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8. 02:25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고 혼자 다 갖는 게 ‘독점’,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게 ‘독재’,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고 자기 혼자만 옳다고 믿는 게 ‘독선’, 다른 형제 없이 하나뿐인 자식이 ‘독자’다. 그러니 ‘독립’이란 본래 주변에 다른 사람 없이 혼자만 서 있다는 뜻이다. 중국인들이 사용하는 중국어사전은 독립을 “혼자만 서 있음. 혹자는 남에게 의존하거나 예속되지 않는 관계를 가리킴”이라고 정의한다. 


나는 일본인들이 만들어 중국으로 역수출한 번역어 중 최고의 걸작은 낭만(浪漫)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물결이 이리저리 일렁임’ 정도 될 텐데, 일본인들이 romance에 상응하는 단어로 만들어낸 신조어였다. 이와 거의 비슷한 뜻을 가진 한자어로 풍류(風流)가 있었음에도 왜 굳이 신조어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단어는 한자 문화권 전체로 퍼져 나가 중국인 중에도 이 단어가 중국 고전에서 유래한 것인 줄 아는 사람이 많다.
몇 해 전, 소규모 학술 세미나에 일본에서 번역의 역사를 전공하는 학자 한 사람이 참석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independence를 독립으로 번역한 이유가 뭡니까?” 사람을 허탈하게 만드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자립으로 번역하는 게 나았을 텐데, 당시 일본인들은 한자의 미세한 뉘앙스 차이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모국어가 아니니까요.” 순간 중국인들이 그 번역어를 역수입해 간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들었으나, 그에게 묻지는 않았다. “혹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은 다 엎드려 있는 상태에서 혼자만 일어서겠다는 의지가 작용하지는 않았을까?”라고 혼자 생각하고 말았다. 

일본인들이 유럽 세계와 조우하기 훨씬 전에 ‘성경’을 접했던 중국인들은 the God에게 천주(天主)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에는 별로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과 다른 유럽인의 우주관은 용인했지만, 천하관의 차이는 어떻게 해도 극복할 수 없었다. 천주의 독생자에 상응하는 한자어 ‘천자(天子)’는 이미 세속에서 절대적 권능을 행사하는 황제의 몫이었다. 그들은 부득이 발음도 비슷하고 땅을 감독하는 자로 해석할 수도 있는 ‘기독(基督)’이나 발음만 비슷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야소(耶蘇)’라는 단어를 만들어 대응시켰다. 

얼마 전 한국 언론들이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SNS에 쓴 짧은 문장을 줄줄이 오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주일에 10시간 이상씩 10년 넘게 영어 공부한 사람들이, 그것도 평균 수준 이상인 사람들이, 영어사전을 옆에 두고도 오역을 한다. 그러니 아무런 사전 지식도, 참고할 문헌도 없이 처음 외국어와 맞닥뜨린 사람들은 어땠을까? 

최초의 번역은 자기들의 언어와 결합한 지식으로는 들여다볼 수 없는 혼돈의 세계와 교류하는 일이었다. 교류 수단을 얻기 위해서는 자기 문화 전체와 상대 문화 전체를 맞대면시켜야 했다. 둘 사이에서 일치하는 것들을 찾아 대응시키고, 비슷한 것이 있으면 변형시키며, 없는 것은 창조해야 하는 버거운 일이었다.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알려는 의지를 총동원해야 했으나, 그래도 완벽한 결과를 얻을 수는 없었다. 대통령, 장관, 목사처럼 격에 안 맞는 단어들이 만들어졌는가 하면, 가방, 구두, 돈가스처럼 상대도 모르고 자기들도 모르는 단어들까지 발명되었다.

유럽인들이 전 지구를 무대로 해상활동을 개시한 15세기 말부터, 일본과 중국에서는 유럽인들의 언어를 통해 유럽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본격화했다.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서구세계와 접촉한 조선은 이 점에서도 후발 주자의 이점을 톡톡히 누렸다. 일본인과 중국인들이 대응시킨 단어들을 가져다 쓰기만 하면 되었으니. 그러나 한국 문화 전체를 놓고 보자면 결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번역할 기회를 잃은 탓에, 한국인들은 자기 문화 전체를 성찰하고 서구 문화 전반을 주체적으로 관찰할 기회도 잃었다. 

19세기 말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유래한 신문물에 대한 한국인의 지식 세계는 중국 번역어와 일본 번역어의 공동 지배하에 있었으나, 20세기 이후에는 일본이 이에 대한 지배권마저 독점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일본어로 번역한 글을 그대로 읽거나,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가벼운 수고만 하면 되었다. 1980년대 초중반까지 1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인들은 별 문제의식 없이 이 편리함을 누렸다. 

그런데 이 뒤로 일본 번역어를 매개로 한 간접 번역이 줄어들었다고 해서 번역어를 창조하려는 의지가 커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번역어 만들기를 포기하거나, 우리말의 ‘미세한 뉘앙스 차이’를 모른 채 번역어를 만들고는 억지로 유포시키려는 경향만 강해진 듯하다.

이런 현상을 잘 보여주는 단어가 근자에 횡행하는 ‘혐오’다. 우리말 어감으로는 ‘징그럽거나 끔찍하거나 더러워서 싫어함’에 해당할 텐데, 이 단어 하나에 증오, 분노, 불신, 공포, 멸시, 경시, 비하, 조롱, 심지어 숭배의 의미까지 다 구겨 넣는 게 당연한 일처럼 되었다. 일본과 중국에서는 혐오, 불신, 공포, 차별로 나누어 번역하는 단어들도, 한국에서는 ‘혐오’로 통일돼 있다. 같은 단어에 다른 뜻을 담다 보니 상호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소통에 장애가 생긴다.

공자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말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했다. 같은 말에 다른 뜻을 담는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세상이 평화롭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게다가 자기 문화 전반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남의 문화에서 탄생한 단어를 함부로 번역하는 것은, 자기 문화에 대한 무지를 심화하는 일이다. 

국립국어원에서든 지식사회에서든, 올바른 번역어를 찾거나 만들기 위해 분발했으면 한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252111015&code=990100#csidx61549b83d14692dab9ef8a84251cc9b 

Posted by 겟업
2018. 1. 8. 02:24

사회적기업도 성공과 실패의 과정이 여느 기업과 다를 바 없다. 품질경쟁력과 가격경쟁력이 동시에 있어야 한다. 일반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추구한다면 사회적기업은 사회서비스나 취약계층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적 가치가 뛰어날지라도, 정부 지원 기간인 3~5년 사이에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다면 사회적 가치를 실현해보지 못하고 폐업하게 된다.나는 사회적 가치 그 자체가 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었고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사람들은 날 보고 사업의 ‘ㅅ’자도 모르는 이상주의자라고 말했지만 우리가 꿈꾸는 공공성이 살아있는 기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우리만의 차별성을 부각하고 농촌과 도시의 선순환 사이클을 만들기 위해 ‘시골 어르신들이 농사 지은 것을 도시 어르신들이 발효빵으로 만든다’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리고 전주만의 정체성을 담은 특색 있는 제품을 고민하면서 ‘전주비빔밥’을 빵에 접목시켰다. 마지막으로 고식이섬유와 저칼로리 빵을 만들기 위해 각종 신선한 채소를 듬뿍 넣고 담백하고 매콤한 전통 고추장 소스를 만들어 넣었다.
 ‘전주비빔빵’은 그런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전주비빔빵을 만드는 ‘천년누리’는 사회복지 노인일자리 사업단에서 자본금 200만원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전문 기술도 부족하고 시장 경쟁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시장에 나왔다. 하지만 “가능성을 찾아 사람들이 힘을 합치면 못해낼 일이 없다”는 관점으로 고민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전주비빔빵은 재료도, 맛도 좋지만 어르신들의 인심 덕분에 속도 실하고 크기도 크다. 지혜와 경륜이 있고 인내심이 강한 어르신들은 오랜 시간 천천히 숙성시키는 우리밀 발효빵을 만들었다. 우리밀 빵의 건강함과 어르신들의 손맛으로 입소문이 난 전주비빔빵 브랜드는 희소성을 지니게 됐다.

전주비빔빵은 1년 전보다 사업은 커지고 고용인원은 4명에서 30여명 가까이 늘었다. 월 500만원이던 매출은 월 1억원 가까이로 성장했다. 비빔빵뿐만 아니라 각종 건강 빵들이 모두 담백하고 속이 튼실해 소비자들의 재구매율이 높다. 어르신들은 단팥빵이나 비빔빵뿐 아니라 유럽의 치아바타, 크루아상, 호밀샤워도, 파이 등 세련된 빵도 아주 잘 만드는 기술자로 훈련되고 있다. 소비자들은 건강한 빵으로 착한 기업을 운영해줘서 고맙다는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빵을 구매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왜 빵이냐고 물었다. ‘빵’은 우리 어머니들이 차려주신 생명의 밥상을 의미한다. 우리가 만드는 빵은 배고픈 사람들의 허기를 채우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매일매일 살아가는 치열한 일상 속에서, 자신의 몸 하나도 지탱하며 살아가기 힘든 이기적인 세상 속에서, 사회적 가치가 수익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한 순간 한 순간 눈물이 울컥하는 감동을 준다. 이제 ‘전주비빔빵’의 다음 목표는 지역 취약계층 100명의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사업 초반에 사업의 ‘ㅅ’도 모르던 이상주의자의 믿음이 대한민국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그 길을 함께해준 정부의 사회적기업 육성 지원 정책에 감사한 마음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든든한 버팀목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회적 경제의 주체이자 소비자인 우리 모두라고 말하고 싶다. 



장윤영 천년누리 대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052107015&code=990304#csidx4179d49aad843759df44100e00eeea4 

Posted by 겟업
2018. 1. 8. 02:23

요 근래 정치권의 동성애 호들갑을 보노라니 좀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하다. 마치 오랫동안 외항선이라도 타다 내린 것 같다. 언제부터 동성애 문제가 고위 공직자의 역량과 자질을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 됐나 싶어서다.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라고 거칠게 다그치는 국회의원, 곤혹스러운 표정의 대법원장 후보자, 그리고 21세기 한국 사회에 등장한 황당무계한 ‘후미에’(17세기 일본 에도막부가 기독교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을 국민들. 이미 후미에의 피해자도 나왔다.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는 졸지에 ‘동성애 옹호자’로 몰렸다. 군형법의 ‘군대 내 동성애 처벌’ 규정이 불명확하다는 이유로 위헌 의견을 냈던 것이 동성애 찬성으로 ‘둔갑’한 것이다. 모호한 법으로 피해 보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법관의 양심에 따른 판단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 후보자, 항문성교를 연상하게 하는 후배위를 선호하죠? (녹취 파일을 흔들며) 그동안 관계했던 여성의 증언이 확보돼 있어요. 인정하세요.”
해당 군형법을 보면 ‘군인이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하면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 밖의 추행’이 자의적으로 해석되거나 악용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이 ‘동성애를 퍼뜨릴 위험인물’이라는 증거가 됐다. 비약도 이런 비약이 없다. 이 같은 논리가 별문제 없이 통용되는 분위기, 게다가 급격히 퇴행하는 정치인들의 수준을 보노라면 다음과 같은 문답이 오가는 청문회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저는 상식과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부당한 차별을 하지 말자, 애매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법조문을 정비하자. 현재 동성애와 관련한 논의의 수준은 이 정도다. 그런데 이에 대한 동의가 군대의 기강을 무너뜨리고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와 동일시된다. 또 이것이 물꼬가 되어 소아성애, 수간, 시체상간까지 비화되리라 단언하고 군대 가야 할 자녀를 둔 부모들의 불안감을 강변한다.

듣다 보면 동성애자만큼 무서운 존재가 없다. 페스트 저리 가라 할 만한 치명적 역병이다.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받는 그 순간부터 동성만 보면 흥분해서 들이댈 좀비 같은 존재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통제불능 성도착자들이다. 좀 있으면 ‘나는 동성애자가 싫어요’ 외치다 죽임을 당했다는 군대 괴담까지 나올 기세다. 이렇게 끔찍한 존재들이 널렸는데 그동안 사우나는 어떻게 다녔으며 화장실 소변기는 어떻게 이용했나. ‘항문성교하면 처벌한다’는 얄팍한 보호막 하나로 안심하고 살아왔다는 말인가. 같은 논리라면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이성애자들은 이성만 보면 흥분해서 껄떡거리는 존재들이다. 남녀가 함께 모이는 학교, 회사, 각종 공동체는 언제든 난교파티가 벌어질 공간이다.

우려해야 하는 것은 남의 성적 지향이 아니다. 동성 간이든 이성 간이든 물리력이나 지위 등을 이용해 상대에게 가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이다. 기득권, 다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차별과 탄압이다.

