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 경기도 일산 신도시에 살 때 서울 광화문행 버스 정류장은 출근 시간대에 늘 전쟁터였다. 자리에 앉느냐 못 앉느냐에, 50분가량 걸리는 출근 시간의 휴식 여부가 결정됐기 때문이다. 또 광화문 버스정류장에서 일산행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우르르 달려가는 장면도 일상사였다. 비나 눈이 올 때는 더 처절하게 탑승 경쟁을 벌였다.
이제 그런 모습은 추억의 한 장면이다. 광화문 정류장에서 승객들은 긴 줄을 이루고, 스마트폰을 보면서 탑승 차례를 기다린다. 서울 시내 버스정류장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모습은 외국인들을 감탄케 한다. 무질서의 상징이었던 버스정류장이 '매력(魅力) 한국'의 상징으로 변신한 것은 서울시가 2006년부터 설치한 위성항법장치(GPS)와 무선통신 기술을 이용한 버스 도착 안내 단말기(BIT) 덕분이다. BIT 기능이 스마트폰의 앱으로 확장되면서 정류장 질서는 완벽하게 뿌리를 내렸다.
흔히 사회적 습관의 변화는 정치 지도자나 사회운동가의 솔선수범이나 캠페인이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사회적 습관의 극적 변화는 대부분 신기술과 그 기술을 잘 활용하는 아이디어가 만들어냈다. 은행의 창구 대기표, 전철 승강장의 스크린도어, 승용차 블랙박스 등 그런 사례를 숱하게 찾을 수 있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동시에 역사적인 도전 과제를 던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근본적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고, 각계각층의 리더들은 근본적 의식 개혁을 입을 모아 말한다. 국민 대다수도 자신이 죄인이 된 듯한 느낌을 토로하면서 '진짜 한국 사회가 변할 때'라고 반성한다. 하지만 재발(再發) 방지책은 대부분 의식 변화와 같이 추상적 가치이거나 새로운 규제론이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대형 참사를 반복해서 일으키는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실천 가능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쁜 습관이 개인과 조직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찰스 두히그(Charles Duhigg)의 저서 '습관의 힘'이 시사하는 바가 많다. 두히그는 의료 사고, 항공기 사고 등 대형 참사 이면에는 반드시 사고를 부르는 '반복 행동(습관)'이 조직 안에 자리 잡고 있고, 그런 습관과 관련된 보상 시스템을 바꿔야만 문제를 근원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서울 버스정류장 혁신 사례는 두히그의 분석과 잘 맞아떨어진다. 이를테면 이제 서울 시내에서 과속하거나 승객을 정원보다 많이 태우는 버스를 보기 어렵다. 무리하게 버스를 타려는 승객도 거의 볼 수 없다. BIT를 포함한 서울시 교통 시스템(TOPIS)이 예측 가능성이라는 새로운 보상을 실현하자 승객과 운전기사가 나쁜 습관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선택한 것이다.
BIT 사례에서 봤듯이 입으로 주창하는 의식 개혁이나 제도 개선보다 첨단 디지털 기술의 합리적 사용이 새로운 사회적 습관을 만드는 데 훨씬 효과적이다. 그런 사회가 진정한 선진국이기도 하다. 두히그는 "훌륭한 리더는 위기를 활용해 조직의 습관을 개조한다"고 말했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은 대상이나 방법론이 모호한 '국가 개조'가 아니라 첨단 기술을 이용한 '습관 개조'다.
우병현 조선경제i 총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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