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는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이다(The only good Indian is a dead Indian).”
19세기 후반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 미국의 백인들은 서부 개척에 방해되는 인디언들을 잔인하게 소탕하고 있었다. 코만치족의 추장 토와시는 이때 부족원들을 이끌고 투항했다. 더듬거리는 영어로 그가 “나 토와시, 좋은 인디언”이라며 선처를 호소했을 때 토벌작전을 지휘하던 필립 셰리든 장군은 “내가 본 좋은 인디언은 다 죽어버렸어”라고 대꾸했다. 이 말이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 뿐’이란 말로 바뀌어 인구에 떠돌았다.
지난달 20일 박근혜 대통령이 ‘끝장 토론회’에서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는 우리 경제의 ‘암 덩어리’지만 복지, 환경, 개인정보 보호같이 꼭 필요한 규제들도 있다. 좋은 규제는 개선하고 나쁜 규제는 뿌리 뽑겠다”라고 밝히는 걸 보면서 엉뚱하게 미국 인디언 멸망사의 한 토막이 떠올랐다. 박 대통령은 이날 좋은 규제와 나쁜 규제에 대해 설명했지만 전체적인 무게는 ‘나쁜 규제의 혁파’에 실렸다.
다음 날부터 모든 정부부처는 규제개혁 총력전에 돌입했다. 한국의 인터넷쇼핑몰에 ‘천송이 코트’를 주문하려는 중국인들을 가로막는 공인인증서 규제, 트럭을 개조해 소자본으로 음식장사를 해보려는 청년들을 방해하는 푸드트럭 관련 규제 등 토론회에서 지적된 사안들은 벌써 개선 방안과 일정이 나왔다. ‘좋은 규제는 폐지된 규제뿐’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각 분야의 규제들이 사회의 발전을 해치는 절대악으로 떠올랐다.
공인인증서 규제, 푸드트럭 규제는 누가 봐도 폐지돼야 할 나쁜 규제다. 하지만 조금만 다른 부문으로 가면 선악의 경계는 금세 흐릿해진다. 끝장 토론회에서 여성가족부 장관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설전을 불렀던 ‘셧다운제’는 게임산업을 활성화하고 관련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선 폐지돼야 할 나쁜 규제다. 하지만 자녀의 게임중독을 두려워하는 부모들에게 이 규제는 고마운 규제다.
문제는 선악의 중간지대에 있는 이런 규제들이 일자리 창출, 기업투자 확대의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다는 점이다. 카지노 관련 규제도 이런 종류다. ‘도덕 국가’ 싱가포르에서 카지노는 40여 년간 금단의 비즈니스였다. 하지만 2006년 취임한 리셴룽(李顯龍) 총리는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도박은 절대 허용 못한다”는 아버지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반대를 무릅쓰고 카지노 허용에 박차를 가했다. 활력을 잃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거센 반대에도 2010년 내국인도 출입할 수 있는 카지노 두 곳을 포함한 복합리조트의 문을 열었다. 결과는 5만 개의 일자리, 10%가 넘는 성장률이었다.
시대에 따라 규제의 선악은 바뀌기도 한다.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규제로 자주 꼽히는 영국의 ‘적기 조례(Red flag act)’는 증기 자동차가 마차 타는 사람이나 보행자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도록 붉은 깃발을 든 사람이 차에 앞장서 달리게 하는 내용이었다. 1865년 제정 당시엔 도로 사정 등을 고려한 세계 최초의 선진적 도로교통법이었다. 하지만 차의 속도를 사람이 달리는 속도 이하로 제한한 이 규제로 영국의 자동차산업은 독일, 프랑스에 영원히 뒤처졌다.
규제의 선악을 판가름하는 일은 기병대가 좋은 인디언, 나쁜 인디언을 생사로 가르는 것만큼 분명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각종 규제가 현재와 미래에 끼칠 손익을 읽어내는 눈을 갖춰야 한다. 선악의 경계에 있고, 반발이 예상돼도 국가의 미래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개혁을 추진하는 지도자의 의지가 결국 좋은 규제와 나쁜 규제를 규정한다. 그런 의지가 담긴 선택을 보고 싶다.
박중현 경제부장
http://news.donga.com/3/all/20140403/622211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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