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위반. 적어도 결혼에선 더 이상 책잡힐 일이 아닌 듯하다. 한때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낙인의 단어였지만, 이제는 수줍게 고백하면 당당한 축하로 되돌아올 정도로 호감 단어가 되어가고 있다. 어느덧 속도위반에 대한 경계심은 이제 도로 위에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속도위반은 도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에도 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생각의 내용에 관해서는 각별한 관심을 가져왔다. 그래서 폭력적 영화나 게임이 폭력성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점,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담은 영화가 청소년들에게 왜곡된 성 의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 흡연이나 음주 장면이 시청자들에게 흡연과 음주 행동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 자살에 대한 지나치게 자세한 보도가 자살을 유도할 수 있다는 점 등을 주목하고, 각종 규제와 대응 방안을 마련해왔다. 생각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점에 우리 사회가 동의한 결과이다.
그러나 생각은 내용뿐만 아니라 속도 역시 매우 중요하다.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평상시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제시되는 문장을 읽은 사람이 평상시 속도보다 천천히 제시되는 문장을 읽은 사람에 비해 훨씬 더 위험한 결정을 내린다고 한다. 빠른 속도로 읽게 되면 생각하는 속도가 빨라진다. 빨라진 생각은 성급한 의사 결정을 유도하게 되고, 성급한 의사 결정은 잠재적 위험 요인들을 차분히 따져보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일을 가로막게 된다. 도로 위 속도위반이 자동차 사고 원인이 되듯이 생각의 속도위반이 인생의 사고 원인이 되기도 한다. 어른들이 다리 떠는 행동을 그렇게 말렸던 이유도, 사실은 너무 빠른 생각의 속도를 경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천천히 여유 있게 다리를 떠는 경우를 본 적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생각의 속도가 너무 빠르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뉴스 페이지는 가만두어도 빠르게 페이지가 넘어간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들여다보는 스마트폰 활자는 쏜살같다. 운전 중 읽어내려 가는 이메일 속도는 가히 혁명적이다. 수시로 제시되는 실시간 검색어 순위는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읽기만이 아니다. 연구에 따르면 어떤 장면이 빠르게 제시되는 영상을 본 사람이 느리게 제시되는 영상을 본 사람보다 일상의 많은 장면에서 더 위험한 선택을 한다고 한다. 모든 것이 빨라졌다. 특히 '속도'라는 단어가 붙는 영역이 그렇다. 자동차 속도, 인터넷 속도, 배달 속도, 충전 속도….
그러나 생각은 속도의 영역이 아니다. 생각은 깊이와 방향성의 영역이다. 그래서 생각에는 뚝심이 중요하다. 비록 느려 보이지만 어떤 문제에 대하여 뚝심 있게 천천히 오랫동안 생각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몇 달째, 몇 년째 천착하는 생각의 주제가 있는가?
우리의 생각이 심각한 속도위반을 범하고 있다. '내려올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이라는 고은 선생 시처럼, "멈춰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혜민 스님 책 제목처럼 이제 생각의 폭주를 멈춰야 한다. 인생은 한 곳에서 빨리 사진을 찍고 다른 곳으로 서둘러 이동해서 또 기념사진을 찍어야 하는 단체 여행이 아니다. 여행은 어디를 가든 천천히 가면 볼만한 것이 많지만 서둘러 가면 별 볼일 없기 마련이다.
고무적인 것은 생각의 속도를 늦추려는 자발적 노력이 우리 사회에서 이미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걷기이고, 다른 하나가 인문학 열풍이다. 가을, 이 두 가지를 하기에 최적의 시간이다. 디지털 기기를 끄고,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 멈추고 들여다보는 인문 정신을 실천해 볼 시간이다. 느리게 생각하기, 천천히 걷기, 하루의 아침을 천천히 그리고 여유 있게 맞이하기, 바쁠수록 놓치지 말아야 할 행복의 조건들이다.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행복연구센터장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0/12/20141012022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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