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공무원 사회의 썩은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관료들의 무능과 부패를 새삼 알게 됐다. IMF 외환 위기 때 경제 관료 집단의 신용 등급이 평가절하되더니 이번엔 안전을 책임지는 부처의 공무원들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오죽하면 대통령 입에서 '부처 해체'라는 살벌한 말이 나왔을까.
어디 행정부 공무원뿐인가. 헌법재판관 출신 변호사가 문서를 보려고 남의 사무실에 몰래 들어간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됐다. 대법관을 지낸 변호사가 대법관 시절 재판을 맡았던 사건을 변론하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우리 사회 상층부의 병폐가 무질서하게 폭발하는 요즘이다. 마치 팝콘 냄비 같다. 다음번에 어떤 것이 터질지 모른다. 터질 순서는 알 수 없다. 아직 터지지 않은 것도 있다. 어디서 무슨 일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냄비 속 옥수수 알갱이들은 모두가 열(熱)에 노출돼 있어 언젠가는 터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터질 때마다 그 피해가 아래쪽 국민에게 번진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상층부가 과거보다 더 부패했는가. 그렇지는 않다. 국회의원들이 감옥에 가는 걸 보면 호주머니에 넣은 금액이 과거와는 다르다. 수십억원 하던 뇌물 액수가 최근에는 몇 억원 수준으로 줄었다. 몇 천만원 때문에 의원직을 잃은 사람도 적지 않다.
법관이나 관료들도 주변의 감시 눈초리를 의식하는 센서를 가동하며 몸조심하느라 애를 쓴다. 판사는 이해관계로 얽힐 수 있는 친구들과는 골프도 피하려 한다. 저녁 술자리에 함께 어울렸다가 구설수에 휘말리지 않을까 미리 참석자 명단을 확인하는 관료도 적지 않다. 과거엔 좀체 볼 수 없던 광경이다.
그런데도 왜 법관·검사들의 전관예우가 시빗거리가 되고, 고위 공무원들이 낙하산 인사로 한자리를 차지할 때마다 시끄러운 소음이 발생할까. 왜 백성을 미개하다거나 게으르다고 꼬집은 상류층 인사들의 발언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가. 그 이유는 그냥 시대가 달라졌다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선진국이 돼가는 과정이어서 진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해석도 언뜻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는 지난 20년 사이 새로운 계층이 등장했다. 취업을 포기하거나 취업에 실패한 청년층이 100만명을 넘을 만큼 두꺼워졌다. 비정규직 근로자는 공식적으로도 591만명에 달한다. 엄마 혼자, 아빠 혼자 자식을 키우는 한 부모 가구는 86만명을 헤아린다. 전에는 판자촌, 쪽방촌의 빈곤층이 고민거리였다면 새로운 빈곤층은 우리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있다. 이런 빈곤층 숫자가 늘면서 거대한 하부 계층을 형성하고 있다. 그 숫자는 1000만명을 쉽게 넘고, 넉넉하게 잡으면 5000만명 가운데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비정규직의 평균 임금은 월 146만원 안팎이다. 국가가 정한 최저생계비 163만원보다 낮다. 최저 생계점 이하에서 사는 591만명이 다달이 3억원씩 수입을 올리는 전직 법관의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겠는가. 셋집을 구하지 못해 몇 달씩 중개업소를 쫓아다닌 외벌이 엄마가 아들딸을 명문 고교에 넣겠다고 위장 전입한 장관 후보자의 행동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겠는가. 10만명이 넘는 개인 파산자들이, 자녀에게 2억원의 예금을 상속하고서 국회 청문회에 나가는 날 아침에야 마지못해 세금을 내는 고관들을 보며 '뒤늦게라도 세금을 잘 냈다'고 박수를 치겠는가.
이들은 우리 사회의 질서 형성·유지 세력에 저항할 힘도, 정면으로 싸울 힘도 없다. 생각은 자학적(自虐的)일 수밖에 없고, 즉흥적인 반사(反射) 행동에 익숙해져 있다. 이들은 자신의 울분을 풀어줄 정치를 갈망하고 분노를 키우는 정치를 지지한다. 때론 자신들과 같은 언어 코드를 쓰는 정치인이 나타나 '새 정치' 깃발을 흔들면 무한(無限) 신뢰를 보내며 열광하는 것을 우리는 목격했다.
민심은 종종 변덕스럽고 그 실체를 잡기도 힘들다. 그러나 민심이 정치로 흐르는 길목이 막히면 대중은 흥분한다. 성공한 지도자는 이것저것 혼재(混在)돼 있는 민심의 도가니 안에서 부글부글 끓는 유독가스를 적절하게 잘 분출시켜 주고, 때로는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민심을 이끌어가는 흡인력을 발휘한다.
이번 정권이 꽉 막혔다는 말을 듣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관피아' 척결, 전관예우 철폐를 약속하고서도 주요 자리에는 '관피아' 슬하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살았거나 전관예우의 혜택 아래서 편안했던 쪽에서 대부분 차출하고 있다. 울분을 시원하게 풀어주는 것도 아니고 같은 언어를 쓰지도 않는다. 민심의 분노 표출에 때맞춰 댓글을 달아주는 민첩함도 없다. 그렇다고 민심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재주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팝콘만 불쑥불쑥 터지는 게 낫다. 팝콘 냄비마저 폭발해 잿더미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송희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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