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 21. 12:19



유쾌한 크리에이티브

저자
톰 켈리, 데이비드 켈리 지음
출판사
청림출판 | 2014-01-17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세계적 디자인 기업 IDEO의 창업자 데이비드 켈리, 톰 켈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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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유치원 시절엔 창조적이었다.


저자는 세계적인 디자인 기업 IDEO와스탠퍼드 D스쿨 창립자 형제.



인간 중심적 디자인

GE 헬스케어 팀 Doug Dietz 는 병원에 온 어린이들이 MRI 기계를 무서워해 검사를 받는동안 아예 마취를 시켜놓는다는걸 알게 되었다. D 스쿨 수업을 듣고, 일일 보육 센터에 찾아가 어린이들을 관찰하고, 환자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 전문과들과 이야기도 나눈 후 해적선을 본따 '모험 시리즈'라는 MRI 검사실을 만든다. MRI 기사는 아이들에게 곧 해적선 내부로 모험을 떠날 거라 말해주고 배에 올라타 있는 동안 움직이지 말고 조용히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 항해가 끝나면 아이들은 검사실 한쪽 벽에 있는 해적의 가슴에서 작은 보물을 하나 꺼내 가질 수 있다. 






익스트림 강좌 중에 개도국에서 사용 가능한 저비용 인큐베이터에 대해 디자인하는 수업에서 


1. 구글 검색으로 매년 약 1500만 명의 조산아와 저체중아가 태어나고 그 중 약 100만 명이 주로 24시간 이내 저체온증으로 사망한다는 사실 알아냄.


2. 네팔로 여행을 가 병원에 방문했는데 인큐베이터 대부분이 비어있어 이유를 알고 보니 인큐베이터가 필요한 아이들은 병원에서 30마일 떨어진 촌락에서 주로 태어나기 때문. 병원에 와도 인큐베이터에 몇주 못있고 몇일만에 퇴원해 버린다는 문제점 발견.


3.  시골 마을로 가서 히터가 달린 침낭형 인큐베이터 테스터 모델 보급. 하지만 온도계에 37도에 불이 오면 도움이 된다고 말하자 엄마들이 서양 의학은 너무 강하다며 30도 쯤으로 해놓겠다고 함. 


4. 앤지니어는 충격을 받고 계기판을 아예 없애고 적당한 온도가 되면 OK 사인만 뜨게 설계. 


이걸 전기공학, 컴공, MBA 출신 3명이서 팀을 이뤄 20주만에 해냈음.


Embrace infant warmer 



Posted by 겟업
2015. 1. 20. 11:12

각설하고 요즘 고민은 왜 세상에 정답은 아직도 없나 였다.


예를 들어 역사상 누적인류 105억명이라고 한다(이 중에 70%인 73억이 현재까지 생존해있다는게 함정). 그렇다면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사건을 겪었을 것인데 여전히 왜 모든 일에 메뉴얼이나 정답이 존재하지 않냐는 것이다.  쉽게 결혼과 성공 이야기로 예를 들어보자.


세상에 수십억 개의 결혼 스토리가 있었으면 지금쯤 "완벽한 배우자 고르는 법 or 결혼 잘하는 법"이라는게 존재할 법도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잘 못된 선택을 하고, 후회를 하기도 한다.


세상에 수억 개의 성공 스토리가 있었으면 지금쯤 "한번뿐인 인생, 이것만 따라하면 성공한다" 라는 메뉴얼 쯤은 있어야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 사람들은 실패하고 성공한 사람은 극소수다.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는 성공적인 결혼 스토리나 부를 축적한 경험담만 모아도 정답이 짠하고 나와서 후세까지 참고할 수 있을 것 같은데도 우리는 여전히 길을 헤맨다. 왜 그럴까?




얼마전에 읽은 내가 다시 서른 살이 된다면이라는 책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성공은 운과 기량의 결합이다. 결국 내 능력도 좋아야하지만 운이 따라줘야 하기 때문에(적당한 장소, 적당한 타이밍에 나타난 그 사람이라거나 역사상 극히 드문 경제호황이나 좋은 상사 같은 류?)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성공은 반복되기가 힘들고 시중의 성공 스토리는 결국 허황된 것이라는거다. 


결국 인생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성공 스토리처럼 흘러가지 않을 확률이 더 크다는 것이다. 왜나하면 수많은 변수가 있어 똑같은 상황을 재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깐 많이다. 결국 아무리 노력해도 운 항아리에서 뭘 꺼내나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인생은 운빨이다?!   





p.s. 글을 쓰다보니 집단지성의 시대를 맞이하여 완벽한 배우자 스토리를 다 모아서 결혼 생활에 필수적인 덕목, 플러스 되는 요인들을 모아 나의 그/그녀는 최고의 배우자가 될 재목인가? 같은 체크 리스트를 작성해 피드백해주는 프로그램도 괜찮을거 같다ㅋ  왜 사람들은 스드메, 예물 같은건 플래너까지 고용해 체크하면서 이런건 체크 안하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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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5. 1. 20. 10:39



내가 다시 서른 살이 된다면

저자
마이클 모부신 지음
출판사
토네이도 | 2013-01-24 출간
카테고리
자기계발
책소개
“인생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할, 전세계 젊은 독자들에게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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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 서른 살이 된다면 나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에 열광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의심할 것이다. 특정한 성공 스토리에 매료된다는 것은 그만큼 눈이 멀게 된다는 뜻이다. 여러분에게 유리한 인과관계를 만들어내지 마라. 특정한 결과를 여러분에게 유리하게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하지 마라.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 같은 실수를 통해 인생의 실패를 반복해왔다. 성공하는 사람이 늘 소수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기량에 운이 얼마나 개업되어 있는지 명확하게 통찰하라." p.77


“내가 다시 서른 살이 된다면 나는 모르고 이기는 삶을 경계할 것이다. 알고 지는 삶을 추구할 것이다. 모르고 이기는 것보다 알고 지는 곳이 인생을 더 현명하게 만든다.” p.17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서 기량과 운이 각각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는지 계산할 수 있고, 과거 성공사례에서 기량과 운의 비중을 분리할 수 있다면 이를 바탕으로 미래에 좀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p. 12


이 책은 세상의 모든 성공은 기량과 운의 결합인데 이 둘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세상에서 성공 가능성을 극대화 시키는 방법을 수학과 과학으로 풀어낸다. 읽다보면 통계학 자료와 수학 방정식에 질릴수도. 한국에서 이런 류의 책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성공 스토리만 조명하는 예가 다순데 역시 미국은 경영학이라는 학문도 한단계 고차원적이다. 


성공 스토리에 취해 따라가지 말고(절대 똑같은 행운이 일어날리가 없다!) 냉철하게 과학적으로 내가 몸담은 분야를 분석해 특징을 파악하고 덤벼야 한다.



운은 기량이 최고조인 상태에서 가장 극대화 된다. 행운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사람에게만 유의미하다.


기량 항아리 : -3, 0, 3

운 항아리 : -4, 0, 4


기량+운 가장 잘 뽑으면 7 가능,

            가장 안좋으면 -7 가능


운 좋은데 기량 나쁘면 잘해도 -1

운도 그저그렇고 기량도 그저그러면 0

기량 좋은데 운 좋으면 1 



의외로 이 책을 읽고 요즘 최대 고민이던 "왜 세상엔 정답이 없는가"가 풀렸다;;


Posted by 겟업
2015. 1. 20. 10:04



창가의 토토(보급판)

저자
구로야나기 테츠코 지음
출판사
프로메테우스출판사 | 2004-01-2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00년에 정식 한국어판으로 선을 보인 이후 5년 여에 걸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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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 훈련으로 선택한 책


일본의 단행본 기네스북에 오른 책.


이 책 덕분에 일본에 대안교육에 불을 지폈다고 하니 소설의 힘이란.


20년이 지나서 그런가, 감수성이 바닥이라서 그런가.


내용은 그닥 기억에 남지 않는다.

Posted by 겟업
2015. 1. 7. 22:11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뒤, 조문 방북과 분향소 설치 문제가 남남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이미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조문을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내렸지만, 진보진영에서는 “정부와 민간 차원의 조문단 파견”을 요구하고 있다. 26일에는 서울의 한 대학과 덕수궁 앞 광장에 분향소가 설치됐다가 즉각 철거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조문·분향소 설치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싣는다.


죽은 자들에 대한 예우


국가는 하고 국민은 할 수 없는 표현의 영역은 있을 수 없어…
죽은 자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과 그 행위를 찬양하는 것은 달라


우리 정부와 미국이 ‘북한 주민에게’ 애도를 표했다고 하는데 한낱 말장난이다. 당연히 우리가 초상집에 가면 유족들에게 애도를 표하지 않는가. 애도는 애도인 것이다. 인권침해의 괴수였던 카다피의 사체 처리에 대해서도 국제인권단체들이 문제제기를 한 것처럼, 아무리 독재자라 할지라도 그 죽음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엄숙함과 예우를 요구한다.


문제는 김정일만 죽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일부는 김일성과 북한 정부에 대해 유대인이 히틀러나 나치독일에 대해 느끼는 공포심과 증오감을 느낀다. 전쟁 도중에 자신의 가족을 인민군의 총구 앞에 잃은 사람들이 그 ‘학살자’에 대해 갖는 증오감은 스스로에게는 어떤 종교적 신념보다도 자랑스럽고 떳떳한 것이다. 그들의 신념을 존중해주지 않는 언사는 그들에게는 자신을 모욕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의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전쟁보다 더욱 심한 고통을 당한 유대인들에게 ‘대학살은 없었어, 모두 거짓말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이들이 겪은 인간성의 상실을 확장하는 ‘행위’라고 보고, 독일은 대학살 부인죄를 제정하였다. 그 외에도 많은 국가들이 소수를 차별과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혐오죄를 두고 있다. 광주학살의 전주곡이었던 ‘12·12’ 주도자를 ‘혁명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은 법 위반에 관계없이 거기서 죽은 자들과 그 유족들에 대한 예우가 아닌 것이다. 국가보안법 7조(찬양·고무죄)의 폐지가 힘든 이유는 이 조항이 전쟁유족들에게 ‘혐오죄’와 비슷한 심정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언어에는 ‘학살자에 대한 공포와 증오감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다수들에 둘러싸인 소수’라는 일종의 ‘포위의식’이 가득하다.


결국 김정일 분향소 설치 문제는 법의 문제가 아니라 죽은 자(들)에 대한 예우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이 법(국가보안법)을 들고나와 분향소를 철거한 것은 잘못이다. 국가가 조문을 이희호·현정은씨에게 허가했다는 사실 자체가 분향소가 불법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국가만 할 수 있고 국민은 할 수 없는 여러 행위들이 법률에 정해져 있지만, 표현의 영역에서는 국가는 하고 국민은 할 수 없는 의사표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헌법 21조 검열금지 조항의 명령이다. 국가기밀 등을 제외하고, ‘원래는 할 수 없지만 국가의 허가를 받으면 할 수 있는 말’은 헌법상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우리가 쉽게 수용하는 ‘적장에 대한 예우’라는 문구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은 자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과 죽은 자의 행위를 찬양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또 국가보안법 7조는 두말할 것 없이 위헌이다. 국가보안법의 다른 조항들은 국가 존립을 위협하는 ‘물리적 행위’를 범죄시하지만 7조는 언사(찬양·고무·선전·동조) 자체를 범죄시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들의 국가보안법은 물리적 행위를 처벌하는 것이지 그러한 생각을 처벌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1789년 반란법도 “미국인들을 욕보이는… 미국 정부에 반하는 거짓되고 논란적이고 악의적인 문서의 작성”을 처벌한다고 하여, 당시 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퍼슨은 사법부의 위헌심사권을 세계 처음으로 확립한 ‘마버리 대 매디슨’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이 법을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분향소 설치를 법의 문제가 아니라 예우의 문제로 다루면 해결책이 보인다. 이번에 죽은 자와 60년 전에 죽은 자들 모두에게 예우를 갖추는 방법은 무엇일까? 김정일의 죽음을 속으로, 사적 모임으로 애도하는 사람은 많다. 그의 죽음으로 당사국들이 관망세로 돌아서면서 올스톱된 북-미 회담, 같이 올스톱된 인도적 지원 및 에너지 경협, 이 때문에 늘어나는 아사자들과 지연되는 군축·평화…. 서울대에 분향소를 설치한 학생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적 애도들을 모두 적발해서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전쟁유족들도 원치 않는 것이다. 언론이 자꾸 뉴스 거리로 만들고 경찰이 자꾸 법적 논란을 일으키니 전쟁유족들은 알고 싶지 않아도 알게 되고 모욕감을 느끼게 되는 것 아닌가.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준법’ 명제에 좌우는 없다


현행법상 북한은 반국가단체이고 지속적으로 안보 위협하는 상황…

북한과의 교류에 일정한 제한 둔 실정법에 따라 이성적 대처 필요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한 지도 어언 열흘이 지났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조문 방북의 문제로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다. 조문과 관련하여 정부는 특별한 관계를 가졌던 소수의 사람에 대해서만 방북을 허용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렇지만 일부 단체에서는 개별적 조문 방북을 허용해 달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이 조문 문제와 함께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분향소 설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며칠 전 서울대에서 분향소 설치 제안에 관한 대자보가 붙으면서 시작되었고, 분향소는 다수의 반대 속에서 설치되었다가 곧바로 철거되었다. 또한 한 민간단체에서도 서울 도심에 분향소를 설치하려고 시도하다가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사람이 숨지면 애도와 조문을 하는 것이 인간 사회의 기본적인 예인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국가와 사회를 위하여 헌신한 분이 사망하면 그를 기리기 위하여 분향소를 설치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북한 지도자의 사망으로 인한 조문이나 분향소 설치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사망으로 인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복잡하면서도 비극적인,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를 추구하면서 궁극적으로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남북문제가 얽혀 있다. 한반도의 현실은 전쟁과 군사적 대치, 긴장과 교류라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만들어져 왔다. 세계가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끝냈음에도 한반도는 여전히 갈등과 대치 속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더구나 2010년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사건은 우리에게 북한은 경계의 대상이라는 것을 각인시켜 주고 있다.


