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문을 연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간송미술관 소장품을 전시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가 "이건 아닌데"라고들 했다. 세계적 건축가가 설계한 초현대식 건물과 간송 고서화·골동품의 거리가 너무 멀어 보였다. DDP는 "창의적 인재들의 디자인에 관한 생각과 표현을 세계에 발신하겠다"는 목표를 걸고 4800억원이나 들여 지었다.
이달 초 DDP에 새로 걸린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美人圖)'를 보고 "그나마 간송이라도 있길래…"라는 생각을 했다. 동대문 일대는 37개 대형 패션 상가가 있는 우리 패션·디자인 산업의 1번지다. DDP 간송 전시장을 찾아가는 길엔 상점마다 손님을 유혹하는 문구가 가득했다. "당신은 예뻐요. 헤어만 바꾸면" "선명한 컬러, 반짝임, 단 한 방울로 기적의 피부 관리"…. 그 한가운데 혜원의 '미인'이 걸려있었다.
여인은 가벼운 여름 단장이다. 실타래 같은 머리를 탐스럽게 말아 올리고 나긋나긋 두 손으로 앞가슴 삼작노리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몸에 착 달라붙는 흰 저고리 밑으로 쪽빛 열두 폭 모시 치마가 시원스럽다. 겨드랑이에서 흘러내린 두 가닥 주홍색 허리띠와 자줏빛 옷고름엔 200년 전 패션 리더의 자신감이 넘친다. 뜯어보면 하나하나가 패션의 코드이다.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 작품이 뉴욕에 전시됐을 때 그 고장 여인들이 '금년 뉴욕의 헤어스타일은 바로 이것이 될지 몰라요' 해서 같이 웃었다"고 쓴 적이 있다.
패션·디자인 산업과 예술의 공생(共生)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런던 디자인박물관은 작년 일본 화가 야요이 구사마의 '점(點) 그림'을 가방과 옷·장신구에 접목한 루이비통 여름 컬렉션을 '올해의 디자인'으로 뽑았다. 세계에 널리 퍼져 우리에게도 익숙한 윌리엄 모리스의 과일 무늬 벽지는 서양 중세 태피스트리에 나오는 꽃과 열매를 되살려낸 것이다. '산업 디자인의 천재'로 불리는 필립 스탁의 짐승 뿔 모양 조명 기구는 바이킹족의 뿔 달린 투구에서 힌트를 얻었다.
디자인 메카로서 DDP의 성패(成敗)는 '미인도'같이 이 시대 패션·디자인 산업에 영감을 줄 수 있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여줄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문제는 "그나마 간송이라도 있길래…"라는 생각이 들 만큼 DDP의 디자인 관련 기획 전시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DDP는 며칠 전 개관 100일을 맞았다. 그동안 찾은 발길이 250만명이다. 하루 평균 1만5000명으로 잡았던 목표를 훨씬 뛰어넘는 대성공이다. 그러나 DDP가 애초 약속대로 온갖 창조적 아이디어의 발신 기지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느냐에 대해선 의문이 많다. DDP 전시 중 더 크게 눈에 띄는 것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세트·사진전, '트랜스포머' 30주년 기념전, 판타지 영화 특수 효과 관련 자료전 같은 것이다.
문 연 지 얼마 안 된 영국 테이트 모던 갤러리가 해마다 400만명을 불러 모으며 런던의 관광산업을 이끄는 것은 관광객을 겨냥한 오락적 전시를 많이 해서가 아니다. 거꾸로 순수·고품격 전시로 미술관의 본령에 충실해 사람들로 하여금 가보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DDP가 창조의 서식지가 될 것인가, 테마파크가 될 것인가는 앞으로 DDP가 보여줄 전시의 질(質)에 달렸다.
김태익 논설위원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7/14/2014071403856.html
'교양있는삶 > Culture & Contents'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로벌 아이] 쓰가루·USJ, 그리고 아베의 역발상 (0) | 2014.12.04 |
---|---|
테마파크(theme park) 신드롬의 虛實 (0) | 2014.12.03 |
포스트(Post) 1000만 제주 관광 시대의 새 지평을 위해 (0) | 2014.11.03 |
[광화문에서/이진영]빌바오 효과 뒤집어보기 (0) | 2014.10.20 |
[메아리] 용(龍)의 등에 올라타라 (0) | 2014.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