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7. 21:32

머리에 노란 꽃을 단 대통령의 그림이 광화문 하늘에 여우비처럼 흩날렸다. 면세점 건물 옥상이었다. 작가는 3만5,000장을 뿌리려 했지만 곧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를 취재하던 기자도 함께 잡혀 들어갔다. 경찰이 내건 죄목은 ‘건조물 침입’이었으나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면세점 건물에 무단 잠입했다고 입건된 것이 아니라, 최고 존엄에 대한 풍자가 문제라는 것을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또 이렇게 이죽거렸다. 여우비로 뿌리지 말고 풍선에 매달아 날렸어야지. 며칠 전 대북 전단 살포를 그만 두라며 북한이 우리 땅에 포탄을 떨어뜨렸을 때, 여당은 이렇게 대꾸했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정부는 민간의 일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 나라는 예술가의 풍자에 개입하는 것일까.


얼마 전 프랑스에서도 ‘정치인의 희화화’가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한국 입양인 출신의 첫 상원의원 장-뱅상 플라세가 그 주인공이었다. 니콜라 깡들루라는 유명 코미디언이 플라세의 억양을 우스꽝스레 흉내 내었다. 악랄하게 과장된 딱딱하고 촌스런 발음이 웃음 포인트였지만, 정작 7살 때 입양된 플라세의 말투는 전형적인 프랑스인과 다르지 않다. 이 코미디언은 예전에도 아프리카 출신 정치인의 억양을 비웃었던 전력이 있었다.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이 프랑스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민감한 시기, 플라세를 향한 풍자를 두고 대중의 반응은 양분되었다. 누군가는 깔깔거렸지만 누군가는 ‘인종주의’적 위험한 풍자라 경계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사자 플라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프랑스 녹색당의 유력 정치인이면서도 영락없이 한국인의 얼굴을 갖고 있는 그는 코미디언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깡들루씨, 당신을 한국식 식사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나로선 당신의 유머가 전혀 재미있지 않더군요. 제 목소리를 제대로 흉내 내려면 저와 함께 김치를 먹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요.” 대중들은 익살스러우면서도 허를 찌르는 플라세의 트윗에 뜨거운 호의를 보냈다.


한편 예술가의 풍자가 용납되지 않은 세상에선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기도 한다. 옛 소련의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란 오페라로 음악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공연 첫해만 해도 모스크바에서 94회, 레닌그라드에선 83번씩이나 무대에 오를 정도로 비평가와 청중 모두로부터 휘황한 찬사를 받았던 작품이었다. 그 뿐인가. 유럽의 주요 도시에 초청되어 ‘사회주의 오페라의 높은 성과’란 호평도 이끌어 내었다. 국제적 명성을 거머쥐자 공산당은 작곡가를 ‘소비에트 인민의 영웅’이라 추켜세웠다. 스탈린 역시 엄청난 흥행을 직접 목도하고 싶어 볼쇼이 극장을 찾았다. 그러나 오페라가 채 끝나기도 전 객석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극중 독살 장면이 그의 심기를 거슬렀던 까닭이었다. 피의 숙청을 단행하고 있던 독재자로선 주인공에게 살해 당한 인물이 꿈속에 나타나 저주하는 장면이 편할 리 없었다. 다음 날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는 20세기 음악사의 가장 큰 비극을 선언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인민의 적’이라 낙인 찍혔고, 사회주의 오페라의 높은 성과라 칭송 받던 므첸스크의 맥베스 역시 ‘조잡하고 천박한 쓰레기’라 일거에 추락한 것이다. 작곡가는 언제 어느 때 숙청될지 모르는 공포 속에 웅크렸고, 오페라는 그 뒤로도 27년 동안이나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머리에 노란 꽃을 단 대통령의 그림이 며칠 전 대한민국의 하늘에 여우비처럼 흩날렸다. 그림을 흩뿌리러 옥상에 오르기 전, 작가는 자신의 복잡한 심정을 페이스북에 남겨 놓았었다. 그는 ‘전립선이 떨리도록 두렵다’ 토로하면서도, ‘엿 같은 세상을 엿 같다 말해야’하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이라 얘기했다. 그리곤 준비했던 3만5,000장을 다 뿌리기 전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허나 그 파급은 사람들의 설왕설래로 3만5,000장 보다 훨씬 더 멀리 퍼져 나갔다. 마침 이 시절은 ‘모독이 도를 넘었다는’ 대통령의 발언 이후 사이버 망명이 난무하는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실소하는 동시에 불안해했다. 예술가의 풍자적 표현조차 비장한 각오로 내놓아야 할 이상한 시절을 살고 있다.


조은아 피아니스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http://www.hankookilbo.com/v/bf1092e6bc6746dc81efc318df4bd3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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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6. 17:15

결혼식을 한 부부가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경향이 늘어난다고 한다. 남성보다 여성이 더 원해서란다. ‘혹시 금방 헤어질 것에 대비해서 그런가?’ 그런데 아니다. 취업을 원하지만 결혼 전까지 취업을 못한 여성들의 결정이란다. 취업 지원 때 서류상 기혼이면 불리해서 일단 미혼으로 지원한다고 한다. 하필 왜 여성들이 무슨 불리 때문에 그러는가? 기혼여성을 채용하면 금방 임신ㆍ출산 때문에 업무에 지장이 있으리라는 회사의 우려(?)로 인해 탈락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업할 때까지 혼인신고를 미루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해외토픽감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이 땅의 여성들이 출산계획을 세우려고 할까? 많은 전문가들이 저출산 현상의 주원인으로서 교육ㆍ돌봄비용 부담을 언급한다. 물론 아주 틀린 진단은 아니다. 그래서 어린이집 수는 급격히 확대되고, 임신ㆍ출산 전후 비용 지원 목록도 다양해졌다. 게다가 무상보육제도까지 도입됐다. 그러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는 대책은 효과를 볼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렇다면 저출산의 근본적 원인은? 가족도 부부도 아닌, ‘여성’의 돌봄부담이다. 더 나아가 돌봄부담을 기꺼이 하려는 여성을 시장이 채용 기피와 경력단절 강요로써 벌주는 현상이다.


‘남성=취업노동 담당자, 여성=무보수 가사ㆍ돌봄노동 담당자’ 구도를 ‘성별노동분리’라고 표현한다. 성별노동분리를 우리사회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남성은 취업노동에만 전념해도 되고 여성은 취업노동에 가사ㆍ돌봄노동을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래도 이중부담을 어떻게 해서든지 견뎌보려고 하는 여성에게 기업은 채용기피와 취업노동 중단 강요를 한다. 이중부담을 견뎌야 하고 원하는 취업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아이를 낳지 않는 방향으로 개별 여성이 무의식적으로 집단 반응을 하는 결과가 저출산의 지속이다. (가임기) 여성 전체는 조직화한 집단이 아니다. 그러나 성차별적 임신ㆍ출산 과정에서 갖게 되는 개인적 경험에 충실한 여성의 반응이 ‘출산파업’이라는 집단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린이집을 아무리 만들어도, 퇴근시간 되자마자 엄마가 뛰어야 하는 현실에서 이른바 직장맘은 한 명은 낳아도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다. 받지 않던 비용지원을 받으면 도움은 된다. 그러나 바우처 카드에 넣어주는 돈 몇 십만원에 아이 더 낳겠다고 결심하는 여성이 얼마나 될까? 교육비 부담 높다고 국가가 어느 수준까지 비용 분담을 해줄 수 있을까? 아예 없던 국가와 사회의 지원이 생겨서 좋다는 반응이 당장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 반응은 오래가지 않는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야근하고 회식 가서 남성 동료와 함께 제때 승진하고자 한다고 생각해보자. 임신ㆍ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의 대가로 국가 지원을 받는 것보다, 중단 없는 취업노동으로 양육비를 스스로 벌고 넉넉한 노후도 스스로 만들고 싶다는 여성의 소망을 인정하자.


성별노동분리 구도 철폐를 전제로 하지 않는 국가의 돌봄비용 지원은 영리민간 어린이집 시장 규모만 키우고 있음을 이미 보고 있다. 사교육비 부담이 저출산의 원인이라면 앞으로 국가에서 사설학원 비용도 대줄 것인가? 재정정책상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고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사교육 시장 규모만 키울 뿐 저출산은 지속될 것이다.