우리나라 현행법은 국제법과 달리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북한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남북한이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하고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교류하고 있다. 1990년대부터 우리나라는 남북교류협력법을 제정하고 북한과 인적·물적 교류를 통하여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물론 이에는 북한 역시 경제현실을 고려한 태도의 변화가 있었다는 점도 작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북한의 지속적인 도발은 우리 헌법에 의하여 한반도에서 유일한 국가인 대한민국의 안보와 국민의 생존에 위협을 주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반국가단체로서의 법적 지위에는 변함이 없다.


2000년대 들어오면서 남북관계가 과거와 달리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두 대통령의 방북, 개성공단의 설치로 인한 진전된 경제교류뿐만 아니라, 금강산 관광을 통하여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한정된 지역이지만 북한을 방문하였다. 이렇게 남북의 교류가 빈번해졌음에도 북한은 지속적인 도발로 우리의 안보를 시험하면서 여전히 양면적 태도를 바꾸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조문을 위한 분향소의 설치나 방북을 허용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법치국가이다. 우리의 실정법은 북한과의 교류에 있어서 일정한 제한을 두고 있다. 조문을 위하여 분향소를 설치하거나 방북하겠다고 요구하는 사람들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이들에게는 대한민국의 법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또한 국가는 이들 국민을 보호하고 자유와 생명을 지켜야 할 책무가 있다. 실정법에 따라 북한이 반국가단체라는 점에서 이 단체의 수장을 위한 분향소 설치는 허용될 수 없다.


법은 우리의 약속이며 우리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한 근간이다. 국민이 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국가와 사회의 안전과 평화는 유지될 수 없다. 남북관계가 법으로만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하여도,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대한민국의 실정법을 준수해야 한다. 법을 지켜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 앞에서 진보와 보수는 없다. 조문 방북이나 분향소 설치 문제는 우리나라 실정법에 따라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이다. 더구나 북한은 여전히 반국가단체이고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대상이다. 한반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하여 남북이 경협을 통하여 교류한다고 하여도, 이러한 한반도의 현실을 무시하고 개인이나 단체가 조문 방북을 요구하거나 분향소를 설치하겠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김상겸 동국대 법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argument/512089.html



Posted by 겟업
2015. 1. 5. 21:46

지난 15일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는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요즘 연예인은 사실상 공인인 만큼 엄격한 잣대가 적용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신을 밝혔다. ‘국민 엠시(MC)’ 강호동씨가 잠정 은퇴를 선언하는 등 연예계를 뒤흔들고 있는 연예인 탈세 의혹에 대한 발언이었다. 강호동씨가 탈세에 이어 강원도 평창에 땅 투기를 했다는 의혹까지 보도되자 연예인의 도덕성에 대한 논란이 증폭되고 있다. 한국 사회가 연예인들에게 들이대는 도덕성 잣대는 정당한지에 대해 두 가지 의견을 들어봤다.


‘공인 타령’으로 이득을 얻는 자들


어떠한 권한도 위임받지 않은 연예인은 당연히 공인이 아니다
‘아파트 신공’ 여성부 장관처럼 진짜 공인은 강호동 뒤에 숨는다


난리도 아니다. 3주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강호동에 대한 세간의 여론은 수시로 급변했다. 탈세 의혹이 보도되자 그를 방송에서 퇴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득세했고, 막상 그가 ‘잠정’ 은퇴를 선언하니 옹호론자들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고의 탈세가 아니라 세무사의 단순 실수인 것 같다는 국세청의 입장이 보도되고 여론이 잠잠해질 무렵, 평창 땅 투기 의혹이 다시 가십의 시장으로 기어 나온다. 여론이 종잇장처럼 펄럭이며 앞뒤로 뒤집히는 동안 강호동은 몇 번이고 ‘죽일 놈’과 ‘희생양’ 사이를 오갔다. 어느 의협심이 넘치는 시민은 탈세 의혹 기사만 보고 발 빠르게 강호동을 고발했단다. 가히 초현실적이다.


개인적으로 이 상황의 비루함에 더없이 짜증이 난다. 연예인이라고 해서 동정표를 주자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강호동이 실제로 불법적인 방법으로 세금을 탈루했고, 투기 목적으로 부동산을 구매했다는 증거가 나와 혐의를 확정할 수 있으면 철저하게 비판하고 합당한 처벌을 하면 된다. 그러나 단순히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아직 입증되지 않은 혐의 의혹이 대중들에게 공표되고, 민감한 개인정보인 납세 내역과 재산 증식 과정이 만천하에 까발려져 공공연한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나나 이 글을 읽을 당신이 그런 것처럼, 강호동 역시 어떤 혐의로 수사를 받든 유죄 확정 전까지는 무죄 추정을 받을 권리, 소중한 개인정보를 보호받을 권리, 그리고 여론재판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그것이 법이 보장하는 시민의 권리다.


물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시청자들의 사랑을 먹고사는 연예인들은 ‘공인’이므로 단순 혐의만으로도 도덕적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여기서 잠시 ‘공인’이란 개념에 대해, 우리가 왜 ‘공인’들에게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하는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공직자나 정치인들을 ‘공인’이라 부르는 것은, 공동체가 그들에게 법률 제정과 자원 분배, 정책 입안 등의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이다. 고도로 집중된 권한을 위임받은 이들의 언행은 공동체의 실질적 이익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고, 그 권한의 공정한 행사를 위해 필연적으로 고도의 도덕성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재산과 납세 내역 공개를 요구하며, 도덕적으로 결함이 없는지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연예인들은 어떤가? 우리는 그들에게 어떠한 권한도 위임한 적이 없다. 그들의 활동이 국가적 의제를 세우거나 정책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연예인은 대중을 상대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판매하는 ‘고소득 유명인’일 뿐, 공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범죄 사실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단순 혐의만으로 불이익을 당해서는 안 되고, 설령 범죄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법이 정한 이상의 과도한 처벌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어떤 이들은 연예인들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문화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공인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를 펼친다. 이 논리대로라면 우리 사회는 유명 연예인 한두 명의 언행에 전체의 도덕관념이 출렁일 정도로 정신적 기반이 취약해졌다는 소리다. 그쯤 되면 이미 연예인의 문제 이전에 우리 사회가 교육과 자체 정화 기능을 잃었다는 뜻이다. 연예인 핑계 댈 일이 아니다.


공인과 연예인의 경계가 흐려지면 득 볼 이들은 따로 있다. “요즘 연예인은 ‘사실상’ 공인인 만큼 엄격한 잣대가 적용돼야 하지 않겠는가.” 최광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인사청문회에서 했던 말이다. 강호동이 “어찌 뻔뻔하게 티브이에 얼굴을 내밀고 웃을 수 있겠느냐”며 잠정 은퇴를 선언하는 동안, 김금래는 실거래가 3억2000만원짜리 아파트를 9500만원에 사는 신공을 펼치고도 여성가족부 장관에 임명됐다. 진짜 검증 받아야 할 공인들은 강호동의 넓은 등을 방패 삼아 몸을 숨겼다. 그리고 이젠 3년 전에 추징금 내고 끝났다는 인순이의 탈세 의혹이 기어 나온다. 3년 묵은 이 떡밥은 또 무엇을 감추기 위해 던져진 것인가? 우리는 언제까지 입증도 안 된 동료 시민들의 혐의 의혹을 미리 비난하느라 진짜 공인들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할 텐가?


이승한 티브이 비평가


대중의 인기 얻는 순간 공인이다


왜 그리 가혹하고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는지 서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고마워해야 한다 인기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강호동이 은퇴를 선언했다. 비록 잠정 은퇴라는 표현으로 추후의 복귀 가능성을 열어두었지만, 세금 탈루에 대한 국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선택이었다. 일부 누리꾼들은 고의로 탈세한 것이 아니고 검찰 기소가 이루어진 것도 아닌데 은퇴는 너무하지 않으냐는 동정의 의견을 내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유명 연예인은 공인이기 때문에 더욱 엄격한 잣대의 도덕성과 처신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연예인은 과연 공인인가 아닌가? 필자의 생각에 연예인은 공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정도 인기가 있고 잘 알려진 유명 연예인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연예인이 관련된 도박 또는 마약 사건, 교통사고, 병역 문제 등은 일반인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끔 큰 비중으로 언론에 보도된다.


연예인이 공인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기 때문이다. 단순히 관심을 많이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대중의 사랑을 받을뿐더러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비록 공무원처럼 국가에 관련된 공적인 일을 하지는 않지만, ‘공적’(公的)이라는 의미 자체가 사회 전체의 구성원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의미하므로 연예인은 공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


따라서 유명 연예인은 평소 자신의 언행에 대해서 늘 조심하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물론 갑작스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즉흥적으로 또는 순발력 있게 대응하기 힘든 부분도 있다. 결국 평소의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마음, 자신을 늘 돌아보는 마음, 자아존중감과 겸손의 미덕을 동시에 갖추려는 마음, 상식과 사회적 규칙을 존중하고 따르는 마음, 신중하게 생각하여 충동적인 행동을 자제하는 마음 등이 연예인들에게 요구된다.


평상시에 늘 명심하면서 몸에 배게끔 하라. 만일 그럼에도 잘못된 행동이나 범법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면,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며, 사람들의 용서를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연예인도 우리 대중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그(또는 그녀)가 진심으로 후회와 반성을 한 다음에 용서를 구하면, 대중은 너그러워질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부인하고, 책임의 경감을 얻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애초에 진심 어린 반성이나 사과가 없다면, 대중은 그(또는 그녀)를 매몰차게 벼랑 끝으로 내몰 것이다.


연예인에게 왜 그리 가혹하고 엄중한 잣대와 요구를 들이대는지 서운한 감정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오히려 고마워하라. 대한민국의 연예인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다. 부와 명예, 그리고 인기는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재능과 노력 못지않게 더 중요한 원천이 있음에랴. 그것은 바로 대중의 존재, 그리고 그들의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다.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대중과의 애착관계는 사랑과 관심에서 미움과 무관심으로 바뀔 수 있다. 자녀와 부모의 애착관계는 좀처럼 끊어지지 않지만, 연예인과 대중의 애착관계는 순식간에 끊어지곤 한다. 국민들은 유명 연예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하게 관찰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스타여서 부담스러워하기 이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부분이다.


국민들은 결국 선택할 것이다. 공인으로서의 처신을 잘하고 책임을 다하는 연예인은 계속 사랑해 주고 언젠가는 용서하여 기회를 다시 주지만, 그렇지 못한 연예인에게는 가혹한 판단과 행동을 보일 것이다. 국민들의 마음은 변화할 수 있다. 연예인들이여, 자신이 대중의 인기를 얻는 순간 공인으로 공인(公認)되는 것임을 꼭 기억하라.


