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환 하나투어 회장… "여행업은 사람이 자산, 사람이 전부다"
수출일꾼 꿈꾸다 여행일꾼으로
해외 잘 못나가던 군사정권때 6~7년간 70개국 넘게 돌아…
남들보다 먼저 지구촌 봤기에 중남미·지중해 상품 내놨죠
IMF 외환위기 때 폭풍성장
他社들 부도나고 해고할 때 한 사람도 구조조정 안해…
경기 살아나자 기회가 왔죠
인력 보존한 덕에 업계 1위로
"행상·밭일로 6남매 키운 어머니, 멀미 탓에 해외여행 한번 못갔죠
제겐 그것이 평생의 恨으로…"
여행의 패러다임 바뀐다
1980년대엔 '나 왔다'고 증명사진 찍기에 바빴죠
지금은 완전 개성시대… 여기에 맞는 상품 내놔야죠
싸구려여행? 억지 쇼핑코스?
반성해야 할 부분이지만
쇼핑 코스는 '필요악' 측면도… 물건 살 시간은 있어야죠
단, 주요 관광 빼먹으면 안돼
여행업, 여직원이 행복해야
아이 제대로 키우면서도 일할 수 있는 환경 돼야…
재택근무·출퇴근 유연근무… 꼭 하도록 권하고 있어요
"여기가 진짜 회장님 자리 맞나요."
국내 여행업계 1위 하나투어 박상환(57) 회장을 만나러 간 사람들은 하나같이 회장이 일하는 자리를 보고 놀란다. 회사엔 번듯한 회장실이 없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하나투어 본사 10층 맨 안쪽 구석이 그의 자리다. 두 평(6.6㎡)쯤 될까. 높이 1m20㎝ 칸막이 안쪽에는 노트북 컴퓨터와 전화기가 놓여 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을 뿐이다. 어차피 보고와 결재 등 주요 업무는 스마트폰으로 하기 때문에 사무실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박상환 하나투어 회장은 젊은 시절 해외여행 인솔자(TC)로 시작해 지금의 국내 여행업계 1위 기업을 키웠다. 지구에서 안 가본 곳을 꼽아보라는 말에 잠시 지구본을 들여다보더니 “그린란드 빼고는 다 가본 것 같다”며 웃었다. / 이태경 기자
◇"세상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보라"
"요즘 여행업계 문제가 뭔지 아세요?"
지난 15일 오후 11시 30분쯤 서울 평창동의 한 주점. 소주잔을 기울이던 박 회장이 대뜸 물었다.
"업체 간 과당경쟁? 이익 안 남는 출혈경쟁? 질 떨어지는 싸구려 관광? 아닙니다. 그런 건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겁니다. 원하는 손님이 있기 때문이죠. 여행업계의 진짜 문제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겁니다."
―세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는 게 무슨 뜻인가.
"일부에선 여행업이 20~30년 지나면 사라질 거라고들 한다. 고객들이 점점 단체 패키지 관광을 멀리하고 있어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맞지만 이는 끝이 아니고 새로운 기회이다. 여행업계는 지금 세상에는 없는 비즈니스를 만들어야 한다. 볼거리와 먹을거리, 즐길거리, 쇼핑거리를 발굴하고 엮어서 고객이 원하는 '새로운 가치'를 내놔야 한다. 고객은 그곳에서 우리를 필요로 한다. 세상은 무조건 밝고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 그래야 길이 보인다."
―앞으로도 국내 여행업계가 계속 성장할 거라고 보나.
"지난해 해외 출국자(출장 포함)는 1350만명이었다. 이 숫자가 머지않아 3000만명, 5000만명이 될 거라 믿는다. 전 국민이 일 년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가는 시대가 올 것이다. 여행이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인 시대가 온다."
―미래를 너무 낙관하는 것 아닌가.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하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더워 해외로 나갈 충동이 생긴다. 땅은 크지 않고 북한 중국 일본 등에 막혀 있어 섬나라와 다름없다. KTX 등 교통이 발달해 국내는 모두 당일 코스가 됐다. 여행을 생각할 땐 해외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미 겨울에 동남아에서 한두 달씩 살다 오는 분들도 많다. 영국이 우리와 비슷하다. 섬나라이고 사계절이 있다. 영국 국민들은 거의 100% 해외여행을 다닌다. 우리 소득 수준이 곧 3만달러가 넘는다. 4만달러, 5만달러가 되면 해외여행은 일상화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싸구려 여행상품이나 억지 쇼핑 코스 등으로 소비자 불만이 끊이질 않는다.
