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장영실, 김구, 노무현.
올해 하반기 현대자동차 입사시험에 출제된 에세이 문제의 답으로 많이 거론된 인물들이다. 시험 문제는 ‘본인의 관점에서 역사상 저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인물에 대해 쓰시오’였다. 특히 수험생의 절반 정도는 정도전에 대해 썼다고 한다. 상반기 내내 안방극장을 달궜던 TV 사극 ‘정도전’의 영향일 것이다.
과거 에세이를 채점했던 경험을 떠올려 ‘내가 만약 현대차 채점위원이라면 어떻게 점수를 매길까’ 하는 상상에 빠져봤다. 에세이를 채점할 때는 대개 질문 취지에 충실한 답을 하는지, 주제와 소재는 참신한지, 일관성과 설득력은 있는지, 표현력은 좋은지 등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데 시험 채점이라는 게 비슷비슷한 내용의 답안지를 수십 장씩 읽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참신성이 없거나 질문의 취지에서 벗어난 답안지에는 아예 눈길이 가지 않게 된다.
이런 연유로 정도전이나 노무현이라는 답에는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을 것 같다. 정도전의 경우, 채점위원이라면 누구나 ‘책을 얼마나 안 읽었기에 TV 드라마 이야기로 답안지를 채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 고인이기는 하지만 측근과 추종자들이 현실정치의 최대 세력 가운데 하나다. 그를 역사라고 하기에는 일러도 너무 이르다. 아직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은 인물에 대해 고평가, 저평가를 논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장영실과 김구도 참신한 답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모 기업 면접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낸 사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6·29선언’이라는 대답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있는 걸 보면 나름 준수한 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우리 대기업들이 인문학 비중을 크게 늘리고 난도(難度)를 높인 것은 올 하반기 채용에서 처음 시작된 현상이 아니다. 이미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확고한 경향이다. 대응할 시간이 충분했는데도 취업준비생들이 내놓는 답은 기대치와 거리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가뜩이나 ‘스펙’ 쌓기에 바쁜 취업준비생들을 두고 기업들이 역사다 인문학이다 해서 괴롭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7월 신한은행이 고졸 고객들에 대해 대졸 고객들보다 비싼 이자를 물리는 등 차별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파문이 인 적이 있다. 당시 신한은행의 한 임원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하소연을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예금과 대출 등 금융상품을 설계할 때는 수학 통계학 전공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금융권도 이공계 출신 채용을 크게 늘리고 있다. 물론 이공계 출신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들이 인문학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보니 큰 문제다.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들이 상품을 개발했다면 학력에 따라 대출을 차별하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겠느냐.”
이런 종류의 고민은 비단 금융권만의 몫이 아니다. 한국의 주력 제조업이 ‘빠른 추격자’에서 벗어나 ‘시장 선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술과 함께 ‘인간’을 이해하는 인재가 절실히 필요하다. 최근 기업들이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인문학 교육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기술력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기업들의 역사 중시 추세는 결코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문제의 비중은 점점 커지고, 난도 또한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평소 책이나 신문기사를 꼼꼼히 읽고 자신만의 역사관을 만들어 놓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스펙이 있어도 대기업 문턱을 밟아보기 어려운 시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천광암 산업부장
http://news.donga.com/3/all/20141021/673194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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