연예인도 사람인지라 인기를 얻은 다음에 과대망상적인 사고가 슬슬 자라나기 시작할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하니 일반인처럼 평범하게 지낼 수 있으랴. 고급 음식과 술, 그리고 아름다운 이성들을 찾을 수 있다. 묘한 특권의식도 생겨날 수 있다. 돈을 더 벌고자 하는 욕심이 일어날 수도 있다. ‘누가 알겠어, 그리고 내 사생활인데 뭐 어때?’라는 생각이 들면 망할 징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럴 때는 초심을 다잡고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라. 그래야 파국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손석한 정신과 전문의

Posted by 겟업
2014. 12. 26. 17:15

결혼식을 한 부부가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경향이 늘어난다고 한다. 남성보다 여성이 더 원해서란다. ‘혹시 금방 헤어질 것에 대비해서 그런가?’ 그런데 아니다. 취업을 원하지만 결혼 전까지 취업을 못한 여성들의 결정이란다. 취업 지원 때 서류상 기혼이면 불리해서 일단 미혼으로 지원한다고 한다. 하필 왜 여성들이 무슨 불리 때문에 그러는가? 기혼여성을 채용하면 금방 임신ㆍ출산 때문에 업무에 지장이 있으리라는 회사의 우려(?)로 인해 탈락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취업할 때까지 혼인신고를 미루는 현상이 생긴 것이다. 해외토픽감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이 땅의 여성들이 출산계획을 세우려고 할까? 많은 전문가들이 저출산 현상의 주원인으로서 교육ㆍ돌봄비용 부담을 언급한다. 물론 아주 틀린 진단은 아니다. 그래서 어린이집 수는 급격히 확대되고, 임신ㆍ출산 전후 비용 지원 목록도 다양해졌다. 게다가 무상보육제도까지 도입됐다. 그러나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는 대책은 효과를 볼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그렇다면 저출산의 근본적 원인은? 가족도 부부도 아닌, ‘여성’의 돌봄부담이다. 더 나아가 돌봄부담을 기꺼이 하려는 여성을 시장이 채용 기피와 경력단절 강요로써 벌주는 현상이다.


‘남성=취업노동 담당자, 여성=무보수 가사ㆍ돌봄노동 담당자’ 구도를 ‘성별노동분리’라고 표현한다. 성별노동분리를 우리사회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다 보니 남성은 취업노동에만 전념해도 되고 여성은 취업노동에 가사ㆍ돌봄노동을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는 현실이다. 그래도 이중부담을 어떻게 해서든지 견뎌보려고 하는 여성에게 기업은 채용기피와 취업노동 중단 강요를 한다. 이중부담을 견뎌야 하고 원하는 취업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차라리 아이를 낳지 않는 방향으로 개별 여성이 무의식적으로 집단 반응을 하는 결과가 저출산의 지속이다. (가임기) 여성 전체는 조직화한 집단이 아니다. 그러나 성차별적 임신ㆍ출산 과정에서 갖게 되는 개인적 경험에 충실한 여성의 반응이 ‘출산파업’이라는 집단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어린이집을 아무리 만들어도, 퇴근시간 되자마자 엄마가 뛰어야 하는 현실에서 이른바 직장맘은 한 명은 낳아도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는다. 받지 않던 비용지원을 받으면 도움은 된다. 그러나 바우처 카드에 넣어주는 돈 몇 십만원에 아이 더 낳겠다고 결심하는 여성이 얼마나 될까? 교육비 부담 높다고 국가가 어느 수준까지 비용 분담을 해줄 수 있을까? 아예 없던 국가와 사회의 지원이 생겨서 좋다는 반응이 당장은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 반응은 오래가지 않는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야근하고 회식 가서 남성 동료와 함께 제때 승진하고자 한다고 생각해보자. 임신ㆍ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의 대가로 국가 지원을 받는 것보다, 중단 없는 취업노동으로 양육비를 스스로 벌고 넉넉한 노후도 스스로 만들고 싶다는 여성의 소망을 인정하자.


성별노동분리 구도 철폐를 전제로 하지 않는 국가의 돌봄비용 지원은 영리민간 어린이집 시장 규모만 키우고 있음을 이미 보고 있다. 사교육비 부담이 저출산의 원인이라면 앞으로 국가에서 사설학원 비용도 대줄 것인가? 재정정책상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고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사교육 시장 규모만 키울 뿐 저출산은 지속될 것이다.


물론, 성별노동분리 극복을 국가정책으로만 할 수는 없다. 기업의 인식이 바뀌어야 하고 인력에 대한 시장 수요 변화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성별노동분리 극복’을 명백한 정책 목표로 내세우지 않는 이상 저출산 극복의 길은 시작할 수 없다. 이른바 돌봄의 사회화를 위해 수많은 재정을 투입했지만 가족 내 성별노동분리 극복을 목표로 하지 않았던 독일은 현재 대표적 저출산 국가 중 하나이다. 그런 독일이 지난 2007년 이후 스칸디나비아 국가식 성별노동분리를 극복하는 돌봄의 사회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책 효과는 당장 나타나지 않는다. 앞으로 10여 년 이상은 기다려야 한다고 독일의 관련 전문가들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나?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http://www.hankookilbo.com/v/abb76e0c502a4d1fa48c346ea2407cb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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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6. 17:13
외부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권력 구조. 누가 실질적 정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가족도, 친척도 안전하지 않은 반복된 숙청. 어제 최고의 권력자가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고 감옥살이를 할 수 있는. 아들이 아버지를, 삼촌이 조카를,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는 사회. 2013년 북한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터키 민족 오스만 제국에 1453년 점령당하기 전까지 1000년 넘게 지중해 동쪽 국가들을 통치하던 비잔틴제국 이야기다.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콘스탄티누스 1세(272~337) 황제는 로마제국의 수도를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있는 비잔티움으로 옮기며 동로마제국(훗날 비잔틴제국)의 시대를 연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은 콘스탄티누스는 아들과 아내를 사형시킨다. 전 아내 사이에 난 장남 크리스푸스가 새어머니인 파우스타와 연인 관계였다는 이유였다. 그런가 하면 황제 레오 4세의 아내 이레네 사란타페카이나(Irene Sarantapechaina·752~803)는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의 눈을 찔러 장님으로 만들고 자신이 비잔틴제국 첫 여자 황제가 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8세의 딸 조에 포피로게니타(978~1050)는 남편을 살해하고 자신보다 수십 년 어린 2명의 새로운 남편들을 앞세워 실질적 권력을 유지하기도 한다.


권력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할 엄마가 아들을 장님으로 만들고 아버지가 아들을 사형시키는가? 법으로 통제되고 사회가 책임을 물을 수 있는 합법적 권력은 물론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도력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 없이는 아무것도 실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임도 통제도 존재하지 않는 비잔틴제국 같은 무한 권력은 인간을 야생동물로 만드는 듯하다. 왜 그런 걸까? 아마도 억제되지 않는 권력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중독성이 높기 때문일 거다. 인간이 즐길 수 있는 대부분 것은 반복하면 할수록 만족감이 떨어진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먹으면 먹을수록 예전만큼의 맛을 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권력만큼은 다르다. 권력이란 결국 타인의 행동을 나 자신에게 이득 되도록 제어하는 힘을 말한다. 더 많은 사람을 제어하면 할수록 나에게 돌아오는 이득도 많아진다. 항상 같은 사람을 통한 동일한 이득이 아니기에 '수확 체감(law of diminishing return)' 같은 문제도 없다. 타인의 제어 덕분에 나는 보상과 이득을 얻을 수 있기에, 뇌는 '보강 학습' 메커니즘을 통해 중독성을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한번 무한 권력을 맛보면 더 이상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말이다.


술·담배·마약·비디오게임의 중독성을 걱정하는 우리. 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것은 우리 북쪽에 수십 년 동안 무한 권력의 맛을 경험해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김대식 KAIST 뇌과학 교수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23/201312230450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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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6. 17:12

평일 오전 9시가 가까워져 오면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 역 1번 출구 근처에는 수백명의 청춘이 줄을 선다. 배화여대와 연세대의 1교시 수업에 늦지 않으려는 학생들이 학교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다. 각각 정연했던 두 줄이 요즘 위태롭다. 서촌(西村) 등을 찾는 중국인 관광버스가 하나둘 밀려 내려와 정류장을 침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발 늦은 학교 셔틀버스가 클랙슨을 누르지만 결국 중앙선 쪽으로 차선을 옮겨 멈추고, 한국 대학생들은 위태롭게 차선을 가로지른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 마트가 서울역사에 있다. 주말에 중국 관광객으로 인한 쇼핑 체증을 경험한 뒤 평일, 그것도 자정 가까운 심야에 들렀다. 그런데도 중국 마트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계산대에서는 중국인 쇼핑객이 쪽지를 내밀며 중국말로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나중에 캐셔에게 물어보니 유효 기간 지난 할인 쿠폰이었다. 포장대는 한술 더 떴다. 한참을 기다려 종이 박스를 집으려는 순간에 중국인이 뒤에서 밀치고 들어왔다. 항의는 통하지 않았다.

관광공사 추산으로 올해 한국을 찾을 요우커(중국인 관광객)는 589만명이다. 작년보다 157만명 늘었다. 중국 국경절 연휴인 지난 일주일(1~7일) 동안만 16만명이 찾았다.

나라 살림과 내수(內需) 진작에 보탬이 된다는 이유 때문에 몇몇 사소한 불편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최근 주변에서 경험하고 목격한 풍경은 이 문제를 좀 더 입체적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이는 단지 시끄럽고 뱃살을 드러낸 채 공공장소를 활보하며 새치기에 익숙한 중국 관광객을 인내해야 한다는 평면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산업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도전인 것이다.

서울 홍대 주변의 한 원룸텔은 최근 부티크 호텔로 변신했다. 몰려드는 중국 관광객 덕분에 그쪽이 훨씬 더 이문이 많이 남기 때문이다. 건물주는 행복하겠지만 그 원룸텔에서 미래를 꿈꾸던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들은 당연히 방을 비워줘야 했다. 이화여대 주변의 한 의류상가 점장(店長)은 중국 관광객이 반갑지만은 않다고 했다. 월세를 대폭 올리겠다는 건물주의 통보를 받았다는 것이다. 빈부 격차와 삶의 질 변수에 이제는 중국 관광객까지 가세한 것이다.

'아파트 게임'의 저자인 박해천 동양대 교수는 좀 더 과감한 가설을 내놓은 적이 있다. 서울의 주요 상권(商圈)들이 호주머니가 얇아진 기존 소비자를 밀어내고 중국 관광객들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한 번 더 확장하면 서울의 문화적 지형과 특성을 변화시키는 주체 역시 중국 관광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 관광객들의 입맛에 맞춘 맛집과 카페, 쇼핑몰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풍성해진다면 다행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목격하는 모습은 획일화와 평준화에 가깝다. 요우커를 위한 관광 인프라 확대 못지않게 그 이면도 적극적으로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어수웅 문화부 차장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10/07/2014100704659.html



Posted by 겟업
2014. 12. 26. 16:58
두 아이의 엄마 샬롯 키틀리(영국)씨가 지난 16일 세상을 떠났다(depart this life). 36세.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be diagnosed with stage four bowel cancer). 간과 폐로 전이됐다(spread to her liver and lungs). 대장과 간의 종양을 제거하기(remove tumors from her bowel and liver) 위해 두 번 수술을 받았다. 25차례의 방사선 치료, 39번의 끔찍한 화학요법 치료(25 rounds of radiotherapy and 39 bouts of gruelling chemotherapy)도 견뎌냈지만,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블로그 내용.

"살고 싶은 나날이 저리 많은데, 저한테는 허락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become grumpy with my husband) 늙어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안 주네요.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매일 아침 아이들에게 일어나라고, 서두르라고, 이 닦으라고 소리 소리 지르는(shout at my children to wake up, hurry up and clean their teeth) 나날이 행복이었더군요.

