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7. 17:01
자동차 회사들은 강한 인상을 풍기기 위해 경쟁적으로 전면부에 커다란 인테이크 그릴을 넣는다. 그러나 BMW는 가로 배치 ‘키드니 그릴’ 때문에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아우디 ‘A8’,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 렉서스 ‘LS’, BMW ‘7시리즈’. 각 회사 제공



최근 미국의 싱크탱크인 리싱크X는 “13년 뒤인 2030년에 미국 내 자동차 등록대수가 82% 감소할 것”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공유형 자율주행 전기차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현재 대부분을 차지하는 개인 소유의 내연기관(엔진) 자동차가 도로 위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예언입니다.


이 보고서는 미국 내 자동차 등록대수가 2020년 2억4700만 대로 정점을 찍은 뒤 2030년 4400만 대로 감소하면서 130년의 역사를 가진 자동차·운송산업과 개인의 내연기관 자동차 소유 문화가 종말을 맞고, 그 과정에서 세계 에너지 경제가 재편된다고 내다봤습니다. 이로 인해 제조-판매-유지·보수-보험-정유회사 등으로 이어지는 자동차 산업 가치사슬이 재난적 수준으로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도 지난달 25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글로벌 자동차 공유 서비스가 2030년까지 현재의 8배(약 320조 원)로 성장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공유 자동차 서비스를 이용하는 비용이 아무리 낮아진다고 해도 사람의 기본적인 소유욕과 유아시트 같은 개인 사물을 보관해두는 편의성 측면에서 자동차 산업이 입는 타격이 예상만큼 크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10년 뒤 자동차 산업과 관련 서비스 생태계가 ‘전동화, 자율주행, 공유’라는 3대 변혁의 요인으로 크게 달라질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이처럼 4차 산업혁명의 폭풍을 코앞에 두고 있는 현재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두 자동차회사가 있습니다. 현대·기아자동차와 BMW입니다. 기아자동차가 최근에 내놓은 스포츠세단 ‘스팅어’는 깜짝 놀랄 정도로 잘 만들어졌습니다. 운전 재미와 안락함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도록 동력 성능과 차체, 서스펜션 세팅이 역대 국산차 중 최고 수준으로 업그레이드됐습니다. 또 현대차는 지난달 28일 독일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24시간 내구레이스에 곧 출시될 ‘i30N’ 모델 2대를 출전시켜 완주했습니다. 특히 개발 엔지니어들이 레이서로 참여해 의미를 더했습니다.



하지만 현대·기아차의 노력들이 조금 안쓰럽게 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바로 이런 식의 자동차 만들기는 끝물이기 때문입니다. 기존 자동차 산업의 가치체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데 10년 전 일본이 졸업한 자동차 제조와 마케팅을 이제야 구현했습니다. 

차라리 이런 단계를 건너뛰고 지금은 미래 비전을 보여줄 고출력 전기차나 사람보다 운전을 잘하는 자율주행차를 실험적으로 내놓아야 할 타이밍이 아닐까요. 곧 스마트폰 세상이 열리는데 열심히 성능 좋은 ‘삐삐’를 개발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현대·기아차의 시가총액은 이미 미국의 전기차 업체인 테슬라에 따라잡혔습니다.


BMW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례로 보입니다. BMW의 상징은 흰색과 파란색이 4등분돼 있는 동그란 엠블럼과 ‘키드니 그릴’로 불리는 자동차 전면의 공기흡입구 두 가지입니다. 특히 키드니 그릴은 멀리서 봐도 BMW임을 각인시키는 효과가 뛰어나서 그동안 회사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키드니 그릴이 이제는 BMW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2004년 아우디의 ‘싱글 프레임’을 시작으로 경쟁사들은 앞다퉈 커다란 인테이크 그릴(사진 참조)을 도입해 강한 인상과 럭셔리함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BMW는 긴 타원형 그릴 2개를 가로로 배치해야 하는 디자인의 한계 때문에 전면부를 납작한 스타일로 만들 수밖에 없었고 상대적으로 경쟁 그룹 내에서 디자인 존재감도 약화됐습니다. 첨단 기술로 무장시켜 야심작으로 내놓은 신형 7시리즈의 판매 부진도 이와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특히 전기차 시대로 넘어가면 엔진의 열을 식히는 기능적 역할을 했던 인테이크 그릴의 존재 의미는 퇴색됩니다. BMW 내에서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키드니 그릴을 바꾸자는 주장은 ‘역적모의’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오래전부터 충분히 검토하고 조금씩 변화의 시도를 해왔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은 과거에 성공했던 경험이나 위기관리 방식이 적용되지 않는 시대입니다. 만일 기존 성과와 경험이 생존을 보장해준다면 세계 1위 기업이 몰락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죠. 그러나 우리는 코닥, 모토로라, 노키아 등이 단숨에 곤두박질치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엔진과 변속기 전문가나 키드니 그릴 신봉자를 옆에 두고선 미래를 준비하기 힘들어 보이는 이유입니다.



이제 지켜야 할 것은 파괴적인 자기 혁신과 유연한 사고를 가진 조직과 인재밖에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석동빈 기자


http://news.donga.com/East/MainNews/3/all/20170601/84664646/1#csidx3a6f6904aab9edeb9df5aa398d45149 

Posted by 겟업
2018. 1. 7. 16:58

거리 풍경 바뀌지 않는 서울… TV로 치면 정지 화면 상태 걷고 싶은 도시 만들려면 들어가 구경할 가게 늘려야

서울시는 최근 '서울로 7017'을 조성했고, 향후 광화문 12개 차로를 지하화해서 세종로 전체를 광장으로 만드는 계획안을 발표하는 등 서울을 보행자 중심 도시로 만드는 노력을 진행 중이다.


전 세계적으로 도시를 자동차 중심에서 보행자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변화의 물결은 이미 시작됐다. 하지만 단순히 자동차 도로를 없애면 걷기 좋은 도시가 되는 걸까? 보행 친화적 도시를 만들기 위해서 인도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경험으로 어떤 길은 더 걷고 싶고 어떤 길은 덜 걷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을 안다. 연애 초기에 데이트 코스를 정할 때 홍대 앞, 명동, 신사동 가로수길 같은 곳을 선호하지 테헤란로를 걷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유는 가로에 접한 가게 입구의 숫자와 상관이 있다. 100m를 걷는 동안 보행자가 선택 가능한 가게 입구의 숫자는 홍대 34개, 명동 36개, 가로수길은 36개, 강남대로 14개, 테헤란로는 8개이다. 대체로 가게 입구의 숫자가 30개는 넘어야 걷고 싶은 거리가 된다.


가게 입구는 보행자에게 선택권을 준다. TV 채널과 비슷하다. 가게 입구가 많은 거리를 선호하는 것은 채널이 5개였던 시절의 TV보다 채널 100개 이상의 케이블TV를 선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뿐 아니다. 시속 4㎞ 속도로 걸어갈 때 마주치는 다양한 가게 입구는 다채로운 체험을 제공한다. 채널이 100개여도 볼 것이 없지만, 채널이 많으면 그나마 '채널 돌리는' 재미라도 느끼게 해준다. 가게 입구가 많으면 실제로 내가 들어가는 가게는 몇 개 없더라도 걸으면서 변화하는 풍경이 주는 엔터테인먼트가 있다. 계산해보면 명동이나 가로수길은 2.5초당 한 번씩 채널이 바뀌는 TV와 같고, 테헤란로는 11초당 한 번씩 채널이 바뀌는 TV와 같다. 밀도가 높은 가게 입구의 배치는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드는 데 중요한 물리적 조건이 된다.


서울 홍대앞 '걷고 싶은 거리'에서 시민들이 주말을 즐기고 있다. /조선일보 DB

필자는 뉴욕에서 일할 때 20분 정도의 거리는 걸어서 다녔다. 하지만 서울 강남에서 그 정도 거리는 택시를 탄다. 왜 그럴까? 지인 중에 금요일 저녁마다 마포에서 압구정동까지 걸어서 퇴근하는 이가 있다. 그는 3시간 반의 퇴근길 중 가장 걷기 힘든 구간은 '마포대교 위'라고 했다. 마포대교 위를 15분쯤 걸어야 하는데 그동안 장면이 바뀌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TV로 치자면 정지 화면 상태다. 이 이야기로 우리는 걸으면서 풍경이 바뀌는 것은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드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뉴욕은 블록의 세로 길이가 평균 60m밖에 되지 않는다. 뉴욕에서 남북 방향의 애비뉴를 따라 걸으면 1분마다 동서 방향으로 가로지르는 새로운 스트리트의 풍경을 접한다. 반면 서울 강남은 한 블록의 크기가 800m다. 한 변을 걸을 때 12분쯤 걸린다. 역삼역에서 강남역을 향해 걸어가면서 바라보는 풍경이 12분 동안 큰 변화가 없다. 당연히 지루하다. 반면 강북의 북촌이나 경리단길 같은 곳은 촘촘하고 복잡한 골목길로 되어 있어서 조금만 걸어도 새로운 골목길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이처럼 걷고 싶은 거리는 블록의 크기와 도로에 접한 가게 입구의 수가 결정한다.

위의 연구처럼 상업 시설의 분포는 보행자 중심 도시를 만드는 데 중요하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얼마 안 되는 상업 시설들이 한곳에 집중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반포의 아파트 재개발을 살펴보면 가로(街路)형 상가들이 사라지고 수천 가구 단지의 모든 상업 시설이 코너 역세권의 5층짜리 상가에 집중돼 있다. 보행자 도시를 만들려면 상업 시설이 1·2층에 선형으로 늘어서야 하는데 반대로 고층·집중화되고 있다. 이런 상가가 만들어지고 나면 나머지 거리는 수백m 길이의 아파트 단지 담장만 늘어서게 된다. 편리한 원스톱 상가가 거리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상업 시설이 점차 대형화되고 실내 공간에서 놀이·휴식·쇼핑 등을 모두 해결하려 한다. 그로 인해 우리의 거리와 외부 공간은 황폐화되고 있다. 고층·집중화된 상가와 대형 쇼핑몰을 계속 지어대면서 보행자를 위한 도시를 만들겠다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가 이대로 거리를 자동차에 양보하고, 에어컨은 나오지만 하늘을 볼 수 없는 실내 공간에서만 살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방향을 돌릴지 깊이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21/2017062103682.html

Posted by 겟업
2018. 1. 7. 16:35
두 달 전쯤 미국의 유명 어린이 TV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에 '줄리아'라는 이름의 여자 인형이 새로 등장해 화제가 됐다. 48년 방송 역사상 첫 자폐아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네 살인 줄리아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할 땐 친구들이 불러도 반응하지 않고, 갑자기 웃거나 이상한 소리를 낸다. 소방차 사이렌 소리에 놀라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서미 스트리트는 줄리아를 통해 시청자에게 자폐가 무엇인지를 자연스럽게 이해시켰다.

한국에선 자폐성 장애와 지적장애를 합쳐 발달장애라고 규정한다. 국내 등록 장애인 250여만명 중 지적장애인이 20여만명, 자폐성 장애인은 2만여명 정도이다. 지적장애, 자폐성 장애, 뇌병변 등의 장애가 겹친 발달장애인도 상당수일 것으로 추정된다.