"끊임없이 지켜보고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반성도 필요하다. 하지만 쇼핑 코스는 필요악이란 점도 인정해야 한다. 정해진 스케줄 맞추다 보면 따로 물건 살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단, 주요 관광을 빼먹으면 안 된다. 저가 패키지 상품도 살아남을 것이다. 친구 중에 서울 강남 부자가 있는데 꼭 우리 상품보다 30% 더 싼 여행을 다닌다. 고급 호텔이나 맛있는 음식은 필요 없다고 한다. 그 돈으로 원하는 거 사고 다른 걸 즐긴다는 것이다. 그 저렴한 여행 상품 만든 회사 사장을 만나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고 말해줬다."
◇IMF 외환위기 때 업계 1위 올라… "사람이 전부다"
하나투어는 1997년만 해도 업계 5위권 회사였다. 천지개벽은 IMF 외환위기 때 일어났다. 여행업계가 초토화된 시기, 하나투어는 6개월 만에 업계 1위로 올라섰고 그 이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때 여행업계는 한마디로 풍비박산이 났다. 그런데 하나투어만은 폭풍 성장을 했다. 비결이 무엇이었나.
"전 직원에게 약속했다. 한 사람도 구조조정하지 않겠다고. 당시 여행업계는 초상집이었다. 상위 10개 업체 중 5개가 부도났다. 살아남은 곳도 직원 80% 이상을 해고했다. 그럴 때 나가라고 하면 죽으라는 말밖에 안 된다. 여행업은 사람이 자산이다. 아니 전부다. 그걸 잃고선 회사를 끌고 갈 수가 없다. 반년만 참고 기다리면 기회가 올 거라고 봤다."
―사정이 어려운 건 다른 회사와 마찬가지였을 텐데.
"1998년 1·2월 해외 여행객이 전년도에 비해 95% 줄었다. 한 명도 모객하지 못한 날도 수두룩했다. 여행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는 게 불가능했다. 직원들에게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이겨내자고 호소했다. 월급은 50%로 깎았고 모든 경비는 최소로 줄였다. 2년 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 밤에 잠을 푹 자본 적이 없다."
―어려운 사정은 참을 수 있지만 비전이 없으면 버티기 어렵다. 당시 여행업이 조만간 살아날 거라고 어떻게 확신했나.
"여행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인솔자 생활을 하면서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때 넓은 세상을 보면서 배웠다. 1983년쯤 이스라엘에 갔는데 그 나라 역시 IMF 외환위기를 겪었지만 곧 여행 수요가 회복됐다. 북유럽도 그랬고 러시아도 그랬다. 경제 체질이 튼튼하고 교육 수준이 높은 나라는 위기를 곧 극복한다는 걸 눈으로 봤다. 그래서 우리도 6개월만 견디면 고객이 10%, 20%로 늘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 회복 속도가 빨랐나.
"1998년 1·2월엔 정상 월급의 50%도 못 줬는데 3월엔 60%, 4월엔 80%, 5월부턴 100%를 줬다. 사람이 부족해 인턴사원을 뽑았다. 비로소 사람 역할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회사는 금방 회복하지 못했다.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180명 직원 중 30여명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회사를 그만뒀다. 하지만 항공권 발권, 상품 기획·개발 등 핵심 인력은 그대로 남았다. 여행 수요가 다시 늘자 물량이 한꺼번에 우리 쪽으로 쏠렸다."
박 회장은 "2003년 초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유행 때와 2008년 가을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국제 금융위기 때도 직원을 감원하지 않았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와도 걱정하지 않는다. 직원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1985년 박상환 하나투어 회장이 해외여행 인솔자(TC)로 이집트 피라미드에 갔을 때 찍은 기념사진. 당시는 양복을 입고 손님들을 안내했다. / 하나투어 제공
◇해외여행 인솔자에서 창업자로
그는 중앙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당시 업계 1위 고려여행사에 입사했다. 원래는 무역회사에 가고 싶었다. 대학에서 영어교육과를 택한 것도 영어로 먹고살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역회사 취업엔 번번이 실패했다.
"여행사도 영어 많이 쓰고 외국 자주 왔다 갔다 한다기에 지원했다. 입사 이후에도 한동안 무역회사 꿈을 포기하지 못했다. 달러를 쓰기보다 버는 수출 역군이 되고 싶었다."