물론, 성별노동분리 극복을 국가정책으로만 할 수는 없다. 기업의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인력에 대한 시장 수요 변화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성별노동분리 극복’을 명백한 정책 목표로 내세우지 않는 이상 저출산 극복의 길은 시작할 수 없다. 이른바 돌봄의 사회화를 위해 수많은 재정을 투입했지만 가족 내 성별노동분리 극복을 목표로 하지 않았던 독일은 현재 대표적 저출산 국가 중 하나이다. 그런 독일이 지난 2007년 이후 스칸디나비아 국가식 성별노동분리를 극복하는 돌봄의 사회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책 효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 앞으로 10여 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고 독일의 관련 전문가들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http://www.hankookilbo.com/v/abb76e0c502a4d1fa48c346ea2407cbd



Posted by 겟업
2014. 12. 26. 16:52

미국 CIA가 발간하는 자료(WORLD FACTBOOK)를 보면 구매력 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13년 7월 현재 3만3200달러다. 구매력 기준 국민소득은 명목환율 기준 국민소득이 놓치기 쉬운 그 나라의 실제 경제, 생활수준을 보여 준다. 우리보다 높은 나라는 거의 북미·유럽 국가들과 카타르·쿠웨이트 같은 자원부국 혹은 조세피난처들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싱가포르·대만이 우리보다 높다. 일본 3만7100달러, 영국 3만7300달러, 프랑스 3만5700달러이며 유럽연합(EU)의 평균은 3만4500달러로 우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3만100달러, 2만9600달러로 우리보다 낮다.

 이 통계가 보여 주는 대로 한국 경제는 소득이나 생활수준에서 이미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거나 근접해 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 통계에서 도소매업·음숙박업의 소득이 크게 과소평가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1인당 실질소득은 더 높을 것이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 또는 일본에서 생활해본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매우 잘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첫째, 이제 우리가 선진국 기술과 제도의 모방으로 이들을 따라잡는 성장은 거의 한계에 달했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도입한 기술에 대규모 투자와 값싼 노동을 동원해 고성장을 이뤘던 과거 성장방식에 이제 더 기댈 수 없다. 인구 고령화, 투자율 감소는 이런 한계를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창출하고 새로운 제도를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만큼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빠르게 일어날 수 없다면 성장 속도도 자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생산성 향상이 향후 성장의 주 동인이 돼야 하나 우리의 생산성 향상은 여전히 더디다. 해외에 진출해 있는 기업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임금이 우리의 몇 분의 일도 안 되는 중국 공장의 생산성이 한국 공장보다 높고, 미국 공장의 생산성은 국내 공장의 두 배에 달하나 임금수준은 오히려 낮다고 한다. 지금과 같은 한국 근로자의 생산성을 가지고는 현재의 소득수준을 지켜내기도 어렵다는 얘기다. 정부와 기업에서 일하는 방식, 인사 평가, 고용 및 승진제도, 임금체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반적 시스템 혁신이 일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추격이 어렵게 된 것이다. 교육의 질을 높이고, 노동 부문을 개혁하며, 기업 구조조정을 가속화해야 한다. 숯불이 거의 다 탔는데 단기 부양책으로 풀무질만 해댄다고 불이 다시 타오르지는 않는다.

 둘째, 고성장 없이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성장지상주의로 달려왔고 지금도 성장률에 매달려 있다. 성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매달려 있는 동안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놓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4개 회원국을 비교한 지표에는 한국이 노동시간 2위, 산재사망률 1위, 자살률 1위, 국민행복지수 33위, 출산율은 꼴찌라고 한다. 또 미국 여론조사기관의 ‘삶의 질 지수’는 조사 대상 135개국 중 한국이 75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필리핀(40위)·인도(71위)·이라크(73위)보다 낮음을 보여 준다(9월 18일자 중앙일보 사설). 왜 우리 국민은 높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하는가? 지금 우리나라에 절실한 것은 현재의 소득수준에서도 보다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문화·제도·관행을 바꿔 나가는 것이다. 질서와 예절, 정직과 투명, 상호 신뢰, 법 적용의 공정성과 엄중함, 공정경쟁, 이런 가치들을 우리 사회가 보다 존중하는 토양을 만들어 가야 한다. 각자가 타고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교육과 취업 기회를 가지며, 불운이 닥쳐도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복지가 제공되며, 억지보다 합리성이 더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국민은 지금 행복에 배고프다. 우리가 과거 헝그리 정신으로 경제 도약을 이뤘듯이 이제 ‘행복 헝그리’ 정신으로 행복 도약을 이뤄야 한다. 우리는 쉽게 정부를 탓하나 이는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민이 여러 캠페인을 통해 새로운 사회 풍습과 문화의 정착을 가져오도록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정부도 이를 끌어내기 위해 각종 제도와 보상체계를 바꿔 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가혁신이다. 단기 부양책에 정권에 주어진 시간과 정치적 에너지를 너무 소모하지 말고 우리 사회의 생산성과 행복 증진을 위한, 보다 공정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위한 ‘시스템 혁신’에 시간과 에너지를 더 쏟았으면 좋겠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938883&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4. 12. 26. 16:44

#풍경1 : 저녁 모임이었습니다. 한 증권사 부사장이 리더십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는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었다. 주로 자료를 복사하고, 심부름하고, 그 다음에는 문서 작업을 했다. 그런데 직책이 점점 올라갈수록 내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이 바뀌더라.” 나중에 임원이 됐을 때는 곰곰이 짚어봤다고 합니다. 자신이 실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리더십이 어떤 건지. “그랬더니 놀라운 사실을 알겠더라. 위로 올라갈수록 내게 필요한 건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할 때 배운 게 아니었다. 회의할 때 부하 직원들과 소통하는 법,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법, 사업상 처음 만난 사람과 사귀는 법. 그런 게 가장 중요하더라. 그건 책상 앞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들과 놀고 어울리면서 익힌 것들이었다.”

다들 놀랐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말을 던집니다. “밖에 나가서 놀지만 말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 좀 해! 제~발.” 돌아오는 길,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독립해서 필요로 하는 힘은 뭘까. 그건 어떤 근육일까.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왼팔로만 매달리는 턱걸이를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입시라는 무게감에 부모가 먼저 겁을 먹고서. 사회에 나가면 오른팔의 근육도 필요하고, 두 다리의 근육도 필요하고, 배와 등의 근육도 필요한데 말입니다. 우선 입시부터 해결하자, 나머지는 대학 가서 다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핑계 반, 위안 반으로 위장한 채 말입니다. 

#풍경2 : 최재천(국립생태원장) 교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의 교육 철학은 흥미로웠습니다. 한마디로 ‘방목’입니다. 무작정 풀어놓는 방목은 아니었습니다. 긴 끈의 한쪽 끝을 따뜻하게 잡고 있는 방목이었습니다. 최 교수는 아이들을 ‘제품’에 비유했습니다. “공장에서 기계로 마구 찍혀나오는 제품을 만들려면 기존의 방식으로 키워라. 그런데 정말 제대로 된 ‘물건’을 한번 만들어보려는 생각이 있다면 방목하라.” 그런 방목을 그는 ‘아름다운 방목’이라고 불렀습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책상에서도 배울 건 많습니다. 들판에서도 배울 건 많습니다. 그럼 어떤 교육법이 가장 지혜로운 걸까요. 두 마리 양이 있습니다. 한 마리는 주로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합니다. 다른 한 마리는 목장이란 울타리 안에서 마음 가는 대로 뛰어다닙니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뭘까요. 저는 그게 ‘내 안에서 올라오는 물음에 스스로 답을 하게 하는가?’라고 봅니다.

들판에서 친구와 놀고, 싸우고, 어울리면서도 숱한 물음이 자기 안에서 올라옵니다. 그게 무슨 물음일까요. 자신의 생활에서 부닥치는 문제들, 그걸 풀기 위한 물음들입니다. 친구가 화났을 때 어떻게 풀까, 전학 온 친구와 어떻게 사귈까, 사과를 할 때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이 모두가 결혼 생활, 직장 생활, 사회생활의 문제를 푸는 근육입니다. 그런 물음에 스스로 답할 때 아이들은 사회생활의 리더십을 미리 갖추게 됩니다. 울타리 안에서 자유로운 양이 울타리 밖에서도 자유로우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의 안목이 참 중요합니다. 책상에 앉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판에서 뛰어다니는 것도 중요합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증권사 부사장은 회사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책상의 리더십’이 아니라 ‘들판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최 교수는 “닭장에서 사육한 닭은 고기 맛이 퍽퍽하다. 반면 방목한 닭은 쫄깃쫄깃한 고기 맛이 끝내준다”고 하더군요. 아이들의 인생에서 책상의 근육이 전부일까요. 들판의 근육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내 아이를 ‘제대로 된 물건’으로 키우고 싶다면 더더욱 말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013505&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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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29

어느 사회나 논쟁이 되는 가치가 있고 또 모든 사회 구성원이 갖는 공통의 가치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노예 혹은 계급 제도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한 공통의 가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구상의 어느 나라는 아직도 노예 혹은 계급 제도가 공공연하게 인정되고 최하층민은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여성의 인권은 어떤가요?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정하거나, 교육을 받는 것을 부정한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비난을 받겠지만, 중동 혹은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는 아직도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으며 교육을 받지 못하며 운전조차 못 합니다. 인종차별과 나치를 부정하는 것 모두 우리 사회의 공통의 가치일 것입니다. 이러한 공통의 가치는 진보와 보수의 논쟁도 아니고 그 어떠한 이해관계에서도 반드시 지켜지는 가치들입니다.


