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0. 15:06

뉴욕과 워싱턴DC를 자동차로 오가다 보면 델라웨어를 거치게 된다. 델라웨어주의 최대 도시 윌밍턴에 들러보자. 노스오렌지 거리(North Orange Street) 1209번지. 미국 기업들에 가장 유명한 주소다. 구글·애플·코카콜라·포드 같은 쟁쟁한 회사들이 이곳에 본사를 등록해두고 있다. 본사 주소를 1209번지로 쓰고 있는 기업은 28만곳이다. 2층짜리 반(半)지하 빌딩이 그 많은 회사의 공동 본적지(本籍地)다.

구글이나 애플은 이곳에 호적만 올려놓고 실제 사업은 실리콘밸리에서 하고 있다. 다른 기업들도 이 주소만 사용할 뿐이다. 윌밍턴 공무원들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기업 고객들이 전화를 걸어오면 응대하기 위해 평일에도 밤 12시까지 근무한다.

원래 친(親)기업으로 유명했던 곳은 버지니아였다. 그러나 버지니아가 기업을 괴롭히는 법을 계속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서 이웃 델라웨어는 거꾸로 갔다. 법인세를 낮췄고 상표권이나 저작권 수익에는 면세 혜택을 주었다. 기업 입장을 두둔하는 조례도 많이 제정했다. 델라웨어 법원도 기업 쪽에 관대한 쪽으로 판결을 내리는 경향이다.

그렇게 델라웨어에 몰려든 기업이 100만개다. 델라웨어 인구 92만명보다 많다. 100만 기업이 내는 세금으로 92만 주민이 먹고산다. 지자체들끼리 벌인 경쟁에서 델라웨어가 이긴 것이다.

이번 지방선거 공약들을 유심히 살펴보라. 또 새 도로와 긴 다리를 건설하겠다고 한다. 복지 공약도 단골 메뉴다. 공단을 더 넓히고 기업을 유치해 금방이라도 지역 경제가 활활 타오르게 마술을 부릴 것처럼 말하는 후보가 적지 않다. 경제 낙원(樂園)이 탄생할 듯하지만 무엇을 하겠다는 공약만 풍년이고 어떻게 그것을 실행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우리나라는 농어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변신하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교육·의료·소프트웨어 같은 두뇌를 쓰는 분야에서는 별다른 실력을 발휘하지 못해 선진국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두뇌 국가로 탈바꿈해야 할 시기를 맞았지만 모두가 근육을 쓰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단계이다. 지방선거 공약에 눈에 보이는 건축물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피츠버그는 철강 도시였다. 유에스스틸(US Steel)의 본거지다. 그러나 지금 도시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는 64층짜리 유에스스틸 타워의 꼭대기 층부터 가장 많은 층을 점거한 기업은 피츠버그대학 메디컬센터(UPMC)다. 폐·심장 이식 수술로 유명한 의료법인이다. 피츠버그대 의료센터는 병원을 22개나 경영하며 6만2000여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피츠버그시에서 최대 기업인 셈이다.

피츠버그는 미국 철강 산업이 쇠퇴하면서 한때 '녹슨 도시'로 통했다. 그러나 지금은 의료 산업의 중심지로 변신했다. 거기에 로봇·바이오 산업을 보태고 있다. 피츠버그가 두뇌 도시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던 곳은 피츠버그대학과 카네기멜론대학이다. 역대 시장들이 두 대학에 연구비를 집중 지원해 도시의 검붉은 녹물을 씻어내고 그 자리에 병원과 로봇을 앉힌 것이다.

우리 지방자치도 20년을 넘었다. 12년씩 장기 재임한 지자체장들도 있다. 그러나 그동안 과거의 도시가 사라진 곳에 새로운 도시가 탄생했다는 인상을 주는 사례는 거의 없다. 모두들 중앙 정부에서 보조금을 더 타내다가 외형만 그럴싸한 공사판을 벌였다. 새 도로가 뚫리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도시의 겉모습만 바뀌었을 뿐 도시를 먹여 살리는 콘텐츠는 변하지 않고 있다.

사실 공업의 시대에 번성했던 도시들은 다음 세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를 맞았다. 울산, 거제, 창원, 구미 같은 도시는 모두 산업화의 산물(産物)이다. 우리 자동차·조선·전자산업의 경쟁력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이들도 녹슨 도시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런가 하면 농업의 시대에 호황을 누렸던 도시들은 공업화 물결을 타지 못한 채 여전히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지방선거 20년 만에 모처럼 이념 갈등도 줄었고 큰 정치 이슈도 없다. 맹탕 선거라는 말도 들린다. 그렇다고 한국의 산업혁명 시절에 번영했거나 낙오했던 도시들이 변신해야 하는 숙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델라웨어처럼 큰 공장은 없어도 기업 본사를 유치할 수도 있고 피츠버그처럼 도시의 주력 업종을 교체해 주민을 먹여 살리는 방법도 있다. 지역 개조(改造)를 놓고 다투는 선거판이 달아올라야 한다.


송희영 주필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04/201404040434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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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7. 16:26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우호를 상징하는 인물로 처음 든 것은 서복(徐福)이다. 서복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기자들도 잘 모르는 이름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적당하지 않다고 봐서 그런 것인지 서복이 거론되지 않은 관련 기사도 많다. 진시황 때 불로초를 찾아 동방으로 갔다는 도사라고 설명하면 ‘아, 그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시진핑은 ‘바다를 건너 제주도로 간 서복’이라고 소개한다. 

서복의 얘기야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것이니까 그렇다 치자. 그러나 ‘사기’에도 그가 제주도에 갔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제주도에 서복이 와서 문물을 전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서복의 얘기에 꿰맞춘 전설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역사학자도 그걸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시 주석은 2006년 저장 성 서기로 있을 때 제주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이세기 한중친선협회장의 안내로 서복기념관을 방문했다. 서복기념관은 서귀포시가 2003년 중국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만든 곳이다. 당시 이 회장이 서복기념관에 가자고 했더니 시 주석은 “왜 그게 중국에 있지 않고 한국에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 일이 시 주석에게 무슨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중국의 서복’이 아니라 ‘제주도의 서복’은 관광업 진흥을 위해 만들어진 인물이다. 그것을 역사 속의 인물인 것처럼 언급하는 것은 대학에서 할 소리는 아니다. 게다가 한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이, 서복이 제주도에 간 것처럼 말하면 어딘가 제국주의적 냄새가 난다.

시 주석은 또 한중 양국이 환란에 서로 도운 사례로 임진왜란(정확히는 정유재란) 때 명나라 장군 등자룡(鄧子龍)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싸우다 전사한 사실을 들었다. 등자룡의 상급자인 명나라 제독 진린(陳璘)의 후손이 진씨 성을 갖고 한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승리에 중국이 큰 도움을 줬다는 듯이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듣기 거북하다. 진린은 전투에는 소극적이고 공적에 욕심이 많았던 인물이다. 그는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전과를 몇 차례 양보한 후에야 이순신 장군과 화해할 수 있었다. 그가 중국에서 끌고 온 배는 작아서 전투에 쓸모가 없었고 조선 수군의 판옥선을 빌려 타야 하는 신세였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왜적과 싸우는 데 써야 할 병력의 일부를 왜적에 포위된 진린을 구하는 데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시 주석이 거론한 인물 중에서 또 한 명 거슬리는 것은 정율성(鄭律成)이다. 정율성이 한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이름을 날린 몇 안 되는 근현대사의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를 한중우호의 상징적 인물로 거론하는 데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시 주석이 그를 한국인들 앞에서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으로 소개한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 한중이 지금은 평화를 모색하고 있지만 중국인민해방군은 6·25전쟁 때만 해도 우리 측에 많은 피를 흘리게 한 적군이었다. 정율성이 중국인민해방군가를 작곡했다고 소개하지 않아도 달리 소개할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중국은 사실 한국을 잘 모른다. 잘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나 중국을 알려고 야단이지 중국에서 한국은 국경을 인접한 많은 나라 중 하나일 뿐이다. 중국 정치인의 외교적 수사만 듣다가 역사 강의 같은 강연을 들으니 그것이 확실해졌다. 


중국 지도자의 한국 대중 강연은 처음이다. 친근해지려는 의지는 전달됐다. 다만 친근함이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 남이 어떻게 느낄지 미리 알아서 배려해 말할 수 있어야 진짜 친근한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http://news.donga.com/3/all/20140708/650168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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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7. 16:25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 못지않다. 김수현 전지현에 대한 역사관 검증도 혹독하다. ‘별에서 온 그대’로 중국에서 사랑받고 있는 두 배우는 헝다그룹의 생수 광고 모델 계약을 했다가 ‘물벼락’을 맞았다. 원산지가 백두산의 중국 명인 ‘창바이산(長白山)’으로 돼 있음을 확인한 사람들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놀아났다”며 들고일어난 것이다. 둘은 “취수원까지는 확인 못했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한쪽에서는 여전히 “한류 스타가 아니라 한류 망신”이라며 혀를 찬다. 농심이 중국 백두산을 취수원으로 하는 생수를 생산하면서 제품명을 ‘백두산수’도 ‘장백산수’도 아닌 ‘백산수’로 정한 것이 얼마나 절묘한 선택인지 감탄하게 된다. 

김수현 전지현의 중국 생수 CF 논란을 보면 걸그룹 카라의 ‘독도 침묵’ 사건이 떠오른다. 일본에서 인기 있는 카라는 2012년 “일본에서 독도 관련 질문을 받는다면?”이라는 국내 매체의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가 ‘친일’ 걸그룹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카라에서 탈퇴한 멤버 지영이 최근 일본에서 연기자로 데뷔한다는 소식에 국내 반응은 냉랭한데 “카라가 친일적이어서”라는 것이 일본 언론의 해석이다.

카라의 독도 사건은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한일 관계가 냉랭할 때 일어났지만 이번 생수 논란은 한중 지도자 사이에 봄바람이 부는 가운데 터졌다. 양국 관계가 어떻든 역사나 영토 논쟁은 큰 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 뜨거운 불씨인 것이다.

하지만 한류 스타에게 “백두산은 누구 것?” “독도는?”이라고 묻는 게 현명한 일일까. 한중일이 서로에 중요한 교역국이듯, 한류도 국경을 넘나들며 유통되는 글로벌 상품이다. 중국 최대 검색엔진 바이두가 쏟아내는 한류 관련 소식은 130만 건으로 네이버(38만 건)의 3배가 넘는다. ‘별그대’의 엄청난 경제 효과는 ‘별그대노믹스’로 불린다. 요즘은 잘생긴 남자 배우가 의사로 나오는 ‘닥터 이방인’을 보고 의료 관광을 오는 중국인도 있다. 걸그룹 2NE1, 보이그룹 빅뱅을 비롯해 케이팝 스타들은 세계 2위 규모이며 케이팝 시장보다 20배 큰 제이팝 시장(일본)에서 오리콘 차트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이들에게 역사관을 묻는 것은 해외 활동을 포기하라는 말과 같다. 2012년 독도 횡단 수영대회에 참가했던 한류 스타 송일국은 일본 외무성 차관이 “앞으로 일본에 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언급해 국내에서는 ‘개념 배우’로 박수 받았지만 이 일로 일본 땅을 못 밟는 연예인이 돼버렸다.