'세서미 스트리트'의 자폐증 아동 캐릭터 줄리아. /EBS 화면캡처
발달장애인은 자기주장이나 권리를 제대로 내세우지 못하므로 여러 유형의 장애인 중에서 가장 소외되고 차별받는 약자(弱者)에 속한다. 19년 동안 소 축사 옆 쪽방에서 살며 강제 노역을 했던 고모(48)씨, 10여년 동안 '거짓말 정신봉' '인간 제조기'라는 글자가 적힌 몽둥이로 맞아가며 타이어 수리점에서 일했던 김모(42)씨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발달장애인 사례들이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청소년기엔 학교에 다녔어도 성인이 되면 대부분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것도 문제다. 얼마 전 광주광역시에선 발달장애가 있는 20대 여성이 아파트 12층 난간에 매달리는 극단적인 행동을 했다. 어머니가 15분간 필사적으로 딸을 붙들고 있는 사이 경찰이 출동해 구조했다. 이 장애 여성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지 하루 만에 이런 소동을 벌였다고 한다. 집과 병원 외엔 갈 곳이 없었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문재인 정부는 최근 '국가가 치매를 책임지겠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발달장애도 포함하길 바란다. 국가와 지자체가 발달장애인의 생애주기별 욕구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지원하면 발달장애인 가족의 삶의 질까지 높여줄 수 있다. 소수만을 위한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발달장애인들을 도울 전문 인력을 양성하면 새 정부가 추구하는 일자리 늘리기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전 세계 140여 나라 어린이들에게 사랑받는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자폐아 줄리아'의 인형을 움직이는 여성은 자폐성 장애를 가진 13세 아들을 두고 있다고 한다. 사람과 동물, 몬스터, 요정 등 다양한 캐릭터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서미 스트리트는 TV 속 가상의 세계다. 하지만 우리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깨치는 순간, 이 이상향은 현실로 다가온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1/201706110179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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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7. 16:32

'시인의 경지에 이른 과학자'상이라는 게 있다. 과학 분야에서 탁월한 글솜씨를 발휘한 저자에게 주는 상이다. 1993년 미국 록펠러대학이 제정했다. 역대 수상자 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네 명이나 됐다. 아인슈타인도 글을 잘 썼다. 우연이 아니다. 생각을 체계적·합리적·논리적으로 펼치는 것은 무엇을 하든 필수다. 미국 의대 시험에서도 에세이를 중시하는 이유다.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서구 고등교육의 근간은 수사학(修辭學)이다. 글로든 말로든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미국 방송을 보면 길 가는 아무한테나 마이크를 들이대도 자기 생각을 풍부하고 논리적으로 얘기한다. 우리는 그저 "너무, 너무" "… 같아요"만 연발한다. 앞뒤가 뒤죽박죽이어서 글로 옮겨 놓으면 무슨 얘기인지 알 수도 없다. 때론 한국어를 배운 지 3~4년 된 외국인이 우리보다 더 조리 있게 한국말을 하기도 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우리도 예부터 글을 잘 쓰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걸 강조했다. 이런 전통은 사라진 지 오래다. 해외에서 아이를 키우다 한국에 들어온 사람 불만 중 상당 부분이 글쓰기 교육이 없다는 것이다. 객관식 문제 한두 개 맞히는 데 목숨 거는 세상에선 글쓰기 교육 하자고 말하는 사람이 이상해진다.


▶올해 초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신입생 글쓰기 평가를 했더니 39%가 70점 미만을 받았다. 주제를 벗어난 데다 비문(非文)에 맞춤법도 엉망이다. 채점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나 제대로 평가하면 점수는 훨씬 더 떨어질 것이다. "거시기하다"는 등 비속어, 인터넷식(式) 엉터리 문체가 과제물에 넘쳐난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요즘 신입 사원은 영어보다 국어 실력이 문제"라고 한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20년간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한 낸시 소머스 교수가 그제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어느 분야에서든 진정한 프로가 되려면 글쓰기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짧은 글이라도 매일 쓰라. 그래야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하버드 대학 신입생은 한 학기 적어도 세 편 에세이를 쓴다. 교수가 일일이 첨삭 지도한다. 사회에서 리더가 된 졸업생에게 '성공 요인이 뭐냐'고 물었더니 가장 많은 답이 '글쓰기'였다. '능력을 하나만 가질 수 있다면?'이란 질문에 대한 답도 단연 '글쓰기'였다. 글쓰기는 기술이 아니다. 생각의 근력(筋力)을 키우는 일이다. 생각하는 힘이 없는 사회는 주관 없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냄비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불필요한 갈등도 빈발한다. 읽지도 않고 쓰지도 않는 우리 모습 아닌가.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05/2017060502685.html

Posted by 겟업
2018. 1. 7. 15:49

동성애가 더 잘 퍼진다(?)는 걱정은 군대 같은 이성애적 남성성이 강하고 개인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집단주의적 폐쇄성이 강한 공간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확인된 사실도 없다. 군대는 오히려 남자답지 못한 남자에 대한 집단적 혐오와 경계심이 높아 이성애자의 동성애자에 대한 성폭력 같은 보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작년에 일어난 일이다. 인권 관련 회의에서 미혼모 인권 행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참석했던 한 공무원이 용기를 내어 자신의 관점을 꼭 보태야겠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미혼모 인권도 중요하지만 미혼모 발생 예방도 중요하지 않나요?” 순간 다들 어떻게 대응할지 몰라 막막해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잠시 후 어떤 이가 다른 이야기로 말머리를 돌렸고 다수가 동조하며 회의를 이어갔다.


그 공무원은 자존심이 상할 상황이었다. 그가 전혀 뜬금없는 소리를 하였다면 반박하며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혼모가 늘어나면 안 좋다는 것은 아직까지 우리 사회 보편상식이고 공무원은 상식 수준의 말을 하고 있었다. 반론이 쉽지 않은 주장이다. 반면 인권과 예방은 같이 이야기할 수 없는 모순관계이다. 특정 소수자 그룹의 인권을 논하면서 그들은 존재하지 않아야 더 좋고 존재할 수 없게 노력까지 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반인권적이다. 그 상황에서 가장 정직한 접근은 미혼모가 많은 사회가 정말 문제인가를 토론하는 거였다. 그러나 결혼제도, 국가, 여성의 저임금과 성, 저출산 등이 얽혀 있어 논쟁을 피하는 게 낫다고 다들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특정 소수자 혐오는 그 소수자들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너무 퍼지지 않을까 하는, 일종의 전염과 확산에 대한 경계 혹은 공포가 깔린 의심에서 출발한다. 미혼모의 존재를 인정하면 너도나도 미혼모가 되려 하지 않을까?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인정하면 너도나도 군대 안 간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바탕에선 이들이 적게 존재하면, 심지어는 없으면 더 좋다는 생각을 당연시하고 있다. 소수자 인권을 부정하지 않더라도 결국 차별이 예방이라는 믿음도 깨지 않고 있는 것이다. 소수자 인권은 허술한 토대 위에 집을 짓고 있는 셈이다.


며칠 전 영외에서 동성 군인과 합의된 성관계를 한 대위가 군형법 92조의6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을 보면서 이 허술한 토대가 생각났다. 이 법은 영내 성관계 금지와 징계로 통제 가능한 동성 군인과의 섹스를 굳이 ‘항문성교’라며 추해서 형법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으로, 특정 대상만을 심하게 차별하는 허약한 법이다. 그러나 헌법소원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대선에서도 후보자들은 군형법을 인정한다는 의견을 당연한 듯 피력했다. 다수가 지지하기 때문이다.


기사의 댓글에서도 다수의 마음이 확인된다. 다른 문제에 진보적인 특정 사이트의 댓글에서 이번에는 유죄판결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훨씬 높다. 지지가 높은 댓글은 “군은 특성상 동성애 금지해야 돼. 저런 지휘관이 동성애자면 지위를 이용해서 악용할 수도 있고 애들 작살난다”, “군대가 동성애를 처벌하지 않는다면 엄마들 어찌 아들을 군대 보내겠나?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더욱 철저한 관리와 처벌이 있어야 한다”, “내 아들이 군대 가서 동성애자 되면 어떡하지요” 등이다.


성폭력과 동성애 확산에 대한 공포이다. 동성간 성행위를 금지하지 않는 것은 동성간 연애를 허락하는 것이고, 그러면 동성애가 군대에 만연할 것이란 두려움이 다수의 반대의식에 담겨 있다. 내 아들은 절대 동성애자일 리 없지만 유혹에는 넘어갈 것 같고, 서열적 권위가 강한 군대에서 선임으로 혹은 장교로 이들을 만날 것 같기에 두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성애가 더 잘 퍼진다(?)는 걱정은 군대 같은 이성애적 남성성이 강하고 개인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집단주의적 폐쇄성이 강한 공간의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렵고 확인된 사실도 없다. 군대는 오히려 남자답지 못한 남자에 대한 집단적 혐오와 경계심이 높아 이성애자의 동성애자에 대한 성폭력 같은 보복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다. 동성애를 금지하면 동성애 폭로 등을 약점 삼아 성폭력 등 각종 범죄가 더 쉽게 일어난다. 그래서 몇 년 전 미국 군대는 동성애자인지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던 모호한 신분불인정정책을 폐지했다.


진짜 문제는 군대의 특수성은 핑계이고 다수의 사람이 동성애는 없으면 더 좋은 것이라며 동성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을 가능성이다. 동성애가 시민사회에서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는다면 수많은 사람이 일상으로 살아가는 공간인 군대에서만 특별히 구성원간 동성애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은 나오기 힘들다.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반인권적 판결을 대하면서 우리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존재의 부정보다 더 공격적인 차별은 없다는 것이다.




권인숙  명지대 교수·여성학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6873.html#csidx31a4d15cd2443049afb96a6af7441a7 

Posted by 겟업
2018. 1. 7. 15:31

오래전 일이다. 새삼 옛 기억이 떠오르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마도 지난달 만난 스리랑카 농부 때문인 것 같다. 수년간 유기농을 고집했는데 이제는 마을 전체가 유기농을 하면서 마을살이가 좋아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변화의 속도보다 방향을 제대로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도 했다.


2004년 12월26일, 성탄절 다음날이었다. 나는 서울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강력한 지진으로 해일이 발생해 타이 푸껫을 휩쓸고 있다는 긴급 뉴스를 보았다. 지진 발생 지역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 아체주 앞바다였다. 규모 9.3의 강진이었다. 급히 인도네시아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보니 피해 규모가 상상을 뛰어넘었다. 이후 사고 집계를 보니 인도네시아 아체에서 17만여명이 숨지거나 실종됐고, 스리랑카, 인도, 타이 등에서 약 6만여명이 사망했다.


이듬해 피해복구가 한창인 아체를 갔다. 참혹한 현장이 끝도 없었다. 거대한 배가 지진해일에 밀려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점령군처럼 우뚝 서 있었다. 그 뒤편으로 세계 각지에서 온 구호단체들의 수많은 텐트에 각종 깃발이 만국기처럼 펄럭였다. 저 수많은 구호단체 중 주민에게 기억되는 단체가 있을까. 주민들 입장에서 궁금했다.


현지 단체들의 도움으로 여러 마을 주민대표들을 만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국가 또는 구호단체 이름과 이유를 물었다. 유명한 단체를 이야기할 거라 짐짓 생각했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단체 이름을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이유가 흥미로웠다. 어느 날 청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마을 곳곳을 다니는 외국 여성이 있었는데, 여느 단체들처럼 구호물품을 들고 온 것도 아니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기만 했다. 그리고 여느 구호단체와 달리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계속 묻기만 했고 주민들의 대답에 정말 기가 막힌 생각이라고 공감하는 게 전부였다.


