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22:24

최근 정부는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 공약 재원 마련을 위해 향후 5년 동안 신규 도로·철도 사업에 대해서는 재정 투입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국토 면적 대비 우리나라의 도로 연장은 OECD 회원국 가운데 이미 상위권이라, 기존의 투자 계획도 전면 재검토할 방침이라고 한다. 그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사실 지방을 다녀보면 차량이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가 많다. 국회의원들의 지역구 예산 챙기기나 지자체 단체장들의 업적 과시에 의한 것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SOC 투자를 일률적으로 중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SOC 투자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구상되어야 할 국가 전략이라, 복지 정책의 희생양이 될지 말지는 매우 신중히 논의되어야 한다. 또한 과거 고도성장기에 건설된 사회 인프라의 노후화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 온난화 등 새로운 환경 변화에도 SOC 정책은 선제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그런 만큼 국가가 SOC 사업으로부터 멀어지는 모습은 무언가 아쉽고 허전하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와 정신분석학자 가타리에 의하면 국가 권력의 본질은 "공간에 홈을 파는 것", 곧 길을 관리하는 일이다. 그래서 국가는 부단히 철길을 내고 도로를 닦는다. 속도의 사상가 비릴리오에 따르면 특히 오늘날은 더 빠른 속도가 세상을 지배하는 사회, 곧 '질주정(疾走政)' 시대다. 그것의 대표적 총아가 고속도로와 고속철도인데, 고속성장을 추구해 왔던 우리나라도 이런 추세의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전형이었다.

물론 빠르고 편리한 고속 교통망 나름의 가치는 인정되어야 한다. 세계로 열린 바닷길과 하늘길과 합쳐져 국가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면의 폐해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는 일종의 컨베이어 벨트가 되어 국토를 공장같이 만들 뿐만 아니라 여행을 마치 작업 공정처럼 다룬다. 몇 년 전부터 시민 스스로 올레길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사이 공간과 사람 공간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당연한 저항이다. 그렇다면 차제에 박근혜 정부는 SOC 정책을 새로운 각도에서 구상할 필요가 있다. 국도(國道)의 재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도로와 철도가 고속으로 질주하는 동안, 국도나 지방도와 같은 일반도로는 경시하거나 방치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 결과, 주행의 안전성이나 편의성, 그리고 경관의 쾌적성이나 심미성의 측면에서 도무지 국도라고 말하기 민망하고 무색한 곳이 크게 늘었다. 이것만으로도 더는 미루기 어려운 국책사업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국도 자체가 문화적 자산이자 지역 발전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국도는 우리 시대의 핵심 가치인 행복과 안전, 소통과 화합, 그리고 자치와 다양성의 보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도 업그레이드 정책은 따라서 결코 단순한 토건사업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문화정책이나 지역정책에 가깝다. 가령 고속도로는 과학성과 동질성의 최전선이라, 전국 어디를 가도 기하학적 공간일 뿐이다. 프랜차이즈 휴게소가 그렇고 표준화된 도로안내판도 마찬가지다. 이에 비해 국도는 인간 중심의 유기적 장소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국도는 도로 자체가 명소화되어 여행의 목적을 창출하기도 한다. 국도 주변의 풍광이나 취락 또한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 길에 관하여 문화적 선진국과 후진국을 따진다면 기준은 국도다.

이 점에 관련하여 일본의 사례는 시사점이 많다. 국도 본연의 성능이나 경관에도 부러운 점이 많지만 특기할 만한 것은 국도의 역, 곧 '미치노에키'다. 이는 단순한 휴게소를 넘어 온천이나 숙박시설은 물론, 경우에 따라 미술관이나 공연장까지 갖춘 복합공간이다. 건물의 미관도 수려한 편인데, 문화재로 지정된 주변 마을의 전통가옥을 모티브로 한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덧붙여 주목할 것은 그곳의 직판장이다. 주변 지역에서 생산되는 채소, 과일, 생선 등 신선물과 더불어 각종 토산물이나 특산품을 취급하는데, 현재 전국적으로 1000개를 넘어선 미치노에키 직판장의 총매출액은 일본 최대의 편의점 체인 훼미리마트에 버금간다고 한다. 그곳만 찾아다니는 동호회가 활성화될 정도다.

박정희 시대에는 '고속도로의 성장경제학'이 풍미했다. 그 이후 고속철도에 부심한 정부도 있었고, 세계적 허브공항에 몰두한 정부도 있었다. 최근에는 4대강에 올인한 정부도 있었다. 이러한 역대 정부의 SOC 사업을 통해 우리는 많은 것을 얻기도 했고 잃어버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의 화두로서 경제와 문화 그리고 지역을 함께 배려하는 '저속(低速)국도의 문화경제학 내지 인문사회학'이 어떨까 싶다. 국도는 길이면서 길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02/2013060200802.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