―1989년 여행자유화 이전이 오히려 돈 벌기 편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30명 단체가 해외여행을 가면 2000만~3000만원이 남았다. 서울 압구정동 아파트가 2000만원대였던 시절이다. 개인 수입도 괜찮았다. 막내 사원인데도 대기업 초임의 3~4배는 벌었다. 특히 여권 만들면 상당한 부수입도 생겼다."
―여권 발급이 그땐 매우 중요한 일이었나 보다.
"여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사회적 신분을 의미했다. 돈 많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여권을 만들어주면 수고비를 받곤 했는데 신입인 나도 한 건으로 월급의 절반을 받았다. 집 사고 땅 사고 부자 된 사람들이 많았다. 여권 만드는 직원을 '껀돌이'라고 했다. 회사는 그들을 극진히 대우했다. 껀돌이들은 외무부 여권과 직원들과 잘 지냈다. 상납도 하고…. 수입은 좋았지만 계속 그런 일을 하고 싶진 않았다. '몇 십 년 후 내 모습은 이게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1982년 그는 제1기 해외여행 인솔자(TC)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지원자가 구름같이 몰렸다. 최종 합격자(영어권)는 48명. 고려여행사 직원 160여명 중 그를 포함해 단 2명이 합격했다. 그는 "TC 자격증을 딴 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고 했다. 이후 6~7년 동안 70개국 이상을 돌아다녔다.
―군사정권 시절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다녔으니 주변에서 부러워했겠다.
"해외 갔다 오면 친구들이 기다렸다. 양주 마시는 날이다. 12년산이 15달러였던 조니워커 블랙이 최고였다. 일본 갈 땐 코끼리밥솥과 무선 전화기를 사달라는 부탁이 많았다. 여성들에겐 랑콤 콤팩트가 인기였다. 손님들은 재력이 대단했다. 5000달러짜리 롤렉스 시계를 두 개, 세 개씩 사는 사람도 많았다. 외화 소지 한도가 3000달러였는데 2만~3만달러씩 갖고 나가더라. 돈을 얼마나 많이 갖고 가느냐가 능력이었다.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여행업에 회의가 들기도 했겠다.
"가장 비애를 느꼈던 건 나 또한 불법을 저질러야 했다는 거였다. 외국 현지에서 호텔·식사 비용을 내려면 꽤 큰돈을 갖고 나가야 했다. 30명 단체면 5만달러 정도가 필요했다. 해외 송금도 안 되고 신용카드도 안 되는 때였다. 현실과 동떨어진 규제도 문제였지만 어쨌든 당당하지 못한 일 아닌가. 공항에서 발각돼 망신당하고 빌고 사정해서 간신히 빠져나온 적도 있었다."
―여행 인솔자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무엇을 배웠나.
"많은 걸 버려야 한다는 걸 배웠다. 돈과 사람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어느 정도 덜어낸 것도 큰 힘이 됐다."
―그 나이에 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나.
"어릴 때부터 내 삶의 기둥인 어머니를 잃으면 어쩌나 늘 걱정했다. 한번은 인도 갠지스강 인근 마을에 갔다.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을이었다. 돈을 모아 자신을 화장할 때 쓸 장작을 구하는 노인들의 무표정하지만 편안한 모습을 보며 인간에게 죽음과 삶이란 하나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고객 때문에 힘든 일 많았을 것 같은데.
"함께 TC 자격증 딴 동료는 출장을 딱 한 번 갔다 와서 그만뒀다. 나도 '이러다 미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영국에선 할머니 두 분을 잃어버렸다 공항에서 만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TC 경력은 회사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 그 경험으로 남들은 생각지 못한 상품을 아주 싼 가격에 내놨다. 사건·사고가 발생해도 안달하지 않고 기다리는 법도 배웠다."
박 회장은 1989년 동료 몇 명과 함께 국일여행사(지금의 모두투어)를 창업했고, 1993년엔 다시 국진여행사를 만들었다. 국진여행사는 1996년 하나투어로 이름을 바꿨다.
◇자식에게 떳떳한 아빠
―무역회사 꿈 그만 꾸고 여행업에 올인하겠다고 결심한 건 언제부터인가.
"1980년대 들어 부분적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됐고 1989년엔 완전 자유화가 됐다. 누구나 해외에 나갈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새로운 차원의 여행이 시작될 거라고 봤다. 여기서 내 길을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과 이후는 어떻게 달랐나.