주민들은 이제나저제나 언제 올지 모르는 구호물품을 마냥 기다릴 수 없으니 생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뭘 해서 먹고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날품팔이라도 좋으니 손수레와 옥수수를 공급해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고 답했다. 이쯤 되면 손수레를 공급해주겠다고 해야 할 텐데 “그 손수레와 옥수수는 어떻게 구입하지요?”라고 또 물었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당황스러웠다. 주민들은 곰곰이 생각해보니 쓰나미에 떠밀려온 폐자재 중에 골라서 고쳐 쓰면 될 것 같았다. 손수레 바퀴 짝이 안 맞는 것도 있지만 굴러가기만 하면 급한 대로 쓸 수 있었다. 그녀는 몇푼 안 드는 옥수수와 재료비는 장기 저리로 빌려주겠다고 했다. 공짜로 받는 것보다 자존심을 지킬 수 있어서 그것도 괜찮다 생각했다. 게다가 돈 빌려주는데 까다로운 서류를 요구하지도 않고 주민들에게 맡긴다고 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 후 손재주가 있는 사람들은 폐자재 수리 전문가가 되고 이래저래 자그만 가게들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가끔씩 찾아오는 그녀는 빌려준 돈이나 사업보다는 사람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그제야 주민들도 어느 나라 어떤 단체에서 일하는지 물었다고 한다. 몇달이 지나서 알게 된 단체 이름은 영국의 ‘옥스팜’이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주민들 스스로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옥스팜은 참 좋은 친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단체는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변화의 속도보다 함께 공감할 줄 아는 능력, 정책 못지않게 사람이 중요한 까닭이다.


나효우  착한여행 대표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6411.html#csidxfa2184726d215d9bc1bd0849b68eb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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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7. 15:25

피를 빨아먹는 게 모기의 모성애라는 얘기도 있다지만, 그래도 모기는 성가시고 아주 간혹 위험하다. 가려움쯤이야 성가신 일로 넘겨도 말라리아, 지카 같은 병을 옮기는 건 위험한 공중보건 문제다. 그래서 모기를 쫓거나 피하려는 가벼운 노력도 있지만, 병원체를 옮기는 모기 종을 물리치려는 치열한 노력도 계속된다.


아예 모기의 유전자를 바꾸자는 건 그런 시도의 첨단에 서 있다. 2010년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영국의 생명공학기업이 카리브해의 영국령 케이맨 제도에서 유전자 변형 모기들을 야생에 풀어 뎅기열 매개 모기 종을 퇴치하려는 실험을 벌였다.


퇴치 전략은 이렇다. 수컷 모기의 유전자를 변형해 야생에 푼다. 이 수컷이 야생의 암컷과 짝짓기를 하면 후손 유충은 생존에 필요한 특정 항생물질을 생성하지 못해 죽고, 그래서 세대를 거듭할수록 모기 수가 줄어들도록 했다. 당시 모기 수가 크게 줄었다는 발표도 있었으나 야외 실험 전에 환경영향평가가 충분했는지는 논란거리가 됐다.


더 적극적인 시도는 ‘유전자 드라이브’라는 말과 함께 2015년 등장했다. 모기 번식을 막을 특정 유전자가 후손에게 우선적으로 널리 유전되도록 촉진하는 기술이라는 뜻에서 이런 이름이 붙은 듯했다. ‘수출 드라이브’ 같은 말에 담긴 의미와 비슷할 듯하다. 예컨대 암컷이 태어나는 걸 막는 유전자를 모기 후손들에게 널리 퍼뜨릴 수 있다면 그 종의 개체는 점점 줄고 결국엔 위험한 모기 종을 퇴출할 수도 있다는 구상이다.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NAS)가 지난해 이와 관련한 평가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를 보면, 유전자 드라이브는 일찍이 1960년부터 어떤 생물종을 개체군 수준에서 보존하거나 퇴치하는 유전공학적 관리 기술과 전략으로 연구되었는데 실효성이 특히 주목받은 것은 2013년 무렵 유전체 편집 기술인 ‘유전자 가위’가 등장한 이후였다. 실험실에선 모기나 초파리에 유전자 가위 시스템을 심어 특정 유전자를 확산하는 기법이 개발됐다.


유전자 드라이브는 위험한 야생은 억제하고 멸종위기 야생은 보존하는 전략이 될까? 기대도 높지만 우려도 깊다. 얽히고설킨 생태계를 뜻하지 않게 교란할 가능성은 한창 논란 중이다. 현재로선, 지난해 유엔 생물다양성 회의나 미국 과학아카데미 보고서가 밝혔듯이 불확실성과 우려도 있지만 연구 가치 또한 있으므로 실험실 연구는 계속돼야 한다는 쪽에 무게가 실려 있다.


논란 중에 다른 성격의 연구도 새롭게 눈길을 끌었다. 실험실이 아니라 실제 야생에서도 유전자 드라이브는 힘을 발휘할까? 야생에선 돌연변이가 출현해 유전자 드라이브에 대한 저항성도 또한 생기지 않을까?


이런 물음과 관련한 연구결과가 최근 또 하나 더해졌다. 미국 생물학 연구자들은 유전자 가위 기법을 이용해 거짓쌀도둑거저리라는 병해충의 개체수를 줄이는 유전자 드라이브 실험을 했다. 연구진은 몇 세대 뒤에 자연적으로 돌연변이가 생겨나 유전자 드라이브 전략을 무력화하는 저항성이 생겨났다고 학술지(<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발표했다.


흥미로운 점은, 변이가 작더라도 드물게 출현하더라도 일단 생긴 변이는 야생에서 빠르게 확산하는 것으로 분석된다는 점이다. 말라리아, 뎅기열, 지카 같은 질환의 퇴치를 목표로 연구돼온 유전자 드라이브 전략은 생태계 교란 가능성이라는 딜레마를 안고서 앞으로도 여러 논의를 거칠 것이다. 이제 유전자 드라이브 연구 전략이나 환경영향평가 논의에서는 첨단 과학의 수동적 대상으로 여겨질 법한 야생이 실은 능동적 적응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도 심각하게 고려될 듯하다. 야생의 진화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다.



오철우 삶과행복팀 선임기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6282.html#csidx4b24b569d03b6b1b39acf64b20245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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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7:55

적폐 청산이란 무엇을 하는 것일까? 청산해야 할 적폐들은 수없이 많지만, 최근 며칠 동안 선거와 관련된 뉴스를 보면서 떠오른 것은 유신헌법의 잔향이었다. 1972년에 제정되어 유신체제의 근간이 된 유신헌법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1조 2항에 나온 주권자에 대한 규정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이후 대통령 긴급조치를 통해 이 헌법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하는 것 자체가 범죄로 규정된 것처럼, 주권자인 국민은 직접 정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없고, 오직 투표나 청탁을 통해서만 정치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누구를 지지하느냐, 어느 줄에 서느냐가 ‘정치’가 된 셈이다.


지난주, 문재인 후보가 4차 토론회에서 한 혐오발언에 대해 성소수자들이 직접 항의행동에 나서자 일부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내가 본 것만 해도 ‘예의가 없다’부터 ‘테러’까지 다양한 수준의 막말이 난무했다. 문재인의 연설을 방해하지 않도록 끝까지 기다렸다가 무지개깃발을 들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몇 마디 외친 것을 두고 마치 난동을 부린 것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신’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절감했다.


성소수자들의 행동에 대한 비난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은, 한마디로 ‘오냐오냐하니까 기어오른다’는 의식이다. ‘불쌍한 약자’로서 ‘훌륭한 지도자’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렸어야 할 존재가, 자신들도 오르지 않는 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이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그들이 지닌 위계의식은, 성소수자들이 홍준표가 아니라 문재인을 ‘공격’한 이유가 그가 만만해 보여서였다는 인식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이런 가정 자체가 망상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의식은 더 잘 보인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누군가 만만하게 봤다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인이 만만해 보이는 게 그렇게 나쁜 것일까?


노무현이 대통령이었을 때, 나에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 그가 만만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가 대통령으로서 잘못한 것도 많지만, 과거 어떤 대통령보다도 탈권위주의적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평가될 만하다. 보수 세력이 노무현이 한때 대통령이었다는 사실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도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실추시켰다고, 즉 민주화시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권위를 바라는 마음은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4·19혁명 이후 쏟아져 나온 다양한 목소리들 앞에서 적지 않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오직 ‘혼란’만을 보고 불안해했다. 위계의 붕괴는 ‘사회 지도층’으로서의 그들의 존립기반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불안은 ‘혼란을 수습한’ 군사쿠데타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다. 우리가 그들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을지 여부는 우리가 ‘광장’에서 무엇을 배웠느냐에 달려 있다.


올해 1월, <한겨레>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더 나은 민주주의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으로 시민들이 검찰 개혁에 이어 두 번째로 꼽은 것이 시민의 직접 정치 참여였다. 이는 꼭 대의제를 부정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선거 과정을 통해 더 다양한 의견들이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직접 정치 참여의 한 방법이며, 성소수자들의 행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투표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유신시대는 끝나지 않는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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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7:51

지난겨울은 '도깨비'가 있어서 행복했다. '가슴에 검(劍)을 꽂고 900년을 살아온 도깨비의 고통을 거두어 줄 사람은 그의 신부뿐'이라는 지극히 낭만적인 '저주'는 서사 전개에 필요한 장치라기보다는 메타포에 가까웠다. 드라마 '도깨비'는 시적인 대사와 미시 콘텐츠의 활성화를 통해 즐길 거리를 제공했다. 그 매력은 당신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작품에 참여한 데 있다. 주인공의 대사를 따라 하거나, 롱코트를 입어보거나, 빨간 목도리를 둘러 본 사람들. 시크한 말투를 흉내 낸 시청자. 모두가 작품과 함께했다.

우리는 거부할 수 없는 '향유의 시대'를 살고 있다. 향유란 문화를 주체적으로 즐기는 활동이다. 주체적으로 즐긴다는 말은 스스로 참여하여 가능한 모든 방법을 찾아가는 체험의 과정을 의미한다. 문화는 향유를 통해 생산자 중심의 교조적 일방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창조적 활력을 지니게 된다. 국민 누구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콘텐츠를 향유하고 소비하며, 체험의 과정을 통해 창작자로 성장한다. 콘텐츠를 중심으로 역동적인 창업과 창작이 연결되는 것이다.

이렇듯 콘텐츠 관점에서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향유다. 이제 우리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가치 있는 체험을 하고 공유하며 확산시킬 힘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다. 게임, 영화, 음악, 애니메이션, 웹툰, 캐릭터 등으로 대표되는 콘텐츠 모두가 보편적 향유 대상이다. 우리는 이 향유 대상들로부터 감성과 감동의 울림을 얻는다. 기술 진보에 따라 향유 방법이 다양해지고 있지만 결국 사람을 이해하고 감성을 자극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문화적 감수성이 중요하다.


지금 온 사회가 4차 산업혁명과 새 정부의 새로운 정책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문제는 경제'라고 하지만 사회의 어젠다가 경제에만 묶여 있으면 불행한 일이다. 경제가 삶의 중요한 토대라면 콘텐츠 향유 역시 그러하다. 콘텐츠 향유가 중요한 것은 그 부가가치만큼이나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 자신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때문이다. 스스로 참여해 가치를 발굴하고 즐거움을 창출하는 향유의 시대인 것이다. 문화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콘텐츠는 공허하고, 참여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향유는 불가능하다. 새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국민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그 중요한 답의 하나는 '콘텐츠 향유'에 있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16/20170516034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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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7:05
서울의 민간 재가복지센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시행된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에 따라 치매나 뇌혈관 문제 등 노인성 질환을 앓는 어르신 댁을 요양보호사들이 찾아가 도움을 드리고 있습니다. 저도 20명가량을 담당하는데, 매달 한 번 댁으로 가서 신체, 질병, 인지, 영양, 의사소통 상태를 체크하고 보호자와 요양보호사들의 의견을 듣습니다. 어르신 20여명 중 대부분이 할머니입니다.