그럼, 이건 어떤가요? 자식 잃은 부모들이 길거리에서 진실을 위해 단식하는 자리에서 그들을 비난하고 폭식투쟁을 하는 것은 우리의 공통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인가요? 아니면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일인가요? 민주화 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일인가요? 부도덕한 인사들이 고위 공직자로 추천되는 것은 논쟁의 대상인가요? 국가기관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논쟁의 대상인가요? 가끔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언론에 설득당할 때가 있습니다. 프레임 이론이나 이슈 선점이니 하는 기법으로 혹은 언론의 호도로 내가 믿고 있는 가치들이 흔들리거나 설득당할 때가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뭔가 다른 것을 바라고 있다거나, 지역감정이라는 틀 속에 스스로 편 가르기를 한다거나, 부도덕해도 유능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믿는다거나,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 않다고 사건을 외면해버린다거나 하면서 내가 믿었던 가치를 저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노예 혹은 계급 제도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을 비난하거나 여성이 운전을 하는 것이 사회의 큰 문제가 되는 나라들을 보면서 무시하는 것처럼, 어쩌면 어느 다른 선진국에서는 혹은 미래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지금 우리들이 논쟁하고 있는 이것들을, 우리가 공통의 가치로 지키지 못한 것을 창피해할지도 모릅니다. 진보와 보수의 논쟁이 돼서도 안 되고 그 어떤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우리 사회 공통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김해식 핀란드 거주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585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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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28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모든 것이 거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첫 줄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장의 시대’라는 지난 30여년이 유난했다면 사고파는 논리가 물질적 재화에만 적용되지 않고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사례지만, 아이를 대신 낳아주는 것도, 민간인이 기업에 고용돼 군인처럼 전투를 하는 것도 시장거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샌델은 묻는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돈의 논리가 작용하지 말아야 하는 영역은 무엇일까?”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해보자. 지난해만 해도 10조원 선이던 삼성전자의 분기 영업이익이 3분기에는 4조원대로 내려앉으리란 예상이 나오듯 중국 제조업의 추격이 매섭다. “우리는 이제 무얼 먹고 사느냐”는 시름이 깊다. 잘살게 된 중국인을 겨냥해 관광, 의료, 교육 같은 서비스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진작부터 나왔다. 하지만 외국인용 카지노, 영리병원,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같은 주요 정책들이 찬반 논란 속에 표류하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2일 관훈토론회에서 “외국인 환자를 유치해서 돈을 벌자는 것인데 ‘의료 민영화’니 ‘의료 영리화’니 한다”며 “왜 이런 것들이 이념적인 논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하지만 외국인 영리병원을 그렇게 간단히 봐도 좋을까? 돈이 많건 적건 병원 복도에서 지켜지던 ‘선착순’의 줄서기 윤리가 ‘돈을 낸 만큼 얻는다’는 시장논리로 대체되는 큰 변화의 서곡이 아닐까? 미국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의사가 연간 최고 2만5000달러나 하는 연회비를 내는 환자들에게만 진료 예약이 가능한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기도 한다. 또 자기 국민들에게는 사행성 산업을 권장하지 않으면서 중국인이라면 얼마든지 판을 깔아줘도 괜찮은 것인가? 최 부총리는 케이블카가 오히려 수만명이 줄서서 산에 오르는 것보다 환경파괴가 적다고 하지만 산은 산다워야 하는 것 아닐까? 질문은 꼬리를 문다.


법을 위반해 형을 살고 있는 기업인을 가석방·사면해주자는 얘기도 거래 관계를 법적 정의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다. 풀어주자는 쪽의 명분은 경제가 어려우니 이들이 나가서 유보했던 투자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최근 황교안 법무장관과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앞장서 바람을 잡자 해당 기업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런저런 투자계획을 밝히고 있다. 가석방 요건이 되는데 재벌 총수라고 역차별을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민주화에 일말의 기대를 건 많은 국민들은 이번에도 “그러면 그렇지” 하는 허탈한 심정일 것이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믿음을 이렇게 투자와 감형의 거래 관계로 치환해도 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세월호와 같은 시대적 비극조차 이런 거래적 사고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세월호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사람들은 “경제도 어려운데…”라는 이유를 댄다. 정부도 내수 부진의 원인을 세월호 때문으로 돌린다. 대부분 고등학생인 300여명을 뻔히 보면서 놓친 어이없는 참화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다시 태어나려면 아프고 또 아파하고 슬퍼해야 하건만 경제를 끌어다 서둘러 덮어버린다.


도덕군자가 되자는 게 아니다. 우리가 무얼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지 이야기하고 합의점을 찾아가자는 것이다. 시장은 교환가치 이외의 가치판단을 배제하지만, 우리는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토론을 너무 자주 생략한다. 이래서는 한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봉현 경제·국제 에디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8333.html



Posted by 겟업
2014. 12. 23. 01:26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폭식을 하면서 조롱하거나 욕을 퍼붓는 사람들을 보고 공감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들이라고 개탄한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 극단적인 대립이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세월호 그만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는지 의심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는 오늘날 세월호 문제에 대한 극한적 대립은 한국 사회가 티브이 종합편성채널(종편)과 조·중·동으로만 세상을 읽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종편을 전혀 보지 않지만 식당이나 목욕탕 등 공공장소에서 할 수 없이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언론계나 지식사회에서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대단한 논객이 되어 방송사가 작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진보/보수의 양 테이블에 나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의제를 긴 시간 떠드는 것이나 세월호 참사 이후 유병언과 구원파의 동향을 거의 생중계하듯이 계속 보도하는 것을 본 적 있는데, 그걸 보고 왜 종편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유족 공격 담론에 솔깃하게 되는지 약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은 “텅 비고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귀중한 시간을 때우면서, 정작 보여주어야 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시민이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하여 가져야 할 적절한 정보를 멀리하게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텔레비전이 소유주나 광고주의 시청률 압박 요구에 완전히 종속되어 권력에 민감한 의제는 의도적으로 피해가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것인 양 포장하는 일종의 상징 폭력 기구라고 보았다.


이번 한국의 종편과 지상파도 ‘참사’를 교통사고로 만들었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 다음, 정부나 당국의 구조 책임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세월호 구조 관련 수많은 의혹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않고, 농성장의 유족과 생존자들에게 마이크 한번 들이대지 않은 채, 이들이 마치 자식 죽음을 팔아 욕심을 채우려는 탐욕스러운 떼잡이인 양 만들어 버렸고, 유족들 대리기사 폭행 사건이 나오자 잘 만났다는 듯이 뉴스의 머리기사로 띄워 종일 틀어댔다. 이런 걸 칼 안 든 폭력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해방 직후 <동아일보> 등 여러 신문이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안을 소련이 제안한 것으로 왜곡 보도하여 숨죽이고 있던 친일파를 반탁·반공 투사로 부활시켰고, 나라를 적대적 대립으로 몰고 갔듯이, 그 악명 높던 서북청년단이 다시 나타난 지금도 그 상황과 유사하다. 물론 8·15 직후 하나였던 국민이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적대적으로 쪼개진 것은 언론들만의 작품이 아니라 기사회생을 노리던 친일 정치세력들의 공작 혐의가 있듯이, 국민적 공감에서 출발했던 세월호 여론을 적대적 반반으로 돌려놓은 주체도 사실상은 이미지 조작과 허구적 여론지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현 집권세력일 것이다.


가공된 이미지가 ‘여론’이 되고 ‘지지율’이 되어 권력을 재생산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은 온갖 무리수와 편법을 써서 종편 허가를 강행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월호 여론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좋아할지 모르지만, 공감대와 합의의 기반 위에 서서 비극적 재난 방지를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국민들은 폭발 직전의 두 적대 진영으로 쪼개졌고 근본적 대안 마련 작업은 더 멀어졌다. 유신 시절 지식인들이 국내 소식을 알기 위해 외국 신문·잡지를 뒤졌듯이, 21세기에 사는 지금 우리는 일본의 <후지티브이>를 통해 침몰 직전 세월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언론환경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호의 한국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공감은커녕 폭력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집단이 활개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76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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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24

네트워크 사회 또는 인터넷 사회는 평등할까? 헝가리 출신으로 현재 미국 노스이스턴대학 물리학 교수인 버러바시는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답한다. 그에 따르면 연결망이 많은 네트워크 노드(node)와 상대적으로 적은 노드 사이의 연결망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페이스북 친구가 많은 사람의 친구 수는 적은 사람의 그것보다 빠르게 증가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 수 격차가 커진다. 버러바시에 따르면, 구글·페이스북 등이 중국과 러시아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결국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밖에 없다. 네트워크에는 승자독식 법칙이 통한다는 뜻이다.