살고 싶어서, 해보라는 온갖 치료 다 받아봤어요. 기본적 의학 요법은 물론(not to mention the standard medical therapies), 기름에 절인 치즈도 먹어보고 쓰디쓴 즙도 마셔봤습니다. 침도 맞았지요(get acupuncture).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귀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feel like a waste of precious time). 장례식 문제를 미리 처리해놓고 나니(sort out my funeral in advance) 매일 아침 일어나 내 새끼들 껴안아주고 뽀뽀해줄 수 있다는(have a cuddle and kiss my babies) 게 새삼 너무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얼마 후 나는 그이의 곁에서 잠을 깨는(awake next to him) 기쁨을 잃게 될 것이고, 그이는 무심코 커피잔 두 개를 꺼냈다가 커피는 한 잔만 타도 된다는 사실에 슬퍼하겠지요. 딸 아이 머리 땋아줘야(plait her hair) 하는데…, 아들 녀석 잃어 버린 레고의 어느 조각이 어디에 굴러 들어가 있는지는 저만 아는데 그건 누가 찾아줄까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be given six months to live) 22개월 살았습니다. 그렇게 1년 보너스로 얻은 덕에 아들 초등학교 입학 첫날 학교에 데려다 주는(walk my son for his first day at school) 기쁨을 품고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녀석의 첫 번째 흔들거리던 이빨(his first wobbly tooth)이 빠져 그 기념으로 자전거를 사주러 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보너스 1년 덕분에 30대 중반이 아니라 30대 후반까지 살고 가네요. 중년의 복부 비만(middle-age spread)이요? 늘어나는 허리둘레(expanding waistline), 그거 한번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희어지는 머리카락(greying hair)이요? 그거 한번 뽑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살아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저는 한번 늙어보고 싶어요. 부디 삶을 즐기면서 사세요. 두 손으로 삶을 꽉 붙드세요(keep a tight grip on your life with both hands). 여러분이 부럽습니다."

'Live to the point of tears.'(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 '눈물이 나도록 살아라.'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9/24/2014092405488.html



Posted by 겟업
2014. 12. 26. 16:52

미국 CIA가 발간하는 자료(WORLD FACTBOOK)를 보면 구매력 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13년 7월 현재 3만3200달러다. 구매력 기준 국민소득은 명목환율 기준 국민소득이 놓치기 쉬운 그 나라의 실제 경제, 생활수준을 보여 준다. 우리보다 높은 나라는 거의 북미·유럽 국가들과 카타르·쿠웨이트 같은 자원부국 혹은 조세피난처들이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싱가포르·대만이 우리보다 높다. 일본 3만7100달러, 영국 3만7300달러, 프랑스 3만5700달러이며 유럽연합(EU)의 평균은 3만4500달러로 우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3만100달러, 2만9600달러로 우리보다 낮다.

 이 통계가 보여 주는 대로 한국 경제는 소득이나 생활수준에서 이미 선진국 수준에 진입했거나 근접해 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 통계에서 도소매업·음숙박업의 소득이 크게 과소평가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의 1인당 실질소득은 더 높을 것이다. 실제로 유럽이나 미국 또는 일본에서 생활해본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매우 잘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첫째, 이제 우리가 선진국 기술과 제도의 모방으로 이들을 따라잡는 성장은 거의 한계에 달했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서 도입한 기술에 대규모 투자와 값싼 노동을 동원해 고성장을 이뤘던 과거 성장방식에 이제 더 기댈 수 없다. 인구 고령화, 투자율 감소는 이런 한계를 더욱 뚜렷이 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스스로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창출하고 새로운 제도를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만큼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이것이 빠르게 일어날 수 없다면 성장 속도도 자연히 느려질 수밖에 없다. 생산성 향상이 향후 성장의 주 동인이 돼야 하나 우리의 생산성 향상은 여전히 더디다. 해외에 진출해 있는 기업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임금이 우리의 몇 분의 일도 안 되는 중국 공장의 생산성이 한국 공장보다 높고, 미국 공장의 생산성은 국내 공장의 두 배에 달하나 임금수준은 오히려 낮다고 한다. 지금과 같은 한국 근로자의 생산성을 가지고는 현재의 소득수준을 지켜내기도 어렵다는 얘기다. 정부와 기업에서 일하는 방식, 인사 평가, 고용 및 승진제도, 임금체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 전반적 시스템 혁신이 일어나지 않으면 더 이상 추격이 어렵게 된 것이다. 교육의 질을 높이고, 노동 부문을 개혁하며, 기업 구조조정을 가속화해야 한다. 숯불이 거의 다 탔는데 단기 부양책으로 풀무질만 해댄다고 불이 다시 타오르지는 않는다.

 둘째, 고성장 없이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 성장지상주의로 달려왔고 지금도 성장률에 매달려 있다. 성장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매달려 있는 동안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놓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34개 회원국을 비교한 지표에는 한국이 노동시간 2위, 산재사망률 1위, 자살률 1위, 국민행복지수 33위, 출산율은 꼴찌라고 한다. 또 미국 여론조사기관의 ‘삶의 질 지수’는 조사 대상 135개국 중 한국이 75위를 기록했으며 이는 필리핀(40위)·인도(71위)·이라크(73위)보다 낮음을 보여 준다(9월 18일자 중앙일보 사설). 왜 우리 국민은 높은 소득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힘들고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하는가? 지금 우리나라에 절실한 것은 현재의 소득수준에서도 보다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사회문화·제도·관행을 바꿔 나가는 것이다. 질서와 예절, 정직과 투명, 상호 신뢰, 법 적용의 공정성과 엄중함, 공정경쟁, 이런 가치들을 우리 사회가 보다 존중하는 토양을 만들어 가야 한다. 각자가 타고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교육과 취업 기회를 가지며, 불운이 닥쳐도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복지가 제공되며, 억지보다 합리성이 더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국민은 지금 행복에 배고프다. 우리가 과거 헝그리 정신으로 경제 도약을 이뤘듯이 이제 ‘행복 헝그리’ 정신으로 행복 도약을 이뤄야 한다. 우리는 쉽게 정부를 탓하나 이는 정부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민이 여러 캠페인을 통해 새로운 사회 풍습과 문화의 정착을 가져오도록 열정과 노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정부도 이를 끌어내기 위해 각종 제도와 보상체계를 바꿔 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가혁신이다. 단기 부양책에 정권에 주어진 시간과 정치적 에너지를 너무 소모하지 말고 우리 사회의 생산성과 행복 증진을 위한, 보다 공정하고 조화로운 사회를 위한 ‘시스템 혁신’에 시간과 에너지를 더 쏟았으면 좋겠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938883&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겟업
2014. 12. 26. 16:45

오세훈 시장의 노들섬 계획, 전면 재검토 이후 시간만 끌어온 ‘상상력 빈곤’ 
파리는 문화 인프라 확충해 세계 제1의 도시로 등극 
이념과 ‘책임 미루기’로는 서울 위상 못 올릴 것



박원순 서울시장은 요즘 차기 대권주자를 묻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에 올라 있다. 박 시장 본인은 “지지율은 공중에 나는 새털 같은 것”이라며 “시장 직무에 충실하겠다”고 말하지만 그의 행보를 보면 ‘서울시장 이후’를 겨냥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야권도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국가 지도자로서 그의 자질과 역량에 대해서는 회의가 생길 때가 많다. 서울 한강대교 중간에 사실상 버려진 땅인 노들섬 문제만 해도 그렇다.

노들섬 개발은 오세훈 전임 서울시장의 정책이었다. 그는 노들섬에 복합 문화시설을 세우기로 하고 오페라하우스 등의 건축 설계까지 마쳤다. 하지만 2011년 10월 박 시장 취임 이후 계획은 중단됐다. 오 전 시장은 얼마 전 “밤잠 안 자며 추진해온 자식 같은 정책들이 줄줄이 제동이 걸리는 것을 보고 생병을 앓았다”고 토로했다. 노들섬 계획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잘못된 정책은 늦었더라도 바로잡고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전임자의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부정한다면 지도자로서 자격 미달이다. ‘승계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가리는 안목과 처리 방식에서 지도자의 능력과 포용력, 리더십이 오롯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노들섬은 서울시 지도에서 한복판에 위치한다. 노들은 ‘백로가 노닐던 징검돌’이라는 정겨운 의미를 갖고 있다. 옛 선비들은 한강에서 노을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이곳을 꼽았다. 세계 10대 도시로 선정된 바 있는 서울시가 도약을 꿈꾼다면 활용 여하에 따라 서울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매력적인 장소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의미 있는 곳이다. 노들섬은 ‘노들나루’, 한문 이름으로는 노량진이 있던 곳으로 서울 남쪽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노량진에 대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정조실록에는 ‘강의 흐름이 평온하고 강폭도 뚝섬과 서빙고의 3분의 1이어서 나룻길 중 으뜸’이라고 적었다. 영조실록에는 ‘임금이 노량진에서 군사들을 사열했다’고 기록했다. 노들섬은 서울을 대표하는 교통과 군사 요충지였다. 수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는 이곳을 방치하지 말고 문화적 용도로 활용하자는 아이디어는 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현재 노들섬은 박 시장의 지시에 따라 ‘텃밭’으로 쓰이고 있다. 한동안 전문가 포럼을 만들어 활용 방안을 논의한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요즘은 시민 아이디어를 공모 중이라고 한다. ‘회의 중’이라는 간판을 3년 가까이 걸어놓았으나 진전된 것은 없다. 최종 결정권자인 시장이 판단을 미루고 ‘전문가 포럼’이나 ‘시민’을 내세워 마냥 시간을 끄는 것이 ‘박원순 식 행정’으로 굳어진다면 심각한 일이다.

최근 서울시 내부에서 노들섬에 오페라하우스 대신 작은 공연장을 만드는 방안이 제시됐다. 특정 계층을 위한 시설은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반대로 해석하면 전임 시장이 추진한 문화시설은 부유계층을 위한 것이어서 백지화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안으로 고작 생각해낸 것이 ‘텃밭’이고 ‘작은 공연장’이라면 박 시장에겐 나라는 물론이고 서울시를 이끌 리더십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프랑스의 첫 좌파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은 1981년 취임 직후 파리 시내에 ‘그랑 프로제(큰 계획)’라는 문화시설 확충 계획을 세웠다. 오늘날 관광 명소가 된 오르세 미술관, 바스티유 오페라극장,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등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미테랑을 지지했던 사람들은 반발했다. 사치스러운 극장이나 박물관 대신에 서민주택이나 빨리 지으라고 요구했다. 미테랑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헬리콥터를 동원해 유유히 파리 상공에 올라가 어느 곳에 문화시설을 세워야 할지 골몰했다.


지난해 파리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1550만 명이다. 작년 한국 전체의 외국인 관광객 1217만 명보다도 훨씬 많다. 관광객들은 문화와 역사를 보기 위해 파리로 향한다. 파리가 세계 1위의 인기 도시가 된 것은 미테랑의 혜안과 결단력도 큰 힘이 됐다.


최근 중국의 ‘빅뱅’과 더불어 서울이 문화와 관광의 중심지로 위상을 확고히 하는 일이 향후 우리의 활로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박 시장이 보여준 상상력과 추진력으로는 서울의 획기적 변신을 기대하기 힘들다. 지도자가 지닌 ‘그릇의 크기’로 미테랑과 박 시장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지 모른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http://news.donga.com/3/all/20141002/66886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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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6. 16:44

#풍경1 : 저녁 모임이었습니다. 한 증권사 부사장이 리더십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는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었다. 주로 자료를 복사하고, 심부름하고, 그 다음에는 문서 작업을 했다. 그런데 직책이 점점 올라갈수록 내가 필요로 하는 리더십이 바뀌더라.” 나중에 임원이 됐을 때는 곰곰이 짚어봤다고 합니다. 자신이 실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리더십이 어떤 건지. “그랬더니 놀라운 사실을 알겠더라. 위로 올라갈수록 내게 필요한 건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할 때 배운 게 아니었다. 회의할 때 부하 직원들과 소통하는 법,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법, 사업상 처음 만난 사람과 사귀는 법. 그런 게 가장 중요하더라. 그건 책상 앞이 아니라 오히려 친구들과 놀고 어울리면서 익힌 것들이었다.”

다들 놀랐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이런 말을 던집니다. “밖에 나가서 놀지만 말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 좀 해! 제~발.” 돌아오는 길, 저는 생각에 잠겼습니다. 나중에 아이들이 독립해서 필요로 하는 힘은 뭘까. 그건 어떤 근육일까. 어쩌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왼팔로만 매달리는 턱걸이를 강요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입시라는 무게감에 부모가 먼저 겁을 먹고서. 사회에 나가면 오른팔의 근육도 필요하고, 두 다리의 근육도 필요하고, 배와 등의 근육도 필요한데 말입니다. 우선 입시부터 해결하자, 나머지는 대학 가서 다 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핑계 반, 위안 반으로 위장한 채 말입니다. 