서울에 사는 87세 할머니는 1남 4녀가 있는데 서울에만 1남 2녀가 삽니다. 하지만 셋 모두 형편이 어려워 줄곧 모실 처지가 아니어서 한 달씩 번갈아가며 모십니다. 신림동 작은딸네서 한 달, 그 부근 아들네서 한 달, 사당동 큰딸네에서 한 달, 이런 식입니다. 난청이 심해 큰 소리로 말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이가 없는데 틀니를 못해 늘 소화 장애에 시달립니다. 작년 가을 화장실에서 넘어진 후로는 걷지도 못합니다. 치매와 시공간 감지력 저하로 밤과 낮 구분이 안 돼 한밤에 기어가 이 방 저 방 문을 여니 자식과 손주들 모두 힘들어합니다. 제가 가면 "왜 아직까지 사는지 모르겠다"며 "하지만 병원(요양원)은 안 간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요양원에 보내질지 모른다는, 즉 집에서 내쳐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겁니다. 요양원 입소는 당사자들이 극력 꺼리기도 하지만 국공립은 대기자가 많아 '하늘의 별 따기'이고 민간 역시 자리가 비어야 합니다. 대상 어르신의 수는 급격히 늘어나는데 시설 자체가 크게 부족합니다.

/조선일보 DB
평택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 가야 하는 곳에 홀로 사는 90세 할머니가 계십니다. 너무 외져서 요양보호사들도 맡기를 꺼립니다. 지하 창고를 개조해 환기가 잘 안 되는 악취 심한 방에 삽니다. 시력이 나쁜데도 불을 켜면 눈물이 나서 사실상 암흑 속에서 지내다시피 합니다. 제가 돌아갈 때마다 "왜 벌써 가려느냐"며 붙잡으십니다. 저는 화재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 늘 불안합니다. 이분도 자녀는 많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고, 서울·수도권에 사는 자녀는 다들 살기가 어려워 함께 지낼 여건이 아닙니다. 구리에서 혼자 사는 90세 할머니는 생활 형편은 훨씬 좋습니다. 하지만 그분도 저만 보면 "나보다 나이 먹은 사람도 있느냐"며 물어보시는데 제가 "그럼요. 많이 계셔요"라고 답해야 안심하십니다.

어르신들이 왜 오래 사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나. 왜 자녀들 힘들게 만든다며 죄의식을 갖고, 내쳐질까 봐 두려워해야 하나. 이분들을 대할 때마다 우리의 내일을 미리 보는 것 같아 서글프고 불안해집니다. 우리나라의 고령화 속도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릅니다. 그리고 노인 빈곤율은 OECD 회원국 가운데 1위라고 합니다. 한편 불황과 청년 실업 문제는 개선되지 않으니 사회가 어르신을 모실 능력을 점점 더 상실해가는 것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우리의 부모인 어르신을 모시는 문제는 이제 가족만이 감당할 사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끼곤 합니다. 어르신이 오래 사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나라, 자녀에게 피해를 준다며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지요. 이제부터라도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워 실천합시다.



김지은 굿모닝복지센터 책임연구원·사회복지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4/201705040266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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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7:02
"욕하지 말고, 때리지 말고. 부리지 말자."

1923년 5월 1일이 '어린이날'로 처음 제정됐을 때 어린이 운동가들이 외친 구호다. 아이들에게 뭘 해주자는 게 아니라 뭘 하지 말자는 부작위의 호소였다. 뒤집어보면, 90여 년 전 우리 아이들 처지가 얼마나 고달팠는지 알 수 있다. 제1회 어린이날에 아이들의 가장 간절한 희망사항 10가지를 담아 배포한, '어른에게 드리는 선전문' 속에는 '이발이나 목욕을 때맞춰 해주세요'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해주세요' '산보와 소풍을 가끔 시켜주세요' 같은 것도 있었다(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자). 이런 외침도 어린이날만 지나면 잠잠해졌다.


1956년 어린이날 행사 때 땡볕 아래서 매스게임을 하는 어린이들(왼쪽 사진·조선일보 1956년 5월 6일 자)과 1963년 어린이날 나들이 나왔다가 미아가 되어 미아보호소에서 새우잠을 자는 어린이들(동아일보 1963년 5월 6일 자).
1956년 어린이날 행사 때 땡볕 아래서 매스게임을 하는 어린이들(왼쪽 사진·조선일보 1956년 5월 6일 자)과 1963년 어린이날 나들이 나왔다가 미아가 되어 미아보호소에서 새우잠을 자는 어린이들(동아일보 1963년 5월 6일 자).


















초창기 어린이날이란 잔칫날이라기보다는 '어린이날이란 무엇인가'를 어른들에게 알리는 날이었다. 전국 거리를 행진하면서 전단지 등을 나눠주는 일을 어린이들이 했다. 1925년 행사 땐 어린이 30여 만명이 길거리에 나갔다. 1933년 어린이날에 소년단 소속 어린이들은 새벽 6시부터 어린이날을 고하는 새벽나팔을 분 뒤, 선전지 배포에 총동원됐다. 평소보다 몇 배 고단한 하루였다.

광복 이후엔 어린이날 행사들이 볼거리 위주로 크게 열렸다. 이승만 정권 시절 어린이날마다 서울운동장(옛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대규모 행사 역시 아이들을 힘들게 했다. 초대형 매스게임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1955년의 경우 초등학생 5000여 명은 몇날 며칠을 수업도 줄여가며 연습한 '합동체조'를 이 대통령과 고관들 앞에서 선보였다. 얻어맞아 가며 연습했다는 말도 있었다. 이날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할 어린이들이 땡볕 쏟아지는 운동장에서 진땀을 뺐다. 보다 못한 아동문학가 이원수는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아이들이) 알아듣기도 힘든 축사 강연을 들었으며 무의미한 고행을 했다… 어린이날이 아니라 아동 곤욕의 날"이라며 당국자들을 맹비난했다(조선일보 1955년 5월 10일자). 그러나 이런 지적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1956년에도 어린이 5000명이 합동무용에 동원됐다. 공연 도중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기념식이 중단됐다. 운동장에서 고생하던 어린이들은 아마도 좋아했을 것이다. 아동문학가 윤석중(새싹회 대표)은 "어린이날엔 어린이들 재롱을 어른들이 구경할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른들이 어린이에게 알맞은 얘기랑 노래랑 춤이랑 연극이랑 들려주고 보여주는 잔치를 베풀어 줘야만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어린이날 행사에서 어린이들의 고생이 줄어들기는 했다. 하지만 어린이들의 매스게임 동원은 1980년대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린이날이면 나들이 나왔다가 부모를 잃어버린 미아도 1000명 안팎씩 발생했다. 1963년 어린이날엔 미아 105명이 그날 밤까지도 부모를 못 만나 적십자 미아보호소에서 새우잠을 잤다. 

고달픈 어린이날의 과거는 역사 속으로 흘러갔고, 오늘날  어린이날이면 많은 아이가 가족들과 좋은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도 지난주 보도에 따르면 세계 16개국 12세 아이들의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가 최하위였다고 한다. 

특히 '외모에 대한 불만'이 12세들의 행복도를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외모 중시 풍토가 아이들 행복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방정환 선생님이 이런 사실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2/2017050203074.html


Posted by 겟업
2018. 1. 6. 16:54

오이와 함께 비벼버린 냉면 사진에 8만 오싫사(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가 통곡했다. 오이 냄새만 맡아도 피부 말단의 DNA 세포부터 쭈뼛 서버리는 것 같다는 이들은 오싫사를 ‘살면서 가장 소속감을 느낀 집단’이라고 말한다. 어린 시절 선생님이 억지로 입에 넣은 오이를 토해버린 트라우마가 자신만의 것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52소수자(오이라는 글자에서도 오이 냄새가 난단다)들은 뭉친 지 며칠 사이에 많은 것을 성취했다. 한 분식 체인점이 큐컴버-프리 김밥을 출시했고 언론은 OE혐오자들이 쓴맛을 다른 사람보다 1000배 더 느끼는 유전자를 가졌단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정당성까지 확보한 셈이다. 이쯤 되면 과거 오이 싫어하는 친구를 놀리려 친구 핸드폰에 오이 비누를 문댔던 나의 장난이 씻을 수 없는 만행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들 최대의 적은 오이가 아닌 오이 패권주의자다. “오이 빼주세요”란 말에 “오이 없이 무슨 냉면 맛이야”라며 덤퍽 오이를 올리는 오이 탈레반을 의미하는 거다. 오싫사 회원들은 지난 며칠간 오이 사진과 함께 “오이는 오이시이(맛있다의 일본말)” “오이미역냉국 한 사발 하세요” 등의 메시지 테러까지 당했다. 편식은 나쁜 것이란 뿌리 깊은 인식, 똑같이 안 먹으면 실눈 뜨는 전체주의적 문화. 거기서 오는 오득권자들의 만행은 익숙하다며 한숨을 내쉰다.


중국 관광객 대신 중동 관광객을 대거 유치하겠단 계획에 의구심이 드는 것도 곳곳의 음식 패권주의 때문이다. 식도락을 즐기기 어려운데 관광객이 ‘유치’될까. 중동 사람들이 대장금을 재미있게 봤다 해도 그렇다. 할랄을 꼼꼼히 따지지 않는 이들도 한국 식당에선 믿고 먹기 어려운 경우가 많단다. 한국 대학에 다니는 중동 석사생이 “돼지를 아예 안 먹으면 돼지고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은 뭐가 돼”란 말을 자주 듣는다며 하소연한 글이 외국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일도 있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는 우문현답에도 돼지 권유는 끊이지 않았단다. 공영방송에서 시어머니와 남편이 무슬림 며느리를 속여 돼지고기를 먹이는 에피소드가 나온 것도 불과 지난해다. 좋아하는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입장 바꿔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 ‘고수 안 넣으면 동남아 음식이 아니다’며 고수를 고수하는 식당이 있다면 실격이다.
 
다행인 건 우리나라가 학습이 빠른 나라란 거다. 10년 사이에 취향 존중 문화가 확산된 것만 봐도 그렇다. 10년 전엔 욕이었던 ‘오타쿠’ ‘빠순이’도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로 시선이 많이 중화됐다. 취향을 평가하려 드는 이에게 ‘취향 존중 부탁드립니다’는 매너가 됐다. 이제 식문화 차례다. 탕수육 찍먹파가 부어 먹음 당하지 않는 세상, 생선회에 레몬을 각자 뿌려 먹을 수 있는 밥상 민주화를 원한다.
 
구혜진 JTBC 사회1부 기자 



http://news.joins.com/article/21440934

Posted by 겟업
2018. 1. 6. 16:50

직장인의 미래를 예술에서 찾아야 한다고 하면 엉뚱할까.

여행사에 근무하는 지인에게서 앞으로 이 직종이 얼마나 살아남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여행사를 통해 비행기표를 구매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근 만난 동시통역사는 10년 이내에 기계에 일을 내어 줄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내가 아는 미용사는 1990년대 20대 말에 어쩔 수 없이 퇴사해서 미용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자기 가게를 운영한다. 그녀는 5월에 연휴가 많아 손님이 줄어들까 걱정하지만, 직업이 없어질 것 같은 걱정은 없다. 오히려 40대인 지금까지 직장에 있었다면 나와서 막막했을 거라 말한다. 

