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돼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한국 사람 뺨치게 한국말을 잘하는 것을 보면 외국어 학습이 나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가 늦게 배웠기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며 아직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육아정책연구소에서는 외국어 교육의 적절한 시작 시기를 알아보기 위해 중국어로 실험교육을 실시했다. 영어와 달리 중국어는 아직 배워 보지 않은 생소한 언어라 실험에 적합했다. 세 그룹으로 나눠 5세 유아, 초등 3년생, 대학생 각각 20명에게 일주일에 5회씩 총 20회의 교육을 실시했다. 유아들은 깔깔거리는 소리가 실험실 밖까지 들릴 정도로 재미있게 중국어를 배웠다. 그동안 외국의 많은 연구는 유아들의 외국어 교육효과가 아동이나 어른들에 비해 매우 낮다고 했는데, 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연구 결과를 뒤집어 놓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4주 뒤 테스트 결과에서는 우리나라 유아들도 다른 나라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교육효과가 매우 낮았다. 말하기·듣기·읽기로 나눠 평가를 해 보니 세 영역 모두 유아의 점수가 가장 낮았다. 듣기와 읽기는 유아, 초등, 대학생 순이었고 말하기는 대학생의 점수가 초등생보다 약간 낮았지만 역시 유아의 점수가 가장 낮았다.
그뿐 아니었다. 실험교육 후 중국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검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실험 대상자들에게 자연스러운 중국어 문장과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을 보여 준 후 뇌파검사(Cz 부위)와 안구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그 결과 대학생들은 중국어 문장을 볼 때 뇌파와 안구의 움직임이 중국 원어민들과 유사한 패턴을 보여 중국 사람들처럼 문장의 의미를 이해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유아들은 그 패턴이 매우 달랐다. 이는 중국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실험이 보여 주듯 유아기는 외국어 교육의 적령기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유아 자녀를 위해 한 달에 수십만원 내지 수백만원을 내며 하루에 5~6시간씩 영어만 사용해야 하는 학원에 보내는 부모들도 있다.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잘해 국제경쟁력을 갖추도록 하겠다는 것이 부모들의 바람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오히려 사고가 움츠러들고 외국인 강사로부터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배우며 열등감마저 느끼게 된다.
언어학자 촘스키는 인간은 언어습득장치(LAD)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특별한 장애가 없는 한 누구든지 모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간혹 우리나라에서는 이 장치의 기능이 나이가 들수록 저하된다며 조기 외국어 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언어습득장치는 가상의 장치이며 나이가 든다고 쇠퇴하는 게 아니다. 모국어는 결정적 시기에 적절한 언어 자극이 없으면 습득이 어렵지만 일단 모국어를 습득한 사람은 언제든지 외국어 학습이 가능하다. 다만 배우려는 동기의 절실함이나 각자의 언어 능력에 따라 외국어 학습효과는 달라질 수 있다.
유아들은 아직 외국어를 배우겠다는 간절한 동기가 없다. 게다가 인지 발달, 뇌 발달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유아들의 외국어 학습효과는 매우 미미하다. 반면 유아기는 뇌의 발달이 가장 왕성해 포도당의 소모가 성인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 이 시기에 힘든 외국어를 배우느라 뇌 발달에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탕진해 버린다면 뇌 자체의 발달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뇌에 과부하가 걸려 다른 발달의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뇌 발달을 저해하는 외국어를 유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어른들의 무지로 인한 아동학대다.
현재의 유아들이 살아갈 미래는 빅데이터를 활용하고 인공지능(AI)이 대세가 될 4차 산업혁명 시대다. 그 시대에는 통역기가 발달해 외국어를 전혀 몰라도 앱을 깐다거나 귀에 간단한 장치 하나만 끼우면 소통이 가능해진다. 어려서부터 힘들게 배운 외국어가 쓸모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반대로 빅데이터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려면 튼실하게 잘 발달된 뇌가 필요하며, AI로부터 살아남으려면 AI에게 없는 감성과 창의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유아기는 모국어 습득으로 사고력과 창의력이 가장 활발하게 발달하는 시기다. 신나게 뛰놀면서 오감을 통해 방대한 세상의 자극을 받아들여 상상력과 창의력이 쑥쑥 자랄 수 있도록 아이들을 제발 좀 내버려 두자. 쓸모가 없어질 외국어 교육을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는 부모들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더 이상 자녀를 학대하지 말자. 정부도 교사 자격은커녕 근원도 모르는 원어민을 데려다가 학부모들을 현혹해선 안 되고 자칫 아이들의 발달을 저해할지 모를 영어학원도 방관해선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랄 때 진정 우리나라도 행복하고 건강한 나라로 발전할 것이다.
우남희 육아정책연구소장
http://news.joins.com/article/2133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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