동성애가 정치권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한 데는 보수 개신교계가 큰 몫을 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죄악에 물들어가는 세상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떨쳐 일어날 만큼 ‘순수’한 신앙심 때문일까. 안타깝게도 냉전·반공체제를 발판으로 함께 성장했던 수구보수체제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헤게모니를 되찾으려는 생존전략이라는 것을, 유통기한 지난 색깔론과 종북 타령을 대신해 혐오의 대상으로 삼기에 적절한 동성애를 선택했다는 것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게 아니라면 성경에 언급된 그 수많은 죄들이 지금도 도처에서 횡행하는데 왜 동성애에만 목숨 거는 건지 이해할 길이 없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9182104015&code=990100#csidx171f4b18366cf428816e6b50b4e1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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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2:16

바디프랜드는 안마의자가 노년층 전유물 또는 실버 제품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기업이다. 건강에 관심이 높은 30, 40대도 안마의자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인식을 만들어 대중화에 성공했다. 아예 젊은층을 겨냥한 힐링 카페 ‘바디프랜드 파크’도 최근 시작했다.

정수기 렌털 사업으로 성장한 코웨이는 공기청정기, 비데 시장 점유율도 1위다. 코웨이는 이들을 모아 ‘환경가전’이라고 부른다. 가입자 건강과 직결되는 제품군이라는 뜻이다. 30∼50대 주부층이 주 고객이다. 

바디프랜드와 코웨이에 관심을 가졌던 곳이 있다. SK그룹의 사업형 지주회사 SK㈜다. SK㈜는 두 기업을 통째로 사거나 지분 투자라도 하고 싶어 했다. 반도체와 정유·화학, 이동통신사업을 주력으로 삼는 SK의 지주사가 왜 안마의자나 정수기에 눈독을 들였던 걸까. 

사실 SK㈜는 제품보다는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30∼50대 가입자 정보와 네트워크에 관심이 컸다. 평균 렌털 기간인 5년간은 가입자들의 집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살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플랫폼 비즈니스’다. 바디프랜드와 코웨이의 고객들은 제품 관리나 점검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현관문 잠금장치를 풀 준비가 돼 있었다. 두 기업이 쌓아온 신뢰야말로 플랫폼 비즈니스에서는 막강한 힘이 될 수 있다.  

SK㈜가 플랫폼 비즈니스에 관심을 가진다는 단서는 또 있다. 이달 초 SK㈜는 미국 개인 간 차량 공유업체 ‘투로’에 지분 투자를 했다. 단순히 차량공유 서비스에 투자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투로 경쟁력의 핵심은 ‘모빌리티(이동성) 플랫폼’이라는 데 있다. 



SK는 국내에서 ‘이동’이란 단어로 상상할 수 있는 과정 상당수에 대한 사업을 하고 있다. 우선 렌터카(SK렌터카)와 차량공유 서비스(쏘카)를 갖고 있다. 가는 길은 내비게이션(SK텔레콤의 T맵)이 알려준다. 기름을 넣을 주유소(SK엔크린)도 한 식구다. 결제나 멤버십 할인뿐 아니라 자동차 수리까지 SK라는 한 울타리 아래서 해결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아직은 계열사마다 흩어진 퍼즐 조각에 불과하다. 결국 이 조각들로 확실한 밑그림을 그려보겠다는 게 SK의 목표다. 자동차를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SK는 이들 사업 간 시너지로 언제든 ‘도로 위 점령자’가 될 잠재력을 확보하고 있다. 투로 지분 투자는 이 그림을 해외로까지 확대해보겠다는 장기 플랜의 일환일 것이다.


SK그룹이 안마의자, 정수기, 차량공유업체에 손길을 뻗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랫폼 비즈니스의 가치는 사용자 수가 결정한다. 이들 사용자 집단이 만들어내는 데이터와 네트워크 효과들이 곧 플랫폼을 가진 기업 가치다. 모바일을 기초로 한 산업 변화가 주로 ‘연결’에 집중돼 왔다면, 이제는 누가 그 위에 지붕을 지을 것인지가 핵심인 시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주인공은 인공지능(AI)이나 사물인터넷(IoT) 같은 기술이 아니라 플랫폼을 구축하는 자다”라는 분석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SK의 주력 사업은 에너지와 화학, 이동통신, 반도체였다. 각 산업 간의 장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지금 SK는 굳이 잘하는 사업 영역에만 머무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게 분명하다. 한국에는 아직 건강과 의료, 자동차, 교육, 쇼핑 등 너무나도 많은 영역의 플랫폼들이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


국내 대기업 중 SK가 그걸 가장 먼저 눈치 챘다.

서동일 산업부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70926/86524921/1#csidxf6a6c4e20166c3fa890b540fb26ec8a 

Posted by 겟업
2018. 1. 8. 02:14

‘예술은 관람자가 필요하다’는 말은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 철학자 디드로가 편찬한 백과사전에서 ‘비평’을 정의한 장프랑수아 마몽텔(1723~1799)은 이 말을 통해 예술의 조건을 적시했다. 작품이 예술이 되려면 관람자 자신이 의미를 만드는 협업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예술은 늘 현재진행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후보인 송상희의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는 세 개의 스크린에 펼쳐진 영상이다. 지역마다 변형돼 전해 온 ‘아기장수’ 설화를 얼개로 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아기는 폭정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염원하던 영웅이 될 운명이다. 하지만 비천한 신분의 영웅은 곧 역적이 되는 법. 살려두면 가족은 물론 온 마을이 관군에게 몰살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부부는 돌을 굴려 아이를 죽인다. 주인공 아기장수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지만 마을 사람들과 권력의 손에 재차 죽임을 당한다. 
  
1970년대 말 희곡으로 만들어진 설화는 당시 군부정권의 폭력성과 민중의 무력감을 이야기에 빗대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야기는 전 지구적 맥락으로 확장되어 민족 간 전쟁과 이념의 차이로 희생된 수많은 약자를 대변한다. 
  

송상희 영상작품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의 한 장면. 역사와 설화 속 희생자들 얘기다. [사진 송상희]

송상희 영상작품 ‘다시 살아나거라 아가야’의 한 장면. 역사와 설화 속 희생자들 얘기다. [사진 송상희]



카메라는 상처를 대하듯 땅을 어루만진다. 바이마르 유대인 강제수용소, 홋카이도의 폐탄광, 노근리 쌍굴다리, 보도연맹 학살지에는 수풀이 우거지고 들짐승이 다닌다. 
  
‘우리는 같은 사람을 쫓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이 아닌가!’ 인종 청소, 강제징용과 양민 학살의 희생자는 작품 속에서 기형이 된 물고기와 곤충의 입을 빌려 인간의 잔혹성을 꾸짖는다.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 아기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불편한 심기의 관람자가 선뜻 자리를 뜰 수 없는 이유는 아기장수를 죽이자고 공모하는 이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죄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권력에 거스르지 않기 위해 타인의 고통에 귀를 막고 공동체를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고 폭력을 합리화하고 방관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곧 추석이다. 많은 이가 분주한 삶의 자리를 떠나서 나고 자란 고향과 조상이 묻힌 땅을 밟을 것이다. 죽은 자를 거두고 생명을 품어 온 땅은 차별을 두지 않는다. 예술이 전달하는 설화와 역사의 교훈이 무거운 것은 아직도 평화와 포용이 요원한 현실의 무게 때문이다. 
  
이지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 

http://news.joins.com/article/21985969

Posted by 겟업
2018. 1. 8. 01:46

“끝판왕”은 원래 컴퓨터 게임의 ‘최종 보스’다. 하지만 의미가 확장되면서 일상어가 되었다. 유사한 말로 ‘종결자’도 꽤 유행한 적이 있다. 기표는 달라졌지만 뜻은 비슷하다. 더 이상 승급이 필요 없는 최종 단계 또는 최상의 무엇. 이를테면 “학벌의 끝판왕(종결자)은 하버드대학교”라는 식이다. 끝판왕에 대한 열망은 끝없이 성장해야 하는 피로감의 반작용인 한편, 모든 걸 줄 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비교서열 강박의 적나라한 노출이다.


또 재밌는 건 “가성비”라는 말이다. 가성비는 ‘가격 대비 성능 비율’의 줄임말이다. 같은 가격으로 살 수 있는 최선의 상품을 “가성비템”(가성비+아이템)이라고 부른다. 가격과 품질이 제각각인 수많은 상품들 사이에서 가성비템은 ‘최적의 균형점’이다.


가성비에 대한 집착은 단순히 경제적 효율을 추구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일종의 낙인 공포이기도 하다. “호갱님”(호구+고객님)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게 공포인 이유는 호갱님이 곧 ‘정보사회 무능력자’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끝판왕 열망’과 ‘가성비 집착’은 얼핏 이율배반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상호의존적이다. 가성비는 끝판왕의 환상은 유지하되 그것을 향한 광기가 시스템을 붕괴시키지 않도록 하는, 말하자면 압력분출 밸브로 기능한다.


견주고 줄 세우는 행위 자체는 특별히 비난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대상과 기준이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적 삶의 영역마다 고유한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장(field) 개념으로 설명한 적이 있다. 각 장마다 나름의 판돈과 환상-공모가 있고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장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게 만든다.


그런데 한국은 하나의 정점을 향해 모두가 전력질주하는 사회다. 어떤 분야에서 업적을 쌓아 일가를 이룬 사람도 청와대가 부르면 쏜살같이 달려간다. 지역에서 성공하면 중앙(서울)이 순식간에 빨아들인다. 여러 개의 장이 병존한다기보다 단지 거창한 중심부와 황폐한 주변부만 존재할 뿐이다. 어떤 이에겐 역동적인 사회일 테지만 다수에겐 무간지옥이다.


여러 연구를 통해 알려졌듯 한국의 물질주의는 세계에 유례없는 특이성을 보인다. 어느 나라든 일정 정도 경제가 성장한 뒤에는 개인의 자유, 참여, 생태주의, 타인에 대한 개방성 같은 탈물질주의 가치에 대한 선호가 커진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경제성장, 안전, 법질서, 타자에 대한 폐쇄성 등의 물질주의 지향이 기이할 정도로 강하게 유지된다. 그야말로 ‘장기 물질주의 사회’다. 비교하고 서열화하려는 강박은 이런 강력한 물질주의와 깊게 연관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해 전국 1등부터 전국 꼴찌까지 줄 세우려면 기준은 물질적 가치여야 한다. 추상적 가치는 비교하기 어렵다.


한국의 물질주의는 왜 이토록 질기고 또 강한가? 이유를 크게 세 가지 꼽을 수 있다. 첫째, ‘폭력성의 고착’. 전쟁의 압도적 폭력뿐 아니라 식민지 경험과 군부독재 시기의 억압과 모멸, 분단체제가 만들어낸 군사주의, 반공주의 등이 거의 한 세기에 걸쳐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분위기를 사회에 고착시켰다. 둘째, ‘서사의 과잉과 기록의 과소’. 극적 서사와 음모론은 넘치는데 성실하게 사실을 축적한 자료들은 드물고, 있다고 해도 큰 관심을 끌지 못한다. 유사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논의가 ‘리셋’되고 쳇바퀴 도는 논쟁으로 공론장에 대한 환멸만 커진다. 이런 환경에서 비평은 ‘용비어천가’이거나 ‘토황소격문’ 둘 중 하나로 소비될 뿐이다. 셋째, ‘권력 정당성의 일상적 위기’. 한국에서 정치가, 재벌, 관료 등 엘리트 권력집단이 사회적 존경을 획득한 적은 거의 없기에 권력 정당성에 대한 기대도 매우 낮다. 요컨대 권력은 원래 더러운 것이고 ‘억울하면 출세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윤리적 가치들은 냉소의 대상이 된다.


물질주의가 팽배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다양한 가치가 혼재하는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한다. 서열과 순서를 정할 수 없는 대상 앞에서 한없이 불안해지며, 자기 머리와 가슴으로 무언가를 향유하는 데에도 서툴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인간 대신 한국인을 집어넣으면 이렇게 바뀔 테다. “한국인의 욕망은 늘 똑같아서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 그 욕망은 한국인의 ‘종족 특성’이라기보다 우리가 지금껏 만들어온 역사의 산물이다.

박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7052.html#csidx7373ab820c81538b3409fdb6fc2be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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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1:26

음악평론가 강헌씨가 재즈를 설명하면서 ‘흑인 특유의 폐활량과 두툼한 입술’이라고 표현한 적 있다. 이에 음악평론가 서정민갑씨는 ‘인종주의적 표현이 아닌가’ 하고 우려한 적 있다. 물론 강헌씨는 재즈를 신체적 특징으로만 설명하지 않았다. 19세기 노예 무역과 남북전쟁, 철도와 시카고, 2차 세계대전과 뉴욕, 1960년대 정체성의 미학과 민권운동 등을 두루 언급하였다. 서정민갑씨의 우려도 조잡한 비난은 아니다. 신체적 특징에 대한 과도한 표현이 복합적인 음악 세계를 일거에 덮어버릴 수 있음을 걱정한 것이다. 


며칠 전 유튜브로 현존 최고의 재즈 아티스트 허비 행콕을 위한 헌정 공연을 보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까지 참석한 기념비적인 공연이다. 평생의 ‘지음’인 웨인 쇼터를 비롯하여 칙 코리아, 잭 디조넷, 마커스 밀러 등이 무대를 채웠으며 힙합의 절대지존 스눕 독까지 등장했다.
 이처럼 특정 예술 분야를 그 인종적이고 신체적인 특징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그러나 거부하기 어려운 심미적 풍경도 있다.


