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14. 09:41

세월호 참사 후, 우리 사회는 ‘해답’ 찾기에 분주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후 멸종했다고 믿었던 대형참사라는 이름의 괴물이 다시 살아나 활개를 치는 모습에 지식인 사회는 바쁘게 그 원인을 찾아다녔다. 한국일보도 ‘세월호를 잊지 말자’라는 제하의 시리즈 기사를 준비하면서 과연 지식인들이 생각하는 세월호 참사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조금은 냉정하게 물었다. 이에 지난 5월 12일부터 8회에 걸쳐 인문학자와 작가들로부터 장문의 글을 받아 ‘전 근대사회의 망령’이라 부를만한, 참사의 근원을 따져봤다.


신문 등 매스컴들이 내놓은 진단들은 어쩌면 눈에 보이는 근인(近因)들을 언급하는 데 불과했을지 모른다. “안전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거나 “경직된 관료사회가 재난대응의 발목을 잡았다”와 같은 분석들로 일원화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기고로 받아본 학자들의 대답은 이와 달랐다. 이들은 세월호의 침몰, 그리고 이후 드러난 우리 사회의 흉측하기 짝이 없는 상처들이 다름 아닌 ‘비뚤어진 근대화’의 칼날에 의해 생긴 것들이라고 입을 모았다. 잘못된 길을 걸어온 근대화 과정으로 인해 인간의 존엄이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참사가 빚어졌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 가운데 독일 카셀 대학에서 사회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덕영 교수는 “단순히 공무원의 복지부동, 선원들의 무책임성, 자본의 탐욕만으로는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며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 전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통해 이해해야 하는 복합적인 현상이다”고 진단했다. 그는 전분야에서, 그리고 오래도록 뜸을 들여가며 완성했어야 할 근대화가 우리 사회에선 경제 성장에 집착해 진행됐고 그래서 세계 경제규모 10대 강국이 21세기에도 전근대적인 참사를 겪게 됐다는 해석을 내놨다. 농로를 포장하고 수출 1억 달러(1974년)를 달성하는 것만이 근대화의 전부라며 복지, 정치, 노동 등 여러 분야의 근대화를 소홀히 한 탓에 현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머릿속에는 알게 모르게 ‘오직 성장’이라는 치우친 이데올로기가 자리했고 인간 자체에 대한 존귀함은 뒷전으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비뚤어진 근대화의 결과물을 비단 세월호 사고와 같은 거대한 참상을 통해서만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근대화의 태중에서 나온 자식들은 사실 곳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 주거 공간이라는 속성은 거의 무시된 채 오직 재테크 수단이란 정체성을 앞세워 하우스푸어를 양산하며 서식지를 넓혀간 아파트는 인간보다 성장을 중요시한 근대화가 낳은 또 다른 자식이 아닐까. 김덕영 교수는 책 환원근대에서 인구밀도가 높지만 아파트가 많지 않은 네덜란드의 예를 들며 ‘아파트 공화국’ 한국의 현실이 잘못된 근대화의 유산임을 지적했다.


경제적 가치로 모든 가치를 가리는, 비뚤어진 근대화의 하이라이트는 이른바 ‘공장사회’를 지탱하는 공교육이다. 고속 성장을 근대화의 전부로 인식한 기성 세대와 과거 정권 탓에 우리 아이들은 인성 교육에서 멀어져 특목고와 사교육의 현장에서 화석연료처럼 불타고 있는지 모른다. 김두식 경북대 로스쿨 교수는 “아이들이 재능과 열정을 너무 일찍 소진해버리는 ‘번 아웃(burn out)’에 내몰리고 있다”며 “이로 인해 오히려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안타까워했다. 잘 팔리는 문화 상품을 만들기 위한 원자재로 청소년을 다루는 K팝 업계, 몸뚱이를 불리는 데 혈안인 일부 종교단체 등 ‘탈(脫) 빈곤’을 핑계로 한 비뚤어진 근대화는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넘어섰지만 “행복하다”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돈보다 앞서는 가치들을 포기한 비뚤어진 근대화 때문에 불행한 이들에게 30여 년 전 미국의 경제학자 티보르 스키토프스키는 “항상 많은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배가 침몰해도 발 빠르게 사람을 구하지 않는 비정함, 지나친 사교육에 젊음이 소진되어 버린 아이들. 2014년 한국이 짊어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는 사실 물질적인 무언가가 부족해서 빚어진 것들이 아니다.



양홍주 경제부 차장대우


http://hankookilbo.com/v.aspx?id=e324ea3b63b3472cb8d0ab6c451ea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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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09:39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기는 것이 내 일이다. 만나는 이들 대부분은 ‘싸우는’ 사람들. 마을에 들어서는 송전탑 때문에 싸우고, 하루아침에 문을 닫아버린 회사를 상대로 싸우고, 새파란 나이에 꼬꾸라진 자식의 죽음을 밝혀내기 위해 싸우고, 십 년을 일해도 6개월짜리 취업계약을 해야 하는 소모품 인생 때문에 싸운다.

싸우다 말한다. “세상이 이럴 줄은 몰랐어요.” 그들은 자신들 사정 한 줄 전해주지 않는 주류언론에, 용역을 사 자신들을 내동댕이칠 수 있는 기업에, 그걸 멀뚱히 지켜보는 경찰들에 당황한다. 가슴을 친다. 반복되어 절망한다.

그리고 말한다. “내가 죽어야 해결이 되려나 봐요.”

피가 나게 두드려도 무너지지 않는 거대 벽을 앞에 둔 사람의 자조인 것을 알면서도, 나는 놀라곤 한다. 죽으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다니. 절망 속에서도 온전히 버리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믿음이 슬프도록 놀랍다.

오랜 싸움을 한 이들, 그 과정에서 동료 한둘쯤은 저세상으로 떠나보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개죽음”. 애꿎은 목숨만 사라졌다. 변한 것은 없다. ‘죽어봤자’ 해결되지 않음을 보아온 경험적 결론이다.

밀양의 이치우 어른이 송전탑 건설에 반대해 일흔넷 삶에 기름을 부었을 때 경찰은 볏단을 태우다 몸에 불이 옮겨붙었다고 발표했다. 유서가 없으면 가정불화, 생활고, 우울증, 비리 연루 같은 이유가 등장하여 죽음을 희석하기 마련이다.

또박또박 유서를 써 남겨봤자, 크게 달라질 것도 없다. 얼마 전 “나를 바칩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그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에 경찰이 들이닥쳤다. 고인은 자신이 속한 노동조합의 싸움이 승리할 때까지 장례를 미뤄달라 했지만, 경찰은 시신을 외딴 병원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이를 막아선 고인의 어머니가 최루액을 맞았다.

비슷한 시기, 그의 회장님이 응급실에 실려 갔다. 회장님의 위태로운 건강이 속보로 떴다. 언론은 회장님의 병세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이미 사망했지만 회장님의 일가가 승계 문제로 인해 죽음을 밝히지 않는다는 추측조차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다.

회장님과 협력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닮은 구석이 없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만이 공평하다는 것은, 못난 삶을 향한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300여명의 목숨이 끽소리도 못하고 바다에 잠겼을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우리의 죽음이 별것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렴풋 느꼈다. 바다에 잠긴 목숨 사이에도 급이 있다. 정규직 노동자와 계약직·아르바이트 노동자, 생전의 지위에 따라 부여되는 관심과 보상이 달랐다.

어찌 죽음마저 이처럼 대우가 다른가 한탄한다면, 그래서 눈살이 찌푸려진다면 방법은 하나이다. 남은 사람들이 죽음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것.

죽음은 기억될 때 가치를 지닌다. 밀양 이치우 어른의 영정을 50여일간 지킨 마을주민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 이름 세 글자도 몰랐을 것이다. 한진중공업 김진숙씨가 85호 크레인에 올라가지 않았다면, 우리는 김주익이라는 사람이 그곳에서 목을 맨 사실을 잊었을 것이다.

죽음을 기억하자. 그것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더 이상은 ‘개죽음’을 만들지 않는 길이다. 그들의 마지막 부탁을, 그들의 삶을 잊지 말자. 그 전에 우리 누구도 죽게 하지 말자.


희정 기록노동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887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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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09:39

요즘 우리 사회 공통의 관심사는 안전이다. 국제사회에서도 안전은 주요 화두로도 떠올랐다. 세계 곳곳에서 안전을 위협하는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우리의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터키의 탄광 참사 등 위험이 일상화되고 있다. 이제 위험은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로 국가, 기업, 사회가 책임지고 관리해 나가야 한다.

지난 19일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국민안전을 위한 대책을 내놓았다. 경제계는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바로 다음날 국가안전 인프라 구축을 위해 국민 성금을 모으겠다고 발 벗고 나섰다. 대한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경영자총협회 등 경제5단체가 안전 대한민국 구축을 위해 나서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모은 성금은 다양한 용도로 쓰인다고 한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 지원, 안전경영 선포식, 노후설비 등 안전시설 점검, 재난대응 시스템 구축, 전문가 양성, 산업별 유형별 재난발생 대응 매뉴얼 제정 보급, 선진국 모범사례 발굴, 관련 기술 연구 촉진 등이다.

경제계의 이런 움직임은 안전한 일터를 만드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데 기업 안전사고의 악순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더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지나친 성과지상주의, 효율 추구의 경제로는 제아무리 안전에 투자를 많이 한들 안전경영을 담보하기 어렵다. 저비용과 고효율로 생산성을 극대화하려는 기업들은 직원의 임금을 낮추고, 인원수를 줄이거나, 사내 하청을 늘리기도 한다. 세월호의 선사인 청해진해운도 이런 기업이었다.