한류는 외교적인 힘까지 발휘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부인이 “한국 드라마 팬이에요”라고 했을 때 반일 감정이 잠시나마 누그러졌던 기억을 떠올려 보라. 권영세 주중 대사는 “한중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여러 지표를 통해 알 수 있다”면서 대표적인 사례로 드라마 ‘상속자들’과 ‘별그대’의 인기를 꼽았다. 2008년 후진타오(胡錦濤) 전 중국 국가주석 방한 때 이영애 장나라가 그러했듯, 3일 시진핑(習近平) 주석 내외가 오면 김수현 전지현이 국빈 만찬에 초대받을 가능성도 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화해의 여지를 남겨두려면 경기장에서 그러하듯 문화 영역에서도 정치적 표현은 삼가야 한다. 양국 간 정치적인 관계가 냉랭하든 열렬하든 문화 교류는 뜨거운 것이 좋다. 정랭문열(政冷文熱) 혹은 정열문열(政熱文熱)이다. 총리 시킬 것도 아니면서 전지현에게 역사관을 묻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이진영 문화부 차장


http://news.donga.com/3/all/20140702/648775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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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7. 16:24

며칠 전 재미있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꾸준히 노력하면 누구든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이 실은 틀린 이야기라는 것이다(본지 7월 17일자). 1만 시간 노력하려면 하루 3시간, 일주일 20시간씩 총 10년이 걸린다. 그러나 미국 연구팀이 노력과 선천적 재능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많은 분야에서 타고난 재능이 노력보다 훨씬 중요한 요인으로 밝혀졌다고 기사는 전한다. 음악에서는 재능 79%, 노력 21%고 스포츠는 재능 82%, 노력 18%였다. 학술 분야는 더 심해서 96대 4 비율이었다. 공부하는 머리는 타고난다는 얘기가 맞는가 보다. 어제 정상급 피아니스트 손열음씨를 만난 김에 “음악에서 재능이 79%, 노력 21%라는 게 맞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런 것 같다”며 “재능을 드러낼 기회가 훨씬 적었던 옛날에는 아마 90% 정도로 비중이 더 높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천재는 1%의 영감(靈感)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에디슨의 명언도 사실은 ‘99%의 노력도 단 1%의 영감 없이는 소용없다’는 뜻이라고 한다. 타고난 재능이 그토록 결정적이라면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 입장에선 맥이 풀릴 수밖에 없다. 노력하면 뭐하나. 이미 날 때부터 유전자에 성공 여부가 새겨져 있다는데 말이다. 이달 초 도쿄 국제도서전에 갔다가 사 온 신간 한 권이 이런 인간불평등 기원론(?)을 부추겼다. 제목은 『노력불요론(努力不要論)』. 의학박사이자 뇌과학자인 나카노 노부코가 쓴 책으로, 제목 그대로 ‘쓸데없이 노력할 필요 없다’는 내용이다.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무작정 노력부터 하고 보는 ‘노력 중독자’는 남에게 이용만 당하거나 피해를 끼치기 십상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인은 특히 ‘노력신앙’을 가진 ‘노력교(敎)’ 신자가 많아 큰일이라고 걱정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어 패한 것도 대책 없이 노력과 정신력만 강조하던 지도자들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를 딛고 60년 넘게 줄달음쳐 온 우리나라도 노력 숭배주의라면 지구상 어느 나라 못지않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책상 머리에 ‘노력 끝에 성공’ ‘노력은 성공의 어머니’를 붙여 놓았으며, 좀 커서 한자라도 배우면 ‘苦盡甘來(고진감래)’로 글귀를 바꿔 달았다. 노력신앙의 단짝은 결과지상주의였다. 겨울철 유엔군 묘지에 보리를 옮겨 심어 파란 잔디처럼 보이게 했다는 기업인의 임기응변이 자랑스러운 신화로 기록되었다. ‘하면 된다’의 시대였다. ‘안 되면 되게 하라’가 특전사 병영을 넘어 사회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졌다.

 이미 젊은이들은 속지 않는다. 노력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노력 이외의 요인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아는 듯해 걱정될 정도다. 사회가 그렇게 변했다. 고도성장은 끝났고 당대 성공신화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서울에서 내 집은 고사하고 전세금을 마련하는 데도 6년치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한다. 국민의 57.9%가 ‘일생 동안 노력해도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아질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고 있다(통계청, 2013년 사회조사). 사회 역동성, 계층 상승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드니 젊은이들이 소개팅에서 상대 부모의 직업과 사는 동네부터 묻는다는 슬픈 이야기가 나돈다. 이제 평강공주는 온달을 찾지 않고, 왕자는 신데렐라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기성세대가 ‘하면 된다’ 시대의 관점에서 벗어나 근본적인 발상의 전환을 할 시점인 것 같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만 이루면 된다는 결과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원칙과 상식을 앞세우는 시대로 진입해야 한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말한 ‘비정상의 정상화’도 이런 사고의 틀 전환을 전제로 한 것이길 바란다. 빨리빨리와 대충대충을 버리고, 잔뜩 힘준 어깨를 눅이고 눈에 서린 핏발은 풀고, 무리하게 앞지르거나 끼어들지 않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 말이다. 더뎌도 차근차근 나아가는, 무엇보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로의 대전환이다. 비록 짜릿한 성공담과 기막힌 반전은 적을지라도 한 차례 애를 쓰면 딱 그만큼 결과가 나오는 게 일반적인 풍경이었으면 좋겠다. 결과에만 목을 매 무리와 편법·탈법, 집단 간 유착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사회와는 이별해야 한다. 원래 안 되는 것은 누가 해도 안 되고, 억지로 되게 하려다간 도리어 된통 당해야 마땅하다.

 정당한 노력이라면 왜 쓸모가 없겠는가. 자기 파악 못 하고 남 배려 안 하고 잇속에 눈이 멀어 무리를 범하니 언젠가는 사달이 나는 것이다. 우리는 하면 된다는 낡은 신화에 안주하다가 밀렸던 청구서가 쏟아지는 시점에 처해 있다. 그 와중에 가엾은 아이들만 희생된 듯해서 마음이 아프다. 내일은 세월호 참사 100일째다.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332603&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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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7. 16:23

‘내가 지금 탄 세월호, 나는 갔어야 됐어 네스호/ 이런 미친놈들의 항해사, 너 때문에 나는 즉사/ 이런 길 속에 나는 묻혀, 넌 나를 못 쳐/ 내가 니들 뺨을 쳐? 니들은 내 등을 쳐/ 우리가 출발예정시간 여섯시 삼십분, 우리가 출발예정시간 여섯시 삼십분/ 우리가 출발한 시간은 여덟시 이런 씨발, 니들이 그따구로 이 배를 운전?/ 지금 배는 85도, 내 머릿속 온도는 지금 100도.’

고3이면서도 힙합 오디션 프로인 <쇼미더머니>를 본방사수하며 관련 기사나 댓글까지 다 찾아 들려주는 내 아들의 모습이 겹쳐 더 그런지 모르겠다. 단원고 2학년 6반 김동협군은 평생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을 것 같다. 지난 1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처음 공개된 휴대전화 동영상에서 동협이는 말했다. “내가 왜 수학여행을 와서, 나는 꿈이 있는데, 나는 살고 싶은데 이 썅.” 그도 꿈이 래퍼였을까? 침몰 상황을 중계하듯 전하던 동협이는 “마지막으로 제 라임을 한번 뽐내야겠습니다” 하며 랩을 남겼다.

40일 넘게, 적잖은 <한겨레> 사람들은 비슷한 증세를 보이고 있다. 박재동 화백이 그린 단원고 학생들의 초상캐리커처와 사연, 가족들의 편지를 싣기 시작하면서다. 제작된 다음날 지면을 점검하는 저녁 편집회의에서 ‘잊지 않겠습니다’를 확인하다 눈가가 젖으면 서로 못 본 체하고, 아침에 집으로 배달된 신문에서 같은 기사를 다시 읽다가 눈물을 흘린다.

원통해하는 가족들에 대한 가슴 아픔과 지지부진한 진상규명에 대한 분노가 뒤엉킨 감정 속에, 새삼 느낀 건 정말 아이들의 꿈이 이렇게 많구나라는 점이다. 이종격투기 대회 출전을 계획했던 홍래,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꿈꾸며 미용대회에 나갈 재료비를 아껴놨던 혜경이, 유니세프 같은 국제기구에서 일하길 바라던 하영이, 여군 장교가 되겠다던 주이, 작곡가가 되려던 승묵이…. 그동안 우리는 주변에서 너무나 흔하게 ‘요즘 애들은 자기 꿈이 없어’라는 말을 들어왔다.

몇주 전 큰아들 학교 입시설명회에 다녀왔다. 실용음악학원의 실기 연습도 버거운 아이가 다른 학과까지 지원해 합격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문자에 쫓기는 심정이 됐다. 수능 외에 학생부 교과, 학생부 전형, 논술모집, 적성고사… 여기에 수시와 정시의 경우와 과별, 과목별 반영비율까지 고려하면 경우의 수는 꼽기도 힘들다. 그래도 설명회에 나온 선생은 한번의 학력고사 점수로 결정되던 예전에 비해 학생들에게 다양한 기회가 생긴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대학별 점수표와 ‘합격 사례’로 가니 막막하다. 학원이나 학교에서 제시하는 표 안에서 과목별 1, 2등급 이외 학생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전체 학생의 89%인 3~9등급 대다수 아이들의 ‘꿈’은 이 표에서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대학만이 길은 아니라고 누구나 쉽게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 사회와 학교는 중·고교 시절 6년 내내 대부분의 학생들을 서울 및 수도권 대학을 목표로 전력질주시킨다. 이런 속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꿈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갖고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을까. 학생들의 자기소개서나 논술답안이 학원에서 베껴온 듯 똑같다고 교수들은 불평하지만, 아이들의 다양한 꿈을 덮어버리는 건 주요과목 점수가 높은 학생들을 끌어들이려 교묘히 짜놓은 입시전형 쪽이다.

열일곱살 250개의 꿈을 떠나보내고서야 깨달았다. 이 많은 꿈을 왜 몰랐을까. 지금 이 땅의 아이들이 등급이 아니라 하나하나 자신의 꿈을 드러내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이 또한 세월호 아이들을 잊지 않는 길 아닐까.

김영희 문화부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90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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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7. 16:23

휴가철이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20, 30대 직장인들과의 대화는 세상의 급변을 실감케 했다. 지난달 일찌감치 친구들과 싱가포르로 여름 휴가를 다녀온 A씨는 어느 때보다 만족감이 컸다고 한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비싼 레스토랑이나 호텔 대신 로컬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밀쉐어링(mealsharing.com)’과 온라인 숙박 공유 사이트 ‘에어비엔비(airbnb.com)’를 이용한 덕분이란다. 밀쉐어링 서비스는 현지 가정에서 돈을 주고 ‘집 밥’을 먹을 수 있는 시스템이다. 시간과 날짜는 음식을 제공하는 가정에서 정하는데, 가고 싶은 집을 선택해 사이트에 올라있는 음식사진과 가격을 골라 예약하면 된다. 세계 각지에서 온 낯선 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순도순 식사도 할 수 있는 점이 매력이란다. 숙박은 에어비앤비를 활용했는데, 집 주인을 직접 만나지 않고도 예쁜 2층 단독주택의 비밀번호를 받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었다. 비용도 기존 유스호스텔이나 민박보다 저렴했다. 사이트에 해당 주택을 먼저 다녀간 사람의 후기도 적혀 있어 믿고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석한 B씨의 이야기는 더 놀라웠다. 경기 화성시 동탄에 사는 그녀는 회사가 있는 서울 강남까지 ‘이버스(eBUS)’로 출퇴근한다. 지난해 하반기에 국내에 등장한 이버스는 이용자들이 홈페이지에 접속해 정원을 채워 신규노선을 만들면 된다. 직장 위치가 비슷한 동네 사람들이 인터넷에 모여 자발적으로 버스노선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입했다고 한다. 현재 동탄-강남, 동탄-서울역 2개 노선이 출퇴근 시간대만 하루 3회씩 운영되는데, 강남 노선은 만석일 정도로 인기가 높다. 현행법상 면허 없이는 여객주선업을 할 수 없어 이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는 자회사인 전세버스사업자로부터 위탁 받는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다. 일종의 편법인데, 위법은 아니다.