나는 한쪽 눈으로는 온갖 악기들을 윷놀이 하듯 다루는 최고 명인들의 공연을 보면서도 다른 눈으로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았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관중들의 몸짓은, 그루브를 타고 비트를 즐기는 것이었고 그에 비하여 백인 관중들의 몸짓은 간소했다. 이때, 약간의 인종적 특성과 문화적 감수성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차이’다. 특정 예술이 특정 피부색과 반드시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쇼미더머니 6>의 ‘N분의 1’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조우찬은 13살, 초등학생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까닭은 우사인 볼트 때문이다. 그가 마지막 레이스를 펼쳤다. 100m 마지막 기록은 9초95로 3위. 하지만 그의 위업은 찬란하다. 그가 이룩한 기록과 성적을 일일이 적는다면 이 지면으로도 모자랄 것이다. 그러니 개틀린처럼, 볼트라는 이름 앞에 경의를 표할 뿐, 나는 다른 얘기를 하고 싶다. 


볼트를 말하면서 대개 자메이카를 동시에 언급한다. 면적은 한반도의 20분의 1에 불과하고 인구는 대구광역시 정도로 260만여명이며 국내총생산(GDP)은 143억달러로 세계 118위의 가난한 나라다. 볼트를 비롯하여 아사다 파웰, 일레인 톰슨 같은 선수들이 성장기만이 아니라 전성기 시절에도 잔디가 듬성듬성 나 있는 트랙에서 훈련할 정도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 작고 가난한 나라가 육상의 강자가 되었을까.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벤 존슨(캐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린퍼드 크리스티(영국),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의 도노반 베일리(캐나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의 멀린 오티(슬로베니아) 등이 자메이카 출신이다. 


자메이카의 육상을 설명하면서 쉽게 떠올리는 것이 그 유전자와 토종 음식이다. 글래스고대학과 서인도대학이 200명 이상 자메이카 육상 선수들을 조사했더니 ‘액티넨 A’라는 특이 유전자가 있다는 것이다. 근육 수축와 이완을 빨리 일으키는 유전자라고 한다. 자메이카 사람들이 즐겨 먹는 참마가 선수들의 스피드를 배가시키는 데 효험이 있다는 얘기도 한다. 이러한 설명은 재즈와 흑인의 폐활량처럼, 물리적인 요인으로는 충분히 거론할 만하다. 


그러나 이런 유전자적 특징과 풍토적인 속성이 절대적인 이유처럼 표현되어서는 곤란하다. 월드컵이 열릴 때마다 국내 방송사는 줄곧 아프리카 선수들을 ‘흑인 특유의 파워’라는 말로 묘사했다. 이러한 표현은 그들이 전략이나 전술 없이 힘으로 밀어붙인다는 인상을 준다. 그 밖의 더 중요한 요인들은 이러한 오해와 편견 아래 묻혀 버린다. 나아가 제3세계의 당대적 삶 자체가 소멸된다.


다시 자메이카 얘기를 해보자. ‘타고난 기질’ 말고 그들이 이뤄낸 20세기적 성취 말이다. 자메이카 출신의 하버드대 사회학과 교수 올란도 패터슨은 특정 종목과 인종의 관련성을 의심한다. 오래전 자메이카인들은 서아프리카에서 건너왔다. 오늘날 서아프리카는 케냐 같은 동아프리카에 비해 육상을 잘하지는 않는다. 산악지대가 많은 자연 환경에서 ‘거침없이’ 달리다 보니 잘 달리게 되었다는 원시적인 해석도 거부한다. 


대신 패터슨 교수는 공중보건과 사회체육을 거론한다. 20세기 초엽, 제3세계 여러 나라들은 미국의 록펠러 재단 같은 곳의 원조를 받으면서 자국의 질병 퇴치와 보건위생 개선을 시도했다. 이 사업을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진국 의료봉사단의 능력과 헌신만이 아니라 해당 국가의 재원이 필요하다. 재정이 열악한 자메이카는 주거환경의 개선과 사회 체육의 확산을 통해 가난과 질병에서 벗어나려 했다. 상대적으로 재원이 덜 드는 달리기는 최고의 사회 재생과 활력의 수단이었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 자메이카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극대화되는 ‘라스파타리아니즘’의 분위기 속에서, 자메이카는 달리기를 통한 개인 건강 도모와 사회적 활력 신장에 집중하게 된다. 동네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달렸고 정기적으로 대회가 열렸으며 그 탄탄한 저변 속에서 곳곳에서 우사인 볼트 같은 선수가 속출했다. 이런 자메이카 육상의 핵심이 자메이카 공과대학이다. 이 학교는 ‘육상학교’를 모태로 출발하여 1960년대에 선진적인 스포츠과학을 접목하였으며 오늘날 세계 육상의 모범으로 꼽히고 있다. 이처럼 자메이카 육상은 타고난 인종적 특징이나 신토불이 음식의 성과가 아니라, 가난과 비위생의 생존 조건을 벗어나려는 자메이카의 ‘현대적 삶’의 성취다.



솔직히 여기에 밥 말리의 저항적인 레게 문화 운동까지 덧붙이고 싶으나 그 또한 과잉 해석인 듯하여 자제한다. 다만 2012년 남아공 월드컵 폐막식에서 울려 퍼졌던 밥 말리의 노래들 그리고 2006년에 맨체스터에서 직접 보았던 수많은 자메이카 축구팬들의 레게 응원이 단순히 그들의 신체적 특징이 넘실댔던 장면이 아니라, 식민과 가난의 일그러진 현대성을 저항하고 극복하려는 몸짓이었음을 기억하고 싶다. 우사인 볼트의 달리기 그리고 그의 유쾌하고도 의미 있는 세리머니 또한 그러하다. 그는 단순히 세상에서 가장 빨리 달리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사람이 아니다. 



정윤수 스포츠 평론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8072058015&code=990100#csidx90474c591318edaa7b329d8aefa9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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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1:02

작년 7월, 파리 특파원으로 부임한 지 일주일 만에 프랑스 남부 도시 니스에서 테러가 터졌다. 사망자만 86명에 이르는 대형 사고였다. 니스로 향하면서 프랑스 한국대사관에 전화했다. 워낙 유명한 관광지여서 한국인 피해자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사관 영사와 직원도 파리에서 급하게 현지로 내려가고 있었다. 파리에서 니스까지는 900km가 넘는 먼 거리. 남부에는 영사관이 없어 태권도를 가르치는 교민을 영사 협력원으로 두고 있다고 했다. 

반면 일본은 니스와 가까운 남부 마르세유에 있는 영사관 직원이 급파됐다. 일본은 파리 외에도 세 곳에 영사관이 더 있다. 외교 역량에서 차이가 있구나, 프랑스에서 일본과의 격차를 실감한 건 그때부터였다. 

파리의 상징 에펠탑 좌우 1km 사이로 한국문화원과 일본문화원이 있다. 그러나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다. 에펠탑 바로 옆 센강변에 위치한 일본문화원은 지나가다가 눈길이 갈 정도로 세련된 유리 건물로 지어져 있다. 에펠탑 건너편 두 블록 떨어진 골목에 위치한 한국문화원은 쉽게 찾기가 힘들다. 

일본문화원의 면적은 7500m², 한국문화원(750m²)의 10배다. 더 놀라운 건 프랑스가 파리에서 손꼽히는 이 노른자 땅을 1982년 무상으로 제공했다는 거다. 

두 개의 거대한 공연장에서 일본 전통 공연이 계속되는 일본문화원과 달리 1979년에 지어진 한국문화원에는 공연장이나 전시장이 없어 복도에서 전시회를 열어왔다. 10년 숙원 사업으로 내년에 문화원을 옮긴다. 부지를 매입하는 데 650억 원의 예산이 들었다. 


프랑스가 무상으로 문화원 부지를 제공할 정도로 일본 문화에 관심이 많아진 건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1800년대 중후반부터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일본의 채색목판화 우키요에를 비롯해 도자기, 차, 부채 등 자포니즘이 파리와 유럽을 강타했다.  


파리에서 40분 거리 지베르니에 위치한 프랑스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집에는 온통 일본 그림이 걸려 있다. 파리 외곽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낸 빈센트 반 고흐도 일본 마니아였다. 

우리가 일본에 전통문화를 전수했다는 자부심이 통하지 않는 나라에 사는 건 고달프다. 프랑스어가 서툰 유학생이나 주재원들은 프랑스 은행을 이용하기가 힘들어 유일한 한국 은행 지점인 KEB하나은행 파리 지점을 이용해왔다. 그런데 수지가 안 맞아 하나은행이 내년에 소매업 철수를 검토하면서 이들의 고민이 크다. 

반면 거의 모든 일본 주재원은 프랑스 현지 은행을 이용한다. 주요 프랑스 은행에 일본어가 가능한 직원이나 통역원이 있어 프랑스어를 몰라도 별 불편함이 없다. 지하철에 일본어 안내 방송이 나오고 일본어 통역원이 있는 종합병원도 있다.

파리에 파견된 많은 일본 외교관이나 주재원들은 자녀들을 본국과 같은 교육과정을 진행하는 일본 학교에 보낸다. 꼭 많은 돈을 들여 국제학교로 보내야 할 만큼 외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작다. 반면 파리에 한국어로 교육하는 한국 학교는 한 곳도 없다. 있다고 한들 그리로 보낼지도 의문이다.


프랑스인들에게 150년 전부터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앞선 1등 국가다. 문화, 경제,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그렇다. 인정하기 싫지만 일본 조상들이 이뤄낸 거다. 

이제 프랑스인들도 한국 하면 삼성과 싸이, 그리고 김치 정도는 떠올린다. 산업화와 한류, 아버지 세대와 우리 세대가 함께 이뤄낸 노력의 결과다. 그래도 우리 후손들이 조국을 자랑스러워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 150년 후 세계에서 한국은 어떤 나라로 기억될 것인가.

동정민 파리 특파원


http://news.donga.com/3/all/20170817/85856903/1#csidx977c7296f0de711ab691ddf36f0bc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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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0:57

현대자동차그룹 정의선 부회장은 6월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코나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양복 대신 ‘알로하 코나(Aloha KONA)’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 청바지와 낡은 스니커즈로 멋을 더했다. 연 매출 100조 원에 이르는 현대차그룹을 이끌 경영자, 그의 달라진 옷차림을 놓고 ‘혁신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풀이도 나왔다.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 부는 혁신의 바람을 좇다 보면 ‘공유(Share)’라는 단어와 만나게 된다. 디자인, 연료소비효율, 가격을 따져 차를 사는 시대가 저물고 필요할 때만 차를 빌려 쓰는 시대가 올 것이란 이야기가 많다. GM(메이븐), 다임러(카투고), BMW(드라이브 나우) 등 내로라하는 제조사들이 앞다퉈 카셰어링 사업을 시작하는 것도 이 바람을 거스를 수 없어서다.

늦게나마 현대차도 9월 현대캐피탈과 카셰어링 서비스를 시작한다. 이름은 ‘딜카’. 4월 서비스 시작 예정이었지만 기존 서비스들과 차별화 방법 등을 고민하다 5개월이 더 늦어졌다. 차별화로 내세운 것은 고객이 원하는 장소까지 차량을 갖다 준다는 것인데 이미 카셰어링 업계 1위 쏘카가 6월 시작한 서비스다.

현대차 측은 “‘카셰어링 시장 본격 진출’이란 시선이 부담스럽다”고 한다. 현대캐피탈과 중소 렌터카 업체에 차량을 공급하는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란 뜻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솔직히 다른 카셰어링 업체가 큰돈을 벌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글로벌 제조사들이 워낙 활발하게 사업을 하니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시작하지만…”이라고 말했다. 

실제 쏘카는 아직 돈을 못 벌고 있다. 지난해 서울과 제주를 중심으로 차량 6400여 대를 운영해 212억 원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영업이익’을 기준으로 보면 낙제점이다. 그러나 수익만 생각했다면 자동차 한번 안 만들어본 SK그룹 사업형 지주회사 SK㈜가 740억 원을 투자해 쏘카 지분 22%를 확보했을 리 없다. 베인캐피털(240억 원), 프리미어파트너스(100억 원)의 투자도 설명하기 어렵다.


미국 빅3 완성차 업체 중 한 곳인 GM은 ‘메이븐(Maven)’이란 브랜드로 카셰어링 시장에 한발 앞서 진출했다. GM은 젊은층이 몇십 달러만으로도 GM 자동차를 만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메이븐을 활용한다. 신차 위주로 차량을 배치해 초기 시장 반응을 살핀다. 소상공인 전용 서비스를 출시하는 등 시장을 세분화해 이용 행태를 분석한다. 궁극적으로 메이븐이 아닌 GM을 위한 사업이다.

국내 카셰어링 이용자들 역시 미래 현대차 고객이 될 수 있는 20, 30대가 대부분이다. 쏘카와 그린카 등은 매일 이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어떤 차량을 선호하는지 살핀다. 당장 돈을 벌지는 못해도 수백만 명을 가입자로 둔 거대한 ‘플랫폼 사업자’로 성장하고 있다. 이들이 모아온 데이터는 영업이익이란 숫자로는 설명되지 않는 가치가 있다.  


