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0. 15:15

'우리 기업인들의 기개(氣槪)가 지금처럼 위축되고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적이 있을까?' 요즘 고위 임원·CEO들을 만나 얘기를 나눌 때 수시로 드는 생각이다. 이들이 말하는 사정은 여럿이다. 국내에선 중앙·지방정부와 입법부가 기업 발목을 잡고 있다. 세계경제는 저(低)성장이 정상(正常)으로 불릴 만큼 동력을 잃었다. 웅진·STX그룹은 해체됐고, SK· CJ·동양그룹 오너는 수감됐거나 재판 중이다. 재계에서 "현상을 유지하며 내 한 몸만 보전해도 대성공"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거스르는 기업도 있다. 1980년 서울 신촌 이화여대 앞 작은 가게에서 시작해 1998~99년 부도 위기를 겪었던 이랜드그룹이 주인공이다. 성장세부터 다르다. 글로벌 금융 위기 직후인 2009년부터 매년 두 자릿수 성장을 거듭 중이다. 지난해엔 매출 10조원 고지(高地)를 넘었고 영업이익은 1년 새 25% 정도 늘었다. 최근 5년간 국내외에서 20여개 업체·사업 부문을 인수·합병(M&A)하는 공격 경영도 주목된다. M&A 목록에는 세계 30여개국에서 판매되는 글로벌 브랜드인 K-SWISS와 코치넬리·만다리나덕 같은 유명 상표, 퍼시픽아일랜즈클럽(PIC·사이판), 계림(桂林)호텔(중국) 등이 올라 있다.

흥미롭게도 이랜드가 명품·레저·호텔 분야를 집중 육성하는 데는 '중국'이란 확실한 키워드가 있다. 글로벌 고가(高價) 브랜드를 직접 사들여 중국 시장을 더 깊고 더 넓게 파고든다는 '중생중사(中生中死·중국에서 살고 중국에서 죽는다) 전략'이다.

얘기가 여기까지라면 다른 기업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이랜드에는 '필살기(必殺技)'가 있다. 1999년 도입한 '지식 경영'이다. 매장 판매사원부터 최고위 임원까지 참여하는 지식 경영은 현장에서 모은 시장 자료·정보와 신사업 아이디어를 데이터베이스(DB)화해 활용하는 것이다. 매년 4000건 이상을 엄선해 이 중 5%는 '기업 비밀'로 특별 관리한다. 임원급 최고지식경영책임자(CKO)가 직접 챙기고 매년 두 차례 '지식 페스티벌'을 열어 특진(特進)·포상·발탁 등을 한다. 최종양 사장은 중국법인장이던 2012년 3개월간 중국 22개 도시의 81개 백화점 내 720여개 매장에서 현장 관리자 4414명과 면담한 내용을 지식 경영 인트라넷에 올렸다. 2003년 440억원 매출(매장 130개)을 올리던 이랜드중국이 지난해 매출 2조2000억원(매장 6200개)짜리 패션 강자(强者)로 도약한 비결이다.

물론 그룹 전체 차입금(借入金·연결 기준)이 4조원을 넘고, 부채비율이 390%(작년 6월 기준)에 이르는 재무구조를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이랜드 측은 "현금 보유액이 충분해 문제없다"고 말하지만 과도한 금융비용으로 큰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라는 시샘 섞인 관측도 많다.

하지만 최소한 이랜드의 과감한 '도전'이 지금까지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더욱이 한국 기업가들에게 사라져가는 야성(野性)과 용기(勇氣) 치밀한 전략, 이 세 덕목을 이랜드만큼 효과적으로 실천하는 한국 기업은 드물다. 이랜드의 처지를 걱정하거나 조롱하기에 앞서 더 지독하게 벤치마킹해 이 회사를 능가하는 기업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그래야 한국도 산다.

송의달 산업1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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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