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역사를 지닌 영국의 대표적 공기업 로열메일(Royal Mail)이 여덟 달 전 민영화됐다. 영국 정부는 작년 10월 이 회사 지분 중 60%를 떼서 민간에 팔았다. 남은 지분 40%는 시장 상황을 봐 가면서 전량 매각한다고 한다. 주식 거래 첫날 주가가 정부 매각 가격보다 40% 가까이 급등해 '헐값 매각' 논란이 일었지만, 재정 상황이 어려운 영국 정부는 현금 20억파운드(약 3조5000억원)를 손에 쥐었다.
로열메일은 1516년 헨리 8세의 개인 우편 부서로 출발했다.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의 얼굴이 새겨진 세계 최초 우표 '페니 블랙'을 발행하는 등 우편 역사의 산 증인이다. 1980년대 40여개 공기업을 민영화했던 대처 전 총리조차 "여왕의 얼굴을 민영화할 준비는 안 됐다"며 로열메일을 민간에 넘기는 건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캐머런 영국 정부는 민영화를 밀어붙였다. 우편 서비스를 공기업이 제공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터넷 업체가 제공하는 이메일이 확산되니 편지는 급감했다. 페덱스·DHL 등 다국적 회사들이 택배 시장을 밀고 들어와 무한 경쟁이 불가피해졌다. 독일·오스트리아·벨기에 등이 이미 우정 민영화에 성공한 것도 영국을 자극했다.
그렇다고 영국이 공기업을 없애기만 하는 건 아니다. 민간이 할 수 없는 일은 재정이 어려워도 공기업을 만들어 맡긴다. 재작년 예산 30억파운드를 넣어 출범시킨 '녹색투자은행(Green Investment Bank)'이 대표적이다. 대서양 편서풍으로 바람이 센 영국은 세계 풍력 발전소의 절반이 몰려 있는 풍력 발전 대국이다. 그런데 건설비가 많이 드는 해상(海上) 풍력 발전은 민간자본만으론 건설이 어렵다. 그 틈을 메우기 위해 녹색 투자 전문 공기업을 세웠다. 2010년 총선에서 여야 모두 녹색투자은행 설립을 공약으로 내세워 정치적 갈등도 없었다.
영국에서 이처럼 공기업 세대 교체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나라 공기업 개혁을 돌아보게 된다. 박근혜 정부는 작년 말부터 공기업 개혁에 '부채 감축' '방만 경영 해소'라는 두 개의 구호를 들고나왔다. 그런데 두 구호 모두 겉핥기에 그치고 있다. 우리 경제에서 지금 시점에 공기업이 할 일이 무엇인지 규정하고, 필요한 공기업은 놔두되 그렇지 않으면 민간에 넘기는 것을 결정하는 '큰 그림 그리기'는 아예 뒷전이다. 변죽만 울리다 보니 공기업 사이에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이 팽배하다.
공기업이 할 일은 각 나라가 추구하는 경제 모델과 경제발전 단계에 따라 다를 것이다. 시장주의 전통이 강한 미국·영국에는 공기업이 적지만 그렇지 않은 중국·프랑스·스웨덴 등에는 공기업이 많고 맡은 일도 다양하다. 우리는 경제개발 초기에 민간이 할 일까지 공기업에 맡기다 보니 공기업 과잉이란 지적이 많다. 예컨대 다른 나라에선 토목·건설을 담당하는 토지주택공사(LH) 같은 공룡 공기업은 찾아보기 힘들다.
박근혜 정부 2기 경제팀은 여러 분야의 의견을 모아 공기업 개혁의 '큰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 국회도 끌어들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초기엔 공기업 개혁 목소리를 높이다가 후반엔 흐지부지되는 푸닥거리가 이번에도 되풀이될 것이다.
방현철 논설위원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6/16/20140616039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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