인류 구성원 모두가 스마트폰을 가지는 때도 머지않았다. 사물의 인터넷 시대도 성큼 다가왔다. 그만큼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인간, 스마트폰, 냉장고, 자동차 등 노드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만큼 연결망이 강한 노드는 더욱 강해진다. 네트워크에 흐르는 데이터도 증가한다. 그만큼 네트워크 강자인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특정 인터넷 서비스 기업에 데이터가 쏠려 데이터 집중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데이터가 쏠리니 자연스럽게 구글 검색 광고, 유튜브 광고, 페이스북 광고 등 세계 광고시장 수익이 소수 기업에 몰리고 있다. 이마케터(eMarketer)의 분석에 따르면, 2013년 세계 모바일 광고 수익의 약 67%를 구글과 페이스북 단 두개 기업이 가져갔다. 세계 디지털 경제의 자본이 소수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이렇게 돈을 긁어모으고 있는 구글은 기술연구에 막대한 규모의 투자를 진행하면서 인간 도움 없이 스스로 주행하는 자동차를 개발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구글은 미래 먹거리 경쟁에서도 크게 앞서고 있다. 구글은 2005년부터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 위치한 대학 도서관의 책들을 통째로 스캔하고 있다. 2013년 기준 이미 3000만권에 대한 스캔을 완료했다. 여기에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자동번역 기술이 결합하여, 프랑스어, 독일어로 기록된 지식에 대한 영어권 이용자의 접근이 쉬워진다. 지식 집중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렇게 네트워크 격차가 데이터 집중, 자본 집중, 지식 집중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독일 경제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은 구글에 대한 강제 기업분할을 주장하고 있다. 1877년 설립된 미국 벨(Bell)전화회사는 거대 독점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결과 벨전화회사는 1983년 미국 반독점법에 따라 7개 회사로 쪼개졌다. 이 사례를 들며 네트워크 격차에 기초해 자본 집중 및 지식 집중을 실현한 구글에 반독점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유럽 정치권에서 힘을 얻고 있다. 구글에 대한 이러한 강제적인 기업분할 주장의 이면에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적이고 불법적인 이용자 감시에 대한 유럽 시민의 두려움에 편승하려는 정치권의 대중영합주의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일부 미국 기업에 디지털 경제 주도권을 사실상 넘겨준 유럽 국가들의 두려움을 마냥 국수주의로 치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까지 초고속인터넷 보급률에 기초해서 국가별 디지털 격차를 논해왔다. 이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노르웨이와 함께 대표적으로 디지털 격차가 작은 정보기술(IT) 강국이다.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도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망, 통신망, 스마트폰 등 물리적 우위는 시간이 갈수록 약화될 수밖에 없다. 네이버, 다음 등과 같은 인터넷 서비스 기업이 풍부하지 않은 네트워크, 이용자의 다양성이 위축받고 감시받는 네트워크. 우리는 아이티 강국에서 네트워크 빈국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강정수 ㈔오픈넷 이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78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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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21

배우 최진실이 보고 싶은 계절이다. 신인 시절 최진실을 특히 유명하게 만든 한 광고 대사가 있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이 말이 허구임을 최진실도 알았을 것이다. 여자 하기 나름? 이는 두 사람 관계에 대한 책임을 주로 여성에게 지우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애인과 화해하고 싶어 꽃다발을 들고 온 남자가 잠시 후 꽃을 들었던 손으로 일가족을 차례로 살해했다. 지난주에 일어난 광주 일가족 살인사건이다. 살해 동기는 ‘무시해서 홧김에’였다. 익숙한 동기다. 아내나 애인을 살해하는 남자들의 살해 동기는 툭하면 ‘무시해서, 자존심이 상해서, 순간적으로, 홧김에…’라고 한다.


예전에 가정폭력에 관한 한 언론의 글을 읽다가 이런 마무리를 보았다. “(여자들도) 남편의 자존심을 짓밟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하다. 죽기 싫으면 남자의 자존심을 건들지 말라는 조용한 협박이 통한다. 우리 사회는 인간의 자존심이 아니라 유독 남자의 자존심이 중요하다.


가부장제와 이성애 관계 속에서 여성은 거의 일방적인 감정노동을 한다. 가족을 위해, 남자를 위해 행해지는 그 노동은 모성애나 애교로 불리며 마치 자연스러운 여성성으로 왜곡되었다. “여성들은 다른 자원이 없고 재정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감정을 남성에게 주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들에게 없는 물질적 자원을 받는 방식으로 감정을 자산으로 활용해 왔다.”(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267쪽)


여성이 이 노동을 멈출 때 주로 ‘곰’이 되고, 그 곰이 화를 내기 시작하면 ‘무시했다’와 같은 말이 돌아온다. 그리고 이는 ‘맞을 짓’이 된다. 기 센 여자는 부정적 표현이지만 남자의 기는 살려야 한다. 이를 합리화하는 말이 ‘여자 하기 나름’이다. 여성은 감정노동의 주체지만 늘 가만히 있는 대상이다. 그래서 집(사람), (어머니)대지, 항구, 꽃에 비유된다. 진부하고 지겨운 비유. 여성은 안식처이거나 아름다운 볼거리다.


서비스직에서 여성 노동자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감정노동의 주체를 여성으로 보는 우리의 관념 때문이다. 그 관념 때문에 여성은 실제로 감정노동에 훨씬 숙련된 노동자로 성장한다. 이는 여성의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에 의해 부단히 훈련된 결과다.


나는 <한겨레> 토요판에 실리는 연애와 가족에 대한 글을 꼬박꼬박 읽는다. 뭘 그런 것까지 열심히 읽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 ‘그런 것’은 사소한 이야기라고 치부한다. ‘교양’을 주제로 한 어떤 책에는 여성들이 읽는 로맨스 소설은 몰라도 될 교양, 알아도 아는 척하지 말아야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지식으로 분류된다.


중요한 뉴스와 중요한 교양은 뭘까. 김정은의 행방? 아시안게임의 경제 효과?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세상의 중요한 문제와 나의 중요한 문제가 꼭 일치하진 않는다. 일상에서 인간관계는 언어와 함께 우리 일상의 고통과 가장 밀접한 문제다. 하지만 가장 등한시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관계와 언어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이는 하찮은 문제지만 감정노동의 고통이 일상인 사람에게 인간관계는 늘 중요한 화두다. 그 노동의 헛헛함을 달래려 여성들은 때로 로맨스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비현실적 인물로 눈을 돌린다.


사랑은 노동이다. 관계를 생성, 유지, 나아가 말소시키는 순간까지도 상당한 육체적, 감정적 노동이 요구된다. 타인은 나의 쉼터가 아니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89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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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15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한국 사람한테 좀처럼 듣지 못했던 속담 중 하나다. 오히려 외국인한테 더 많이 들었다. 한국이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보는 방식을 그들이 설명할 때다. 그러나 내가 만났던 많은 한국인은 정말로 자기 나라를 새우에 견준다. 이게 과연 적절하고 정확한 비유일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국인들의 그런 인식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시각에서 보면 한국은 영원히 다른 나라에 휘둘리는 힘없는 희생자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체로 그런 시각에는 한국이 ‘작다’ ‘약하다’ ‘여전한 개발도상국이다’라는 표현이 따라다닌다. ‘개발도상국’은 불편할 정도로 자주 듣는다.

거슬리는 것이 또 하나 있다. 한국 친구 한 명이 미국 유수의 MBA 스쿨에 합격 통지서를 받고 한 말이 “나 들어갔다. 난 그냥 한국 사람인데 말이야”였다. 미국의 엘리트 대학에서 외국인 학생 중 한국인이 불균형적으로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한국에는 대체로 부정적이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얘기들이 만연해 있다. 서울 특파원 시절 결론 낸 바로는 이런 얘기의 주창자들은 정치인과 재계 지도자를 비롯한 엘리트였다. 사회 지도층일수록 한국이 한국 같지 않기를 바라고, 미국 등 외국 같기를 바라는 듯이 보인다. 그들에게 한국은 ‘약하고’ ‘여전한 개발도상국’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자기 회의적인 그런 얘기들은 변화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평등주의나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논의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이 아직도 개발도상국이라는 인식만큼 좋은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성장과 진보를 위해 모두가 희생을 감수하지 않겠는가.

오늘 왜 이 얘기를 꺼낸 것일까. 나는 현재 여러분이 겪고 있는 한국의 추위와 산성눈(산성눈이 존재하는지 몰랐으나 산성비가 있으면 산성눈도 있을 법하다)을 피해 말레이시아에서 이 칼럼을 쓰고 있다. 이곳에서 한국에 대해 쓴 내 책과 관련해 현지 언론인들의 인터뷰에도 응했다. 여기 있는 동안 한국이 약하고, 작고, 후진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한국을 언급할 때마다 현지인들은 부러움과 존경이 섞인 반응을 보였다. 언론인들은 1987년 이후 한국의 정치적 발전을 부러워한다. 부(富)에 대해서는 한국을 서구나 일본과 같은 범주로 인식한다. 한국인에 대한 다른 반응이라면 “하지만 한국인은 우리를 깔보지 않나요?”였다. 말레이시아인들의 한국에 대한 얘기는 한국인들의 자기인식과는 정반대이다. 