인터넷과 모바일, SNS를 통해 촘촘히 연결되고 있는 사회에서 소비자의 차별화된 욕구에 부응해 다양한 서비스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공유경제’라 부른다. 2008년 미 하버드대 로렌스 레식 교수가 쓴 개념인데, 비어 있는 집이나 세워 둔 차량 등 물적 자산뿐 아니라 재능ㆍ경험 등 인적 자산까지도 필요한 사람과 공유(sharing)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살면서 소유해야 하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사고가 출발점이다. 이를 공유경제로 칭하든, 신종 렌탈 비즈니스로 표현하든, 정보통신(IT)기술 덕분에 지구촌이 24시간 연결되면서 생긴, 시대적 현상임은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이들 서비스가 기존 사업자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한다는 점이다. 대표적 사례가 최근 모바일 차량 공유 앱(App) 서비스인 ‘우버’(UBER)다. 201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돼 전 세계로 번지고 있는 이 서비스는 주변의 일반 차량을 콜택시처럼 불러 이용할 수 있다. 나라와 도시 별로 “기존 법규를 허무는 불법” 혹은 “혁신적 합법 서비스”로 판결이 엇갈리는 가운데, 전 세계 택시운전사들이 자신들의 밥줄이 끊긴다며 들고 일어나고 있다. 얼마 전 미국 뉴욕주 검찰이 “손님을 빼앗아 간다”는 호텔업계의 강력한 항의로 에어비앤비에 가입한 건물주들을 단속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중요한 건 규제당국의 자세다. 기존 규제를 엄격히 적용하느냐, 아니면 이를 완화ㆍ해체해 혁신의 물꼬를 터주고 북돋우느냐에 그 사회의 명암이 갈린다. 간과해선 안 될 건 외견상 기존사업자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술발달로 인해 새롭게 열리는 시장이라는 점이다. 밀쉐어링이 등장했다고 기존의 레스토랑이 망한다는 건, 이버스가 나왔다고 대중교통 노선이 없어진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혁신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시장을 선점한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흔들어 놓는다. 때문에 혁신의 성공은 늘 혁신을 바라보는 규제당국의 긍정적이고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공유하라, 그리고 기존의 칸막이를 파괴하라”는 슬로건으로 대표되는 네트워크사회의 새로운 비즈니스 생태계를 뒷받침할 규제혁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경환 새 경제팀이 경제활성화를 고민한다면 잊지 말아야 할 포인트가 아닐까 싶다.


박진용 논설위원



http://www.hankookilbo.com/v/37359a6a68d14e88b4b506bfed4a9a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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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7. 16:22

지난 주말 일본에 다녀오는 길에 일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새삼 새겨보게 되었다. 거품(버블) 붕괴 이후 지난 사반세기 동안 일본은 장기적인 침체를 겪고 있다. 매년 엄청난 적자를 내고 있는 간사이공항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거품의 후유증을 확인할 수 있었고, 삼성 휴대폰을 샀더니 일본 친구들이 ‘불쌍한 소니 거 사주지 왜 안 그래도 잘나가는 삼성 거 샀냐고 뭐라 하더라’는 한 동포의 농담에 일본인들의 어려움이 묻어나왔다. 소위 ‘해석개헌’을 통해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꾀하는 움직임도 일본 경제의 장기적 침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본 경제의 문제는 무엇인가? 거품의 후유증도 있었고, 엔화 강세로 인한 제조업 경쟁력 저하도 있었고, 누적된 재정적자로 인한 미래에 대한 불안심리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은 그다지 커다란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거품 붕괴는 까마득한 옛날 얘기고, 환율은 부침이 있었으며, 거대한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국채금리는 지극히 안정되어 있다. 규제가 많아서 문제니 규제완화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지난 20년 동안 수도 없이 외쳤고, 아베 내각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규제완화를 통해서 경제성장이 눈에 띄게 올라갈 리 만무하다. 사실 일본이 엄청난 거품경제에 휩싸이게 된 까닭이 바로 80년대 중반 나카소네 내각의 무분별한 규제완화였던 것을 상기하면 이러한 규제완화론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본 경제문제의 핵심은 인구문제다. 인구 정체와 고령화에 의해 잠재성장률 자체가 매우 낮아졌다. 인구문제를 빼고 보면 일본 경제의 성과가 나쁘지 않다. 1990년부터 2007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15살에서 64살까지의 경제활동인구 1인당 소득의 증가율은 1.2%로서 여느 선진국보다 못하지 않다. 2008년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의 타격이 심했던 만큼 최근의 회복세도 강하다. 다시 말해 일본 경제가 오랫동안 침체되어 보이는 것은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지 이들의 생산성이 떨어지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일본처럼 인구가 정체되고 고령화가 진행된다면 온갖 경기부양이나 성장정책이 먹혀들 여지가 없어진다.

한국은 과거 일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이런 고민을 하는 가운데 귀국하여 처음 접한 뉴스가 “한국 출산율 세계 최하위”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건 조금 선정적인 헤드라인이고, 그 내용은 16일 발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월드팩트북(The World Factbook)에 따르면 올해 추정치 기준으로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25명에 그쳐 분석 대상 224개국 중 219위였다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는 한국이 꼴찌였다고 한다. 일본은 1.40명으로 208위를 차지해서 우리보다는 조금 나았다.

그럼 도대체 어떤 나라들이 출산율이 낮은 것일까? 크게 보아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출산율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일정한 소득수준을 넘어선 나라들 사이에서는 문화와 정책의 차이에 의해 커다란 편차가 나타난다. 우리보다 출산율이 낮은 나라들은 싱가포르, 마카오, 대만, 홍콩으로서 이들이 모두 동아시아의 부유한 경제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사회복지가 부실하여 아이 낳아 기르기가 부담스럽고, 여성차별 때문에 출산과 자아실현을 동시에 이루기 어려운 나라들이다. 젊은 여성들이 출산파업으로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새 경제팀이 경제의 활력을 살리겠다고 한다. 출산파업을 해결하지 않는 한 백약이 무효일 것이다.

유종일 KDI국제정책대학원 교수·지식협동조합좋은나라 원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26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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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7. 16:22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필자가 여태까지 들은 노엄 촘스키의 명언 중 이 말은 가장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 “최악의 학살자는 현장에서 직접 살인을 벌이는 졸개들이라기보다는, 멀리에서 정장을 입고 조용한 사무실에 얌전히 앉아 있는 고학력자 출신의 지휘자다.” 이번 세월호 학살도 마찬가지다. 주류 언론들이 도망친 선장 등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렸지만, 비정규직이기도 한 선장은 촘스키가 이야기한 ‘졸개’에 불과했다. 고물 선박 구입과 관련된 규제를 풀고 선박에 대한 감독을 해운업자 조직에 맡기는 등 과적 운항을 상습화시킨 ‘조용한 사무실에서의’ 관피아야말로 이 학살의 원흉임을 이제는 삼척동자도 알게 된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서 관피아보다 훨씬 더 그늘에 가려 있는 초대형 조직은 바로 학피아, 즉 정부·기업들과 긴밀히 유착돼 있는 학계다. ‘규제완화’ 등 관피아가 추진하는 범죄적 정책들의 골간을 학피아가 만들어내고, 곡학아세하면서 합리화하기에 이번 학살의 원인을 논할 때 학피아를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관피아와 함께 이 학살이 일어나도록 공을 들였으면서도, 관피아보다 훨씬 더 그늘에 가려 있는 초대형 조직은 바로 학피아, 즉 정부·기업들과 긴밀히 유착돼 있는 대학가 내지 학계다. ‘규제완화’ 등 관피아가 추진하는 범죄적 정책들의 골간을 학피아가 만들어내고, 곡학아세하면서 합리화하기에 이번 학살의 원인들을 논할 때 학피아를 빠뜨릴 수 없다. 하지만 국내는 아니지만 일단 대학 교원인 나 자신에 대한 반성문을 쓰는 입장에서 학피아 문제를 본격 거론하기 전에 몇가지 단서를 달아야 할 것이다.

첫째, 나는 국내 대학의 모든 정규직 교원들을 뭉뚱그려 ‘학피아’로 보려 하지 않는다. 그들 중에서도 주류에의 편입을 거부하고 노동운동에 앞장서는 ‘작지만 큰’ 용감한 소수는 있다. 하지만 변혁을 지향하는 소수는 있다 하더라도 하나의 조직체로서 학계·대학가는 대한민국에서 신자유주의 도입의 전위대 노릇을 해왔다. 또 밑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대학사회만큼 신자유주의 원칙이 철저히 적용되는 곳도 드물다.

둘째, 대한민국 학계라고 해서 꼭 특별한 것은 아니다. 정학(政學)·경학(經學) 유착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우리 식민 모국을 보라. 이미 1969년에 촘스키는 베트남 침략의 원흉으로 아서 슐레진저(1917~2007)나 새뮤얼 헌팅턴(1927~2008)처럼 ‘효율적인 제3세계 개입을 위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어용 ‘정치학자’들을 지목했다. 1973년에 촘스키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정치외교학 계통 논저의 95% 정도는 미국 재벌기업의 이해관계와 대외정책의 연관성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학자들이 재벌들 앞에서 이 정도로 ‘얌전하게 구는’ 데는 당연히 대학가의 이해관계가 있다. 전체 미국 대학이 수령하는 연구비의 약 60%를 재벌이 움직이는 국가가 대주고, 약 6%를 사기업들이 직접 대주고 있다. 많은 대학의 경우 기업들의 지원은 거의 결정적이다. ‘진리 탐구’나 ‘상아탑의 자율성’은 옛말이 된 지 이미 오래다.

다른 나라라고 해서 본질적 차이는 그다지 없는데 하필이면 한국 학계를 특별한 문제로 삼는 까닭은 무엇인가?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관피아와 함께 학피아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어느 나라보다도 한국 ‘명문대학’의 전임교원들은 사회 귀족으로서의 신분을 과시한다. 미국이라고 해서 폴리페서가 없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언급한 슐레진저와 같은 사람들은 사실 그 정의에 그대로 부합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만큼 폴리페서들이 판치는 세상도 참 드물다.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공공기관 고급 임원 중 교수와 연구원 출신은 24%나 됐다. ‘재벌정부’라는 누명을 썼음에도, 사기업 임원 출신은 약 8%에 그쳤다. 박근혜 초기 내각에서는 연구원 출신만 약 28%에 달했다. 즉, 두 극우적인 신자유주의 정권의 공통점이라면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바로 ‘고급 두뇌’들이 추진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유독 ‘교수 출신 장관’ 따위가 많은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그중 하나 특기할 만한 이유는 바로 학벌 카스트 제도의 작동 방식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이라는 세 대통령의 하나의 공통점을 지적하자면, 그들 중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서울대 마피아’라고 호칭할 수 있는 학벌조직이 대한민국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각각 임명한 정무직 공무원 중 서울대 출신 비율은 47% 정도였으며, 이명박 시절에는 고려대 출신에 약간 밀린 결과 40%로 깎이긴 했지만 그대로 우세를 유지했다. 특정 대학이 국가 전체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에서 그 대학 전임교원의 정치·사회적 비중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둘째, 그 어느 나라에서도 대학들이 신자유주의적으로 개편되지 않는 곳은 거의 없지만, 그 일부(성균관대·중앙대 등)를 아예 재벌기업이 소유하는 한국만큼 저질스럽고 졸속적인 신자유주의화를 볼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예컨대 정부의 정원감축이나 특성화 사업에 발맞추느라고, 도살하듯이, 학생의 의견을 무시해 가면서 여러 대학에서 벌어지는 학과 통폐합을 보라. ‘비인기’라고 해서 독일·프랑스어, 사회학이나 철학 등의 학과들을 폐품 처리하듯이 단숨에 없애버리는 것은 과연 학술적 전통이 있는 대학에서 가능한 일일까? 아니면 ‘영어 논문’ 광풍이나 ‘유명 해외 학술지’ 광풍을 보라. 내가 있는 오슬로대학을 포함해서 세계 대부분의 대학들은 교원들이 학술 활동을 영어로 하는 것을 유도하고, 교원들의 영미권 유명 학회지 논문 게재를 선호한다. 그만큼 세계적으로 영미권 학계의 패권이 강한 것은 현실이다. 한데 외국의 유명 학술지에 논문을 실었다고 하여 그 저자로 돼 있는 교수에게 수천만원의 포상금을 내놓는 대학은 한국 말고 과연 어디에 더 있는가? 더군다나 국내의 논문생산 시스템에서 상당수 교수들이 대학원생이나 비정규직들을 무상 착취해 가며 논문을 만드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국내 대학들을 기초 상식이 없고 기본 인권도 지킬 줄 모르는 신자유주의적 착취공장으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장하준 교수는 케임브리지대에 취직할 수 있어도 국내의 ‘명문대’ 경제학과 같으면 취직하기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학과 교수들은 비정규직 양산부터 ‘규제완화’까지 서민들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데 앞장섰다. 학피아의 주변부에 속하는 인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고질적인 현실도피다.