그동안 자동차 산업의 주인공은 ‘제조사’였지만 미래는 모른다. 자동차가 공짜로 도심 곳곳에 배치되고, 이용자는 모바일로 차량을 예약해 이용하는 시대가 이미 시작됐다. 현대차가 아무리 자동차를 잘 만들어도 돈은 ‘플랫폼 사업자’들이 벌어가는 현실이 오지 말란 법은 없다. ‘양복 대신 티셔츠’를 입고 신차 발표회를 했던 것처럼 변화에 발 빠르게 대응하는 현대차가 보고 싶다. 잘하는 일만 고집하다가는 금세 무대 뒤로 밀리기 십상인 요즘이다. 
   
서동일 산업부 기자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40100000109/3/70040100000109/20170809/85742215/1#csidxe8eb13b58b2d487bb1791059b07bd5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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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0:53

20년 전 지도자 잘못 만난 프랑스… 조스팽의 어리석은 주 35시간 노동
지난 10년간 폐지 노력 다 실패 
같은 시기 노동 유연성 늘린 독일… 오늘날 메르켈의 황금시대 열어
경쟁력만이 성장의 원동력이다



프랑스와 독일을 흔히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라고 부른다. 과연 두 나라는 여전히 쌍두마차인가. 두 나라의 경제력은 2000년대에 들어와 역사상 선례가 없을 정도로 격차가 커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프랑스가 법으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강제한 것은 2000년부터다. 주 35시간 노동제는 근로자의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늘린다는 좋은 목적으로 도입했지만 더 많이 일하려고 해도 일할 수 없게 만들어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프랑스 경제의 질곡이 되고 있다. 

2007년 집권한 공화당의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주 35시간 노동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됐지만 노조의 반발로 실패했다. 2012년 집권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비록 자기 당이 도입한 제도이지만 폐해를 인정하고 폐지를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현 대통령이 올랑드 정부의 경제장관으로 있다가 뛰쳐나온 것이 주 35시간 노동제 폐지가 좌절돼서다. 마크롱이 신생 정당을 창당해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것은 공화당으로도 안 되고 사회당으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마크롱의 당선이 새로운 프랑스의 시작인지는 잘 모르겠고 무능한 프랑스가 맞은 파탄의 ‘화려한 피날레’인 것은 분명하다. 

프랑스가 사회당 리오넬 조스팽 총리 주도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도입하던 무렵 독일에선 사회민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가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늘리기 위해 노력했다. 상급 노조에 의한 집단적인 임금 인상 관행이 줄어들고 기업별로 임금과 노동시간 협상이 이뤄지는 새 관행이 정착되기 시작했다. 그런 노력의 연장이 2003년 발표된 ‘2010 어젠다’다. 기독민주당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2010 어젠다’를 이어받아 독일의 최전성기를 이끌어 냈다.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에서 헤매던 2000년 무렵은 두 나라에 아주 중요한 시점이었다. 유럽연합(EU)은 1999년 단일 화폐 유로를 출범시키고 본격적인 시장 통합을 이뤘다. 역내 환율이 없어져 한 국가의 경쟁력은 직접 다른 나라에 타격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세계적으로는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서 거대한 시장이 열렸다. 이 시점에 프랑스는 조스팽이라는 전철수(轉轍手)를 만나고 독일은 슈뢰더라는 전철수를 만난 것이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


두 나라의 장기 대차대조표는 실업률과 무역수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독일의 실업률은 2005년 11.7%로 최고치를 쳤으나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지난해 4.1%까지 내려갔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2010년 독일을 추월해 2013년 10%를 넘어선 이후 지난해까지 4년 연속 두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다. 독일 무역흑자와 프랑스 무역적자의 격차는 1990년 100억 유로에서 지난해 32배인 3200억 유로로 벌어졌다. 이 액수는 일자리로 따지면 약 320만 개에 해당한다. 







주 35시간 노동제는 단기적으로는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가 있었지만 장기적으로는 프랑스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결국은 일자리를 줄이는 결정적 요인이 됐다. 본래 프랑스 제품은 디자인을 제외하고 질과 서비스 등 모든 면에서 독일 제품에 뒤떨어졌다. 프랑스는 뒤떨어지는 제품 경쟁력을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인건비에 의한 가격 경쟁력으로 따라잡았다. 그러나 제 주제도 모르고 세계 최초로 주 35시간 노동제를 실시함으로써 그 경쟁력마저 사라졌다. 



이제 프랑스에 남은 거의 유일한 경쟁력은 원전을 토대로 한 값싼 전기료 정도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온다. 사라지는 경쟁력 때문에 프랑스는 원전을 포기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다. 반면 독일은 전기료 부담을 안고서라도 원전에서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을 추구할 만큼 경쟁력에 자신이 생겼다.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을 선언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고 최저임금을 파격적으로 올리고 있다. 초과 근로시간도 줄이겠다고 한다. 우리 산업의 어떤 경쟁력을 믿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성장의 원동력은 경쟁력이다.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는 더 그렇다. 경쟁력은 아랑곳없는 소득 주도 성장은 훗날 노동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조스팽의 주장만큼이나 어리석었다고 평가받을 수 있다.
  
송평인 논설위원


http://news.donga.com/3/all/20170809/85742221/1#csidx6f19d132cbe52989d0494334a0a8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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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0:51

휴가는 가지 못했지만 지난 휴가를 되새기며 지낸다. 나는 여행 갈 때 까짓것 한두 푼에 연연한다. 4인 가족 가장인 월급쟁이 여행중독자의 숙명이다. 그런 주제에 꿈은 크다. 몇 년 전에는 8월 호주 여행을 꿈꿨다. 혹등고래가 남극을 떠나 호주 퀸즐랜드 해안으로 회유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입시지옥이 시작되기 전에 아이들에게 고래를 보여주고 싶었다.
 
우선 비행기값이 부담이었다. 고민하던 중 경제 기사에서 유명 저가항공사가 한국 취항 예정이라는 뉴스를 봤다. 바로 항공사 홈페이지에서 프로모션 e메일 구독신청을 했다. 취항 기념 초특가 행사 메일이 오자마자 숨도 안 쉬고 발권했다. 다음 해 8월 초 호주 왕복 티켓이 세금 포함, 1인당 45만원이었다. 직항이 아니라 비행시간도 길고 좌석도 좁은 건 감수해야지. 그런데 재미있는 걸 발견했다. 비즈니스석이 출발 직전까지 완판되지 않은 경우 업그레이드 받을 수 있는 옵션을 저렴하게 파는 것이다. 8월은 호주의 겨울이라 성수기가 아니니 가능성 있다고 보고 옵션을 구매했다. 작전 성공. 누워서 갔다.
 


도착 후에는 캠핑카 여행에 도전했다. 그것도 공짜로. 오히려 기름값 210불까지 받아가며 브리즈번에서 케언스까지 1800㎞를 여행했다. 호주처럼 땅덩어리가 큰 나라에서는 렌터카 회사들이 차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줄 자원자들을 구한다. 나라가 커서 원 웨이 렌털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다시 원래 위치로 차를 보내야 하는데, 기사 고용해서 보내면 인건비 들고 차 수송 차량 이용해도 돈이 드니까 차라리 일정 맞는 여행객들에게 수송을 맡기는 거다. 운 좋게 가장 크고 좋은 6인용 메르세데스 캠핑카를 잡았다.


거대한 캠핑카를 몰고 북동해안을 누비며 혹등고래를 본 후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를 향해 달리는데 이 나라에서는 로드킬이 캥거루더라. 아내에게 의기양양하게 서방 잘 만난 줄 알라고 큰소리를 좀 과하게 쳤더니 돌아온 대답. 사업가 집안에 시집간 아내 친구도 휴가 중인데, 여행 며칠 전에 온가족이 1등석을 아무렇지도 않게 끊어서 옆집 놀러가듯 뉴욕으로 갔고 공항에는 리무진과 기사가 대기 중이라신다. 하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는 임시직 렌터카 운송기사로 일하는 셈이었던 것이다. 현실은 그러하였다.
 
문유석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




http://news.joins.com/article/21824165

Posted by 겟업
2018. 1. 8. 00:39

[미이케 다카시 '할복']

250년 평화 누린 에도 시대
사무라이, 칼 대신 책 읽으며 난학 등 세계 최신 학문 접해… 메이지 유신은 '독서광' 덕분
日근대화는 험난한 과정 거쳐… 우리는 '한 사람'이 이끌었다



공감 능력이 과다하게 발달한 사람은 이 영화를 보지 않는 게 좋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할복'이란 영화다. 에도 시대(도쿠가와 막부), 한 다이묘(지방 영주)의 집에 젊은 사무라이가 찾아온다. 용건은 할복하고 싶으니 댁 마당을 좀 빌려 달라는 것이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이른바 광언할복[狂言切腹]으로 자해 예고 공갈이다. 피도 닦아야 하고 뒷일이 많다. 해서 이런 요청 받으면 귀찮아서 몇 푼 쥐여 돌려보내는 게 통례다. 그런데 "알았소, 하시오" 대답이 나와 버린 것이다. 젊은 사무라이, 당황하더니 어쩔 수 없이 칼을 꺼내는데 보니까 진짜 칼이 아니라 대나무 칼이다. 인간의 살은 두부가 아니다. 칼도 잘 안 들어가는 게 사람 몸인데 그걸 대나무로 찔러 난도(亂刀)질 효과를 내려니 오죽하겠는가. 그 고통의 시간을 영화는 줄임 없이 보여준다. 영화 후반부는 그 대나무 칼의 이유와 복수극이다. 일본인들이 배를 가른 것은 인간의 영혼이 복부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무슨 어이없는 발상이냐고? 우리도 이런 말 종종 하지 않는가. "거참, 속을 보여 줄 수도 없고." 그들은 보여줬을 뿐이다.

젊은 사무라이가 그런 소동을 벌인 건 가난했기 때문이다. 도쿠가와의 일본 통일 후 에도 시대 250년의 평화는 사무라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일본은 과거 제도가 없는 나라다. 유일하게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전쟁에서 무공을 세우는 건데 아, 평화라니요. 할 일이 없는 것이다. 칼이 필요 없어진 다이묘들은 사무라이들을 해고했고 이들은 낭인이 되어 빈곤을 벗 삼아 떠돌았다. 그러나 이런 사정은 일본 역사에는 행운이었다. 그 250년 동안 사무라이들은 물건을 만들어 팔았으며 심지어 예술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이들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같은 농업 사회에다 순서도 똑같이 '사농공상'의 신분 질서가 있는 조선과 일본의 운명이 확연하게 갈린 것은 이 때문이다(일본 사농공상의 사는 사무라이). 당시 에도 인구는 100만명으로 같은 시기 100만명짜리 도시는 베이징과 콘스탄티노플까지 달랑 셋이다. 에도 시대 사무라이는 전체 인구의 7%에 달했는데(무려 250만명) 이들은 두 가지 공부를 했다. 하나는 중국 고전이고 하나는 네덜란드발(發) 최신 학문이다. 에도에서 독서는 유행이었고 이는 오사카 등 다른 도시로 급속히 퍼져갔다. 18세기 일본은 전 국민이 준(準)독서광이었다. 당시 어지간한 집에는 세계지도가 하나씩 붙어 있었는데 우리의 정조, 순조 때다. 비교, 많이 된다. 이렇게 책 읽은 사무라이들이 성사시킨 게 메이지 유신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메이지 유신을 높게 평가 안 한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에도 시대에는 번(藩·일종의 지방 정부)이 세 종류 있었다. 도쿠가와의 친·인척이 다스리는 번, 도쿠가와의 가신들이 다스리는 번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도요토미 편에 서서 도쿠가와에게 맞섰다가 항복했던 '도자마번'이다. 도쿠가와는 이들을 살려주는 대신 경제 기반을 빼앗았다. 도자마번의 대표 주자가 사쓰마와 조슈였고 이들이 동맹을 맺어 250년 만에 옛 주군의 원수를 갚고 경제 침탈자인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게 메이지 유신이다(로미오와 줄리엣 뺨치게 앙숙이었던 두 번을 연결한 게 사카모토 료마). 이런 단순 복수극이 근대화의 물꼬로 이어진 것은 마침 서양 오랑캐가 밀려와 있었고 일왕이라는 존재가 있었으며 책 읽어 눈 밝아진 사무라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개항(開港)이라는 조건이 없었더라면 이들은 당파를 만들어 조선처럼 사색당쟁 시대를 신나게 열어젖혔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안에서 지지고 볶다가 서양 열강에 꼴깍. 그래서 운이 좋다는 얘기다(이 운은 2차 대전까지 이어진다. 전쟁에서 진 건 그쪽인데 대체 왜 우리가 쪼개지냐고!). 책 읽은 마지막 사무라이 세대가 이토 히로부미와 그 일당이다. '시경'과 '서경'을 열심히 읽은 조슈 출신 이토 히로부미는 젊은 시절 테러리스트로 출발하여(실제로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메이지 시대 유일한 총리) 학연과 지연의 중요성을 보여주며 역시 인생은 운이고 인맥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뒤 만주에서 사망한다.

제반 여건이 좋았다고 메이지 유신이 순탄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일왕에게 정권을 반환했지만 에도 막부는 까만 속셈이 있었고 수백 년 만에 존재감을 회복한 일왕은 손안에 들어온 권력이 진짜인지 근질근질했으며, 사쓰마와 조슈의 대표 선수들은 근대화 청사진을 놓고 난투극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이 죽어 나갔다. 책 읽은 사무라이가 죄다 나서고 이렇게 험난한 과정 끝에 겨우 이룩한 근대화를 우리는 한 사람이 거의 다 끌고 갔고 올해는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누구일까~요?