내 책은 베스트셀러가 아니고, 나도 유명 인사가 아니다. 하지만 동남아 여행 중에 한국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태국 언론인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수없이 받았다. 그들은 한국의 비결이 뭔지와 더불어 도대체 왜 한국은 휴식을 취하지 않고, 지금의 성공을 조금이라도 즐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느냐고 물었다. 또한 자신들의 TV 스케줄이 왜 한국 드라마로 채워지는지도 알고 싶어 했다. 나의 책 중국어판 표지에 ‘세계가 김치에 목이 막히다’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봐서 중국에서도 한국에 대한 인식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 어머니는 가끔 전화를 걸어와 한국에 대해 읽거나 TV를 통해 들은 것을 얘기해준다. 그런 전화는 더 잦아지고 있다. 어머니는 “요즘 맨날 한국 소식을 듣고 있단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한국이 맞는 것 같구나”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머니만이 아니다. K팝을 비롯한 한류가 런던이나 파리에서 대박 날 것이라는 데는 회의적이지만 한국이 세계 도처로 발을 뻗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동료 외국 특파원이 한국을 새우로 비유하는 것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은 더 이상 새우가 아니라 돌고래라고 했다. 중국이나 미국과 같은 고래는 아니지만 스마트하고, 민첩하며 꽤 인기가 많은 돌고래 말이다. 돌고래는 때때로 포식자들을 조심해야 하지만, 먹이사슬에서 그의 전반적 순위는 선망의 대상이다. 돌고래가 알거나 말거나.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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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0:53

#풍경1 : 조선 500년과 일제 식민지를 거치며 한국 불교는 쪼그라들었습니다. 근대에 한국 불교를 다시 일으킨 이가 경허 선사(1849~1912)입니다. 경허가 아꼈던 제자 셋이 있습니다. 수월(水月), 만공(滿空), 혜월(慧月). 그들을 ‘경허의 세 달’이라 부릅니다. 하루는 수월 스님이 만공 스님과 대화를 나누다가 뜬금없이 숭늉 그릇을 내밀었습니다. “여보게 만공. 이걸 숭늉 그릇이라고 하지 말고, 숭늉 그릇이 아니라고도 하지 말고. 한마디 똑바로 일러 보소.”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만공 스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방문을 열더니 그 숭늉 그릇을 밖으로 휙 던져버렸습니다. 그릇은 박살이 났겠죠. 만공 스님은 돌아와 자리에 앉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걸 본 수월 스님이 말했습니다. “잘하였소. 참으로 잘하였소.” 

#풍경2 : 수년 전에 한 스님과 마주했습니다. 중국 임제 선사의 일화를 꺼내더군요. “저 방으로 들어가도 30방, 들어가지 않아도 30방일세. 자, 어떻게 대답하겠나?” 방문을 넘어가도 30방을 맞아야 하고, 넘어가지 않아도 30방을 맞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차피 30방이라면 안도 밖도 아닌 문지방 위에 서 있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실 분도 있겠네요. 그렇게 잔머리를 굴려도 30방이 날아갈 겁니다. 

수월 선사의 물음과 임제 선사의 물음은 맥이 통합니다. 앞으로 가도 절벽, 뒤로 가도 절벽입니다. 선문답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까마득한 절벽에서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가는 우리를 겨눕니다. ‘자, 어떡할 건가. 이 진퇴양난의 위기를 어떻게 넘을 건가. 어디 대답 한번 해보시오!’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도 종종 이런 절벽 위에 섭니다. 회사에서는 기존의 제품과 시장을 확 뛰어넘을 창조적인 아이템을 찾습니다. 그걸 위해 머리를 쥐어짭니다. 앞으로 가면 다른 제품과 비슷하고, 뒤로 가도 획기적인 맛이 없습니다. 그런 ‘절벽’에서 어떡해야 할까요.

그 단초를 수월과 임제의 일화가 일러줍니다. 우리는 대부분 ‘절벽 안’에서 생각합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어떡해야 절벽을 피할 수 있을까. ‘절벽’은 하나의 무대입니다. 그 무대 위에서 이 길로 가든, 저 길로 가든 큰 차이는 없습니다. 무대 자체를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 제품도 새로울 게 없고, 저 제품도 남다를 게 없습니다.

만공 스님의 해법은 달랐습니다. “숭늉 그릇이라고도 하지 말고, 숭늉 그릇이 아니라고도 하지 마라”는 수월 앞에서 그릇을 깨버렸습니다. 사실 무엇을 깬 걸까요. ‘수월의 기준’ ‘수월의 잣대’ ‘수월의 무대’를 깨버린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새로운 차원, 새로운 무대가 펼쳐집니다. 숭늉 그릇을 깨버리는 순간, 수월이 제시한 절벽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숭늉 그릇’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내가 만든 기준’ ‘내가 만든 잣대’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선 “내 탓이오!”라며 가슴을 치는 겁니다. ‘나’가 있어서, ‘나’로 인해 절벽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한때 선(禪)불교에 심취했습니다. 그도 선문답 속의 ‘숭늉 그릇’을 들고 적잖이 고민했을 겁니다. 결국 잡스는 나름의 그릇을 깨고 스마트폰이란 새로운 무대를 열었습니다. 

삶에서 우리는 각자의 ‘절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들어가도 30방, 안 들어가도 30방.’ 어떡하실 건가요. 그걸 뛰어넘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그 물음을 던진 임제 선사를 ‘팍!’ 하고 밀쳐버리세요. 그 순간, ‘30방’이 사라져버립니다. 임제가 만든 기준, 임제가 만든 절벽이 없어집니다. 바로 그때 차원이 다른 세상이 펼쳐집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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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4. 00:57

영화 <괴물>을 보면, 주한미군이 한강으로 흘려보낸 포름알데히드 탓에 괴물이 만들어진다. 영화 속 괴물은 사람들을 잡아 죽이기도 하지만, 치명적인 바이러스의 숙주이기도 하다. 실제 주한미군이 저지른 한강 오염 사건에 바탕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환경오염이 초래할 수 있는 끔찍한 결과에 대한 경고다.


겉으로 보면, 현재 서부 아프리카를 휩쓸고 있는 에볼라는 환경적인 문제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라이베리아·시에라리온·기니 등지에서 14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이번 사태는 지난해 기니 동부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한 어린아이가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과일박쥐에게 물리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감염자 발생 뒤 에볼라는 급속도로 도시 지역으로 퍼졌고, 이어 국경을 넘었다.


출혈열의 일종인 에볼라는 치사율이 매우 높다. 아직까지 백신은 개발되지 않았고, 일부 실험단계 치료제가 시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과거에도 에볼라가 창궐한 때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한적한 시골 지역에서만 퍼졌다. 1976년 콩고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에볼라로 인한 사망자는 약 3000명 정도다.


언론은 에볼라에만 관심을 쏟지만, 현재 아프리카에서 가장 치명적인 질병은 에볼라가 아니다. 매일 2000명가량의 아프리카 어린이가 설사로 인한 탈수 등으로 목숨을 잃는다. 1분마다 아프리카 어린이 1명이 말라리아로 숨을 거둔다. 2011년에만 후천면역결핍증(AIDS·에이즈)으로 인해 사망한 아프리카인은 120만명에 이른다.


이와 관련해 이미 효과적인 예방·치료법이 개발돼 있다는 점이 더욱 비극적이다. 설사는 깨끗한 마실 물과 화장실 등 위생시설만 제대로 갖추면 된다. 말라리아는 모기장과 처방약으로 예방이 가능하다. 에이즈도 치료제가 개발돼 있다.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필요한 자금이 제대로 투입되지 않아 목숨을 잃고 있다.


설사·말라리아·에이즈는 선진 개발국에서 더 이상 목숨을 위협하는 유행병이 아니다. 반면, 에볼라는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은 탓에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에볼라가 아프리카 이외 지역으로 확산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기댄 측면이 있다. 하지만 감염자의 침·땀·혈액 등 체액과 직접 접촉해야 전염되는 에볼라가 지구촌 차원에서 대유행을 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언론이 에볼라를 대서특필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아프리카는 들짐승의 고기를 먹는 따위 야만적인 관습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시각인데, 이번 에볼라 사태는 서구인들이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신식민주의적 관점’에 딱 들어맞는다. 과거 에볼라가 유행으로 번졌을 때도 감염된 침팬지나 박쥐 고기를 섭취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사슴, 멧돼지, 다람쥐 따위를 사냥해 재미삼아 먹는다. 이들을 야만적이라고 비난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물론 최근 서부 아프리카 지역에서 에볼라가 퍼지는 속도는 위협적이다. 의료진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환경적인 측면도 살펴봐야 한다. 이번 에볼라 사태는 과거와 달리 한적한 시골에서 대도시로 급속히 번지고 있다. 이는 산림 파괴에 기인한 바 크다. 서부 아프리카 일대는 지구촌에서 산림 파괴가 가장 극심한 지역이다. 해마다 약 100만㏊에 이르는 숲이 사라진다. 지금까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인간들이 달려들고 있는 것이다. 서부 아프리카 주민들이 에볼라 바이러스 보균 생물과 직접 접촉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주민들 간 접촉 기회도 많아졌다. 환경 파괴가 어떤 치명적 전염병을 몰고 올 것인지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다.