#풍경2 : 최재천(국립생태원장) 교수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의 교육 철학은 흥미로웠습니다. 한마디로 ‘방목’입니다. 무작정 풀어놓는 방목은 아니었습니다. 긴 끈의 한쪽 끝을 따뜻하게 잡고 있는 방목이었습니다. 최 교수는 아이들을 ‘제품’에 비유했습니다. “공장에서 기계로 마구 찍혀나오는 제품을 만들려면 기존의 방식으로 키워라. 그런데 정말 제대로 된 ‘물건’을 한번 만들어보려는 생각이 있다면 방목하라.” 그런 방목을 그는 ‘아름다운 방목’이라고 불렀습니다.

생각해 봤습니다. 책상에서도 배울 건 많습니다. 들판에서도 배울 건 많습니다. 그럼 어떤 교육법이 가장 지혜로운 걸까요. 두 마리 양이 있습니다. 한 마리는 주로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합니다. 다른 한 마리는 목장이란 울타리 안에서 마음 가는 대로 뛰어다닙니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뭘까요. 저는 그게 ‘내 안에서 올라오는 물음에 스스로 답을 하게 하는가?’라고 봅니다.

들판에서 친구와 놀고, 싸우고, 어울리면서도 숱한 물음이 자기 안에서 올라옵니다. 그게 무슨 물음일까요. 자신의 생활에서 부닥치는 문제들, 그걸 풀기 위한 물음들입니다. 친구가 화났을 때 어떻게 풀까, 전학 온 친구와 어떻게 사귈까, 사과를 할 때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까. 자세히 들여다보세요. 이 모두가 결혼 생활, 직장 생활, 사회생활의 문제를 푸는 근육입니다. 그런 물음에 스스로 답할 때 아이들은 사회생활의 리더십을 미리 갖추게 됩니다. 울타리 안에서 자유로운 양이 울타리 밖에서도 자유로우니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의 안목이 참 중요합니다. 책상에 앉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판에서 뛰어다니는 것도 중요합니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증권사 부사장은 회사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책상의 리더십’이 아니라 ‘들판의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최 교수는 “닭장에서 사육한 닭은 고기 맛이 퍽퍽하다. 반면 방목한 닭은 쫄깃쫄깃한 고기 맛이 끝내준다”고 하더군요. 아이들의 인생에서 책상의 근육이 전부일까요. 들판의 근육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내 아이를 ‘제대로 된 물건’으로 키우고 싶다면 더더욱 말입니다.



백성호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6013505&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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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29

어느 사회나 논쟁이 되는 가치가 있고 또 모든 사회 구성원이 갖는 공통의 가치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노예 혹은 계급 제도를 부정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한 공통의 가치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구상의 어느 나라는 아직도 노예 혹은 계급 제도가 공공연하게 인정되고 최하층민은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여성의 인권은 어떤가요?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부정하거나, 교육을 받는 것을 부정한다면 우리 사회에서는 비난을 받겠지만, 중동 혹은 아프리카의 어느 나라에서는 아직도 여성들은 투표권이 없으며 교육을 받지 못하며 운전조차 못 합니다. 인종차별과 나치를 부정하는 것 모두 우리 사회의 공통의 가치일 것입니다. 이러한 공통의 가치는 진보와 보수의 논쟁도 아니고 그 어떠한 이해관계에서도 반드시 지켜지는 가치들입니다.


그럼, 이건 어떤가요? 자식 잃은 부모들이 길거리에서 진실을 위해 단식하는 자리에서 그들을 비난하고 폭식투쟁을 하는 것은 우리의 공통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인가요? 아니면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일인가요? 민주화 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은 이들을 비난하는 것은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일인가요? 부도덕한 인사들이 고위 공직자로 추천되는 것은 논쟁의 대상인가요? 국가기관이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논쟁의 대상인가요? 가끔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언론에 설득당할 때가 있습니다. 프레임 이론이나 이슈 선점이니 하는 기법으로 혹은 언론의 호도로 내가 믿고 있는 가치들이 흔들리거나 설득당할 때가 있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뭔가 다른 것을 바라고 있다거나, 지역감정이라는 틀 속에 스스로 편 가르기를 한다거나, 부도덕해도 유능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믿는다거나, 세상은 원래 공정하지 않다고 사건을 외면해버린다거나 하면서 내가 믿었던 가치를 저버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노예 혹은 계급 제도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 나라들을 비난하거나 여성이 운전을 하는 것이 사회의 큰 문제가 되는 나라들을 보면서 무시하는 것처럼, 어쩌면 어느 다른 선진국에서는 혹은 미래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지금 우리들이 논쟁하고 있는 이것들을, 우리가 공통의 가치로 지키지 못한 것을 창피해할지도 모릅니다. 진보와 보수의 논쟁이 돼서도 안 되고 그 어떤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우리 사회 공통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김해식 핀란드 거주


http://www.hani.co.kr/arti/opinion/because/6585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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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28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 모든 것이 거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첫 줄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장의 시대’라는 지난 30여년이 유난했다면 사고파는 논리가 물질적 재화에만 적용되지 않고 삶 전체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사례지만, 아이를 대신 낳아주는 것도, 민간인이 기업에 고용돼 군인처럼 전투를 하는 것도 시장거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샌델은 묻는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돈의 논리가 작용하지 말아야 하는 영역은 무엇일까?”


같은 질문을 우리에게 해보자. 지난해만 해도 10조원 선이던 삼성전자의 분기 영업이익이 3분기에는 4조원대로 내려앉으리란 예상이 나오듯 중국 제조업의 추격이 매섭다. “우리는 이제 무얼 먹고 사느냐”는 시름이 깊다. 잘살게 된 중국인을 겨냥해 관광, 의료, 교육 같은 서비스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진작부터 나왔다. 하지만 외국인용 카지노, 영리병원,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같은 주요 정책들이 찬반 논란 속에 표류하고 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2일 관훈토론회에서 “외국인 환자를 유치해서 돈을 벌자는 것인데 ‘의료 민영화’니 ‘의료 영리화’니 한다”며 “왜 이런 것들이 이념적인 논란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답답해했다.


하지만 외국인 영리병원을 그렇게 간단히 봐도 좋을까? 돈이 많건 적건 병원 복도에서 지켜지던 ‘선착순’의 줄서기 윤리가 ‘돈을 낸 만큼 얻는다’는 시장논리로 대체되는 큰 변화의 서곡이 아닐까? 미국에서는 이름이 알려진 의사가 연간 최고 2만5000달러나 하는 연회비를 내는 환자들에게만 진료 예약이 가능한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기도 한다. 또 자기 국민들에게는 사행성 산업을 권장하지 않으면서 중국인이라면 얼마든지 판을 깔아줘도 괜찮은 것인가? 최 부총리는 케이블카가 오히려 수만명이 줄서서 산에 오르는 것보다 환경파괴가 적다고 하지만 산은 산다워야 하는 것 아닐까? 질문은 꼬리를 문다.


법을 위반해 형을 살고 있는 기업인을 가석방·사면해주자는 얘기도 거래 관계를 법적 정의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다. 풀어주자는 쪽의 명분은 경제가 어려우니 이들이 나가서 유보했던 투자를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최근 황교안 법무장관과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앞장서 바람을 잡자 해당 기업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런저런 투자계획을 밝히고 있다. 가석방 요건이 되는데 재벌 총수라고 역차별을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경제민주화에 일말의 기대를 건 많은 국민들은 이번에도 “그러면 그렇지” 하는 허탈한 심정일 것이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믿음을 이렇게 투자와 감형의 거래 관계로 치환해도 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세월호와 같은 시대적 비극조차 이런 거래적 사고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세월호 이야기는 그만하자”는 사람들은 “경제도 어려운데…”라는 이유를 댄다. 정부도 내수 부진의 원인을 세월호 때문으로 돌린다. 대부분 고등학생인 300여명을 뻔히 보면서 놓친 어이없는 참화를 계기로 우리 사회가 다시 태어나려면 아프고 또 아파하고 슬퍼해야 하건만 경제를 끌어다 서둘러 덮어버린다.


도덕군자가 되자는 게 아니다. 우리가 무얼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지 이야기하고 합의점을 찾아가자는 것이다. 시장은 교환가치 이외의 가치판단을 배제하지만, 우리는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토론을 너무 자주 생략한다. 이래서는 한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봉현 경제·국제 에디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833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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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26

슬픔과 고통에 몸부림치는 세월호 유족들 앞에서 폭식을 하면서 조롱하거나 욕을 퍼붓는 사람들을 보고 공감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들이라고 개탄한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 극단적인 대립이 과연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세월호 그만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과연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세상을 보는지 의심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는 오늘날 세월호 문제에 대한 극한적 대립은 한국 사회가 티브이 종합편성채널(종편)과 조·중·동으로만 세상을 읽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종편을 전혀 보지 않지만 식당이나 목욕탕 등 공공장소에서 할 수 없이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언론계나 지식사회에서 이름 한 번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대단한 논객이 되어 방송사가 작위적으로 만들어놓은 진보/보수의 양 테이블에 나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의제를 긴 시간 떠드는 것이나 세월호 참사 이후 유병언과 구원파의 동향을 거의 생중계하듯이 계속 보도하는 것을 본 적 있는데, 그걸 보고 왜 종편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유족 공격 담론에 솔깃하게 되는지 약간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은 “텅 비고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 귀중한 시간을 때우면서, 정작 보여주어야 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보여주고’, 시민이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기 위하여 가져야 할 적절한 정보를 멀리하게 만든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텔레비전이 소유주나 광고주의 시청률 압박 요구에 완전히 종속되어 권력에 민감한 의제는 의도적으로 피해가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것인 양 포장하는 일종의 상징 폭력 기구라고 보았다.


이번 한국의 종편과 지상파도 ‘참사’를 교통사고로 만들었고,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한 다음, 정부나 당국의 구조 책임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세월호 구조 관련 수많은 의혹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않고, 농성장의 유족과 생존자들에게 마이크 한번 들이대지 않은 채, 이들이 마치 자식 죽음을 팔아 욕심을 채우려는 탐욕스러운 떼잡이인 양 만들어 버렸고, 유족들 대리기사 폭행 사건이 나오자 잘 만났다는 듯이 뉴스의 머리기사로 띄워 종일 틀어댔다. 이런 걸 칼 안 든 폭력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해방 직후 <동아일보> 등 여러 신문이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안을 소련이 제안한 것으로 왜곡 보도하여 숨죽이고 있던 친일파를 반탁·반공 투사로 부활시켰고, 나라를 적대적 대립으로 몰고 갔듯이, 그 악명 높던 서북청년단이 다시 나타난 지금도 그 상황과 유사하다. 물론 8·15 직후 하나였던 국민이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적대적으로 쪼개진 것은 언론들만의 작품이 아니라 기사회생을 노리던 친일 정치세력들의 공작 혐의가 있듯이, 국민적 공감에서 출발했던 세월호 여론을 적대적 반반으로 돌려놓은 주체도 사실상은 이미지 조작과 허구적 여론지지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현 집권세력일 것이다.


가공된 이미지가 ‘여론’이 되고 ‘지지율’이 되어 권력을 재생산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권과 새누리당은 온갖 무리수와 편법을 써서 종편 허가를 강행했을 것이다. 그들은 세월호 여론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고 좋아할지 모르지만, 공감대와 합의의 기반 위에 서서 비극적 재난 방지를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할 국민들은 폭발 직전의 두 적대 진영으로 쪼개졌고 근본적 대안 마련 작업은 더 멀어졌다. 유신 시절 지식인들이 국내 소식을 알기 위해 외국 신문·잡지를 뒤졌듯이, 21세기에 사는 지금 우리는 일본의 <후지티브이>를 통해 침몰 직전 세월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언론환경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박근혜호의 한국은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공감은커녕 폭력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집단이 활개치는 나라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76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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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24

네트워크 사회 또는 인터넷 사회는 평등할까? 헝가리 출신으로 현재 미국 노스이스턴대학 물리학 교수인 버러바시는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답한다. 그에 따르면 연결망이 많은 네트워크 노드(node)와 상대적으로 적은 노드 사이의 연결망 격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페이스북 친구가 많은 사람의 친구 수는 적은 사람의 그것보다 빠르게 증가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친구 수 격차가 커진다. 버러바시에 따르면, 구글·페이스북 등이 중국과 러시아 등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결국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밖에 없다. 네트워크에는 승자독식 법칙이 통한다는 뜻이다.


