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권에서 세월호 사태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세월호 가족대책위의 유경근 대변인이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세월호 유족을 이끄는 실질적 리더로 유씨를 꼽고 있다. 유씨는 세월호 침몰로 쌍둥이 자매 중 둘째를 잃었다.
유씨는 정의당 당원이라고 한다. 정의당은 통합진보당을 탈당한 유시민·심상정·노회찬 의원 등이 2012년에 만든 정당이다. 그는 유시민 전 의원을 지지하는 팬 클럽 회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씨가 유족 대변인으로 나서면서 그가 2013년 11월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논란이 됐다. 유씨는 '바뀐애는 물러나야 한다'고 썼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름을 그렇게 바꿔 부르며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대통령은 대통령이 아니기에 훔친 거 내놓고 나가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유씨는 세월호 참사로 목숨을 잃거나 실종된 304명 피해자 가족 중 한 사람이다. 가족을 잃은 참기 힘든 슬픔을 함께하는 유족들이라 해도 정치적 신념과 성향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실제 유족들은 참사 초기에 각 정당과 정치인들이 혹시라도 세월호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할 가능성을 가장 경계했다. 여당이라고 박대하거나 야당이라고 반기는 일도 눈에 띄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이들의 판단 기준은 하나였다. 어느 정치인, 어느 정당이 진심으로 자신들을 대하고 세월호 진상 규명 의지를 보여주느냐를 따졌을 뿐이다. 이 관문을 가장 성공적으로 통과한 인물이 새누리당 4선(選) 의원 출신으로 세월호 참사 직전에 해양수산부 장관을 맡은 이주영 장관이다.
이 장관은 지난 추석 연휴 내내 세월호 침몰 현장인 진도에 머물렀다. 이 장관은 요즘도 외부 일정을 마치면 무조건 진도로 향한다. 그러곤 유족들을 만나고 진도군청 사무실에 마련된 간이침대에서 잠을 청한다. 벌써 다섯 달이 넘게 이런 생활을 해 왔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난 8월 하순 이란·일본 출장에 맞춰 넉 달간 길게 자랐던 수염을 자른 정도다. 처음엔 이 장관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르던 유족들이 이제는 이 장관이 한동안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이 장관은 해양 관련 안전 대책을 다시 세우고 10명 남은 실종자 수색 및 구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진도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세월호 사태의 본무대는 참사 발생 한 달 뒤부터 서울로 옮아왔다. 각종 시위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단체들이 대거 참여한 '세월호참사 국민대책회의'가 만들어진 것도 이 무렵이다. 이때부터 유족들의 국회 방문과 항의 농성이 시작됐다. 그런데도 이 정권의 누구도 팽목항의 이주영 장관처럼 서울로 올라온 유족들을 만나 이들의 마음을 얻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당에선 유족들을 노숙자에 비유하는 등 상처를 주는 발언이 줄을 이었다.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6번이나 사과하고 정부 전체가 사고 수습에 매달렸던 노력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정권과 유족 단체가 대립하는 구도가 만들어졌다. 여권 고위관계자는 "세월호 참사 첫 한 달과 그 이후의 유족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얼마 전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18세 흑인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후 이 도시는 열흘 넘게 대규모 흑인 소요(騷擾)를 겪었다. 한밤중에는 약탈까지 횡행했다. 이 사태는 흑인인 에릭 홀더 법무장관이 현지에 투입되면서 거짓말처럼 가라앉았다. 흑인들이 자신들의 분노와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 나타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면 박근혜 정부에는 인종이 다른 것도 아니고 무장 폭력 시위를 벌이는 것도 아닌 세월호 유족들과 얼굴을 맞대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줄 사람도 마땅히 없었다.
정부·여당과 달리 유족들을 에워싼 단체들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유족 곁을 지켰다. 여당 관계자는 "유족의 마음을 얻는 데서 전문가 수준인 이들을 당할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 단체들은 군 기지 건설이나 송전탑 문제 등 사회적 갈등 요인이 있는 현장이라면 어디든 달려간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판판이 이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이주영 장관의 성공 사례는 재현(再現) 불가능한 예외적인 경우인가.
사실 세계에서 민족·인종·종교 같은 대형 갈등 유발 요인이 우리만큼 적은 나라는 드물다. 그런데도 어느 나라보다 더 큰 사회적 갈등 비용을 치르느라 스스로 손발을 묶어 놓고 있는 게 지금 우리 실정이다. 선진적인 갈등 관리 모델을 찾는 것이야말로 세월호 후속 대책의 핵심 내용이 돼야 한다.
며칠 전 세월호 가족대책위는 국회를 찾아가 "새누리당이 강조하는 민생 법안은 서민에게만 세금 많이 내라는 것이고 부동산 투기를 부추기며 의료비를 폭등시킬 우려가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변인 유씨가 주도했다. 야당 대변인이나 다를 게 없다.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속수무책으로 일관한 정부·여당의 무능·무책임을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박두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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