이윤에 눈먼 청해진해운은 직원들을 쥐어짰다. 세월호에서 배를 움직이는 선박직 15명 가운데 9명이 비정규직이었다. 급여도 업계 평균에 턱없이 못 미쳤다. 당연히 선원들의 이직률도 높았다. 이처럼 기본적인 욕구조차 제대로 채워지지 못하는 조직의 직원들이 책임의식과 공동체의식 등을 갖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불안정한 고용은 직무에 대한 책임감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나쁜 일자리가 우리 사회의 안전에 악영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우리 경제의 프레임을 바꾸는 걸로 접근해야 한다. 기업의 안전경영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서는 경제원리를 사람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인간회복의 경제학>의 진노 나오히코 도쿄대 교수는 2000년대 초부터 사람 중심의 경제를 강조해 왔다. 그는 대표적인 모델로 스웨덴의 사례를 꼽았다. 스웨덴은 공업 중심에서 지식 중심의 사회로 옮겨가면서 사람을 가장 중요한 경제 요소로 삼았다. 의료, 교육, 육아 등 사회서비스를 총동원해 사람을 키우고 돕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도록 했다. 투자의 의미에서의 복지로, 일터에서도 일과 복지를 연계한 워크페어(workfare)를 적극 추진했다. 스웨덴은 높은 복지지출 규모에도 양호한 성장세와 높은 국가경쟁력을 이어오고 있다.

12년간 핀란드 대통령을 지낸 타르야 할로넨 대통령도 이런 사람 중심의 경제가 기업과 사회가 함께 갈 수 있는 길임을 강조하고 실행될 수 있도록 힘을 쏟았다. 할로넨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만난 기업인들이 사업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 달라고 한 요청에 이렇게 답했다. “핀란드를 사업하기 가장 적합한 국가로 만들겠다고 하는데, 저는 사업가에게 가장 좋은 게 모두에게 좋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경제가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 집착하기보다 멀리 내다보고 사람을 중심에 둘 때 비로소 우리는 안전사회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다.

이현숙 한겨레경제연구소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887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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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09:37

긴 것은 기고 아닌 것은 아니다 말하게 하소서. 눈치 보느라 눈이 한쪽으로 몰려 붙은 도다리로 살아온 시간을 뉘우치게 하소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다시는 입 밖에 꺼내지 않게 하소서. 절실하게 사랑해야 할 것들과 죽도록 미워해야 할 것들을 구별할 수 있게 하소서. 길이 없다고 두리번거리지 말고 길이 되어 걸어가게 하시고, 내가 내 운명의 주인임을 아프게 새기며 살아가게 하소서.

바람 부는 날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게 내버려두시고, 어두워지면 우주의 어둠이 몸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끼게 하소서. 평수 넓은 아파트에 산다고 해서, 배기량 많은 승용차를 탄다고 해서 적게 먹고 적게 싸는 칠점무당벌레의 삶보다 우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소서. 나의 밥그릇이 소중한 만큼 남의 밥그릇도 소중하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소서.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울음이 되게 하소서. 우리의 울음소리로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하소서. 남의 노래는 안 듣고 제가 부를 노래의 목록이나 뒤적거리는 노래방에서는 노래하지 않게 하소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게 하시고, 나뭇잎이 튕겨 올리는 햇빛 한 오라기도 감격하는 눈으로 바라보게 하소서. 당신으로 하여 내 마음속 물관부에 늘 사시사철 서늘한 물이 흐르게 하소서. 당신과 나 사이의 아득하고 아득한 거리를 자로 재지 않게 하시고, 당신을 그리워하는 미음을 저울로 달지 않게 하소서.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67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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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09:36

최근에 주변 사람들이 아프거나 안 하던 일을 한다. 누구는 식욕을 잃어 힘들어하고, 누구는 회사 문제에 집안일도 겹쳐 우울증을 앓는다. 조울증 치료가 호전돼 가던 누군가는 며칠 전 다시 입원했고, 누군가는 길을 떠났다. 각자의 사정이 있지만, 세상일이 서로 무관하지만은 않을 거다. 회사를 그만두려고 하는 한 친구는 회사에서 새로 인수한 건설회사로 파견 갔는데 거기 속사정을 보니 세월호 사건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멀쩡하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떠올랐다. 그는 자기 나라 일본이 그렇게 싫었단다. 미야자키는 <이웃집 토토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을 만들었고 지난해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세계적인 거장이다. 그가 그랬다. 일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일본의 고전 <겐지 이야기>도 그렇게 싫었단다. 그는 1941년생이다. “중국과 한국, 동남아 각 나라들을 향한 죄의식에 전율하며 내 존재 자체도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정적으로 좌익이 됐지만, 헌신해야 할 인민을 발견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 외국에서 일장기를 보면 혐오감이 드는 일본인이었다.”(<미야자키 하야오 - 출발점>)

그러던 와중에, 조엽수림 문화를 알게 됐다고 했다. 조엽수림은 히말라야 산맥에서 중국 양쯔강 이남, 대만, 일본으로 이어지는 상록활엽수림인데, 일본 신석기 시대에 이 조엽수림에서 풍요롭고 전쟁이 없고, 종교라면 소박한 애니미즘 정도에 인간의 개성이 존중되는 조몬 문화가 퍼졌다는 연구 결과를 접하고서 이내 조엽수림 문화에 빠져들었다.

<이웃집 토토로>엔 조엽수림의 정령들이 나오는데, 그는 숲을 어떻게 그릴지 무척 고민했다고 했다. 유럽의 근대화된 느낌의 숲이 아니라 울창하면서도 전근대적이고 뭔가 나올 것처럼 무서운 숲, 그 무섭다는 생각이 그 안에 있을지 모르는 것에 대한 존경, 혹은 존중의 마음으로 이어지길 기대하면서 그렸다고 했다. 아이들이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서 숲에 들어가 달리거나 도토리를 줍기를 바라면서 수종을 연구하고 숲을 디자인했단다.

“어린 시절이라는 것은 어른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일 때만 맛볼 수 있는 것들을 맛보기 위해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5분의 체험은 어른의 1년 체험을 이겨요. … 그 시기에 사회 전체가 어떻게 지혜를 짜서 아이들이 얼마나 무럭무럭 잘 자라 살아갈 수 있게 하느냐가 중요하죠.”

영화기자를 8년 넘게 했으니 영화를 꽤 많이 본 편일 거다. 하지만 보면서 눈물 흘린 영화는 두세 편인데, 그중 하나가 <이웃집 토토로>였다. 시골 숲에 사는 가족의 엄마가 병에 걸려 읍내 먼 병원에 입원했다. 어린 자매가 엄마 걱정을 한다. 숲의 정령 토토로가 나타난다. 무심한 표정으로 고양이 버스를 부른다. 자매가 고양이 버스를 타고 엄마의 병원으로 달려간다. 별 장면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오나 싶었는데, 거기엔 자기 나라가 싫었던 사람이 다음 세대를 향해 쏟은 정성과 배려가 숨어 있었던 거였다.

두서없이 떠오른 영화 대사 하나를 적어본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주인공 가족의 아버지가 막내아들을 잃은 뒤 교회에서 하는 설교의 한 대목이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하는 이가 도움을 청하는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좀처럼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지 못하며, 우리가 준 게 불필요한 것이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충분한 이해가 없더라도 충분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임범 대중문화평론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659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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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09:24

1992년 보스니아 내전 때 무슬림을 학살한 세르비아계 정교도들은 대개 이웃 마을 사람들이었다. “어린 시절 함께 놀던 사람이었고, 추수 때면 팔을 걷고 도와줬던 이웃”이었다. 그들의 종교·민족적 광기에 불을 붙인 건 정치꾼들이 퍼뜨린 유언비어였다. ‘무슬림들이 정교도들을 방화하고 살해하려 한다!’ 불안과 공포에서 출발한 것이 종국엔, ‘총구를 머리에 들이대고 아들과 아버지에게 엄마와 딸에게 패륜을 강요’하다가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게 학살된 무슬림과 가톨릭계는 25만여명.

광기에 불을 붙인 이런 유언비어는 나치의 유대인, 집시 학살을 정당화하고, 터키 정부의 아르메니아인 인종청소를 합리화했으며, 캄보디아를 킬링필드로 만들었고, 르완다의 종족 갈등과 인종청소를 야기했다. 권력욕에 눈먼 정치집단은 그렇게 공포와 적개심을 자극해 학살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정치권력을 유지하거나 확대하려 했다. 한국인? 그들은 피해자이기도 했고, 가해자이기도 했다.

1923년 9월 간토(관동)대지진이 도쿄 일원을 덮치자, 일본인들은 ‘조센진’들을 보이는 대로 학살했다. 이들을 자극한 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 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 당시 일본인 자경단에 의해 검, 죽창 등으로 희생당한 조선인은 무려 6천여명. 유언비어는 일본 정치집단에서 비롯됐다. 내무성은 각 지역 경찰서에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고 지시했고, 언론이 이를 유포했다. 당시 일본 정치집단은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 불안과 혼란을 수습하는 데 희생양이 필요했다.

6·25 전쟁기 한국인의 광기도 이에 못지않았다. 인민군이 남침하자, 남쪽의 군과 경찰은 전국적으로 빨갱이 청소에 나서 10만~20만명의 보도연맹 회원들을 학살했다. 인민군 점령기,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군경 및 우익단체 회원과 그 가족들을 살해했다. 다시 국군이 진주하면서, 부역자로 지목된 이들이 처형당했다. 군경이 주도했다지만, 이웃끼리 피의 학살을 번갈아 자행했다.

2일 박근혜 대통령은 유언비어가 세월호 유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사회 혼란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참사 이후 많은 선동적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그러나 치명적인 것은 정권 집단에서 나왔다. 새누리당 최고위원인 한기호씨는 4월20일 “북괴의 지령에 놀아나는 좌파 단체와 좌파 사이버 테러리스트들이 정부 전복 작전을 전개할 것이다. 국가 안보 조직은 근원부터 발본 색출해서 제거하고, 민간 안보 그룹은 단호히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간토대지진 때 내무성 지침을 연상케 하는 말이었다. 그날 새누리당 국회의원인 권은희씨는 실제 유족인 한 여인을 “유가족인 척하는 선동꾼 여자의 동영상”이라며 글과 동영상을 올렸다. 이를 전후해 정부는 북한의 4차 핵실험 첩보를 부단히 공개하며 불쏘시개를 제공했다. 지만원씨는 22일 “박 대통령을 쫓아내기 위한 빨갱이들의 ‘제2의 5·18 반란’에 대비해야 한다. … 시체장사 한두번 당해봤나. 세월호 참사는 이를 위한 불쏘시개”라고 떠벌렸다.

