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3. 16:19

소설가 김원일은 대구에서 자랐다. 약전골목과 중국인 많이 거주하는 종로를 낀 장관동이었다. 장관동은 손수레나 지나다닐 수 있는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남북으로 나 있다. 골목길 가장자리는 덮개 없는 하수구 탓에 겨울 한 철을 빼곤 늘 시궁창 냄새가 났고 여름이면 분홍색 장구벌레가 오글거렸다. 약전골목길 양쪽엔 약제 도매상과 한약방이 즐비했다. 갖가지 약초가 산더미처럼 쌓여 향긋한 내음이 진동했다.


김원일이 한국전쟁 당시 약전골목과 종로통을 배경으로 쓴 자전적 소설이 '마당깊은 집'이다. 1988년 발표한 작품이 최근까지도 '명성'을 누리는 건 대구 근대골목 투어 덕분이기도 하다. 이은상 시(詩)로 지은 가곡 '동무생각'에 나오는 '청라언덕'이 골목 여행의 출발점이다. 일명 '90계단'으로 불리는 3·1운동 만세길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결혼식을 올렸다는 계산성당, 시인 이상화 고택(古宅)을 거쳐 뽕나무 골목, 약전골목, 종로로 이어지는 코스다. 한 해 20만명의 관광객이 다녀간단다.


대구 근대골목 투어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2013 아시아 도시경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CNN과 한국관광공사가 공동 선정한 '한국의 풍경들 100' 중 14위에 이름을 올렸다. 대구에서의 성공 때문일까. 온 나라에 골목 여행이 붐이다. '골목길 전쟁'이라고 할 만큼 지자체들의 예산 따기 경쟁, 코스 개발 경쟁도 치열하다. 올해 서울시가 지원하는 골목길에는 미아리 점성촌길, 창신동 봉제동 길도 포함됐다. 유명 예술인 생가를 비롯해 역사 유적, 현대사의 흔적 등 '이야기'만 퍼올릴 수 있다면 죄다 '골목'이 된다.


골목길 부활은 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이 주도했다. 오래된 뒷골목이 관광자원이 된다는 걸 보고 와서다. 카프카의 작업실이 있는 체코 프라하 성(城) 뒷골목 '황금소로'를 구경하는 데 1만원 가까운 입장료를 내라고 해서 입을 딱 벌린 적 있다. 이야기가 상품이 되니 너도나도 골목 만들기에 나섰다. 문제는 돈맛을 보자 골목 맛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옷가게와 갤러리, 식당이 늘어나고 스타벅스, 맥도날드 같은 프랜차이즈 업종까지 진출했다.


건축학자 임석재는 "골목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해 질 녘, 딸내미 피아노의 똥땅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가 호박 써는 소리가 통통통 울리고, 된장찌개 끓는 냄새가 퍼지고, 가끔 개가 멍멍 짖고, 집 밖에 널어놓은 빨래가 기분 좋게 말라가는 때…"라고 썼다. 골목의 부활은 반갑지만 거기서 고유의 일상이 사라지면 진정한 시간 여행은 이뤄질 수 없다.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7/14/2014071403852.html


'다이어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CNN 종군기자와 아시아  (0) 2014.12.05
결혼 결심[펌]  (0) 2014.12.05
원어민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영어 말하기  (0) 2014.12.03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0) 2014.11.21
끝나지 않는 논쟁에 대한 단상  (0) 2014.11.14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