영화 <괴물>은 괴물이 죽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지금 서부 아프리카에서 창궐하고 있는 에볼라도 조만간 사그라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곳쯤으로 숲과 환경을 대한다면, 언젠가 그 쓰레기가 돌아와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공상과학 영화나 소설에서의 괴물 모습은 아니더라도 말이다. 전염병은 괴물보다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존 페퍼 미국 외교정책포커스 소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35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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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4. 00:25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는 전자산업의 ‘격렬한 한때’였다. D램 반도체 호황의 끝물을 맞아 업계는 글로벌 구조조정에 돌입했고, 2001년 하이닉스 반도체가 미국 업체와 매각 협상을 벌이던 전후로 치킨게임은 극에 달했다. 이 와중에 내로라하던 일본 D램 업체들과 대만 업체들은 사업을 철수했고, 국내에선 하이닉스 사수에 소액주주들까지 나서기도 했다. 전쟁처럼 지독했다.

한데 그 전쟁에서 삼성전자는 홀로 비껴나 있었다. 1달러를 밑도는 D램 가격에 도처에서 비명 소리 낭자한데 삼성전자 영업 임원은 “이 전쟁을 더 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낸드플래시를 들고 나왔다. 모바일 기기용 메모리다. 당시엔 이런 기기의 개념조차 생소했던 터라 “곧 손에 들고 다니는 ‘포터블 컴퓨터’ 시대가 오면 낸드플래시 시대가 될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도 알쏭달쏭했다. 그들은 이렇게 한발 앞서 시장을 장악했다.

이후 삼성전자는 디지털 시대 글로벌 주인공이 됐다. 막강 아날로그 기술을 가졌던 일본 전자업계가 미련을 못 버려 미적대는 사이 디지털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거칠 게 없었다. 아날로그에선 가진 게 없으니 신기술 시장에서 발목 잡힐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요즘 ‘샤오미(小米) 쇼크’로 업계가 다시 술렁인다. ‘좁쌀’이라는 뜻의 중국 스마트폰 업체 샤오미가 중국 시장에서 삼성전자를 끌어내리고 1위를 차지했단다. 이로부터 삼성전자 위기론은 표면화됐다. ‘잘나가는 삼성전자는 스마트폰 착시 현상’이라는 말이 시장에 떠돈 지 오래인데 마침 샤오미에 일격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삼성전자는 진짜 사계(斯界)의 맹주로서 비전과 실력을 보여줘야 하는 길목에 선 것이다.

한데 삼성 스마트폰이 약한 모습을 보이자 ‘디스(diss)’도 나온다. 한 통신업계 관계자는 “삼성 스마트폰의 성공 신화는 SKT가 써줬다”고 했다. 애플 아이폰 출시 당시 SKT가 아이폰의 한국 내 파트너 되기를 포기하고, 갤럭시를 6개월이나 기다려 주고, 처음으로 줄 서기 개통을 시킨 장면이 세계 언론에 보도되며 갤럭시 신화가 시작됐다는 거다. 최태원 SK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의리’가 낳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샤오미는 ‘짝퉁 아이폰’으로 불린다. 중국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한데 한 IT전문가는 “잘 베꼈다”고 했다. 20만~30만원대에 성능은 아이폰급이어서 국내 소비자들도 해외 직구로 들여온다. 또 소프트웨어가 삼성보다 낫다는 평도 나온다. IT전문가들은 “샤오미의 진정한 경쟁력은 소프트웨어에 있다. 삼성전자엔 없는 것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레드오션이 된 스마트폰 시장에 경쟁자 하나 더 늘어난 게 무슨 대수인가. 당연히 예견하고 준비했어야 할 일이다. 진짜 문제는 그 뒤를 받쳐주는 과거의 ‘낸드플래시’가 뭐냐는 질문에 삼성전자가 답을 못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판국에 삼성전자는 ‘비상경영’을 외친다. 임원 출장 때도 이코노미석을 타고, 인원을 재배치하는 등 한마디로 ‘허리띠를 졸라매자’다. 대기업이 허리띠를 졸라매면, 협력업체는 비명을 지른다. ‘원가절감’은 협력업체 납품가격을 후려쳐서 만들어진다. 이에 모두 심리적으로 오그라든다. ‘베끼는 경쟁력’으로 한몫 보던 과거에 흔했던 장면의 재생이다. 시장은 포스트 디지털 혁신 방안을 묻는데, 농경시대적 근면과 성실로 위기를 돌파하겠다고 답하는 형국이다.

‘들판에 나온 호랑이는 개도 무시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삼성전자는 허리띠를 졸라매고 들판에서 개들과 먹잇감을 다툴 것인지 웬만큼 뜯어먹은 먹잇감은 던져버리고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산중 왕국을 지킬 것인지 결정해야 할 기로에 서 있다. 중국 기업이 무섭다 해도 베끼는 경쟁력으로 돈은 벌 수 있지만 시장을 리드할 수는 없다. 시장이 삼성전자에 기대하는 건 창의적 리더의 길이다. 10여 년 전의 배짱과 패기를 다시 보고 싶다. 

양선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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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4. 00:08

1960년 가을, 민주당 대선 후보 존 F 케네디 상원의원이 미시간대에서 연설했다. 그때 아프리카는 경제적·정치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벅찬 문제에 허덕이고 있었다. 문맹퇴치와 인적 자본 개발이 시급했다. 케네디는 미시간대 학생들에게 해외로 나가 봉사하라고 촉구했다. 그의 호소로 탄생한 게 평화봉사단(Peace Corps)이다. 미국이 세계에 선사한 가장 훌륭한 선물로 손꼽힌다.

오바마 대통령은 4~6일 워싱턴에서 미국-아프리카 정상 회의를 개최한다. 회의 주제는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다. 그러나 회의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될 민간 기업 프로젝트가 다음 세대를 위한 진정한 투자라고 볼 수 없다. 아프리카의 차세대를 위해 저비용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안겨줄 방법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교육이다. 

지금 아프리카 경제의 약진은 산업 생산성 제고가 아니라 천연자원 채굴에 의존하고 있다. 아프리카 경제는 아직 천연자원의 초보적 가공이나 내수용 단순 소비재 생산에 머물고 있다. 아프리카는 다른 대륙과 달리 현대 과학기술을 습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보건·에너지·개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과학기술을 활용할 수 없다.

과학기술은 생산성을 높이고 개발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무기다. 무기가 생기면 빈곤 척결과 자생적 경제 개발이 가능하다. 과학기술 발전을 지원하는 것은 임기응변적 구호 처방보다 더 확실하고 더 많은 개발이익을 안겨 주는 지속적 장기 투자다.

아프리카 지도자들도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데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간기업이 후원하는 연구센터도 속속 문을 열었다. 그러나 혁신적 발전을 위해서는 정부·기업·학계 간의 국제적인 파트너십이 필요하다.

미국 국내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STEM 교육 발전을 핵심 정책으로 꾸준히 내세웠으며 예산도 우선적으로 배정했다.

이제는 미국이 과학 중심의 아프리카 어젠다를 수행할 때가 왔다. 미국 고등교육 기관과 과학 연구 센터, 기술혁신형 사업가들을 아프리카 국가와 연계시켜 경제 성장을 지원하고 외국 구호자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 과학기술 파트너십이 확대되면 교역이 증가하고 아프리카 시장에서 미국 기업을 위한 기회도 풍부해질 것이다.

과학기술 협력은 중국·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 등에 대한 미국 대외정책에서 오랫동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 왔다. 특히 1959년 이래 미국-이스라엘 과학 협력의 결과로 43개의 노벨상이 나왔다. 미국은 현재 외국 정부와 50여 개의 과학 파트너십 관계를 체결했다. 아프리카 국가는 하나도 없다. 변화가 필요하다.

이번 미국-아프리카 정상 회의를 계기로 미국의 대(對)아프리카 정책은 과학기술 개발을 지원하고 새로운 교류·협력을 수립하는 한편 이를 수행할 자원을 새롭게 할당해야 한다.

필요한 재원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디딤돌이 될 만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미 진행 중이다. 미 국제개발처(USAID)의 ‘고등교육 프로젝트’, 미국 학술원의 ‘아프리카 과학 학술원 발전 이니셔티브’, ‘에이즈 구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계획(PEPFAR)’, 파워아프리카(Power Africa) 등이 좋은 예다. 이 중에서도 에이즈 위기와 에너지 부족에 대처하기 위한 PEPFAR와 파워아프리카는 첨단 과학기술 역량이 뒷받침돼 있지만, 개발 구호기관을 통해 자금을 지원하다 보니 공여자 중심의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계속 바뀌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국내 우선순위를 반영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제약품이나 태양광 패널처럼 이미 개발이 완료된 제품을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대신, 2014~2018년까지 이 두 프로그램에 지원될 300억 달러 예산 중에서 10억 달러를 떼어내면 아프리카를 위한 공동연구 기금을 조성할 수 있다. 이 기금으로 과학·공학 분야의 차세대 아프리카 인재를 육성할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게 아프리카 자신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미국은 또 앞으로 10년 동안 아프리카의 STEM 전공학생 10만 명을 미 고등교육 기관에서 교육시키는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한다. 동시에 미국 과학자들이 아프리카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연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미국 과학자들은 아프리카 개발의 난제에 대해 보다 잘 이해하게 될 것이고, 아프리카의 교육·연구 수준 또한 크게 향상될 것이다.

