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23:02

뜨거운 8월 햇살 아래, 사람들은 청동상 하나하나를 만져가며 사진을 찍거나 요괴 캐릭터부터 참치라면까지 다양한 가게에 발길을 멈추었다. 일본 돗토리현의 사카이미나토역에서 800m에 이르는 ‘미즈키 시게루 로드’. 만화 <게게게노 기타로>(한국명 <요괴인간 타요마>)로 유명한 작가 이름을 딴 거리에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기타로와 고양이소녀를 비롯해 일본 전국의 요괴 청동상 150여점이 늘어서 있다. 최근 주춤해졌다곤 하나 연간 방문객은 1993년 2만명에서 2010년 시 인구의 100배가 넘는 370만명까지 불었다.

20년 전 이 거리는 빈 가게만 즐비했다. 삼면이 바다에 에워싸여 어업이 번성했던 사카이미나토지만 “대형슈퍼가 생기고 자가용족이 늘며 70년대부터 상점가가 쇠락했다”고 한 가게 주인은 말했다. 시는 문화계의 제안을 받아 이곳 출신 미즈키 작품의 캐릭터 청동상을 꾸민다. 애초 지역민을 붙잡겠다는 소박한 기획은 청동상이 훼손되거나 사라졌다는 얘기가 보도되며 전국적 유명세를 탔다. 국제공항이 있는 요나고에서 사카이미나토까지 ‘요괴 열차’가 오가고 각종 요괴 이벤트가 열리며 미즈키의 만화세계와 요괴연구 자료를 모은 기념관도 10년 전 생겨 지역 살리기에 가속도를 붙였다.

방문객 ‘숫자’보다 인상적인 건 거리 정착 과정에서 보인 민간의 자발성과 이를 극대화시킨 방식이다. 고향의 쇠락을 안타까워한 미즈키는 청동상의 저작권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몇 해 전엔 거액을 기부했다. 23점으로 출발한 청동상은 일반인들 모금에 힘입어 153점까지 늘었다. 상급 지자체인 돗토리현은 이 붐을 이어받아 2년 전 아예 ‘만화왕국 돗토리’를 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호쿠에이초 출신 작가 아오야마 고쇼(<명탐정 코난>) 기념관, 구라요시 출신 다니구치 지로의 <열네살> 무대인 시라카베도조군도 주요 관광지로 변신했다. 꽤 떨어진 지역인데다 대단한 규모도 아니지만, 만화라는 테마에 꽂힌 사람들은 이번 여름 나처럼 열차를 타고 돗토리현을 누빈다.

지역 문화사업의 안착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산업폐기물 섬에서 대자본이 투입되며 문화예술 섬으로 변모한 가가와현 나오시마는 한국에서도 모범사례로 소개되는데 “그 나오시마도 요즘 적자”라고 한 미술계 인사는 전했다. 지역 문화사업을 ‘수익사업’처럼 여겨선 안 되지만 ‘지속가능한 규모’라는 개념 또한 필요한 법이다. 그 지역에서만 만날 수 있는 콘텐츠, 그리고 그 지역 사람들이 즐기고 유지할 토대 없인 ‘모래성’이 되기 십상이다.

한국에서도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문화사업에 나서고 있다. 환영할 일이지만 문제는 ‘일단 폼나게 시작하고 보자’는 발상이다. 요즘 열리는 평창비엔날레는 도와 정부 예산이 15억, 10억원씩 들어갔는데 막상 뚜껑을 열자 200만명 관객 목표가 10분의 1로 축소됐다. 지역에 신진작가 소개, 의미 있다. 그렇더라도 피서객을 믿고 두달여 준비로 일회성 행사도 아닌 ‘비엔날레’를 하겠다는 건 과유불급 아닐까. 정부 한 관계자는 “광특회계(광역지역발전특별회계)가 있어 지자체가 달라면 꼼짝없이 줘야 한다. 이런 행사가 정부 예산 없이 유지되겠나”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예산을 주고도 전문성 있는 관리감독을 못하는 정부, 정부만 바라보다 예산이 줄면 아우성치다 사라지는 지역 문화사업의 악순환을 우리는 숱하게 봐왔다.

지난주 찾은 부천국제만화축제에선 다른 ‘싹수’가 보였다. 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들이 자녀 손을 잡고 온 모습이 유독 눈에 띄었다. 초기부터 시와 만화가들이 머리를 모으고 지역민들이 아이들과 편히 뒹굴며 만화를 즐기는 도서관을 마련한 게 우여곡절 속에서도 16년을 지속해온 바탕일 게다. 그게 문화의 출발점이다.


김영희 문화부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00346.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