베스트셀러 ‘일의 미래’에서 저자 선대인 소장은 ‘5년 뒤 당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을 던진다. 직장인들은 이에 대해 답이 없고 불안하다. 미래는 어디에 있을까.

지난주 나무와 진흙으로 주로 작업하는 영국의 젊은 예술가이면서 한국에서도 전시를 한 바 있는 닉 웹과 이틀 동안 그의 작업실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직장인의 미래에 대한 힌트를 예술가에게서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첫째, 예술가들은 조직이 아니라 자신의 기술에 의존한다. 2월 월스트리트저널은 ‘(정규직) 직원의 종말’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업들이 정규직 채용을 줄이고, 아웃소싱, 계약직으로 전환하는 트렌드를 보도했다. 예전 어른들은 공부를 못하면 “기술이나 배워라”라고 했다. 하지만 직장인들은 자기만의 기술이 없어 미래가 불안하다. 50세를 전후하여 직장을 떠난 뒤 자기 기술이 있는 사람은 독립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결국 프랜차이즈 등을 통해 조직의 기술에 의존하고, 독립이 힘들어진다. 직장인의 미래에 대한 고민은 조직이 아닌 나만의 기술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둘째, 예술가들은 조직에 기대지 않기에 정기적인 급여를 받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생계를 위해 자기 작품을 팔거나 돈벌이를 하게 된다. 미술이나 음악 하는 사람이 교습을 하거나 작가가 인세를 받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는 경우가 그렇다. 직장인이 회사를 떠나 정기적인 급여를 받지 못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빨리 온다. 정기적 급여를 받으며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팔 수 있는’ 기술을 축적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냥 기술’과 ‘팔 수 있는 기술’은 매우 다르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요리를 팔아서 식당을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이다. 판매할 수 없다면 정기 급여가 없는 상황을 헤쳐 나가기 힘들다.

셋째, 예술가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우리는 학교를 졸업하면 취직을 하고, 회사에서 배정한 부서에서 일한다. 예술가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비교적 뚜렷하다. 빅데이터는 유망한 직종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빅데이터 산업에 뛰어들 수는 없다. 세상의 변화를 쫓아가기 위해 우리는 외부에 눈을 돌린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물어보면 말문이 막힌다. 


자신을 조직과 직책의 이름으로만 규정하면 미래는 매우 좁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기술을 만들어 내야 자신만의 지속적인 연구와 개발도 가능하고 팔 수 있는 가능성도 높아진다. 생각을 확대해 보자. 여행사 직원보다는 사람들이 좀 더 즐겁고 행복하게 여행하도록 만들어 주는 전문가로, 미용사보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에 더 자신감을 갖게 도와주는 전문가로 자신을 바라보면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 혼자만의 시간과 자신과의 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많은 사람은 미래에 대한 걱정만 하지 정작 깊이 있는 고민은 회피한다. 일단 월급은 나오기 때문에 고민을 미룬다. 

웹은 좋은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확실한 기술을 가진 장인(匠人)이 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감정과 연결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했다. 선 소장 역시 공감과 소통 능력이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이라 말한다. 

예술가의 특성에서 미래에 대한 힌트를 얻어 보자. 삶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 분야의 탄탄한 기술을 갖고 있는가. 그 기술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월급을 받을 수 있는 날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 조직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http://news.donga.com/Column/3/70030300000055/20170405/83695473/1#csidx4939ff3de601590992b50a5bd32401a 

Posted by 겟업
2018. 1. 6. 16:48

몇 해 전 명절이었다. 집안 어른 한 분이 딸과 며느리들에게 신문을 보여주며 말씀하셨다. “이 사람 어머니가 자식들을 방으로 매일 한 명씩 따로 불렀다는 거야. 아이와 두 눈을 꼭 맞추고선 ‘넌 정말 특별하단다’, ‘넌 진짜 대단한 아이야’ 이런 얘기를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줬다네. 그 덕분에 오늘날의 자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아주 좋은 방법 같아.” 혼잣말의 형식을 띠었지만, 너희도 이렇게 자식들을 키워보면 좋지 않겠냐는 제언이었다. 포인트는 형제자매들을 한꺼번에 칭찬하는 게 아니라 한 명씩 따로 몰래 칭찬하는 것. 어머니의 일상제의 덕분에 훌륭해진 사람이 빌 게이츠였는지 마크 저커버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저 연배의 어른에게도 부모에게 인정 받는다는 느낌이 자존감의 깊은 뿌리가 되는구나, 혼자 웃으며 며칠간 열심히 실행했던 기억만 남아 있다. 

우리는 아이를 특별하게 키우라는 많은 메시지에 노출돼 있다. 분유 하나를 사도 ‘우리 아이는 특별하니까’ 더 비싼 것을 사 먹여야 하고, 학원 하나를 보내도 특별한 아이들만 다닐 수 있다는 ‘영재학원’에 보내고 싶어 한다. 특별한 아이로 키우라는 메시지는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한 자본의 상술일 뿐이지만, 내 아이는 특별하다는 믿음과 염원이 우리 마음 속에 창궐하므로 언제나 이 전략은 번성한다. 내면적인 것과 외형적인 것은 다르지 않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둘은 생각보다 그렇게 분리돼 있지 않다. 특별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설령 내면에서만 꽃핀다 해도 별로 건강한 일이 아니다. 특별하다는 것 자체가 본질적으로 남과의 비교, 외부의 시선을 전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사랑 받고 인정 받는다는 확고부동한 감정은 한 인간의 존립근거이며, 이것이 심하게 결핍될 때 아이는 훼손된 인간으로 자라날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나는 특별하다는 자의식이 너도 특별하다는 평등의식과 병립하지 않는다면, ‘이렇게 특별한 나’라는 선민의식은 한 인간의 정신에 그저 독약으로 작용할 뿐이다. 너무 특별하게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괴물 같은 어른이 되는지 오늘날 우리는 충격적으로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보일러 작동법을 몰라 삼성동 자택에서 떨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그래서 우리는 오래오래 기억해야 한다. 9세에 청와대에 들어가 27세에 나올 때까지 공주마마로만 살았던 그는 너무도 특별한 아이였던 나머지 온전한 삶을 살 기회를 박탈당했다.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그저 그런 일상을 지루하게 살아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온전한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일찍이 소설가 마르케스가 털어놓았듯 명성은 그 본질이 파괴적인 것이어서 “사람들을 진짜 세계로부터 소외시킨다”. 그러니까 보통사람으로 산다는 건 진짜 세계에서 온전하게 전적으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올 초 백악관을 떠난 미국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8년은 평범함과 정상성을 고수하기 위한 피나는 투쟁이었다. 외부의 시선에 노출된 공적 삶으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하고 아이들이 ‘평범하기에 전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매섭게 규칙을 세우고 지켰다. 백악관 직원들이라고 왜 퍼스트도터(first daughter)들에게 찬탄의 언어를 쏟아내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미셸은 즉각 이들의 찬사를 제지하며 경계선을 설정했다. 백악관에 들어가 직원들에게 처음 했던 말이 “아이들 이부자리 펴주지 마세요. 청소도 스스로 하게 하세요”였다. 최저임금 직종에서 일해봐야 한다며 둘째 딸 사샤를 새벽 식당 아르바이트에 보내고, 아이들 학교 행사는 백악관 달력에 가장 먼저 표시한 후 반드시 참석했다. 보통사람으로서 누리는 온전한 삶의 경험과 감각은 제 아무리 탁월한 홍보 전략과 이미지 조작으로도 재현 가능한 게 아니라는 걸 그는 몸소 보여줬다. 


덴마크 사람들이 신봉하는 얀테의 법칙(보통사람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남보다 더 똑똑하다고 착각하지 마라’, ‘네가 다른 이들보다 중요할 것이라 생각하지 마라’ 등으로 이뤄진 겸손의 10계명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너는 특별하라’는 정언명령이 아니다. 바로 이 보통사람의 법칙이다. 그토록 특별한 삶을 살아왔던 박 전 대통령이 새 매트리스의 비닐커버를 지금쯤은 뜯었을지 어쩔지 궁금해 하다, 내가 왜 이런 걸 궁금해 하고 있어야 하는지 마음이 답답해진다. 오늘 집에 가면 아이들을 하나씩 따로 불러 말해줘야겠다. ‘넌 정말 특별하지 않아.’ 

박선영 기획취재부 기자



http://www.hankookilbo.com/m/v/f1c35ea72e614b9aa178aa0e56d702d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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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6:40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총 균 쇠’는 서울대생이 학교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보는 책 가운데 하나다.


물론 생물지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책이기는 하지만 도대체 왜 그리 많이들 읽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선배들이 많이 봤다고 하니까 후배들도 덩달아 너도 나도 따라서 읽은 것일 테다.


‘총 균 쇠’는 752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지만 단 한 가지 질문에 집중한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같은 조상에서 나온 호모 사피엔스다. 그런데 왜 문명 발달 속도가 저마다 다를까?”


여기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유전자의 차이라는 것이다. 흑인, 황인, 백인의 유전자가 다르며 그에 따라 지능도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학계에서는 이미 ‘인종’이란 단어는 퇴출되었다. 대륙마다 유전자가 다르다는 증거가 없다.


두 번째 해석은 필요의 차이, 기후에 따른 천성 같은 게 원인이라는 것이다. 창의성은 기후가 추운 곳에서 발휘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문명 발달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바퀴, 문자, 농업, 야금술은 모두 더운 지방에서 발명된 후 추운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그는 1532년 스페인의 피사로 장군과 잉카제국의 알타우알파 왕의 전투를 예로 든다. 피사로의 군대는 기병 62명과 보명 106명이 전부였다. 알타우알파 뒤에는 자그마치 8만 명의 대군이 서 있었다. 19대 1로 싸워서 이겼다는 허풍은 많이 들어봤어도 400 대 1로 싸워서 이겼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결과는 스페인의 압승이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무기다. 둘째는 유럽인이 가져온 전염병이고 셋째는 대양을 건너는 해양기술과 문자였으며 강력한 통솔력을 발휘하는 정치조직이다. 그런데 왜 유럽인에게 가능했던 일이 잉카인에게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농업의 발전이 대륙의 모든 차이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왜 어느 지역은 농업의 발전이 빨랐고, 어느 지역은 발전이 더디거나 아예 농업을 시작하지도 못했을까?”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해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기후, 고도와 지형의 변화 정도, 가축화할 수 있는 포유류와 곡물화할 수 있는 야생식물의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결국 환경적 차이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족과 대륙마다 역사가 다르게 진행된 까닭은 민족의 생물학적인 차이가 아니라 환경적인 차이 때문인 것이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논리는 명확하다. 문명 발달의 기초는 농업이며, 잉여생산물이 생기면 기술을 발달시킬 전문가들이 생기고 결국에는 문자와 정치조직이 발달했다. 그런데 농업의 발달 정도를 결정한 것은 바로 환경이라는 것이다. ‘총 균 쇠’는 인종의 차이를 뛰어넘는 인류사의 중요한 요소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분명히 전 세계 사람들에게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원래 생리학자로 과학계에 발을 내딛었다. 그를 생물지리학자로 변신시킨 질문은 뉴기니에서 나왔다. 1972년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조류학자와 진화생물학자로서 뉴기니 해변에서 새의 진화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뉴기니의 정치가 얄리와 함께 길을 걸었다. 얄리가 물었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발전시켜 뉴기니까지 가져왔는데 어째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한 겁니까?” 여기서 화물이란 쇠도끼, 성냥, 의약품, 옷, 청량음료, 우산에 이르는 온갖 물건을 말한다. 뉴기니 사람들에게 화물은 하나의 신앙이었다. 카고 컬트(cargo cult), 즉 화물숭배가 바로 그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남태평양의 섬에는 미군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미군 비행기가 착륙할 때마다 신기하고 쓸모 있는 화물들도 함께 왔다. 미군들은 물건을 조금씩 원주민들에게 넘겨주었다. 하얀 알을 먹으니 설사가 멎었다. 기적이었다. 원주민에게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었다. 물건을 넘겨주는 미군들은 아무런 생산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물은 비행기에서 저절로 생겨났다. 화물은 신이 내려준 선물 같았다.