케네디는 54년 전 미시간대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의사를 꿈꾸는 학생 중 가나에서 봉사할 마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케네디와 마찬가지로 영감을 주는 젊은 대통령인 오바마는 같은 질문을 미국의 고등교육 기관과 과학계에 던져야 한다. 

은켐 쿰바 미시간대 STEM-아프리카 이니셔티브 간사& 멜빈 P 푸트 ‘아프리카 지지 모임(CFA)’ 회장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타임스 신디케이트 8월 1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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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3. 17:22

중국 浮上 관련 따져봐야 할 점은 '세계 지도자로서 역량 갖췄나'
현실은 경제 불평등 심각한 데다 인종·종교로 나뉜 불안정한 제국
美·中 하나를 선택할 필요 없어… 강대국 보호 불가피론 탈피하라



캐사린 문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SK-한국교류재단 석좌
캐사린 문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SK-한국교류재단 석좌
중국의 정치·군사적 부상(浮上)이 한국과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안정성을 위협하는가?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반드시 한 나라를 선택해야 하는가? 중국은 정말 순수하게 대한민국과의 우호와 협력에 관심이 있는 걸까, 아니면 한반도에 대한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것일까? 한·중 간의 이른바 '밀월 관계'는 미국을 불편하게 만드는 건가?

많은 한국인이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지난 7월 정상회담 이후 이런 질문들을 부쩍 많이 던지고 있다. 최근 워싱턴을 찾은 한국의 외교정책 담당자들과 언론은 계속해서 미국의 정부 관계자들이나 분석가들에게 같은 질문을 거듭 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그리고 그 미래가 한국과 동아시아 나아가 미국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알고 싶은 거라면 이 질문들은 잘못됐다.

정작 중요한 질문은 '중국이 거대한 땅덩어리와 인구를 바탕으로 군사 대국으로 부상하고 글로벌한 세계에서 지도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경제적 역량과 정치적 일체감을 갖췄는가'이다. 현 시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한동안은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게 내 대답이다. 역사적으로 강대국의 지위를 자랑한 국가들은 상당한 수준의, 그리고 오래가는 군사적 목표를 지원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역량이 있어야 했다. 국가적 상징과 국익을 위해 국민이 하나 될 수 있게 만드는 정치적 일체감도 필수조건이다. 중국은 아직 강대국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첫째 현실은 중국이 아직도 내부 불평등이 심각한 가난한 나라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개발도상국이다. 세계은행은 2013년 중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구매력 평가 기준)을 1만1905달러로 평가했고, 세계 185개국 중 84위였다. 세르비아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순위가 중국보다 높았다. 경제가 몰락한 쿠바도 1만8796달러(60위)로 중국보다 높았다. 중공업 집중, 국내 자본 축적, 뚜렷한 지역 간 임금 격차에 따른 지역적 불평등이 지속되고 있다. 가장 부유한 세 도시인 톈진·베이징·상하이의 1인당 GDP는 가장 가난한 세 성(省)인 구이저우·간쑤·윈난의 4배에 달한다. 중국의 기적 같은 경제성장은 특히 위험성이 높은 그림자 금융(shadow banking)과 지속할 수 없는 인위적인 높은 저축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둘째 현실은 중국이 계속해서 영토적 통합과 중앙집권적 정치 통제를 위협하는 내부 분열에 맞닥뜨릴 것이라는 점이다. 세계는 이미 티베트와 신장에 중국 중앙정부와 대립하면서 자치를 요구하는 인종적·종교적 소수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난 7월 29일만 해도 중국 당국이 신장 지역 두 곳에서 59명을 총살하는 등 100명 가까운 사망자가 났다. 신장의 면적은 중국 전체 국토의 6분의 1에 달한다. 중국 전체 인구 중 1억명은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졌고, 이들은 통합되지 않고 있다. 소수민족끼리는 완전히 별개다. 문화·언어·경제적 기회와 정치적 권력 등 모든 측면에서 다수인 한족(漢族)에 대해 배타적이다. 데이비드 엘머가 최근 발간한 중국 소수민족에 대한 책 '황제는 저 멀리: 중국의 변방을 가다'를 보면 중화인민공화국은 단일한 민족국가가 아니라 한족과 중앙정부 지배를 거부하고 분노하는 소수민족으로 이뤄진 '거대한, 통제 불능의, 불안정한 제국'이다. 더욱이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정치적 개혁과 참여에 대한 욕구는 커지고 있다. 영토 분쟁이나 환경 문제 등과 연관된 현안을 둘러싸고 매년 약 3만~5만 건의 '군체성 사건(群�性 事件·Mass Incident)' 또는 지역적 봉기와 시위가 발생한다.

중국이 내부적으로 잠재적인 경제·정치적 불안정이 심하다는 점에서 한국과 미국이 택해야 하는 가장 현명한 정책은 중국이 계속해서 경제적 성장과 국내 정치적 안정에 집중할 수 있는 역내(域內)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중국은 경제 발전에 몰두할 수 있고 내부 정치 안정을 꾀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상호 간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한·중 간의 건강한 경제적 경쟁과 협력이 포함된다. 또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스마트하고 정치(精緻)한 외교정책을 펼치는 것도 들어간다.

한국의 과제는 과거의 역사와 심리적 경험에 비춰 한국을 지켜줄 강대국이 필요하다는 신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한국은 중국과 미국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중국과 미국 모두가 필요로 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


캐서린 문 브루킹스연구소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8/17/20140817022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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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3. 16:45

이런저런 이름으로 불리지만 역시 가장 많이 불리는 건 큰애와 작은애의 이름 뒤에 ‘엄마’를 붙인 누구누구의 엄마이다. 몇해 전 소도시의 작은 도서관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직장과 학교에 보내고 온 엄마들을 만났다. 그해는 유독 엄마들의 정체성 찾기가 붐처럼 일어 도서관 안에서도 서로서로 누구 엄마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불러주자는 약속을 한 듯했다. 누구 엄마로 불리게 되면서 온종일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날이 많다는 푸념 뒤에 오늘만큼은 아이 이야기 빼고 여자와 한 개인으로서의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는데 이야기 중 누군가 불쑥 아침에 오이가 열렸다는 소식을 전했다. “아마 그 기쁨을 모를 거예요. 아이를 낳는 것 같다니까요.” 잠시 뒤 누구랄 것도 없이 웃음이 터졌다. 채 몇분도 되지 않아 우리는 다시 누구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세월호 100일 추모식에서 ‘동혁이 엄마’를 보았다. 안산에서 1박2일 동안 걸어 광화문에 도착한 그녀의 둥근 얼굴은 다른 엄마 아빠들과 같이 검게 그을어 있었다. 나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세월호의 진실을 알리는 동영상 속에서 자신을 ‘동혁이 엄마’라고 했다. 학생들의 휴대폰 동영상 속에서 자신의 여동생을 걱정하던 남학생이 있었는데 바로 김동혁군이었다. 동혁이 엄마는 “엄마 아빠 사랑해, 내 동생 어떡하지?라고 말한 아이가 바로 제 아이입니다”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옆에는 오빠가 걱정하던 동생이 같이 서 있었다.


무대 위에 선 동혁이 엄마는 차돌 같았다. 동영상 속에서도 동혁이 엄마는 길 가는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 그녀 옆의 동영상 속에는 2학년 6반 김동협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변성기를 거친 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김동협군은 살고 싶어! 꿈이 있는데! 외쳤다. 침몰 상황을 중계하던 동협군의 영상은 랩을 끝으로 끊어졌다. 동혁이 엄마는 아이들이 남긴 동영상을 봐달라고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엄마로서 그 동영상을 차마 끝까지 볼 수 없었다며 울먹였다.


동혁이 엄마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마이크를 손으로 잡았다. 하지만 말이 자꾸 끊어졌다. 자신이 길 가는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이토록 많은 군중 앞에 서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그녀에게 흘러갔을 지난 100일의 시간. 그 어느 때보다도 동혁이 엄마로 살았던 시간. 동영상을 보면서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대체 누가 우리 아이들을 저런 공포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었는가. 아이들은 그 끝에서 대체 무엇을 보았을까. 저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너희들이 왜 죽어갔는지 엄마 아빠는 끝까지 밝힐 거야”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동혁이 엄마의 목소리는 그 어느 부분보다 힘이 실렸다. 하지만 “보고 싶다, 내 새끼”라고 말하면서 결국 흐느끼고 말았다. 누가 동혁이 엄마를 저 위로 올라가게 했나. 불현듯 동혁이 엄마의 둥근 얼굴 위로 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들의 영정 사진을 끌어안고 어쩔 줄 몰라하던 어머니.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는 아들을 잃은 뒤에 평생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다. 많은 엄마 아빠의 삶이 그렇게 한순간에 바뀌었다.