남정욱 작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09/2017080903522.html


만에 


Posted by 겟업
2018. 1. 8. 00:35

“단순히 언어적 도구로서 라틴어를 공부하고 문헌의 해독력을 높이고 유창하게 라틴어를 구사하는 것이 수업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라틴어의 단순한 암기를 지양합니다. 사실 언어 공부를 비롯해서 대학에서 학문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양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라 ‘틀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학문을 하는 틀이자 인간과 세상을 보는 틀을 세우는 것이죠. 쉽게 말하면, 향후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알고, 그것을 빼서 쓸 수 있도록 지식을 분류해 꽂을 책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배가 정박되었을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항구를 떠나 먼 바다로 나가면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납니다. “배가 지나간 자리에 생기는 물거품” 때문입니다. 배와 배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아야 하는데 물거품을 보는 것은 “메시지를 읽지 않고 그 파장에 집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거품을 바라보면 오해가 쌓이고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한국인 최초,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인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흐름출판)은 지향점이 분명합니다. 그는 “소통의 도구로서의 언어는 배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는 라틴어를 비롯해 모든 언어는 제대로 잘 사용할 때에 타인과 올바른 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외국어로 유창하게 말할 줄 알지만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유명 인사의 강변보다, 몇 마디 단어로도 소통할 줄 아는 어린 아이들의 대화 속에서 언어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그의 수업은 라틴어 동사 활용(변화)표를 달달 외울 필요가 없이 머릿속에 ‘책장’을 마련한 다음 이 책장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로 나아갈 수 있는 수업입니다. 


그래서 첫 수업은 휴강을 하고 학생들에게 운동장에 나가 봄 기운에 흩날리는 아지랑이를 보기를 권합니다. “공부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 ‘보잘것없는 것’ ‘허풍’과 같은 마음의 현상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언어 학습은 “학습의 방향성이 다른 학문들에도 좋은 나침반이 될 수” 있습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앎의 창으로 인간과 삶을 바라보며 좀 더 나은 관점과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는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공부할까요? 저자는 “이제는 정말 공부해서 남을 줘야 할 시대”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들이 더 힘든 것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철학이 빈곤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한 공부를 나눌 줄 모르고 사회를 위해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소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머니를 불리는 일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착취당하며 사회구조적으로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는 무신경해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과 자기 가족을 위해서는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의 신음소리는 모른 척하기 일쑤입니다. 엄청난 시간과 열정을 들여 공부를 한 머리만 있고 따뜻한 가슴이 없기 때문에 그 공부가 무기가 아니라 흉기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두가 저만 잘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이번 생은 망했으니 다음 생에는 고양이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경향신문 특별팀이 정리한 <부들부들 청년>(후마니타스)에서는 “2015년 8월 기준 임금 근로자로 신규 채용(근속 기간 3개월 미만)된 15~29세 청년의 64%가 비정규직”인 현실, “저소득층 청년 가구가 한 달에 고작 81만원을 벌고”, “계약 기간 1년 이하의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확률이 20%”나 되는 현실에 많은 젊은이들이 분노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일자리’와 ‘비정규직’과 ‘최저임금’에 대한 논란이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너무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에 대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는 정치인들의 ‘막말’이 젊은이들의 분노를 더욱 키우고 있습니다. 막말 정치인은 교과서에서 등장하는 단어를 단순하게 암기만 한 이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은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는 저자의 충고부터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지식은 삶과 결합해 지혜가 되는 법입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얘야 밖에 비가 온다”고 말하면 며느리는 그 말을 “빨래 걷어라”로 새겨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문장 자체에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법조문’이나 관행에 갇혀 있는 정치인들은 이렇게 지식 전체를 잘 버무려서 지혜를 만드는 능력을 포기한 사람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명문대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고 외국에서 공부를 하고서 사법시험을 통과하는 엘리트 교육을 받은 한 정치인이 학교비정규직 및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동네 아줌마들’이라 말하며 ‘미친 ×들’이라고 욕을 해서 논란을 자초했습니다. 그 같은 정치인들부터 <라틴어 수업>을 읽으면서 자신이 왜,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공부를 해야 했는지를 다시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치인의 반성과 상관없이 ‘미움 받을 용기’를 배우고, ‘자존감 수업’을 받았던 젊은이들이 이제 이 책을 읽으며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는 ‘자기배려’ 또는 ‘자기연민’의 지혜부터 습득하면 정말 좋겠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7172058025&code=990100#csidx43f2abc1c816040854517729927c7c7 

Posted by 겟업
2018. 1. 8. 00:33

한국에서도 ‘청년 시민’이 생겨나고 있다. 텀블벅 같은 스토리 펀딩 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활기차고 기발한 일들을 벌이고 있는 한국 청년들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시민’이 될 공간과 활동수당이다.



스톡홀름, 헬싱키, 뮌헨을 거쳐서 베를린에 다녀왔다. “치매, 국가 책임”, “청년 실업, 국가 책임” 등의 단어를 접하면서 국가 단위가 건재한 곳을 자세히 보고 싶어서였다. 뮌헨의 청년들은 이자르 강변에서 떨어지지 않는 해를 벌거벗은 몸으로 즐기고 있었다. 파도가 생기는 다리 밑에서는 새벽부터 밤까지 곡예 같은 서핑을 즐기는 무리가 도시를 관광지로 만들고 있었다. 급류에 몸을 맡긴 채 떼 지어 보디서핑을 하는 청년들도 있었는데 여행객 사망 사건으로 얼마간 금지했다가 시민들의 저항으로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헬싱키에서는 아이디어가 넘치는 청년과 아주머니가 만든 단체가 주최하는 ‘하늘 아래서의 저녁 식사’라는 행사가 벌어졌다. 도심부 4차선 거리를 막고 끝없이 이어진 8인용 테이블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길을 막은 불편함을 시민들은 기꺼이 감수했다. 할머니의 숄을 꺼내 입은 듯한 아주머니팀은 홈메이드 케이크를 나누어주었다. 핀란드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올해는 이 행사를 세계 각 도시에서 벌이기로 했다는데, 서울시도 개장한 서울역 고가에서 함께하면 어떨까 싶다. 주최 측을 만나보았는데 이들은 시의 허락을 받는 것이 어려웠지 실제로는 의자 빌리고 테이블 예약을 받고 협찬받은 물을 제공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 팀은 또 ‘청소의 날’을 정해서 집 청소를 하고 안 쓰는 물건을 가지고 나오는 벼룩시장을 시작하기도 했다. 주차장에서 발레하기, 사우나를 사랑하는 시민들을 위해 공공건물 뒤편에 이동 사우나 설치하기, 부엌과 응접실을 공개해서 전시장을 만들고 파티하기 등 시민들이 서로 엮여서 행복해지는 도시를 만들기 위한 마술을 끝없이 이어가고 있었다. 이 작업을 주도하는 야아코라는 청년은 행정당국에 신청한 후 소식이 없으면 통보하고 실행한다면서 시민들이 원하는 일을 했으니 시민들이 지지자가 되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는 ‘반자본, 반관료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쳐야 한다며 “창조하는 것 자체, 사람들과 동네가 바뀌는 것을 보면 얼마나 즐거운가?”라고 말했다. 새로운 발상, 협업 가능한 동료, 그리고 펀딩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이 이런 공유 공간과 소셜 미디어로 인해 가능해졌다.


북유럽의 특징은 무엇보다 공터가 많이 남겨져 있는 것이다. ‘다음 7세대’를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인디언 추장의 말을 이곳 주민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공유지 곳곳에서는 날마다 채식 그린 마켓 등이 펼쳐지고 임시 텐트극장과 수리하여 고친 놀이기차가 다니는 임시놀이터가 차려졌다. 버려진 옥상 주차장을 텃밭으로 가꾸어 독특한 자신들만의 쉼터로 만든 곳은 낮에는 카페로 밤에는 세계 유명 클럽으로 변한다. 청년들의 실험장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의 방황과 실업으로 고민이 많다는데 막상 이들은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시민’처럼 살고 있다. 널널한 시간 속에서 의논하면서 사는 삶 말이다.


공유 작업장(coworking space)에서 청년들은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커뮤니티를 만들고 합작 회사를 차리기도 한다. 이들은 “그냥 한번 해보자”는 모토로 가볍게 움직이고 “서로 좀 방해를 하자”면서 서로 연결하느라 분주했다. 이들을 보면 매일 출근하는 회사원들은 곧 로봇에 의해 대체될 ‘2등 국민’이고 자신이 원하는 활동을 벌이는 이들이 일등 국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유하고 발명할 여유가 있는 시민’ 말이다. 4차 산업 운운하는 시대에 자발성과 자치에 따른 시민의 이분화가 이뤄지고 있는 게 아닐까?


“취준생에게 한달에 30만원씩 3개월간 구직촉진수당. 하반기 6개월간 약 11만6000명이 지원. 취업성공패키지 규모 36만6000명” 등의 청년정책 발표를 들으면 갑갑해진다. 실은 한국에서도 ‘청년 시민’이 생겨나고 있다. 텀블벅 같은 스토리 펀딩 사이트를 들어가 보면 활기차고 기발한 일들을 벌이고 있는 한국 청년들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시민’이 될 공간과 활동수당이다. 취업 성공 신화와 수치화된 성과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모처럼의 시민혁명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말 것이다. 고도기술관리 시대의 국가발전은 오로지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시민들의 활동에 의해서 추동된다. 청년들이 공화국의 시민으로, 동네의 주민으로, 정서적 공동체를 이루어 자기 삶을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1453.html#csidxdb59b7ff5bf3b2bac1f6b3c47c11a49 

Posted by 겟업
2018. 1. 8. 00:31

이효리의 컴백으로 가장 긴장한 사람들은 동료 가수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예능업계의 라이벌들도 아니었다. TV 앞에서 제일 기가 죽은 건 아마도 요가 강사들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효리가 오랜만에 예능에 나와 선보인 요가를 보며 ‘어랏, 우리 선생님도 저만큼 못 하던데…’라는 의구심을 품은 게 나뿐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이효리는 인도 마이솔의 요가 지도자가 탄생시켰다는 ‘아쉬탕가 요가’를 일반인들에게까지 회자되게 한 장본인이다. 이효리가 하면 뭐든 유행이 되지만, 역으로 이효리는 늘 유행이 될 만한 걸 한다. 다이어트 요가에 질린 사람들이 슬슬 본토 요가로 관심을 돌리던 무렵, 그녀는 그런 수련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복귀해서도 “집착의 결집인 방송으로 얻은 괴로움을 요가로 내려놨다”며 프로 뺨치는 실력으로 전국의 요가 강사들에게 ‘의문의 일패’를 안겼고 말이다. 

다 가진 이효리가, 요가까지 잘하다니. 그런데 이젠 대중이 그런 걸 원한다. 본업이 멋진 건 기본, 취미도 제대로 해야 한다. 사람들이 이시영이란 배우를 다시 봤던 것도, 복싱이란 취미 때문이었다. 프로 선수로까지 뛰었으니 본업이 뭔지 헷갈릴 정도로 잘했다.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다부지게 링 위에 선 여배우라니. 마치 인생은 원래 이렇게 뜨겁고 치열하게 사는 거 아니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그 배우의 아우라가 달라졌다. 

제대로 해내는 취미엔 열정, 몰입, 끈기가 다 있기 마련이다.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며 자기만족적인 소비를 아끼지 않는 ‘욜로(YOLO)’나 일과 삶의 조화가 최우선이라는 ‘워라밸’이 대세가 되면서, 취미에 과감히 투자하는 사람들은 주변에서도 늘고 있다. 얼마 전 함께 촬영 나갔던 카메라 기자는 전문 다이버였다. 중형차 한 대 값을 들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전문가 간지’를 위해 장비는 곧 죽어도 수중업계 최고 브랜드만 쓴다고 했다. 어쩐지 그 고집조차 소신으로 느껴질 만큼, 그는 행복해 보였다. 

가디언 전 편집국장이 쓴 ‘다시, 피아노’란 책이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어렵기로 유명한 ‘쇼팽 발라드 1번 G단조’를 완주하기까지의 기록이다. 하루 24시간도 모자랄 편집국장이 쇼팽이라니, 과연 일은 제대로 했을까 싶지만 그는 위키리크스 외교문건 폭로 같은 특종을 지휘하고 가디언의 디지털화를 이끈 누구보다 유능한 리더였다. 그런 그가 매일 출근 전 20분, 하루를 견딜 힘을 얻기 위해 건반 위에 손을 올리는 장면은 굉장한 울림을 준다. 탁월한 일과 완벽한 취미,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는 그 사회의 저력과 품격까지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쇼팽의 난곡(難曲)을 때려눕혀 버리는 편집국장이 가능한 ‘사회적 토양’이야말로 우리가 진짜 동경해 왔던 것들이다. 입시와 상관없는 취미는 뒷전인 교육, 오랫동안 일중독이 훈장이던 문화 속에선 불가능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도 달라지고 있다. 고난도 요가를 선보이는 가수나 링 위의 여배우처럼 삶의 균형추 역할을 하는 취미의 진가에 눈뜬 이들이 늘어나는 걸 보면 그렇다. 본업만큼 취미를, 물질만큼이나 여가의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아직 무르익어야 할 제도적 여건이 많지만 피아노 치는 편집국장도 더는 먼 꿈만은 아닌 시대. 오랜만에 요가 매트를 다시 펼쳐본다. 