너무 저질이었던지, 한동안 관변 유언비어는 뜸했다. 그 물꼬를 튼 것은 기이하게도 박 대통령의 2일 발언이었다. 이튿날 새누리당 서울시장 예비후보였던 정미홍씨는 “자원봉사자라며 정부의 구조 노력을 폄하하고, 유가족들의 분노를 더욱 키우는 유언비어를 대량으로 확산시키고…” “판단력 없는 청소년들을 이용해 반정부, 반대한민국적 사고부터 가르치는 세력도 나타났다” “이들은 결국 수많은 종북 성향 지자체장들을 당선시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튿날 그는 ‘박근혜 퇴진 시위에 청소년들 일당 6만원에 동원’이라는 막장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끔찍한 선동이었다. 분쟁 시기, 반인륜적 인종청소를 불러온 유언비어들과 다르지 않았다. 나치의 괴벨스 문법을 고스란히 따른 것이었다. “거짓말은 처음엔 부정되고, 다음엔 의심받지만, 거듭하면 결국 믿게 된다.” 그러나 ‘권력욕에 눈 먼’ 자들의 무책임한 유언비어가 거대한 반인륜 학살의 업으로 돌아온다. 권력이 그렇게 좋은가.

곽병찬 대기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5943.html



Posted by 겟업
2014. 9. 14. 09:22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이신중'씨와 '김모험'씨라고 해두자.

이신중씨는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완벽하게 자료를 준비하고, 업무 처리는 꼼꼼해서 실수를 찾아볼 수 없다. 일을 할 때 그의 우선순위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김모험씨는 사뭇 다르다. 그의 프레젠테이션 자료에는 종종 구체적 수치나 데이터가 부족하다. 하지만 회의 때마다 가장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사람이 바로 그다. 그는 새로운 도전이나 기회를 보면 일단 뛰어들고 본다.

컬럼비아대 심리학 교수이자 동기과학센터 소장인 토리 히긴스(사진) 교수는 이신중씨와 김모험씨를 각각 '안정 지향적(prevention focus)' '성취 지향적(promotion focus)' 인간으로 분류했다. 그는 최근에 낸 책 '어떻게 의욕을 끌어낼 것인가(Focus: Use Different Ways of Seeing the World for Success and Influence)'에서 자신과 상대가 두 부류 중 어떤 형이냐에 따라 인생과 업무의 모든 전략을 어떻게 달리 짜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위클리비즈는 최근 뉴욕 컬럼비아대 연구실에서 히긴스 교수를 만났다.


①안정 지향적인 사람과 성취 지향적인 사람에게 광고를 한다면 어떻게 달리해야 하나?

"러닝머신을 판다고 하자. 성취 지향적인 사람에겐 이렇게 해야 한다. '운동 효과가 높은 유산소운동 기구! 왜 이 기구로 운동을 해야 하느냐고요? 심혈관계 운동을 통해 신체 건강을 높이고, 멋진 몸매를 가꿀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광고 문구는 안정 지향적인 사람을 설득하기엔 부족하다. 그런 사람에겐 이렇게 말해야 한다. '최적 기능을 갖춘 궁극의 유산소운동 기구! 왜 이 기구로 운동을 해야 하느냐고요? 충격을 완화한 스테퍼로 걸을 때 발바닥에 닿는 충격이 줄어들고, 특허를 받은 다중 경사면 설정이 걸음걸이를 정밀하게 보정해 줍니다."


②사람은 누구나 성취 지향과 안정 지향 속성을 함께 갖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안정 지향적인 사람인데 성취 지향이 더 필요한 상황에 부닥칠 땐 어떻게 해야 하나?

"책의 핵심이 되는 질문이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각자의 역할을 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누릴 때 또는 사회생활을 할 때 각각 다른 동기가 필요하다. 성취 지향적 목적을 설정하고 그 방향으로 가려면 위험을 줄이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인 안정 지향적인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를 들어 '나의 의무는 무엇인가?' '이걸 못 해낼 경우엔 어떤 위험이 따르는가?' 같은 생각은 잠시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뤄야 한다."


③상황에 따라 성취 지향성이 중요할 때와 안정 지향성이 필요할 때가 있다고 했는데,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


"당신이 지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이기는 것인지 아니면 지지 않는 것, 즉 실패하지 않는 것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만약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면 성취 지향성이 더 강하게 요구되고, 지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할 경우엔 안정 지향성이 필요하다. 스포츠를 예로 든다면 농구처럼 높은 득점을 해야 하는 스포츠는 무조건 공을 골대에 던져 보는 성취 지향성이 중요하다. 반면 피겨 스케이팅이나 체조는 실수를 하지 않는 것, 안정 지향성이 더 중요하다. 만약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이 더 정확함을 요구하고, 더 분석적으로 되고, 안전성을 생각해야 하는 일이라면 안정 지향 동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항공사 같으면 특히 비행기를 안전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안정 지향 동기가 강하게 작동한다. 굳이 이렇게 구분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자신이 진정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신이 목표로 삼는 것에 따라서 다른 동기를 부여하고, 다른 행동 양식을 선택한다. 즉 '내가 어떻게 하면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가 가장 큰 목표가 될 경우엔 성취 지향적 동기가, '나는 절대로 지금 실패해선 안 돼'라는 것이 우선순위일 경우엔 안정 지향적인 동기가 우리를 지배한다."

상황 별 적합한 성격

④인간관계와 협상 측면에선 어떤 사람이 유리한가

"성취 지향이 강한 사람들은 항상 사물의 좋은 점을 바라본다. 그것이 인간관계 형성에 좋은 쪽으로 작용하곤 한다. 안정 지향성이 강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맺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큰 비중을 둔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 지향성이 강한 사람들은 관계에 대한 헌신이 강하다. 협상을 할 경우에 안정 지향적인 사람들은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 항상 상대방과 내가 윈윈(win-win)할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반면 성취 지향성이 강한 사람은 윈윈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자신이 가장 커다란 파이를 차지하는 것이다. 단기적인 관계에서 보자면 성취 지향성이 더 큰 결과물을 얻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점이 크다고 볼 수 있지만, 장기적인 관계 유지가 필요한 협상에서는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 없다."


⑤만약 한 팀에 두 부류 사람이 섞여 있는 경우 갈등을 줄이고 팀워크를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만약 성취 지향이 강한 사람이 '우리가 우선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혁신적이고, 참신한 것, 전에 없던 것을 만드는 거야. 그 밖의 것은 중요하지 않아'라고 주장하고, 반면 안정 지향이 강한 사람이 '그렇지 않아. 우리가 우선 해야 하는 것은 사람들이 믿고 쓸 수 있는 제품, 품질이 탁월하고 안전한 제품을 만드는 거'라고 주장하면서 서로가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경우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의견을 절충하고 한 목표를 향해 나간다면 서로가 훌륭한 보완책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대단히 우수하고 안전하면서도 창의력이 큰 제품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각자가 잘하는 부분을 인정하면서 역할을 분담할 수 있다. 안정 지향이 강한 사람은 실수를 줄이고 질이 뛰어난 제품을 만드는 데 치중하고, 성취 지향이 강한 사람은 더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부분에 집중하면서 말이다. 단, 공통 비전이 확실히 설정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업무 환경에서 그런 확실한 비전이 서 있을 경우엔 사람들은 그 비전을 위해서 때로는 안정 지향적인 전략을 쓰고, 때로는 성취 지향적인 전략을 번갈아 가며 사용할 수 있다."


⑥성취 지향과 안정 지향은 외향성·내향성과 비슷한 것 아닌가

"맞다. 서로 연관성이 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예를 들어 성취 동기를 이루기 위해선 굳이 외향성을 따르지 않더라도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할 수가 있다. 내가 성취 동기가 강한 사람이고, 현재 가지고 있는 것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무언가를 성취하고자 한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사람들과 어울리고, 인맥을 넓힐 필요는 없다. 현재 위치보다 더 나은 자리로 가기 위해 특정 시험을 준비한다거나, 무언가를 배운다거나 할 수도 있다. 외향성은 그저 성취 동기를 현실화하는 데 필요한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한마디로 외향성과 내향성은 우리를 지배하는 동기를 뒷받침해 주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고 전술이다."


⑦"한국과 일본은 세계적으로 안정 지향 동기가 강한 나라로 손꼽힌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들이 어떻게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나

"일본이 한 것은 그 전까지 세상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것을 독창적으로 만들어냈다기보다는 이미 있던 것을 '더 잘'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대단히 혁신적이라거나 위험을 수반하는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일본은 더 신뢰할 만한 것, 더 예측 가능한 것을 만들어 냈다. 이것은 성취 동기가 아닌 안정 지향 동기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발전이라는 것이 항상 성취 지향적 동기와 함께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인텔이다. 인텔의 창업자인 앤드루 그로브의 책이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였는데 제목처럼 책 전체가 안정 지향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을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순 없다. 그로브는 인텔의 운영자였고, 당시 인텔은 전체 컴퓨터 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는 굳이 그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써야 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은 안정 지향적 동기에 추진력(locomotion)이 결합된 사례다. 추진력이라는 것은 당신이 현재 있는 위치에 안주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습성이다. 안정 지향적 동기가 강한 사람이 강한 추진력을 가질 수도 있다. 그로브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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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09:22

1990년대 후반 경기도 일산 신도시에 살 때 서울 광화문행 버스 정류장은 출근 시간대에 늘 전쟁터였다. 자리에 앉느냐 못 앉느냐에, 50분가량 걸리는 출근 시간의 휴식 여부가 결정됐기 때문이다. 또 광화문 버스정류장에서 일산행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우르르 달려가는 장면도 일상사였다. 비나 눈이 올 때는 더 처절하게 탑승 경쟁을 벌였다.

이제 그런 모습은 추억의 한 장면이다. 광화문 정류장에서 승객들은 긴 줄을 이루고, 스마트폰을 보면서 탑승 차례를 기다린다. 서울 시내 버스정류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모습은 외국인들을 감탄케 한다. 무질서의 상징이었던 버스정류장이 '매력(魅力) 한국'의 상징으로 변신한 것은 서울시가 2006년부터 설치한 위성항법장치(GPS)와 무선통신 기술을 이용한 버스 도착 안내 단말기(BIT) 덕분이다. BIT 기능이 스마트폰의 앱으로 확장되면서 정류장 질서는 완벽하게 뿌리를 내렸다.

