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전 9시가 가까워져 오면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 1번 출구 근처에는 수백명의 청춘이 줄을 선다. 배화여대와 연세대의 1교시 수업에 늦지 않으려는 학생들이 학교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각각 정연했던 두 줄이 요즘 위태롭다. 서촌(西村) 등을 찾는 중국인 관광버스가 하나둘 밀려 내려와 정류장을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발 늦은 학교 셔틀버스가 클랙슨을 누르지만 결국 중앙선 쪽으로 차선을 옮겨 멈추고, 한국 대학생들은 위태롭게 차선을 가로지른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 마트가 서울역사에 있다. 주말에 중국 관광객으로 인한 쇼핑 체증을 경험한 뒤 평일, 그것도 자정 가까운 심야에 들렀다. 그런데도 중국 마트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계산대에서는 중국인 쇼핑객이 쪽지를 내밀며 중국말로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나중에 캐셔에게 물어보니 유효 기간 지난 할인 쿠폰이었다. 포장대는 한술 더 떴다. 한참을 기다려 종이 박스를 집으려는 순간에 중국인이 뒤에서 밀치고 들어왔다. 항의는 통하지 않았다.
관광공사 추산으로 올해 한국을 찾을 요우커(중국인 관광객)는 589만명이다. 작년보다 157만명 늘었다. 중국 국경절 연휴인 지난 일주일(1~7일) 동안만 16만명이 찾았다.
나라 살림과 내수(內需) 진작에 보탬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몇몇 사소한 불편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최근 주변에서 경험하고 목격한 풍경은 이 문제를 좀 더 입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이는 단지 시끄럽고 뱃살을 드러낸 채 공공장소를 활보하며 새치기에 익숙한 중국 관광객을 인내해야 한다는 평면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산업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도전인 것이다.
서울 홍대 주변의 한 원룸텔은 최근 부티크 호텔로 변신했다. 몰려드는 중국 관광객 덕분에 그쪽이 훨씬 더 이문이 많이 남기 때문이다. 건물주는 행복하겠지만 그 원룸텔에서 미래를 꿈꾸던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들은 당연히 방을 비워줘야 했다. 이화여대 주변의 한 의류상가 점장(店長)은 중국 관광객이 반갑지만은 않다고 했다. 월세를 대폭 올리겠다는 건물주의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빈부 격차와 삶의 질 변수에 이제는 중국 관광객까지 가세한 것이다.
'아파트 게임'의 저자인 박해천 동양대 교수는 좀 더 과감한 가설을 내놓은 적이 있다. 서울의 주요 상권(商圈)들이 호주머니가 얇아진 기존 소비자를 밀어내고 중국 관광객들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한 번 더 확장하면 서울의 문화적 지형과 특성을 변화시키는 주체 역시 중국 관광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 관광객들의 입맛에 맞춘 맛집과 카페, 쇼핑몰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풍성해진다면 다행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목격하는 모습은 획일화와 평준화에 가깝다. 요우커를 위한 관광 인프라 확대 못지않게 그 이면도 적극적으로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어수웅 문화부 차장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0/07/201410070465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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