전쟁이 끝났다. 미군 비행장은 폐쇄되었다. 원주민들은 더 이상 문명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원주민은 대나무로 비행기와 관제탑 모형을 만들어 놓고는 제사를 지냈다.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도와줄 것처럼 제사를 지냈다. 후에 미국인들이 와서 그들의 오해를 풀어주려고 해도 그들의 깊은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뉴기니에는 아직도 화물숭배 신앙이 남아 있다. 심지어 매년 2월 15일 되면 USA라는 그림을 그리고, 성조기를 펼쳐 들고 대나무 막대기로 만든 총을 어깨에 걸치고 사열하는 부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깊은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화물은 내려오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이게 남의 일이 아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화물숭배 신앙은 활개치고 있다. 지난 3월 1일 서울 시청 앞에는 성조기와 태극기, 심지어 뜬금없이 이스라엘 국기를 든 사람들이 500만(!) 명이나 모였다. (500만 명이 한군데에 모여도 서울시 교통은 전혀 마비되지 않았으며 생수를 비롯한 생필품 공급과 화장실 사용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단 1만 6천 명의 경찰로 질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정도 대처라면 웬만한 전쟁이 나도 서울시민은 무사할 것 같다. 서울시 만세! 경찰청 만세!)


이것은 한국전쟁의 기억 속에서 북한을 블레셋으로 미사일과 핵을 골리앗으로 섬기며 저주하는 또 다른 화물숭배 신앙이다. 화물숭배 신앙인에게는 답이 없다. 시간이 흘러 자연적으로 소멸하기를 바라야 한다. 다만 뉴기니보다 대한민국의 화물숭배 신앙이 더 먼저 사라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총 균 쇠’를 읽을 이유가 분명한 것 같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http://www.hankookilbo.com/v/a0ecdee3e0f74d9097ac2a954f9dd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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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6:36

독일의 경제학자 빌헬름 뢰프케는 평생 화두 하나를 붙들고 살았다. 바로 "칸트 괴테 베토벤의 나라 독일이 어쩌다 미치광이 히틀러에게 몰표를 몰아주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인류에게 안겨주었는가?"였다.


의문은 곧 이런 재앙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독일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성찰로 이어졌다. 뢰프케가 도달한 결론은 한 사회가 건강하려면 사회적 계층질서 피라미드의 최상층에 소수의 '윤리적 귀족'이 존재해야 하며, 무지한 대중들로 인해 세상이 흔들리지 않으려면 진정한 성직자 혹은 지식인과 같은 엘리트가 자기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뢰프케는 두 가지 특이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25세 때 예나대학교의 교수에 임용됨으로써 독일 역사상 최연소 교수가 되었다는 점이고, 두 번째 기록은 나치정권이 해직한 대학교수 리스트 상단에 그의 이름이 위치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치의 집권 이전부터 장차 나치가 독일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것을 예견하고, 강연과 기고를 통해 격렬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히틀러의 미움을 샀다. 마침내 현실화된 나치의 박해를 피해 그는 터키를 거쳐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뢰프케는 나치체제가 가져온 재앙을 복기하면서 모름지기 건강한 사회에는 윤리적 귀족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윤리적 귀족은 ‘범할 수 없는 규범과 가치를 지키는 공동체의 수호자를 자임하고 또 그것을 몸소 엄격하게 실천하는 소수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 그룹’을 의미한다. 윤리적 귀족은 절제된 생활을 위해 헌신하고, 진리와 법을 수호하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며, 마침내 국가의 양심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자유사회의 지속적인 존립여부는 우리 시대가 윤리적 귀족을 얼마나 충분히 창출하느냐에 달려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목전의 이해에 눈멀지 않고 중요한 경제정책을 바라볼 수 있는 사업가, 금융인, 노조지도자, 재판관, 언론인과 학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순실 사태 이후 광장에 촛불이 켜지고 연이어 태극기 물결이 등장하면서 나라는 의식적으로 두 쪽이 났다. 현대 국가의 가장 큰 책무인 갈등조정은 교과서 속으로 퇴장하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적절한 대응은커녕 한국은 정부부재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 사드의 중국, 소녀상의 일본, 트럼프의 미국 등 국제문제가 우리를 옥죄고 있으나 정부는 아무 손을 쓰지 못한다. 정치권은 온통 대통령선거에만 집중하는 바람에 민생이라든지 청년 일자리 같은 국내현안도 표류하고 있다. 가위 국난이다.


미증유의 국난을 맞아 우리에게도 윤리적 귀족이 있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존경하는 정치인, 믿고 따를 수 있는 성직자, 올곧은 언론인, 신뢰하는 법조인, 시대정신을 발현하는 지성인이 우리에게 있는가. 지금은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대중이 귀담아듣지 않는다. 그런 판국에 국민이 존경할 만한 인물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기에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어쩌다 언론이 국가 원로라는 포장으로 전직 고위인사 몇 사람의 의견을 묶어 보도하지만 그들의 말은 국민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어른도 원로도 지도자도 존경할 만한 인물도 없는 사회야말로 비극의 무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세상에서는 국민이 자포자기하기 쉽고 부박해진다. 광장은 이미 그런 기류를 반영하기 시작했다.


믿고 따를 인물이 없는 우리에게 뢰프케의 윤리적 귀족 처방은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향후 한국사회가 건강성을 유지하려면 우리에게도 윤리적 귀족에 해당하는 다음 세 집단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이다. 지식인의 책무는 건강한 시대정신을 제시하는 것이다. 언론인은 사회가 썩지 않도록 감시하고 계도하는 것이 기본 책무다. 종교인은 국민들이 저마다 가치 있게 살아가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들이 절제된 생활을 위해 헌신하고, 진리와 법을 수호하기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하며, 각자의 영역에서 국가의 양심이라 칭할 만한 인물로 성장한다면, 비로소 국민의 가치관이 바로 서게 되며 그때 가서야 나라가 반듯해질 것이다.


서재경 아름다운서당 이사장

http://www.hankookilbo.com/v/8e959b7f133d4f67bf2be7c854e536c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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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6:33

빵집 아들이 자기집 유리창을 깼다. 빵집 주인이 아들을 심하게 탓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그렇게 볼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빵집 주인이 새 유리를 사면 유리창 수리 업자는 돈을 벌게 된다. 수리업자는 그 돈을 다른 곳에 쓸 것이고, 그러면 또 다른 곳에서 소득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빵집 아들은 마을의 소득과 고용창출에 기여했다. 그러니 창을 깬 것은 마을경제로 보면 잘한 일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아직도 4대강 사업이 좋은 사업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4대강 사업으로 금융위기 당시 고용이 창출됐다거나, 백제보를 통해 가뭄이 심각한 충남 보령댐에 물을 댈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만 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주장이다. 바스티아는 이런 사람들을 ‘사이비 경제학자’라고 말했다.
 빵집 주인은 신을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리창을 사느라 신을 사지 못했다. 아들이 유리창을 깬 것은 빵집 주인의 지출 방향만 바꾸었을 뿐 새로운 소득을 창출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신발장수는 신발을 팔지 못했으니 오히려 손해를 봤다. ‘깨진 유리창의 오류’라고 명명된 유명한 경제학의 우화다. 프랑스 경제학자인 프레데릭 바스티아가 1850년에 쓴 에세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나오는 얘기다.

강 정비의 필요성을 전면 부인하자는 게 아니다. 정비가 필요한 강에는 그 수요에 맞게 돈을 썼으면 됐다. 10분의 1인 2조원 정도였다면 차고도 남았을지 모른다.

말이 쉬워서 1조원이지, 1조원은 작은돈이 아니다. 한 사람이 하루 3000만원씩 쓴다고 해도 무려 100년간 쓸 수 있는 돈이다. 그런 돈 22조원을 강바닥에 썼다. 그것도 국채를 발행해 빚까지 내서 말이다. 그 돈은 시급히 써야 할 데가 많았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기획재정부의 한 고위 간부는 “김대중 정부 때 인터넷 인프라를 까는 데 47조원을 썼고, 그 덕에 IT강국이 됐다”며 “4대강 대신 신성장동력에 과감하게 투자했더라면 지금쯤 새로운 먹을거리를 찾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래, 그까짓 것 한번 질펀한 돈잔치를 벌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다. 4대강 사업이 완공된 2012년 이후 유지비로 매년 5000억원씩, 이미 2조5000억원을 더 썼다. 수자원공사가 빌린 8조원의 이자, 생태하천 등 4대강 사업 구간 관리, 준설토 관리 등을 합친 액수다. 예정에 없던 새 계산서도 제출됐다. 녹조 관리다. 거기다 향후 지출이 확정된 비용 등을 모두 따지면 전체 사업비는 30조원에 이를 수 있다. 차라리 보를 부수고 물길을 터주자고 애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는 안된다고 한다. 이미 쓴 돈이 얼마냐는 것이다. 이면에는 4대강 사업 실패를 인정할 수 없는 자존심도 있다. 

세계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인 ‘콩코드’는 경제성이 없었다. 연료소모량은 많고 탑승인원은 적었다. 하지만 콩코드를 만든 영국과 프랑스는 운항을 중단하지 못했다. 콩코드는 양국의 자존심이었다. 개발에 많은 자금도 투자됐다. 2003년 콩코드는 운항 27년 만에 중단을 선언했다. 누적된 적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콩코드의 오류’라 부른다. 매몰비용(이미 쓴 비용)에 집착하다 상황을 더 악화시킨 대표적인 사례다. 


‘깨진 유리창의 오류’로 시작한 4대강 사업은 ‘콩코드의 오류’로 넘어가고 있다. 정부가 고집을 꺾지 않는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4대강 사업은 새 경제용어를 남길지도 모르겠다. 깨진 유리창과 콩코드, 두 오류를 합친 ‘4대강의 오류’라고 말이다. 4대강 사업은 시작도 잘못됐고, 끝도 잘못되고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3012112035&code=990100#csidxd50d0c3754599e18345c1ccd6c92264 



Posted by 겟업
2018. 1. 6. 16:30

‘부시맨’은 같은 제목으로 국내에도 개봉한 1980년대 영화 덕분에,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아프리카 원시부족을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부락 위를 날던 비행기에서 우연히 떨어진 콜라병을 두고서 부락 안에서 분란이 일고, 결국 하늘에서 떨어진 콜라병을 신에게 돌려주려고 추장은 땅끝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여정 중에 마주치는 문명사회에서 겪는 코미디 같은 에피소드가 줄거리다. 순진무구해서 도리어 우스꽝스러운 부시맨은 문명의 맥락에서 동떨어진 아프리카 부족을 부르는 자연스러운 이름으로, 그렇게 불리었다.


