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의 위협을 느끼는 국민 앞엔 사실 한가한 소리다. 고작 계란·물병의 위협 따위라면. 그러나 그조차 좀 당당하게 맞서는 정치인(고위공직자)과 새가슴인 부류로 갈리는 것 같다.
#1. “그때도 계란 한 방 맞았지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다. 2001년 인터뷰 때였다. 두 번 계란을 맞은 일화를 소개했다.
부산 정치집회에서 한 번, 대우자동차·GM과의 인수협상 때 “외국 자본으로라도 공장을 돌리자”고 노동자들을 설득했다가 세게 한 방 맞았다고 했다. 그러나 계란 맞은 걸 수치로 여기진 않았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한번씩 맞아줘야 국민들의 화가 좀 안 풀리겠는가.”
말이 무섭게 한 번 더 봉변을 당했다. 2002년 ‘우리 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에서 연설하던 도중, 날아온 계란이 얼굴에 명중했다. “얼굴이 축축하길래 피가 나나 했다”면서도 연설을 끝까지 마쳤다.
#2. 1987년 김대중(DJ) 전 대통령(당시 대선후보)의 대구 두류공원 유세 때였다. 연설을 시작하기도 전에 돌멩이가 어지러이 날아들었다. 수행원들이 방패로 몸을 가리려 했다.
“치우시오. 이 더러운 지역감정의 돌멩이에 맞으면 어떻습니까. 때리라고 하세요!”
실제 한 말은 이와 조금 다를지 몰라도, 연단 앞에 떼구르르 돌멩이가 나뒹구는데, 방패를 밀쳐낸 걸 학창 시절 TV로 본 기억이 난다. DJ도 당시 연설을 끝까지 마쳤다.
#3. 정홍원 국무총리가 지난 17일 세월호 실종자들 앞에 섰다. 해외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진도체육관으로 직행한 것까진 좋았다.
세월호 실종자 가족들이 “총리님 오셨습니까”라고 환대할 걸로 기대하진 않았을 것이다. 물병이 날아왔다. 자정쯤 도착한 정 총리는 10여 분 만에 등을 보였다. 가족들이 승용차를 막아섰다. 정 총리는 여러 시간 동안 차 안에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새벽 5시쯤에야 현장을 빠져나갔다.
그럴 거면 왜 갔나. 이랬으면 어땠을까. 차 안에서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 기다릴 게 아니라, 다시 내려 물병 든 가족들의 손을 꽉 잡았더라면. 그리고 체육관 안으로 다시 들어가 같이 울거나, 정 눈물이 안 나오면 그들의 눈가를 닦아주기라도 했다면. 해양경찰청장이든 장관이든 불러서 혼낼 건 혼내고 “이분들이 원하는 걸 당장 들어주라”고 지시했다면. 못할 일인가? 바로 몇 시간 뒤 박근혜 대통령은 했는데. 당시 박 대통령과 실종자 가족들의 문답을 보면서 귀를 의심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대통령에게 원한 게 ‘상황판 설치’ 같은 것들이었다. 대통령보다 먼저 현장을 방문한 총리는 왜 해결 못했나. 당연한 상황판 하나까지 대통령이 지시해야 공무원이 움직이는 나라임을 보여주려고? 물병을 뒤집어써 생수가 안경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더라도 “늦었지만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면, 사의 표명한 그에게 조롱은 안 나왔을 것이다.
#4. “정홍원이 누군데?”
27일 정 총리의 사의 표명 이후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트위터에 올린 시중 여론이다. “아, 그 물병 맞은 아저씨?”
얄미운 말이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기자도 비슷한 반응을 만났다. ‘아저씨’ 대신 ‘정원홍’이라 부르는 사람도 봤다. 박근혜 정부는 총리 없는 정부였나.
정 총리에 국한한 얘기는 아니다. 고위급 인사나 정치인들에겐 가도 욕먹고, 안 가도 욕먹는 현장이 널려 있다.
안 가서 욕먹을 바엔 가서 계란의 역습을 받더라도 현장과 호흡하며 느낄 걸 절절하게 느끼고 돌아오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계란과 물병에 쫓겨온 뒤 국민을 ‘미개인’으로 본다면, 최악이다. 아무 생각 없이 갔다가 사진 찍고 되돌아오려면, 약은 사람들처럼 납작 엎드려 몸 사리고 ‘죄인 스탠스’를 취하는 게 낫다. 카메라에 눈도장 찍으러 갔다가 욕만 먹는 ‘바보들의 행진’은 질릴 만큼 봤다.
강민석 정치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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