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굴 재인, 도도 철수.' 대통령 후보 단일화를 둘러싼 문재인 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요즘 겉으로 드러난 태도는 이렇다. 문재인 후보는 세 번 사과했고, 안철수 후보는 아직도 부족하다는 식이다. 태도가 다른 건 두 사람의 인간성 때문은 아니다. 지지율은 뒤지나 거대 조직을 가진 문 후보와 지지율은 높지만 세력이 적은 안 후보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것과 다르게 속내는 '여유 재인, 불안 철수'로 볼 수도 있다. 갑자기 흥미진진해진다. 역시 긴장과 불화는 '정치'의 주요한 조역이다.
마음속 답답함이 가시기 시작한다. 대선 후보들이 이제야 사활을 건 '정치'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대선 후보들은 그간 '착한 어린이 선발대회' 출전자 같았다. 예쁘고 착한 말만 했다. "학창시절 좋은 추억을 만들기 위해 나왔습니다… 제 꿈은 세계 평화입니다." 틀에 박힌 말을 반복하는 미인대회 출전자들 같았다.
때문에 후보를 수식하는 말도 '종교적 상징'으로 대체됐다. 실천신학대학원대 정재영 교수와 인덕대 장형철 교수는 16일 한 심포지엄에서 '미디어 속의 18대 대통령선거와 종교'란 논문을 발표했다. 이번 선거에 유난히 종교적 수사가 많이 등장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박근혜 후보는 베드로(예수를 부정했지만 결국 교회 지도자가 된 베드로처럼 아버지를 부정했지만 결국 대권을 잡게 될 것이라는 뜻)' '(안철수) 메시아 대망론' '안철수 미륵불' 같은 수식이 그 예다.
세 후보가 그간 '아픈 자여, 다 내게로 오라'의 화법을 구사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과 화해하고, 모든 걸 들어주겠다고 했다. 절대 신(神)의 영역이다. 고작 인간인 대통령은 이게 불가능하다. 얼마나 아픈지, 병의 원인은 뭔지, 치료법은 몇 가지이고 비용은 얼마가 드는지 제대로 진단하는 게 국정 책임자가 할 일이라는 걸 잊었다. 세 후보의 캠프 이름은 저마다 다르지만 색깔은 하나였다. '힐링(치유) 캠프'다.
그들이 '힐링 캠프'를 차리니, 종교인과 예술가들이 정치판을 차렸다. 목사와 신부들이 제각각 흩어져 각 정치인을 후원하고 지지하고 나섰다. 신과 사람에게 봉사해야 할 시간을 나누어 현실정치에 쏟는다. 글 쓰는 이들도 가세했다. 여당 지지는 야합이고, 야당 지지는 시민의 책무라 한다. 야당이든 여당이든 각질화된 권력의 속살을 드러내는 게 예술이라 생각하는 건 이제 구식이 된 듯하다. 곧 시행되는 '예술인복지법'의 출발은 누구에게 속하지 않은 채 예술로 사회에 공헌하는 예술인에게 최소한 밥을 먹여주자는 취지였다. 관련 법 예산이 크게 줄어 실망했는데, '정치예술인'에게도 우리 세금을 바쳐야 하는가 생각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비교적 살림살이가 나은 영화계에서는 사람이 나서는 대신 영화가 정치를 한다. 전두환 정권의 고문사를 다룬 영화를 찍은 감독은 "이번 대선에 영향을 미쳤으면 좋겠다"고 했고, 여당 후보를 떨어뜨리고 싶다 작심한 듯한 영화가 서너 편 이상이다. 정치인만 빼고 다들 정치를 하고 있다.
난(亂)하다. 그래서 단일화로 촉발된 '정치게임'이 차라리 반갑다. 철저히 자기 색을 드러내고, 상대 후보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고,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 말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상대가 분명해지면 여야 후보도 서로 물고 뜯어 진짜 속살이 드러났으면 좋겠다. 그래야 정치가 정치인의 몫이 된다.
박은주 문화부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16/20121116023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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