"1980년대 일정은 동남아 15일, 유럽 20일이 최소였고 여행지는 10여곳 이상이었다. '나 왔다'고 증명사진 찍기 바빴다. 1990년대엔 일정이 10여일 안팎, 나라는 4~5개국으로 줄었다. 지금은 4~5일짜리 일정에 한 국가 또는 한 도시만 가는 상품도 쏟아져 나온다. 개성이 중시되는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것 같다."
―여행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인가.
"그렇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것도 그 때문이다. 시대는 바뀌는데 회사는 구태를 답습했다. 여권 만드는 데 치중하고 단체 한 팀으로 큰돈 버는 구조에 집착했다.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 동료들과 국일여행사를 만들었다. 중남미와 지중해, 남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전문 상품을 만들어 팔았다. 첫해 3억5000만원을 벌었고 3년 후 30억원을 벌었다. 대박이었고 정말 신났다."
―그렇게 잘나갔는데 국진여행사로 독립한 이유가 무엇인지.
"회사 상장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렸다. 직원이 주인의식을 가지려면 주인이 돼야 한다는 게 소신이다. 회사가 클 때 직원도 부자가 될 수 있어야 희망이 있는 거다. 마음 맞는 사람들이 따로 나왔다. 초기 자본금도 나와 직원들이 함께 모았다. 신입 직원들은 최소 500만원 정도의 주식을 보너스 대신 줬다. IMF 위기를 넘긴 것도 이런 힘이었다."
―평소에 '그때 돈은 많이 벌었지만 미래를 향한 꿈이 없었다'고 얘기한다던데.
"여행사 직원이었을 때 돈 많이 벌었다. 세금 안 낸 소득도 많았다. 해외여행에서 10% 이상 수익 내면 안 된다는 등의 엉터리 규정 때문이었다. 어기면 영업 정지였다. 소득 신고를 누락해 세금을 안 내는 게 업계 관행이었지만 그게 심적으로 힘들었다. 자식에게 떳떳한 아빠가 되고 싶었다. 지금은 당당하고 마음이 편하다."
하나투어는 2000년 여행업계 최초로 코스닥에 상장했고 2006년엔 영국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박 회장의 회사 지분은 초기 35%에서 최근 8.26%가 됐다.
◇6남매 키운 어머니, 가정이 제일 중요해
그의 할아버지는 전남 곡성에서 알아주는 부자였다. 무역으로 큰돈을 벌었고 땅도 많아 천석꾼으로 불렸다. 하지만 6·25 전쟁을 전후해 가세가 기울었다. 막내인 아버지는 정미소와 논 50마지기를 물려받았지만 재산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정은 어머니가 지켰다. 그는 "어머니는 평생을 일만 했다. 단 하루만 어머니가 노는 걸 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떤 일을 하셨나.
"젊었을 땐 행상을 했다. 밭일도 하고 식당일도 했다. 서울에 올라오신 이후엔 파출부 일을 나가셨고 나이 드신 후에도 봉제 공장에서 나오는 옷의 실밥 따는 일을 했다."
―생활비나 용돈을 드리지 않아서 그러신 것은 아니었을 텐데.
"주식이 많이 올랐을 땐 내 재산이 꽤 많았다. 제발 일 좀 그만하시라고 해도 '돈은 있을 때 아껴야 한다'고 하셨다. 병나면 돈이 더 들어간다해도 몰래 일을 다니셨고, 용돈 드리면 한 푼도 안 쓰고 모았다가 자식들, 손자들에게 나눠주셨다. 멀미가 심한 어머니는 단 한 번도 해외여행을 가보지 못했다. 아들이 여행사 사장인데, 어머니를 여행 보내드리지 못한 것, 그게 지금도 한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6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배운 교훈이 있다면.
"철저한 근면과 성실이다. 끊임없이 성실하지 않으면 잘 굴러가던 자전거 바퀴가 쓰러진다. 돈 많이 벌어 인생을 즐기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삶을 보면서 한눈팔며 사는 삶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가정이 가장 중요하다는 교훈을 배운 것도 큰 자산이다."
하나투어가 요즘 주력하는 경영 목표인 '스마트워킹(smart working)'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일과 삶이 함께하는 직장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여직원이 많은 여행업계 특성상 아이 키우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 들어 하나투어 전체 직원 2200여명 중 재택근무를 하는 사람은 81명, 출퇴근 시간을 맘대로 조절하는 유연근무를 하는 사람은 300여명 정도다. 작년의 두 배다.
그는 말한다. "어머니가 가정을 버렸다면 우리 6남매는 어떻게 됐을까.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누구 한 사람에게라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대단한 것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게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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