흔히 사회적 습관의 변화는 정치 지도자나 사회운동가의 솔선수범이나 캠페인이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사회적 습관의 극적 변화는 대부분 신기술과 그 기술을 잘 활용하는 아이디어가 만들어냈다. 은행의 창구 대기표, 전철 승강장의 스크린도어, 승용차 블랙박스 등 그런 사례를 숱하게 찾을 수 있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동시에 역사적인 도전 과제를 던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고, 각계각층의 리더들은 근본적 의식 개혁을 입을 모아 말한다. 국민 대다수도 자신이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을 토로하면서 '진짜 한국 사회가 변할 때'라고 반성한다. 하지만 재발(再發) 방지책은 대부분 의식 변화와 같이 추상적 가치이거나 새로운 규제론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대형 참사를 반복해서 일으키는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실천 가능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쁜 습관이 개인과 조직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찰스 두히그(Charles Duhigg)의 저서 '습관의 힘'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두히그는 의료 사고, 항공기 사고 등 대형 참사 이면에는 반드시 사고를 부르는 '반복 행동(습관)'이 조직 안에 자리 잡고 있고, 그런 습관과 관련된 보상 시스템을 바꿔야만 문제를 근원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서울 버스정류장 혁신 사례는 두히그의 분석과 잘 맞아떨어진다. 이를테면 이제 서울 시내에서 과속하거나 승객을 정원보다 많이 태우는 버스를 보기 어렵다. 무리하게 버스를 타려는 승객도 거의 볼 수 없다. BIT를 포함한 서울시 교통 시스템(TOPIS)이 예측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보상을 실현하자 승객과 운전기사가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선택한 것이다.

BIT 사례에서 봤듯이 입으로 주창하는 의식 개혁이나 제도 개선보다 첨단 디지털 기술의 합리적 사용이 새로운 사회적 습관을 만드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그런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이기도 하다. 두히그는 "훌륭한 리더는 위기를 활용해 조직의 습관을 개조한다"고 말했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대상이나 방법론이 모호한 '국가 개조'가 아니라 첨단 기술을 이용한 '습관 개조'다.



우병현 조선경제i 총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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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9. 14. 09:20

日, 공산 혁명가 인질 사건 겪고 列島 개조론 펼쳐 5년 후 G7 진입
美, 기술·안전 낙후 드러낸 참사… 타이태닉 후 허점 메워가며 성장
세월호는 '未來 한국' 가를 계기 修理·投資 않고 남 탓만 해서야



2차 세계대전 직후 태어난 일본의 베이비붐 세대는 일본을 경제 대국으로 일으킨 주역이다. 그들에게 몹시 큰 충격을 준 사건 가운데 하나가 아사마 산장(山莊) 인질극이다. 그건 전쟁터였다. 일본 공산주의 테러 집단(연합적군파) 소속 5명이 고급 휴양지 가루이자와 아사마 산장에서 관리인 등을 인질로 잡고 219시간 동안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1972년 2월이었다.

열흘간의 총격전은 막 보급된 컬러 TV를 통해 생중계됐다. 시청률이 최고 98.2%를 찍었다. 1억 일본인 거의 전원이 화면 앞에 있었다는 말이다. 범인들은 체포됐지만 3명이 사망하고 27명이 부상했다. 소니가 세계에서 최첨단 TV를 내놓고, 일본 1인당 GDP(구매력 기준)는 1만1434달러로 벌써 유럽 선진국 평균치를 앞지르던 시절이었다.

어느 일본인 교수는 이렇게 회고했다. "잘사는 나라가 됐는데 왜 공산혁명을 하겠다는 젊은이들이 무장 인질극을 일으켰는지, 그런 의문이 지금도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인질범들이 체포된 후 그들이 배신자 동료를 12명이나 살해한 것을 보며 일본인들은 또 한 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본인들 마음속에 감춰진 야만성을 탄식하는 글이 쏟아졌다. 자기 비하(卑下)가 지식인 사회의 유행이었다.

미국도 강한 나라로 떠오르는 과정에서 똑같은 대형 쇼크를 겪는다. 타이태닉호가 침몰하던 1912년 무렵 미국의 1인당 GDP는 5300달러 수준으로 영국보다 높았다. 그러나 미국 JP모건이 거느린 해운 회사는 영국의 경쟁 회사를 이기지 못했다. 대형 여객선을 건조할 기술도 없었다. 존 피어폰트 모건 회장은 영국의 경쟁 상대를 누르기 위해 타이태닉 건조를 영국에 발주하고 선박 운영도 영국인들에게 맡겼다.

우리에게 타이태닉은 영웅적인 선장(船長)과 애틋하게 꾸며진 러브스토리로 포장돼 있다. 그러나 그 뒤에 숨겨진 얘기는 세월호와 그다지 다를 게 없다. 구명보트 숫자는 적었다. 짙은 안개를 뚫고 나간 세월호처럼 타이태닉도 빙하 출현 경고를 무시하고 출항을 강행했다. 선장은 처녀 항해를 기념하려는 듯 경고를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망루에는 주변을 감시할 망원경 하나 없었다. 타이태닉의 복원력과 설계 구조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출항 전 보험 가입을 거부한 보험사도 있었다.

희생자는 1513명이었다. 모건 회장은 승객의 안전을 무시하면서도 자기 전용 객실에 무도회장을 따로 만들고 전용 담배 보관함까지 설치했다. 이런 호사(豪奢)에 대한 비난이 빗발칠 수밖에 없었다. 그해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모건그룹 전체가 도마 위에 올랐다. 모건 회장은 국회 청문회에 끌려나가 짓궂은 봉변을 당해야 했다.

아사마 산장 사건을 전후해 일본은 '경제동물(Economic animal)'이라는 경멸이 국제사회에서 퍼지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가이드 깃발을 따라 루브르박물관을 단체 관광하는 풍경은 유럽 언론의 조롱거리가 되곤 했다.

그러나 아사마의 충격 이후 다섯 달 만에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라는 정치인이 '일본 열도 개조론'을 들고나와 정권을 잡았다. 부동산 값은 뛰었지만 다나카의 솔직성, 불도저처럼 정책을 밀고 나가는 실행력에 온 국민이 열광했다. 소니는 워크맨을 개발했고, 도요타자동차는 GM과 합작 공장을 세웠다. 안에서 서로 다투기보다는 세계로 나간 것이다. 5년 후 일본은 강대국(强大國)들의 모임인 G7 회담에 동양의 대표 선수로 참석했다. 일본인들은 아사마 사건에서 맛본 모멸감을 딛고 일어선 것이다.

타이태닉의 충격에 빠졌던 시절 미국에는 중앙은행(FRB)도 없었다.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매기는 상속·증여세도 없던 미완성(未完成) 국가였다. 그 당시 미국은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못하다며 미국인 스스로를 깔보는 인식이 수많은 문학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흥 부자들은 파티에서 서로 프랑스어 실력을 과시하느라 안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은 국가를 완성해가는 길에서 불쑥불쑥 떠오르는 허점을 메우고 경제력을 키우며 그런 장벽을 뛰어넘었다. 타이태닉의 상처도 인간 중시의 시민의식이 싹트면서 그렇게 아물어갔다.

세월호 참변이나 서울 지하철 사고는 국제 경쟁에 노출되지 못한 부문에서 발생했다. 두 회사 모두 국내 시장에서만 사업을 해온 우물 안 촌뜨기 회사들이고, 사고 관련자들도 대부분 나라 밖에서 외국 경쟁자와 싸워본 적이 없는 내수형(內需型) 인간들이다. 우리가 K팝, 갤럭시폰을 자랑하며 이만하면 국제화됐다고 하지만 아직도 나라 구석구석에는 이처럼 뒤처진 분야가 적지 않다.

잇단 사고를 겪으며 우리의 안전 불감증을 한탄할 수도 있고, 모든 비극은 네 탓이라고 남에게 손가락질하며 서로 다툴 수도 있다. 고장 난 곳을 고치고 뒤진 곳에 더 투자해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충격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나라가 될지 말지는 우리가 선택하기 나름이다.



송희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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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09:15

미국 사람들은 자전거 헬멧(안전모)을 정말 열심히 챙겨 쓴다. 한적한 주택가와 공원에서 자전거를 탈 때도 헬멧은 거의 필수다. 어린이들은 반드시 헬멧을 착용하도록 규정한 자치단체도 많다. 역시 선진국이라 시민들이 철저한 안전의식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대서양 건너 네덜란드에 오면 상황이 180도 다르다. 암스테르담 거리에선 헬멧 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린이도 거의 맨머리로 자전거를 탄다.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자전거 천국으로 불리는 이 나라의 자전거 이용자 0.1%만이 헬멧을 쓴다고 한다.

그럼 네덜란드의 교통 문화는 미국보다 후진적인가. 아니다. 네덜란드의 인구비례 교통사고 사망률은 미국의 3분의 1 수준이다. 단지 이 나라엔 자전거 헬멧 착용이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견해가 많을 뿐이다.

실제로 자전거 헬멧은 머리의 움직임과 반사신경을 둔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 또 ‘헬멧을 썼으니 괜찮겠지’ 하는 생각에 운전자 본인뿐 아니라 옆을 지나가는 자동차 운전자들도 주의를 덜 기울이게 된다. 이는 영국 배스대 실험으로 입증됐다. 무엇보다 헬멧 사용을 의무화하면 시민들이 자전거 이용을 불편해한다. 그래서 이용률이 감소한다. 자전거 수가 줄어들고 자동차 수가 늘어날수록 자전거 타기는 그만큼 더 위험해진다. 요컨대 자전거 헬멧은 사고 시 부상 위험을 줄여주지만 사고 자체가 일어날 확률을 높일 수 있다는 얘기다.

헬멧 착용을 강제하는 법은 각 나라 사정에 따라 효과적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네덜란드가 자전거 천국이 된 이유는 헬멧 때문이 아니다. 자전거 위주의 인프라 구축과 교통문화 정착, 그리고 청소년에 대한 자전거 운전법 교육 덕분이다. 이처럼 어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는 눈에 보이는 현상보다 문제의 원인에 집중하는 편이 더 확실하다.

