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11월 삼성그룹 회장 자리를 물려받았을 때 이건희 회장의 나이는 마흔다섯 살이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 SK그룹 최종현 회장, LG그룹의 구자경 회장 등 당시 재계를 대표하던 총수들에 견줘 가장 젊은 오너였다. '최대 그룹의 최연소 총수'를 보는 세간의 시선은 말 그대로 반신반의일 수 밖에 없었다.
아마 이 회장도 몰랐을 것이다. 취임 일성으로 '세계 초일류기업'도약을 선언하기는 했지만, 삼성이 이렇게까지 글로벌 챔피언으로 우뚝 서 될 줄은 스스로도 100% 확신하지는 못했을 게다.
사실 이건희 체제 25년 동안 삼성이 고르게 성장했던 건 아니다. 90년대 중반만해도 미국 백화점과 양판점 진열대에서 삼성전자 TV는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 놓여있었다. 소니 필립스 도시바가 장악하고 있던 쇼윈도 자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난 건 최근 10여년 사이다. 25년 삼성 도약사를 그래프로 그린다면, 산술급수형 직선(↗)보다는 기하급수형 곡선(J커브)에 가깝다. 무슨 벤처기업도 아니고, 첨단 제조업체가 이렇게 단기간에 비약적 성장을 일궈낸 예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향후에도 삼성은 쉽게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제품 포트폴리오가 워낙 탄탄한데다, 기본적으로 '위기를 넘기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상에서 멈추지 않고, 지속적인 도약을 꿈꾼다면, 삼성은 몇 가지 뿌리깊은 숙제를 풀어야 한다.
첫 번째는 '와이어 투 와이어(wire to wire)'의 DNA를 갖는 것이다. 현재 수많은 삼성 제품이 세계 1위에 올라있지만, 한결같이 늦게 출발해 선두를 추월한 역전의 결실이었다. TV와 반도체는 소니를 제쳤고, 휴대폰은 노키아와 애플을 따라잡은 결과다. 스포츠에선 역전이 짜릿하지만, 시장에선 시종 1등을 놓치지 않는 '와이어 투 와이어'승리가 훨씬 잘하는 게임이다.
애플과 혈투를 거듭하면서 삼성도 이젠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아닌 '퍼스트 무버(first mover)'의 절실함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R&D 투자액이나 박사인력의 숫자만으로 되는 건 아니고 두뇌부터 뼛속까지 창조의 체질로 바꿔야만 가능하다. 아마도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두 번째는 제조와 금융의 딜렘마에 관한 것이다. 현재 삼성그룹은 삼성전자로 대표되는 제조업과 삼성생명을 정점으로 하는 금융부문으로 짜여져 있는데, 종종 삼성에 대해 '왜 금융은 전자처럼 글로벌 플레이어가 되지 못할까'란 질문이 나온다.
하지만 이건 금융파트의 책임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위험을 감수(risk taking)해야 하는 금융은 위험관리(risk management)를 우선시하는 제조업과 논리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삼성의 금융이 지금처럼 그저 국내 1위 유지가 목표라면 더 얘기할 것도 없겠지만, 만약 '전자의 신화'를 꿈꾼다면 전면적인 경영마인드 전환이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삼성 고유의 경영문화와 충돌 소지도 있다. 제조와 금융의 이런 잠재적 갈등요소를 풀어나가는 것도, 미래 삼성이 풀어야 할 숙제다.
마지막으로 '절세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삼성이 경이적인 글로벌 사업성공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숱한 갈등과 비용을 치렀던 건 결국 경영권 승계문제로 귀결된다. '가장 효율적'인 승계 방법을 찾다 보니 첨단금융상품과 법 논리가 동원됐고, 바로 이 부분에서 국민 일반정서와 충돌이 생겼던 것이다. 법보다 정서가 우선시되는 세태도 문제는 있지만 어쨌든 국내 최대 그룹의 승계인 만큼 지나친 재무적, 세무적 접근 보다는 좀 더 대승적이고 정무적인 판단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제 삼성을 빼놓고 한국경제를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삼성의 리스크는 곧 한국경제의 리스크이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삼성이 더 잘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성철 산업부장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1/h201211210236091187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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