박선희 채널A 산업부 기자 


http://news.donga.com/3/all/20170725/85507393/1#csidx6542dfcd6519d0892adef8334c44ea1 

Posted by 겟업
2018. 1. 8. 00:25

“다양성이 왜 중요한가요?” 학기말 세미나 자유토론 시간에 한 학생이 불쑥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다양성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며 자신도 그런 흐름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이유에 대해 자신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다양성이 중요함을 여러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가장 설득력 있는 논리는 그것이 ‘생존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중요한 겁니다. 일정한 생명 집단을 이루는 개체들이 모두 동일하다면 내부적 갈등의 문제는 없겠지요. 하지만 환경 변화나 다른 집단의 공격 같은 외부의 간섭과 침투에 매우 취약합니다. 치명적이기까지 합니다. 그에 대한 반응이 획일적이기 때문입니다. 영생(永生)을 할 수 있는 생명체 집단이라 할지라도 개체가 모두 동일하다면 치명적인 요소가 하나만 침투해도 몰살하겠지요. 

외연을 갖지 않은 집단은 없습니다. 무한한 우주 전체를 하나의 동일한 집단으로 삼을 수 있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간섭과 침투는 상존하며 이에 반응해야 합니다. 각기 다른 개체는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함으로써 살아남기도 하고 피해를 입기도 하며 소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양성을 확보한 집단은 존속할 수 있습니다. 다양성의 정도와 생존 가능성은 비례합니다.

이는 현대 농업과 축산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선택된 종(種)에만 의지하는 획일화된 농업은 한 가지 병충해에도 전체 수확이 위협 받습니다. 구제역이나 조류인플루엔자 같은 동물 전염병이 자연 상태의 개체보다 사육되고 있는 동물들에게 쉽게 확산되는 것도 그 다양성의 정도가 낮기 때문입니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의 결론에서 문학적으로 표현했듯이 자연은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경이로운 무수히 다양한 형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연 그 자체가 다양하며, 다양성은 자연을 존재하게 하는 원리입니다. 동양사상에서는 ‘자연과 동화하는 삶’을 강조해 왔습니다. 구체적으로 그런 삶은 자연의 다양성을 깨닫고 그 이치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시대를 앞서갔던 16세기의 사상가 조르다노 브루노는 “세상을 이루고 있는 사물은 다양하다. 그러므로 자연의 이치에 맞추어 살기를 원한다면 세상 만물에 다양성의 옷을 입혀라!”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문명화 과정에서 사물을 구분해서 범주를 정하고 일정한 방식으로 동식물을 사육하고 경작해 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의 근원적 다양성에 대해 망각의 경험 또한 해왔습니다. 이런 경험이 종종 일상에서도 자연의 다양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무심하게 바라본 얼룩말의 무늬는 모두 똑같아 보이고, 하늘의 별들은 모두 오각형으로 반짝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초원의 얼룩말들은 다 똑같아!”라고 말하는 사람은 생명의 원리를 알 수 없으며, “하늘의 별들은 다 똑같아!”라고 하는 사람은 우주의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생물 다양성이 자연에 필요한 것처럼 문화 다양성은 인류에 필요합니다. 다양성은 생물·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세계에도 활력을 불어넣으며 교류, 혁신, 창조성의 근원이 됩니다. 가장 큰 다양성을 지닌 집단이 가장 안정적이고 발전적입니다. 다양한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법을 모색하고 타자와 협력하는 일은 인류가 진화하고 개인이 발전하는 동기가 되어 왔습니다. 다양한 환경은 더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뜻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선택의 기회 또한 더 많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김용석 철학자·영산대 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70708/85256572/1#csidx5bafbeb7206067d895d4efd6921cd28 

Posted by 겟업
2018. 1. 8. 00:09

“나는 평생 동안 미술관이나 공연장을 찾을 의향이 전혀 없다. 그런데 정부가 내가 낸 세금으로 예술에 지원하는 것이 타당한가?” 누군가가 화를 내면서 이렇게 묻는다면, 이 사람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정부가 예술에 왜 지원을 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또 어떻게 지원하는지도 말해주어야 한다. 우선 예술이 우리 삶에 왜 필요한가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두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예술을 통한 심리적·정신적 효과이다. 시 한 편을 읽거나 영화 한 편을 보면서 팍팍한 일상에 지친 삶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고, 그런 심리적 치유와 재충전을 통해 다시 삶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예술 수준이 향상되면, 국민이 문화적 자부심을 갖게 되고 공동체적 일체감도 이룰 수 있다고 대답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국제 문화예술 행사가 열리고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게 될 때, 국민이 문화적 자부심을 갖게 되고, 행사의 성공을 위해 내부적 일체감도 이루게 될 것이며, 그때의 일체감이 사회의 다른 분야로까지 확산되고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답은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화가 난 사람을 진정시키기에도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준비한 또 하나의 대답이 예술을 통한 경제적 파급 효과다. 예술이 활성화되고 발전되면 그 효과가 경제에도 흘러넘치게 된다는 것이다. 미술관이나 공연장이 활기를 띠고 문화예술 행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인력이 더 필요하게 된다. 필요한 장비를 제작해주는 일들도 파생적으로 생길 것이며, 행사를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업, 음식업, 기타 상점들도 활기를 띠게 되어 예술과 직접 관련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혜택이 미치게 된다는 식이다. 

이런 효과들이 현실이 되려면 문화계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첫째, 문화예술의 다양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다양한 생각과 느낌의 예술 작품을 접할 수 있게 해야 하고, 이를 위한 예술의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 똑같은 현실이나 대상을 바라보며 예술가들이 저마다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생각하고 적대시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치유의 공간이 되어야 할 문화와 예술에서만은 다양한 다름들이 흘러넘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문화예술의 자율성을 살려내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그 자체로 보이고, 관객들의 판단에 맡겨 두어 문화예술계가 스스로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영화 한 편을 보면서도 진보와 보수의 진영 논리로 해석하고, 미술 작품의 의미를 정치적 관점으로 몰아가려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물론 작품에 대한 해석이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과 선택의 문제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이런 다양성과 자율성을 목표로 예술을 지원해야 하며, 여기에 적합한 방법이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그런데 예술 지원의 교과서적 규범 같은 이 원칙이 말처럼 잘 지켜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지원금이 국민의 세금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정부의 관점에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다 더 근본적인 원인은 문화와 예술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정치의 관점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내용이 정치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예술 지원이 정치의 논리, 더 정확히는 정치에 편승한 문화 권력의 편 가르기 논리에 따라 집행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술의 공공성보다 정치적 편의주의에 따라 예산이 집행되고, 이런 일들이 누적되어 나타난 사례가 문화계의 블랙리스트 사건일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섰고, 문화기관이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말한다. 블랙리스트 의혹의 진상을 조사하고 제도개선위원회(가칭)를 만들겠다는 소식도 있다. 반가운 일이다. 이번 기회에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흐지부지 덮어버리고서는 새롭게 출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문화의 논리로 해결해야지, 정치적 논리로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자칫 또 다른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우려되어 하는 말이다. 이젠 내 세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였냐고 묻는 누군가를 향해 당당하게 다양성과 자율성이 살아 숨 쉬는 문화공간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박일호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교수 


http://news.donga.com/Main/3/all/20170706/85240539/1#csidx4104374e46114a69b0c9531ea324f27 



Posted by 겟업
2018. 1. 8. 00:04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책 『이동진 독서법』을 읽다가 깊이 공감하는 구절을 만났다. 삶을 이루는 것 중 상당수는 사실 습관이고, 습관이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라는 구절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죽기 전에 이과수 폭포를 보고 싶다, 남극에 가보고 싶다는 등 크고 강렬한, 비일상적 경험을 소원하지만 이것은 일회적인 쾌락에 불과하고,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 자체가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마치 동화 ‘파랑새’를 연상시키는 일견 익숙하고 평범해 보이는 말이지만, 실은 굉장히 과학적인 말이기도 하다. 인간의 행복감에 관한 심리학의 연구결과는 공통적으로 ‘행복은 기쁨의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말한다. 어떤 ‘큰 것 한 방’도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습관이 행복해야 행복하다는 말이 좋았던 이유는 폭넓게 생각을 확장해 갈 수 있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시민들이 행복한 습관을 누릴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해야 한다. 한강시민공원에서 걷고, 자전거를 타고, 연을 날리고, 낚시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라. 공원과 도서관은 행복 공장이자 행복 고속도로다. 교육도 중요하다.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하고, 요리를 하고, 다양한 운동을 즐기고. 어린 시절부터 각자의 행복한 습관을 찾을 수 있도록 경험을 제공하는 교육이 영재교육 이상으로 중요하다.



개인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다. 남들의 기준이 아니라 솔직한 자신의 기준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일들을 찾아야 한다. 멋진 몸매를 위해 굶고 운동하는 것이 유행이라 치자. 바뀌어 가는 몸매를 보는 기쁨이 이를 위한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되는 거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오히려 맛집 찾아다니는 모임을 만드는 것이 낫다. 남들 보기에 덜 번듯한 직장이더라도 내가 더 좋아하는 일을 매일 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내 일상을 보내는 공간을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꾸미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잘나가는 사람과 친해져 보려 애쓰기보다 가족, 그리고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를 돌아보는 것이 낫다. 습관처럼 내 곁에 있는 이들과의 관계가 불행하면 내 삶 또한 불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유석 판사·『미스 함무라비』 저자


http://news.joins.com/article/21765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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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0:02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남자 친구 때문에 힘들다는 여자분의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말다툼 끝에 연락을 끊은 후 낯선 여자와 함께 있던 그가 한 말에 마음이 무너졌다고 했다. "외로움 못 참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세상엔 사랑 때문에 잠 못 드는 괴로운 사람이 많다.

외로움은 전염성이 강하다. 정신과 전문의 김병수의 책 '감정의 온도'에는 외로운 친구를 곁에 두면 외로워질 확률이 무려 40~65%까지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다. 외롭지 않은 사람을 세 번이나 거쳐야 외로움의 전염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부부 사이에 외로움이 더 잘 전염된다고 말한다. 가령 남편이 회사 일을 마치고 가족이 있는 집에 들어와 '외롭다'고 말하면 아내 역시 우울해지는 동시에 부정적인 생각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데 외롭다면 대체 나는 남편에게 어떤 존재인가 자문하며, 역시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식이다. 앞서 말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온 편지와 같은 경우였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음식을 찾던 후배에게 "혹시 배고픈 게 아니라 마음이 고픈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가 와락 눈물을 터뜨리는 그녀에게 연애 상담을 해주던 기억이 났다. 얼마 전 나는 외로움과 배고픔을 느끼는 뇌신경이 서로 매우 근접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 말인즉, 우리 뇌가 외로움과 배고픔을 혼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억지웃음에 대한 뇌의 반응 역시 비슷하다. 우리 뇌는 가짜와 진짜 웃음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억지로 웃어도 신체에 90% 긍정적 효과가 있다.


'감정의 온도'에는 심부 온도를 38.5도까지 올리는 목욕만으로도 항우울제 복용과 같은 개선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등장한다. 따뜻한 목욕이 마음의 온도까지 높여준다는 건 꽤 의미 있는 이야기다. 외로움의 온도는 낮고, 웃음의 온도는 높다. 흥미로운 건 외로움만큼 웃음도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외로움 때문에 시작한 연애는 대개 괴로움으로 끝난다. 연애의 목적이 외롭기 때문이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함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백영옥 소설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28/20170728027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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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8. 00:00

노래·비디오·멀티·PC방… 
카페는 싼값에 거실 빌려주는 곳, 사적 공간 부족해 '방'으로 도피 
청소년들, 편의점서 시간 보내고 게임 속 사이버 공간으로 몰려가 
부모 감시 벗어날 수 있기 때문

우리나라는 유독 '방' 문화가 발달했다. 노래방, 비디오방, 멀티방, 모텔방, 룸살롱 등 각종 방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도시에 단위 면적당 커피숍이 가장 많은 나라도 우리나라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에 각종 '방'이 많은 이유는 사적인 공간이 부족해서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대학만 가도 부모를 떠나서 산다. 그럴 경우 자기 집에 친구를 불러들이기 쉽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결혼 전 대부분 부모님과 같이 살고, 국민 60%가 아파트에 살고 있다. 부모님과 같이 살아도 2층 주택이라면 층별로 사생활을 확보할 수 있다. 하지만 단층 구조의 아파트에서는 가족끼리 너무 공개되어 있어서 친구를 집으로 초대하기 어렵다. 독립을 해도 원룸이나 고시원같이 좁은 공간뿐이어서 두 명 이상 함께 앉아 있기도 힘들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만날 때는 카페나 노래방이 필요하고, 연인과 함께 있고 싶을 때는 모텔에 가야 한다. 사적인 공간을 소유할 수 없다 보니 시간당으로 공간을 빌리는 사업이 번창했다.