세월호 학살로 귀결된 대한민국의 신자유주의화를 이끈 것은, 학피아의 하나의 중심이라고 할 ‘명문대’들의 경제학과였다. 거기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는 고사하고 제도주의 학파 등 온건 케인스주의자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시장주의자 일색이다. 시장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큰 인기를 얻은 장하준 교수는 케임브리지대에 취직할 수 있어도 국내의 ‘명문대’ 경제학과 같으면 취직하기가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경제학과 교수들이 역대 정권에 의해서 가장 자주 정무직으로 등용됐으며, 비정규직 양산부터 범죄적인 ‘규제완화’까지 서민들의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데 앞장섰다.

경제학과들을 점령하다시피 한 시장주의자들의 범죄성이야 노골적이지만, 학피아의 주변부에 속하는 인문학의 가장 큰 문제는 고질적인 현실도피다. 예를 들어 여러모로 가장 현재성이 강할 수도 있는 역사학을 보라. 최근의 ‘문화 중시’와 같은 포스트모던 추세로 한참 ‘뜨고 있는’ 식민지시대 영화 연구로 지난 10년 동안 적어도 50개 이상의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그러나 삼성가의 자본축적 경위나 그 과정에서의 식민지 당국이나 독재정권과의 유착을 본격적으로 다룬 저서 내지 논문은 3~4편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어차피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민족주의는 학계에서 비판의 대상에 올라도, 한국 대학에 대한 자본 지배의 현실은 거의 학술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국가와 자본의 명령대로 인문학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세월호에서 수장당한 아이들에게, 시장주의와 순응주의가 당연시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앞장서온 고등교육기관 교원인 우리가 속죄하자면, 이제라도 학피아의 테두리를 안으로부터 과감히 부숴야 한다. 국가와 자본을 끊임없이 문제시하고 도전하는 학문만이 새로운 학살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실학’이 된다. ‘가만히 있지 않기’를 실천하고 가르쳐야 우리에게 속죄의 길이 열릴 것이다. 착취공장으로 전락한 대학의 틀 안에서 안주하는 순간 우리도 종범이 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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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7. 16:21

약속 시간에 늦었다. 급히 대문을 열고 나오는데 옆집 할머니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계셨다. 할머니가 우리집 쪽을 돌아본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 잠시만요!”라는 외침이 무색하게 할머니는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내려가 버리셨다. 벌써 두 번째 있는 일. 집에 오는 길에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어떤 아저씨가 스마트폰으로 운동경기 중계를 보고 있었다. 소리를 스피커폰으로 해두어서 나를 비롯한 버스 승객 모두는 강제로 그 시끄럽게 웅웅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유명한 연예인을 길거리에서 만난 대학생들의 반응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와!” 하고 놀라더니 “헐~ 대박!”을 외치며 무작정 스마트폰 카메라부터 연예인의 얼굴에 들이대고보기 시작했다.

옆집에 살아서 서로 얼굴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할머니는 왜 그러셨을까? 혼자 타고 가는 대중교통도 아닌데 아저씨는 왜 그러셨을까? 아무리 연예인이라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무런 인사도 없이 그저 어떤 대상을 다루듯 학생들은 왜 그랬을까? 처음엔 왜 이렇게 무례할까 생각했다. 그런데 차츰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공감’의 개념 자체를 배우지 못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옮아갔다. 공감이 없으면 애초에 마음에 ‘너’가 없으니까 무례일 것도 없다.

지난해에 케냐에 갔다가 우연히 비정부기구(NGO)가 지원하고 있는 방과후교실 수업에 참관할 기회를 얻게 됐다. 초등학생들 수업이었는데, 그 수업의 그날 주제는 ‘정직’(Honesty)과 ‘온전함’(Integrity)이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그 두 단어를 각각 나름대로 정의해 보게 했다. 학생들의 발표가 끝없이 이어졌다. 45분 내내 수업은 이것이 전부였다. 두 개의 단어로 45분 수업이 다 갔다. 무척 인상 깊었다. 내가 받아온 수업이란, 늘 ‘정직해야 해요’로 시작해서 ‘이러이러한 게 정직한 행동이에요. 이렇게 행동해요’를 암기한 뒤 어떤 것이 정직한 행동인지 문제집에서 연습한 후 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45분을 딱 두 개 단어로 보내는 것, 지나치게 더딘 수업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내려준 정의와 행동강령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배운다. 남이 내린 정의를 강요받는 것이 아니므로 이 정의는 나의 행동을 결정하고 책임질 힘을 갖는다. 두 단어만 공부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이 시간 동안 아이들은 자기 삶을 더 넓고 깊게 살펴보게 된다. 가족과 자기의 관계, 친구와 자기의 관계 등등. 천천히 아이들의 마음에 인간이 들어온다. ‘너’가 보이기 시작하고 너와 ‘공감’하게 된다. 행동은 당연히 일일이 지시해주지 않아도 어떤 상황에서든 자연스레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입시 위주의 우리 교육은 도덕 시험에서는 100점을 맞지만 실제 생활에선 전혀 도덕적이지도 타인을 고려하지도 못하는 기이한 인간을 만들어냈다. 남이 내려준 정의는 내 것이 아니니 책임질 필요 없고, 단순 암기는 전체를 보는 눈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마음에 들어와 있지 못한 사람의 눈에 ‘너’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공감 불능’이 만연해 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란 외침이 가득하다. 아이들의 더딘 걸음을 기꺼이 기다려주는 천천한 교육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00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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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10:44

옛날 새우깡은 지금 새우깡이랑 맛이 조금 달랐다. 한 봉지에 담긴 과자 맛이 균일하지 않았다. 짠맛이 많이 나는 게 있는가 하면, 조금 탄 맛이 나는 것도 있었다. 새우깡 한 봉지를 열면 그 안에서 감자깡이나 고구마깡이 한두 개씩은 꼭 나왔다. 제조 공정이 개선되면서 이런 일은 사라졌지만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어린 시절 과자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통로와 같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열릴 때쯤 ‘언젠가는 먹고 말 거야’라는 광고문구와 함께 등장한 ‘치토스’는 세상을 경험하지 못한 어린이들에게 태평양 건너 바비큐 소스의 풍미를 처음 알렸다. 

옛날 과자 얘기를 꺼낸 이유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과자들이 여전히 전성시대를 누리고 있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인기 과자 가운데 새우깡은 1971년 탄생했고 죠리퐁, 꿀꽈배기는 1972년생이다. 초코파이와 에이스는 1974년에 탄생했다. 1980년대에도 계란과자, 포테토칩, 홈런볼, 버터링, 꼬깔콘 등이 태어났다. 

이런 ‘고령 과자’가 판치는 까닭은 사람의 감각기관 가운데 입이 가장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항상 새로운 것만 찾는 눈이 가장 진보적인 기관이라면, 수십 년 전 엄마의 손맛을 평생 잊지 못하는 입은 ‘극렬보수’에 가깝다. 모르는 것을 잘못 먹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위험회피 본능이 우리 유전자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과자 회사들은 보수적이 될 수밖에 없다. 새 제품을 연구해 내놓기보다 성공이 검증된 제품에 의존하려는 습성이 강하다. 외생변수로 시장이 급성장한 경제 성장기엔 외국의 인기 제품을 먼저 모방해 국내에 소개하면 성공이 보장됐지만 시장이 성숙해 버린 지금은 그마저도 어려워졌다. 스테디셀러 과자 탄생이 드물어진 까닭이다. 성장 정체를 딛고 살아남는 법은 가격 인상이 있을 뿐이다. 한 유명 과자회사의 회장은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신제품 개발도 안 하고 마케팅도 안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실제로 국내 대표적인 식품기업들의 연구개발(R&D) 투자는 매출액의 1%를 밑도는 수준이다.

보수화되는 것은 비단 과자회사만의 얘기가 아니다. 자동차, 가전, 반도체, 조선…. 우리나라가 의존하는 주요 먹거리 산업은 대부분 1970, 1980년대에 시작돼 조금씩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다. 기업들이 새로운 분야의 투자를 기피하는 바람에 성장이 정체되는 모습이 확연하다. 어떤 전문가들은 “더이상 따라잡을 기업이 없어진 삼성전자에 필요한 것은 ‘제2의 애플’이 등장하는 일”이라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이렇게 검증된 성공 공식만 따르다가는 필연적으로 갈 길을 잃게 된다. 입사 시험을 보러 전국에서 10만 명이 모여든다는 삼성그룹, 현대자동차그룹의 공채가 한 차례 진행될 때마다 취업전선에서 9만 명씩의 방황하는 영혼이 생기는 셈이다. 브랜드 컨설턴트 권민 씨는 자신의 책에서 “사람은 모두 원본(原本)으로 태어나지만, 대부분 누군가의 복사본(複寫本)으로 죽게 된다”고 말했다. “유일한 존재로서 유일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누군가를 따라 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희석한 나머지 잉여 되거나 여분의 사람으로 전락해” 발전의 동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다시 눈길을 경제 살리기와 일자리 창출로 돌려야 할 때다. 그리고 다시 경제성장을 얘기할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과제가 있다. 바로 과거의 성공모델을 답습하려 하지 않고 모험정신으로 똘똘 뭉친 새로운 ‘원본’을 발견해 내는 일이다.

김용석 소비자경제부 차


http://news.donga.com/3/all/20140625/64628378/1

Posted by 겟업
2014. 9. 14. 10:42

선진국선 ‘김영란법’ 이미 시행 
공무원이 금품받으면 직무관련-대가성 불문하고 뇌물죄로 형사처벌 
돈-향응 받은 ‘스폰서 검사’, 승용차 받은 ‘벤츠 여검사’ 
무죄판결 또 안나오게 하려면 김영란법 통과가 절실하다



이른바 김영란법은 형법의 뇌물죄 요건이 너무 엄격하여 금품을 받은 공무원이 처벌이 안 되는 부패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부패의 근원을 방지하기 위해 선진국이 마련하고 있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국회에서 이 법을 통과시키지 않는 이유는 이 법률이 통과되면 청탁과 이권 개입으로 이득을 얻어 오던 무리들의 음성소득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때문일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인테그리티(integrity)’라는 단어를 매우 강조한다. 윤리 관련 규정과 부패 방지 법규에는 이 단어가 꼭 등장한다. 주로 ‘청렴성’으로 번역되지만 ‘고결성’이 더 적합할 것 같다. “고결성만큼 신성한 것은 없다”(에머슨) “고결성은 말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행동에서 나온다”(베이컨) 등 고결성을 강조하는 경구가 많다.

선진국에서는 학교와 기업, 공직사회, 전문직과 리더십 교육 과정 등에서 이 고결성 덕목을 반복해서 교육하고 강조한다. 국제 거래와 기업에서도 법규와 윤리규정 준수를 의미하는 ‘컴플라이언스 의무’가 강조된다. 고결성을 손상시키는 행위는 중대 사안으로 다룬다. 필자가 하버드 로스쿨에서 공부할 때도 ‘인테그리티’를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것을 보았다. 부패 방지를 위한 국제규범에서도 고결성은 핵심 가치로 등장한다. 국제투명성기구는 “부패 방지를 위해 노력한 사람에게 ‘인테그리티상’을 준다. 유엔 반부패협약에서도, “부패와 싸우기 위해, 각국은 공직자들에게 고결성, 정직성을 장려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동양에서도 군자는 혼자 있을 때 더욱 삼가고 경계해야 한다는 신독(愼獨)을 강조했다(대학과 중용). 우리나라에서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도 신독을 강조했다. 이순신 장군은 신독 정신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공직자였다. 우리도 선비정신과 같은 고결한 인격수양의 전통이 있음에도 오늘날에는 고결함의 전통과 가치가 크게 퇴색되어 가고 있다.

