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은 대개 값진 것이지만, 경험의 독재는 경계해야 한다. '우리 때는…'으로 시작해서 '요즘 것들은…'으로 이어지는 '어른'들의 타령이 그럴 때가 많다. 세월의 편차를 소거시키는 절대평가와 맥락을 무시한 비교의 폭력이 저 경험론 안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실업타령 그만두고 이주노동자들을 보라고, 일손 없어 허덕이는 일터가 한두 곳이냐고 반문하는 경영자의 훈계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사진 속 어떤 마을에서 온 청년이 몇 달 알뜰히 모아 고향 가족들에게 집을 사줄 수도 있는 월급과 몇 년을 벌어도 허름한 전셋집조차 얻기 힘든 한국 청년의 월급을, 요컨대 공간의 차이와 사회관계의 차이를 그는 무시하고 있다. 인류학 학위 유학을 하며 힘들어하는 제자에게 노(老)교수가 "나는 스트레스로 귀가 안 들릴 지경이어도 책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학위만 받고 귀국하면 교수직이 기다리고 있던 그의 60년대와 지금은 다르다. 상대성을 소거한 맹목의 경험은 스스로를 특권화, 권력화한다. 그런 경험의 독재는 일상에 편재한다. 나는 시인의 가난 타령에서 경험의 독재를 읽었다. 칸트는 개념 없는 직관을 맹목이라고 비판하며 경험론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최윤필 기획취재부장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246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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