우리나라에서 카페는 커피를 파는 곳이라기보다는 5000원을 받고 두세 시간 정도 거실을 빌려주는 사업이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모텔 대실 문화는 방을 시간당으로 빌려준다. 방 하나를 하루에도 여러 번 돌려쓰는, 시대를 앞선 공유 개념 숙박업이다. 그래서 가격도 저렴하다. 이처럼 우리나라에는 공간 렌털 사업이 발달해 있다. 공간을 다른 커플들과 나눠 쓰기 싫은 젊은이는 차를 산다. 차는 집보다는 저렴하면서도 완전한 사적 공간을 소유하려는 사람들의 선택이다. 더 많은 사생활을 원하는 사람들은 자동차 윈도를 어둡게 틴팅(tinting) 한다. 틴팅 필름은 자동차 실내를 좀 더 사적인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재료다. 뚜벅이가 연애할 때 어려운 것은 이동이 어려워서가 아니고 그들만의 공간이 없어서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사적인 공간의 부족은 청소년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올해 중1인 필자의 둘째 아들은 학원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들어와 엄마에게 꾸중을 듣곤 한다. 중학생들은 왜 편의점을 찾는가? 요즘 학생들은 항시 감시를 받으면서 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선생님과 학부모가 많아야 일 년에 한두 번 만났다. 학교와 가정의 공간이 분리되어서 자녀 세대가 공간적으로 자유와 독립이 가능했던 시절이다. 요즘은 아이들이 학원에 5분만 늦어도 학부모에게 문자가 도착한다. 학원은 고객인 학부모들과 공조해 전방위로 학생을 감시한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의 발달로 아이들은 공간적으로 부모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핵가족 형태도 청소년에게는 불리한 구조다. 대가족 집안에서는 부모가 자녀를 야단치면 조부모가 옆에서 말려주고 견제해주었다. 권력 구도가 견제 가능한 순환형 3권 분립 체제였다. 반면 지금은 부모-자녀 양강 대립구도다. 요즘은 부모 중 한 명이 야단치는데 다른 한 명이 말리면 부부싸움만 난다.

학교, 학원, 집 모두 부모 감시하의 공간이다. 청소년에게는 감시에서 벗어난 사적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대학생이 스타벅스에 가듯 10대들은 편의점에 간다. 1000원짜리 과자 한 봉지를 사면 편의점에서 친구들과 놀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편의점은 알바 점원과 CCTV 덕분에 안전하다. 중학생들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 자신들만의 안전한 공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이 편의점이다. PC방도 이들의 용돈 내에서 빌릴 수 있는 공간이다. 1500원가량이면 한 시간 동안 PC방을 전세 낼 수 있다. 학원과 집에서 그들만의 사적 공간을 가질 수 없는 아이들은 PC방이나 편의점에서 삼삼오오 모여 부모의 감시를 벗어난 자신들만의 공간을 구축하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 공간을 완전히 소유할 수도 없고, 1등을 할 수도 없는 청소년들은 점점 게임 속 사이버 공간으로 내몰리고 있다. 지금은 더 작은 스마트폰 스크린 속 공간으로 숨고 있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보면 차라리 30년 전 학교에서 밤 10시까지 붙잡혀 있었던 야간 자율학습실이 그리울 정도이다. 그때는 그곳이 감옥인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야간자율학습실은 청소년 시기에 공식적으로 부모를 떠나 있을 수 있게 해준 우리만의 거실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비용 대비 공간을 빌리는 순서는 가장 저렴한 편의점부터 PC방, 커피숍, 노래방, 모텔 순이다. 우리의 주거 공간에 사적인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청소년은 편의점과 PC방으로, 대학생은 커피숍과 모텔로 가고 직장인은 차를 산다. 우리 도시의 각종 방 문화는 부족한 사적 공간과 인간의 욕구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12/2017071203226.html


Posted by 겟업
2018. 1. 7. 23:53

美, 소득 따라 교육 격차 커지고 한국처럼 자녀의 미래에 집착 
핀란드·스웨덴 등 북구 나라는 '노르딕 모델'로 자녀 독립 돕고 
자신의 꿈 펼칠 수 있게 지원… 청년의 미래 위한 제도로 참고를


우리 아들딸 세대는 우리 세대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예전에는 개인의 신분 상승 기회가 보장된 국가로 흔히 미국을 거론했다.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사회 최상층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많았고, 수백만명의 이민자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했기에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오늘날에도 미국은 여전히 기회의 땅인가? 그렇지 않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미국은 오히려 다른 나라에 비해 상향 사회 이동이 매우 적다. 최저 소득 구간의 사람들이 상층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계속 빈민으로 남는 비율이 훨씬 작은 나라는 오히려 북유럽 국가들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영국 노동당 당수였던 에드 밀리밴드는 이렇게 말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려면 핀란드로 가라."

오늘날 국가 경쟁력과 삶의 질 면에서 최상위를 차지하는 나라, 행복하게 살고픈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로 꼽히는 곳들은 핀란드·스웨덴·덴마크·노르웨이·아이슬란드 등 소위 노르딕(Nordic) 국가들이다. 혁신 국가, 국가 경쟁력,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일과 삶의 균형, 행복 지수, 청소년 학업 성취도 같은 조사를 할 때마다 노르딕 국가들은 모두 최상위권에 들었던 반면 미국은 순위가 훨씬 뒤처졌다.

아메리칸 드림은 어느덧 '미국병'으로 미끄러져 버린 것 같다. 그 증상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것이 교육 문제다. 갓난아이 때부터 좋은 유치원 들여보내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고, 좋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잘사는 지역에 집을 얻어야 한다. 피아노나 무용 같은 과외 교육시키기 위해 어머니들이 돈 대고 운전하느라 골수가 빠질 지경이다. 명문대학 입학 역시 많은 경우 부모의 능력에 좌우되고, 엄청난 학비도 부모의 부담으로 돌아온다. 미국 중산층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너무 크게 희생한다. 반대로 저소득층 아이들은 그런 경쟁에서 일찌감치 뒤처져서 중등 교육부터 이미 포기 상태에 빠지곤 한다. 어렵사리 우수한 대학에 들어간다 해도 경제적 부담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다. 자연히 불평등의 대물림이 영속화하는 경향이 커졌다.

부모가 아이를 위해 그토록 큰 희생을 치른 결과 모두들 행복해졌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엄마 손에 이끌려 자란 아이들이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는 어렵다. 많은 미국 대학생들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 부모에게 문자나 전화 통화로 보고를 하고, 명문대학의 여학생들이 부잣집 남자 만나 결혼하는 게 꿈이라는 조사도 있다. 시간이 흘러 부모가 늙으면 지난날의 '투자'에 대한 반대급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중년의 성인들이 나이 든 부모를 돌보는 데에 완전히 얽매여 의존 상태가 역전된다.

미국 사회의 일들이 우리나라와 너무 흡사하여 놀라울 지경이다. 두 나라 모두 부모 자식 간에 서로 과도하게 얽매여 사느라 정작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 중 하나가 '노르딕 모델'이다. 아이들은 십대 후반이면 자기 삶을 찾아 부모 곁을 떠나고, 부모 역시 자식의 삶에 개입하려 하지 않는다. 초·중등 교육뿐 아니라 대학 교육도 무료이니 수학 능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대학교 진학이 가능하지만, 굳이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 부자가 되지 않더라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하며 잘 살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병원비가 거의 무료일 정도로 우수한 사회보장제도를 이용하며 살다가 나이 들면 시설 좋은 양로원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사회의 인간관계는 너무 메마르고 비정한 게 아닐까? 생각하기 나름이다. 과도한 의존과 부담에서 벗어날 때 오히려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 생각이다.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해 노르딕 국가들의 단점도 언급하는 게 옳다. 이런 나라들에서는 모두 우울증, 알코올중독, 자살 비율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행복한 사회라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흔히 북유럽의 혹독한 겨울 날씨를 거론하지만, 자연만 탓할 게 아니라 분명 이 사회 시스템이 안고 있는 심각한 결점들도 들여다보아야 한다.


남의 나라의 좋은 제도를 배워서 가져온다고 그대로 작동하지는 않는다. 많은 사례를 참조하되 결국은 우리에게 맞는 체제를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누가 만드는가? 현 정부도, 다음 정부도 조만간 답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다음 세대의 주인공들인 청년들이 새로운 꿈을 꾸고 미래 사회의 새 제도를 연구해보아야 한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11/2017071103438.html




Posted by 겟업
2018. 1. 7. 23:48

책 정리를 할 일이 생겼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집에 쌓인 책이 많은데, 그걸 정리하지 못해 거의 무너질 지경이 되었다. 인터넷으로 집 안 정리하는 법, 책 정리하는 법 같은 걸 찾아보았는데, 어떤 정리의 법칙이든 가장 우선되는 건 ‘잘 버리는 일’ 같았다. 우선되는 일인 만큼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책이란 게 과일 껍데기처럼 다 먹어치우거나 아니면 깎아버리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유행 지난 옷처럼 의류수거함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다양했다. 지인들의 서명이 있는 책들은 물론 버릴 수 없고, 오래전에 밑줄 그어가며 보았던 책들도 버릴 수 없고, 전에는 읽기 싫었지만 앞으로는 읽고 싶어지게 될지도 모르는 책들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다 버릴 수 없는 책들이었다. 


책들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많은 건 소설책이다. 한 번 읽은 책도 있고 몇 번 읽은 책도 있고, 펼쳐보기만 하고 만 책도 물론 있다. 모두들 나름대로 내 책장에서 나이가 들었다. 최근 어떤 작은 모임에서 요즘 시대에도 여전히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대단히 새로운 질문이 아니었음에도, 이런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그런 것처럼 좀 불끈했다. 발끈이 아니라 불끈이다. 나한테는 소설 쓰는 일이 맛있거나 맛있지 않거나 아주 좋은 밥상을 차리는 일과 같고, 그 밥상 차려놓은 후에는 이게 맛있기까지 해야 할 텐데 하면서 살짝 MSG의 유혹도 받고, 차림이 이쁜가 사발과 대접 놓임새도 신경 쓰고, 아무튼 그러한 일인데, 누군가 그걸 먹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묻는다면 거기에 조리있는 대답이 있을 리가 없다. 불끈, 드셔보시지요, 할 뿐이다.
 학창시절에 샀던 책들도 눈에 띄었다. 30년도 더 된, 노랗게 색이 바랜 책들이다. 대부분의 책들은 지난 30년 동안 한번도 다시 펼쳐보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다시 펼쳐볼 일이 거의 없을 듯싶은데, 이 책들을 한쪽 구석으로 치우는 일이 어려웠다. 추억이 가장 많기 때문이다. 없는 돈을 안타깝게 모아 샀던 책들, 그중에는 엉뚱한 표지로 제목과 내용을 가려놓은 금서도 있었다. 당시에는 금서도 많았고 그 금서들을 배포하는 방법도 많았다.


불끈이든 발끈이든, 이렇게 감정이 앞서면 대답에 조리가 없기 마련이다. 그때 톨스토이 얘기를 했었다. 독후감 같은 것을 쓸 일이 생겨서 근래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읽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한 권당 600페이지가 넘는 총 4권 분량의 긴 책이다. 이 책의 감상문을 쓸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서 편집자가 ‘혹시 체력이 허락된다면’이라는 농담 같은 말을 덧붙였을 정도다. 그만큼 압도적인 길이이기도 하거니와 그 촘촘한 짜임새의 긴장이 만만치 않다는 뜻임을 알아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 책을 읽었을 것이다. 읽었다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과연 제대로 된 <전쟁과 평화>를 읽어본 적이 있었던 것인지 자신할 수가 없어서이다. 아주 어렸을 때 어린이용으로 편집된 세계명작 동화로도 읽었던 것 같고, 촘촘하게 인쇄된 몇 권의 책으로도 읽었던 것 같지만, 기억이 다 가물가물하다.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책은 새롭게 읽을 때마다 그 울림이 다를 수밖에 없는데, 그건 물론 달라져있는 내 삶 때문이다. 책을 다시 읽는 나는 매번 전보다 더 나이가 들어있다. 빛나던 열정과 결기는 좋게 얘기하면 성숙해져있지만 나쁘게 얘기하면 소심하게 빛을 잃었거나, 심지어는 비겁한 방식으로 잊혀지기도 했다. 오래된 소설을 읽는 즐거움, 추억을 더듬는 안타까움과 쓸쓸함도 즐거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분명히 오래된 소설을 읽고 또다시 읽어보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안타까움과 쓸쓸함을 넘어 갑자기 환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어떤 한 문장 때문일 수도 있고, 여전히 기억 속의 어느 한순간을 찌르는 듯한 장면 때문일 수도 있고,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옆에서 들리는 듯 자주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작가의 숨소리 때문일 수도 있다. 200년 전을 살았던 대작가 톨스토이의 숨소리를 듣는다니, 근사하지 않나. 


낯선 나라의 낯선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쉽지 않다. 귀족들의 삶, 황제를 위해 기꺼이 바치고 싶은 목숨, 전쟁에 대한 광적인 열정,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 모든 것이 오늘날의 우리와는 다르다. 그 다름은 충분히 흥미롭지만,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다름 속에서도 ‘여전히 관통하는’, ‘여전히 같은 것들’이다. 전쟁 속에서 펼쳐지는 오만과 허위, 그 전쟁이 앗아간 목숨들, 그리고 파괴된 사랑들, 그래도 여전히 삶은 이어진다는 것. 


