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플이 하는 게 뭐 있니? 딱 세 가지지.” 최근 연애를 시작한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데이트를 하면 주로 뭘 하고 노느냐고 묻자 친구가 반색을 하며 물어왔다. 밥, 영화, 차? 산책이나 술? 미술관과 서점…. ‘갈 데 없다’는 말을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저런 데이트 코스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밥, 술, 섹스.” 지하철에서 친구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빠르게 세 단어를 내뱉는다. 그 커플은 잦은 야근을 하는 사회 초년병과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20대였다. 평일에는 부담이 가기 때문에 주로 주말에 잠시 짬을 내 만난다고 했다. 수험생활 때문에 데이트 장소도 고시촌을 잘 벗어나지 않는 것 같았다. 친구는 지금 만나는 사람의 생활패턴이 생각보다 자신과 잘 맞는다고 말했다. 수험생과 야근족이라니, 슬프면서도 잘 맞을 수밖에 없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세대론의 교과서가 되어버린 어느 책에서는 ‘왜 한국의 10대는 독립할 수 없는가’라는 도입부에서 살 곳이 없고, 일할 곳이 없기 때문에 10대의 첫 섹스는 언제나 슬프다고 선언했다. 물론 그들의 섹스도 슬프겠지만, 정말 슬픈 건 사실 20대의 섹스다. 가장 왕성한 시기에 그야말로 모든 상황이 빠듯하다. 일단 시간을 내기 어렵다. 그나마 돈이 별로 없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게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다. 특히 학생 커플이거나 한쪽이 아직 돈을 벌지 못할 경우 이 계산은 더 빡빡해진다. 섹스를 위해 자연스럽게 다른 것들을 포기한다. 저축, 책과 영화 등에 쓸 문화생활비, 취미생활, 여행 경비 등 말이다. 예전에는 이 시기를 ‘시간은 있으나 돈이 없는 때’라고 했다는데 요즘은 ‘시간도 없고 돈도 없는’ 시기가 되었다. 당연히 문화생활 전반도 위축되고 젊은층이 책을 읽지 않는다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우린 오픈마켓을 뒤져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싼 옷을 사입고, 포털사이트의 웹툰으로 문화생활을 대체할 뿐이다.
어느 순간 섹스는 비교적 가장 저렴하면서도 만족도 높은 여가생활이 된 것만 같다. 그 이상 무엇을 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돈이 든다. 일전에 희망청(청년실업네트워킹센터)에서는 일반적인 20대가 데이트 생활을 즐기기 위해 (매주 데이트를 한다는 가정하에) 얼마큼의 돈이 필요한지 계산을 해본 적이 있다. 주말에 만나 쓰는 밥값, 커피값, 영화관람료, 모텔비를 합치면 최소 8만원 정도의 돈이 든다. 월 30만원이 넘는 돈을 감당하려면 아르바이트 생활을 해서는 불가능하다. 데이트 비용을 줄일 방법을 찾다보면 오락거리가 있는 모텔을 찾거나 모텔에서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볼 수 있는 ‘방에서 한다’.
주말의 ‘방’과 평일의 ‘사무실’을 오가는 상황을 탈출할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모텔비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큼 벌 수 있는 직장을 다니거나,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다. 내 주변 많은 또래들은 결혼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즐겁게 연애하면서 자신의 생활을 잘 꾸려가는 선배들도, 스스로를 도시빈민이라고 말하는 선배들도 역시 미혼이었다. 수도권의 전셋값은 부모님의 대출마저 탈탈 털어야 얻을 수 있고, 설령 아이를 낳아도 부모님이 아니고서는 맡길 곳이 없어 고생하는 선배들을 보면 차라리 섹스만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래저래 20대의 섹스는 슬프다. 2013년도에 적용될 최저시급은 4860원이다. 지금을 보나 미래를 보나 답이 없다. 섹스마저 말이다.
김류미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 저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11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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