필자는 한국의 ‘온라인 게임 셧다운제’ 논란을 보며 네덜란드의 자전거 정책이 생각났다. 지난달 헌법재판소는 밤 12시 이후 청소년의 인터넷 게임 이용을 금지하는 셧다운제에 합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셧다운제는 심야에 청소년의 인터넷 게임 접속을 막아서 게임중독을 줄이자는 발상으로 2011년 말 시행됐다. 하지만 어른들의 주민번호를 도용해 게임 하는 청소년이 늘어났기 때문에 얼마나 효과가 있는지에 대해선 누구도 확신하지 못한다. 청소년들의 하루 평균 게임시간은 오히려 늘었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12시 전까진 마음껏 게임을 해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을 학생과 부모에게 심어준 것으로 추측된다.

암스테르담의 자전거 안전 해법은 헬멧 사용 강제가 아니라 좋은 인프라와 운전 교육이었다. 게임중독의 해법 역시 강제적 규제보다는 중독의 폐해를 청소년 스스로 깨치도록 도와주고 다양한 대체 여가문화를 조성해 주는 게 핵심이 되길 바란다.

조진서 미래전략연구소 기



http://news.donga.com/3/all/20140513/63426357/1



Posted by 겟업
2014. 9. 14. 09:09

20년 전이었습니다. 저는 영국인의 운전매너에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이 횡단보도 앞에만 서면 차들이 모두 멈췄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차량 안의 운전자를 쳐다봅니다. 눈이 마주치면 서로 빙긋이 웃습니다. 늘 운전자와 보행자 사이에는 그런 교감이 흘렀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사람이 있든 없든 그들은 신호를 지켰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영국 신사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네.’ 영국인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부럽다. 어떻게 이렇게 교통법규를 잘 지키나. 영국인은 참 신사적이다.” 그랬더니 친구가 답했습니다. “영국의 횡단보도에 얼마나 많은 카메라가 숨어있는지 아느냐? 그런 신호를 어기다가 걸리면 범칙금이 얼마인지 아느냐?” 신사적인 운전 매너, 그 밑에 무서운 범칙금이 깔려 있더군요.

 며칠 전에 100주년기념교회 이재철 목사를 만났습니다. 세월호 이야기를 하다가 영국인의 운전매너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목사는 “그게 다가 아니다”고 말하더군요. 그는 스위스에 3년간 머문 적이 있습니다. “큰 도로에서 신호등이 빨간불인데 브레이크를 안 밟고 선을 넘어갔다. 신호가 완전히 바뀌기 전에 일찍 출발했다. 속도를 위반했다. 도처에 카메라가 깔려 있다. 그때마다 무시무시한 범칙금이 날아온다. 당시 제일 싼 범칙금이 20만원 정도였다. 제한 속도가 시속 40㎞인 주택가에서 시속 60㎞로 달리다 카메라에 찍힌 사람이 있었다. 그는 총 100만원을 내고 1개월 운전면허 정지를 당하더라.”

 그 말을 듣고서 제가 말했습니다. “스위스도 교통범칙금이 센 나라군요.” 이 목사는 손을 내저었습니다. 그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스위스 사람들은 그걸 살인 행위라고 본다. 주택가 골목에 아무도 없었다. 다른 차도 없고 보행자도 없었다. 그런데도 제한속도를 어기면 살인 행위라고 보더라.” 

 고개가 갸우뚱해지더군요. 그건 지나치게 엄격한 ‘규제와 율법의 사회’가 아닐까. 이어지는 이 목사의 설명에 저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더라.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아니라 딱 한 사람 말이다. 그 하나의 생명을 전부처럼 여기더라.” 

 오랫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 말입니다. 적지에 있는 일병 하나 구하려고 많은 군인이 투입되고, 그들 중 많은 이가 죽었습니다. 아무리 손가락을 꼽으며 더하기·빼기를 해봐도 답이 안 나왔습니다. ‘하나 구하려고 여럿이 죽었는데, 그게 뭐야? 결국 손해잖아.’ 그게 저의 셈법이었습니다. 아니, 우리 대한민국의 셈법일 겁니다.

 생각해 봅니다. 만약 30만원, 50만원, 100만원짜리 주차위반 스티커를 받으면 기분이 어떨까. 속이 뒤집어질 겁니다. 5만원짜리 스티커가 날아와도 마음이 그렇게 쓰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인과 영국인, 또 다른 유럽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거기에는 ‘하나의 생명’을 지키자는 공감대가 있는 겁니다. 그 ‘하나의 생명’이 뭐냐고요? 바로 나의 생명이자 너의 생명입니다. 내 자식의 생명, 가족의 생명, 이웃의 생명, 모두의 생명입니다. 그걸 지키기 위해, 그걸 존중하기 위해, 그걸 살리기 위해 30만원짜리, 50만원짜리 스티커를 받아들인 겁니다. 그들은 아무도 없는 주택가 골목에서 시속 60㎞로 달린 차를 ‘살인 행위’라고 봤으니까요.

 이 목사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자문했습니다. ‘좁쌀 하나에 수미산이 들어간다. 하나의 생명을 지킬 때 모든 생명이 지켜진다. 국가는 그럴 때 개조된다.’ 나도 몰랐던 나의 살인 행위. 그걸 고치기 위해 우리는 얼마짜리 스티커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4705529&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4. 9. 14. 09:08

‘(아이들이) 안전한 나라’. 세월호가 던진 화두 하나에 대한민국이 통째로 앓고 있습니다. 끝도 없는 반성과 사과, 슬픔과 분노가 이어진 지 어느새 한 달이 다 돼갑니다. 그새 세월호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습니다. 그 단단하던 레이저 눈빛의 대통령도 예외가 아닙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4일 진도 팽목항에 또 내려가 이번엔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취임 후 몇 차례 사과를 했지만 대통령이 자신의 책임을 직접 얘기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틀 뒤엔 부처님 오신 날 불사(佛事)에 참석해 “국민의 안전·생명을 지킬 수 있도록 국가 정책·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국가 개조를 또 말한 겁니다. 하지만 의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안전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요.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비용입니다. 지금은 가슴만큼 머리도 뜨거울 때라 ‘국가 예산을 안전에 올인하자’는 격한 주장에도 박수가 터집니다. 하지만 뜨거운 머리로 평생 살 수는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머리는 차가워져야 합니다. 항공·선박·철도부터 놀이기구까지 모든 결함과 위험을 늘 샅샅이 관리·감독하려면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듭니다. 물론 부정·부패만 일소해도 그런 비용을 감당하고 남을 것이란 지적도 있습니다. 복지 재원을 줄여 안전에 쓰자는 주장도 나옵니다. 그게 정답일까요.

아예 발상을 확 바꾸는 건 어떨까요. 안전을 비용이 아니라 투자로 접근하는 겁니다. 안전은 종종 대박상품이 되기도 했습니다. 일회용 반창고 밴드에이드는 존슨앤드존슨의 구매 담당 얼 딕슨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요리 때 자주 손을 다치는 부인의 안전을 위해 만든 게 히트했습니다. 150년 전 엘리샤 오티스는 줄이 끊어져도 안전한 장치로 엘리베이터의 역사를 새로 썼습니다. 오티스는 대박이 나기 전 빚 3000달러를 남기고 죽었지만 그가 세운 오티스 엘리베이터는 지금도 세계 1등 기업입니다.

조지 웨스팅하우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1869년 압축 공기를 이용한 철도 제동장치를 만들어 냅니다. 당시로선 혁명 같았습니다. 그때까지 기차가 서려면 객차마다 브레이크맨이 달라붙어 기관차에 맞춰 제동을 해야 했습니다. 안 그러면 관성에 의해 객차가 기관차를 들이받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시속 20~30㎞의 기차가 서는 데 1.5㎞, 지금 지하철 역 한 구간 정도 거리가 필요했습니다. 걸핏하면 충돌·탈선 사고가 났지만 당시 열차회사나 정부는 브레이크 개선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안전은 돈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죠.

웨스팅하우스는 달랐습니다. 그는 생명을 좌우하는 제품은 완벽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첫 작품이 성공했지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안전한 브레이크를 꿈꿨습니다. 그는 마침내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두 개의 브레이크 시스템을 만들어 냅니다. 그는 이를 ‘페일 세이프(Fail safe:이중 안전장치)’ 시스템이라 불렀습니다. 미국 의회는 1893년 이 시스템의 장착을 의무화합니다.

고장은 나도 사고·재난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시스템, 페일 세이프는 이후 안전공학의 기본이 됐습니다. 이상이 생기면 무조건 빨간색이 깜빡이도록 설계된 신호등, 주차(P)에 두지 않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 자동차, 유통기간이 지나면 아예 계산이 안 되는 삼각김밥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나라 구석구석을 이런 이중·다중 안전시스템으로 무장하는 겁니다. 이게 나라 경쟁력이 되도록 하는 겁니다. 아주 새로운 것도 아닙니다. 플랜트나 원전은 공장·발전소뿐 아니라 안전 운용 노하우까지 수출합니다. 넓은 의미의 안전 시스템 수출입니다. 안전 먹거리, 안전 탈것, 안전 관광… 안전은 그 자체로 국가 주력 상품이요 경쟁력이 될 수 있습니다.

또 되돌아봅니다. 세월호에 페일 세이프 시스템이 작동했다면 어땠을까요. 청해진해운은 규정 중량을 지켰을 겁니다. 평형수를 빼낼 수도 없었을 겁니다. 만재흘수선을 속이는 일도 못했을 겁니다. 그랬다면, 우리는 생때같은 목숨 300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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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08:43

수업 시간에도 사이렌이 울렸습니다. ‘애~애~앵!’ 초등학생들은 일사불란하게 교실을 뛰쳐나갔습니다. 복도와 계단을 달려서 운동장 귀퉁이에 줄지어 쪼그려 앉았습니다. 양손으로 두 귀와 두 눈을 막고 입을 벌렸습니다. 적기의 폭격 때는 그렇게 해야 고막이 터지는 걸 막는다고 했습니다. 앞줄, 옆줄 반듯하게 앉아야 했습니다. 약간만 튀어나와도 스피커에서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3학년2반 앞에서 일곱째 줄 똑바로 앉아!” 

