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시간에 늦었다. 급히 대문을 열고 나오는데 옆집 할머니가 엘리베이터 앞에 서 계셨다. 할머니가 우리집 쪽을 돌아본 그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아, 잠시만요!”라는 외침이 무색하게 할머니는 엘리베이터 문을 닫고 내려가 버리셨다. 벌써 두 번째 있는 일. 집에 오는 길에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어떤 아저씨가 스마트폰으로 운동경기 중계를 보고 있었다. 소리를 스피커폰으로 해두어서 나를 비롯한 버스 승객 모두는 강제로 그 시끄럽게 웅웅대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유명한 연예인을 길거리에서 만난 대학생들의 반응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와!” 하고 놀라더니 “헐~ 대박!”을 외치며 무작정 스마트폰 카메라부터 연예인의 얼굴에 들이대고보기 시작했다.
옆집에 살아서 서로 얼굴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할머니는 왜 그러셨을까? 혼자 타고 가는 대중교통도 아닌데 아저씨는 왜 그러셨을까? 아무리 연예인이라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무런 인사도 없이 그저 어떤 대상을 다루듯 학생들은 왜 그랬을까? 처음엔 왜 이렇게 무례할까 생각했다. 그런데 차츰 사람을 배려할 수 있는 ‘공감’의 개념 자체를 배우지 못해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쪽으로 생각이 옮아갔다. 공감이 없으면 애초에 마음에 ‘너’가 없으니까 무례일 것도 없다.
지난해에 케냐에 갔다가 우연히 비정부기구(NGO)가 지원하고 있는 방과후교실 수업에 참관할 기회를 얻게 됐다. 초등학생들 수업이었는데, 그 수업의 그날 주제는 ‘정직’(Honesty)과 ‘온전함’(Integrity)이었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그 두 단어를 각각 나름대로 정의해 보게 했다. 학생들의 발표가 끝없이 이어졌다. 45분 내내 수업은 이것이 전부였다. 두 개의 단어로 45분 수업이 다 갔다. 무척 인상 깊었다. 내가 받아온 수업이란, 늘 ‘정직해야 해요’로 시작해서 ‘이러이러한 게 정직한 행동이에요. 이렇게 행동해요’를 암기한 뒤 어떤 것이 정직한 행동인지 문제집에서 연습한 후 시험에서 만점을 받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45분을 딱 두 개 단어로 보내는 것, 지나치게 더딘 수업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선생님이 일방적으로 내려준 정의와 행동강령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배운다. 남이 내린 정의를 강요받는 것이 아니므로 이 정의는 나의 행동을 결정하고 책임질 힘을 갖는다. 두 단어만 공부하는 것 같지만 실은 이 시간 동안 아이들은 자기 삶을 더 넓고 깊게 살펴보게 된다. 가족과 자기의 관계, 친구와 자기의 관계 등등. 천천히 아이들의 마음에 인간이 들어온다. ‘너’가 보이기 시작하고 너와 ‘공감’하게 된다. 행동은 당연히 일일이 지시해주지 않아도 어떤 상황에서든 자연스레 타인을 배려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입시 위주의 우리 교육은 도덕 시험에서는 100점을 맞지만 실제 생활에선 전혀 도덕적이지도 타인을 고려하지도 못하는 기이한 인간을 만들어냈다. 남이 내려준 정의는 내 것이 아니니 책임질 필요 없고, 단순 암기는 전체를 보는 눈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마음에 들어와 있지 못한 사람의 눈에 ‘너’가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공감 불능’이 만연해 있다.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란 외침이 가득하다. 아이들의 더딘 걸음을 기꺼이 기다려주는 천천한 교육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4009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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