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3. 16:26

'너구리'를 시작으로 한반도에 본격적인 태풍의 계절이 돌아왔다. 최근 태풍과 관련된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나왔다. 지난 6월 초 국제 학술지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는 북미 지역의 태풍인 허리케인에 여자 이름이 붙었을 때가 남자 이름인 경우보다 훨씬 큰 피해를 줬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그러고 보면 미국에 엄청난 피해를 준 카트리나·샌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악명(惡名)을 떨친 사라·베티 모두 여자 이름이었다. 태풍이 제 이름을 알 리도 없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연구진은 "허리케인의 이름에 따라 피해가 달라진 것은 성별(性別) 고정관념이 원인"이라고 밝혔다. 사람들은 여자 이름이 붙은 허리케인이 오면 그다지 강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대피에 소홀해진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대학생들에게 가상의 허리케인에 대한 위험도를 물었다. 학생들은 알렉산더·크리스토퍼·빅터 등 남자 이름이 붙은 허리케인보다 알렉산드라·크리스티나·빅토리아 등 여자 이름의 허리케인이 위험도가 더 약하다고 평가했다.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성 차별을 근거로 들었다. 기상 전문가들은 "허리케인에는 원래 여자 이름이 많았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미 공군과 해군의 남성 기상 예보관들은 1953년부터 아내나 애인의 이름을 허리케인에 붙였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생겨난 이 전통은 성 차별 논란이 일면서 1979년에 사라졌다. 지금은 허리케인에 남녀 이름을 번갈아 쓴다. 아시아에 오는 태풍 이름은 2000년부터는 회원국이 각각 10개씩 제출한 이름을 돌아가며 쓰는데, 우리나라가 낸 너구리처럼 동물이나 식물 이름이 대부분이다.

과학에는 이처럼 알게 모르게 성 차별을 한 연구가 많다. 일례로 동물 실험에는 대부분 수컷을 쓴다. 암컷은 발정 주기 때 호르몬 변화가 심해 실험에 영향을 주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때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1997~2000년 미국에서 치명적인 부작용으로 10종의 의약품이 회수됐다. 이 중 8종은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큰 부작용을 가져온 것으로 나타났다. 동물 실험 단계에서 암수를 골고루 썼다면 예방할 수도 있었던 일이다. 공학 연구도 마찬가지다. 한때 자동차업체는 충돌 실험에 남성 인형만 썼다. 이러면 남성보다 몸이 작고 뼈가 약한 여성은 실제 자동차 사고에서 더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미국과 유럽에서는 연구 과제를 선정할 때 연구자의 성비(性比)까지 맞추기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실험동물뿐 아니라 연구자의 성에 따라서도 실험 결과가 달라진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남자 연구원이 있으면 쥐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가 늘어 통증 반응을 알아보는 실험이 제대로 이뤄지기 어렵다고 한다. 국제 학술지들도 같은 이유로 논문에 연구 대상뿐 아니라 연구자의 성까지 밝히도록 권고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과학 연구에 생물학적인 성과 사회적 성인 젠더(gender) 요소를 고려하기 위한 '과학기술 젠더 혁신 포럼'이 출범했다.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아온 또 하나의 편견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영완 산업2부 과학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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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