그쯤 하면 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 애가 고 2예요. 그 애들과 같은 학년이에요, 어떡해요?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로부터 이제 겨우 백여일 지났을 뿐이다.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들만이라도 잊지 않기를…….


누구 엄마라고 불리는 것이 이렇듯 소중한 것일 줄, 이토록 책임감으로 무거운 건 줄 몰랐다.


하성란 소설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040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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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3. 16:26

'너구리'를 시작으로 한반도에 본격적인 태풍의 계절이 돌아왔다. 최근 태풍과 관련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난 6월 초 국제 학술지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는 북미 지역의 태풍인 허리케인에 여자 이름이 붙었을 때가 남자 이름인 경우보다 훨씬 큰 피해를 줬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그러고 보면 미국에 엄청난 피해를 준 카트리나·샌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악명(惡名)을 떨친 사라·베티 모두 여자 이름이었다. 태풍이 제 이름을 알 리도 없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연구진은 "허리케인의 이름에 따라 피해가 달라진 것은 성별(性別) 고정관념이 원인"이라고 밝혔다. 사람들은 여자 이름이 붙은 허리케인이 오면 그다지 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대피에 소홀해진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대학생들에게 가상의 허리케인에 대한 위험도를 물었다. 학생들은 알렉산더·크리스토퍼·빅터 등 남자 이름이 붙은 허리케인보다 알렉산드라·크리스티나·빅토리아 등 여자 이름의 허리케인이 위험도가 더 약하다고 평가했다.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성 차별을 근거로 들었다. 기상 전문가들은 "허리케인에는 원래 여자 이름이 많았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미 공군과 해군의 남성 기상 예보관들은 1953년부터 아내나 애인의 이름을 허리케인에 붙였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생겨난 이 전통은 성 차별 논란이 일면서 1979년에 사라졌다. 지금은 허리케인에 남녀 이름을 번갈아 쓴다. 아시아에 오는 태풍 이름은 2000년부터는 회원국이 각각 10개씩 제출한 이름을 돌아가며 쓰는데, 우리나라가 낸 너구리처럼 동물이나 식물 이름이 대부분이다.

과학에는 이처럼 알게 모르게 성 차별을 한 연구가 많다. 일례로 동물 실험에는 대부분 수컷을 쓴다. 암컷은 발정 주기 때 호르몬 변화가 심해 실험에 영향을 주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1997~2000년 미국에서 치명적인 부작용으로 10종의 의약품이 회수됐다. 이 중 8종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큰 부작용을 가져온 것으로 나타났다. 동물 실험 단계에서 암수를 골고루 썼다면 예방할 수도 있었던 일이다. 공학 연구도 마찬가지다. 한때 자동차업체는 충돌 실험에 남성 인형만 썼다. 이러면 남성보다 몸이 작고 뼈가 약한 여성은 실제 자동차 사고에서 더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에서는 연구 과제를 선정할 때 연구자의 성비(性比)까지 맞추기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실험동물뿐 아니라 연구자의 성에 따라서도 실험 결과가 달라진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남자 연구원이 있으면 쥐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가 늘어 통증 반응을 알아보는 실험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고 한다. 국제 학술지들도 같은 이유로 논문에 연구 대상뿐 아니라 연구자의 성까지 밝히도록 권고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과학 연구에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적 성인 젠더(gender) 요소를 고려하기 위한 '과학기술 젠더 혁신 포럼'이 출범했다.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아온 또 하나의 편견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영완 산업2부 과학팀장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7/14/20140714038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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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3. 15:51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23/2014032301605.html?related_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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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3. 15:47

2년 전 이맘때 중국 외교부가 한국 기자 7명을 자국으로 초청한 적이 있다. 베이징(北京)에서 국영 방송사인 중앙TV (CCTV) 녹화 현장과 외교부 브리핑 현장 등을 보여준 중국 측은 3일째 되는 날 한국 기자단을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고려사관유적지(高麗使館遺址)'였다. 고려사관은 12~13세기 남송(南宋)과 교류하던 고려 사신과 상인이 머물던 영빈관이었다. 고려인은 중국 측이 명주(明州·지금의 닝보)에 세워준 고려사관에서 외교 업무와 무역 거래를 했다. 긴 세월 속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고려사관은 2006년 닝보시에 의해 되살아났다.

중국 외교부가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한국 기자단을 베이징에서 1200㎞나 떨어진 남방 도시로 데려간 의도를 알 듯했다. 한·중 간 교류의 뿌리를 찾아 양국민 간 유대를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던 것이다. 양저우(揚州)의 최치원기념관이나 하얼빈의 안중근기념관도 같은 목적에서 세워졌다. 이런 기념관은 한국인 관광객을 중국 구석구석으로 끌어들이는 역할도 하고 있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이후 한·중 간 '인문 유대'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다. 인문 유대는 한 개인 혹은 한 국가가 살아온 궤적이나 삶의 철학, 살아가는 방식에 공감하고 신뢰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즉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것이 인문 유대를 강화하는 길이다. 중국이 자국 내 한·중 교류사의 발자취를 찾아 복원하는 것도 한국인의 마음을 얻으려는 노력이다. 중국은 이를 통해 한국의 투자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쯤에서 한국은 과연 중국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 닝보에 고려사관이 있었다면 호남 도서 지역에 송대의 '상관(商館)'이나 '객관(客館)' 같은 것이 있었을 법하다. 당시 중국의 상선이 봄과 여름 사이 계절풍을 타고 전남 흑산도나 가거도·진도 등지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역사책을 뒤지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목포의 해양유물전시관을 제외하고 당시 한·중 간 교류의 흔적을 발굴해 복원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 최근 한국관광공사가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을 추천했지만 그중 중국인이 유대감을 느낄 만한 곳은 인천 차이나타운뿐이다. 상대의 마음을 얻는 전략에서 우리는 중국에 뒤진 것은 아닌가?

한국이 중국인의 마음을 얻는 데 노련하지 못하다는 점은 천편일률적인 관광 코스에서도 드러난다. 중국 인터넷에서 한국 여행 상품을 찾아보면 열 중 아홉은 서울·제주행 프로그램이다. 또 여행사는 달라도 여행 코스는 똑같다. 한 해 430만명의 중국인이 서울의 경복궁·청와대·청계천, 제주의 용두암·성산일출봉·섭지코지만 뱅뱅 돌다 돌아간다. 다른 지역의 관광 자원은 중국인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대장금'에 이어 10년 만에 '별에서 온 그대'가 중국에서 폭발적 반응을 일으켰다. 이 열풍이 장기간 지속되도록 하려면 두 나라 국민을 잇는 역사와 철학의 교감을 넓혀야 한다. 호남·영남·경기·충청도는 중국인이 오지 않는다고 푸념만 할 게 아니라 지방 곳곳에 숨은 한·중 교류의 발자취를 발굴하고 복원하는 노력부터 해야 한다. 그것이 중국인의 마음을 얻고 관광 수입도 올리는 첫걸음이다.



지해범 동북아시아연구소장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3/23/2014032302705.html



Posted by 겟업
2014. 12. 3. 15:43

경험은 대개 값진 것이지만, 경험의 독재는 경계해야 한다. '우리 때는…'으로 시작해서 '요즘 것들은…'으로 이어지는 '어른'들의 타령이 그럴 때가 많다. 세월의 편차를 소거시키는 절대평가와 맥락을 무시한 비교의 폭력이 저 경험론 안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실업타령 그만두고 이주노동자들을 보라고, 일손 없어 허덕이는 일터가 한두 곳이냐고 반문하는 경영자의 훈계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사진 속 어떤 마을에서 온 청년이 몇 달 알뜰히 모아 고향 가족들에게 집을 사줄 수도 있는 월급과 몇 년을 벌어도 허름한 전셋집조차 얻기 힘든 한국 청년의 월급을, 요컨대 공간의 차이와 사회관계의 차이를 그는 무시하고 있다. 인류학 학위 유학을 하며 힘들어하는 제자에게 노(老)교수가 "나는 스트레스로 귀가 안 들릴 지경이어도 책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학위만 받고 귀국하면 교수직이 기다리고 있던 그의 60년대와 지금은 다르다. 상대성을 소거한 맹목의 경험은 스스로를 특권화, 권력화한다. 그런 경험의 독재는 일상에 편재한다. 나는 시인의 가난 타령에서 경험의 독재를 읽었다. 칸트는 개념 없는 직관을 맹목이라고 비판하며 경험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최윤필 기획취재부장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2465036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