부시맨이라는 말이 당사자인 아프리카 ‘산족’(San people)에겐 모욕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해외 매체에 실린 뉴스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것도 연구윤리를 다루는 뉴스에서.


서양사람이 붙여준 부시맨 또는 코이산족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아프리카 산족들 중에서 남아공 산족평의회(SASC)가 앞으로 산족을 연구하기 위해선 연구윤리를 지켜야 한다며 연구자사회를 향해 자신들이 만든 연구윤리규약을 발표했다. <네이처>와 <사이언스>를 비롯해 여러 매체가 관심을 보이며 그 내용과 반응을 보도했다.


산족평의회는 원주민 연구의 윤리 원칙으로 존중, 정직, 정의와 공정, 배려를 요구했다(bit.ly/2nEscvQ). 산족의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고 산족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줄 것, 연구 목적이나 연구비 정보 등을 산족에게 투명하고 정직하게 밝힐 것, 연구에 참여해 얻을 혜택을 분명하게 논의하고 보장할 것, 산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복잡한 과학 언어로 혼란을 주거나 무지한 이로 취급하지 말 것 등을 요구했다.


산족이 연구윤리에 이처럼 심각해진 이유는 뭘까?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원시 종족”으로 불리는 산족은 그동안 각지에서 찾아온 연구자들로 시달려왔다고 한다. 이른바 문명사회에선 보기 힘든 전통 의례와 풍습들, 그리고 환경과 어울려 살 줄 아는 산족만의 건강 비법과 약초 지식들, 오래된 유전자를 간직해 인류 집단의 분기와 진화를 연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전체(게놈), 이런 것들이 산족 바깥 세계로 연구자들이 가져간 산족의 지식, 경험, 문화, 생체정보였다.


한 사건이 기폭제가 됐다. ‘트러스트 프로젝트’라는 단체의 보고서(bit.ly/2nkVP2g)를 보면, 산족과 반투족의 게놈을 비교분석해 2010년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이 문제가 됐다. 논문 부록에서 무지한 부시맨 또는 비문명인처럼 묘사된 데 대해 산족은 모멸감을 느꼈다. “부족 열등감으로 많은 부시맨 여성은 반투족 남성과 결혼해 신분 상승을 꾀하려 한다”는 말은 산족의 화를 돋우었다. 프라이버시 원칙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산족 지도자들은 <네이처>에 항의편지를 보냈고, 그동안 산족 지도자와 게놈 연구자, 윤리학자, 법률가 등이 모여 윤리규약을 마련해왔다.


산족 연구윤리 선언의 의미를 조금 넓혀 바라본다면, 특정 집단을 우리와 다른 존재, 분리된 존재로서 흥미의 대상이나 연구 자원으로만 바라보는 이른바 ‘타자화’의 위험을 지적하고 경계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머나먼 아프리카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타인에 의해 분석되고 설명될 뿐인 이들은 또 없을까?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차별을 받는, 자신을 방어할 마땅한 수단이 없는, 그래서 주류와 정상의 시선에서 손쉽게 재단되고 타자로 분리되어 이야기되는 소수자 집단이 우리 주변에도 있을 것이다. 산족이 알려준 존중, 정직, 정의, 배려의 원칙은 단지 연구자들의 윤리규약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의미 있는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오철우 삶과행복팀 선임기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8691.html#csidx1aced828f4f69ed83318153d32630b9 

Posted by 겟업
2018. 1. 6. 16:28

지난 2월 하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에 의해 진주 용산고개 일대에서 한국전쟁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유골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학살 당시의 목격자에 의하면 용산고개 3개 골짜기 5개 지점에 718구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다고 한다. 카빈소총, 5구경 권총 및 M1 소총으로 살해당한 이들은 대부분 ‘보도연맹’에 연루된 양민들이었고, 살해 총기를 근거로 추정컨대 살해자들은 당시의 경찰과 국군이었다고 한다. 도대체 무엇이 한 집단으로 하여금 다른 집단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게 했을까. 도대체 무엇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도록’ 밉게 만들었을까.
 
테리 이글턴은 “악이란 이해 너머에 있는 것, 이해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악의 치열성이고 절대성이다. 악인들은 본인들이 악하다는 생각을 절대 하지 않는다. 다시 이글턴을 인용하면 “악이란 자기 너머에 있는 어떤 것, 가령 대의(大義) 같은 것과 아무런 관련을 갖고 있지 않다.” 악은 악 그 자체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악인들은 자신들을 향한 모든 비난에 대해 (그들의 입장에서는) 정당하게(?!), 진실하게(?!) 분개하는 것이다. 그들의 억울함과 분노는 가짜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폭력에 가담한 많은 사람들이 개인 단위에서는 양심적이고 선하며 순수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선한 ‘개인’들을 악한 ‘집단’으로 몰고 갈까. 그것은 바로 사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그러나 개인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해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보여준 것처럼,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깊이 연루되었던 나치 전범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 당시 그를 진찰했던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그의 정신 상태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심지어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법원에서 그의 항소를 지켜보고 그를 자주 방문한 한 성직자는 실제로 그가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판단하였다. 이것이 바로 아렌트가 이야기한 바, “악의 평범성”이다. 아이히만은 자신은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했는데, 이 “명령”이 바로 선한 개인들을 악인으로 만드는 시스템의 (허상이라는 의미에서) 시뮬라크르(simulacre)이다.
 
나치들은 소위 “민족사회주의 혁명”이라는 이념에 포획되어 ‘민족’과 ‘혁명’의 시뮬라크르에 충실했던 사람들이다. 알랭 바디유에 의하면 정치적 시뮬라크르는 “충성의 형식을 실제로 지니기 때문에… ‘어떤 자’에게 희생과 줄기찬 참여를 요구”하며 “전쟁과 학살을 그 내용으로 한다.” 말하자면 ‘명령’ ‘민족’ ‘혁명’ 이런 기표들이 형식(허상)으로서의 시뮬라크르라면, 전쟁과 학살은 그 내용(실상)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한 사회를 집단 광기로 몰고 가는 여러 가지 시뮬라크르들이 있다. 근대 국가의 형성과 발전의 과정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것들이 바로 ‘민족’ ‘애국’ ‘혁명’과 같은 시뮬라크르들이다. 이런 기표들은 대부분 ‘국가주의’의 기의(記意)를 가지고 있고,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들을 ‘애국’의 이름으로 적대시한다. 대신 그것들은 그 안에 참여하는 개인들을 동질성의 확고한 틀로 묶어내며,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정의의 투사’라는 판타지를 갖게 만든다. 그들은 개인 단위에서 자신들이 겪은 비극들을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승화시키며, 헌신의 숭고미(崇高美)에 빠져 자신들을 역경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구조적 악을 망각한다. 자신들이 지나온 불행의 역사를 조국을 위한 헌신으로 해석할 때, 그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숭고한 전사로 둔갑되는 것이다.
 
지금은 근대가 아니라 후기 근대 혹은 탈(脫)근대의 21세기이다. ‘상식’에 근거하여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문화가 “상상적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로서의 민족보다 더 중요한 시대이다. 상식이 존중될 때, 민족에 집착하지 않아도 민족은 아무 탈 없이 무사하다. 비상식이 상식을 덮을 때마다 민족이 위태로워지고, 그 틈에서 애국애민의 판타지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시스템이 가동되는 것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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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 6. 15:58

어른이 돼 한국어를 배운 외국인들이 방송에 출연해 한국 사람 뺨치게 한국말을 잘하는 것을 보면 외국어 학습이 나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우리가 늦게 배웠기 때문에 영어를 못한다며 아직 우리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아이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육아정책연구소에서는 외국어 교육의 적절한 시작 시기를 알아보기 위해 중국어로 실험교육을 실시했다. 영어와 달리 중국어는 아직 배워 보지 않은 생소한 언어라 실험에 적합했다. 세 그룹으로 나눠 5세 유아, 초등 3년생, 대학생 각각 20명에게 일주일에 5회씩 총 20회의 교육을 실시했다. 유아들은 깔깔거리는 소리가 실험실 밖까지 들릴 정도로 재미있게 중국어를 배웠다. 그동안 외국의 많은 연구는 유아들의 외국어 교육효과가 아동이나 어른들에 비해 매우 낮다고 했는데, 이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연구 결과를 뒤집어 놓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4주 뒤 테스트 결과에서는 우리나라 유아들도 다른 나라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교육효과가 매우 낮았다. 말하기·듣기·읽기로 나눠 평가를 해 보니 세 영역 모두 유아의 점수가 가장 낮았다. 듣기와 읽기는 유아, 초등, 대학생 순이었고 말하기는 대학생의 점수가 초등생보다 약간 낮았지만 역시 유아의 점수가 가장 낮았다.

그뿐 아니었다. 실험교육 후 중국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검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실험 대상자들에게 자연스러운 중국어 문장과 부자연스러운 문장들을 보여 준 후 뇌파검사(Cz 부위)와 안구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그 결과 대학생들은 중국어 문장을 볼 때 뇌파와 안구의 움직임이 중국 원어민들과 유사한 패턴을 보여 중국 사람들처럼 문장의 의미를 이해함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유아들은 그 패턴이 매우 달랐다. 이는 중국어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실험이 보여 주듯 유아기는 외국어 교육의 적령기가 아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유아 자녀를 위해 한 달에 수십만원 내지 수백만원을 내며 하루에 5~6시간씩 영어만 사용해야 하는 학원에 보내는 부모들도 있다. 모국어처럼 유창하게 영어를 잘해 국제경쟁력을 갖추도록 하겠다는 것이 부모들의 바람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오히려 사고가 움츠러들고 외국인 강사로부터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배우며 열등감마저 느끼게 된다.


언어학자 촘스키는 인간은 언어습득장치(LAD)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특별한 장애가 없는 한 누구든지 모국어를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간혹 우리나라에서는 이 장치의 기능이 나이가 들수록 저하된다며 조기 외국어 교육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언어습득장치는 가상의 장치이며 나이가 든다고 쇠퇴하는 게 아니다. 모국어는 결정적 시기에 적절한 언어 자극이 없으면 습득이 어렵지만 일단 모국어를 습득한 사람은 언제든지 외국어 학습이 가능하다. 다만 배우려는 동기의 절실함이나 각자의 언어 능력에 따라 외국어 학습효과는 달라질 수 있다.

유아들은 아직 외국어를 배우겠다는 간절한 동기가 없다. 게다가 인지 발달, 뇌 발달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으므로 유아들의 외국어 학습효과는 매우 미미하다. 반면 유아기는 뇌의 발달이 가장 왕성해 포도당의 소모가 성인의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 이 시기에 힘든 외국어를 배우느라 뇌 발달에 사용해야 할 에너지를 탕진해 버린다면 뇌 자체의 발달이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또한 뇌에 과부하가 걸려 다른 발달의 장애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므로 뇌 발달을 저해하는 외국어를 유아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어른들의 무지로 인한 아동학대다.