 철 좀 드니까 생각이 바뀌더군요. 그게 냉전체제, 군사정부,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냉소적입니다. ‘재난 대비’ ‘비상 훈련’이란 말을 들으면 콧방귀부터 나옵니다. 저도 모르게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비상 훈련 매뉴얼=귀찮고, 형식적이고, 거추장스럽다’는 강한 선입관이 생겼습니다. 

 어른이 된 뒤에도 그랬습니다. 비행기 승무원이 앞에서 구명조끼에 바람 넣는 법을 설명합니다. 늘 한눈을 팔았습니다. 동작과 순서를 제대로 따라가 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다 비상구 앞에 앉을 때면 널찍한 자리만 좋아했습니다. 승무원이 설명하는 비상시 행동 요령은 한 귀로 흘렸습니다. 영화관에서도 그랬습니다. 화재 발생 시 비상구 통로가 스크린에 그려집니다. 저는 하품을 했습니다. “왜 이렇게 광고가 많지?” 투덜거렸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다들 말합니다. “어른들 말을 들은 학생은 죽고, 듣지 않은 학생은 살아남았다.”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어른들 말을 듣는다고 다 죽는 건 아닐 텐데. 어른도 어른 나름이겠지. 그럼 대체 어떤 어른을 말하는 걸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그게 저 같은 어른이더군요. 형식적인 매뉴얼을 만드는 어른, 거기에 코웃음 치는 어른, 그래서 매뉴얼을 무시하는 어른. 그게 바로 저였습니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도 배가 뒤집어졌을 때 매뉴얼을 외면했습니다. 해경도 그랬습니다. 수색구조 매뉴얼을 무시했습니다. ‘사고 발생 시 선박을 잘 아는 사람을 현장에 급파하라’는 수칙을 거꾸로 뒤집었습니다. 누구보다 배를 잘 아는 선원들을 뭍으로 먼저 옮겼습니다. 신원 파악을 먼저 하라는 매뉴얼도 놓쳤습니다. 해경은 배가 가라앉은 다음에야 선원들을 다시 바다로 데려갔습니다. 

 어른들은 매뉴얼을 뭉갰습니다. 학생들은 달랐습니다. 배가 뒤집어진 상황에서도 “선실에 대기하라”는 방송을 침착하게 따랐습니다. 베이징 특파원이 그러더군요. ‘세월호 참사’ 이후 중국 교육계가 한국 교육을 연구하고 있답니다. 배가 침몰하는데 학생들이 어떻게 선내 방송대로 실내에 머물러 있었느냐는 겁니다. 중국 학생들이라면 유리창 깨고 다들 바다로 뛰어들었을 거랍니다. 

 짚어 봅니다. 중국 학생들은 왜 바다로 뛰어들까. 그 사회의 매뉴얼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쩌면 저희 세대도 그랬을 겁니다. 유리창을 깨고 바다로 뛰어들었을지 모릅니다. 저희는 매뉴얼을 믿지 않는 세대니까요. 그런데 우리의 아이들은 다르더군요. 그들은 매뉴얼을 믿었습니다. 어른들이 만들고도 어른들이 믿지 못하는 매뉴얼을 아이들은 믿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죄스럽습니다. 이토록 큰 참사를 당하고서야 깨닫습니다. 매뉴얼도 ‘그 시대의 초상(肖像)’이더군요. 권위주의 시대의 매뉴얼은 권위적이었습니다. 그게 싫었던 저는 ‘이 시대의 매뉴얼’까지 무시했습니다. 저는 뉘우칩니다. 잘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두 번 다시 매뉴얼을 무시하지 말자. 실질적인 매뉴얼, 그래서 존중받는 매뉴얼. “이걸 따라가야 우리가 살 수 있어!”라고 외칠 수 있는 매뉴얼. 그걸 꾸려서 나 같은 어른부터 지키자고 다짐합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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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08:39

스페인은 711년부터 1492년까지 거의 800년간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이슬람은 타 종교에 관용적이어서 모두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평화롭게 공존하였다. 스페인의 가톨릭교도들은 국토수복 전쟁, 즉 레콩키스타도르 전쟁을 700년 넘게 계속했고, 이교도인 이슬람과의 전쟁을 치른다 하여 십자군원정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었다. 정말 끈질겼던 이 전쟁에서 승리한 가톨릭교도들은 이교도에 매우 배타적이고 적대적이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무슬림과 유대인들을 국외로 추방한 것이었다. 스페인 문화 속에는 반(反)이슬람, 반유대인 정서가 짙게 녹아있지만 너무 오래 생활화되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스페인 북부에 카스트리요 마타후디오스(Castrillo Matajud<00ED>os)란 인구 64명의 작은 마을이 있다. ‘마타후디오스’는 ‘유대인을 죽여라’(mata=죽여라, jud<00ED>os=유대인)란 뜻인데 이와 같은 반유대, 반이슬람적 어휘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이런 정서는 16세기부터 3세기 동안이나 이교도를 잔혹하게 박해했던 종교재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도 스페인 사람들은 ‘마타후디오스’란 음료를 마시는데 이는 포도주에 레몬주스를 섞어 단숨에 들이켜는 부활절 전통 음료로도 유명하다. 스페인의 보호성자는 야곱, 즉 이아고로 성 야곱은 스페인말로 ‘산티아고’가 된다. 그런데 ‘산티아고 마타후디오스’(성 야곱이시여, 유대인을 죽이소서)라는 도시가 과거 스페인 식민지였던 멕시코에도, 미국 오하이오주에도, 쿠바에도 버젓이 존재한다.

 이 이름을 바꾸자고 이곳 시장이 나섰다. ‘마타=죽이자’의 a를 o로 고치면 ‘모타후디오스’ 즉 ‘유대인의 언덕’이 되니 마을 문장에도 들어가는 ‘유대의 별’에도 맞는다는 것이고, 아니면 이 마을에서 태어난 유명한 작곡가의 이름으로 바꾸자는 의견도 있다. 이 마을 주민들은 오는 5월 26일 투표로 마을 이름 변경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왜 갑자기 수백 년간 사용해온 마을 이름을 바꾸자고 하는지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관습화되고 미처 깨닫지 못한 작은 것이라도 ‘올바르지 않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것’이라면 바꾸어야 하는 것이 글로벌 시대의 정신이다. 글로벌화란 인류 보편적인 상식과 규범을 받아들이고 이에 어긋나는 우리의 것을 여기에 적응시켜 범세계적인 호환성을 획득해 나가는 것이지, 자기의 것을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아주 사소하지만 우리들만의 독선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없는지 둘러보아야 한다. 


이원복 덕성여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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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14. 08:39

얼마 전 <대한민국 부모>라는 책을 읽는데 엄마의 외도를 다룬 부분이 있었다. 일상의 대부분을 남편 내조와 자식 교육에 할애하는 중산층 엄마가 외도를 가족 붕괴의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가족 유지에 필요한 삶의 활력소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외도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통해서까지 유지하고자 하는 그 가족이라는 게 대체 뭔가? 도대체 가족이라는 게 왜 그렇게까지 중요한가?

곰곰이 생각해보던 나는 가족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요즘의 한국 사회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굉장히 모순적인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쪽에서는, 가족은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티브이 예능은 딸바보 아빠와 훈남 아들에게 장악되었다. 내가 만나본 많은 젊은이들이 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모와 친밀하게 지낸다. 거의 친구나 애인 사이 같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대학입시, 취업, 연애, 결혼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영향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가족은 파탄 난 지 오래다. 살인에 이르는 가족 내 폭력이나 친족 내 성폭행 뉴스는 너무 잦아서 이제는 그 뉴스가 그 뉴스처럼 느껴질 정도다. 한국의 이혼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국 가운데서도 상위를 차지한다. 사회면에서는 요즘 사람들은 결혼에도 출산에도 회의적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런데 이 모순적인 풍경을 좀더 찬찬히 들여다보면, 다시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은 정말로 끔찍할 정도로 모든 것이 가족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마치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가족, 혹은 다수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연합체 같다. 가족은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한국인을 지배한다. 그건 그저 특수한 관계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언어이자 사상이다. 실제로 우리는 친족 간의 호칭을 타인들 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그것이 권장된다. 아버지 같은, 딸 같은 식의 수사는 어떤 상황에서나 카드게임의 조커처럼 기능한다. 위기에 처한 자식을 구하기 위해 범죄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은 영화나 텔레비전에서 크게 환영받는다. 이상한 것은, 이렇게 가족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다루는 사회 속 현실의 가족은 살인과 폭력, 성폭행 등 각종 범죄의 온상인 경우가 드물지 않으며, 많은 사람이 가족으로 인한 크고 작은 상처에 괴로워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오로지 가족 외에 아무것도 지키고 발전시키지 않은 우리 사회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실재하며, 악화하는 현실의 가족의 문제에 대단히 무력하다. 그저 망가진 현실 가족 위에 가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무한히 덮어씌울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가족을 둘러싼 극단적 판타지와 숨막히는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건지도 모른다. 점진적인 부의 증가에 기반을 둔 한국의 중산층 가족 모델은 시효를 다했다. 더 이상 그런 식의 가족을 만들 희망이 없음을 깨달은 젊은이들은 결혼을 미루고, 출산을 기피한다. 이렇게 현실에서 가족이 멈추어 섰는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그것만을 바라본다. 우리가 가진, 상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가족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외도와 같은 극단적 처방을 통해서라도 망가진 가족을 끌어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것은, 그 바깥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피가 부르는 고통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가족이 아닌 다른 관계와 세계에 대한 상상이 필요하다.


김사과 작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324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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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3:12

“내가 아는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The only good Indian is a dead Indian).”

19세기 후반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미국의 백인들은 서부 개척에 방해되는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소탕하고 있었다. 코만치족의 추장 토와시는 이때 부족원들을 이끌고 투항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그가 “나 토와시, 좋은 인디언”이라며 선처를 호소했을 때 토벌작전을 지휘하던 필립 셰리든 장군은 “내가 본 좋은 인디언은 다 죽어버렸어”라고 대꾸했다. 이 말이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 뿐’이란 말로 바뀌어 인구에 떠돌았다. 

