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자인 박영호 한신대 명예교수한테서 책 한 권이 택배로 왔다. 카를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선언>이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뒤 81년 귀국, 한국 대학에 마르크스정치경제학 연구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한 학자로 이 시대에 잔류하는 마지막 마르크스주의자로 자처해 온, 나의 다감한 중학친구다.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시의에 안 맞는 출간인 탓이다. 굳이 마르크시즘의 사양시점을 골라 출간한 건 무슨 억하심정일까…. 서문에 출간사유가 명시돼있으려니 싶어 머리글을 샅샅이 뒤졌지만 없다. 전화를 걸었다.
"어이, 박영호. 본론을 말하라. 하필이면 이 시점을 골라 이 책을 낸 이유가 무엇이냐?" 한 시간 후 답신이 메일로 왔다. 답장치고는 너무나 비장했다. '한 까칠한 마르크스주의자가 지식인 김승웅에게 작심하고 던지는 질문'이라는, 마르크시스트 치고는 자못 센티멘털한 제목까지 단 답신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 달 남은 대선을 앞두고 내게 가장 혼란스러운 것은 '경제민주화'다. 여야 대선후보 모두가, 심지어 제3의 후보까지도 경제 민주화를 표방하고 있다니… 우리가 살 길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밖에 없다고 침을 튀겨오지 않았던가. 한 밤중의 홍두깨도 유분수지, 느닷없이 세 후보 모두가 경제민주화를 부르짖는다는 말인가."
박교수의 요지는 이렇다.
신자유주의와 경제민주화가 근본적으로 모순 관계임을 역설, "비정규직을 양산한 것은 물론, 기업구조조정을 통해 정리해고를 여야 모두가 잔인하게 자행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반 경제민주화에 앞장섰던 자들이 대통령 선거철이 되니까 이토록 교활하게도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걸다니…. 기가 막힐 일 아닌가!"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이토록 무작위로 공약을 남발해도 된다는 말인가"라고 개탄했다.
그가 써낸 책의 제명은 '공산당 선언의 새로 읽기'다. 이런 제명으로 그가 책을 써낸 이유는 자명해진다. "후보들이 아무리 무식하기로서니 소위 집권하겠다는 사람들이 어찌 이리 속 보이는 짓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로 집약된다. 후보들의 무식을 깨우쳐주기 위해, 또 그 묘약으로는 경제민주화가 근간인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 밖에는 없으리라 싶어 작심하고 책을 냈다는 것.
스스로 자인하듯, 까칠한 것으로 치부돼온 마르크시즘의 진수를 차제에 보여주겠다는 타산도 깔려있는 성싶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더구나 마르크스한테는 철학자 니체의 상투표현이 되어온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요소가 많다는 박 교수의 평소 주장에 비춰, 이번 출간은 잘하면 박교수로 하여금 마르크시즘을 곡해해온 대선후보들과 대중들의 무지를 깰 우상파괴자로 변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여긴 듯싶다.
일단 갸우뚱해진 고개는 그러나 쉬 돌아서지 않는다. 오늘따라 그가 평소 역설해온 마르크스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요소'가 나의 심기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공산당선언의 핵심부위는 누가 뭐래도 그 선언의 대미를 장식한 마지막 구절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가 아닐 수 없다. 이 대목 하나로 그는 일약 격동적인 혁명가이자 뜨거운 시인으로 바뀐 것이다. 이 대목을 읽은 젊은이, 가난한 사람치고 피가 끓지 않던 사람이 있던가. 단순한 선언을 넘어 절창(絶唱)이었다. 문제는 이 일련의 선언이 지닌 허구에 있다. 영국인 이데올로기 전문 저널리스트 폴 존슨이 지적한 그 허구를 인용('지식인의 두 얼굴', 원제: Intellectuals, 1988), 다음과 같은 메일을 박교수에게 답신으로 보냈다.
"어이, 박영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카를 샤퍼의 말에서 따온 말이다. '종교는 아편이다'는 독일의 유명한 시인 하이네한테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다'는 마라한테서 따온 말이고. 박 교수, 응답하라. 이게 자네가 평소 주창해왔듯 카를 마르크스의 인간적인 요소라는 말인가? 그가 귀족 출신인 아내 몰래 하녀를 임신시키고, 태어난 아이마저 자신의 재정적 뒷받침을 해왔던 엥겔스의 아이라 둘러댄 건 논외로 하더라도…."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1/h2012111620404611578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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