인류 구성원 모두가 스마트폰을 가지는 때도 머지않았다. 사물의 인터넷 시대도 성큼 다가왔다. 그만큼 네트워크에 연결되는 인간, 스마트폰, 냉장고, 자동차 등 노드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만큼 연결망이 강한 노드는 더욱 강해진다. 네트워크에 흐르는 데이터도 증가한다. 그만큼 네트워크 강자인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특정 인터넷 서비스 기업에 데이터가 쏠려 데이터 집중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데이터가 쏠리니 자연스럽게 구글 검색 광고, 유튜브 광고, 페이스북 광고 등 세계 광고시장 수익이 소수 기업에 몰리고 있다. 이마케터(eMarketer)의 분석에 따르면, 2013년 세계 모바일 광고 수익의 약 67%를 구글과 페이스북 단 두개 기업이 가져갔다. 세계 디지털 경제의 자본이 소수 기업에 집중되고 있다. 이렇게 돈을 긁어모으고 있는 구글은 기술연구에 막대한 규모의 투자를 진행하면서 인간 도움 없이 스스로 주행하는 자동차를 개발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구글은 미래 먹거리 경쟁에서도 크게 앞서고 있다. 구글은 2005년부터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에 위치한 대학 도서관의 책들을 통째로 스캔하고 있다. 2013년 기준 이미 3000만권에 대한 스캔을 완료했다. 여기에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자동번역 기술이 결합하여, 프랑스어, 독일어로 기록된 지식에 대한 영어권 이용자의 접근이 쉬워진다. 지식 집중이 한창 진행 중이다.


이렇게 네트워크 격차가 데이터 집중, 자본 집중, 지식 집중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독일 경제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은 구글에 대한 강제 기업분할을 주장하고 있다. 1877년 설립된 미국 벨(Bell)전화회사는 거대 독점기업으로 성장했다. 그 결과 벨전화회사는 1983년 미국 반독점법에 따라 7개 회사로 쪼개졌다. 이 사례를 들며 네트워크 격차에 기초해 자본 집중 및 지식 집중을 실현한 구글에 반독점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유럽 정치권에서 힘을 얻고 있다. 구글에 대한 이러한 강제적인 기업분할 주장의 이면에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무차별적이고 불법적인 이용자 감시에 대한 유럽 시민의 두려움에 편승하려는 정치권의 대중영합주의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일부 미국 기업에 디지털 경제 주도권을 사실상 넘겨준 유럽 국가들의 두려움을 마냥 국수주의로 치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지금까지 초고속인터넷 보급률에 기초해서 국가별 디지털 격차를 논해왔다. 이 기준에 따르면 한국은 노르웨이와 함께 대표적으로 디지털 격차가 작은 정보기술(IT) 강국이다.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도 세계 1~2위를 다투고 있다. 그러나 인터넷망, 통신망, 스마트폰 등 물리적 우위는 시간이 갈수록 약화될 수밖에 없다. 네이버, 다음 등과 같은 인터넷 서비스 기업이 풍부하지 않은 네트워크, 이용자의 다양성이 위축받고 감시받는 네트워크. 우리는 아이티 강국에서 네트워크 빈국으로 변모한 지 오래다.


강정수 ㈔오픈넷 이사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781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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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23

“다양성이 존중되고, 노동의 대가는 정직하며, 모두가 균등한 삶의 질을 보장받는다. 국가는 제도적 틀을 마련해 개인이 당면한 문제를 극복하도록 돕는다.”


많은 사람들이 희망하는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유토피아라고 지레 손사래 칠 필요는 없다. <핀란드 슬로우 라이프>의 저자 나유리씨가 남편과 헬싱키에서 2007년부터 7년간 살면서 평가한 핀란드의 현재 모습을 그대로 옮겼을 뿐이다.


부부는 이 책에서 핀란드인의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를 탐색하고 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핀란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곳’이라는 것이다. 일을 하는 한, 가난한 사람은 없으며 약자에 대한 차별은 없다. 이런 나라에서는 다문화 가정이나 유학생들조차도 행복하다. 책에 소개된 일본 유학생은 “출산, 교육, 결혼에 대한 경제적 부담이 전혀 없다. 경력을 쌓기 전, 돈을 모으기 전, 이 모든 것을 ‘아직’ 학생인데 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고 말했다.


이들은 모국인 한국과 일본을 그리워하면서도 핀란드를 선택한다. 한국과 일본 청년들이 처한 상황이 너무 답답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2030세대를 빗댄 ‘88만원 세대’에서 이제는 삼포세대(연애·출산·결혼 포기)를 넘어 사포세대(인간관계도 포기), 오포세대(내집 마련도 포기) 등 포기의 숫자가 빠르게 늘고 있다. 이웃 일본에도 비슷한 뜻의 ‘사토리 세대’(여행·자동차·사치품·음주·연애는 물론 돈과 출세에도 무관심)가 증가하고 있다.


비단 일본과 한국 청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고령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세계 여러나라 청년들의 실업률은 높아지고 있다. 최근 오큐파이(점령하라) 센트럴 운동을 이끈 홍콩 청년들의 삶도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중국 정부에 민주적 선거 보장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경제적인 문제도 있다. 1997년 주권이양 뒤 중국에서 자본과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집값은 4년 동안 두 배 넘게 올랐다. 중국 유학생은 10년 새 10배나 늘었고, 졸업 뒤 홍콩에서 취업한 중국 학생도 3년 동안 2배나 늘었다고 한다. 홍콩 청년들은 일자리 얻기가 힘들어지고 급등한 집값으로 주거 문제 해결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더 커지고 있다. 중국은 홍콩의 기존 체제 유지와 자치권을 50년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홍콩 사람의 눈엔 이런 약속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1990년대 초 홍콩에서 4년간 산 경험이 있다. 당시 홍콩 사람들의 전체적인 생활수준이 우리보다 더 높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비록 영국령이었지만 주민 자치와 법규로 운영되는 개방 사회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선택지가 다양한 열린 사회라는 점이었다. 홍콩 사람들은 먹을거리, 입을거리, 주거, 교육, 의료 등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을 자신이 처한 여건에 맞춰 선택할 수 있었다. 소득이 매우 낮아도 기본생활은 할 수 있는 ‘안전망’이 있는 사회였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홍콩 청년의 표정은 밝았고 희망차 보였다. 그런데 이번 오큐파이에서 청년들이 내건 슬로건에는 “희망이 없다”는 표현이 들어 있었다.


홍콩 오큐파이 운동이 어떤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가늠하긴 어렵다. 하지만 홍콩 청년들이 스스로 기대수준을 낮추고 미래를 포기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미래에 희망을 걸고 행동에 나선 홍콩 청년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현숙 한겨레경제연구소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83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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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21

배우 최진실이 보고 싶은 계절이다. 신인 시절 최진실을 특히 유명하게 만든 한 광고 대사가 있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 이 말이 허구임을 최진실도 알았을 것이다. 여자 하기 나름? 이는 두 사람 관계에 대한 책임을 주로 여성에게 지우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애인과 화해하고 싶어 꽃다발을 들고 온 남자가 잠시 후 꽃을 들었던 손으로 일가족을 차례로 살해했다. 지난주에 일어난 광주 일가족 살인사건이다. 살해 동기는 ‘무시해서 홧김에’였다. 익숙한 동기다. 아내나 애인을 살해하는 남자들의 살해 동기는 툭하면 ‘무시해서, 자존심이 상해서, 순간적으로, 홧김에…’라고 한다.


예전에 가정폭력에 관한 한 언론의 글을 읽다가 이런 마무리를 보았다. “(여자들도) 남편의 자존심을 짓밟는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하다. 죽기 싫으면 남자의 자존심을 건들지 말라는 조용한 협박이 통한다. 우리 사회는 인간의 자존심이 아니라 유독 남자의 자존심이 중요하다.


가부장제와 이성애 관계 속에서 여성은 거의 일방적인 감정노동을 한다. 가족을 위해, 남자를 위해 행해지는 그 노동은 모성애나 애교로 불리며 마치 자연스러운 여성성으로 왜곡되었다. “여성들은 다른 자원이 없고 재정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감정을 남성에게 주고 이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들에게 없는 물질적 자원을 받는 방식으로 감정을 자산으로 활용해 왔다.”(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267쪽)


여성이 이 노동을 멈출 때 주로 ‘곰’이 되고, 그 곰이 화를 내기 시작하면 ‘무시했다’와 같은 말이 돌아온다. 그리고 이는 ‘맞을 짓’이 된다. 기 센 여자는 부정적 표현이지만 남자의 기는 살려야 한다. 이를 합리화하는 말이 ‘여자 하기 나름’이다. 여성은 감정노동의 주체지만 늘 가만히 있는 대상이다. 그래서 집(사람), (어머니)대지, 항구, 꽃에 비유된다. 진부하고 지겨운 비유. 여성은 안식처이거나 아름다운 볼거리다.


서비스직에서 여성 노동자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는 감정노동의 주체를 여성으로 보는 우리의 관념 때문이다. 그 관념 때문에 여성은 실제로 감정노동에 훨씬 숙련된 노동자로 성장한다. 이는 여성의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에 의해 부단히 훈련된 결과다.


나는 <한겨레> 토요판에 실리는 연애와 가족에 대한 글을 꼬박꼬박 읽는다. 뭘 그런 것까지 열심히 읽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 ‘그런 것’은 사소한 이야기라고 치부한다. ‘교양’을 주제로 한 어떤 책에는 여성들이 읽는 로맨스 소설은 몰라도 될 교양, 알아도 아는 척하지 말아야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지식으로 분류된다.


중요한 뉴스와 중요한 교양은 뭘까. 김정은의 행방? 아시안게임의 경제 효과?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세상의 중요한 문제와 나의 중요한 문제가 꼭 일치하진 않는다. 일상에서 인간관계는 언어와 함께 우리 일상의 고통과 가장 밀접한 문제다. 하지만 가장 등한시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관계와 언어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사람에게 이는 하찮은 문제지만 감정노동의 고통이 일상인 사람에게 인간관계는 늘 중요한 화두다. 그 노동의 헛헛함을 달래려 여성들은 때로 로맨스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비현실적 인물로 눈을 돌린다.


사랑은 노동이다. 관계를 생성, 유지, 나아가 말소시키는 순간까지도 상당한 육체적, 감정적 노동이 요구된다. 타인은 나의 쉼터가 아니다.


이라영 집필노동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589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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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18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요즘 푹 빠져있는 애니메이션 중 ‘요카이(요괴)워치’라는 것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이 요괴를 현실의 세계로 불러낼 수 있는 손목시계(요카이워치)를 손에 넣은 것을 계기로 이런저런 요괴들과의 만남을 통해 성장해간다는 줄거리로, 우스꽝스러운 요괴 캐릭터들과 초등학생 일상을 반영한 내용으로 어린이의 마음을 끌고 있다.


요카이워치는 지난 해 7월 게임회사 닌텐도가 3DS 게임용 소프트로 선보인 것이 최초이다. 게임 인기에 힘입어 테레비도쿄는 올해 초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 방송을 내보냈는데, 방송 2회만에 이 방송국의 간판 애니메이션인 포켓몬스터의 시청률을 뛰어넘으며 요카이워치 신드롬을 이끌어냈다.


최근 여름방학을 맞아 아들과 극장판 포켓몬스터를 보기 위해 찾은 영화관에서 겨울방학에 방영될 요카이워치 예고편을 보여줬는데, 영화관에 온 모든 어린이들이 요카이워치의 주제가를 합창하는 것을 보면서 인기를 실감하기도 했다. 지난 달 발매된 닌텐도 3DS 게임용 소프트 두번째 시리즈는 발매 사흘만에 매진, 재판에 들어가는 기염을 토했다.


요카이워치는 게임, 애니메이션에 국한되지 않고 장난감, 문구 시장에도 수많은 파생상품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나오는 상품마다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 언론도 요카이워치 신드롬을 다루는 특집기사들을 속속 내놓고 있다.


교도통신은 2일 가와사키시의 가전양판점 비쿠카메라에 장난감 제조업체 반다이가 출시한 요카이워치를 본 뜬 손목시계를 구입하기 위해 1,200여명이 줄을 섰다고 소개했다. 한화로 3만5,000원을 호가하는 고가 제품이지만 올 1월 발매된 첫번째 시리즈 제품이 이미 품절된 상태여서 이번에도 금세 매진될 것으로 업체에서는 기대하고 있다.