지난달 20일 박근혜 대통령이 ‘끝장 토론회’에서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는 우리 경제의 ‘암 덩어리’지만 복지, 환경, 개인정보 보호같이 꼭 필요한 규제들도 있다. 좋은 규제는 개선하고 나쁜 규제는 뿌리 뽑겠다”라고 밝히는 걸 보면서 엉뚱하게 미국 인디언 멸망사의 한 토막이 떠올랐다. 박 대통령은 이날 좋은 규제와 나쁜 규제에 대해 설명했지만 전체적인 무게는 ‘나쁜 규제의 혁파’에 실렸다. 

다음 날부터 모든 정부부처는 규제개혁 총력전에 돌입했다. 한국의 인터넷쇼핑몰에 ‘천송이 코트’를 주문하려는 중국인들을 가로막는 공인인증서 규제, 트럭을 개조해 소자본으로 음식장사를 해보려는 청년들을 방해하는 푸드트럭 관련 규제 등 토론회에서 지적된 사안들은 벌써 개선 방안과 일정이 나왔다. ‘좋은 규제는 폐지된 규제뿐’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각 분야의 규제들이 사회의 발전을 해치는 절대악으로 떠올랐다. 

공인인증서 규제, 푸드트럭 규제는 누가 봐도 폐지돼야 할 나쁜 규제다. 하지만 조금만 다른 부문으로 가면 선악의 경계는 금세 흐릿해진다. 끝장 토론회에서 여성가족부 장관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설전을 불렀던 ‘셧다운제’는 게임산업을 활성화하고 관련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선 폐지돼야 할 나쁜 규제다. 하지만 자녀의 게임중독을 두려워하는 부모들에게 이 규제는 고마운 규제다. 

문제는 선악의 중간지대에 있는 이런 규제들이 일자리 창출, 기업투자 확대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다는 점이다. 카지노 관련 규제도 이런 종류다. ‘도덕 국가’ 싱가포르에서 카지노는 40여 년간 금단의 비즈니스였다. 하지만 2006년 취임한 리셴룽(李顯龍) 총리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도박은 절대 허용 못한다”는 아버지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지노 허용에 박차를 가했다. 활력을 잃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거센 반대에도 2010년 내국인도 출입할 수 있는 카지노 두 곳을 포함한 복합리조트의 문을 열었다. 결과는 5만 개의 일자리, 10%가 넘는 성장률이었다.

시대에 따라 규제의 선악은 바뀌기도 한다.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규제로 자주 꼽히는 영국의 ‘적기 조례(Red flag act)’는 증기 자동차가 마차 타는 사람이나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도록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차에 앞장서 달리게 하는 내용이었다. 1865년 제정 당시엔 도로 사정 등을 고려한 세계 최초의 선진적 도로교통법이었다. 하지만 차의 속도를 사람이 달리는 속도 이하로 제한한 이 규제로 영국의 자동차산업은 독일, 프랑스에 영원히 뒤처졌다. 


규제의 선악을 판가름하는 일은 기병대가 좋은 인디언, 나쁜 인디언을 생사로 가르는 것만큼 분명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각종 규제가 현재와 미래에 끼칠 손익을 읽어내는 눈을 갖춰야 한다. 선악의 경계에 있고, 반발이 예상돼도 국가의 미래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개혁을 추진하는 지도자의 의지가 결국 좋은 규제와 나쁜 규제를 규정한다. 그런 의지가 담긴 선택을 보고 싶다.


박중현 경제부장


http://news.donga.com/3/all/20140403/622211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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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8. 18. 03:11

안전의 위협을 느끼는 국민 앞엔 사실 한가한 소리다. 고작 계란·물병의 위협 따위라면. 그러나 그조차 좀 당당하게 맞서는 정치인(고위공직자)과 새가슴인 부류로 갈리는 것 같다.

 #1. “그때도 계란 한 방 맞았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다. 2001년 인터뷰 때였다. 두 번 계란을 맞은 일화를 소개했다.

 부산 정치집회에서 한 번, 대우자동차·GM과의 인수협상 때 “외국 자본으로라도 공장을 돌리자”고 노동자들을 설득했다가 세게 한 방 맞았다고 했다. 그러나 계란 맞은 걸 수치로 여기진 않았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번씩 맞아줘야 국민들의 화가 좀 안 풀리겠는가.”

 말이 무섭게 한 번 더 봉변을 당했다. 2002년 ‘우리 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에서 연설하던 도중, 날아온 계란이 얼굴에 명중했다. “얼굴이 축축하길래 피가 나나 했다”면서도 연설을 끝까지 마쳤다.

 #2. 1987년 김대중(DJ) 전 대통령(당시 대선후보)의 대구 두류공원 유세 때였다. 연설을 시작하기도 전에 돌멩이가 어지러이 날아들었다. 수행원들이 방패로 몸을 가리려 했다.

 “치우시오. 이 더러운 지역감정의 돌멩이에 맞으면 어떻습니까. 때리라고 하세요!”

 실제 한 말은 이와 조금 다를지 몰라도, 연단 앞에 떼구르르 돌멩이가 나뒹구는데, 방패를 밀쳐낸 걸 학창 시절 TV로 본 기억이 난다. DJ도 당시 연설을 끝까지 마쳤다.

 #3. 정홍원 국무총리가 지난 17일 세월호 실종자들 앞에 섰다. 해외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진도체육관으로 직행한 것까진 좋았다.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총리님 오셨습니까”라고 환대할 걸로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물병이 날아왔다. 자정쯤 도착한 정 총리는 10여 분 만에 등을 보였다. 가족들이 승용차를 막아섰다. 정 총리는 여러 시간 동안 차 안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새벽 5시쯤에야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럴 거면 왜 갔나. 이랬으면 어땠을까. 차 안에서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기다릴 게 아니라, 다시 내려 물병 든 가족들의 손을 꽉 잡았더라면. 그리고 체육관 안으로 다시 들어가 같이 울거나, 정 눈물이 안 나오면 그들의 눈가를 닦아주기라도 했다면. 해양경찰청장이든 장관이든 불러서 혼낼 건 혼내고 “이분들이 원하는 걸 당장 들어주라”고 지시했다면. 못할 일인가? 바로 몇 시간 뒤 박근혜 대통령은 했는데. 당시 박 대통령과 실종자 가족들의 문답을 보면서 귀를 의심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대통령에게 원한 게 ‘상황판 설치’ 같은 것들이었다. 대통령보다 먼저 현장을 방문한 총리는 왜 해결 못했나. 당연한 상황판 하나까지 대통령이 지시해야 공무원이 움직이는 나라임을 보여주려고? 물병을 뒤집어써 생수가 안경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더라도 “늦었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면, 사의 표명한 그에게 조롱은 안 나왔을 것이다.

 #4. “정홍원이 누군데?”

 27일 정 총리의 사의 표명 이후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트위터에 올린 시중 여론이다. “아, 그 물병 맞은 아저씨?”

 얄미운 말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기자도 비슷한 반응을 만났다. ‘아저씨’ 대신 ‘정원홍’이라 부르는 사람도 봤다. 박근혜 정부는 총리 없는 정부였나.

 정 총리에 국한한 얘기는 아니다. 고위급 인사나 정치인들에겐 가도 욕먹고, 안 가도 욕먹는 현장이 널려 있다.

 안 가서 욕먹을 바엔 가서 계란의 역습을 받더라도 현장과 호흡하며 느낄 걸 절절하게 느끼고 돌아오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계란과 물병에 쫓겨온 뒤 국민을 ‘미개인’으로 본다면, 최악이다.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사진 찍고 되돌아오려면, 약은 사람들처럼 납작 엎드려 몸 사리고 ‘죄인 스탠스’를 취하는 게 낫다. 카메라에 눈도장 찍으러 갔다가 욕만 먹는 ‘바보들의 행진’은 질릴 만큼 봤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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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8. 18. 03:09

세월호 침몰 이후 온갖 유언비어가 돌았다. 미군 잠수함과 부딪쳤다는 충돌설, 구조를 지연시키기 위해 구조함이 늑장 출동했다는 소문에 당국이 민간 잠수사들을 일부러 차단했다는 얘기까지 한때 돌았다. SNS에선 학생들이 선내에서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는 문자 메시지가 돌며 경찰이 수사에 나서기도 했다. 당국은 각종 유언비어에 대해 엄단을 선언했다.

 『유언비어의 사회학』(시미즈 이쿠타로 저)은 유언비어가 발생하는 조건으로 ‘굶주림’과 ‘부족한 정보’를 든다. ①사실을 알고 싶다는 굶주림이 있어야 하고 ②이 과정에서 무언가가 알려졌는데 모든 것은 알려져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엄청난 관심을 받는 뭔가가 있는데 이를 완벽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니 ‘빠진 부분’이 유언비어로 만들어진다는 설명이다. “유언비어는 지식(정보)을 필요로 하지만 그것만으론 도저히 수미일관한 보도로 만인을 만족시킬 수 없을 때 성립한다”는 얘기다. 『루머사회』(니콜라스 디폰조 저)도 비슷한 분석을 내놓는다. “소문이 퍼지는 이유는 불확실성 때문으로, 정보의 부족에서 불확실성이 발생한다”고 봤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적 충격이다. 그런데 시작부터 정보의 불확실성이 지배했다. 모두 구조됐다길래 안도했는데 곧바로 아니라는 발표가 나왔다. 세월호 탑승자 숫자도 며칠간 오락가락했다. 기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참사가 벌어졌는데 당국의 발표로는 상황을 이해하기는커녕 혼란과 불안이 가중됐다. 이 공백을 유언비어가 스멀거리며 메운 게 된다. 유언비어엔 분노도 담겼다. 『루머사회』는 “사람들이 소문을 믿는 주된 이유는 소문을 받아들이고 싶은 심리적 공간이 있기 때문”이라며 “개인은 자신의 적대감을 정당화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고 기술했다. 세월호 초기 구조 작업과 이후 대응에서 드러난 관(官)의 비효율과 무능은 좌절감으로 이어졌고, 이 좌절감에 기생한 유언비어가 근거 없는 ‘카더라’로 표출된 것은 아닐까.