이 소설에는 느닷없는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히 빠른 전개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 시간과 그 시간 속의 사람들, 그리고 결국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쫓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이렇게 읽히는 것, 한 장 한 장, 한 줄 한 줄, 더듬어가듯 읽히는 것을 천천히 쫓아 읽는 게 책을 읽는 즐거움이지 싶었다. 



전쟁에 관한 소설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무수하다. 전쟁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작가는 자신이 겪고 있는 가장 끔찍한 전쟁을 묘사하고 있을 것이다. 물리적인 전쟁의 한복판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도처에서, 우리나라의 도처에서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아마 누구나 그러할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 이름 없이 죽어간 사람들처럼, 특별히 내세울 게 없어서 국민 중의 한 사람, 서민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대부분의 사람들 삶이 정작 그러할 것이다. 그들, 우리들의 삶이 차근차근 위로받기를 바란다. 누가 봐도 정쟁으로 보이는 그런 싸움 말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편에 선 정치를 기대한다. 어떤 정치인이나 자신이야말로 그렇다고 말할 것이고, 그중 많은 정치인들의 말을 믿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건 이름 없이도 이루어냈던 우리들의 승리의 기억이다. 그러니, 국민의 감시가 무서울 것이다. 지난 세월, 뒤로 간 시간들이 너무 길었다. 서둘러, 그러나 차근차근, 아주 긴 책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듯이, 한 문장 한 문장 빼놓지 않고 읽듯이, 그러다가 책의 한 권 한 권이 쌓여가는 것을 보듯이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김인숙 소설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6142055005&code=990100#csidx8e4f84aa918308582064563a374d125 


Posted by 겟업
2018. 1. 7. 23:47

가끔 여행을 함께 하는 최 선생님의 여행 습관은 뭔가 좀 다르다. 여행전문가는 아니지만 남들과 함께 다니는 여행에서도 틈틈이 자신만의 행복하고 좀 특별한 여행을 만들 줄 안다.


한번은 라오스 루앙프라방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가기 전부터 열심히 라오스 관련 프로그램과 책도 보더니 몽족 야시장에 꼭 가야겠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몽족 야시장에서 옷가지 등을 파는 어린 소녀 이야기가 안타까워서 꼭 만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을 거쳐서 오후에 루앙프라방에 도착했다.


루앙프라방은 라오스 700만명의 인구에서 1%, 약 7만명이 사는 아주 작은 도시이다. 연간 외국관광객 약 400여만명이 라오스를 방문하는데 이들 중에 대부분은 세계문화유산 도시 루앙프라방을 꼭 찾는다. 한국 관광객들도 라오스 직항이 생기면서 한해 약 10여만명이 방문한다. 최근에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여행기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는 2층 높이의 아담한 숙소에 짐을 풀고 학교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거리로 나섰다. 이 마을에서 3층 이상 높이의 건물을 찾기 힘들다. 마치 동화의 나라처럼 숲으로 둘러싸인 마을에 메콩강 줄기를 따라 수줍은 듯 작은 30여개의 사원들이 있다. 뜰에는 자기 키를 넘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쓰는 붉은 가사를 입은 동자들이 장난처럼 눈에 들어온다. 마을 한가운데 망루처럼 솟아 있는 푸시산에서 바라보는 노을과 소박한 마을의 밥 짓는 연기가 정겹다. 그렇게 여행자들은 욕망의 날개를 접고 어느새 라오 사람들 품에 스며든다.


우리는 해가 산 너머로 지고 가로등이 어스름해질 때 장이 들어서는 몽족 전통시장을 찾았다. 몽족은 중국의 묘족 원주민들로서 라오스에 약 70여만명이 살고 있는데 라오스 정부와 역사적으로 갈등관계로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밤이 되면 주홍빛 천막을 치고 수많은 몽족 사람들이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한다. 최 선생은 몇 바퀴를 돌고 돌아 어렵사리 방송에 나왔다는 소녀를 찾았다. 처음에는 뭔가 도움을 주고 싶어서 선물로 물건 몇 개 사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렇게 선물 될 만한 것들을 몇 개 사더니, 소녀의 양해를 구하고 직접 지나가는 한국 사람들에게 물건을 함께 팔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아웃도어 지점장을 하던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한다. 작은 수고지만 함께 노동을 하고 제법 물건을 팔고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돌자 자리에 일어섰다. 그와 여행할 때마다 이런 비슷한 일들이 적지 않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짐을 나르는 사람들의 신발이 해어진 것을 보고 신던 신을 내주었고, 지진이 났을 때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버마에서는 고아원 아이들에게 맛있는 점심을 만들어서 대접하기도 했고, 캄보디아 아이들을 위해서는 책을 구입하는 데 돈을 보태기도 했다. 결코 큰돈은 아니었지만, 그는 마음을 다했고 결코 우쭐대거나 자랑하지 않았다. 그저 친구처럼 사람들과 어울렸고 함께하는 즐거움으로 여행의 즐거움을 더했다.


그가 여행을 그 사람들의 삶에 젖어들고 스며드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름 휴가철이 다가왔다. 어느 곳에 가든지 자연에 순응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지긋한 마음으로 다가설 때 여행의 즐거움과 행복이 다가선다.



나효우 착한여행 대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0034.html#csidx9ab34cb4e099cefa92ea053492ecdac 

Posted by 겟업
2018. 1. 7. 23:45

단 2시간. 100년이 사라지는 데 걸린 시간은 그뿐이었다.


지난달 30일 오전 페이스북의 한 타임라인에서는 건물의 철거 현장이 중계됐다. 인천 중구 송월동에 위치한 붉은 벽돌 건물 세채가 포클레인 한대로 간단하게 ‘정리’됐다. 건물 이름은 애경사. 애경그룹이 창업한 해인 1954년 인수해 1962년 매각한 비누공장으로 이 공장의 역사는 1912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대의 양조장, 정미소, 전기회사 등과 함께 개항 초기 산업사의 중요한 한 풍경으로 한 세기를 버텨온 근대산업유산이 두시간 만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철거를 앞두고 나온 시민들의 반대 목소리를 문화유산의 가치가 없다고 무시했던 중구청은 철거 소식이 중앙 언론에까지 타전되자 그제야 그 가치를 몰랐다며 궁색한 변명을 내놨다.


그나마 보도가 되면서 ‘부음’ 기사라도 나온 애경사는 나은 형편인지 모르겠다. 인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아래 있던 동구 송림동 한옥여관은 지난해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1938년에 지어져 1989년까지 여관으로 쓰였다는 이 한옥은 건축이나 역사의 문외한이 겉에서만 봐도 방방마다 올라간 벽돌 굴뚝이 신기해 안을 기웃거리게 되는 독특한 건물이었다. 2011년 인하대박물관 조사팀이 이 건물의 건축적 역사적 가치에 대한 분석과 보존을 위한 제언을 보고서로 남겼지만 헛수고가 됐다. 만석동에 위치했던 조선기계공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 노동자 숙소(추정)는 어떤가. 겉모습은 일반 창고 모양으로 거의 훼손됐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다닥다닥 붙어 있는 2층의 목재 발코니 구조가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드는 이 건물도 사망신고조차 확인할 겨를 없이 없어졌다.


백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며 전쟁통에도 살아남은 이 강인한 건물들을 부순 힘은 뭘까. 주차장이다. 애경사는 송월동 동화마을 관광객 편의를 위한 공영주차장 증축을 위해 허물었고, 송림동 한옥여관은 근처 교회에서 건물을 사 밀어버리고 주차장으로 만들었다. 이밖에도 조일양조장, 동방극장 같은 30~40년대 인천의 근대건축물들이 최근 2~3년 새 주차장에 자리를 내주며 헐려나갔다. 공공자산의 가치가 있는 역사적 건축물을 단순히 ‘땅값’으로만 평가하는 지자체의 몰역사적 태도야 어제오늘 이야기도 아니지만 관광 활성화라는 명목으로 문화유산들을 가뿐하게 밀어버리는 판단에는 우려라는 표현도 아까운 지경이다.


최근 몇년 새 원도심 여행은 국내 여행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서울 북촌과 서촌을 시작으로 인천, 부산, 군산 같은 도시들의 오래된 골목길로 그 세월을 살지 않았던 젊은 여행자들이 찾아간다. 인천의 배다리 헌책방 거리도 그런 골목 여행지 가운데 하나다. 오래된 양조장을 대안적 문화공간으로 활용한 스페이스빔과 아벨서점 등이 주축이 되어 한때 쇠락을 거듭하기만 했던 골목에 문화적 온기를 불어넣으며 찬찬히 ‘동네’가 되살아났다. 요즘은 문화유산까지 쓸어버리며 주차장을 지원할 만큼 중구청이 그렇게나 아끼는 알록달록 송월동 동화마을보다 드라마나 영화 촬영지로도 주목받고 있다.


애경사의 허탈한 철거 현장을 페이스북으로 중계하며 알린 이는 스페이스빔의 민운기 대표였다. 그에게 애경사의 비극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10년간 인천 지역문화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이 유서깊은 건물과 재계약에 실패했기 때문이다.(<한겨레> 4월17일치 ‘10년 공든 탑 스페이스빔 인천 문화버팀목 무너지나’) 한가지 다행은 지역 주민들과 예술인들이 이 공간의 시민자산화를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손쉽게 애경사의 전철을 밟기에는 이제 너무 많은 눈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인천시와 동구청은 알아야 할 것이다.


김은형 문화스포츠 에디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9723.html#csidxe1413e18e20ce808c8c7b6b886e7fd7 

Posted by 겟업
2018. 1. 7. 20:06

10년 전 6월 29일, 미국에 아이폰이 나왔다는 뉴스를 봤다. 그땐 별 관심이 없었다. 모토로라의 핑크색 레이저 모델이 더 예뻐 보였으니까. 당시 레이저는 날렵한 디자인과 핑크, 라임, 실버, 블랙 등 다채로운 컬러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아이폰이 마음에 들어온 것은 ‘옐프(yelp)’라는 맛집 찾기 애플리케이션(앱) 때문이었다. 2009년 9월 미국 뉴욕에 갔을 때였다. 주섬주섬 지도책을 꺼내려던 찰나, 미국에 살던 지인이 아이폰을 꺼냈다. 옐프로 우리 주변에 있는 가장 인기 있는 컵케이크 카페를 찾아냈다. 여행 책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아이폰은 그해 11월이 돼서야 한국에 상륙했다.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 망설이던 중 친구가 미국 주간지 ‘타임’ 앱 덕분에 출퇴근 시간에 영어공부 하기 좋다고 했다. 공부는 ‘지름신’의 좋은 핑계가 돼줬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이폰은 생활의 일부가 됐다.

구구절절 아이폰과의 첫 만남을 떠올린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29일이 아이폰의 10번째 생일이어서, 두 번째는 얼마 전 열린 동아일보, 한국디자인진흥원 주최의 디자인경영포럼에서 아이폰이 화제에 올라서다.  

포럼에 참석한 에린 조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 전략디자인경영학과 교수는 “아이폰은 디자인이 아닌 전략의 승리”라고 설명했다. 그러면 왜 10년이 넘도록 아이폰이 디자인경영의 모범 사례로 꼽힐까. 조 교수는 “아이폰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혁신을 이끄는 ‘디자인 전략’을 선보였다”고 설명했다. 

10년 전 레이저는 예뻤고, 블랙베리는 시크했다. 하지만 아이폰은 휴대전화에 맛집 검색, 영어공부 같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사용하고, 더 많은 개발자가 뛰어들면서 그 쓰임새는 무한히 확장됐다. 이젠 백화점, 서점, 은행도 들어 있다. 아이폰 이후의 디자인경영은 ‘남보다 예쁘게 만들어서 비싸게 판다’가 아닌 ‘새로운 기술과 의미를 제품과 서비스에 매끄럽게 담을 수 있는가’를 포괄하는 전략적 개념이 됐다. 


요즘 ‘심리스(seamless·끊김 없는)’라는 단어가 많이 쓰인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상품과 서비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포스트 아이폰 시대에는 기업이 각종 ‘재료’를 심리스하게 융합해 디자인해야 한다.



혁신적인 기업들은 이미 디자인, 개발, 전략, 기획부서가 함께 심리스한 상품 개발에 나서고 있다. 네이버는 디자이너를 ‘서비스 설계자’로 부른다. 사용자의 경험까지 디자인해야 한다는 의미다. 에어비앤비의 창업자 세 명 중 두 명은 디자이너 출신이다. 이 회사의 디자인 팀에는 도서관 사서, 댄서, 생명보험 설계사 출신 등이 있다고 한다. 사용자의 경험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배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아이폰의 고향, 미국에서는 최근 10주년을 기념한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중 월스트리트저널 기사의 제목이 눈에 띄었다. ‘10년 후 당신의 아이폰은 더 이상 폰이 아닐 것.’ 안경이나 헤드셋, 혹은 상상도 못 할 디자인이 나타날지 모른다. 무엇이 또 우리의 10년을 바꿀지 기대된다. 
  

김현수 산업부 기자


http://news.donga.com/East/MainNews/3/all/20170630/85131654/1#csidx71cb96f42201a7eadeb92f2193836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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