고위공직자의 탐욕과 부패, 부정직함이 지나쳐서 하위 공직자들의 일탈 행위는 말할 것도 못 된다. 헌법재판소장 대법원장 대법관 등 가장 고결해야 할 지위에 있었던 사람들조차 ‘황제 전관예우’를 활용하여 과도한 사익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다. 축첩행위와 혼외자식을 은폐하기 위해 대국민 거짓말 행진을 펼친 전 검찰총장, 3억 원대 금품과 2000만 원대 시계를 받고도 이것을 취임 축하선물이라고 강변하는 전 국세청장도 우리 사회의 고결성을 무참히 짓밟은 사람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부패의 근원을 척결하기 위해 ‘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안(이른바 김영란법)’의 통과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법안은 공직자의 부정 청탁과 이해충돌 행위, 금품수수 행위를 금지하고 금품수수가 100만 원을 초과할 경우 형사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러한 법률이 마련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뇌물죄에 대한 형사처벌 규정만 있을 뿐이고, 부정 청탁과 이해충돌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이 없다. 우리나라의 뇌물죄는 직무 관련성과 대가성을 엄격히 요구해서 고액의 금품을 받은 공무원이 무죄 판결을 받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건설업자로부터 현금 100만 원과 140만 원대의 향응을 받은 이른바 ‘스폰서 검사 사건’에서도 향응수수는 인정되나 직무 관련성과 대가성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났다. 내연 관계의 변호사로부터 500만 원대의 샤넬 백과 신용카드 및 벤츠 승용차를 제공받은 이른바 ‘벤츠 여검사 사건’에서도 청탁 관련이 아니라 ‘사랑의 징표’로 받은 것이라는 해괴한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났다.

선진국에서는 이런 일이 가능하지 않다. 미국 영국 독일에서는 공직자가 정부 급여 이외의 금품을 받으면 직무 관련성이 없더라도, 대가성을 불문하고 뇌물죄로 형사처벌한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외국 공무원에 대한 뇌물 제공까지 형사처벌한다. 캐나다 프랑스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들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법규를 마련하고 있다.


‘고결성’을 중시하는 국가 사회를 만들지 않고는 부패를 척결하기 어렵다. 존중받는 국가는 더욱 요원하다. 김영란법의 통과가 절실히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읊은 해맑은 시인 윤동주의 고결성이 더욱 그립다.

배금자 객원논설위원·변호사


http://news.donga.com/3/all/20140613/64226161/1



Posted by 겟업
2014. 9. 14. 10:41

생계와 교육이 막막한 서민에게 손에 안잡히는 ‘국가 개조’는 잠꼬대 
내수 위축시키는 집단심리 탓인지 국내 소비는 줄고 해외 소비는 늘어 
정부 人事물어뜯기보다 급한 것은 멍든 민생경제에 활기 불어넣는 일 
분노와 겁주는 정치로는 해결 못해



웃음기가 너무 없다. 정치에도 사회에도 없으니 경제와 시장에도 없다. 온통 경직되어 있다. 그저 조심하는 게 상책이란 생각이 전염병 같다. 꼬투리만 잡히면 죽는다는 두려움에 총리감도 장관감도 수석감도 많이들 숨었다. 자칫하다간 칼 맞는다고, 공무원들은 복지부동(伏地不動) 정도가 아니라 초여름에 지하동면(地下冬眠) 중이다.


한 친구는 지난달 중순 울릉도에 갔는데 일행 말고는 여행객을 구경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관광 철이 그토록 한산하니 그곳 부모들은 육지로 유학 보낸 자식들의 2학기 등록금 걱정에 땅이 꺼질 것이다. 도시 업소들에서 일당(日當) 시급(時給)이나마 받을 수 있는 일자리와 일거리도 눈에 띄게 줄었다. 많은 일용직 근로자들은 언제 일이 끊어질까 하루하루가 초조하다. 이미 허탕 치는 날이 많다. 당장의 생계와 아이들 교육이 막막해지니 헛웃음조차 짓기 어렵다. 이런 서민에게 ‘국가 개조’라는 손에 안 잡히는 거대담론은 잠꼬대보다도 허망한 소리이다.

지금이 어느 땐데 술 마시고 노래하고 놀러 다니느냐고 하는 집단심리와 상호감시가, 그렇지 않아도 쪼그라든 내수 소비를 더 얼어붙게 만든다. 골프장 손님이 급격히 줄어 생계 걱정이 늘어난 쪽은 경기도우미와 골프장 내 식당종업원 같은 약자들이다. 인과(因果)는 돌고 도는 것이지만 아무튼, 사회가 경직되고 활기가 사라지면 경제가 풀리지 않는다. 그렇지 않아도 부자가 아닌 중산층 이하의 국민은 가계부채의 고통에 시달려왔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사회가 밝기보다 어둡고, 웃는 사람보다 찌푸리는 사람이 많고, 분노가 넘치는 나라에는 외국 관광객인들 많이 올 리 없다. 맞이하는 사람들이 부드럽고 웃음이 넉넉하며, 친절하고 활력 있어야 외국인도 신이 나서 찾아오고 즐겁게 돈을 쓸 것이다. 

돈도 쓰는 맛이 있어야 쓸 텐데, 내 돈 쓰면서 세상 눈치부터 봐야 하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돈이 숨거나 달아나기 십상이다. 우리 국민의 국내 소비는 줄고 해외 소비는 늘고 있다. 어제도 중국행, 동남아행 비행기는 많은 한국인을 실어 날랐다. 그들 주머니의 달러도 주인을 따라 중국으로, 동남아로 흘러갔다.

나라 안에서 돈이 풀리면 서민에게도 좋을 텐데, 그 돈이 나라 밖으로 줄줄 새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술 마시고 노래하고 골프 쳐서는 안 되는 사람이 너무 많은지도 모르겠다. 자주 외국을 드나들며 놀고 쇼핑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돈을 들고 나간다.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주체는 정부 이전에 민간이다. 정부는 많은 세금을 거두지만 정작 민생 경제를 위해 정부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복지로 성장을 북돋우고, 나라가 가난을 구제해줄 것처럼 외쳐댔던 선거공약들은 역시 허망하다. 투자도 생산도 민간이 자유롭게 마음 놓고 할 수 있어야, 그리고 범죄가 아닌 다음에는 남의 눈치 안 보고 소비도 할 수 있어야 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 기업하기 좋고 투자하기 쉬운 환경, 각자의 능력 범위에서 하고 싶고 사고 싶고 먹고 싶은 것에 돈을 쓸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경제가 산다. 그래야 민생의 고통도 덜어낼 수 있다.

물론 나라도 기업도 개인도 부담 능력을 넘어선 과소비는 독약이다. 안 그래도 빚이 너무 늘었다. 부채가 있으면 절약해야 한다. 다만 돈이 있으면 쓸 만큼 써야 하고, 편하게 쓸 수 있어야 돈이 돈다. 돈이 돌아야 빈부 간의 분배도 된다.

경제가 활력을 잃고, 성장 잠재력을 보충하기가 더욱 어려워지는 구조로 가고 있다. 그런데도 세상은 경제보다 정치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더 많다. 내 생각에는 ‘국가를 개조할 국무총리, 경제를 살릴 경제부총리’ 그런 위인(偉人)을 찾는 일보다 국민의 경제심리를 끌어올리는 일이 더 중요하고 급하다. 지금까지 역대 어느 총리도, 어느 부총리도 국민에게 밥을 떠먹여준 위인은 없었다. 온 정치권과 사회운동권이 정부 인사(人事)를 둘러싸고 물고 뜯느라 정작 촉진해야 할 경제와 시장의 활성화에는 건성이다. 미국은 2008년 서브프라임 위기 이후 국민과 국가의 총력을 경제에 집중해 위기를 극복했다.

정부와 정치권에 바란다. 겁주는 정치, 성내는 공권력으로, 그 칼잡이 행태로 민생경제를 더 피멍들게 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국민을 신나게 해주고 국민에게 엷은 미소라도 돌려다오.

배인준 주필


http://news.donga.com/3/all/20140610/64159843/1



Posted by 겟업
2014. 9. 14. 10:40

“우리 애가 요즘 잘 안 먹어서 걱정이에요.” “우리 애가 드디어 대소변을 가려요.” “우리 애는 발소리만 듣고도 난 줄 안다니까.” 우리 애는 사람이 아니라 개다. 우리 집에도 ‘행운이’라는 이름의 혈기왕성한 네 살짜리 수컷 보더콜리가 산다. 퇴근 후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꼬리를 흔들며 반기는 이 녀석에게 제일 먼저 건네는 말이 “엄마 왔다”이다. 휴일에 행운이가 공을 물고 와서 놀자고 채근하면 컴퓨터 앞에서 빈둥거리던 아이들이 잔소리를 듣는다. “오늘은 형, 누나가 좀 놀아줘라.”

개그맨 전유성 씨는 2009년 처음으로 경북 청도에서 반려동물을 위한 음악회 ‘개나 소나 콘서트’를 열었다. 이후 해마다 복날에 즈음하여 열리는 이 음악회를 보러 1만 명이 몰려와 청도의 명물이 됐다. 전 씨가 개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준다는 희한한 발상을 하게 된 계기는 방송인 최유라 씨의 “우리 애(개)가 아파서 병원 갔다 왔어”라는 말 때문이라고 한다. 개도 가족이라면 문화생활을 같이하는 게 뭐가 이상한가.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스스로 반려동물의 엄마 아빠 노릇을 하며 행복해한다. 개의 학명 ‘카니스 루푸스 파밀리아리스(Canis lupus familiaris)’에 ‘가족(원래 친근하다는 뜻)’을 가리키는 ‘파밀리아리스’가 포함돼 있는 것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사랑하는 반려견에게 유기농 사료를 먹이고, 정기적으로 미용실에 데려가고, 공주 옷을 입힌다. 엄마 아빠가 외출한 사이 혼자 집을 지키는 ‘아이들’을 위해 개 전용 방송 채널까지 등장했다. 이처럼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 밑에서 개들도 행복할까.

올해 초 EBS의 다큐 프로그램 ‘하나뿐인 지구’는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는 도발적인 문제 제기를 했다. 주인과 함께 있을 때는 사랑스럽기만 한 반려견이 혼자 집에 있을 때는 180도 달라진다. 물건을 마구 물어뜯고 아무 데나 용변을 보고 늑대처럼 울부짖는다. 개 훈련사인 강형욱 씨는 “힘든 상황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동료를 부르거나 주인을 찾는 소리”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분리 불안증을 보이는 개들은 심한 경우 자기 생식기나 발가락을 물어뜯기도 한다.

방송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동물학자 스티븐 부디안스키의 말이다. “개는 개죠.” 개를 마치 사람처럼 대하며 ‘우리 애가 행복하다’고 믿는 이들이 많다. 순전히 착각이다. 분리 불안증으로 예민하고 난폭해진 개를 치료하는 방법은 끌어안고 비비는 것이 아니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운동을 시키는 것이다. 개는 개의 방식으로 사랑해야 한다. 강형욱 씨는 최근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된다’는 제목의 반려견 교육서에서 ‘가지고 논다’는 의미의 ‘애완견’이라는 말부터 사용하지 말자고 주장했다.

“친구이고 가족이라면, 강아지를 혼자 울타리 안에 가둬놓고 재우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에 줄을 매어 평생을 묶어 놓지도 않을 것입니다. 아파트로 이사 간다고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 강아지는 당신을 친구로 생각하는데, 왜 당신은 자신의 외로움을 해소하고, 과시욕을 채우기 위해 강아지를 키우려 하나요? 강아지를 왜 자녀의 장난감으로 키우려고 하나요? 혹시 이 글을 읽고도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개를 키우면 안 됩니다.”


비단 개뿐이랴. 고양이, 토끼, 새, 햄스터 등등 애완이라는 이유로 사람과 함께 살게 된 모든 생명체가 여기에 해당된다. 뜨끔하다. 나는 결코 좋은 ‘엄마’가 아니었음을 반성한다.


