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인문학 르네상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문학 강좌가 넘쳐난다. 지자체들마다 앞다투어 시민인문강좌를 설치하고 있고 언론사 인문강좌도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인문학 위기 담론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기본적으로 우리 사회 안에는 사람들의 지적(知的) 허기를 충족시켜 줄 문화가 빈곤하다. 제대로 된 취미도 못 가진 채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 왔던 세대들이 어느 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느끼게 되는 헛헛함이 있다. 종교로는 채워지지 않는 허기이다. 수많은 인문학 강좌는 이런 허기를 때우기에 좋은 간식거리와도 같다. 그러나 간식으로 허기를 때우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인문학은 인간에 관한 학(學)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읽고 생각하고, 대화하고, 쓰는 일과 관련된 학문이다. 문학, 역사, 철학은 지금 여기에서 인간다운 삶을 이루어가기 위해 필요한 능력을 함양하고자 한다. 이 능력이 결여되면 어떤 사회가 될 것인가? 방향을 잃은 채 오직 동물적 탐욕에 사로잡혀 맹목적 생명 유지에 집착하는 야만 사회가 될 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삶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하는 문화는 비굴한 자기부정 안에 갇히고 말 것이다.
인문학은 한국의 발전을 이끈 원동력이기도 했다. 조선시대는 강력한 도덕정치를 표방했다. 문맹이기조차 했던 서구의 군주들에 비하면 조선의 왕들은 대단한 지식인들이었다. 인문학은 국가 경영의 중요한 지식이었고 가난 속에서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열망이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힘이었다.
교육 텍스트였던 유가의 경전들에는 성실, 근면, 겸손, 삼감, 이치를 밝힘과 같은 수사들이 넘쳐난다. 진리와 올바른 삶에 대한 확신이 때로 너무 지나쳐 다른 입장을 관용하지 못하고 죽기 살기 식으로 부딪치기도 했다. 그러나 근대화의 과정 안에서 자리 잡게 된 기능주의 사고는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제 인문학 전공자들은 쓸모없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로 간주된다. 전통적 인문학도들의 자리는 선생이었지만 그 자리는 어느새 선생의 기능을 더 잘 갖추었다고 주장하는 사범대 졸업생들의 차지가 되었다. 공교육 현장에서 배척받은 인문학도들은 사교육 시장으로 흩어졌다.
인문학 석사 박사들은 길을 잃고, 대학의 비정규직인 그들의 빈한한 삶을 바라보고 있는 우수한 후배들은 아예 대학원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인문대학원, 인문대, 인문학 연구가 황폐해지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지원을 늘리라고 하면 돈이 필요 없는 인문학 연구에 왜 연구비를 늘려야 하는가 묻는다.
인문학적 사유와 물음은 모든 학문의 기초를 이루고 모든 인간행위를 정하는 형식을 이룬다. 가고 싶은 곳, 갈 곳을 알아야 빨리 가는 길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초중고 교육에 인문학도들이 들어갈 수 있어야 하고 학문 후속 세대들이 자율적 연구자로 성장하여 대학에서 한국의 인문 연구 전통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 모두 제도적 지원이 필요한 일이다.
문학은 복잡한 인간현상과 인간관계에 대한 적응력을 키워주고, 역사는 삶의 좌표를 그릴 수 있게 해주며, 철학은 체계적 방식으로 삶을 기획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런 능력 없이 북한,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사이에서 한국인이 확고히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 나아가 세계를 선도할 미래 가치와 문화를 구축할 수 있을지 매우 의심스럽다.
아니, 그 이전에 이 소중한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자기를 성찰하고 살아있는 생명으로서 자신과 타자의 삶을 긍정하는 힘, 이것은 물질적 충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지적 사유와 내면의 세계를 키워주는 인문학은 치유의 학문이다.
김혜숙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 한국인문학총연합회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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