현재의 유아들이 살아갈 미래는 빅데이터를 활용하고 인공지능(AI)이 대세가 될 4차 산업혁명 시대다. 그 시대에는 통역기가 발달해 외국어를 전혀 몰라도 앱을 깐다거나 귀에 간단한 장치 하나만 끼우면 소통이 가능해진다. 어려서부터 힘들게 배운 외국어가 쓸모없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 반대로 빅데이터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려면 튼실하게 잘 발달된 뇌가 필요하며, AI로부터 살아남으려면 AI에게 없는 감성과 창의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유아기는 모국어 습득으로 사고력과 창의력이 가장 활발하게 발달하는 시기다. 신나게 뛰놀면서 오감을 통해 방대한 세상의 자극을 받아들여 상상력과 창의력이 쑥쑥 자랄 수 있도록 아이들을 제발 좀 내버려 두자. 쓸모가 없어질 외국어 교육을 위해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는 부모들이 사랑이란 이름으로 더 이상 자녀를 학대하지 말자. 정부도 교사 자격은커녕 근원도 모르는 원어민을 데려다가 학부모들을 현혹해선 안 되고 자칫 아이들의 발달을 저해할지 모를 영어학원도 방관해선 안 될 것이다. 아이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자랄 때 진정 우리나라도 행복하고 건강한 나라로 발전할 것이다.


우남희 육아정책연구소장



http://news.joins.com/article/21333536

Posted by 겟업
2018. 1. 6. 15:53

사람들은 타인의 존엄을 짓밟아선 안 된다는 걸 몰라서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그래 왔으니까” “그래도 되니까” 기꺼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제법 그럴듯하게 갖춰져 있음에도 전혀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인 누구나 알고 있다. 재벌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감옥에 가지 않고, 만약 1등 재벌일 경우 구속조차 되지 않는다.


권일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시발비용’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욕설 ‘○발’을 순화시켜 ‘비용’과 합친 말로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아도 될 비용’이란 뜻이다. 홧김에 마신 술, 열 받아서 먹은 치킨, 힘들어서 잡은 택시…. 이런 소비가 전부 시발비용이다. 이 말이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 건 오늘 우리의 노동이 그만큼 비참하다는 증거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월급을 ‘한 달 동안 모멸을 견딘 대가’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높은 자영업자 비율의 배경에는 이런 요인도 있지 않을까. 자영업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알면서도, 어떤 이들은 지옥 같은 직장생활에 시달리다 완전히 소진되는 것보다 자영업이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물론 창업했다고 지옥을 벗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비합리적인 상사보다 한술 더 뜨는 ‘진상고객’, 업계 ‘갑’들의 복마전이다.


존엄(dignity)의 훼손은 일상이 되었다.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존엄을 짓밟히며 살아간다.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부모들, “10분만 더 공부하면 아내 얼굴이 바뀐다(남편 직업이 바뀐다)” 같은 말을 급훈으로 거는 교사들이 과거에 너무나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많다. 그러니까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학습되고 누적되어온 습속이다. 달라진 부분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늘어났다는 점이다. 인간은 경제적 손실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존엄의 훼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다.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을 쓴 역사학자 톰슨은 피착취자의 단결과 저항이 경제적 이해관계의 기계적 반영이 아니라 도덕적 정당성, 사회적 인정 같은 요소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을 잘 보여준 바 있었다.


‘경영 멘토’ ‘인문 멘토’로 불리는 사람들은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말을 써가며 사회의 무자비함을 강조하길 좋아한다. 이들 중 몇몇은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자본주의를 어찌나 준열하게 비판하는지, 거의 반자본주의 혁명가처럼 보일 지경이다. 저들은 인간 존엄을 훼손하는 체제나 사회를 마치 자연재난처럼 묘사한다. 자연재난은 어쩔 수 없는 것이기에 결국 각자의 적응과 생존 문제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논의는 나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수렴한다. 답은 대동소이하다. 잔혹한 세계를 헤쳐나갈 만큼 ‘강한 자아’가 되는 것, 살벌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식으론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는다. 대다수가 존엄하지 못한 사회에서 극소수만 존엄해지는 것, 그건 존엄이 아니라 ‘특권’이다. 나의 존엄을 인정받으려면 타인의 존엄도 인정해야 한다. 동시에 우리는 현실에서 이 원칙이 권력의 작동에 의해 심각하게 침식되고 있음을 안다. 한국 사회에서 유독 존엄의 훼손이 극심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앞서 말한 오랜 습속과 관성이고, 또 하나는 사회적 제재 수단의 결여다. 사람들은 타인의 존엄을 짓밟아선 안 된다는 걸 몰라서 그런 짓을 하는 게 아니다. “그래 왔으니까” “그래도 되니까” 기꺼이 그런 짓을 하는 것이다. 법과 제도가 제법 그럴듯하게 갖춰져 있음에도 그것이 전혀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인 누구나 알고 있다. 재벌은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감옥에 가지 않고, 가더라도 금방 특별사면되며, 만약 1등 재벌일 경우 구속조차 되지 않는다.


명시된 법도 지킬 생각 없는 이들에게 “타인의 존엄을 지켜주세요”라고 부탁하면 그들이 ‘아 그랬구나, 우리가 잘못했구나’ 눈물 쏟으며 회개할까? 그럴 거였으면 애당초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테다. 사태가 별반 개선되지 않는 이유는 개별 해법 말고는 대처 수단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은 혈연·지연·학연 공동체, 종교 공동체는 넘쳐나지만, 오랜 반공주의 등의 영향으로 정당과 노동조합 같은 결사체가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사회다. 이런 결사체는 정부와 자본권력을 견제하고 감시할 뿐 아니라 시민 각자의 이해관계를 공적 관심사로 번역하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우리의 일터와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건, 5년짜리 대통령이 아니라 체제와 개인을 일상적으로 매개하는 이런 조직들이다. 혼자 존엄할 수는 없다. 오직 같이 존엄해질 수 있을 뿐이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80933.html#csidx3bc572a8672940d800e3416452900bb 

Posted by 겟업
2018. 1. 6. 15:48

지난해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던 한 교수님은 “지금은 절대적 빈곤만 줄어들었을 뿐, 불평등 수준은 ‘레미제라블’시대(19세기)와 비슷해졌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저런 그래프를 살펴보니 맞는 말이었다.


얼마 전 이틀간 굶은 실직자가 막걸리를 훔치다 경찰에 잡혔다. 월세가 밀려 방을 빼야 했던 날, 목을 맨 세입자도 있었다. 상위 10%에 몰린 소득 집중도(48.5%),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 비율(53.5%), 월급 7,810만원이 넘는 초고소득 직장인 급증(3,403명) 등 모든 불평등 통계가 사상 최대를 갈아치우고 있다.


하지만 이런 뉴스들은 익숙해서 신문 지면에서도 눈에 띄는 공간에서 밀려날 때가 많다.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2위를 오간 지 오래된 현실에서, 불평등에 대한 자포자기는 공기처럼 퍼졌다. 너무 편재해서 문제라는 감각도 무뎌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장 저항해야 할 인식의 모순인지 모른다.


임금 문제는 노동의 수요- 공급 법칙을 들이미는 경제학의 우격다짐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어떤 학자와 이야기하다가 “정책 만든다는 교수들도 저소득층이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는 게, 참 단점이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속한 언론계도 마찬가지이다. 계층간 사다리는 붕괴됐고 정계, 학계, 언론계 사람들 대부분 평균 이상의 배경과 소득을 가진 계층에 속하니, 다시 도래한 ‘가난의 시대’의 실체와 팽배한 아픔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죄책감도 든다. 19세기 지주와 소작농의 시대처럼, 동시간을 살지만 경험조차 단절됐다.


미국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저임금 직업들을 직접 경험해보고 쓴 ‘노동의 배신’에서 “노동 인구의 30%가 시간당 8달러 이하(1998년 당시)를 받는 게 사실이라면 그들은 내가 모르는 생존 비법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예상했다. 겪어본 결과는 반대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만 아는 절약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드는 비용이 수두룩하다…보증금이 없으니 엄청난 방세를 내고, 정기 건강검진을 받을 수 없어 결국 대가를 치른다”고 했다.


하나의 답은 스웨덴에서 찾을 수 있다. 전국단위 노조가 과거 장기간 연대임금 정책을 내걸고 경영자단체와의 협상에서 상위 근로자의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하위층의 임금을 끌어올린 그 유명한 사례에 대해 누군가는 “눈물 나는 이야기”라고 했다. 일정 수준의 임금을 주지 못하는 기업은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그들의 기조는, 한국의 수준 따위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해도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서 존재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임금을 줄이거나 동결하고, 비정규직ㆍ하청근로자 임금을 올리라고 협상을 할 수 있을까? 지난해 300명 이상 대기업 중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확보한 재원을 신규채용, 비정규직 처우개선 등에 활용한 기업은 18.8%에 불과했다.


국내에서 드물게 산별 임단협 협상을 하는 금융노조는 고연봉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은행원의 평균 연봉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203%(미국 101%), 절대 액수도 미국 은행원의 평균 연봉보다 많다. 이들의 고연봉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러니 당신은, 특히 남들이 부러워하는 연봉을 자랑하는 당신은 분명 알아야 한다. 대기업 총수의 변론을 맡아 수십억원을 받는 변호사는 그 돈이 하청업체의 노동자에게 돌아갈 몫이었다는 것, 의사의 고액 임금에는 박봉의 간호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포함돼 있다는 것, 은행원의 억대 연봉에는 사내 비정규직의 눈물과 후배들을 덜 뽑는 대가가 들어 있다는 것. 아 이쯤에서, ‘나는 남들 놀 때 공부 열심히 했고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은 제발 말아달라.


근본적인 원인은 강력한 비정규직 제도 및 노조 배제정책을 써온 정부, 또 부도덕한 경영자들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할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맞는 말이다. 나는 애초 이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조와 노동자끼리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눈에 띄는 지도자 한 명 나오지 않고, 찢기고 축소된 한국의 노동계가 하루 빨리 힘을 얻고 연대의식을 갖춰 제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또 조만간 ‘최순실 정권’이 끝나고 최소한의 신뢰라도 갖춘 차기 정부가 들어선다면,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를 바란다.


이진희 정책사회부 기자 river@hankookilbo.com



http://www.hankookilbo.com/v/6ec3040f442645e6b9373074ffde62a8

Posted by 겟업
2015. 6. 10. 12:29



말하다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5-03-1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모든 것이 ‘털리는’ 저성장 시대, 감성 근육으로 다져진 영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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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관적 현실주의와 감성근육


"이제는 열심히 해도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낙관이 아니라 비관입니다. 

현실을 직시하되 그 안에서 최대한의 의미, 최대한의 즐거움을 추구하자는 것입니다. 

비관적 현실주의를 견지하려면 남과 다르게 사고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국에서는 뭐뭐 해야 돼 라는 화법을 많이 써요.

쉽게 남에 대해서 손가락질을 하면서 쟤네는 뭘 해야 돼 라고 말한다는거죠.

명절에 모이면 가족들이 친척들이 야. 쟤는 수술 좀 시켜야헤, 성형 좀 해야해, 살 좀 빼야 해, 결혼시켜야 해라고 말하는게 자연스럽게 배어 있어요. 타인과의 경계를 침범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Posted by 겟업
2015. 6. 9. 23:31



문화다양성과 문화간 대화

저자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지음
출판사
집문당 | 2010-12-31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유네스코는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적 가치를 고양함으로써 전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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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다양성으로 이 두꺼운 한 권을 써낸 유네스코도 대단하지만 역이 더 리스펙트

Posted by 겟업
2015. 6. 9. 23:23


살아남은 것들의 비밀

저자
이랑주 지음
출판사
샘터(샘터사) | 2014-04-24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길의 여왕’ 이랑주가 발로 뛰며 쓴 세계 시장 생존 보고서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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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재래시장들을 둘러보고 느낀 기행기


풍물시장 분석 과제 때문에 읽었


이렇게 여행해봐도 재밌겠다.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