁘다. '만사(萬事)의 정치화(政治化)'라는 우리의 고질병이 다시 도졌다.

그러나 서늘한 가을바람은 당쟁(黨爭)으로 타락한 '세월호 정치'를 준엄하게 꾸짖으며 모두 정신 차려서 '세월호 이후'를 준비하라고 경고한다. '세월호 이후'를 예비하는 자기 성찰의 최대 화두는 직업윤리 문제다. 세계 해운인의 수치로 지적된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의 행태가 대표적이다. 이를 특정 해운사의 횡포 앞에 무력했던 선박 노동자의 일탈로 좁히는 건 안이한 설명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하기 짝이 없던 정부와 공무원들의 행태도 직업윤리 부재라는 맥락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직업윤리의 척박함은 한국인의 행복도가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인 이유를 설명한다. 사건·사고가 터질 때마다 감정 인플레 현상이 휩쓰는 것도 한국인의 삶에서 마음의 중심이 견고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에게 마음의 중심은 과거처럼 정신 수련이 아니라 성숙한 직업윤리에서 나온다. 현대인은 자기가 선택한 직업에서 열심히 일함으로써 돈도 벌고 공동체에 기여하며 자아실현을 꾀한다.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중심 잡힌 마음이 곧 직업윤리다.

우리 사회는 자연스럽게 직업윤리를 생성하는 '돈벌이-사회에 대한 기여-자기실현' 사이의 연결고리가 사회문화적 압력에 의해 단절되어 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민감해서 남이 인정하는 직업에 연연한다. 인정받는 직업이란 돈을 많이 벌거나 권력이 있는 자리를 뜻한다. 물론 그것은 다른 나라도 비슷하지만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에 대한 한국인의 집착은 유별나다. 살인적인 입시 경쟁도 좋은 학벌이 좋은 직업으로 이어지고 좋은 직업이 성공한 인생으로 연결된다는 확신 때문이다.

겉은 민주 다원(多元) 사회지만 우리 사회의 내적 가치관은 매우 단원적(單元的)이며 봉건적이다. 무릇 인재라면 '출세'해야 하고, 출세의 종착점은 '벼슬'하는 데 있다고들 한다. 이런 인식이 일상화된 사회는 관(官)과 정치 영역의 이상 비대화가 불가피하다. 현대 정당정치로 포장한 한국 정치가 중세적 당쟁에 매몰되기 일쑤인 근본 배경이다. 극소수 직업이 사회적 인정을 독차지할 때 건강한 직업윤리 생성은 요원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아직 중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돈·권력·명예라는 희소 자원이 몇몇 직업으로 집중되는 한국적 메커니즘을 끊어내야 진정한 현대로의 진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깊은 실존적 통찰로 나아가야 한다. 사람답게 살 만한 수입이 어느 정도 확보되면 그다음 단계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일에 자족(自足)하는 것이다. 르상티망(강자와 승자에 대한 약자와 패자의 질투 서린 원망)이 유독 강한 한국 사회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보다 희귀한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노동의 종말'이 현실로 닥쳐오는 사회에서 '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도 귀한 것이다. 나아가 자신의 일에 대한 자족감이 현실에 대한 안주(安住)로 퇴행하지 않게끔 자계(自戒)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어떤 일에 자족하면서도 자계하게 되면 이윽고 그 일을 잘할 수 있게 된다. 자족하면서 자계함으로써 잘할 수 있게 된 일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행복감이다. 일 자체에 대한 몰입에서 오는 행복감은 자기 충족적이어서 세상의 인정과 돈의 보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족과 자계의 사이클이 만드는 뛰어남(arete·아레떼)은 모든 직업윤리의 핵심이다. 그 뛰어남에서 비롯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한국인이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마음의 습관이다.

세월호특별법 논란으로 시끄러운 판국에 직업윤리는 한가한 얘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세월호 사태는 직업윤리야말로 오늘의 한국인에게 진정 중요한 덕목임을 웅변한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삶의 기쁨과 진실이 평범한 데 있다는 걸 함께 확인하게 되는 한가위가 다가온다. 이제는 우리도 '세월호 이후'를 준비해야만 한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04/2014090404639.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