김현미 출판국 전략기획팀장


http://news.donga.com/3/all/20140613/64226171/1



Posted by 겟업
2014. 9. 14. 10:38

“사저에 살며 슈퍼마켓서 장보는 메르켈… 리더십 비결은 경청”

3개월간 독일 체류를 마치고 최근 귀국한 김종인 전 새누리당 국민행복위원장. 이승만 정권 때인 자유당 시절부터 한국 정치를 체험하고 지켜봐 온 그는 유럽 경제와 역사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으로 독일의 성공 비결과 한국 정치에 던지는 시사점을 설명했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김종인 전 새누리당 국민행복위원장(74)이 3개월간 독일 체류를 마치고 귀국했다는 소식에 안부인사 겸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훔볼트 재단 초청으로 독일 6대 싱크 탱크 중 하나인 에센 RWI (Rheinisch-Westfalisches Institut fur Wirtschaftsforschung)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독일 내 지식인 정치인들을 두루 만났다고 한다. 통일 이후, 또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탄탄한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독일의 성공비결을 찾으려 인생의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당초 인터뷰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듣는 독일이야기는 세월호 이후 국가개조가 논의되는 마당에 의미 있는 시사점이 있었다. 인터뷰는 민감한 정치현안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하고 어렵사리 이뤄졌다. 사무실을 다시 찾은 건 22일이었다.

―직접 가서 본 독일 분위기는 어땠나.

“사회가 상당히 변했다는 걸 느꼈다. 국민들이 자신감에 충만해 있었다. 국민 82%가 현 상황에 만족한다고 하더라. 그럴 만도 한 것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전 세계에서 정부 부채가 줄어든 유일한 나라 아닌가. 올해 성장률도 2%가량 된다고 한다. 거리에 노인들이 많이 보였는데 다들 행복해 보였다. 카페에서 커피 마시고 주말 되면 여행 다니고 이런 게 진짜 복지사회구나 느껴졌다. 결국 한 나라의 발전이라는 것은 적당히 무슨 조치를 취한다고 되는 건 아니고 조금 비난을 받더라도 자신들의 특성을 살리면서 가는 거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독일이 비난을 받았다는 뜻인가.

“독일과 일본은 2차 대전 패전국이면서도 경제적으로 가장 성공한 나라들로 주목받았지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 모델이 더 주목을 받았다. 독일은 1990년 갑작스러운 통일로 휘청거리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독일 모델은 끝났고 더이상 경쟁력이 없다는 말까지 나왔다. 지금은 어떤가. 일본이 1993년 이후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반면 독일은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나라가 되지 않았나.”

―비결은 뭐라고 보나.

“독일인들 스스로 말하듯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 질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독일인들도 자신들의 시스템이 과연 옳은 건지 회의한 적이 있는데 역시 옳았다고 자평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사회적 시장경제’란?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주의냐’고 묻는데 아니다. 자본주의를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다. ‘사회적’이라는 말은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에 정부가 개입한다는 뜻이다. 독일이 성공한 것은 경제 자체의 효율과 사회 각 분야의 질서가 서로 맞물려 통제와 감시 시스템이 가장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업이나 근로자 같은 경제 주체들이 시장에서 탈락을 해도 또 다른 제도를 통해 생존이 가능하기 때문에 사회나 체제에 대한 불만이 적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정부가 개입하는 분야라고 하면?

“공정한 거래확립, 세금 노동 사회안전망 이런 거다. 시장은 내버려두면 약자는 죽어버리고 비사회적으로 가게 되어 있다. 이것을 어떻게 막고 사회적으로 조화시키느냐 이게 소셜(social·사회적)이란 말에 포함된다. 자본주의체제는 기본적으로 탐욕이 작동할 수밖에 없다. 탐욕에는 끝이 없다. 2008년 금융위기란 것도 1999년 클린턴 정부가 금융 규제를 다 풀어 버리는 바람에 시장을 통제하지 못한 데서 온 거 아닌가.”

그는 “무엇보다 독일의 시장경제가 안정화된 데에는 사법부, 학계, 언론 역할이 컸다”는 말도 했다.

“독일 경제학자 뢰프케가 ‘나라가 잘 되려면 법관 기자 대학교수가 제 기능을 해야 한다’고 했다. 독일은 헌법재판소 판결이 나오면 무조건 승복한다. 언론의 감시기능도 엄청나다. 독일인들 스스로 사회 곳곳을 파헤치는 언론의 탐사보도 노력이 민주적인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최근 총리 후보로 유력했던 국방장관이 표절에 걸려 정치적으로 매장됐다. 우리로 치면 7, 8년 가까이 교육부 장관 하던 사람도 표절 사실이 나오자 즉시 물러났다. 대통령도 두 사람이나 임기 중에 물러났다. 한 사람은 사소한 말실수로, 또 한 사람은 대통령 되기 이전에 금융기관 친구를 통해 싼 이자로 대출받은 게 보도됐다. 낙마한 사람들에 대해 국민들이 애석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잘못이 있으면 물러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메르켈 총리는 정말 존경받는 지도자인가.

“국민 신뢰가 대단했다. 지금 59세인데 이런 상태로 가면 총리를 한 번 더 하지 않을까 그럴 가능성까지 보였다.”

―메르켈 리더십의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그는 엄청나게 이야기를 많이 듣는 사람이다. 최종 판단능력이 탁월하기도 하지만 어떤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리기 전에 많은 사람들 의견을 듣는다. 독일 친구 중에 터키 출신 언론인이 있었는데 ‘메르켈을 세 번 만났다’고 하면서 굉장히 겸손한 사람이라고 전하더라. 총리가 터키 전문가를 찾다가 내 친구를 찾았다면서 자신이 동독에서 35년 살다온 사람이라 잘 모르니 상세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세 번이나 단독면담을 청했다는 거다. 최근 의사결정에서 매우 인상적인 건 원자력 발전소 폐기 정책이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독일이 이 정책을 관철시켰는데 오죽하면 ‘원전 폐기하려면 메르켈에게 물어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메르켈은 환경부 장관 4년을 하면서 환경운동가들 이야기를 오랫동안 다 듣고 있었고 후쿠시마 사태가 나자 바로 결심을 해버렸다. 이후 대체 에너지 개발 정책도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북해의 풍력에너지로 만든 전기를 남쪽 지방까지 끌어오는 과정에서 고압선이 지나가는 지역 내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하지만 그 어려운 문제도 최근 합의될 것 같은 분위기이다. 메르켈은 어떤 정책을 내놓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의견을 듣고 방향이 서면 국민들을 오랜 시간 설득한다.”

김 전 위원장은 “지금 독일 사회의 성공은 개방성에서 나온다고 본다”면서 “현재 총리와 대통령이 모두 동독 출신인데 우리로 치면 통일 후 북한 출신이 대통령도 하고 총리도 하는 셈”이라고 했다.

―메르켈 리더십을 흔히 ‘무티(엄마)’ 리더십이라고도 하던데….

“실제로 독일 국민들은 메르켈을 어머니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관저에 살지 않고 사저에서 남편하고 산다. 슈퍼마켓에서 스스럼없이 장도 보는 모습이 공개되는데 이걸 보는 국민들이 친근하게 생각한다. 사실 메르켈 집권 후 독일은 뭐가 잘못되어 가는 게 없다. 축구까지 잘한다(웃음). 총리 머릿속이 요즘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에 복잡하다. 또 유럽연합(EU) 집행부를 새로 뽑고 있어 굉장히 바쁜 시기인데도 일부러 축구 경기에 가서 선수들과 어깨동무하고 사진 찍는다. 이런 게 독일 국민들을 흐뭇하게 하고 호감을 주는 것 같다.”

그는 “총리 보좌 그룹 중에 현자(賢者)들의 모임이란 게 있다”면서 “내가 있던 연구소 소장이 그 모임 의장인데 메르켈은 참석자들마다 제각각 다른 의견들을 모두 들은 뒤 ‘국민의 뜻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는 거 아니냐’라고 말한다고 한다. 정치라는 건 그런 것”이라고 했다.

―무조건 국민 뜻을 따른다면 포퓰리즘 아닌가.

“포퓰리즘이 아니라 그게 현실정치의 속성이다. 이 글로벌한 시대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할 점은 지금이 지식정보사회라는 거다. 국민들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다. 핸드폰 하나만 있으면 정보가 무제한으로 유통된다. 교육수준도 굉장히 높아졌고 국민 대다수가 비판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런 국민들을 상대로 과장하거나 뭔가를 연출하려 한다거나 통제하려 한다면 먹히지 않는다. 늘 이야기하지만 선거를 했으면 표심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

내친 김에 국내 정치 문제로 질문을 삼았다. 그는 새누리당 정강정책을 만들고 박근혜 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다는 생각에서인지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민감한 정치적 사안에 대한 즉답을 내놓는 것을 꺼렸다. 

“이번 6·4지방선거는 누가 이긴 건가”라고 묻자 독일을 언급하며 국내 역대 선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원칙과 신뢰 강조한 朴대통령 경제민주화 약속 믿었지만 선거 끝나고 사라져▼

“독일 정치인들은 선거가 끝나면 승패 분석을 철저히 한다. 집권 세력이 되면 자기네들이 어떻게 해서 집권하게 되었느냐에 대한 성찰을 끊임없이 한다. 우리 역대 선거도 찬찬히 뜯어보면 민심의 뜻과 이후 정국의 향배를 알 수 있다. 단적으로 1958년, 1971년, 1978년, 1985년 선거를 보면 서울 표심이 정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958년 서울서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자유당이 한 석 빼고 전멸했다. 겁이 나니까 다음 대선에서 부정선거 기획을 한 거다. 그게 4·19로 연결됐다. 71년 선거 때도 서울에서 한 석 빼고 다 전멸했는데 그 결과가 유신이었다. 78년 선거 때에도 서울에서 (여당이) 참패하고 전국적으로는 1.1%포인트 차로 졌다. 그런데도 표심을 읽지 못하다 결국 79년 일이 벌어졌다. 85년에는 생긴 지 2주일밖에 안 된 야당(신한민주당)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당시 여당인 민정당이 전멸했다. 결국 87년 민주항쟁이 나온 거 아닌가. 민주사회에서 선거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집권을 할 수가 없다.”

―이번 6·4선거도 엄중한 시그널인가.

“나는 그렇게 본다. 여야가 영호남에서 이긴 것은 원래 지역표이고 서울과 충청권 표심이 야로 돌아섰다는 게 굉장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관피아 척결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문제를 발생시킨 사람들한테 해결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이다.”

―그렇다고 다 나가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결국 정치시스템 자체가 변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 지금 세월호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 세상이 뒤집어진 것 같지만 사실 역대 대통령 모두 당선이 되면 구름 위로 올라간다. 황홀경을 느끼며 1, 2년을 헛되이 보내기 십상인데 이번 일이 구름을 빨리 걷게 해 상황인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동안의 적폐를 해소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방법이 중요하다.”

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말을 끊었다가 “내가 경제 민주화를 주창한 이유가 뭔지 아느냐”고 되물었다.

“재벌을 해체하자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경제 질서를 제대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다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근원적인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우리 재계(財界)는 너무 힘이 세니까 내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만들자고 했던 거다. 이런 방식으로 가다가는 관(官) 주도와 정경유착으로 오랜 불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본 모델로 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어떻든, 일본은 왜 지금 이 모양이고 독일은 승승장구하는지 그걸 알아보고 싶어 독일에도 갔던 거다.”

―총리 후보로도 거론되었다.

“내가 새누리당 정강정책을 새로 쓴 사람이고 거기에 경제 민주화와 복지가 들어간 거 아닌가. 박 대통령은 선거에서 그걸 내걸어 다수당이 됐고 대통령이 됐다. 평소 원칙과 신뢰를 강조해온 대통령이 그걸 꼭 지키리라 믿었다. 하지만 선거 끝나고 경제 민주화는 사라졌다. (이 정부에) 마음 떠난 지 오래다.”

―문창극 총리 후보 문제로 시끄럽다. 총리의 역할은 뭔가.

“우리 같은 대통령제하에서는 한마디로 역할이 거의 없다. 대통령을 대신해 국회에 가서 답변하는 것 외에 실질적인 권한이 없다는 뜻이다. 역사를 보면 총리제도라는 게 우습게 도입이 됐다. 내각책임제를 하려다 갑자기 대통령제로 바뀌었는데 어정쩡하게 총리 자리는 그대로 둔 거다. 이승만 대통령은 말년에 총리를 임명조차 안 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뒤에 내가 어느 인터뷰에서 총리의 자격조건을 말한 적이 있다. ‘대통령보다 잘나서도, 지식이 많아서도 안 되고 잘생겨서도 안 된다’(웃음)는 거다.”

―총리 인선에 너무 무게를 두지 말라는 건가.