시중의 게임기에서 요괴를 불러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메달은 현재 300종류에 3,000만여개가 생산됐다. 판매와 동시에 매진이 이어지는 탓에 특히 구입하기 어려운 메달은 인터넷에서 원래 가격의 10배에 거래되기도 한다.


요카이워치 신드롬이 주목받는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게임소프트를 만든 레벨 파이브는 어린이들의 고민거리를 철저히 조사, 스토리와 캐릭터를 끄집어 냈다. 게임, TV, 상품 등을 연관시켜 구매 의욕을 자극하는 크로스미디어는 물론, 하나의 콘텐츠를 다양한 방식으로 판매, 부가가치를 극대화하는 이른바 원소스멀티유즈를 십분 활용했다. 게임소프트(레벨파이브), 장난감(반다이), 광고(덴쓰) 등 관련 회사 관계자들은 2주에 한번씩 모여 판매전략에 대한 회의를 가진다고 한다.


어린이 소비자의 호기심을 최대한 자극하는 극단적인 마케팅기법도 도입했다. 반다이는 연말까지 메달 1억개를 생산할 예정이지만, 수요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반다이측은 추가생산도 가능하지만 어린이 소비자의 구매심리를 더욱 자극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산량 조절에 나서는 고도의 마케팅 전략도 세우고 있다.


욘사마 열풍으로 시작된 일본내 한류가 올해 진출 10주년을 맞아 휘청대고 있다. 한국의 드라마와 가수가 일본 지상파 TV화면에서 많이 사라졌고, 도쿄의 한인타운이 밀집한 신오쿠보의 상권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고 있다.


한류를 담당하는 업체들은 한일 양국관계가 급속히 나빠지면서 일본에서 한류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줄어들고 있고, 매스컴에 노출이 적게 되면서 한류관련 상품의 판매부진으로 이어졌다는 논리를 펼친다.


얼핏 이해가 가는 대목도 있지만 전적으로 수긍하기는 어렵다. 한류는 운에 기댄 측면이 많지만, 사후관리에 소홀히 한 것이 쇠락의 길을 걷게 된 탓이 크기 때문이다. 한류를 팔기 위해 우리 업체는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앞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 지를 일본 업체들이 요카이워치 신드롬을 만들어내는 노하우에서 한 수 배우는 것은 어떨까.


한창만 도쿄 특파원


http://www.hankookilbo.com/v/6c8bb8eca57347df9e43ada9bf70af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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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15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한국 사람한테 좀처럼 듣지 못했던 속담 중 하나다. 오히려 외국인한테 더 많이 들었다. 한국이 다른 나라와의 관계를 보는 방식을 그들이 설명할 때다. 그러나 내가 만났던 많은 한국인은 정말로 자기 나라를 새우에 견준다. 이게 과연 적절하고 정확한 비유일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한국인들의 그런 인식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시각에서 보면 한국은 영원히 다른 나라에 휘둘리는 힘없는 희생자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체로 그런 시각에는 한국이 ‘작다’ ‘약하다’ ‘여전한 개발도상국이다’라는 표현이 따라다닌다. ‘개발도상국’은 불편할 정도로 자주 듣는다.

거슬리는 것이 또 하나 있다. 한국 친구 한 명이 미국 유수의 MBA 스쿨에 합격 통지서를 받고 한 말이 “나 들어갔다. 난 그냥 한국 사람인데 말이야”였다. 미국의 엘리트 대학에서 외국인 학생 중 한국인이 불균형적으로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한국에는 대체로 부정적이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얘기들이 만연해 있다. 서울 특파원 시절 결론 낸 바로는 이런 얘기의 주창자들은 정치인과 재계 지도자를 비롯한 엘리트였다. 사회 지도층일수록 한국이 한국 같지 않기를 바라고, 미국 등 외국 같기를 바라는 듯이 보인다. 그들에게 한국은 ‘약하고’ ‘여전한 개발도상국’이기 때문이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자기 회의적인 그런 얘기들은 변화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평등주의나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논의를 막기 위해서는 한국이 아직도 개발도상국이라는 인식만큼 좋은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야 성장과 진보를 위해 모두가 희생을 감수하지 않겠는가.

오늘 왜 이 얘기를 꺼낸 것일까. 나는 현재 여러분이 겪고 있는 한국의 추위와 산성눈(산성눈이 존재하는지 몰랐으나 산성비가 있으면 산성눈도 있을 법하다)을 피해 말레이시아에서 이 칼럼을 쓰고 있다. 이곳에서 한국에 대해 쓴 내 책과 관련해 현지 언론인들의 인터뷰에도 응했다. 여기 있는 동안 한국이 약하고, 작고, 후진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한국을 언급할 때마다 현지인들은 부러움과 존경이 섞인 반응을 보였다. 언론인들은 1987년 이후 한국의 정치적 발전을 부러워한다. 부(富)에 대해서는 한국을 서구나 일본과 같은 범주로 인식한다. 한국인에 대한 다른 반응이라면 “하지만 한국인은 우리를 깔보지 않나요?”였다. 말레이시아인들의 한국에 대한 얘기는 한국인들의 자기인식과는 정반대이다. 

내 책은 베스트셀러가 아니고, 나도 유명 인사가 아니다. 하지만 동남아 여행 중에 한국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태국 언론인들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수없이 받았다. 그들은 한국의 비결이 뭔지와 더불어 도대체 왜 한국은 휴식을 취하지 않고, 지금의 성공을 조금이라도 즐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느냐고 물었다. 또한 자신들의 TV 스케줄이 왜 한국 드라마로 채워지는지도 알고 싶어 했다. 나의 책 중국어판 표지에 ‘세계가 김치에 목이 막히다’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봐서 중국에서도 한국에 대한 인식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내 어머니는 가끔 전화를 걸어와 한국에 대해 읽거나 TV를 통해 들은 것을 얘기해준다. 그런 전화는 더 잦아지고 있다. 어머니는 “요즘 맨날 한국 소식을 듣고 있단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한국이 맞는 것 같구나”라고 말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머니만이 아니다. K팝을 비롯한 한류가 런던이나 파리에서 대박 날 것이라는 데는 회의적이지만 한국이 세계 도처로 발을 뻗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동료 외국 특파원이 한국을 새우로 비유하는 것을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은 더 이상 새우가 아니라 돌고래라고 했다. 중국이나 미국과 같은 고래는 아니지만 스마트하고, 민첩하며 꽤 인기가 많은 돌고래 말이다. 돌고래는 때때로 포식자들을 조심해야 하지만, 먹이사슬에서 그의 전반적 순위는 선망의 대상이다. 돌고래가 알거나 말거나.

다니엘 튜더 전 이코노미스트 서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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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10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감동(感動)을 국어사전에서는 ‘크게 느끼어 마음이 움직임’이라고 푼다. 지난주엔 부산에서 전해진 찡한 사연에 많은 국민이 감동했다. 이름하여 ‘치매 할머니 보따리’ 사건이다. 주인공은 1948년생, 그러니까 만 66세의 여성 A씨다. 사실 요즘 66세는 할머니라 부르기엔 좀 이른 감이 있지만, 그래도 손녀를 보셨으니 할머니가 맞다.

 사연을 복기해 보자. 지난 15일 오후 부산 서부경찰서 아미파출소로 신고전화가 들어왔다. 112 신고가 아니라 파출소 일반전화로 한 여성이 제보했다. “부산대학병원 앞길에서 웬 할머니가 보따리를 들고 서성거린다”였다. 경찰이 출동해 순찰차로 파출소에 모셔왔다. 슬리퍼를 신고 계시길래 주변 주민일 것으로 생각하고 경로당 10여 곳과 주민센터·문화센터 등에 수소문했으나 허사였다. 한참 뒤 할머니가 자기 이름과 사는 곳(모라동)을 기억해 내고 경찰에 말해 주었다. 다시 부산하게 움직인 끝에 가족과 겨우 연락이 닿았다.

여기까지는 흔한 사건이다. “부산 서부서 관내에서만 많을 때는 일주일에 3~4건이나 치매 노인 실종 신고가 들어온다”고 아미파출소 박헌중(49·경위) 관리주임은 말했다. 찡한 사연은 할머니가 들고 있던 보따리 두 개에 들어 있었다. 경찰이 가족에게 인계하러 할머니를 모시고 간 곳은 아미동에서 차로 30분 이상 걸리는 개금동의 한 병원. 할머니의 딸(38)이 제왕절개로 딸을 출산하고 입원해 있었다. 그리고 보따리 하나에는 이불, 다른 하나에는 밥과 미역국·반찬이 들어 있었다. 오후 8시 가까워서야 병실에 도착했으니 음식은 이미 다 식어 있었다. 딸의 산후 구완에 쓰려던 밥이요 국이었다. 딸은 말없이 눈물을 흘렸고, 간호사들이 사연을 듣고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다음 날 부산경찰청 페이스북에 이 이야기가 실리자 누리꾼들이 다투어 댓글을 달거나 퍼 날랐다. 아미파출소에는 칭찬하는 시민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전화뿐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달걀, 1회용 기저귀, 화장지, 라면, 음료수를 들고 물어물어 파출소까지 찾아왔다.

팍팍한 세상. 비록 당사자에게는 안타깝고 그나마 천만다행인 해프닝이었지만, 많은 국민이 공감하고 위로를 얻었다. 어머니의 지극한 자식 사랑이 있고, 이제 누구에게나 남의 일이 아닌 치매 증세가 있고, 새 생명의 탄생이라는 경사에다 경찰관의 헌신적인 자세까지 겹쳐진 사연이다. 듣고 마음이 녹진녹진, 뭉클해지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다. 사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비슷한 일은 가끔 벌어진다. 지난달 22일에는 서울 남대문경찰서 태평로파출소 경찰관들이 행인의 신고를 받고 길 잃은 열한 살 아이의 집을 찾아주었다. 알고 보니 지적장애 3급이었던 꼬마는 자기 이름만 말할 뿐 부모 연락처와 사는 곳을 대지 못했다. 경찰관이 “짜장면 먹고 싶어”라는 아이의 말에서 힌트를 얻어 “짜장면 배달해주는 중국집 전화번호 아니?”라고 묻자 전화번호 여러 개를 줄줄이 말하더란다. 그중 한 곳이 강서구의 중국식당으로 확인되었고, 덕분에 부모를 찾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서울경찰청 페이스북).

수많은 개인의 감동은 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집단적인 감동이 제도를 바꾸고 사회를 낫게 만드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도처에서 분출되는 감동을 민감하게 파악하고 변화의 그릇에 담아내는 일은 정치와 행정의 몫이다. 과연 우리 정치는 그런 역할을 다하고 있을까. 부산 치매 할머니의 경우 남편과 사별한 후 작은 주공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인지(認知) 장애를 안고 홀로 생활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식들이 있지만 가정마다 곡절이 있을 테니 함부로 말하기 어렵다. 내가 따지고 싶은 것은 이름표나 실종 방지장치(배회 감지기) 같은 서비스가 왜 할머니에게는 제공되지 않았으며, 노인요양보험의 간병서비스도 받지 못하고 있었는지, 구청·시청은 그동안 무얼 했는지 하는 의문이다. 정치인과 관료에게는 감동의 이면에 깔린 문제점을 갈무리해 사회를 변화시킬 의무가 있지 않은가. 

이건 아파트 관리비(난방비) 비리 의혹을 폭로하다 폭행사건에까지 휘말린 배우 김부선씨 사례에도 해당된다. 한 여성이 외롭게 싸우는 동안 구청·시청, 지방의회, 경찰·검찰과 국회의원은 손 놓고 있었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대마초 합법화 주장을 다시 꺼내지만 않는다면, 김부선씨를 지방의회 의원으로라도 추천하고 싶다. 다수의 잔잔한 감동을 잘 담아내 큰 변화를 이끌어내면 우리 국회도 감동을 넘어 환호와 환희를 불러일으킬 텐데,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짜증과 혐오만 자아내니 큰일이다. 제발 아미파출소 직원들만큼이라도 일을 해보라.