 유언비어는 사악하다. 사회를 갉아먹는다. 4년 전 천안함 폭침 사건에서 나타났듯 무슨 말을 하건 음모론으로 받아치는 ‘신앙 같은 불신’을 사회 밑바닥에 깔아 놓는다. 유언비어 앞에선 진실도 사라진다. “유언비어가 발생한 뒤 진실이 알려지면 유감스럽게도 진의의 태반은 상실된다.”(『유언비어의 사회학』) 

 하지만 유언비어만큼이나 답답한 것은 유언비어를 만드는 조건이다. 탑승자 숫자를 놓고 책임 떠넘기기를 했던 안전행정부와 해경, 세월호 침몰로 드러난 한국해운조합·한국선급 등의 ‘관료 낙하산’,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모인 장소에서 장관 의전에 나서고 사진을 찍는 관료들. 불신을 자초한 관료 사회가 먼저 개조되지 않는 한 유언비어가 기생하는 토양을 걷어내기가 쉽지 않다. 정말 두려운 사회는 유언비어 자체보다 유언비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사회다. 

채병건 정치국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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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8. 18. 03:08

요즘 또 하인리히 법칙이 언론에 자주 거론됩니다. 하인리히 법칙은 달리 1:29:300의 법칙으로 불립니다. 대형 사고 때면 등장하는 단골손님이기도 합니다. 1931년 미국의 보험회사 직원 HW 하인리히가 입증한 법칙입니다. 그는 5000여 건의 실제 사고를 분석했습니다. 그랬더니 대형 사고 한 건이 일어나기 전 이와 관련 있는 소형 사고가 29건, 경미한 사고가 300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큰 재난이 나기 전에는 늘 어떤 신호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역으로 생각하면 작은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큰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교훈이기도 합니다.(김민주, 『하인리히 법칙』)

 10여 년 전 하타무라 요타로(畑村洋太郞) 도쿄대 교수는 하인리히 법칙을 실패학에 접목했습니다. 그는 저서 『실패학의 권유』에서 작은 사고, 조그만 이상 징후를 놓치지 않아야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며 그것이 경영자의 책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의 실패학은 일본 열도를 강타했습니다. 그는 삼풍백화점 붕괴를 이 법칙에 빗대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많은 국내 대기업들도 ‘하인리히 법칙’과 ‘하타무라 권유’를 임직원 교육에 활용했습니다. 그런데도 대형 사고가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인간은 실패에서 배우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 모양입니다.

 세월호라고 달랐겠습니까. 여객선 안전·관리·감독 유관 조합·협회장 자리를 수십 년간 독식해 온 해양수산부 낙하산 300건, 배에 누가 탔는지 확인도 안 한 무사안일 300건, 늦었다며 화물을 제대로 묶지도 않고 맹골수도를 아슬아슬 빠져나간 용감무쌍(?) 300건이 있었을 겁니다. 기념사진 국장, 컵라면 장관 같은 무개념·무책임 공무원도 그들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300건이 있었을 겁니다.

 어디 세월호뿐이겠습니까. 우리 사회엔 곳곳에 300건이 있습니다. 요 며칠 새 본 것만도 차고 넘칠 정도입니다.

 21일 출근길. 집 앞 커브길을 돌자마자 빨간 봉을 휘두르는 안전요원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크” 급브레이크를 밟아가며 차선을 바꿔야 했습니다. 안전요원은 몸으로 공사 현장 표지판 역할을 한 겁니다. 이쯤 되면 사고를 막는 게 아니라 되레 유발하지만 않아도 천만다행입니다. 이런 공사 현장이 하루 이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미국 도로가 생각났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차로를 막는 ‘꼬깔콘’이 하나 둘 나타납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공사 현장이 안 보입니다. 2~3㎞를 달린 뒤에야 비로소 대형 트럭과 인부 서너 명이 나타납니다. “무슨 대단한 공사기에 이 호들갑인가” 힐끔 보면 별거 아닙니다. 대개 구멍 하나 메우는 정도의 사소한 공사입니다.

 22일 오후 3시 서소문로. 지하철 2호선 9번 출구 앞 인도에서 30분을 지켜봤습니다. 27대의 오토바이가 인도로 질주했습니다. 10대는 건널목을 건너갔는데, 모두 오토바이를 탄 채였습니다. 내려서 끌고 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인도를 걷는 보행자에게 경적을 울리거나 라이트를 번쩍거리는 오토바이도 있습니다. 누구 하나 항의는커녕 몸 피하기 급급합니다. 그만큼 시민들이 안전 불감증 불법 오토바이에 길들여졌다는 얘기겠지요.

 어디 안전뿐이겠습니까. 생활 속 어디에나 또 다른 300건이 있습니다. 새치기, 난폭 운전, 욕설 같은 겁니다. 여기엔 희생과 배려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이런 게 안전 불감증과 결합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그게 바로 세월호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제2의 세월호가 없으려면 이런 생활 속 300건부터 사라져야 합니다.

 마무리는 속담으로 하겠습니다. 아주 유명한 인디언 속담입니다. ‘사람 마음속엔 착한 늑대와 나쁜 늑대가 있다. 두 마리 늑대는 늘 싸운다. 이기는 쪽은 어딜까. 내가 먹이를 주는 쪽이다.’ 늑대를 세월호 선장과 고(故) 박지영 승무원으로 바꿔봅니다. 나는 누구에게 먹이를 주고 있나. 선장 늑대인가, 승무원 늑대인가.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우리 사회는 혹시 너무 오랫동안 선장 늑대에게만 먹이를 줘 온 것은 아닐까요. 


이정재 논설위원·경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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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8. 18. 03:04

박근혜 대통령이 독일을 방문하면서 통일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독일의 통일을 배우려는 열기도 더욱 강해지는 분위기다.

독일에서 배워야 할 것은 단지 통일만은 아닐 것이다. 독일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 경제의 강자다. 경제대국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다. 다 이유가 있어서 되는 것이다. 

 한국의 화두 중 하나가 창조경제다. 창조경제의 모델을 굳이 나누자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국과 미국 같은 벤처모델이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신기술과 창의적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삼은 벤처가 우후죽순으로 나온다. 벤처를 대기업에 팔아 대박을 낸다. 당연히 젊은 대학생과 연구생들이 주변의 성공을 보고 벤처의 꿈을 꾸게 된다. 대학이 벤처의 모태 역할을 하고 있다. 

 둘째는 독일 모델이다. 독일 경제는 강한 중소기업이 이끈다. 독일의 경영학자인 헤르만 지몬은 1996년 강한 중소기업인 ‘히든 챔피언’을 조사했다. 알려져 있지 않지만 해당 분야에서 세계 1, 2위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기업들을 찾아낸 것이다. 독일의 히든 챔피언은 대개 가격보다는 성능과 품질로 승부를 겨루고 있다. 

 또 제조업 분야에서 차별화된 기술에 집중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2012년 조사에 의하면 독일에는 1307개, 미국엔 366개, 일본엔 220개, 오스트리아엔 128개의 히든 챔피언이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하면 무려 1400개 이상의 히든 챔피언이 독일어 문화권에 있다. 독일이 2000년 초 경제가 정체돼 2% 성장을 할 때도 이들 기업은 8% 이상의 성장을 이뤘다. 국가경제가 어려울 때도 독일의 중소기업은 더 강한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히든 챔피언이 나오는 독일의 중소기업, 즉 미텔슈탄트(Mittelstand)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해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130만 명 이상의 독일 청년이 매년 미텔슈탄트에서 직업 훈련을 받고 있다. 유럽의 대부분 국가가 청년 실업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독일은 예외다. 미텔슈탄트가 고용을 창출해주기 때문이다. 

 창조경제에서 벤처모델이 중요하다. 그러나 독일과 같은 히든 챔피언 모델도 중요하다. 한국 창조경제의 한 축은 히든 챔피언 모델이 돼야 한다. 벤처모델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라면 히든 챔피언 모델은 약(弱)을 강(强)으로 만드는 것이다.

중소기업을 강한 기업으로 만드는 데 극복해야 할 과제가 많다. 가장 큰 문제는 중소기업이 개발한 기술과 부품을 대기업이 사주지 못하는 것이다. 신뢰성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판매량이 수년간 수백만 대에 이르는 제품도 있다. 많이 팔면 대박이 나지만 많이 판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쪽박을 차게 된다. 당연히 검증 안 된 기술과 부품을 무턱대고 사줄 수 없는 것이다. 중소기업은 대기업이 개발한 기술과 부품을 안 사주니 히든 챔피언이 될 수 없고, 영원히 약한 기업이니 좋은 인력을 유치할 수 없으며, 인력이 없으니 기술개발은 더 어려워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고 있다. 

 반면 독일에서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주는 인프라가 있다. 바로 산학협력 인프라다. 시뮬레이션(가상실험)을 통해 검증을 해주는 대학이 히든 챔피언을 든든히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미텔슈탄트가 제어용 프로세서를 개발했다면 이를 영하 30도와 영상 140도, 습도 99%, 고도 2000m 등과 같은 극한적 상황에서 기능을 발휘하는지 가상실험을 통해 검증해준다. 가상공간에서 온갖 경우의 수를 검증하는 것이다. 이런 검증 덕택에 대기업은 미텔슈탄트의 기술을 믿고 구매할 수 있는 것이다. 

 독일 기업의 경쟁력이 뛰어난 이유는 가상공간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신제품 개발 기간을 크게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검증을 통해 개발 기간을 단축하면서 품질과 기능의 신뢰성도 높이고 있으니 한번에 세 마리 토끼를 잡는 격이다.

한국에도 가상공간 검증 인프라가 있어야 한다. 특히 대학이 중소기업을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추어야 한다. 검증 하드웨어(HW)와 소프트웨어(SW), 이를 운영할 수 있는 교수와 대학원생이 필요하다. 

 한국 대학의 설비와 장비는 대부분 SCI 외국 논문을 발간하는 데 적합한 인프라다. 연구 인프라는 준비돼 있으나 산학협력 인프라는 매우 취약한 게 현실이다. 정부에서 아무리 산학협력을 권장해도 중소기업이 대학을 찾을 리 없다. 대학에서 양산한 연구논문이 중소기업에는 단지 종잇조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독일식 산학협력 모델을 배워야 한다. 중소기업 기술의 신뢰성을 확보해주는 검증데이터를 대학이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중소기업의 기술이 대학의 검증을 거쳐 대기업의 구매로 이어지는, 히든 챔피언 탄생의 선순환 구조를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 통일의 대박과 한국 히든 챔피언의 대박이 동시에 터졌으면 한다.


유지수 국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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