“상징적인 의미만 있기 때문에 누가 되든 대세에 지장이 없다. 책임총리 운운하는데 헌법에 그런 조항이 없는데 어떻게 책임을 지나.”

―문 총리 후보는 사퇴해야 하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된다. 거듭 말하지만 지식정보사회라고 말만 하지 말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을 해야 한다. 글로벌 환경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해야 하는지는 본인이 잘 알 것 아닌가.”

―새누리당을 떠난 뒤 대통령은 만났나.

“내가 3월 1일에 독일에 왔는데 국빈자격으로 대통령이 방독했던 3월 26일 나는 독일 외교부 초청으로 독일 대통령 주최 오찬장에서 뵈었다. 사람들이 많아 그냥 인사 정도만 나누었다. 그렇게 말고는 만난 적은 없다.”


―대통령이 되고 난 뒤 전화는 한 적 없나.


“없다.”

허문명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40623/645489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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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10:28

"우리는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사회에 갇혀 있는 것 같다."

몇 년 전 어떤 사석에서 들었던 얘기다. 흥부와 놀부의 사회란 어떤 것일까. 매사를 선(善)과 악(惡)의 이분법으로 보는 시각을 말한다. 사람을 볼 때도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나누어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세상이 그럴까. 우리 주변에서 어떤 때는 착한 사람이다가 어떤 때는 나쁜 사람인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서양 사회는 사람관(觀)이 우리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야누스나 '지킬 앤드 하이드'의 사회란 생각이다. 로마신화에 나오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나 학식이 높고 자비심이 많은 지킬 박사가 때로는 추악한 하이드로 변신한다는 '지킬 앤드 하이드'에 익숙한 문화다. 이런 시각은 인간은 선·악이란 두 가지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양면성(兩面性)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다 보면 나 스스로가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으로 결정돼 있는 게 아니라 선택과 결정의 순간마다 자신의 내부에 있는 선과 악이 충돌한다는 사실을 느끼게 마련이다. 더욱이 그렇게 선과 악이 충돌한 결과는 100대0이 아니라 51대49인 경우가 더 많다. 간발의 차이로 때로는 옳은 일을 하고, 때로는 나쁜 일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판단과 선택을 좌우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때로는 내가 배운 교양과 지식일 때도 있고, 때로는 종교적 신념, 때로는 사회적 규율과 시스템이다. 우리 사회가 한발 더 나아가려면 세상을 '지킬 앤드 하이드'로 보는 시각을 흡수해야 한다. 그래야 관용도, 포용도, 소통도 생기는 것이다.

'흥부와 놀부 사회'에 대한 얘기를 하던 시점은 광우병 사태가 막 진정될 무렵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는 '광우병에 걸린 소를 국민에게 먹이려는 대통령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 대(對) '이를 반대하는 세력'이 '전쟁'을 치른 직후였다. '어떤 대통령이 온 국민을 죽일 광우병 소를 수입하겠느냐. 이건 야당과 좌파의 대선 불복 운동이다'는 시각과 '미국과 FTA를 체결하려고 국민 건강을 팔아먹었다'는 주장이 맞붙었다. 광우병 사태는 매사를 선과 악으로 나눠 봐야 직성이 풀리는 흥부·놀부 사회에서나 가능한 소모전이었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면 명쾌해 보이고, 단순해 보이고, 후련하다. 그런데 그런 시각으로는 세상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 사회는 지금 세월호 참사를 되새기며 각종 대책을 고민 중이다. 그런데 고민의 무게중심은 여전히 흥부와 놀부를 찾아내서 규정하는 데 있는 듯하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왜 세월호를 책임져야 할 선원들의 내면에서, 또 화물을 적정량 실었는지 따져야 할 한국선급 직원들의 마음에서 흥부 대신 놀부가 판을 쳤는지 따져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그 자리에 누가 가더라도 흥부가 이길 확률이 더 높은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이제 '흥부와 놀부'의 틀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인열 경제부차장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10/201406100420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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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10:27

'상놈니제이션'이란 표현을 몇 해 전 어느 교수에게서 들었다. 조선시대 신분이 낮은 이를 낮춰 부르는 '상놈'이란 말과 '근대화'를 뜻하는 영어 '모더니제이션(modernization)'을 더한 조어(造語)다. 한국의 근대화는 한마디로 '상놈화' 과정이라는 과격한 주장이었다. 글이나 논문이 아니라 사석에서 한 말이기에 실명은 밝히지 않는다.

때는 우리 학계에서 근대화 논쟁이 뜨겁던 시기였다. 한편에서는 조선후기에 자본주의 경제 발전의 씨앗이 있었고 근대화로 가는 동력이 있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을 주장했다. 이 논의는 일제의 폭압적 수탈로 자주적 근대화의 길이 가로막혔다는 '식민지 수탈론'으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에는 내재적 발전론 및 수탈론을 민족 감정에 호소한 비논리적 담론이라고 비판하면서 통계와 실증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에 비로소 자본주의 경제발전이 이뤄졌다고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있었다. 두 논의를 수렴하면서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식민지 민중이 스스로 참여해 경제성장을 이룬 점을 강조하는 '식민지 근대성' 개념도 나왔다.

이들 근대화 논의는 서로 대척점에 있지만 모두 경제 발전을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놓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덕영 독일 카셀대 강사는 최근 낸 책 '환원 근대'에서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에서는 공히 근대화가 경제 외에도 다양한 삶의 영역을 포괄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고려하기 힘들다"고 비판했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원하는 우리 사회 일부 모습은 정신이나 문화 측면에서 '상놈니제이션'이란 표현이 적절하다. 안전에 관계없이 컨테이너 한 개라도 배에 더 싣는 게 이익이라는 인식,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키고도 도망 다니는 행태는 정신의 상놈니제이션이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힘들다.

우리들 보통 사람에게도 유사한 인식이 스며들어 있다. 악다구니하며 떼를 쓰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 교차로에서 꼬리물기를 하더라도 나만 지나가면 그뿐이라는 의식 수준은 사소하지만 상놈니제이션의 진행을 보여준다. 체면이 밥 먹여주지 않고, 예의와 염치가 돈이 되지 않는 것이다.

서구의 근대화는 귀족 문화가 확산하면서 교양을 갖춘 시민이 탄생하는 과정이었다. 시민 계층은 근대화를 통해 귀족만 즐기던 모차르트 음악 같은 고급문화를 향유할 수 있게 됐다. 이 과정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시민 정신이 싹텄다. 반면 우리 근대화는 좋은 의미의 양반 문화마저 전면 부정하고 폄훼했다. '양반'이란 말은 우리 일상용어에서 욕설에 가까운 말이 됐다. 양반이 중요하게 여기던 체면이나 예의·염치는 냉소의 대상이 됐다. 이는 식민지와 전쟁 같은 험한 역사를 거치면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의 놀라운 압축 경제성장은 결코 죄(罪)가 아니다. 다만 의식(衣食)이 족하면 예절(禮節)을 안다고 했다. 이제 정신의 '양반니제이션'이 필요한 때 아니겠는가.


이한수 문화부차장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22/20140622024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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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10:25

500년 역사를 지닌 영국의 대표적 공기업 로열메일(Royal Mail)이 여덟 달 전 민영화됐다. 영국 정부는 작년 10월 이 회사 지분 중 60%를 떼서 민간에 팔았다. 남은 지분 40%는 시장 상황을 봐 가면서 전량 매각한다고 한다. 주식 거래 첫날 주가가 정부 매각 가격보다 40% 가까이 급등해 '헐값 매각' 논란이 일었지만, 재정 상황이 어려운 영국 정부는 현금 20억파운드(약 3조5000억원)를 손에 쥐었다.

로열메일은 1516년 헨리 8세의 개인 우편 부서로 출발했다.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의 얼굴이 새겨진 세계 최초 우표 '페니 블랙'을 발행하는 등 우편 역사의 산 증인이다. 1980년대 40여개 공기업을 민영화했던 대처 전 총리조차 "여왕의 얼굴을 민영화할 준비는 안 됐다"며 로열메일을 민간에 넘기는 건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캐머런 영국 정부는 민영화를 밀어붙였다. 우편 서비스를 공기업이 제공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터넷 업체가 제공하는 이메일이 확산되니 편지는 급감했다. 페덱스·DHL 등 다국적 회사들이 택배 시장을 밀고 들어와 무한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독일·오스트리아·벨기에 등이 이미 우정 민영화에 성공한 것도 영국을 자극했다.

그렇다고 영국이 공기업을 없애기만 하는 건 아니다. 민간이 할 수 없는 일은 재정이 어려워도 공기업을 만들어 맡긴다. 재작년 예산 30억파운드를 넣어 출범시킨 '녹색투자은행(Green Investment Bank)'이 대표적이다. 대서양 편서풍으로 바람이 센 영국은 세계 풍력 발전소의 절반이 몰려 있는 풍력 발전 대국이다. 그런데 건설비가 많이 드는 해상(海上) 풍력 발전은 민간자본만으론 건설이 어렵다.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녹색 투자 전문 공기업을 세웠다. 2010년 총선에서 여야 모두 녹색투자은행 설립을 공약으로 내세워 정치적 갈등도 없었다.

영국에서 이처럼 공기업 세대 교체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 공기업 개혁을 돌아보게 된다. 박근혜 정부는 작년 말부터 공기업 개혁에 '부채 감축' '방만 경영 해소'라는 두 개의 구호를 들고나왔다. 그런데 두 구호 모두 겉핥기에 그치고 있다. 우리 경제에서 지금 시점에 공기업이 할 일이 무엇인지 규정하고, 필요한 공기업은 놔두되 그렇지 않으면 민간에 넘기는 것을 결정하는 '큰 그림 그리기'는 아예 뒷전이다. 변죽만 울리다 보니 공기업 사이에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공기업이 할 일은 각 나라가 추구하는 경제 모델과 경제발전 단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시장주의 전통이 강한 미국·영국에는 공기업이 적지만 그렇지 않은 중국·프랑스·스웨덴 등에는 공기업이 많고 맡은 일도 다양하다. 우리는 경제개발 초기에 민간이 할 일까지 공기업에 맡기다 보니 공기업 과잉이란 지적이 많다. 예컨대 다른 나라에선 토목·건설을 담당하는 토지주택공사(LH) 같은 공룡 공기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박근혜 정부 2기 경제팀은 여러 분야의 의견을 모아 공기업 개혁의 '큰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 국회도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초기엔 공기업 개혁 목소리를 높이다가 후반엔 흐지부지되는 푸닥거리가 이번에도 되풀이될 것이다.


방현철 논설위원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16/20140616039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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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10:24

세월호 참사로 공무원 사회의 썩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를 새삼 알게 됐다. IMF 외환 위기 때 경제 관료 집단의 신용 등급이 평가절하되더니 이번엔 안전을 책임지는 부처의 공무원들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오죽하면 대통령 입에서 '부처 해체'라는 살벌한 말이 나왔을까.

어디 행정부 공무원뿐인가. 헌법재판관 출신 변호사가 문서를 보려고 남의 사무실에 몰래 들어간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다. 대법관을 지낸 변호사가 대법관 시절 재판을 맡았던 사건을 변론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우리 사회 상층부의 병폐가 무질서하게 폭발하는 요즘이다. 마치 팝콘 냄비 같다. 다음번에 어떤 것이 터질지 모른다. 터질 순서는 알 수 없다. 아직 터지지 않은 것도 있다. 어디서 무슨 일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냄비 속 옥수수 알갱이들은 모두가 열(熱)에 노출돼 있어 언젠가는 터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터질 때마다 그 피해가 아래쪽 국민에게 번진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상층부가 과거보다 더 부패했는가. 그렇지는 않다. 국회의원들이 감옥에 가는 걸 보면 호주머니에 넣은 금액이 과거와는 다르다. 수십억원 하던 뇌물 액수가 최근에는 몇 억원 수준으로 줄었다. 몇 천만원 때문에 의원직을 잃은 사람도 적지 않다.

법관이나 관료들도 주변의 감시 눈초리를 의식하는 센서를 가동하며 몸조심하느라 애를 쓴다. 판사는 이해관계로 얽힐 수 있는 친구들과는 골프도 피하려 한다. 저녁 술자리에 함께 어울렸다가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을까 미리 참석자 명단을 확인하는 관료도 적지 않다. 과거엔 좀체 볼 수 없던 광경이다.