노재현 중앙북스 대표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901689&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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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 23. 01:03

유튜브에서 싸이의 ‘강남 스타일’ 동영상이 십억 번 이상 클릭된 것에 한국 사람들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할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대단한 역동성과 창의성이다. 하지만 싸이의 최근 비디오 ‘젠틀맨’을 보고 나는 분명 한류가 올바른 길을 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한국인 친구들은 싸이의 동영상이 강남의 물질주의 풍조에 대한 풍자라고 설명한다. 사실 싸이가 그런 의도를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외국인으로서 그 동영상을 본 나의 솔직한 느낌은 소비문화에 대한 찬양과 여성에 대한 모욕적인 취급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절박한 이슈는 속도나 양이 아닌 방향성이다. 한국문화가 아무리 역동적이라도 분명한 윤리적 메시지를 담지 못한다면, 즉 한류를 즐기는 세계인들에게 단순한 수동적 소비를 넘어 무엇인가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영감을 줄 수 없다면 종국적으로 한국 문화의 영향력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한류의 융성에 기뻐하기 이전에 역사적으로 경제·문화대국들의 영고성쇠(榮枯盛衰)와, 비전이 없어서 아예 사라져 버린 문화들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를 들면 17세기 청나라를 이끈 만주족은 강력했다. 한족(漢族)마저 만주족 문화에 압도돼 변발 풍습까지 모방했다. 당시 만주족의 대중문화[滿流]와 행정 제도는 중국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 만주족의 문화는 어디에 있나? 17세기 중국인들은 필사적으로 만주어를 배우려 했으나 지금은 만주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없다. 만주족 후예(後裔)들도 문화적 정체성을 잃은 채 스스로를 중국인으로 생각한다. 만류(滿流)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이유는 다양하지만 주된 원인은 그 문화가 철학과 문학, 그리고 가치를 스스로 창출해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주족의 뛰어난 통치 노하우도 그들을 구해내지는 못했다.

우리는 만류의 몰락을 한류에 대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스스로 작금의 한류에 대한 엄중한 물음을 던질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신체적 장애우들이 케이팝 밴드(K-Pop bands)를 보면서 자신감과 영감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거기서 매혹적인 외양보다 더 강력한 공헌, 믿음, 비전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여성들이 한국영화를 보면서 진정한 리더로 자라날 수 있을까? 오히려 남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패션과 외모만을 추종하게 되지 않을까? 해외 청소년들이 한국 대하드라마를 보면서 사회봉사나 평화와 환경에 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을까? 오히려 이기적인 환상이나 종속성만 키워지는 게 아닐까?

한국은 식민주의, 제국주의, 문화적 엘리트주의의 잔재를 청산하고 세계적 강국이 된 유일한 국가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은 세계의 개발도상국들에 그 어떤 나라도 줄 수 없는 영향을 줄 수 있다. 한류의 방향이 잘못된다면 전 세계가 그 비극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가령 한국 청소년들이 쓰레기를 버리거나 일회용 컵만 쓴다면 동남아·중앙아시아·중동 등지의 청소년들도 이를 모방할 것이다. 한류가 부모와 친구들을 배려하지 않고 개인의 이기적인 삶만 추구하는 풍조를 퍼날라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환경적·사회적 재난(災難)을 부채질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잃어버린 한국 문화는 어떠한가? 한국 어머니들이 쌀 한 톨이라도 아끼며 살았던 때가 진정 먼 옛날 이야기인가? 기후변화와 환경 파괴의 시대에 그런 절약의 미덕이 다시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런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이 한류의 핵심이 될 순 없을까? 조용히 앉아 책을 읽으면서도 안분지족(安分知足)했던 옛 선비들의 친환경적인 삶이 더욱 강력하고 영감적인 한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순 없을까?

우리는 상업화된 성과 소비문화를 넘어서야 한다. 화장을 하지 않은 채 공공의 이익과 환경,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소녀시대’를 떠올려 보자. 아프리카 케냐의 작은 마을에서 한류에 영감을 받은 한 청년이 분연히 일어나 “나는 케냐의 세종대왕이다”고 외치는 날을 상상해 보자. 그런 장면이야말로 한국 문화에 내재하는 보편적 위대성을 상징한다. 비로소 그때에야 한류가 진정한 한류가 될 것이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시(이만열) 경희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약력 : 1964년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 출생, 예일대 학사, 도쿄대 석사, 하버드대 박사, 조지워싱턴대 교수, 우송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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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12. 23. 00:58

최근 국제대회에서 멋진 플레이를 보이는 한국 여성 프로골퍼들, 국제 정치무대에서 눈부시게 활동하는 유엔의 반기문 사무총장, 그리고 세계은행의 김용 총재 등으로 인해 한국은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의 약진(躍進)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나처럼 한국에 오래 거주해 온 사람으로선 이렇게 좋은 교육과 인프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 중에 아직도 여기저기 빈자리가 남아 있다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면 중국학을 연구하는 나로선 한국, 특히 서울에 살며 혜택이 많다. 거의 모든 분야(역사·문학·경제·인류학 등)의 전문가들을 서울에서 수시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이 서울에서 중국·일본 또는 한국의 시문학(詩文學) 세미나를 열고자 한다면 각 분야에 상당히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전문가 30~40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한데 모을 수도 있다. 도쿄·베이징·상하이 또는 보스턴에서는 그런 분야의 전문가들을 한꺼번에 모으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오직 한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중국학 연구에 있어서 리더가 될 수 있는 조건들을 충족시키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되고 있는 것은 중국학 연구와 뚜렷이 구별되는 한국식 이론이다. 한국의 학자들은 중국학에 대한 많은 전문 지식을 갖췄음에도 중국학 분야를 연구하는 세계의 다른 학자들에게 본보기나 영감이 될 수 있는 일련의 한국식 원칙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중국학의 경우 세계 각국은 독자적 학풍이 있다. 일본에서는 서지학(書誌學) 위주의 치밀한 해석 전통이 있고, 프랑스의 경우는 19세기 에두아르 샤반(<00C9>douard Chavannes)에서 시작된 현지 조사와 텍스트 분석을 결합한 복합적 연구 방법론이 뚜렷한 학풍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유럽식 중국학의 강점과 새로운 미국식 실용주의를 결합한 하버드대의 존 페어뱅크(John Fairbanks)류의 학문적 전통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의 중국학 연구자들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유학생들이 몰릴 만큼 매력적인 독자적 접근법을 구축하고 있는가.

이것은 비단 중국학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서울은 이제 예술가·화랑·예술비평가들이 활발하게 창의적 활동을 하고 있는 역동적 예술의 중심지다. 그런 에너지와 재능을 갖춘 서울에 세계의 예술가와 비평가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사조(思潮), 즉 ‘Seoul School(서울파)’이 없다는 것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서울에는 파리·베를린·바르셀로나·도쿄와 같은 국제 도시들처럼 예술에 대한 비전을 공유하는 예술인들의 모임도 보기 힘들고, 예술계를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으로 결속시키는 비평가들의 학파나 담론도 형성되어 있지 않다.

한국이 세계 무대에서 워낙 급속도로 부상했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새로 형성된 국가의 위상을 제대로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적 접근법 내지 한국적 방법론을 찾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더 뿌리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 최고의 제품을 생산해 내는 경제 대국이다. 그럼에도 세계적 수준의 이론적·개념적 담론 형성에 확신 있는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배경에는 분단국가라는 사실도 놓여 있다.

한국인들의 대화나 일상생활에서는 북한의 존재감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평행선을 그으며 한국 문화에 통합되지 못하고 있는 또 하나의 한국이 주는 압박은 대단하다. 한국인의 정서와 문화에 엄청난 누수 현상을 초래하고 있으며, 결국 한국 스스로 자신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형성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남북한의 분단을 지리적으로만 보는 것은 매우 피상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통일된 한국의 가치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단순히 계산기로 두들겨보는 통일 비용만으로는 평가할 수가 없다. 한반도의 지리적 분단은 전반적인 한국 문화를 관통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한국은 세계적인 석학을 배출하고 있으면서도 분단·통일에 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는 불확실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이제 한국도 경제적인 측면의 통일 비용만 계산하기보다 돈으로 도저히 환산해 낼 수 없는 문화적·정서적 문제에 대한 고려도 해야 될 시기가 되었다.

임마누엘 패스트라이쉬(이만열)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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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
2014. 12. 23. 00:57

2007년 한국에 발을 디뎠을 때 지방정부의 제도개혁 능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충남 도지사 보좌관으로 일하는 동안 도청 소재지를 대전에서 홍성으로 이전하는 데 따른 갖가지 준비사항들에 참여하게 됐다. 한국에선 도시 인구가 100만 명에 이르면 시가 광역시로 바뀌기 때문에 도청 소재지를 홍성으로 옮기면서다.

이런 정책은 매우 과학적이고 실용적이지만 이 같은 혁신은 미국에선 거의 불가능하다.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의 인구는 다른 주들보다 훨씬 더 많지만 주정부에 걸맞은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지난 반세기 동안 새로운 주를 만들어내기도 쉽지 않았다. 푸에르토리코 같은 자치령을 주로 승격시키는 문제도 워낙 오래 끌어 이젠 아예 독립시키자는 논의가 대두될 정도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도청 소재지 이전에서 보인 놀랍고 신속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지방정부의 행태에서 드러나는 약점도 무시하기 어렵다. 도시 설계 시 나타나는 근시안적 태도와 확고한 제도적 틀의 결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정부 관리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의 과거 훌륭한 운영 선례를 모를 뿐만 아니라 제아무리 혁신적인 정책도 사전에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부족한 듯하다. 그저 온갖 양식의 서류를 채우기에 급급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충남도청, 대전, 서울에서 함께 일한 공무원들은 교육 수준도 높고 사려 깊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1년만 지나면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나는 순환근무제의 틀에 갇혀 있다. 이들이 지적 능력과 굳은 의지에도 불구하고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구축하기 힘든 이유다. 이들에게 시간을 내 자신의 일과 관련된 서적을 읽어보라고 하면 아마 사치스러운 주문일지 모르겠다.

게다가 각 정부 단위의 평가에 이용되는 기준도 장기적이고 체계적이기보다는 단기적으로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정부의 업적은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하며 여기에는 역사적 안목을 갖고 있는 전문가와 시민들의 반응도 요구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서울시는 시정에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기 위해 ‘위키 서울’ 등 다양한 혁신 방법을 시도하며 도시의 녹색공간을 늘리기 위한 캠페인에 나섰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장기적인 목표를 추구할 시간과 동기부여가 없다면 이 또한 공염불이 될지 모른다.

한국의 지방정부는 단기적 시각에서 장기적 관점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하다. 정책 아이디어가 제아무리 신선하고 좋아도 정권교체와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실행되기 어렵다면 유명무실한 정책이 될 수밖에 없다. .

그러나 장기 계획이 수립된다면 서울시청 공무원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쌓을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새로운 분야의 전문가들을 미리 기를 수 있다. 아무리 후한 급여를 주더라도 하루아침에 전문가를 구할 수는 없지만 사전에 계획만 세운다면 충분히 완벽한 팀을 만들 수 있다.

이 문제의 해결에 도움을 줄 행정적 지혜는 조선왕조의 통치 방식에서 찾으면 어떨까 싶다. 정도전이 경국대전에서 구축한 조선의 통치이념은 그 후 500년을 지탱하지 않았나. 서울시도 개발과 유지, 관리에 최소 100년을 내다본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런 도시계획안에 40년 후에 대해 세세한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하긴 어렵겠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접근한다면 서울의 인프라시설 상태와 시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상당 부분 예측할 수 있다. 사실 혁신은 한 발짝 물러서 장기적 시각에서 도시 공간의 개발을 바라볼 때만 가시화된다.

100년을 내다보고 도시계획을 수립한다면 잘못 지은 건물과 도로에 수반되는 숨은 비용도 고스란히 드러나게 된다. 그게 바로 100년이 지나도 끄떡없는 양질의 자재를 쓰고, 시공을 해야 하는 이유다. 당장은 시간이 걸려도 제대로 지은 하수도 시설과 보도가 결과적으로 더 싸게 먹힌다. 그렇게 되면 최소 20년간은 거뜬한 가로등과 100년간은 거뜬한 주택을 짓게 되리라.

장기적인 도시계획이 수립된다면 단기적 이득을 노린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적 행태도 점차 사라질 것이다. 그런 정책이 미래에 가져올 해악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장기적 계획이 장기적 재정정책의 뒷받침을 받아야 할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만일 20, 30년간 지속될 프로젝트를 위한 장기적 금융조달 방식을 개발한다면, 주택의 단열처리와 태양전지판 이용도 더 싼 값에 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이 같은 재정조달 계획은 경제에 지속적으로 활력을 불어넣을뿐더러 단기 이익을 노린 투기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통치 시스템은 장기적 계획에 확고히 바탕을 뒀다. 그 지혜를 오늘날의 서울과 지방정부에 끌어온다면 분명 한국이 전 세계에서 행정의 선두주자로 우뚝 설 것이다.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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