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과 워싱턴DC를 자동차로 오가다 보면 델라웨어를 거치게 된다. 델라웨어주의 최대 도시 윌밍턴에 들러보자. 노스오렌지 거리(North Orange Street) 1209번지. 미국 기업들에 가장 유명한 주소다. 구글·애플·코카콜라·포드 같은 쟁쟁한 회사들이 이곳에 본사를 등록해두고 있다. 본사 주소를 1209번지로 쓰고 있는 기업은 28만곳이다. 2층짜리 반(半)지하 빌딩이 그 많은 회사의 공동 본적지(本籍地)다.
구글이나 애플은 이곳에 호적만 올려놓고 실제 사업은 실리콘밸리에서 하고 있다. 다른 기업들도 이 주소만 사용할 뿐이다. 윌밍턴 공무원들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기업 고객들이 전화를 걸어오면 응대하기 위해 평일에도 밤 12시까지 근무한다.
원래 친(親)기업으로 유명했던 곳은 버지니아였다. 그러나 버지니아가 기업을 괴롭히는 법을 계속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서 이웃 델라웨어는 거꾸로 갔다. 법인세를 낮췄고 상표권이나 저작권 수익에는 면세 혜택을 주었다. 기업 입장을 두둔하는 조례도 많이 제정했다. 델라웨어 법원도 기업 쪽에 관대한 쪽으로 판결을 내리는 경향이다.
그렇게 델라웨어에 몰려든 기업이 100만개다. 델라웨어 인구 92만명보다 많다. 100만 기업이 내는 세금으로 92만 주민이 먹고산다. 지자체들끼리 벌인 경쟁에서 델라웨어가 이긴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 공약들을 유심히 살펴보라. 또 새 도로와 긴 다리를 건설하겠다고 한다. 복지 공약도 단골 메뉴다. 공단을 더 넓히고 기업을 유치해 금방이라도 지역 경제가 활활 타오르게 마술을 부릴 것처럼 말하는 후보가 적지 않다. 경제 낙원(樂園)이 탄생할 듯하지만 무엇을 하겠다는 공약만 풍년이고 어떻게 그것을 실행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우리나라는 농어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변신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교육·의료·소프트웨어 같은 두뇌를 쓰는 분야에서는 별다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선진국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두뇌 국가로 탈바꿈해야 할 시기를 맞았지만 모두가 근육을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단계이다. 지방선거 공약에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피츠버그는 철강 도시였다. 유에스스틸(US Steel)의 본거지다. 그러나 지금 도시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64층짜리 유에스스틸 타워의 꼭대기 층부터 가장 많은 층을 점거한 기업은 피츠버그대학 메디컬센터(UPMC)다. 폐·심장 이식 수술로 유명한 의료법인이다. 피츠버그대 의료센터는 병원을 22개나 경영하며 6만2000여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피츠버그시에서 최대 기업인 셈이다.
피츠버그는 미국 철강 산업이 쇠퇴하면서 한때 '녹슨 도시'로 통했다. 그러나 지금은 의료 산업의 중심지로 변신했다. 거기에 로봇·바이오 산업을 보태고 있다. 피츠버그가 두뇌 도시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곳은 피츠버그대학과 카네기멜론대학이다. 역대 시장들이 두 대학에 연구비를 집중 지원해 도시의 검붉은 녹물을 씻어내고 그 자리에 병원과 로봇을 앉힌 것이다.
우리 지방자치도 20년을 넘었다. 12년씩 장기 재임한 지자체장들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과거의 도시가 사라진 곳에 새로운 도시가 탄생했다는 인상을 주는 사례는 거의 없다. 모두들 중앙 정부에서 보조금을 더 타내다가 외형만 그럴싸한 공사판을 벌였다. 새 도로가 뚫리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도시의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 도시를 먹여 살리는 콘텐츠는 변하지 않고 있다.
사실 공업의 시대에 번성했던 도시들은 다음 세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를 맞았다. 울산, 거제, 창원, 구미 같은 도시는 모두 산업화의 산물(産物)이다. 우리 자동차·조선·전자산업의 경쟁력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이들도 녹슨 도시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런가 하면 농업의 시대에 호황을 누렸던 도시들은 공업화 물결을 타지 못한 채 여전히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지방선거 20년 만에 모처럼 이념 갈등도 줄었고 큰 정치 이슈도 없다. 맹탕 선거라는 말도 들린다. 그렇다고 한국의 산업혁명 시절에 번영했거나 낙오했던 도시들이 변신해야 하는 숙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델라웨어처럼 큰 공장은 없어도 기업 본사를 유치할 수도 있고 피츠버그처럼 도시의 주력 업종을 교체해 주민을 먹여 살리는 방법도 있다. 지역 개조(改造)를 놓고 다투는 선거판이 달아올라야 한다.
송희영 주필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04/20140404043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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