그런데도 왜 법관·검사들의 전관예우가 시빗거리가 되고, 고위 공무원들이 낙하산 인사로 한자리를 차지할 때마다 시끄러운 소음이 발생할까. 왜 백성을 미개하다거나 게으르다고 꼬집은 상류층 인사들의 발언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가. 그 이유는 그냥 시대가 달라졌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선진국이 돼가는 과정이어서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해석도 언뜻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지난 20년 사이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다. 취업을 포기하거나 취업에 실패한 청년층이 100만명을 넘을 만큼 두꺼워졌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공식적으로도 591만명에 달한다. 엄마 혼자, 아빠 혼자 자식을 키우는 한 부모 가구는 86만명을 헤아린다. 전에는 판자촌, 쪽방촌의 빈곤층이 고민거리였다면 새로운 빈곤층은 우리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다. 이런 빈곤층 숫자가 늘면서 거대한 하부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 숫자는 1000만명을 쉽게 넘고, 넉넉하게 잡으면 5000만명 가운데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은 월 146만원 안팎이다. 국가가 정한 최저생계비 163만원보다 낮다. 최저 생계점 이하에서 사는 591만명이 다달이 3억원씩 수입을 올리는 전직 법관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는가. 셋집을 구하지 못해 몇 달씩 중개업소를 쫓아다닌 외벌이 엄마가 아들딸을 명문 고교에 넣겠다고 위장 전입한 장관 후보자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는가. 10만명이 넘는 개인 파산자들이, 자녀에게 2억원의 예금을 상속하고서 국회 청문회에 나가는 날 아침에야 마지못해 세금을 내는 고관들을 보며 '뒤늦게라도 세금을 잘 냈다'고 박수를 치겠는가.

이들은 우리 사회의 질서 형성·유지 세력에 저항할 힘도, 정면으로 싸울 힘도 없다. 생각은 자학적(自虐的)일 수밖에 없고, 즉흥적인 반사(反射) 행동에 익숙해져 있다. 이들은 자신의 울분을 풀어줄 정치를 갈망하고 분노를 키우는 정치를 지지한다. 때론 자신들과 같은 언어 코드를 쓰는 정치인이 나타나 '새 정치' 깃발을 흔들면 무한(無限) 신뢰를 보내며 열광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했다.

민심은 종종 변덕스럽고 그 실체를 잡기도 힘들다. 그러나 민심이 정치로 흐르는 길목이 막히면 대중은 흥분한다. 성공한 지도자는 이것저것 혼재(混在)돼 있는 민심의 도가니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유독가스를 적절하게 잘 분출시켜 주고, 때로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민심을 이끌어가는 흡인력을 발휘한다.

이번 정권이 꽉 막혔다는 말을 듣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관피아' 척결, 전관예우 철폐를 약속하고서도 주요 자리에는 '관피아' 슬하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살았거나 전관예우의 혜택 아래서 편안했던 쪽에서 대부분 차출하고 있다. 울분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것도 아니고 같은 언어를 쓰지도 않는다. 민심의 분노 표출에 때맞춰 댓글을 달아주는 민첩함도 없다. 그렇다고 민심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재주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팝콘만 불쑥불쑥 터지는 게 낫다. 팝콘 냄비마저 폭발해 잿더미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송희영 주필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13/2014061303970.html?cs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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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09:46

아이들을 돌봐주실 시부모님을 따라 2년 전 이사해 들어간 아파트 단지 안에는 때마침 혁신학교로 지정된 초등학교가 있었다. 취학 한참 전인 두 아이를 데리고 영문도 모른 채 입주했다가 순식간에 전세금이 1억원 넘게 올라버려, 즐비한 부동산중개업소 앞을 노상 뒷목 잡고 지나다녀야 했던 아파트다.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주변 아파트에서 위장 전입해오는 사람들도 많아 한동안 엘리베이터 안에는 ‘입주민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위장 전입자를 색출해내겠다’는 살벌한 공고문이 수시로 나붙기도 했다. 도대체 혁신학교가 뭐길래!


6ㆍ4 지방선거에서 혁신학교 확대를 공약으로 내건 진보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바야흐로 공교육의 새로운 미래가 펼쳐지리라는 장밋빛 전망들이 만개하고 있다. 전국 17개 시ㆍ도교육청 중 진보교육감을 배출한 13곳 외에 보수 교육감이 당선된 대전시까지 혁신학교 도입을 결정했다니, 진보진영의 이 히트상품이 명실상부 우리 교육의 거부할 수 없는 새 패러다임으로 부상한 듯하다. 전국 초ㆍ중ㆍ고교에 1,000개가 훌쩍 넘는 혁신학교가 들어서게 되면 일단 전세금이 좀 떨어지지 않을까 기대가 되긴 하지만, 나로선 어쩐지 혁신학교 성공 여부에 대해 크게 낙관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다.


두 아이의 놀이터 사교생활을 통해 약소하게나마 구축된 ‘동네 엄마 네트워크’에 따르면, 혁신학교에 대한 학부모들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아이는 너무나 즐겁게 학교를 다니고 있고, 아이가 행복하다니 좋기는 한데, 뭔가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로 요약할 수 있는 그 감정은 거의 명언의 반열에 올라도 좋을 칼럼니스트 김규항의 진단과 일맥상통한다. ‘보수적인 부모는 자녀가 단지 일류대생이 되길 원하고, 진보적인 부모는 자녀가 의식 있는 일류대생이 되기를 바란다.’


“애가 학교에서 배추만 뽑고 있어요. 생태체험도 좋지만 공부를 너무 안 시켜요.” “단원평가 말고는 시험을 전혀 안 보니 학업에 긴장이 없어요.” 혁신학교는 바람직한 교육 모델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입시에 최적화된 교육 시스템은 아니다. ‘공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대안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놓고, 장차 이 학교가 입시에서도 대안이 될 수 있을지 엄마들은 회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교육의 목표가 명확하다. 명문대 입학이다. 그것은 진보적인 엄마든, 보수적인 엄마든, 중도적인 엄마든, 매한가지다. ‘아무것도 안 시키고 자유롭게 키웠어요’라고 육아서적에 쓸 수 있으려면 인과관계가 어찌 됐든 아이가 명문대에 들어갔어야 한다. 내 아이가 공동체의 선에 복무하는 시민사회의 건강한 구성원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도 일단은 자녀가 명문대에 입학하길 원한다. 이것은 탐욕이나 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명문대라고 나와봤자 대단할 것도 없음을 수도 없이 목도하지만, 그마저도 이뤄내지 못하면 생존 가능한 생태계에서 아예 축출되고 마는 세상 아닌가. 천지개벽이 없는 한 이 지독한 입시경쟁은 종식될 수가 없다.


배추의 생장과정을 요약, 설명해주고 암기시키는 데는 몇 분이면 족하다. ‘압축교육’이다. 하지만 직접 배추를 키워보며 자연의 구조를 익히는 데는 일 년이 걸린다. 그 안에 시험문제가 나와버리면 아마도 틀릴 테지만, 이렇게 익힌 지식은 영원히 존재에 각인된다. 문제는 서서히 그러나 깊이 배우고 있는 이 ‘숙지의 시간’을 엄마들이 견뎌낼 수 있느냐이다. 보수언론은 벌써 혁신학교의 학력저하를 주장하며 시비를 걸 태세다. 머잖아 10여년 전 평준화 논란이 되풀이될 테고, ‘명문대생 ○○명 배출’의 플래카드를 내걸지 못하면 혁신학교에 대한 지지도 순식간에 철회될 것이다. 또다시 공동체 교육에서 수월성 교육으로, 한국 교육의 진자운동은 계속될 것이다.


“선생님은 내가 잘 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데, 엄마도 그럴 수 있어?” 입주민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혁신학교에 다니는 5학년짜리 아이의 말이다. 일단 보장된 혁신학교의 수명은 4년. 우리는 이 4년이나마 기다릴 수 있을까. 명문대를 가지 않아도 그럭저럭 살 수 있는 세상에 1㎝라도 다가가기 위해 힘을 모으는, 혁신학교에 걸맞은 ‘혁신엄마’들이 될 수 있을까.


박선영 문화부기자


http://hankookilbo.com/v.aspx?id=655f57aad78341d0b4d113f6948cf8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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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09:42

국방부가 군복무를 대학 학점으로 인정하는 제도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부 대학생들에게는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이다. 하지만 이 제도는 보편적인 보상책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문제가 있다. 공공기관 취업자에게만 혜택이 한정된 군가산점제와 마찬가지로 이 제도 역시 대학생만을 위한 것이며 15%에 달하는 고졸 군복무자와는 사실상 무관하다. 대학생에게도 실질적인 혜택인지 의문이다. 군복무로 학점을 인정받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21개월의 군복무에 대한 보상치고는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일부러 학점을 더 듣고 졸업하는 학생들도 있는 마당에 사실상 9학점을 면제시켜 주는 것이 과연 ‘보상’일지 잘 모르겠다.


근본적으로는 군가산점제에서 학점인정제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에서 나타난 접근방법을 지적하고 싶다. 첫번째는 비용을 들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군복무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보상은 군복무자에게 합당한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월 10만원 남짓한 현재의 군장병 월급은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운 수준이다. 장기적으로는 최저임금 수준은 돼야겠지만 최소한 정치권에서 이미 논의된 대로 30만~50만원 수준까지는 지체없이 인상돼야 한다. 내무반 시설 등 기본적인 병영생활의 의식주 문제에서도 획기적인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 모두 돈 드는 일이다. 의무복무니까 고충이 있어도 감수하라는 식이 아니라 의무복무니까 더욱 최대한의 보상과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 예산을 마련할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 어떤 대안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문제를 군 내부에서 찾지 않고 군 외부에 떠넘기려고 하는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군가산점제나 학점인정제는 공공기관이나 대학 등 군 외부에서 떠맡아야 하는 일이다. 이들 기관들의 충분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시행될 수 없는 사안이다. 예컨대 대학의 총이수학점은 대학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해 설정한 것이고, 수업 외의 활동을 학점으로 인정해 주는 것은 그 활동이 수업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다고 판단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군복무 경험이 과연 일정 학점 취득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이에 대한 대학과 사회의 판단이 선행돼야 한다. 군복무경험이 대학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군복무 경력을 학점이나 점수로 인정하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크다. 군복무가 가치 있는 경험으로 사회의 인정을 받고, 자연스럽게 대학과 사회가 여기에 반응하는 것이 순서다.


군복무로 인한 경력단절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군복무기간을 최소화하고 근무 외 휴식시간을 보장해 자기계발의 시간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학생이라면 원격강좌를 통해 군복무기간 동안 10학점 정도는 학점 취득이 가능하다. 고졸자들도 다양한 자기계발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원격강좌를 수강하는 군장병은 1% 남짓이다. IT강국에서 기술적인 문제가 있을 리 없다. 일과 후 충분한 자기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병영문화가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면 군이 병영문화를 개선해 이 좋은 제도를 잘 시행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까, 아니면 군복무 자체를 학점으로 인정해 달라고 군 외부에 요구해야 할까?


열악한 병영현실을 그대로 놔둔 채 외부기관에 군복무를 가산점이나 학점으로 인정받게 해달라는 건 효과도 미미하지만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여성 장애인 고졸자 등과의 차별과 형평성 문제 등 불필요한 갈등까지 야기하고 있으니 더욱 문제다. 안락한 병영시설에서 좋은 상관·동료들과 함께 지내면서 세상살이도 배우고, 건전하고 민주적인 조직문화도 익히고, 정당한 임금을 받아 저축도 하고, 일과 후에는 취미생활을 하고 공부도 하면서 18개월 이내로 군복무를 한다면 어떨까? 군복무 보상의 열쇠는 여전히 국가와 군대가 쥐고 있다. 충분한 비용을 들일 용의도 없고 병영문화 자체를 획기적으로 바꿀 의지도 없으면서 제시되는 모든 대책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부교수


http://hankookilbo.com/v.aspx?id=eccefc6fa4ab4ab6be2aa1114b38650f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